단군 책임론

 


1. 개요
2. 상세
3. 비판
4.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민국 근대사안타까운 흐름과 현재 대한민국의 모든 문제단군이 '''처음''' 나라를 세울 때부터 이미 잉태되어 있었다고 보는 주장. 굳이 단군을 내세운 이유는 단군이 대한민국의 터를 잡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반도의 환경적, 지정학적 요소를 중요시한다.

2. 상세


쉽게 말하면 '''땅이 안 좋다는 것'''이다. 한반도 자체가 산지가 많고 농업 생산량이 풍부한 곳이 아닌데다가 옆에 있는 나라들이 하필이면 중국[1]일본[2]이라 자급자족도 겨우 할 만한 땅에서 호락호락찮은 이웃 국가들과 경쟁하려다 보니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 심지어 웬만한 나라에서 생산되는 암염도 한반도에서는 거의 나지 않는 상황이다. 그래서 고대 삼국시대부터 해안가에서 소금을 생산하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한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 있어 항상 양면전선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했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3] 중국 쪽에는 압록강개마고원이 자연 방어선 역할을 하고, 일본은 바다가 막고 있다지만, 실제 역사 속에서는 쳐들어 오려고 마음만 먹으면 잘만 쳐들어 왔다.[4]

결국 이러한 형세가 현대에까지 이어져 대한민국도 태평양 건너편의 미국은 별론으로 해도 중국과 일본, 러시아 사이에서 위태로운 균형을 지켜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 단군 책임론의 내용이다.
지정학보다 사회문화적 요소가 더 중요하다고 반론하는 경우가 있지만, 사회문화적 요소 역시 지정학으로부터 영향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3. 비판


진지한 논의라기 보단 인터넷 상의 개드립에 가깝다. 사실 '''단군이 처음 터를 잡은 고조선의 영토는 랴오닝성 일대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랴오닝성은 중국의 주요 천연가스/석유 산지 중 하나인데다가 철광석과 석탄도 풍족하게 나고, 랴오허 강과 쑹화강 유역 사이에 둥베이평원이라는 한반도보다도 드넓고 독일 면적과 맞먹는 수준의 매우 넓은 평야지대(35만 km2)가 있어 춥기는 해도 상당히 높은 농업 생산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이를 까는 측에서는 스타팅 위치는 좋게 잡아주었는데 후손들이 버리고 탈주해서 다 말아먹은 것이라는 드립을 친다. 물론 현대 문명 이전의 만주는 겨울의 혹한으로 농사는 몰라도 사람살기에는 좋은 땅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5]
단순히 영토의 크기만으로 고구려 때가 제일 강성했기는 했는데, 이건 부여와 고구려와 발해가 북방민족들을 복속시켰기 때문이고, 발해 멸망이후로 고려와 조선이 성장한 북방민족을 상대하기가 버거워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위에 언급한 대로 동베이 평원 자체는 흑토지대가 있을 정도로 농사짓기에는 괜찮은 땅이었지만 중간에 산 하나 찾기 힘든 개활지였던지라 여진족몽골족으로부터 방어하기에는 좋은 지역은 아니었고 결정적으로 고려말에 랴오둥반도 일대를 명나라가 차지하면서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지는 산악지대가 주가 되었다는것도 큰 요인이었다. 본디 남만주 지방에 터를 잡았었던 한국계 왕조들이 남하한 것은 괜한 것이 아니라 좀 더 온화하고 북방민족의 침탈에서 방여하기도 더 좋은 지역을 택했기때문이었다. 통일신라, 고려조선이 북진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던 이유는 정복전쟁을 수행하기에 애매한 군사력도 있었지만, 유목민의 방어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조선 성종 때 남만주 개척이 논의되기도 했지만 이 이유 때문에 무산되었다. 만주는 고사하고 4군 6진역시 조선에서 개척하려고 갖은 노력을 했지만, 4군 6진 지역은 고산지대인 개마고원이 포함되어있었기 때문에 목축은 몰라도 농사를 짓기 좋지 않았고 이 때문에 이 지역들을 개척하려는데 온갖노력을 기울렸음에도 개척이 성공적이지 못하여 인구가 많지 않아 기존에 살던 여진족 부족들이 일정수준의 자치권을 행사했고, 인구가 늘어날때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물론 성종 대 개척하려는 연변일대는 평야지대가 다소 포함되어있어 벼농사를 지을수있는 땅이었기는 했지만 이 당시 기준으로는 여진족을 방어하는데 드는 군사력이나 치안문제를 생각한다면 개척에 애로사항이 꽃피기는 마찬가지였다. 실제 조선인들이 연변 일대를 개척하기 시작한것은 만주족들이 중원으로 대거 이주하며 남만주 일대가 개활지나 마찬가지가 되고나서였다.
일부 사람들은 현재 세력구도가 정립된 것이 삼국통일부터라는 인식에서 신라 책임론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통일신라 형성 이전까지[6] 한국인이라는 정체성 자체가 희박했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는 그냥 타국 수준이 아니라 거의 원수지간이나 다름없었다는 것을 간과한 주장이다.[7] 당대 시점에서는 같은 민족을 팔아먹고 타민족(중국)과 붙어먹은 것이 아니라 그냥 거슬리는 타국을 다른 국가와 연합해서 정벌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단군 책임론은 지나치게 결정론적이고 환원주의적인 주장이기도 하다. 환경적, 지정학적 특성이 국가 발전에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사회 문화적 요소들 역시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8] 똑같이 만주 땅에 자리잡았던 발해후금 역시 서로 다른 운명을 맞이했다. 발해는 문왕 이후 당나라와 우호적이었고 유목민족인 거란에게 망했지만, 후금은 명나라와 대립했으며 해서여진, 몽골, 준가르 등의 유목민들을 전부 복속시켰다. 다른 예시를 들자면, 안다만 제도는 교역에 유리한 위치였지만, 그걸 교류에 이용하지 않아 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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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개드립 중에는 단군을 훨씬 넘어서서 '공룡 책임론'(...) 같은 극단적인 것도 있다. 한반도의 공룡은 얼마나 무능하면 석유조차 못 되었냐는 이야기다.[9] 그 외엔 이스라엘 버전으론 모세가 석유가 나는 땅이 아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했다는 유대판 '모세 책임론'도 있다. "우리 이스라엘인이 모세에 대해 불만이 좀 있다. 그는 우리를 40년이나 광야를 헤매게 한 뒤 중동에서도 석유가 나지 않는 땅으로 이끌었다."라는 말을 한게 바로 이스라엘 총리이던 골다 메이어인데 그러나 그 시대에 석유는 있어봐야 난방 및 음식 만들때나 주로 쓰이거나 아님 전투용으로 쓰이는 기름일 뿐이고 기름진 풍요로운 땅이야말로 그 시대에서 천국과 같은 좋은 땅이니까. 그 석유가 자원으로서 평가를 받은 건 고작 200년도 채 안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스라엘 본토와 연안에서 채산성있는 유전과 가스전이 하나 둘씩 발견되면서 모세가 유대민족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한게 맞았음이 증명되었다.

4. 관련 문서


  • 총, 균, 쇠
  • 한국사
  • 지정학
  • 단군
  • 원죄(기독교)[10]
  • 이웃나라/한반도 주변 4대 강국
  • 자국 혐오
[1] 농토의 면적과 단위면적당 생산량에서 한반도를 압도한다.[2] 일본 열도 자체가 한반도보다 면적도 더 넓지만 농토의 면적은 비슷하다 하지만 위도가 한반도보다 남쪽으로 내려가 온화한 기후 덕분에 단위 면적당 농업 생산력이 더 뛰어나다. 최북단 홋카이도는 근현대 이후에는 일본 내에서도 중요한 낙농업 생산거점으로 위도가 북쪽이라고는 해도 농업에 유리한 지형과 기후이다.[3] 한민족이 만주의 영향력을 상실하면서 만주를 정벌하거나 혹은 완전히 개척,정복하려할때 발목잡는 것이 바로 일본의 존재였다. 고려의 요동정벌이 불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가 왜구였다.[4] 여요전쟁, 병자호란, 고려 말 왜구의 침입, 임진왜란[5] 다만 단군 조선이 세워질 당시의 시대의 기온은 고고학적으로 오늘날보다 상대적으로 온난한 기후였다.[6] 심지어 고려 말기까지도 삼국 부흥 운동이 일어나는 등 통일국가로서의 정체성이 온전하지는 않았다.[7] 고구려와 백제 같은 경우에는 그나마 뿌리가 같다는 인식은 있었던 것 같지만, 백제가 부여 계승을 표방한 것을 보면 연대 의식까지는 없었던 듯. 다만 삼국이 언어적으로 유사했던 것은 맞다.[8] 사회문화적 요소 역시 지정학적 요소의 영향을 받아 생겨나지만, 일단 정립된 후에는 지정학적 요소에 종속되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9] 사실 현대의 유전지대는 공룡이 아니라 해양 플랑크톤과 관계가 깊다. 한반도에서 안나오는 것이 당연.[10] 수천년 전의 인물이 벌인 행동을 현대의 그것과 연관짓는다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