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파치노

 

'''알 파치노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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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image]
'''남우주연상'''
''' 제64회
(1992년) '''

''' 제65회
(1993년) '''

''' 제66회
(1994년) '''
안소니 홉킨스
(양들의 침묵)

'''알 파치노'''
('''여인의 향기#s-2''')

톰 행크스
(필라델피아)


''' 역대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
[image]
''' 남우주연상 '''
''' 제28회
(1975년) '''

''' 제29회
(1976년) '''

''' 제30회
(1977년) '''
잭 니콜슨
(차이나타운)/(마지막 지령)

'''알 파치노
(대부 2)/(뜨거운 오후) '''

잭 니콜슨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 역대 에미상 시상식 '''
[image]
'''남우주연상 - 미니시리즈 부문'''
''' 제55회
(2003년) '''

''' 제56회
(2004년) '''

''' 제57회
(2005년) '''
윌리엄 H. 머시
(도어 투 도어)

''' 알 파치노
(엔젤스 인 아메리카) '''

제프리 러시
(피터 셀러스의 삶과 죽음)

''' 제61회
(2009년) '''

''' 제62회
(2010년) '''

''' 제63회
(2011년) '''
브렌던 글리슨
(폭풍 속으로)

''' 알 파치노
(유 돈 노우 잭) '''

배리 페퍼
(케네디스)


''' 역대 골든 글로브 시상식'''
[image]
'''남우주연상 - 드라마'''
''' 제30회
(1973년) '''

''' 제31회
(1974년) '''

''' 제32회
(1975년) '''
말론 브란도
(대부)

'''알 파치노
(형사 서피코)'''

잭 니콜슨
(차이나타운)

''' 제49회
(1992년) '''

''' 제50회
(1993년) '''

''' 제51회
(1994년) '''
닉 놀테
(사랑과 추억)

'''알 파치노
(여인의 향기#s-2)'''

톰 행크스
(필라델피아)
'''남우주연상 - 미니시리즈'''
''' 제60회
(2003년) '''

''' 제61회
(2004년) '''

''' 제62회
(2005년) '''
알버트 피니
(윈스턴 처칠의 폭풍전야)

'''알 파치노
(엔젤스 인 아메리카)'''

제프리 러시
(피터 셀러스의 삶과 죽음)

''' 제67회
(2010년) '''

''' 제68회
(2011년) '''

''' 제69회
(2012년) '''
케빈 베이컨
(챈스 일병의 귀환)

'''알 파치노
(유 돈 노우 잭)'''

이드리스 엘바
(루터)


''' 역대 토니상 시상식 '''
[image]
'''남우주연상 - 연극 부문'''
''' 제30회
(1976년) '''

''' 제31회
(1977년) '''

''' 제32회
(1978년) '''
존 우드
(트라베스티)

'''알 파치노
(파블로 험멜의 기본 훈련)'''

바나드 휴즈
(다)
'''남우조연상 - 연극 부문'''
''' 제22회
(1968년) '''

''' 제23회
(1969년) '''

''' 제24회
(1970년) '''
제임스 패터슨
(생일파티)

'''알 파치노
(호랑이는 넥타이를 매는가?)'''

캔 하워드
(차일드스 파티)


''' Al Pacino '''
'''이름'''
Al Pacino
알 파치노
'''본명'''
Alfredo James Pacino
알프레도 제임스 파치노
'''국적'''
미국 [image]
'''출생'''
1940년 4월 25일 (84세), 뉴욕[1]
'''신체'''
170cm[2]
'''직업'''
배우, 프로듀서, 영화감독
'''학력'''
뉴욕 예술고등학교 (중퇴)
HB 스튜디오
액터스 스튜디오
'''활동'''
1967년 ~ 현재
'''가족'''
장녀 줄리 마리 파치노 (1989년생)
장남 안톤 제임스 파치노 (2001년생)
차녀 올리비아 로즈 파치노 (2001년생)[3][4]
1. 개요
2. 어린 시절
3. 학창 시절
4. 배우 커리어
6. 연기 스타일
7. 은둔형 예술가의 언론 나들이
8. 여담
9. 필모그래피
9.1. 영화
9.2. 연극
9.3. TV
10. 관련 문서


1. 개요


[image][5]

'''대부 촬영 당시 알 파치노에게 말을 아꼈지만, 나는 그가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 배우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이런 내 생각을 똑똑히 증명했다. 허풍처럼 들리는가? 글쎄, 나는 살면서 절대로 과장을 해본 적이 없다. 난 내 본업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어디 가서 다른 배우들 찬사를 쉽게 하는 사람이 아니다.'''[6]

말론 브란도, 대부 개봉 직후 출처

미국의 전설적인 배우.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로서 대부 시리즈, 스카페이스, 여인의 향기, 칼리토, 히트 등을 비롯한 무수히 많은 명작들을 남겼으며 특히 '''할리우드 갱스터, 느와르 장르의 상징적인 인물'''로 유명하다.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배우'''라는 평을 받으며, '''연기파 배우의 끝판왕''' 중 한 명이다. 비슷한 나이대의 배우들 중 잭 니콜슨, 더스틴 호프만, 로버트 드니로[7][8]와 함께 연기 본좌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그리고 이 배우들과 함께 '''역사상 최고의 연기파 배우'''를 꼽을 때 빠지지 않는 '''전설적인 명배우'''이다.
또한 '''할리우드(영화계)와 브로드웨이(연극계) 양쪽에서 모두 최정상급의 성공을 거둔 보기 드문 커리어를 지닌 전설적인 대배우'''이기도 하다.[9]

2. 어린 시절


뉴욕맨하탄에서 무녀독남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부모님이 이탈리아 시칠리아 이민자 출신이다. 아버지 살바토레 파치노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산 프라텔로에서 캘리포니아 주의 코비나로 이민을 와서 보험 판매원으로 일하고 레스토랑을 운영했다. 외할아버지 제임스 제랄디와 외할머니 케이트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콜레오네 출신이다.
이런 이유로 알 파치노가 <대부>에서 시칠리아 후손인 마이클 콜레오네를 연기했던 것이 운명적이라고 보는 의견이 많다. 실제로 코폴라 감독이 제작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명의 연극배우였던 그를 끝까지 고집했던 것에는 알 파치노의 연기력 뿐만 아니라도 이런 배경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 파치노 본인도 관련 질문에 대해 "운명이냐고요? 네, 그럴 지도요. 정말 신기한 일이죠."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10][11]
뉴욕의 이스트 할렘에서 몇년을 살다가 만 2세 때 부모님의 이혼으로 어머니, 외조부모와 함께 뉴욕의 브롱크스로 이사했고 이곳에서 대부분의 어린시절을 보냈다. 홀어머니 밑에서 외동아들로 자라면서 과보호를 받기도 했는데 어린 알 파치노는 외로운 소년이었다고 한다. 10대 시절에는 뉴욕의 뒷골목에서 아주 터프한 성장기를 보낸 것으로 유명한데, 9살에 음주와 담배를 처음 배웠고 13살에 마리화나를 경험했지만 남용한 적은 없다고 한다.[12] 싸움꾼 기질이 있어서 자주 전학을 다니며 문제아 취급을 받기도 했다. 항상 생사가 오가는 뉴욕 뒷골목의 거친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지만 그 시절엔 그것도 모른 채 행복하고 자유로웠다고.
어머니 로즈는 퇴근 후에 외동아들을 데리고 영화를 보러 다니곤 했는데, 집에 돌아온 어린 알은 자신이 본 모든 연기를 그대로 재연해낼 수 있었고 연기 재능을 발견한다.[13]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이미 배우를 꿈꿨고 배우가 아니면 야구선수가 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엔 가족과 친구들에게 '써니(Sonny)'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배우(The Actor)'라는 별명도 있었다. '써니'라는 별명은 <알 졸슨(Al Jolson)>의 '써니 보이(Sonny Boy)'라는 노래때문에 붙여진 별명인데 약 3살 6개월의 어린 알 파치노는 지붕 위에 올라가서 이 노래를 부르곤 했다. 이웃들은 웃으며 그 광경을 지켜봤는데, 당시 진지했던 어린 알은 이웃들이 즐거워 보이긴했지만 대체 왜 웃는건지 궁금해 했다고 한다.[14]

3. 학창 시절


'''허만 리더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영어를 제외한 모든 수업을 낙제할 정도로 공부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바로 이 시기에 뮤지컬과 연극으로 나름 공식적인 연기를 시작했다.[15] 12살 무렵에 굉장히 운명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데 연극이 끝나고 어떤 남자가 다가와 "너는 차기 말론 브란도가 될거야."라는 찬사를 보냈고 그때만 해도 브란도를 몰랐던 어린 알 파치노는 "말론 브란도가 누군데요?"라고 대답했다고.[16] 13살 때는 연극 무대에서 연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토하는 연기를 하며 실제로 무대 위에 토해버리기도 했다.[17]
중학교를 졸업하고 오디션을 통해 페임의 주무대로 유명한 '''뉴욕 예술고등학교'''[18]에 합격하지만 역시 잘 적응하지 못했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연기를 정말 배우고 싶었지만 당시 너무 어렸었고, 15살이었지만 마치 10살,11살 정도로 뒤쳐진 것만 같았다고. 알 파치노는 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지자 약 17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취업을 결심하게 된다.[19][20] 그리고 아들의 결정을 반대했던 어머니와 의견 충돌을 빚게 되자 싸움 끝에 결국 가출을 한다. 뉴욕 중심부로 이동한 알은 어머니를 부양할 돈과 연기 공부를 위한 학비를 모으기 위해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자전거 심부름꾼을 할 때에는 하루에 11시간이나 자전거를 타기도 했고 이때 맨하탄의 지리를 배웠다고. 버스 보이, 문지기, 우체국 직원 등 정말로 안 해본 일이 없었는데 코멘터리 잡지사의 우편물실에서도 일한 적이 있다고 한다.
10대 끝자락에 유명 연기학교인 <액터스 스튜디오>에 지원하였지만 고배를 마신 뒤 이탈리아로 향하게 된다. 알 파치노는 이 시절에 대해 스스로 고백하길 "20살 때, 시칠리아에 살던 시절에 저는 제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걸 팔며 생계를 유지했어요. 제 유일한 자산은 바로 몸이었죠." 당시 이태리어도 할 줄 몰랐던 젊은 알은 집과 음식을 제공해줬던 나이든 여인에게 그 대가로 잠자리를 제공했었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 자신이 정말 싫었어요."[21]
미국 뉴욕으로 다시 돌아온 알 파치노는 결국 유명 연기학교였던 '''<HB 스튜디오>'''에 합격하고 첫 연기 스승인 <찰리 로튼>을 만나게 된다. 후일에 찰리 로튼은 알 파치노의 인생 멘토이자 최고의 친구가 되는 인물. 이 시기에 알은 종종 실직 상태이거나 집을 구하지 못해 노숙자 신세가 되곤 했는데, 길바닥이나 극장 또는 친구의 집 등지에서 불편하게 잠을 청하곤 했다.
그러던 1962년, 어머니 로즈가 4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연이어 외할아버지 마저 사망하면서 22세의 알 파치노는 인생의 격변기를 맞이하게 된다. 노년의 알 파치노는 이 시기를 회상하길 "어머니 로즈와 할아버지가 한 해에 같이 돌아가셨던 일은 제 인생에서 가장 밑바닥이던 시기였어요. 고작 22살이었던 저는 제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두 사람을 떠나보내야만 했죠. 그 일은 저를 나락에 빠지게 했어요."라고 인터뷰했다.[22]
<HB 스튜디오>에서 4년을 공부하고 졸업한 알 파치노는 오디션을 성공적으로 치뤄 10대 때 한 번 고배를 마셨던 '''<액터스 스튜디오>'''에 입학하게 된다. 전설적인 연기 스승인 <리 스트라스버그>[23]를 만나 사사하고 인연을 시작하게 된 것도 바로 이곳. 스트라스버그는 후에 알 파치노를 따라 <대부 2>와 <용감한 변호사>에 출연하기도 했다.
<액터스 스튜디오>에 다니던 이 시기에는 길거리의 극단이나 카페에서 스탠드업 코미디 쇼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스스로 극본을 짜고 배우를 캐스팅하고 광대로서 쇼를 펼치며 가게 앞에서 직접 호객 행위를 하기도 했다고. 당시 알은 (어머니와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우울감에 시달리고 정말로 불행했는데 오로지 코미디 연기만을 하면서 "삶의 구원을 받은 것 같았다"고 이 시기를 회상하며 "뭐든 웃기는 건 좋은 치료법이었어요. 효과가 있었죠. 저는 항상 웃긴 사람들에게 매료되고 그들의 주변에 있길 좋아했어요."라고 말했다.[24]
알 파치노는 "제 인생에서 <액터스 스튜디오>는 정말로 큰 의미를 지닌다"며 "엄청난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고 수차례 언급한 적이 있다. <리 스트라스버그>의 가르침 아래 연기 커리어를 지탱하게 될 메소드 연기법을 습득하고 "모든 부업을 그만두고 연기만 해야겠다고 직접적으로 결심하게 된 시기"였다.[25]
2000년 [26] 모교 <액터스 스튜디오>의 공통 대표직을 맡게 된 알 파치노는 2020년 현재까지 대표직을 유지하고 있다.[27]

4. 배우 커리어


연극 배우로 시작한 알 파치노는 승승장구하며 점차 떠오르기 시작했다. 호로비츠의 극들을 성공적으로 연기해낸 그는 평생의 동업자가 될 매니저 마틴 브레그만에게 발굴되고, 1969년에 영화 배우가 되었다. 1971년 제리 샤츠버그 감독의 백색공포로 처음 주연으로 등장하는데, 당시 대부를 준비하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이 영화를 보고 한눈에 반해 제작사의 반대를 무릅쓰고 마이클 콜레오네역으로 그를 캐스팅한다. 제작사와 배우들의 온갖 반대 속에서도 강행한 촬영 속에서 알 파치노는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극심한 불안에 시달렸으나 그 유명한 식당 암살씬을 찍고나서야 모두의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이 영화에서 그는 순한 대학생부터 카리스마있는 보스를 완전히 연기해냈고, 그 영화는 대성공했다. 무려 1972년 흥행 1위! 그 이후의 커리어를 회상하길 대포에서 막 쏘아진 대포알 같았다고.
이후 서피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처음으로 노미네이트 되었고, 샤츠버그와 재결합하여 만든 작품 허수아비가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대부 2, 뜨거운 오후를 통해 70년대 명실상부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최고의 위치에 오른 알 파치노는 극심한 권태감에 시달린다. 정작 본인이 그 시기를 회상하기엔 항상 우울함과 술에 취해 있어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스카페이스로 다시 명성을 되찾고 술을 끊기 전까지 알콜 중독은 그의 발목을 붙잡는다. 외모와 목소리[28]를 본격적으로 망가뜨리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
결국 79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 커츠 역할 제의를 거절한 채 브로드웨이 연극 무대로 활동지를 옮긴 후 당시 세간을 충격에 빠트렸던 파블로 험멜의 기본훈련을 통해 토니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후 자전적 이야기로 보여지는 바비 디어필드로 골든글로브 남우 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되고 2년 후 용감한 변호사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다시 노미네이트 되었다. 1980년 윌리엄 프리드킨과 함께한 광란자에서 게이 살인자를 쫓다가 자신이 게이가 되어버리는 역할로 비평계를 충격에 빠트렸으며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에 다시 노미네이트 된 후 그의 80년대를 규정짓는 작품이자 대표작 중 하나인 스카페이스로 컬트 아이콘의 지위에 올랐다. 이 영화는 당대에 괜찮게 흥행한 여러 작품들 중 하나였지만 이 후에 힙합 문화를 비롯한 수많은 서브컬쳐들을 형성시키거나 성장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작품으로서 걸작의 위치에 오르게 된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다.
허나, 영화 혁명(Revolution)의 대실패로 헐리우드를 다시금 떠난 그는 줄리어스 시저와 같은 작품에서 지금도 회자되는 명연으로 브로드웨이의 명배우의 위치를 공고히 함과 동시에 본인이 직접 제작한 The local stigmatic으로 The Museum of Modern Art에 개봉하는 등 알게 모르게 영화계와도 간접적인 인연을 이어갔다.
이후 사랑의 파도로 영화계에 돌아오며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에 다시 노미네이트되고 대부 3편으로 주류 할리우드에 다시 진입했으며 딕 트레이시로 흥행에도 성공했다. 케빈 스페이시, 잭 레먼으로 대표되는 명배우들과의 협연으로 글렌 게리 글렌 로스를 완성시켰으며 이후 여인의 향기로 마침내 숙원이었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칼리토, 도니 브래스코로 스카페이스에서 시작된 거친 갱스터로서의 독창적인 캐릭터를 영화속에서 발전시켰고 투 비츠, 애니 기븐 선데이, 히트, 인사이더 등에서 호연을 펼쳤다.
2000년대 이후 작품은 전성기에 비해 비교적 소규모 작품이 주를 이루는데 자신의 감독하에 만들어진 차이니즈 커피, 살로메(2013)가 대표적이다. 다만 전성기에 비해서 영화 작품 선구안이 비교적 안 좋아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29]
하지만 베니스의 상인(2004)은 그의 전성기를 연상시키며 Angels In America(2003)은 그가 연극배우로써의 내공의 결실이라 해도 좋은 시대의 명연기라 불릴만하다. 이 연기로 그는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Triple Crown of Acting의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전성기 시절의 활약에 비교하면 기세가 약해지긴 했으나 80대를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배우 자체의 역량과 연기력은 여전히 걸출하며 이미 젊은 시절에 남긴 퍼포먼스만으로도 위상은 여전히 전설 그 자체이자 영구결번일 정도.
2010년대에 들어서 유 돈 노우 잭으로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다시 한번 수상하고 크리스토퍼 워컨과 스탠드 업 가이즈로 협연했으며 베리 래빈슨과 더 험블링으로 재회하고 대니 콜린스로 골든 글로브 남우주연상에 다시 한번 노미네이트 되었다.2019년에는 아이리시맨에서 로버트 드 니로,조 페시와 함께 출연하여 명연기를 보여주었고 제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에 노미네이트 되었다[30]

5. 아카데미 시상식 7전 8기


'''아카데미 최다 노미 순위 : 남배우'''
'''순위'''
'''이름'''
'''노미'''
'''수상'''
1위
잭 니콜슨
12
3
2위
로런스 올리비에
10
1
공동 3위
스펜서 트레이시
9
2
폴 뉴먼
9
1
'''알 파치노'''
'''9'''
'''1'''
공동 6위
말론 브란도
8
2
잭 레먼
8
2
덴젤 워싱턴
8
2
피터 오툴
8
0
미국 3대 시상식인 <아카데미상>, <에미상>, <토니상>을 모두 받아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알 파치노는 아카데미 시상식과 지독한 악연이었다. 아이리시맨으로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것을 포함하여 남우주연상 5번, 남우조연상 4번, 총 9번의 후보 지명을 받았고 역대 최다 노미 순위 3위에 올라 있지만 수상은 한 번에 그쳤다.[31] 심지어 역대급 연기로 꼽히는 <대부 1> 시리즈로도 수상을 실패했는데, 대부 2로 1975년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놓친 것은 아직도 이해가지 않는 일로 평가 받는다.[32] 또 하나의 대표작인 <스카페이스>로는 골든글로브 후보에만 올랐고 아카데미에는 노미조차 되지 못했다.[33]
  • 1973년 제 4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알 파치노는 <대부 1>로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며 처음으로 아카데미에 노미됐다.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말론 브란도보다 더 많은 출연 시간을 가진 주인공이었음에도 대부의 조연 배우들인 로버트 듀발, 제임스 칸과 함께 아카데미 시상식의 남우조연상 부문으로 배정되었다.
  • <대부1>에서 잘못된 부문의 후보에 오른 것 같냐는 질문에 1979년의 젊은 알 파치노는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오, 물론이죠. 확실히 그랬어요. 터무니없는 일이었죠. 속이 쓰린 일이었어요." 당시 연극 무대에 서고 있었던 알은 시상식 불참을 결정했다. 당해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말론 브란도는 헐리우드가 인디언 차별을 한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하며 불참했고 때문에 대부의 주연 두명이 불참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알 파치노는 주변으로부터 아카데미에 노미 거부 편지를 쓰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는데 "그냥 둬. 그냥 둬. 분란 일으킬 거 없어(Let it go. Let it go. Don’t make waves.)"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비록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TV로 지켜보았던 알은 불참했다는 사실이 불편해져서 조연 후보로 올라간 모순점은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고.[34]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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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제 46회 아카데미 시상식 '''
'''남우주연상 후보들'''
  • 1974년 제 4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형사 서피코>로 남우주연상에 노미되며 처음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했다. <대부>를 함께 찍은 다이앤 키튼과 같이 참석했던 알은 약간 취한 상태였다고. 게다가 스타일리스트가 머리를 이상하게 만져 "마치 제 머리 위에 새둥지가 자란 것 같았어요."라며 엉망이었던 본인 헤어스타일을 스스로 혹평하기도 했다. 첫참석에 너무 긴장이 됐기 때문에 긴장되면 나오는 평소 습관처럼 일부러 차가운 표정을 짓고 앉아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고 알 파치노는 옆자리 제프 브리지스에게 "남우주연상은 시상하지 않을건가 봐요."라고 물어봤는데 그 때 제프 브리지스가 지었던 이상한 표정을 50년이 다 된 지금까지 잊지 못한다고 최근 밝힌 적이 있다.[35] "이거 3시간 짜리예요."라는 대답을 듣는 순간 젊은 알은 나머지 2시간은 뭘해야할지 억장이 무너졌고 남우주연상 차례가 다가오자 "제발 나는 아니어라, 제발."하고 빌었으며 마침내 잭 레먼이 호명되자 자신이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정말 행복했다고 한다.[36]
  • 이후 <대부 2>, <뜨거운 오후> ,<용감한 변호사>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을 때는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불참할 때마다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에 앞으로는 참석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며, 그동안 시상식을 즐기지 못해서 기피했지만 마침내 그 순간을 즐기고 이해하게 되었다고 1979년 인터뷰를 통해 고백했다. 80년대에는 연극 무대에 집중하면서 후보에 오르지 못하다가 <딕 트레이시>로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을 때 두 번째로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했다.
  • 1992년작인 <여인의 향기>에서야 주연상을 수상했다. 이 때문에 수상소감 첫 마디를 "제 연패를 끊어주셨네요!(You broke my streak!)"[37]라고 하며 재치있는 농담을 했다. 수상 당시 객석에 있던 모든 영화 관계자들이 알 파치노가 상을 받고 단상 앞에 서자 한참 동안 기립 박수를 보냈다.
아카데미 수상 당시 영상
수상 소감이 들어있는 7전8기 영상

6. 연기 스타일


지금의 마초적 이미지와는 달리, 알 파치노는 본래 길거리 스탠드업 코미디로 연기를 시작했다. 온갖 농담과 과장된 익살로 사람들을 웃기던 그에게 이 시절은 매우 배고팠지만 그 어떤 시기보다도 행복했다고 술회한다. 이 후 메소드 액팅을 철저하게 훈련하며 자신의 에너지를 극대화하는 연기법을 터득하고, 본격적으로 전업 배우 생활을 시작한다. 초창기엔 폭발적이면서도 절망과 불안을 탁월하게 표현해내는 것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실제로 70년대의 전설로 회자되는 알 파치노의 연기들은 모두 타고난 신체적 조건(커다란 눈망울, 예쁘장한 이목구비, 왜소한 신체, 쩌렁쩌렁한 목소리 등)을 탁월하게 이용하여 극단적인 폭발력 이면에 숨겨진 불안함과 절망감을 표현하는 작품들이었다. 다만 현장에서 몰입도를 위해 본 촬영 때 외에는 그 누구와도 대화를 하지 않을 정도로 극단적이었던, 모조리 발가벗겨지는 식의 메소드 방법론은 자연인으로서의 알 파치노를 황폐화시키는 면이 있었고, 한 작품 찍어낼 때마다 전세계의 찬사를 받았지만 다음 작품을 하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다고 술회한다. 타고난 우울함과 히스테릭함을 갖고 있었던 알 파치노는 70년대의 성공적인 커리어 뒤편에서 24시간 알콜중독에 시달리며 지쳐갔고, 곧 방법론을 바꾸기 시작한다.
83년 스카페이스를 통해 70년대의 자기 자신을 완전히 지워낸 알 파치노는, 자신의 남성성을 극단적으로 과장하여 나약함을 숨기는 방식으로 연기 변신을 시도한다. 불안과 절망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끝까지 운명 앞에 맹렬히 저항하다 파멸하는 갱스터 캐릭터를 본격적으로 확립해나가기 시작한 알 파치노는 90년대에 이르러 대중들에게 익숙한, 괴팍하지만 세상 물정에 통달한 중년 신사의 이미지 역시 확립하였고 지금의 알 파치노는 70년대에 비해 90년대 이르러 정착시킨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흔히 남아있다.
연극 배우로 레전드이기도 한만큼 연기스타일 자체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표적으로 손을 아주 효과적으로 쓰는 배우 중 하나며(연극에서는 관객들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섬세한 표정 연기 외에 손동작이나 움직임으로도 표현을 잘 해야 한다) 공간 활용에도 능하다. 또한 애드립에 아주 강한 배우로 뜨거운 오후의 명장면인 대낮에 경찰과 대치 장면, 여기서 나온 일장연설 대부분은 애드립이고[38] 평상시에도 애드립을 종종 친다. 히트에서 "Because she's got a...GREAT ASS!!"하면서 눈을 부라리는 장면 또한 애드립.

7. 은둔형 예술가의 언론 나들이


  • 알 파치노의 전기책으로 가장 유명한 ≪알 파치노와 로렌스 글로벨의 대화(2006)≫의 저자 '로렌스 글로벨'은 언론을 피하던 슈퍼스타 알 파치노를 처음으로 인터뷰한 저널리스트였다. 오직 연기에만 몰두하던 알이 인터뷰를 결심한 것은 그가 존경하는 배우 말론 브란도때문이었는데, 글로벨이 브란도와 진행했던 플레이보이 25주년 특집 인터뷰를 읽고 이 사람이라면 인터뷰를 해도 되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 1979년, 인터뷰 요청을 받은 글로벨은 대부마이클 콜레오네를 떠올리며 "얼음같이 차가운 이미지를 상상"했으나 다음 날 뉴욕으로 날아가 알의 아파트에 들어서자마자 완전 다른 느낌을 받았다고 서술했다. "알 파치노의 첫인상은 스타 영화배우라는 짐을 짊어진 수줍고 조심스러운 배우였다." 뿐만 아니라 그로벨은 알 파치노 정도의 슈퍼스타가 낡은 가구들과 작은 부엌이 딸린 집에서 너무나 검소하게 생활하는 점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이 때문에 나는 곧바로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 이 때 두 사람은 무려 40시간에 걸쳐 2천 장 분량의 긴 인터뷰를 했고 이를 계기로 둘은 평생 동안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2006년에 발간된 두 사람의 대화록에는 2005년까지 두 사람이 진행한 9번의 인터뷰들이 수록되어 있다. 알은 또 다른 절친인 로버트 드 니로에게 글로벨을 소개해주기도 했는데, 알과 마찬가지로 언론을 꺼려하던 드 니로는 알 파치노의 인터뷰를 읽고 설득되어 로렌스 글로벨과 장시간 인터뷰를 진행했다.
>알은 일생 동안 사회운동, 정치적 이슈, 시위, 반대운동을 피해왔다. 그리고 알이 브로드웨이에서 30년만에 처음 시연된 ≪리처드 3세≫를 연기했을 때, 수많은 비평가들은 맹렬하게 앙심을 품은 듯 그를 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알은 연극을 끝마치고 ≪크루징≫ 촬영에 돌입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언론들은 배알이 꼴려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한 광기와 열광을 피해 숨어온 배우에게, 언론을 열심히 피해 왔던 한 남자의 앞길에 돌연히 강한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져 내렸다.
>
>- ≪AL PACINO IN CONVERSATION WITH LAWRENCE GROBEL(2006)≫ 서문 중에서
  • 인터뷰뿐 아니라 시상식,토크쇼 같은 공식적인 자리를 수줍어하고 불편해하는 성격 때문에 TV 출연도 드물게 하는 편이다. CNN의 래리 킹이나 NBC의 바바라 월터스 같은 언론인과의 인터뷰는 종종 해왔지만 예능격인 토크쇼 출연은 희귀한 편. 하지만 한 번 출연하면 인터뷰어들과 사적인 친분을 맺어버리는 뛰어난 친화력과 의리의 소유자이다.
  • 앤디 워홀이 스타들의 인상을 기록한 책에서 파티장에서 알 파치노가 저 구석에 앉아있는 걸 끝무렵에야 발견했다고 한다. 그만큼 조용했다고.
  • 1995년, CNN의 뉴스 코너인 ≪래리 킹 라이브≫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래리 킹과 절친한 사이가 된 알은 킹이 CNN을 떠날 때까지 여러차례 CNN 뉴스에 출연했다. 1997년 ≪데블스 애드버킷≫의 시사회에 래리 킹을 초대하고 같은 해 킹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등 친분을 이어 나갔고, 2020년 현재까지 여러 행사에서 친목하는 모습을 보이며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39]

  • 2002년 ≪레이트쇼 with 데이비드 레터맨≫에 첫 출연했을 때는 레터맨으로부터 '토크쇼에 나온 걸 본 적이 없는데 대체 얼마만에 출연한 것이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아마 30년 만의 첫 토크쇼 출연이라는 대답을 했던 알은 이 날 출연을 계기로 레터맨과도 친구가 되었다. 2015년, 레터맨이 레이트 쇼를 하차할 때까지 이 쇼에 수 차례 출연했던 알은 같은 해 깜짝 출연한 이후 오랫동안 토크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2020년, ≪아이리시맨≫,≪헌터스≫ 홍보차 처음 ≪지미 키멜 라이브!≫에 출연한 알은 많은 관심을 받았다. 역시나 시작부터 키멜에게서 '이런 자리를 불편해하신다고 들었다'는 말을 들었고 인터뷰의 끝무렵에는 키멜의 마무리 멘트가 끝나기 전에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 팬들에게 웃음을 주었다. 같은 해 2월, 영국 ≪one show≫에 출연했을 때는 사회자의 중간 마무리 멘트를 듣는 도중 일어나려고 시도했는데 "방금 전에 나가려고 했어요. 아직 안 끝났군요."라고 고백하여 좌중을 폭소하게 만들기도 했다.

8. 여담


알 파치노는 매우 마이너한 영화들을 만들어서 평론은 좋게 받았지만 아예 출시되지 않았던 작품들이 꽤 있다. 대표적으로 The Local Stigmatic, Chinese Coffee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셰익스피어 덕후이다. 다수의 셰익스피어 영화와[40] 브로드웨이, 미국 각지의 셰익스피어 연극에 출연했으며, 1996년 덕후의 정점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뉴욕 광시곡을 감독했다.[41] 연극 리처드 3세를 영화로 만드는 과정을 현실과 교차하며 보여주는데, 알 파치노 뿐만 아니라 출연진이 다들 걸출한 연기파 배우들이다. 연극과 연기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추천.
2010년에 나온 안락사를 다룬 유 돈 노 잭에서 잭 케보키언 역을 맡았다. 이 역할로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 수상. 참고로 이때 자기보다 40살 연하의 여친을 데리고 나와서 뭇 남성들의 열폭과 부러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2011년 한국 지방 지자체 행사에 내한 초청이 예정되었으나, 취소되었다.
애니메이션 슈퍼배드 2에서 처음으로 성우로 참여할 예정이었다. 여기선 악역을 연기하기로 했는데 원래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안톤 쉬거로 유명한 하비에르 바르뎀이 맡을 예정이었으나 그가 007 영화에 나오기로 하면서 취소되었고 알 파치노도 여러 사정으로 하차했다.
2008년 이후 들어서면서 나이가 많은 탓도 있겠지만 웬일인지 작품 선정을 지독하게 못해서 88분, 의로운 살인 등 망작을 주연하며 골든 라즈베리에까지 노미네이트되는 등 영화 커리어쪽으론 안습의 극치를 달리기 시작했다. 2000년 후반에 들어서면서 선택한 작품들은, 항상 연기는 좋은데 영화 자체가 재미없어서 팬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2012년에는 기어코 골든 라즈베리를 수상했다. 문제의 영화는 전관왕에 빛나는 잭 앤 질. 해당 항목을 가면 알 파치노의 명장면(?)을 볼 수 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보고 나서 마블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 밝혔고, 마블 스튜디오 사장 케빈 파이기와 접촉했었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조만간 마블 영화에 출연할 것이라는 루머가 퍼졌다.
2016년에 이병헌 등과 같이 미스컨덕트라는 영화에 나왔는데, 평가가 매우 좋지 않다.
임재원, 김태관의 한국만화 에서 광진고 무리들이 모이는 조직의 본거지 카페 이름이 알 파치노.
영화 이외에도 미국 케이블 HBO와 드라마 작업을 많이 했는데 논쟁적이고 도전적인 역할, 실험적인 작품을 좋아하는 듯하다.
알 파치노의 HBO 출연 리스트
1) 엔젤스 인 아메리카(angels in america, 2003)
로이 콘 역. 동명의 퓰리처 수상 연극이며 8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에이즈와 동성애자들의 애환을 다룬 미니시리즈다. 에이즈를 앓고 있는 권력 실세 정치인을 연기하였는데 술집에서 은근히 패트릭 윌슨은 유혹하는 연기를 볼 수 있다(?)
2) 유 돈 노우 잭(You Don't Know Jack , 2010)
잭 케보키언 역. 실화를 바탕으로 한 존엄사와 안락사를 다룬 영화이다. 고통스러운 질병과 치료 불가한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 안락사를 도와주며 살인자로 지목되는 의사를 연기한다.
3) 필 스펙터(Phil Spector, 2013)
필 스펙터 역. 실화를 바탕으로 1960년대를 풍미한 음반 제작자인 필 스펙터가 여배우 라나 클락슨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후 그의 변호사와 법정공방을 하는 과정을 담은 영화이다.
4) 패터노(Paterno, 2018)
조 패터노 역. 미식축구계의 명장이자 61년간 최대 우승기록을 낸 감독 조 패터노의 휘하의 코치가 15년간 52건에 달하는 아동성폭행이 수면 위로 들어나 조 패터노 감독도 알고 있었으나 묵인하고 코치를 맡겼던 정황이 드러나며 명장의 추락을 그리는 미국 스포츠계 엄청난 스캔들을 다룬 실화영화이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얼굴이 닮은꼴로도 유명하며 비슷한 나이때의 모습을 비교하면 바로 알 수 있다. 구글에서도 둘의 이름을 함께 검색한 것이 연관검색어로 뜬다.
할리우드에서 분노 연기를 가장 잘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알 파치노 본인이 울림통이 굉장히 커서 소리를 지르면 매우 우렁찬 소리가 나오며, 분노의 감정을 표현해내는 연기력도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42]
근 몇 년간 머리가 하얗게 세고, 장발로 변신하며 외모가 많이 변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덩치가 더 커지고 간지가 배가된 느낌이다. 외모가 크게 변하지는 않았지만 이미지와 목소리가 매우 급변한 케이스여서 젊은 시절 알 파치노와 나이 든 알 파치노의 연기를 보면 상당히 다르다고 느낄 수 있다. 2020년에는 굉장히 나이가 많이 드셨다.#
앞에서도 볼 수 있듯 목소리가 많이 변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그가 '''9살'''때부터 흡연을 시작한 골초여서 그렇다. 지금 80이 넘은 고령이고 흡연이 워낙 장수에 영향을 주다 보니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건강 이상이 없는 듯하다.
동안이라는 평가를 받은 배우들 중 하나이다. 대부 1에서 대학생 마이클 콜레오네를 맡았을 때 20대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30이 넘은 나이[43]였고, 뜨거운 오후 촬영 당시 35세의 장년기였다. 스카페이스에서는 40대 초반이었다. 그의 영상들을 찾아보면 대부분 동안이라는 얘기(특히 스카페이스 영상)가 적혀있다. 그러나 위에 있듯 지금은 딱 80살 할아버지로 보인다.

9. 필모그래피



9.1. 영화


'''연도'''
'''제목'''
'''배역'''
'''기타'''
1969
미 나탈리
토니
단역
1971
백색 공포
바비
데뷔작[44]
1972
'''대부'''
'''마이클 콜레오네'''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
1973
허수아비#s-8
프랜시스 라이오넬 델부치

형사 서피코
프랭크 서피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
1974
'''대부 2'''
'''마이클 콜레오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
1975
뜨거운 오후
소니 워칙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
1977
바비 디필드
바비 디필드

1979
용감한 변호사
아서 커클랜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
1980
광란자
스티브 번스

1982
브로드웨이에 막이 오를 때
아이번

1983
'''스카페이스'''
'''토니 몬타나'''

1985
혁명


1989
사랑의 파도[45]
프랭크

1990
로컬 스티그매틱
그라함
프로듀서 겸 배우
딕 트레이시
알폰스 '빅보이' 카프리스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
'''대부 3'''
'''마이클 콜레오네'''

1991
프랭키와 쟈니
쟈니

1992
글렌게리 글렌 로스[46][47]
리차드 '리키' 로마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
'''여인의 향기'''
'''프랭크 슬레이드 중령'''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
1993
칼리토
칼리토 '찰리' 브리간테

1995
투 비츠
할아버지

히트#s-4
빈센트 한나 경위

1996
씨티홀
존 파파스 시장

뉴욕 광시곡
본인 & 리처드 3세
감독 데뷔작
1997
도니 브레스코
벤자민 '레프티' 루지에로

데블스 애드버킷
존 밀튼

1999
인사이더
로웰 버그만

애니 기븐 선데이
토니 다마토

2000
차이니스 커피
해리 레빈
감독 겸 배우
2002
인썸니아
윌 도머

시몬
빅터 타란스키

목격자
앨리 워맨

2003
갱스터 러버
스타크먼

리크루트#s-3
윌터 버크

2004
베니스의 상인#s-4.1
샤일록

2005
투 포 더 머니
월터

2007
88분
잭 그램 박사

오션스 13
윌리 뱅크

2008
의로운 살인
데이빗 '루스터' 피스크 형사

2011
화이트 밀크
스탠포드 형사

잭 앤 질
본인
골든라즈베리 남우조연상 수상(...)
와일드 살로메
본인&헤롯 왕
감독 겸 배우
2012
멋진 녀석들
발렌타인

2013
살로메
헤롯 왕
감독 겸 배우
2014
알파치노의 은밀한 관계
사이먼

맹글혼
맹글혼
프로듀서 겸 배우
2015
대니 콜린스
대니 콜린스

2016
미스컨덕트
찰스

2017
더 파이러츠 오브 소말리아
시모어

행맨
형사 아처

2019
아이리시맨
지미 호파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마빈 슈워즈

미정
액시스 샐리
제임스 로린

미정
리어왕
리어왕


9.2. 연극


'''연도'''
'''제목'''
'''배역'''
'''기타'''
1965
The Creditors


1966
Why Is a Crooked Letter

오비상 남우주연상 후보
1967
어웨이크 앤 싱!


1967
아메리카, 만세


1968
인도인은 브롱크스를 원한다
머프
오비상 남우주연상 '''수상'''
1969
호랑이는 넥타이를 매는가?
비컴
토니상 남우조연상 '''수상'''
1969
로컬 스티그매틱
그레이엄

1970
랫츠

감독 데뷔작[48]
1970
카미노 리얼
킬로이

1973
리처드 3세
리처드 3세
[49]
1975
아르투르 우이의 출세
아르투르 우이
[50]
1977
파블로 험멜의 기본 훈련
파블로 험멜
토니상 남우주연상 '''수상'''
1979
리처드 3세
리처드 3세

1981
아메리칸 버팔로
월터 '티치' 콜

1983
아메리칸 버팔로
월터 '티치' 콜

1988
줄리어스 시저
마크 앤소니

1992
차이니스 커피
해리 레빈

1992
살로메
헤로데 안티파스

1996
휴이
에리 스미스
감독 겸 배우
1999
휴이
에리 스미스
감독 겸 배우
2002
아르투르 우이의 출세
아르투르 우이

2003
살로메
헤로데 안티파스

2005
고아들
해롤드

2010-2011
베니스의 상인
샤일록
토니상 남우주연상 후보
2012-2013
글렌게리 글렌 로스
쉘든 '셜리' 르빈

2015-2016
차이나 돌
미키 로스

2017
갓 룩 어웨이
테네시 윌리엄스


9.3. TV


'''연도'''
'''제목'''
'''배역'''
'''방송사/분류'''
'''기타'''
1968
N.Y.P.D
존 제임스
ABC 드라마
시즌 2 5화만 출연
2003
엔젤스 인 아메리카
로이 콘
HBO 6부작
에미상 남우주연상 '''수상'''
2010
유 돈 노우 잭
잭 케보키언
HBO TV 영화
에미상 남우주연상 '''수상'''
2013
필 스펙터
필 스펙터
HBO TV 영화
에미상 남우주연상 후보
2018
패터노
조 패터노
HBO TV 영화

2020
헌터스
마이어 오퍼만
아마존 드라마


10. 관련 문서


[1] 정확히는 뉴욕시의 East Harlem 태생[2] 젊은 시절 기준으로 80세인 지금은 줄었을 가능성이 크다.[3] 안톤과 올리비아는 이란성 쌍둥이다.[4] 3명의 자녀를 두고 있지만, 결혼 경험은 없다.[5] 1970년대 초 알 파치노를 지금의 자리에 올려준 대부 촬영 당시. 이때는 30대 초였는데, 어벙벙한 20대 대학생과 30대의 카리스마있는 마피아 보스 두 가지 이미지를 완벽하게 연기해내며 밑에서도 볼 수 있듯 선배 배우인 말론 브란도에게 격찬을 받았다. 자고로 말론 브란도는 성격 까칠하기로 유명하며 거의 남 칭찬을 하지 않는 인물들 중 하나인 것을 감안한다면..[6] 원문 : I didn't say much to Pacino when we were making The Godfather(1972) but I not only consider him one of the best actors in America but in the world. The picture just reinforced my opinion. That sounds like a put on? well, I never meant anything more in my life. I don't go around touting other actors, the profession means too much to me.[7] 현재는 원로 배우들이 된, 팔순 근처의 나이가 된 넷은 전부 나이 대비 동안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정확히는 알 파치노의 경우 1970년대~80년대, 잭 니콜슨의 경우 살찐 지금(...), 그리고 드니로도 거의 늙지 않는 70대 이후, 더스틴 호프만의 경우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한 뒤 커리어 내내''' 동안이었다.[8] 특히 드니로랑은 같은 이탈리아계+대부에 나옴+스콜세지와 친분 있음이라는 공통점으로 인해 자주 엮이는 편이다. 또한 둘도 서로 친한 편이기도 하고. 2019년 들어 알 파치노, 드니로, 스콜세지는 여든 가까이 된 고령의 나이로 아이리시맨을 찍었다.[9] Triple Crown of Acting을 달성한 배우이자 그의 브로드웨이 최신작 차이나돌 공연쯤에 가디언지는 그를 브로드웨이의 대부라 칭했다. 기사 링크[10] 2015년 가디언지 인터뷰 중에서 "My grandparents came from a town in Sicily called Corleone. Fate? Yes, maybe – it’s very strange." 출처[11] 다만 이런 우연은 당시 대부 시리즈를 준비하던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노력의 결실이기도 하다. 파라마운트 이사들은 대부 시리즈는 이탈리아 문화를 잘 아는 이탈리아계로 팀을 꾸리기를 원했고, 배우들은 그나마 자유로웠으나 감독으로 앉힌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알 파치노를 강력히 주장했다.[12] 절친한 친구 두 명이 마약 남용으로 19살,30살에 사망한 일화를 보면 어린 시절 얼마나 험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다.[13] 1983년 abc 인터뷰 영상 [14] 2007 AFI 공로상 시상식 08:40~ 영상[15] ABC 굿모닝 아메리카에 출연하여 춤을 좋아하는 점과 연기 생활의 시작이 뮤지컬이었다고 밝혀 대중을 놀래킨 바가 있다. 아쉽게도 찍어놓은 영상은 남아있지 않다고. 영상 [16] 2007 AFI 공로상 시상식 09:25~ 영상[17] 2016년 알 파치노에게 케네디 센터 공로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연설 중에 이 일화를 밝히며 당시 관객들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짐작도 안간다고 농담을 한 적이 있다. 백악관 리셉션 한글자막 영상[18] High School of Performing Arts, 흔히 PA로 불리는 뉴욕의 공립 예술고등학교이다. 1947년에 설립되었다.[19] 2019년 12월 open 매거진 인터뷰 " I went to a performing arts school and I remember that I loved the things that I learned, but I was too young, I was 15 but I might as well have been 10 or 11, I just was behind.", "I had to quit school and go to work because my mother was ill. So I was living in the Village by myself when I was 16, 16 and a half. I was working odd jobs to make money and support myself and my mother." 링크[20] Focus On: 100 Most Popular Tony Award Winners의 2017페이지 출처 [21] 2009년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과의 인터뷰에서 스스로 이 때의 일을 밝혔다 "At 20, I lived in Sicily by selling the only asset I had — my body," "An older woman traded food and housing in return for sex. I woke mornings not really loving myself."[22] 2015년 가디언지 인터뷰. "The lowest point of my life was losing my mother, Rose, and grandfather – they died within a year of each other. I was 22 and the two most influential people in my life had gone, so that sent me into a tailspin."라고 말한 뒤 "I lost the 70s in a way, but then I gave up drinking in 1977 and decided to focus on the work." [23] 리 스트라스버그(Lee Strasberg)는 알 파치노를 비롯해 제임스 딘, 더스틴 호프만, 마릴린 먼로, 제인 폰다, 로버트 드 니로를 가르친 미국 연기사의 전설적인 인물이다.[24] 1983년 abc 인터뷰 한글자막 영상 [25] 2006년 발간된 Al Pacino In Conversation with Lawrence Grobel에서 "The Actors Studio meant so much to me in my life. Lee Strasberg hasn't been given the credit he deserves ... Next to Charlie, it sort of launched me. It really did. That was a remarkable turning point in my life. It was directly responsible for getting me to quit all those jobs and just stay acting."라고 인터뷰했다.[26] 2000년 6월 뉴욕 타임즈 기사 홈페이지 링크 [27] 액터스 스튜디오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홈페이지 링크[28] 30대 시절 목소리는 맑고 미성이었으나, 40대를 들어서자 허스키하고 걸쭉해졌다. 하지만 알 파치노하면 허스키한 목소리가 떠오를 정도로 상징적이게 되었다.[29] 후술하겠지만 골든 라즈베리를 수상하거나 비평, 흥행적으로도 졸작이나 다름없는 의로운 살인, 88분, 잭 앤 질, 미스컨턱트에 연달아 출연하면서 영화 커리어 자체가 전성기에 비해 떨어진것은 팩트다. 이는 연기력과는 별개의 문제이며 이것마저 쉴드를 치는것은 극성의 팬질로 밖에 볼 수 없다. 다만 이는 자신을 발굴하고 키워준 마틴 브레그만의 부재가 가장 큰 이유로, 마틴은 알 파치노에게 가장 어울리는 시나리오와 감독을 고르는 선구안이 매우 뛰어난 제작자였다. 실제로 최전성기인 70년대 알 파치노의 영화들은 모두 마틴 브레그만의 손길이 닿은 영화들이었다. [30] 수상자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할리우드의 브래드 피트[31] 아카데미 역대 최다 노미네이션 배우 순위 링크 [32] 다른 필모들은 차치하더라도 대부2로는 오스카를 받았어야 됐다고 모두가 입을 모은다. 하지만 그 해의 남우주연상은 <해리와 톤토>라는 아주 묻혀진 영화의 <아트 카니>가 수상했다. 심지어 잭 니콜슨, 더스틴 호프만, 알버트 피니마저 제치고...[33] 스카페이스는 현재는 명작 취급을 받지만 당시는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잔인한 영화라서 논란이 되었는데, 보수적인 면이 있는 아카데미상은 이런 영화를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외국어영화가 아카데미상을 수상한게 기생충이 사상 최초일 정도로 다소 보수적인 면이 있다.[34] 1979년 플레이보이지 인터뷰에서 "Oh, sure. Definitely. That was outrageous. It’s things like that that get you a little sour. I decided to pass the ceremonies by. There were certain people around me who wanted to write a letter, who wanted to announce that I would not accept the nomination. I would always say, “Let it go. Let it go. Don’t make waves.” But then, even though I didn’t go, I watched it on TV. I felt bad. I didn’t care for that kind of contradiction."라고 인터뷰했다.링크[35] 2020년 1월 지미 키멜쇼에 첫 출연하여 이 때 일을 상세히 회고했다.[36] Al Pacino by Lawrence Grobel 45p 링크[37] 대부 2의 명대사 'You broke my heart!'를 자체 패러디했다.[38] 이 장면은 시퀀스 전체가 명장면이니 강력추천. 마치 연극 무대에서 원맨쇼를 펼치는 듯 알 파치노 연기력의 정점을 볼 수 있다. 알 파치노가 연기한 소니의 불안하면서도 강렬한 에너지, 그와 대치하는 경관들 사이의 긴장감이 압권인데 대부분이 대본에 없다보니 실제로 경관들이 황당해하거나 당황하는 리액션을 실감나게 한다. 자주 언급되는 부분은 소니가 "Kiss me. I like to be kissed when I'm being fucked"로 fucked가 엿먹이다와 성관계하다란 의미가 둘 다 있는 걸 이용한 말장난이고, 단연 영화 최고의 명장면은 역대 최고의 영화 대사 중 하나로 꼽히는 "Attica! Attica!!"이다. 뉴욕 주에 위치한 Attica 감옥에서 죄수들이 비인간적 대우에 항의하며 폭동을 일으켰는데, 이때 죄수 33명과 교도관 10명이 사망하며 과잉진압 논란을 불렀다. 즉, 소니는 "우리도 한번 짓밟아보시지!"하며 구경꾼들을 선동한 것. 당연하지만 평상시 인격이 짓밟히던 죄수들과 은행강도를 동일시할 순 없다. 그러나 소니의 카리스마 때문에 구경꾼들이 일제히 소니의 편으로 돌아선다.[39] CNN에서 은퇴한 래리 킹은 2020년 현재까지 여전히 개인 쇼를 진행하고 있는데 알 파치노 성대모사가 가능한 사람이 출연하면 자신이 알 파치노의 절친임을 밝히며 알의 성대모사를 시키곤 한다.[40] 최근작이자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라면 베니스의 상인에서의 샤일록.[41] 재밌는 점은 알 파치노는 이 작품에서 위노나 라이더를 주연 중 하나로 앤으로 기용했는데 2002년 시몬에서 극초반에 작중 유명 여배우로 나오는 위노나 라이더에게 퇴짜 맞는 감독으로 나온다는 점이다. 당시 위노나 라이더는 2001년 절도 사건으로 영화에 제대로 나오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42] 목소리가 굉장히 많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고함을 지를 때 나오는 특유의 밀도 높은 목소리는 초창기와 말년이 거의 비슷하다. 그가 얼마나 발성과 기본기가 좋은지 보여주는 부분.[43] 대부 1은 아무리 일러도 1970년 이후에 촬영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코폴라 감독 특유의 오랜 촬영기간 때문에 그 이전이라는 이야기도 많지만.[44] 미 나탈리는 단역이기 때문에 백색 공포가 필모상 첫번째 영화로 알려져있다. 알 파치노 본인도 대부를 두번째 영화로 꼽으며 이 작품을 첫 작품으로 꼽는다.[45] 파치노 연기일생 전성기의 에너지 넘치는, 불타는 듯한 연기스타일과 대비되는 비교적 정적인 (그러나 폭발할때는 폭발하는) 후반기의 연기스타일이 확립된 첫 작품으로 보통 여인의 향기를 꼽지만 사실 이 작품에서 먼저 나왔다. 과도기적인 작품이라 젊은 시절 파치노 특유의 에너지도 어느 정도 남아있긴 하다. 평은 괜찮았지만 크게 흥행하진 못했는데 파치노 본인으로선 나름 의미가 있는 작품인것이, 80년대 초중반 찍은 영화들 중 스카페이스를 빼곤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하고 연극판에서 주로 활동 중이다 돌아와 찍은 첫 작품이기 때문이다.[46] 극작가 데이빗 마멧의 연극 각본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로 조연상 후보이긴 하지만, 부동산 중개업체 내 5명의 직원을 소재로 하는 내용으로 사실상 주연으로 봐도 무방하다. 다른 출연배우는 잭 레먼, 케빈 스페이시, 에드 해리스, 알란 아킨, 조나단 프라이스, 알렉 볼드윈 등으로 어마어마한 이름값들을 가진 배우들이다. 여인의 향기로 주연상을 받긴 했지만, 글렌게리 글렌 로즈의 로마 역을 더 높게 치는 경우도 있다. 알 파치노의 깐족거리는 연기가 일품이다.[47] 참고로 알 파치노는 2012년 리바이벌한 연극에서는 셜리 르빈(92년 영화에선 잭 레먼이 연기) 역을 연기했다. 참고로 연극 내 로마 역할은 바비 카나베일이 연기. [48] 뉴욕 브로드웨이가 아닌 보스턴의 Charles Playhouse에서 공연했다. 소규모 카페 공연을 연출한 경험은 많았던 알 파치노이지만 정식으로 극장에서 연출을 맡은 건 이때가 처음.[49] 뉴욕 브로드웨이가 아닌 보스턴의 Loeb Theater에서 막이 올랐고 이후 교회로 장소를 옮겨 진행되었다. 당시 뉴욕 타임즈 평론 링크 [50] 뉴욕 브로드웨이가 아닌 보스턴의 Charle Playhouse에서 공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