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옥(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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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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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01.29[2] ~2005.12.29 한국계 미국인 군인. 한국 이름은 김영옥(金永玉)으로, 제2차 세계대전과 6.25 전쟁 참전영웅이자 3개국에서(한국, 프랑스, 이탈리아) 최고 무공 훈장을 받은 전쟁영웅. 그런데 정작 미국에서는 수훈십자훈장(명예 훈장 다음으로 높은 육군 훈장)을 수여하였다. 그와 함께 싸운 동료와 그의 부하들은 "그는 명예 훈장을 받아야 마땅하다"라고 했지만 끝내 받지 못했다.
2. 그의 일생
2.1. 입대하기까지
미국으로 이민 간 한인 교포 2세이며, 고등학교 졸업후에 로스엔젤레스 시티 칼리지에 들어갔지만 1년 뒤에 자퇴하고 이런저런 일을 하던 도중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미 육군 모병소로 갔으나 그 당시에 아시아계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 뒤 1941년에 법이 바뀌어 아시아계도 징집 대상에 들어가 육군 병으로 입대했다.
2.2.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활약
육군 사관후보생으로 선발, 장교가 되고 나서 인사 실무자의 착오로 하와이 출신의 일본계 2세대로 이루어진 육군 100보병대대(100th Infantry Battalion)에 배치되어 소대장을 맡았다. 100대대는 이른바 "니세이 부대"로도 불렸는데, 니세이는 교포 2세대를 뜻하는 2세의 일본식 독음이다. 부대 명칭으로 알 수 있듯, 이 대대는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로 인한 부산물인 반쯤은 인질 같은 개념으로 창설된 것으로, 그 당시 적대 국가였던 일본 출신 미국인들이 일본 본국에 협조할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에 반란 등이 일어나면 앞장설 가능성이 높은 징집 연령대의 남성들 중 자원자들을 뽑아서 묶어놓은 것이다. 미국 행정명령 역사상 최악의 1,2위를 다투는 조치이며, 멀쩡한 일본계 미국인들은 갑자기 돌변한 백인 이웃의 냉대, 조롱, 린치를 당하는 슬픔을 겪게 되었다. 일본계 미국인들은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한 일본계들과 하와이를 중심으로 한 일본계들로 나누어지는데, 이들이 미군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로 묶이는 과정에 트러블은 당연히 발생하였다.[3] 미국 본토의 일본계들과 하와이 일본계들은 정서가 사뭇 달라서 일본인의 정체성이 남아있던 본토 일본계들과 '하와이인'의 정체성이 큰 하와이 일본계들은 대립과 충돌이 잦았고 김영옥 선생이 지휘하기에 하와이 일본계들이 수월했을 터.
바다생활, 수영, 야외생활로 단련된 하와이 일본계들은 매우 강인하고 터프했고 미국인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의지와 김영옥 선생의 솔선수범이 맞물려 미 육군의 정예부대로 성장하게 된다.
당시에 대대장이 일본인과 한국인의 사이가 안 좋다는 것과 그가 한국인인 것을 알고 있어서 전출 제의를 했지만, 그는 '''"여기엔 일본인도 한국인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미국인이며 같은 목적으로 싸우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고서 그냥 붙어있었다고 한다.
추후 김영옥 선생의 패기와 솔선수범에 감복한 병사들은 그를 큰형처럼 따랐으며 돌아가시기 전 행사 영상을 보면 일본계 노병들이 그를 극진히 에스코트하고 예우하는 모습을 볼수 있다.
이후 미 육군 제5야전군에 배속돼서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됐다. 다른 100대대 장병들도 자기들이 미국인으로 인정받고 싶어해서 싸우고 싶어했다고 한다. 100대대의 부대의 모토가 "Go for Broke!"[4] 였고, 퍼플 하트[5] 대대라고 불릴 정도로 격렬히 전투에 임했다. 상부에서도 100대대가 잘 싸우는걸 보고 100대대 비슷한 일본인계 대대를 더 만들기도 했다. 이게 다 '''인정받고자 하는 몸부림의 결과물'''이다. 그 때문인지 일본인 2세대 교포들은 일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끝난 뒤 이들 니세이 부대원들에 대한 일반적인 미국인들의 인식은 여전히 'JAP'이었으며, 60년대에 미국 내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면서 그제야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후 전방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리고 독도술에 능하며 기상천외한 전술을 써먹어서 주목받았다. 프랑스 비퐁텐느(Biffontaine)에서 김영옥 소대장이 수류탄 들고 독일 육군의 기관총 진지에 돌격하다 총에 맞자, 이에 울컥한 소대원 전부가 '''"반자이~!"라고 소리 지르며 기관총 진지에 반자이 어택을 감행'''해서 방어하던 독일군들을 충공깽에 몰아넣었고,[6] 김영옥 또한 사실은 경미한 부상만 입었기에 쓰러진 자리에서 가지고 있는 수류탄을 독일군 진지에 까 넣어 부대원을 엄호하기도 했다. 이는 유럽 전선에서 실행된 '''유일한 반자이 어택'''으로 현재도 회자되고 있다.
또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일병 한 명이랑 같이 '''해가 뜨는 아침에 갈대밭을 기어가서 참호로 잠입한 뒤에''' 독일 육군 진지 안으로 잠입해서 독일 육군 지휘소 근무자 두 명을 생포해오기도 했고,[7][8] 도하 작전을 일부러 2번 실패한 뒤에 3번째에는 진짜로 밀고 들어가 버려서 전사자 단 한 명도 없이 피사를 점령하기도 했다.
로마 점령 이후 방면 사령관이 그를 보고 계급이 고작 중위라는 것에 놀라서 왜 겨우 중위냐고 물었다. 그는 진급 신청을 5번 했지만 거절당했다고 대답했고, 그 말을 들은 사령관이 당장 옆에 있는 전속부관의 대위 계급장을 떼다가 붙여주면서 즉석 진급시켰다. 2011년 들어 국방일보에서 김영옥 일대기를 연재했는데, 이에 따르면 김영옥 중위는 은성무공훈장을 수여받을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훈장을 수여한 사령관이 얼마 전에 자신이 같은 물건을 수여해준 동양계 중위가 또 왔음을 알아보고 이런 질문을 했고 대답을 들은 사령관은 즉석에서 진급을 시켰다고 한다. 이 기억력 좋은 사령관의 정체는 다름아닌 미 육군중장 마크 클라크 장군으로, 6.25 전쟁 종전 당시에 UN군 최고사령관이었다.
이후 남프랑스 전선에도 참전했으나 비퐁텐느에서 상부의 개 삽질 때문에 포위당해서 총상을 입고 후방으로 호송되어 로스앤젤레스에서 휴양 생활을 했다.[9] 이후에 회복되어서 유럽으로 돌아가려다가 유럽 전선이 종료되었다. 지금도 비퐁텐느에 있는 교회 벽에는 그와 100대대를 기리는 명패가 걸려있다(구글맵). 유럽 전선에서 그의 활약 덕분에 이후 미 육군 교범이 다시 쓰였을 정도라고 한다.
2.3. 6.25 전쟁에서의 활약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전역하고 세탁소를 열었는데, 이게 또 당시 미국에 흔치않던 코인세탁소 방식이라 상당히 잘 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6.25 전쟁 발발 이후 예비역 소집 형식으로 재입대를 하고 한반도 전선에 도착했다. 이때가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한반도를 밟아본 것이라 한다.
투입되고 나서 탈북자[10] 사이에서 뽑은 유격대를 지휘하며 정보 수집 임무를 맡다가 1951년 4월에 미 육군 제7보병사단 31보병연대 정보참모로 임명되었다. 이후 별 볼일 없던 31연대가 연전연승을 거두는 계기를 만들었다. 엄청난 타격을 입어서 사기도 최악이었던 연대에서[11] 솔선수범하며 활약해 장병들을 독려하기도 했다.
5월 말부터는 적군이 공격을 해왔는데 당시 대대장은 목욕하러 후방에 가 있던 게 걸려서 짤린 대대장 후임으로, 상관이 김영옥 대위를 승진시킬 겸해서 실전 경험이 부족한 대대장을 앉혔고, 그가 실질적인 지휘를 대신 맡게 했다. 이후 10월에 소령 진급을 겸해서 정식으로 1대대 대대장이 되어서 미 육군 최초의 아시아계 보병 대대장이 되었다.
1951년 6월에 오인 포격을 받아서 중상을 입고 치료를 받은 뒤 8월 27일에 복귀했다.[12] 이때 오인 포격을 받은 이유가 걸작인데, 포병대대[13] 의 판단에 따르면 '''아군치고는 너무 북쪽까지 진군해 있어서 적인 줄 알았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1개 보병 대대로 전선을 돌파해서 겨우 20여일 만에 60km나 북진해 현재의 휴전선 형태를 만들어냈다.[14]
이후 52년 가을에 미국으로 귀국했다. 이때의 부상이 군 경력에 있어서 큰 아쉬움을 남겼는데, 당시 미 육군에는 전쟁지역에서 대대장이 일정 개월 실전경험을 채우면 자동적으로 중령으로 진급시켜주는 제도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김영옥 소령이 개월 수를 다 채우기도 전에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있는 도중에 이 제도가 사라져버렸다. 여담으로 평전에 따르면 이때 입은 중상 때문에 얻은 후유증의 고통으로 무척 고생하였다 한다. 오죽하면 그의 안타까운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이 '''"인사카드에 두꺼운 진료기록이 남아 있으면 장군 진급 물 건너 갈 거 각오해야한다."'''라는 말까지 남겼을까.
2.4. 화력 덕후
화력 덕후라 지원화력을 꽤나 중시해서, 유사시 필요하다면 사단, 군단 포병까지 가리지 않고 지원 요청을 했다. 심지어는 독일군이 육군과 공군 방공포병의 대공포를 지상 지원에 쓰는 걸 보고, 루프트바페가 박살나서 놀고 있는 아군 대공포 부대를 끌어다가 포병 포격 이후 근접 제압 사격에 쓰기도 했다 저 당시 "저 대공포 부대 좀 빌려주세요." 하니까 상관이나 대공포 부대에게 "야, 지상군 작전에 대공포 가져다가 뭐 하게?"라는 말만 들었다고 한다.
평전에 따르면 2차 대전 당시 중대급 작전에 군단 포병을 동원하는 계획을 세우자 장교들이 다들 "부탁해봐야 소용없을걸?"하며 반응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중대급 작전이면 사단 포병대에서나 지원받는 게 당연하다고 여긴 때이다. 그러나 정작 군단에 포병지원을 요청하였더니, 군단 포병들은 흔쾌히 수락했다. 당시 군단급 포병들이 대포병 사격 대비 때문에 평상시엔 대포를 잘 쏘질 않아서 심심했던 모양이다. 김영옥의 설명을 요약하면 "군단 포병은 사단보다 대구경 야포를 쓰니까 화력도 세고, 자주 지원요청을 받지 못하니 사단 포병보다 '''더욱 신나게 쏠 거다.'''"라고 한다. 당시 미 육군의 군단 포병에 배치된 야포들은 45구경장 155mm 평사포(롱 톰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8인치 곡사포는 기본이고, 이탈리아 전선이 산악지대에 구축된 요새지대를 공격/방어하는 양상이었기 때문에 공성포인 36구경 240mm 중포까지 군단에 상시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판단대로 군단 포병들은 '''아주 신나게 쏴 갈겨댔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독도법을 이미 만렙으로 찍은 터라서 전투상황에서 포병 화력유도 할 적에는 포병 관측장교보다 명중률이 높았다고 한다. 국방일보에 일대기가 연재된 당시에 포병 관측장교와 내기를 했는데 '''포병 관측장교는 조정을 해도 맞지를 않았으나 본인은 조정사격 3발을 쏴서 명중을 시켰다고 한다.'''
이런 든든한 화력지원을 통해 김영옥이 지휘한 부대는 2차 대전 및 한국전 내내 훌륭한 전과를 쌓았으며, 이를 본 미 육군 역시 포병 운용에 대한 생각을 바꾼 덕분에 현대 미 육군 교리에 이런 부분이 들어가기도 했다.
2.5. 전쟁 이후
6.25 전쟁 종료 이후에 1972년까지 육군에 있었고, 최종 계급은 대령. 그동안 미 육군보병학교 교관, 독일 주둔 육군 대대장, 주한미군 군사고문단 등을 역임했다.
당시에 미 육군은 선배 장교들과 후배 장교들 간의 '스폰서' 관행이 만연해 있었고, 그의 인품과 능력을 마음에 들어 하는 장군들 또한 많았던 만큼 본래 동북아계 최초의 장성 진급도 가능했을지 모른다.[15] 하지만 본인이 전후 한국에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에 전출을 신청해버리면서 진급길과 멀어져버렸다. 참고로 저서 《영웅 김영옥》에 따르면 거의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은 미군장성 퇴물집합소(...) 같은 곳이었다고 한다. 평소에 김영옥을 아끼던 당시 미8군 작전참모[16] 는 뭐하는 거냐며 그를 말렸지만,[17] 결국 김영옥 중령의 결심을 꺾지 못하고 '거긴 퇴물들밖에 없어서 널 질투해 인사고과도 제대로 안 줄 건데...'라고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 생각도 있고 원래 뭔가에 연연하지 않는 성격이라 그리 후회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군사고문관 시절 해밀턴 H. 하우스 사령관이 군사고문단장 시절 지시한 6.25 전쟁이 다시 일어날 때 전시동원 계획과 개선책을 브리핑하라고 하였는데, 그 뒤에 하우스가 한국을 떠나자 명령은 잊어졌고, 사령관이 되어 다시 돌아와 브리핑을 하라고 하였다. 여기서 김영옥 중령의 하드캐리로 브리핑은 사소한 문제만 빼고[18] 무사 종료되었고, 브리핑이 마음에 들었던 하우스 사령관은 김영옥 중령을 특수임무로 비밀리에 특사로 쓰며[19] 몇 가지 지시를 한다. 첫 번째는 한국군 전시 병력동원계획 작성으로 예비군 치장물자 조사와 병력 이동계획이 병행되어 처리되어야 하는 작업이고,[20] 이 과정에서 항공력의 열세에 있었던 대한민국 공군을 커버하기 위해 대한민국 육군 방공포병 부대 창설[21] 이 건의되어 호크와 나이키 유도탄이 대한민국 육군에 도입됐다.[22][23]
2.6. 전역 이후
로스앤젤레스에서 살면서 여러 가지 사회봉사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전쟁에서 살아남아 무사히 돌아가면 자기가 살던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생각했다고. 실제로 6.25 전쟁 때부터 직접 고아원을 만들고 부하들과 같이 고아원을 방문해 아이들과 어울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에 소식이 끊겼지만 죽기 몇 년 전에 자신이 돌본 고아 중 몇 명과 만났다.
로스앤젤레스의 한인건강정보센터, 한미연합회, 한미박물관 등을 만드는데 공헌했고, 아시안 여성 포스터 홈이라는 인종차별 반대 운동과 가정 폭력을 당하는 아시아계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단체도 설립.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의 조사 위원회에도 참가했고, 위안부 문제에도 활약했다. 캘리포니아 의회에서 위안부 관련 결의를 하려고 하자 일본계 미국인들이 반대 로비를 했는데, 그 사실을 알고 '''우리가 유럽에서 싸운 게 뭘 위해서였습니까?'''라면서 일본계 미국인 중 2차 대전 참전자들을 설득해 반대 로비를 그만두게 했다고 한다. 미국의 일본계 내에서 2차 대전 참전자들은 '큰 어르신'이라서 이들의 발언권이 컸다고 한다.
전쟁 당시 입은 많은 상처 때문에 평생 동안 불편했다고 하며, 2005년 7월 방광암 수술을 위해 입원했으나 암투병 끝에 12월 29일 86세로 사망했다. 87세 생일을 정확히 1달 앞둔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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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 대령과 운명을 공유한 노병들. 이들은 모두 일본계 미국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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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김영옥 대령과 절친한 사이였던 1948년, 1952년 올림픽 다이빙 금메달리스트 새미 리(Sammy Lee 1920.08.01~2016.12.02). 김 대령과 죽마고우였던 그는 이날 조사를 통해 독립운동가의 아들들인 고인과 나는 5살 때부터 희노애락을 같이했다며, 지난 가을에 시더스 사이나이 병원에서 만났던 모습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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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예배 전경.
2005년 10월 노무현 정부는 투병 중인 김영옥 대령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는데 원래 전쟁 이후의 훈포상이 끝나 오랫동안 받지 못하다가 정부에서 군을 설득한 끝에 받을 수 있었는데, 이 일이 국내에 점차 알려지면서 2011년부터 초등학교 5학년 국어교과서에 그의 삶이 수록되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2015년 교과서에서 빠졌고 2016년에도 마찬가지인데, 그 연유를 모르겠다고 당시 문재인 전 대표가 공식적으로 이의제기를 하기도 했다. ‘참군인’ 김영옥 대령을 추억하며
3. 기타
그의 활약상은 《영웅 김영옥》이라는 책으로 나왔으며 대한민국 국방부에서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 이라는 만화로도 출판되었다.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교재에 수록되어 있는 한국인 세 명 중 한 명(나머지 둘은 충무공 이순신과 권율). 일본에서도 일본계 부대인 100대대의 지휘관이라는 이유로 나름대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또한 2011년부터 국방일보에서 《영웅 김영옥》에 나오는 것을 토대로 기고하였으며 7월경에 기고가 끝나고 독후감을 모집하기도 했다.
또한 로스앤젤레스에서 한 중학교를 김영옥 대령의 이름을 붙여 이름이 '''김영옥중학교'''가 되었다(실제 영어이름도 Kim-Young Oak이라고 적혀있다). 참고로 이것은 미국 최초로 한국인 이름이 붙은 학교라고 한다.
미 서부를 남북으로 잇는 5번 고속도로 오렌지카운티 일부 구간을 그의 이름을 따서 도로명으로 등록했다고 한다. 연합뉴스 기사
누나인 김월나(Willa Kim, 1917.07.03. ~ 2016.12.23.)가 2016년까지 만 99세로 미국에 살았다. 브로드웨이에서 1950년대 이전부터 무대의상을 제작해왔으며 토니상 에서 의상부문을 2회 수상하였다. 2013년 토니 상 리셉션장에서.
2011년 6월 20일 한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포털 msn.com에서 '미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 16인'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김영옥이 뽑힌 포털 사이트에서 선정된 전쟁영웅 16인의 이름은 아래와 같다.
- 조지 워싱턴 - 미국 독립전쟁 당시 독립군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자 미합중국 초대 대통령
- 나다니엘 그린 – 워싱턴의 친구이자 오른팔. 미 독립 전쟁 당시 게릴라 부대를 훈련시키고 직접 전선에 나갔으며 그의 활약상을 각색한 영화가 멜 깁슨 주연의 '패트리어트-늪속의 여우'다. 또한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인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3에서 이 인물을 모티브로 한 '나다니엘 블랙'이란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 율리시스 S. 그랜트 - 남북전쟁 당시 미합중국 육군 장군. 리 장군을 물리치고 전쟁을 북군의 승리로 이끌었다.
- 로버트 E. 리 -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 육군 장군. 남군 총사령관으로 활약한 사람이다. 미국 역사 전후 위대한 장군 한명으로 꼽히는 인물.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미합중국 대통령.
- 조지 S. 패튼 - 육군. 그 유명한 패튼 장군. "이제 제군은 전쟁이 끝나 고향에 들어가면 한가지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0년 뒤에 난롯가에서 손자를 무릎에 앉히고 손자가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2차 대전 때 뭐 했어요?'라고 물어보면 헛기침이나 하고 "응, 할아버지는 루이지애나에서 똥이나 펐단다."라고 대답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 대신 제군은 손자를 당당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해주어라. '아가, 이 할애비는 위대한 3군과 조지 패튼이라는 빌어먹을 개새끼와 함께 용감하게 진군했단다!"[24] 라는 연설 로 대단히 유명하다.
- 필립 커니(Philip Kearny) – 육군.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활약.
-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 육군 기병중령. 리틀 빅혼 전투의 바로 그 인물이다.
- 피에르 G.T. 보우리가드(Pierre G.T. Beauregard) -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 육군 장군
- 더글러스 맥아더 - 육군 원수.
- 오디 머피(Audie Murphy) - 육군. 제2차 세계대전에서 크게 활약하여 2년 동안에 7계급이나 승진했다. 이등병으로 참전해 6대의 전차를 파괴하고 240명의 독일군을 사살(부상을 입히거나 항복시킨 병사는 제외하고)해 리얼 콜 오브 듀티를 찍은 걸로 유명. 나중에는 영화배우로 성공했다.
- 윌리엄 딘(William Dean) – 육군. 6.25 전쟁에 사단장으로 참전. 전황이 급박해지자 직접 M9 바주카를 들고 북한군의 T-34를 격파하기도 했다. 이후 후퇴 중 포로로 잡혔으나 포로교환으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단 하나의 기밀도 발설하지 않았다.
- 김영옥(Young-Oak Kim)
- 존 매케인 – 미 해군 조종사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고초를 겪었고, 나중에는 미국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집안 자체가 미국 해군 집안으로, 아버지 존 매케인 2세는 그가 포로가 되었을 때 현역 해군대장이었으며, 북베트남이 당시 소령이던 그를 붙잡은 뒤 제독의 아들을 잡았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기도 했다.
- 존 케리(John Kerry) – 베트남 전쟁에 해군 강상경비정대(Brown Water Navy) 장교로 참전, 최종 계급 중위. 2004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2013년 현재 미국 국무장관.
- H. 노먼 슈워츠코프(H. Norman Schwarzkopf) – 육군 대장. 걸프전쟁에서 다국적군의 사령관을 맡았다. 베트남 전쟁의 재판을 우려하던 언론과 군사전문가들의 예상을 속시원히 깨고 60만 이라크군을 순식간에 털어버렸다.
국가보훈처에서 2019년 1월의 한국전 영웅으로 선정되었다.
채명신 장군과 친구였다고 한다. 고지전이 슬슬 시작되던 무렵 채명신이 몸 담고 있던 제7보병사단 칠성부대 옆에 미 7사단 31연대가 이전왔는데, 그때 31연대 1대대 작전참모가 바로 김영옥 대령(당시 대위)이었던 것.[25] 명장은 명장을 알아본다는 말이 실제인 건지, 이 둘은 이때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죽이 잘 맞았다고 한다. 보통 김영옥 대령이 채명신 장군이 있던 칠성부대 쪽으로 와서 맥주를 즐겼다고 한다.[26][27] 이 둘의 인연은 이후 꽤나 큰 활약을 하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수도방위사령부 관련으로 UN사와 마찰을 빚자[28] 한국 측 특사로 채명신 장군이, 미국 측 특사로 김영옥 대령이 다시 만나게 된 것. 쉽진 않았지만 '1공수 및 2개 보병대대 원대복귀, 다만 그 2개의 보병대대는 수방사로 행정 배속[29] '의 형태로 결국 잘 마무리 되었다.
[1] 2005년 02월 04일,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의 리틀 도쿄에서 프랑스 최고 영예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프랑스 총영사에게서 전달받은 뒤의 모습. 맨 왼쪽에 있는 사람이 김영옥과 죽마고우이자 한국계 피가 섞인, 아시아계 미국인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딴 새미 리, 그리고 김영옥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미국 내에서 유명한 동성애자이자 일본계 배우인 조지 타케이.[2] 저서 맨 뒤 연표에 생일이 나오는데도 한국 인터넷상에선 그 어디에도 생일이 기재되지 않았었다. 위키피디아도 없었지만 현재는 한국, 미국 위키피디아에도 적혀 있다.[3] 실 예로 본토 상병이 일본어로 군인답게 행동하라고 지시하자 하와이 후임들이 하와이 슬랭을 쓰며 대들고 린치하는 하극상이 종종 일어났다고 한다.[4] 하와이 도박장 속어다. 뜻은 '''올인''', 한마디로 '''박살날 각오로 덤빈다'''는 뜻. 현재 442보병연대의 모토가 되었다.[5] 전상장. 일정 수준 이상의 적 공격에 의한 부상을 입거나 전사한 미군 장병에게 수여하는 훈장이다.[6] 그러나 회고록에는 이 돌격이 그닥 성공적이진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보병들이 찌른 것은 나무 울타리여서 찰과상 때문에 다친 보병들이 대부분이라 한다. 진짜 기관총 진지를 침묵시킨 것은 뒤에 서술한 김영옥 소위 자신이 까넣은 수류탄이라 한다.[7] 본인 스스로 "밤에 오히려 경계가 심하니까 '''경계가 심하지 않은 아침에 가면 되잖아?'''"라고 했다. 비범하다(...). 군복무 시절 당직근무를 해 본 위키러라면 새벽녘에 잠을 이겨내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 것이다(...). 실제로 경계가 가장 느슨해지는 시간이 아침 직전의 새벽녘이다. 해뜨기 직전이라 긴장도 풀리고, 달이 지고 해가 뜨기 직전이라 매우 깜깜하다. 때문에 침투작전도 주로 이 시간대에 시도한다.[8] 자서전에 서술된 바에 따르면 당시에 서로의 방어선에 있던 독일군, 미군 모두 야간에 집중해서 경계를 서고 낮에는 밤을 새서 그런지 곯아떨어지곤 했다고 한다. 김영옥은 이를 노리고 평소에 자기를 잘 따른 병사들 중 한명을 데리고 '''지뢰밭을 기어서''' 독일군 참호로 들어갔다. 김영옥에게 붙잡혀온 독일 육군은 김영옥과 같이 간 병사가 자기 입에 총을 집어넣을 때까지 누가 오는 줄도 모르고 자고 있었다고 한다.[9] 다만 이를 무조건적으로 상부가 엉망이었다고만 볼 수만도 없는 게, 연합군은 이미 얼마 전 마켓 가든 작전이라는 대뻘짓을 해버려 안 그래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제대로 된 항만 시설을 가진 항구를 수복하지 못해 반쯤 까먹은 공격 텐션을 완전히 날려먹는 대삽질을 저지른다. 그 이후로도 어찌저찌 남은 공세 진행력을 모아 또 공세를 펼치다 휘르트겐 숲 전투라는 또 다른 소모전에 휘말려 이후로는 아예 공세 실행력이 바닥나 역으로 방어자인 독일로부터 공세를 받는 지경에 이르고. 쉽게 말해 서방연합군은 1944년 후반기로 들어가면서 공세에 대한 전략적 평가에 0점에 준할 정도의 짠 점수를 받을 것이 기정사실화되어가는 상황이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무리수를 두다가 발생한 삽질 가운데 하나가 바로 김영옥 대령이 이때 겪은 참극이라는 것이다. [10] 북한에서 탈출한 의사, 교수, 교사 등등 상위계층이었다.[11] 미 7사단 31연대는 이전 장진호 전투에서 동편 방면을 방어하다가 중공군에게 포위당하여 전멸에 가까운 대피해를 입었고 철수과정에서 부대가 와해되었으며 연대장을 포함한 대다수 전사자들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데다 부상자들은 트럭에 방치된 상태로 중공군에게 수백 명씩 사살당하기까지 했다. 역시 중공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나 부대편제를 보존하면서 몇 배의 중공군을 사살하고 철수한 해병 1사단과 비교될 수 밖에 없어 이후 미 해병대가 미 육군 부대를 멸시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31연대의 참혹한 패주에 대해서는 로이 애플맨이 1987년 ‘장진호 동쪽(East of Chosin)’에서 다루었으며 2013년 우리나라에서 번역 출간되었다1500명 묻은 31연대 전투단 장진호전투의 5일[12] 국방부 정훈서적으로 있는 영웅 김영옥에선 행군하다 대낮에 전폭기의 폭격을 맞아 치명상을 입은 것으로 묘사했다. 이후 미 육군 항공대가 무조건 김영옥은 살리라며 한국엔 김영옥을 수술할 기반이 없으니 오사카까지 헬기로(...) 수송시킨다.[13] 이 포병대대는 미 육군에서도 사격실력이 가장 형편없기로 유명한 대대였는데 이상하게도 이 날에는 사격이 정확했다. '''그게 아군이었던 게 문제지만'''(...). 추후 원인분석단계에서 이 포병대에게 정보를 준 정찰기는 포판(반사판 같은 물건이다) 남쪽에 1대대 지휘소가 있는 것을 봤지만 후술했듯, 너무 북쪽에 차려진 것으로 판단하여 포판을 옮겨서 아군으로 위장된 적의 지휘소라고 보고했고, 실제 보고 위치도 추후 확인된 결과 실제 위치보다 훨씬 북쪽으로 착각했다고 한다. 만일 원인분석 말마따나 사격단계에서 훨씬 북쪽을 노리고 쏘았다고 했을 때 '''제대로 쐈더라면 안 다쳤을텐데 역시 궤멸적인 실력'''(...). 그리고 확실히 죽여 버리겠다면서 VT신관을 쓴 것이 결정타이다. [14] 만약 이 북진이 없는 상태에서 휴전되었다면 서울은 아마 '''예루살렘'''과 비슷한 운명이 되었을 것이고, 부산은 '''한국의 텔 아비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전까지의 전선 모양은 서울만 돌출된 형태에서 감싸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즉, 서울과 그 주변을 제외하면 전체적인 전선이 서울보다 남쪽에 있었다.[15] 실제로 그는 중령 때 이미 장성 코스를 전부 밟았다. 실전경험이 있는 '''대대장''', 주요 사령부의 '''작전장교''', '''보병학교 교관''' 중 하나라도 역임하지 못하면 장성을 달 수 없었다. 오인 사격으로 인한 부상이 없었다면 6.25 때 중령으로 진급했을 것이며, 이 시점엔 대령도 달았을 실적이었다. 그 놈의 멍청한 아군 포병대의 궤멸적 실력이 발목을 잡았다. 아닌 게 아니라, 이때 발목 부상을 입어 평생 고통스러워하셨다. 육체적으로도, 경력적으로도 제대로 발목이 잡힌 셈.[16] 멜 휴스턴 준장(당시 계급).[17] 당시 멜 휴스턴 작전참모는 입이 매우 험하기로 소문났는데 김영옥 중령이 군사고문단으로 한국에 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김영옥 중령의 사무실에 전화해 '''"야 이 미친놈아, 니가 있을 곳은 군사고문단이 아니고 길 건너에 있는 군단사령부 작전부서야 이 미친X아!!"'''(...)라며 날뛰었다고...[18] 브리핑 차트 하나가 잘못되었다. 김영옥 중령의 자료 요구량이 많아 군사고문단에서 잘못 주었다고(...). [19] 실제로 당시 군사고문단 소장인 얜시 소장에게 "김 중령은 비밀리에 특수임무가 있어 특사로 나에게 직접 지시를 받았으며, 김 중령이 필요할 경우 군사고문단 사무실을 떠날 수 있도록 하라" 라고 한다.[20] 국군 내에 무기와 탄약이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작성해야 했다고 한다. 이를 위해 군사고문단 차원에서 지원받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21] 육군의 방공포병사령부로 이어지다가 공군으로 전환된 뒤, 대공미사일 전력이 주가 됨에 따라 공군방공유도탄사령부 명칭이 변경되었다.[22] 이는 대한민국 육군에 최초로 도입된 미사일이며 훗날 육군은 미사일의 국산화를 꾀하고 미사일을 따로 담당할 부대가 필요함을 느껴 80년대 중반에 유도탄사령부를 창설하게 된다. 이래저래 국군의 현대화에 이바지한 셈[23] 나이키/호크 미사일은 육군 방공포병사령부가 공군으로 전환된 이후에도 계속 사용되다, 2000년도 중반부터 교체가 시작되어 현재는 패트리어트 미사일과 천궁 대공미사일로 전면 교체가 완료되었다.[24] 영문: Then there's one thing you men will be able to say when this war is over and you get back home. Thirty years from now when you're sitting by your fireside with your grandson on your knee and he asks, 'What did you do in the great World War Two?' You won't have to cough and say, 'Well, your granddaddy shoveled shit in Louisiana.' No sir, you can look him straight in the eye and say 'Son, your granddaddy rode with the great Third Army and a son-of-a-goddamned-bitch named George Patton!'출처[25] 그 당시 사실상 1대대장은 김영옥이었는데, 전임 1대대장이 워낙 막장이어서(작전 시작 직후에 전선에서 30km 후방에 있는 샤워실에서 샤워한다던가...) 연대장이 그 대대장을 자르고 얼굴마담으로 새 대대장을 세운 뒤 김영옥 대령이 실질적으로 대대장 역할을 맡게 한 것이다. 그때 김영옥 대령이 대위였는데, 당시 미군 규정이 대위는 대대장을 맡을 수 없다는 규정이 있어 이런 요상한 지휘계통을 갖게 되었다고.[26] 당시 미군 배급품 중에 맥주가 있었다고 한다.[27] 의외로 고대부터 전투현장에 식수를 보급하는 것이 현대에 페트병 생수가 나오기전까지 상당히 어려웠는데 냉장시설의 미비와 페트병의 부재로 이송중에 물이 썩어버려서 식수로는 사용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대체품이 고대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는 술이 식수 역할을 대신했었다.[28] 같은 명칭의 부대를 2개 만들어(정확히는 수방사로 파견 후 동명의 대대를 재창설하여) 이중지원을 받고 있었다(...). 더해서 1공수(제1공수특전여단 '독수리' 부대)를 사실상 청와대로 상설 파견시킨 것은 덤...[29] 실질적으로는 수방사의 지휘계통에 배속되게 한 것이다. 군을 동원해 정권을 잡은 박 대통령의 의중(2개 보병대대를 자신을 방어하는 방패로 쓰려고 했었다는 것이 이런 기묘한 행각의 원인이었다.)을 잘 파악한 타협안이라는 평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