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사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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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보'''
''National Treasures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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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명칭'''
한글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한자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영어
Bodhisattva in pensive position
'''분류번호'''
'''국보 78호 '''
'''소재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분류'''
유물 / 불교조각 / 금속조 / 불상
'''시설'''
1구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제작시기'''
?[1], 6세기 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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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보'''
''National Treasures Of Korea''
[image]
'''공식명칭'''
한글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한자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영어
Bodhisattva in pensive position
'''분류번호'''
'''국보 83호 '''
'''소재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분류'''
유물 / 불교조각 / 금속조 / 불상
'''시설'''
1구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제작시기'''
신라(?)[2], 7세기 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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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보'''
''National Treasures Of Korea''
[image]
'''공식명칭'''
한글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한자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영어
Bodhisattva in pensive position
'''분류번호'''
'''국보 118호 '''
'''소재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로55길 60-16, 리움미술관
'''분류'''
유물 / 불교조각 / 금속조 / 불상
'''시설'''
1구
'''지정연도'''
1963년 3월 30일
'''제작시기'''
고구려, 6세기 후반
半跏思惟像
1. 소개
1.1. 미륵보살?
2. 어디서 만들어졌는가?
3.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
4. 흑역사
5. 이외의 다른 반가사유상 유물 목록
6. 여담


1. 소개



반가부좌를 틀고(半跏) 현세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위한 상념에 잠긴(思惟) 미륵보살을 표현한 모든 형태의 불교공예품을 가리키는 유물명이다. 여기서 반가(半跏)는 본디 땅바닥에 앉아서 하는 반가부좌(半跏趺坐)의 줄임말이지만, 여기서는 의자에 앉아 오른발을 왼 무릎에 얹은 자세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것만 해도 국보 78·83·118호[3], 보물 331·643호 등 여러 점이 있지만, 본 항목에서는 그 중 가장 유명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국보 78호와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영어로는 Bodhisattva in pensive position 또는 그냥 간단히 Pensive Bodhisattva라고도 한다. 둘 다 삼국이 한창 피 터지게 싸우던 시기인 6~7세기 만들어진 유물로,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고대 불교 문화재 중 하나로 손꼽힌다.

국보 78·83호 두 불상국립중앙박물관의 여느 문화재와 달리, 단독으로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그만큼 귀한 취급을 받는다는 이야기이다.[4] 국립중앙박물관의 불교 문화재를 대표하는 슈퍼스타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보러 온다.'는 마니아 그룹까지 생겼다. 박물관 큐레이터가 유물을 설명해주는 '큐레이터와의 대화' 시간에 관람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유물이다. 모 회사원은 "반가사유상을 보고 있으면 영혼이 치유되는 느낌을 받는다."라고 말했으니,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본래 2개 모두 한 번에 보여줄 수도 있지만, 문화재의 특성과 관리로 인해 보통 6개월에 한 번씩 로테이션을 도는 것처럼, 한 불상이 6개월 동안 전시되는 동안 나머지 하나는 수장고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문화재연구소로 옮겨져 연구대상이 되거나, 또는 보존실로 모셔져 특수 약품 처리를 받으러 간다. 그러나 2020년 8월 25일부터 2021년 2월 14일까지 국보 78호 반가사유상과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을 각각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내 1층 특별전시실과 3층 불교조각실에 나누어 전시 중이니 두 유물을 모두 관람하고자 한다면 이 기간 내에 방문하도록 하자. 2021년 2월 3일,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주요 업무계획을 발표하며 2층 기증관 입구에 440m2 전용공간을 만들어 두 반가사유상을 '''동시에''' 전시하겠다고 밝혔다.
해외 문화 교류로 외국 여행을 다녀오기도 한다. 총 9번 해외여행을 다녀왔는데, 특히 2013년 10월 말에는 세계 최대급 박물관으로 꼽히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신라 특별전 전시를 위해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이 반출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당시 호암 금동관 파손 사태를 문제삼아 문화재청장이 반출을 불허하고 레플리카를 미국으로 보내려다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측의 수차례에 걸친 요청으로 문광부가 직접 개입하는 소동 끝에 반출이 이루어진 것은 공공연한 비밀.
한 번 해외로 나갈 때는 문화재 보험에 들게 되는데,[5] 이때 보험금이 1990년대 말에 이미 약 300억 원, 2013년 미국 반출 때는 약 500억 원으로 책정되었다. 하지만 말이 그렇지, 통상 보험평가액은 실거래 금액의 10분의 1 정도로 산정함을 고려한다면 이 반가사유상 2점은 수천억 원을 호가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말이 수천억이지, 그 역사성, 작품성 등을 따진다면 이미 돈으로 가치를 논할 수가 없다.

1.1. 미륵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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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상이 표현하는 대상이 정말로 미륵보살인지 논란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석가모니가 출가하기 전 고뇌하는 모습, 혹은 출가를 막 결심한 모습을 나타낸 표현이라고 하여 태자(太子)사유상이라고 하기도 한다. 사실 반가사유상이 미륵보살이라는 설의 발원지인 일본에는 관음보살 반가사유상도 있다. 현재는 미륵보살이라는 설이 가장 대중적이지만 일부 권위 있는 학자들은 반대 의견을 냈다.
불상 전파에는 크게 두 가지 경로가 있다. 동남아와 중국을 거쳐 한반도, 일본에 전해지는 경로와 티베트 위쪽의 실크로드(사막)를 거쳐 대륙으로 전파되는 경로다. 전파 경로에 따라 인도 내의 발상지와 종파가 다른데, 여기서 불상의 모습이 여럿으로 갈린다. 가령, 유명한 간다라 지역 불상은 헬레니즘 영향을 많이 받아 그리스인 석상의 특징을 많이 가졌다면, 마투라 지역이나 굽타 왕조의 불상에서는 인도인 석상의 영향을 받은 모습이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여러 불상과 미륵 반가상에서도 이러한 모습이 나타난다.
옷이나 관, 그리고 손가락의 특징에 따라 불상의 성격을 추측하는데, 문제는 반가사유상이 취하는 자세가 석가모니불이 보리수에서 번뇌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으로도 볼 수 있고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이 사유하는 모습으로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중국의 경우 일부 반가사유상은 불상에 태자사유상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 전자가 맞다고 공인되며, 일부 반가사유상은 혼란기인 위진남북조 시대에 미륵 신앙 유행과 함께 등장하였으므로 미륵불일 개연성이 상당히 높다. 문제는 한반도에서 등장한 반가사유상은 어떤 불교 교리와 함께 등장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에 여러 학설이 분분하지만 공통으로 삼국 시대에 등장한 왕즉불 사상인 호국 불교에서 출현했다고 본다. 전쟁이 이어지던 삼국시대에서 미래에 부처가 혼란한 세상을 구원한다는 미륵불 신앙이 유행한 것이다. 왕실에서도 이를 수용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신라는 왕족들의 이름을 석가모니 가족들의 이름과 동일하게 지었다. 왕자의 이름을, 불교에서 성왕으로 묘사되는 전륜성왕에서 따오기도 했다.
특히 신라는 화랑을 미륵불의 화신으로 여겼으며 화랑들이 전투를 했던 영역에서 거대 반가사유상이 발견된다. 경북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보물 제997호)은 하반신만 남아 있지만, 복원 추정 높이 2.5m로 세계에서 가장 큰 반가사유상이며, 옷주름 형태가 83호 금동반가사유상과 매우 흡사하다. 삼국의 반가사유상이 미륵불을 의미하는지 확실히 결론 내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남아 있는 기록과 유행하던 신앙, 혼란한 시대상을 통해 추측건대 한반도에서 기술적, 심미적으로 완성된 형태의 반가사유상이 많이 발견된 것은 미륵불을 통해 평화로운 세상이 오기를 염원했던 민중의 바람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6]

2. 어디서 만들어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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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반가사유상에 얽힌 또 하나의 의문은 바로 고향이 어디인지 확실히 모른다는 것이다. 두 보물은 직접 발굴해 소장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도굴했던 것을 박물관이 거액의 돈을 주고 사 온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학계에서는 78호에 대해서는 합의점을 찾지 못한 반면 83호만큼은 신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높게 보지만, 아직까지 100% 확신할 수 있는 증거가 없다.
83호에 대해, 일제강점기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 입수 기록에는 "국보 83호는 1912년 당시 이왕가(李王家) 박물관일본인 골동품상에게 2600원(지금 돈으로 약 26억 원)을 주고 구입했다."라고 적혔다.[7] 78호는 일본인 골동품상이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 총독에게 바쳤던 것을 총독이 조선총독부 박물관(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이 출토된 지역이 어디인지 매우 논란이 많았다. 옛 백제 지역(충청도 지역)의 사람들과 옛 신라 지역(경상도 지역)의 사람들은 서로 자기네 것이라고 다툰다.[8]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불상을 처음 발굴한 인간들이 일본의 도굴꾼들이기 때문이다. 도굴꾼들의 우두머리인 가지야마 요시히데는 이 불상이 어디서 출토됐는지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1912년에 83호 불상을 사들인 이왕가 박물관의 일본인 관장은 "경주에서 출토된 것으로 짐작된다." 말했다고 한다.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널리 알린 세키노 타다시는 1933년 발표한 논문에서 경주시 남쪽 오릉 부근 폐사지에서 출토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학자인 이네다 하루미즈는 1915년 발표한 논문에서 1910년 충청도 벽촌에서 발굴되었다고 주장하는 등, 불상의 출토지에 대한 진술이 엇갈린다.[9]
83호는 신라에서 제작했을 가능성이 매우 유력하다. 83호의 신라 제작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몇 가지 있는데, 우선 일본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이 신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일본 고류지의 창건자가 신라 계통 도래인 성씨인 하타씨를 쓰는 하타노미야츠코 카와카츠(秦造 何勝)이며, 《일본서기》에 623년 신라에서 온 귀한 불상을 이 절에 모셨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또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의 재질이 한반도에서만 자라는 적송 소나무인데, 적송 소나무는 특히 경상도 지역에 많이 자란다. 정밀 분석 결과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의 소나무가 경북 봉화군에서 자라는 소나무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사학계에서는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이 신라에서 제작되어 일본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을 매우 높게 보고, 일본 사학계도 이를 인정한다.
따라서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과와 매우 유사한 형태를 가진 83호 금동반가사유상 역시 신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데 크게 무게가 실리고 있다. 또한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의 반원 세 개를 이어붙인 모양을 한 보관('''삼산관''', 三山冠)은 신라에서 제작된 반가사유상에서만 고유하게 발견되는 형태이다. 또 1966년 경북 봉화 북지리에서 발견된 석조반가사유상(보물 997호)과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의 옷주름이 매우 유사한 형태를 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2018년 4월 강원도 영월에 있는 신라 절터인 흥녕선원지에서 신라에서 제작된 금동반가사유상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석조가 아닌 금동으로 제작된 반가사유상 중에서는 그 출처가 명확하게 밝혀진 유일한 금동반가사유상이다. 흥녕선원지 금동반가사유상은 신라 반가사유상 고유의 특징인 '삼산관'을 쓰고, 전반적으로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을 축소한 형태라 83호의 신라 제작설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유력한 근거가 되었다.
한편 78호는 신라 제작설이 조금 더 많은 편이긴 하지만 백제와 고구려 제작설도 상당히 심도 있게 거론되고 있다. 신라 제작설의 경우에는 신라에서 불교, 특히 미륵사상이 가장 유행했다는 사실과 이로 인해 삼국 모두 반가사유상을 제작하긴 했지만 신라에서 특히 유행해 많이 제작되었다는 점이 주 근거로 활용된다. 한편 백제 제작설의 경우 이 불상의 양식이 83호처럼 전형적인 신라 양식이 아닌 백제 양식에 가깝다는 점이 논거로 활용되며 고구려 제작설 역시 이 상이 전형적인 북위의 양식을 따르는데 이 양식이 고구려에서 널리 유행했다는 점을 주 논거로 활용한다.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신라특별전에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이 전시되었다는 점은 83호의 신라 제작설을 정론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엄밀한 고증으로 유명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측이 국립중앙박물관과 문체부에 수차례 요청한 끝에 83호의 전시가 이루어졌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10]
한편 백제 제작설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특유의 미소와 형태가 백제 양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서산마애삼존불로 상징되는 '백제의 미소'와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미소의 양식은 거리가 있다는 반론이 있다. 오히려 신라 불상의 미소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백제의 미소'보다는 차라리 '신라의 미소'와 유사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보물 997호)에서 볼 수 있듯이 백제 양식보다는 신라 양식과 거의 똑같다.
사실 자료 부족으로 많은 부분을 추론에 의존하고 있는 고대사 연구의 특성상 이 정도 근거면 충분히 교과서에 정론으로 실리고도 남는다. 하지만 지역 학계의 이기주의로 인해 83호 금동반가사유상에 대한 논쟁의 결론이 나지 않고 있는 점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국립중앙박물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금동반가사유상이 신라에서 제작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라거나 유력하다고 서술한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나온 일부 문서에는 83호가 신라에서 제작되었다고 명시적으로 서술한다.
현재 중고교 교과서에는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 아예 교과서에 싣지 않은 경우도 많다.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문화 유산인 금동반가사유상이 우리나라 교과서에서조차 제대로 소개되지 못한다는 점은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이다.
공무원 수험서에는 확실한 제작지를 알 수 없다고 서술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전국역사교사모임'이 저술한 『처음 읽는 일본사』에서는 일본 고류지 반가사유상의 소나무가 경북 봉화군의 것이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이 백제의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공영방송인 EBS의 대표 국사 강사 최태성도 금동반가사유상이 백제에서 제작되었다고 가르쳤다. 다만 최태성은 이후의 강의에서는 삼국시대에 제작되었다고 정정하여 가르친다.
참고로 83호에 있어서 백제 제작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주요 근거는 남북국시대가 아닌 삼국시대에 백제나 고구려가 아닌 신라가 이렇게 세련된 걸작품을 만들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굉장히 오류가 많다. 당장 삼국통일 이전 신라의 금속공예작품을 봐도 백제에 밀리지 않는 솜씨를 자랑한다. 신라 금관 세트나 쌍의 감은사지 사리함[11] 등이 그 증거이다. 신라가 국가 발전과 중앙집권화가 가장 늦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 반가상들의 제작년대로 추정하는 6세기 말~7세기 중엽에는 이들의 문화가 여전히 고구려, 백제보다 뒤떨어졌다고 볼 근거가 전혀 없다.

3.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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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이 한국의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우측이 일본의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이다.
일본 국보인 고류지(廣隆寺(광륭사), 코류지)의 목조반가사유상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여겨진다. 1960년, 한 여대생이 우연히 작품의 손가락을 부러뜨리는 사고를 내는 바람에 연구자들이 복원하려고 그 재질을 연구해보니 적송 소나무였다. 이 적송 소나무는 일본에서는 거의 자라지 않고 한반도에서만 자라는데, 특히 경상북도 지역에 많다. 조사 결과 이 목조반가사유상에 쓰인 적송의 원산지가 경북 봉화군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목조 반가사유상은 재질, 양식, 형태 모두 삼국시대의 목조 불상과 비슷해, 신라에서 제작되어 일본으로 넘어간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신의 물방울에서도 거론된 바 있었다.
불상 전체가 소나무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일부 부분에는 일본에서만 자라는 녹나무를 쓴 것으로 보아 한반도에서 전해진 재료를 가지고 일본에서 만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쇼토쿠 태자가 신라에서 받아온 귀한 불상을 모셔 절을 지을 것을 명하고, 이 명을 받는 사람이 신라계로 추정되는 도래인인 하타씨(秦氏) 일족의 하타노미야츠코 카와카츠(秦造 河勝)였기 때문에 신라에서 온 불상이라는 설이 더 강력하다.[12]
그러나 메이지 시대, 약 100여 년 전쯤 고친 얼굴 부분이 달라졌다. 미묘한 차이라고 볼 수 있지만, 결국 그 미묘함이 한 작품의 미학적 가치를 만드는 것이므로, 이는 일본의 이 상을 평할 때 반드시 심각하게 고려해보아야 할 점이다. 또한, 한국의 반가사유상과 매우 비슷하지만 다른 부분도 관찰된다.
덧붙여 우리나라에는 언론 기사 등을 통해 종종 일본의 국보 1호라고 소개되는데, 정확히는 '미술품 조각 부문의 제1호'다. 여기에서 말하는 1호라는 것은 일본의 유무형 문화재를 관리하는 문화청에서 매긴 내부 관리용 지정번호일 뿐이며 1호라고 해서 특별히 중요하다거나 대표성, 상징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데 유달리 숫자에 민감해서 국보 XX호의 숫자를 마치 문화재의 중요도로 착각하고 있는 오늘날 한국에서는, 한반도에서 전래된 것으로 유력시되는 목조 불상이 일본의 국보, 그것도 1호라고 하면 이보다 더 좋은 민족 자긍심 고취 소재는 없을 것이다. 국내 언론이나 정보 매체 등에서 일본의 목조반가사유상 얘기를 할 때 '국보 1호'라는 것을 유달리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13]
우리나라의 문화재 관리 방법은 일제강점기를 거친 탓에 일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국보 1호 숭례문과 같이 번호를 매기는 것 또한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국보의 명칭을 대외적으로 표시할 때 번호를 붙이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내부 관리를 위한 번호라서 국보 명칭에 XX호 등의 숫자를 붙일 이유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청 직원을 제외한 보통의 일본인들 중 국보가 몇 호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 내부 관리를 위한 지정 번호를 국보의 명칭과 함께 필히 표시하고 있어서 국민들에게 '국보 1호=우리나라에서 제일 소중한 문화재'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있는 실정이다.
고류지에는 이 반가사유상 외에 국보로 지정된 반가사유상이 하나 더 있다. 구분을 위해서 위의 반가사유상은 보관미륵, 뒤의 반가사유상은 우는 미륵 혹은 보계(상투)가 높이 틀어져 있어 보관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보계 미륵이라고 부른다.
반가사유상을 비롯한 고류지의 여러 국보급 불상들은 절 내부의 전시관격인 '신레이호덴'에 전시하고 있으며 교토를 찾는 관광객들이 손쉽게 찾아갈 수 있다. 절 자체는 입장료가 없지만 신레이호덴은 800엔 입장료를 받는다.
덧붙여 역시 한일간 역사 논쟁 유물 중 하나인 칠지도는 '미술품 고고(考古)자료 부문의 제15호'다.

4. 흑역사


아사가와 하쿠교의 논문을 보면,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이 처음 서울로 올라왔을 때 불상 표면에 두껍게 호분이 발라졌고 그 위에 면상을 으로 그렸는데, 꼬불꼬불한 수염에 처진 눈꼬리, 빨갛게 칠한 입술로, 그야말로 더럽혀진 흰 벽과 같은 모습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이왕가박물관 관장 스에마츠 구마히코는 불상을 더운 물로 닦아내고 젖은 거적으로 싸서 겨우 원래 모습을 찾아냈다고 한다. 이쯤 되면 불상 능욕.
다만 불상에 호분을 바르고 그 위에 먹과 물감으로 이목구비를 그리는 것은 불상을 오래도록 보존하는 한 가지 보존기법이다. 허나 위에 쓰여 있듯이 '더럽혀진 흰 벽과 같은 모습'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지저분하게 수염 등 이목구비를 그렸다고 하므로, 보존에 대해서 잘 모르는 자들이 정말 막 해버린 듯하다.

5. 이외의 다른 반가사유상 유물 목록



6. 여담


  • KBS 1TV의 교양 프로그램 천상의 컬렉션 4회에서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이 대표 문화재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 얼굴 부분에다 담배를 합성한 짤방이 유행한 적이 있다. 부처님마저도 답답해서 담배를 꺼내야 할 정도로 답이 없는 상황에서 그 심경을 묘사할 때 쓰였다.
  • 경북대학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보물 제997호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은, 양식 면에서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매우 흡사하다. 국보 제83호를 확대해서 돌로 만들었다면 딱 이 석조반가상처럼 되었을 것이다. 1966년 발견된 이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은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의 신라제작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 석조반가상은 상반신과 발이 인위적으로 파괴되고, 현재 하반신과 연꽃 모양 발 받침대만이 남았다. 그런데 이 하반신만 해도 높이가 160 cm라 상반신까지 있었으면 말 그대로 심히 크고 아름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북대 박물관 제7전시실에서 항시 전시 중이니 대구에 거주하고 있는 반가사유상 덕후라면 일부러라도 가서 꼭 볼 것을 추천한다. 실물로 보면 그 웅장함과 섬세함에 입을 다물 수 없을 것이다.
  • 굽시니스트본격 시사인 만화에서 반기문을 풍자할 때, 시사인 455호 '반총장어의 생태'편에서 반가사유상으로 패러디하기도 했다.
  • 한 아티스트가 사탕을 먹고있는 '반가감유상(半跏甘惟像)'로 패러디했다. #
  • 2017년 1월 7일, 일본 교토(京都)시의 한 절에 있는 청동 반가사유상이 1000여년 전 한반도에서 제작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일본 연구진의 연구 결과가 나왔다고 NHK가 보도했다. #
  •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2013년 11월 4일부터 2014년 2월 23일까지 진행한 신라시대 유물전[14]에 몸소 참석하시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문화재청이 훼손 우려를 이유로 반출에 난색을 표했던 일이 있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뉴욕으로 갈 수 있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도 이 반가사유상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해 전시회 알림 포스터의 표지모델(?)로 등장시켰을 정도.
  • 고대에 제작된 한국과 일본의 금동반가사유상(金銅半跏思惟像)은 재질에 뚜렷한 차이가 있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2018년 1월 31일. 연합뉴스에 의하면, 국립중앙박물관오사카대학을 비롯한 일본 연구기관과 함께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진행한 반가사유상 과학 조사 연구의 결과를 담은 보고서 '한일 금동반가사유상'에서 한국과 일본에 있는 금동반가사유상 43점의 성분 분석 결과를 공개했다. 한국 반가사유상은 구리·주석 합금이나 구리·주석·납 합금, 구리·납 합금이 많고, 순동제는 단 한 점도 없다고 분석됐다. 반면, 일본에서 만들어진 금동반가사유상은 구리만 넣은 순동제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인해 소재지는 일본이지만, 불상을 만든 나라에 대해서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었던 간쇼인(觀松院) 반가사유상과 나치(那智) 경총(經塚·경전을 묻은 무덤) 반가사유상의 성분이 한국 불상과 유사해 한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확인됐다. #
  • 2016년 5월에는 한일국교 정상화 50주년을 계기로 한국의 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주구사 목조반가사유상을 공동 전시하는 특별전을 국립중앙박물관과 도쿄국립박물관에서 각각 열었다. 뉴스 영상 두 불상 모두 한일 쌍둥이 반가사유상에 밀리는 각국의 2인자 반가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1] 이 반가상은 고구려, 백제, 신라 제작설이 모두 존재하므로 가장 논란이 많다.[2] 78호와 다르게 이 반가상은 신라 제작설이 학계의 정설이다. 설명은 하단 참조. 참고로 이 상은 고구려 제작설은 '''아예 없다.'''[3] 11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소유자는 삼성전자 회장인 이건희. 이건 고구려의 불상으로 공인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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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두 작품 모두 위대한 걸작이지만 굳이 두 불상의 우열을 논하자면 83호가 평가가 조금 높은 편이다. 일단 화려함의 정도는 78호가 앞서지만 옷 주름이나 손가락 등의 세밀한 표현기법과 사실성, 입체성의 기준에 있어 83호가 더 훌륭하다고 평가받으며 도무지 국적을 종잡을 수 없는 78호와 달리 83호는 신라로 의견이 모아진 상태라 연구에도 용이하다. 또한 일본 고류사의 목조반가상과의 유사성 등을 토대로 삼국시대한일관계 연구에 있어서도 칠지도, 목화자단기국 등의 문화재와 더불어 가장 의미 있게 논의되는 유물이기도 하다. 또한 사이즈 역시 10 cm 가량 83호가 더 크기도 하고 무게는 3배 가량이나 더 많이 나간다. 당장 한국사 교과서의 표지나 내용에 수록된 사진에서도 78호보다 출현 빈도도 훨씬 높고 대중적 인지도 역시 더 높다. 83호가 더 수법이 뛰어나기 때문에 학자들은 78호가 6세기 후반, 83호는 그보다 반세기 더 늦은 7세기 초반 즈음에 만들어졌다고 추정한다. 해외 박물관에서도 83호의 전시 요청이 훨씬 많고 실제로 83호가 훨씬 많이 출국하기도 했다. 요즘은 문화재 보호 등의 이유로 거의 뜸해졌지만. 참고로 문화재 보험 가격은 78호가 약 300억, 83호가 약 400억 정도로 측정되었다.[5] 이 정도 국보급 유물이 해외에 나갈 때는 보통 빌려 가는 국가 정부에서 직접 보험금 지급 보증을 서는 경우가 많다.[6] 출처: 2015년 한림대 사학과 고고미술사학회 학술집에서 내용 요약(여러 논문을 참고해 만든 것으로 모든 참고문헌을 다 열거할 수 없어 학술집 이름을 대표로 남깁니다. 강우방과 황수영 그리고 국립박물관 서적들을 주로 이용했습니다)[7] 당시 쌀 한 가마를 살 때 가격이 1원이다. 당시 2600원이면 쌀 2600가마를 살 수 있는 돈이다.[8] 국립경주박물관 관장을 지낸 강우방 박사는 78호 사유상에 대해서 문화 전파경로와 고구려에 전해진 북위 불교미술 양식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고구려 불상으로 판단했지만, 대부분의 학자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9] 실제로 두 불상 모두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모의고사에서 특정 지역을 연결하면 틀린 답안으로 취급되며, 삼국시대라고 뭉뚱그린 경우에만 정답으로 인정된다.[10] 참고로 당시 83호의 지나친 해외반출을 우려한 문화재청은 메트로폴리탄에 78호를 대신 대여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는데 메트로폴리탄 측에선 신라특별전에 백제의 유물일지도 모르는 78호를 어떻게 전시하겠냐며 반문했다는 일화가 있다.[11] 비록 이것은 삼국통일 직후 작품이지만 고구려 백제의 멸망 직후에 만들어졌기에 그들의 기술과 인력이 통일신라 사회로 녹아들기 전이다.[12]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하타씨의 시조인 유즈키노키미(弓月君)는 진시황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신찬성씨록과 일본서기에 백제에서 귀화했다는 기록이 나오므로 백제계 도래인으로 보기도 한다. 진시황의 후예라는 이야기는 자칭으로 추정된다.[13] 그러나 현지에 가보면 고류지도 뜻밖에 이 국보 1호라는 걸 강려크하게 강조하고 있다. 역시 마케팅에서 1호는 국가와 민족을 막론하고 매력적이다.[14] 이 전시회의 부제가 'The Kingdom of Gold', 즉 '황금의 왕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