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구결번/스포츠
1. 개요
프로 스포츠계에서의 영구결번은 팀에 크게 공헌을 한 선수를 기리거나 애도와 추모의 의미로 그 선수의 등번호를 다른 선수에게 부여하지 않고 팀 내에서 영구히 사용하지 않는 관습, 또는 그 번호를 말한다.
프로 스포츠 최초의 영구결번은 1935년 미식축구 팀 뉴욕 자이언츠의 레이 플래허티의 1번이며 그 후 4년 뒤 뉴욕 양키스의 야구 스타 루 게릭의 4번이 영구결번이 되었다.
사실 이 아이디어는 유명 선수가 은퇴한 이후 저지 판매 수익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상업적인 의미로 시작한 제도였음에도 불구하고,[3] 프랜차이즈 스타라는 상징성의 의미가[4] 덧붙여지면서 현재는 거의 모든 스포츠에 걸쳐 행해지며, 초기 취지를 넘어선 명예로운 대우가 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일본 야구의 경우에는 등번호 자체에도 의미를 두는 현상이 있다는 점. 그래서 일본은 영구결번보다는 번호 세습이 많다. 요미우리의 18번 세습이라든가 등등.[5] 주니치의 20번 세습[6] 이는 일본 야구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 야구에서도 간간히 눈에 띄는 현상이다. 예를 들자면 팬들 사이에서 '좌완 에이스의 등번호'로 인식되는 롯데 자이언츠의 28번이나 어느 구단을 막론하고 '유격수의 등번호'로 인식되는 7번 등. 전자는 90년대 좌완 에이스 주형광에서 2000년대 좌완 에이스 장원준으로 이어진 사례이고, 후자는 김재박 이후 이종범, 박진만, 김하성 등 수많은 유격수들이 그의 플레이에 대한 동경으로 7번을 선택해왔다. 다만 일본처럼 엄격하게 따지진 않는 편이라 롯데의 28번은 장원준이 군 복무로 자리를 비운 2012년~2013년에는 1차 지명을 받은 신인 우완 투수 김원중이 빌려 쓰거나, 장원준 이적후 1년간 좌완 신예 김유영이 달았다가, 2016시즌 우완 고원준, 트레이드 대상이자 역시 우완인 노경은을 거쳐 현재는 노경은과 등번호를 맞바꾼 정대현에게 넘어가있고. 7번의 경우도 이종범의 은퇴와 영구결번을 기점으로 유격수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은 많이 약해진 편. 다만 한국과 일본의 번호 세습이 다른 것은 일본은 번호 자체로 의미하는 포지션이나 에이스 넘버(축구의 10번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고[7] 내려온 전통 한국에서는 선배가 사용한 번호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 프로야구의 첫 영구결번은 1986년도에 주전경쟁에서 밀려 인생을 비관하여 한강에 투신자살한 OB 베어스의 유망주 김영신 선수로서, 당시 OB 베어스는 선수 관리에 책임을 통감하고 김영신의 비극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그의 등번호 54번을 영구결번하게 되었다. 그 뒤로는 그 팀에 큰 공헌을 한 선수들의 번호가 영구결번이 되었다. OB 베어스의 윤동균의 10번이 두 번째 영구결번이었으나 OB 베어스 항명파동의 영향으로 인해 해제되었고, 세 번째 영구결번은 해태 타이거즈의 선동열의 18번이다.
축구는 야구에 비해 영구결번 문화가 옅다. 등번호가 포지션과 팀내 입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 따라서 동 포지션 내의 유명 선수들은 같은 등번호인 경우가 많고, 같은 클럽의 레전드이지만 활약한 시기가 다른 여러 선수가 같은 등번호를 달았던 경우도 쉽게 찾을 수 있다.[8] 더해서 팀내 입지가 낮았던 유망주 시절에는 높은 등번호를 달다가 주전급으로 성장하면 낮은 등번호를 다는 것은 당연한 수준이다. 이렇게 같은 등번호의 선수가 넘쳐나고 등번호의 변경도 비교적 잦은 축구의 특성상 영구결번이 많지 않을 수 밖에 없다. 이적이 활발해서 프랜차이즈 스타가 적다는 점 또한 적은 영구결번의 원인 중 하나. 물론 하술할 목록처럼 영구결번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정 번호가 갖는 의미가 약한 이탈리아의 경우 영구결번이 비교적 많은 편.
축구는 영구결번이 적은 대신 번호가 세습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1번~11번은 사실상 주전급이어야 달 수 있는 번호고 그 중 7번과 10번은 에이스에게만 주어지는 번호이기 때문에 굳이 세습을 신경쓰지 않아도 높은 수준의 기량을 갖춘 선수들이 번호를 이어받게 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7번 계보나 레알 마드리드 CF의 7번 계보처럼 팀의 주전급 선수를 넘어 월드클래스급인 선수들로 번호가 계속 이어지면 특별히 더 관심을 받는다.[9]
전세계 공통으로, 축구 클럽은 12번을 영구결번으로 정해 놓는 경우가 꽤 있다. 이는 과거에 12번을 달고 뛴 선수가 큰 공헌을 해서 그런 게 아니라(물론 그럴 경우도 있을 수 있긴 하지만) '우리 팀의 12번째 선수는 바로 팬 여러분들입니다.'라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함이다. 서포터즈들을 12번째 선수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10] 단, 아래 하단의 목록들을 보면 알겠지만 보통 레전드가 없는 '''신생팀에서 언론 보도용, 혹은 상징적인 의미'''로 결번처리하는 경우가 대부분. 특히나 국내 프로축구단들의 경우 그렇다. 국내 프로축구단 중에서 최초의 12번 영구결번은 1998년 부천 SK이다. 수원 FC의 영구결번은 특이하게도 2가지인데 1번은 수원 시민, 12번은 수원 FC 서포터 리얼크루를 위한 결번이라고 하며, 그 밖에도 인천 유나이티드와 FC 안양도 12번을 팬들에게 헌정하는 번호로 지정했다.
한국프로농구의 경우, 첫 영구결번은 기아자동차/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의 센터 김유택의 14번이다. 2000년 은퇴와 동시에 영구결번되었다. 안타깝게도 모비스 구단이 연고이전 이후 기아자동차의 역사를 적극적으로 지워버림에 따라서 크게 기념되지는 못 하고 있다. 여자프로농구의 경우, 첫 영구결번은 안산 신한은행 에스버드의 전주원의 0번이다. 2011년 은퇴와 동시에 영구결번되었다.
이에 준하는 개념으로 임시결번이 있는데, 팀을 떠난 선수 공적을 위해 일시적으로 다른 선수에게 주지 않는 것을 뜻한다. 이 경우 원 소속팀으로 돌아오면 돌려주거나, 기한이 끝나면 새 주인을 찾아간다.
다만 모든 종목에서 영구결번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배구는 매 랠리 때마다 선수의 포지션 위치가 서버가 위치한 후위 오른쪽 부터 시계 방향으로 전위 오른쪽 까지 지정되어 있으며, 서브권을 가져올 때마다 이 위치가 한 칸씩 회전한다. 서브를 넣는 순간에는 코트 안에 있는 6명의 선수가 자신의 포지션에 맞게 서 있어야 되며 이 순서가 바뀌게 서 있는 경우 '''포지션 폴트'''가 된다. 그 외에도 후위에 위치한 세 명은 어택 라인 안쪽 공간을 밟고 떠서 공격할 수 없는 규정도 있다. 이 때문에 심판과 기록석에서는 매 랠리 때마다 선수의 등번호를 가지고 위치를 계속 확인하고 있는데, 만약 번호가 제각각이면 이 작업에 애로사항이 꽃피기에 번호를 1번부터 20번까지로 제한하므로 영구결번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2016년 3월 3일 안산 OK저축은행 러시앤캐시 배구단에서 시몬의 등번호 13번을, 또 2017년 10월 18일 화성 IBK기업은행 알토스 배구단에서 김사니의 등번호 9번을 영구결번을 했지만 이는 구단의 임의 조치일 뿐이다.
매우 당연하지만, 국제룰에는 번호 선택이 매우 자유로운 야구나 아이스하키를 제외하면 영구결번 그런 거 없다. 특히 수신호와 선수 콜때문에 번호 자체에 제한을 두는 스포츠는 영구결번을 하려면 선수 자리를 비워야 되는 방법밖에 없는데 국가대항전이 주인 국제룰 경기에서 그런걸 할 수 있을리가...[11] 위 배구에 영구결번이 없는 것도 V-리그가 유일하게 국제룰 배번 기준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 2010년대 이후 국제대회에서 21번 이후의 번호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이지는 않다.
아이스하키의 경우 안양 한라의 심의식이 영구결번된 것이 최초다. 2006년 은퇴와 동시에 영구결번되었다.
현실성으로 유명한 축구 게임 풋볼 매니저에서도 영구결번이 구현되어 있다. 실제로 그 구단에서 영구결번인 번호들로는 선수들의 등번호를 배정할 수 없고 플레이 도중 선수가 은퇴할 때 특정 조건이 충족되면 영구결번으로 지정할 수 있다. 근데 이 조건이 굉장히 빡빡하다. 일단 구단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여겨지고 있어야 하며 구단 소속으로 수백 경기를 뛰었어야 하고 그 중 긴 기간을 같은 번호를 단 채로 지냈어야 한다. 물론 현실적으로 영구결번으로 취급되려면 이 정도 활약은 해줬어야 하는 것이 맞다.
아래는 프로 스포츠에서 영구결번 및 임시결번된 번호와 해당 선수의 목록이다.
2. 한국내
2.1. 농구
2.1.1. 남자농구
부산 kt 소닉붐[12] ,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13] , 안양 KGC인삼공사[14] , 창원 LG 세이커스[15] 의 경우 아직 구단 영구결번이 없다.
2.1.1.1. 임시결번
2.1.2. 여자농구
2.2. 배구
개요에서 언급했듯이 배구는 완전한 영구결번이 불가능하므로, 이는 구단의 임의조치일 뿐이다.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의 등번호 10번은 김연경의 번호로 그녀가 해외에서 뛰다 복귀할 때까지 임시결번으로 비워놨었다가 20/21시즌에 복귀 후 다시 달 수 있게 해줬다.[27] 이 번호는 김연경의 은퇴 후 위의 김사니와 이효희처럼 흥국생명의 영구결번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2.3. 아이스하키
2.4. KBO 리그
한국 프로 야구 첫 번째, 두 번째 영구결번은 모두 OB가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김영신, 두 번째는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윤동균'''.[30] 세 번째는 선동열이다. 기사
대체로 일본보다는 영구결번이 약간 후하고, 미국에 비해 영구결번이 굉장히 엄격한 편이다. 일본에서는 영결보다는 번호 세습을 선호해서 그렇고, 아직 리그 차원의 명예의 전당이 없는 KBO 특성상 구단 영구결번이 사실상 명예의 전당을 대신하는 역할을 하고 있어서 미국에 비해 기준이 상당히 높다.
키움 히어로즈[31] , NC 다이노스[32] , kt wiz의 경우 아직 구단 역사가 짧은 관계로 영구결번이 없다.
2.4.1. OB 베어스 / 두산 베어스
은퇴식은 1997년에 있었으나 막상 영구결번은 2002년이 돼서야 진행되었다. 다만 1997~2002년 사이에 등번호 21번을 단 선수는 전혀 없었다.
KBO 리그 최초의 영구결번 선수이자 추모의 이유로 영결된 유일한 케이스다.
2.4.2. 롯데 자이언츠
최동원은 현역 시절 화려한 성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구단과의 갈등으로 인해 은퇴 당시 영결되지 못했었다. 이후 2011년 최동원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영결되지 않자 여론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결국 구단에서 그의 등번호 11번을 영구결번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사실 롯데의 경우 국내 프로야구 팀들 가운데 영구결번에 있어서 가장 짠 구단이라고 볼 수 있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창단한 구단중 같은 역사를 함께한 타 구단에 비해 영구결번 수도 가장 적고, 쌍방울 레이더스/현대 유니콘스 역사를 공식적으로 승계하지 않은 비교적 짧은 역사의 SK 와이번스와 영구결번에서 같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임시결번까지 포함하면 키움 히어로즈 보다도 적은 영구결번 수를 보유하고 있으며[33] , 신생팀인 NC다이노스와 KT위즈 다음으로 롯데가 영구결번이 적은 팀이 된다.
박정태[34] , 윤학길, 김응국, 염종석, 주형광, 등 롯데팬들을 열광시킨 무수히 많은 프랜차이즈 스타가 나왔지만, 이들이 모두 은퇴할때 까지 구단에서는 영구결번 관련 가능성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고, 지금껏 롯데팬들이 아쉬워하는 대목중에 하나로 남겨져 왔다. 최동원이 세상을 떠나고서야 여론을 의식해 영구결번으로 지정해준 것만 봐도 롯데가 얼마나 영구결번에 관해 박한지 알수있는 부분...[35] 향후 유력한 영구결번 후보로는 이대호와 손아섭 정도가 있다.
롯데가 영구결번에 이정도로 박한 이유는 옆나라 형제팀과 어느정도 연관이 있다. 롯데 자이언츠와 같은 모기업을 두고 있는 치바 롯데 마린즈는 1970년 구단을 인수한 후로부터 5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지만, 영구결번이 단 한명도 없다... 팀의 레전드들이 남기고 간 상징적인 번호를 영구결번으로 지정하지 않고, 팀내 에이스 들에게 세습되는 일본프로야구의 번호 세습문화, 그리고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들이 FA가 되면 죽어도 안잡는 치바 롯데가 보여주는 구단성향의 결과로도 생각할 수 있다.[36][37] 1982년 한국프로야구 출범 이후, 같은 모기업인 한국 롯데가 롯데 자이언츠를 창단하였고, 기존 일본에 있던 치바 롯데 마린즈의 시스템과 구단 이미지를 어느정도 참고 및 아예 가지고 오면서[38] 지금까지 남아있는 롯데라는 구단의 문화 혹은 전통으로도 보는게 적절하다.
2.4.3. 삼성 라이온즈
원래 2011년에 별세한 장효조 코치가 달던 번호지만 통산 타율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양준혁이 앞서며, 지정 당시에는 2010년에 은퇴한 양준혁 선수의 번호로 영구결번 처리되었다. 양준혁 본인은 장효조 선배와 공동 영구결번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지금은 삼성 구단과의 섭섭한 감정을 어느 정도 털어놓은 상태지만 은퇴 당시에는 제대로 된 은퇴 소감도 밝히지 못하고 쓸쓸히 방출됐다. 물론 이만수의 상징성을 감안해 은퇴 이후 삼성 구단 내에서도 등번호 22번을 달았던 선수는 나오지 않았다. 22번이 공식 영구결번으로 결정된 것은 그가 은퇴한 후 6년이 지난 2003년이었다. 다만 훗날에 영구결번된 두 후배들과 달리 은퇴식과 은퇴경기, 영구결번식은 치르지 못했다.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했던 2003년에 당시 삼성 단장이던 김재하 단장이 "영구결번으로 지정한다."고 밝힌 바가 있으며, 실제 지정은 공식 은퇴 경기인 2017년 10월 3일날 이루어 졌다.[39]
2.4.4. 빙그레 이글스/한화 이글스
참고로 과거 빙그레 이글스 시절부터 야구를 본 팬이라면 이상하게 생각할수 있는 부분인데, 정민철의 전성기 시절에 달던 번호는 '''55번'''이었기 때문. 23번은 2005년부터 달기 시작했으나 정작 이 번호를 달고 제대로 활약한건 '''2007년뿐이다'''.
이후 55번은 윤규진에게 넘겨주었다가 윤규진의 군 입대로 신인 이태양이 달고 있다가 윤규진이 복귀하면서 다시 번호를 받았다가 윤규진이 은퇴하고 강재민이 55번을 이어받았다.[40] 이를 두고 팬들이 정민철을 모욕하는 구단의 처사라며 반발하기도 했으나 이후 정민철이 방송에서 밝힌 바로는 정민철 빠돌이(...)이자 초-중-고 후배인 윤규진에게 번호를 물려주게 한 것은 정민철 본인의 의사다. 자세한 이야기는 항목 참고.
빙그레 이글스/한화 이글스 구단 역사상 최초의 영구결번.
2.4.5. 해태 타이거즈/KIA 타이거즈
원래 18번은 선동열이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하자 해태 타이거즈에서 영결 처리했던 번호였으나 2001년 구단이 기아자동차에 매각된 후 해태색 지우기의 일환으로 당시 신인 최고액 계약금을 받았던 김진우에게 줘버리고 말았다. 결국 팬들의 반발로 인해 시즌 시작 전 김진우가 배번을 41번으로 교체하게 되면서 영구결번으로 남게 되었다. 정작 선동열 본인은 당시 영결에 큰 미련을 두지 않았으며, 김진우가 18번을 달고 타이거즈의 에이스로 성장하길 응원했었다고 한다. 이후 그가 KIA 타이거즈 감독으로 복귀할 때 이 번호를 재사용할지 이목이 쏠렸지만 본인은 선수 시절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을 우려해 90번을 선택했다. 결과적으로는 감독 시절 5-8-8을 기록하여 선견지명(?)이 되었다.
2.4.6. MBC 청룡 / LG 트윈스
선수로 활동하던 시기에 영결된 유일한 사례이며, KBO 리그 최초로 영구결번식을 치르기도 했다.
영결 당사자가 은퇴 후 코치로 팀에 복귀하면서 해당 번호를 다시 재사용하고 있다. 참고로 사망으로 야구 커리어가 끝난 김영신을 제외하고 현재까지 KBO 리그의 영구결번 선수 중 유일하게 KBO 우승 경험이 없다. 일본시리즈 우승을 경험해봤기에[41] 한국시리즈 우승이 없을 뿐 우승 경험 자체는 있다. [42]
추가로 영구결번 지정이 유력한 선수는 33번의 주인공 박용택이 있다. 차명석 단장은 앞으로 박용택이 개인적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대형 사건에 휘말리지 않는 한 구단 측에서도 영구결번 지정을 적극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2.4.7. SK 와이번스
KBO 리그 역사상 원클럽맨이 아닌 선수가 영결을 받게 된 세 번째 사례이다. 다만 최동원과 양준혁은 팀의 연고지에서 자란 프랜차이즈 스타이며, 본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팀을 떠났던거라, 원클럽맨들이나 다름없는 선수들이다. 반면 박경완은 인천 출신도 아니고 쌍방울 레이더스와 현대 유니콘스에서도 맹활약했기에 위 두 명과는 다르게 SK 와이번스만의 색깔이 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43]
다만 SK에서도 11년간 뛰면서 한국 시리즈 3회 우승의 주역으로 팀을 이끌었고, 개인 커리어 하이 시즌이 SK 소속이던 2004년이므로 상징적인 측면에서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한 팀의 레전드로 보기에는 살짝 애매할지 몰라도, KBO를 대표하는 포수 계보를 잇는 선수이기도 하며, 이 점도 무시 될 수 없다. 또한 그의 전 소속팀들인 쌍방울과 현대가 모두 해체 수순을 밟으면서 SK 입장에서는 별다른 논란 없이 박경완을 영결시킬 명분을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SK와 인천야구가 각각 쌍방울-현대와 복잡한 관계로 얽혀있는 것도 감안해야한다.
2021년 1월 26일자로 SK 와이번스의 매각이 공식 발표되었다. 신세계가 인수 예정으로 인해 박경완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SK 와이번스 영구결번으로 남게 되었으며, 인수 후에도 영구결번은 이어진다.
2.4.8. 임시결번
영구결번 외에도 일시적으로 번호를 비워 놓는 임시결번 제도가 존재하는데, 해외 진출로 인해 팀을 떠난 선수의 번호를 비워 놓는 것을 비롯해 여러 가지 사례가 있다.[44]
2012 시즌이 끝나고 류현진이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떠난 이후 한화 이글스에서 해당 번호를 사용하는 선수는 없다. 본인이 한화에서 은퇴하겠다는 의지가 강하고, 설령 복귀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영구결번 가능성은 높은 편이다.[45]
2020시즌이 지나고 은퇴를 선언하였다. 2021 시즌에 그의 등번호인 52번을 달고 뛰는 선수는 없다.
2020 시즌이 끝나고 양현종이 텍사스 레인저스 산하 AAA로 떠나면서 임시결번이 되었다. 만약 해외에서 노폭전드 처럼 망하지만 않는다면 복귀 후 KIA에서 은퇴할 시 영구결번 가능성이 매우 높다.
2020 시즌이 끝나고 김하성이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떠나면서 임시결번으로 남게 되었다.
이상훈은 2018 시즌을 끝으로 LG 트윈스 코치직에서 사퇴했지만 차명석 단장은 "47번을 비워놓을테니 언제든지 돌아오라"면서 그의 번호를 임시결번 처리했다. 다만 이상훈의 경우 류현진이나 김광현과는 다르게 영구결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당장 2003년 시즌 후 이상훈이 LG를 떠난 이후에 여러 선수들이 47번을 달았을 정도.[46]
2020 시즌을 끝내고 은퇴했다. 차명석 단장은 대놓고 "박용택의 영구결번식과 은퇴식은 코로나사태 이후 만원관중 앞에서 진행하겠다"고 언급했으니 사실상 영구결번 확정. 실제로 2021시즌, 33번을 다는 LG 선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2019 시즌이 끝나고 김광현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떠나자 그의 등번호였던 29번은 자연스럽게 임시결번 처리되었으며, 이후 김광현이 복귀한 뒤 SK에서 은퇴한다면 영구결번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 류중일 감독은 삼성 라이온즈의 통합 4연패를 이끈 공으로 퇴임 후 75번이 코칭스태프 최초로 임시결번 처리되었다. 선수 시절에도 삼성 라이온즈의 프랜차이즈 스타였기에 결번이 될 자격은 충분했다. 하지만 이후 그가 LG 트윈스의 감독으로 부임하고 조규제 2군 투수 코치가 그 번호를 물려받으면서 임시결번이 해제되었다.
- 김현수의 50번은 2015년 이후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이적하게 되면서 두산 베어스의 임시결번이 되었다. 하지만 이영하가 1군에 등록되었을 때 남는 번호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구단은 이영하에게 50번을 부여했고 임시결번이 해제되었다. 당연하지만 김현수가 사고를 쳤거나 두산 베어스 구단과의 사이가 틀어져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2017 시즌 후 선수단이 대거 물갈이되면서 비는 번호가 많아졌지만, 김현수가 LG 트윈스로 가버리면서 이영하가 그대로 50번을 쓰게 되었다.
- 오승환의 21번은 2013년 이후 삼성의 임시결번 상태였으나 도박 사건으로 인해 해제되었고, 2017년에 최지광이 달았다가 다음 해에 번호를 바꾸면서 다시 임시결번이 되었다. 그 이후 2019년 오승환이 복귀하면서 해제되었다.
- 2015년 NC 다이노스는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추모 차원에서 4번과 16번을 임시결번했고, 3년간 유지되었다.# 당시 모창민은 16번을 달고 있다가 3번으로 번호를 바꿨으며, 2019년부터 다시 16번으로 복귀했다.
- 강정호의 16번은 2014년 이후 강정호가 피츠버그 파이리츠로 이적하면서 넥센, 키움 히어로즈의 임시결번이었다. 음주운전 등의 전과가 밝혀진 뒤에도 유지되었으나, KBO 리그 복귀가 무산된 후 2021년 결번이 해제되었다.# 단, 2021시즌은 16번을 선택한 선수가 없어 여전히 결번으로 남게 되었다.
- 박한이의 33번 또한 그의 갑작스러운 은퇴 이후 삼성에서 아직 다는 선수가 한명도 없어, 임시결번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박한이 본인은 코치로 복귀한 이후 74번을 달고 있다.
2.5. 축구
후술할 해외 사례들처럼 유독 팬에게 헌정하는 12번 영구결번이 많다. 12번째 선수인 팬을 기리기 위해서 + 신생팀의 홍보수단으로 활용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2.5.1. 임시결번
기간을 둔 결번도 여기에 들어간다.
2.6. 한국 모터스포츠
- 엔트리 33번은 2000년 10월 21일 제주 코리아랠리에서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이기철 드라이버[56] 의 당시 출전 번호이었다. 한국 모터스포츠 사상 첫 드라이버 사망사고로 기록되었으며[57] , 그래서 공식적으로 한국자동차경주협회[58] 의 결정하에 영구결번되었다.
2.6.1. 준 영구결번
- 엔트리 14번은 2017년에 병으로 인해 세상을 떠난 서승범 드라이버가 2017년 시즌 슈퍼레이스 슈퍼 6000에서 사용하던 출전 번호였다. 2020년 시즌 슈퍼레이스에 참전하는 엑스타 레이싱팀의 노동기 선수가 당초 14번으로 참전할 예정이었으나 고인의 유족들과 서승범 레이서 기념 사업회[59] 측의 요청을 엑스타 팀에서 장고 끝에 수락해, 19번으로 교체하면서 고인의 이름이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현재 대한자동차경주협회에서 영구결번으로 지정하지 않았지만, 유족측의 요청도 있고 해서 그런지 한국에서 열리는 모터스포츠 경기에는 14번을 쓰는 드라이버가 없으니 사실상 영구결번에 가까운 셈.
3. 국외 및 국제
3.1.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 MLB 각 구단별로 수많은 영구결번이 있다. 뉴욕 양키스의 경우에는 영구결번이 22+1(42번 재키 로빈슨)개로 가장 많고[60][61] , 놀란 라이언과 프랭크 로빈슨의 경우에는 3개팀에서 영구결번이 있다.[62]
- 또한 메이저리그에는 전 구단이 영구결번으로 지정한 번호가 있는데, 그 번호의 주인공은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인 42번 재키 로빈슨. 그리고 그를 기리기 위해 그가 데뷔전을 치른 4월 15일은 메이저리그의 모든 선수들이 42번을 달고 경기를 하며, 그의 편견을 없애는데 일조한 당시 브루클린 다저스의 주장인 피 위 리즈는 통산 타율이 고작 .269인데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팀에서도 영구결번 처리되었다.[63]
- 메이저리그 최초의 영구결번 선수는 뉴욕 양키스의 4번 루 게릭이다. 이는 공식으로 기록된 스포츠 구단 중 2번째 영구결번이기도 하다.[64]
- 전구단 영구결번 선수인 재키 로빈슨을 제외하고 영구결번이 없던 마지막 구단은 마이애미 말린스였지만, 2016년 호세 페르난데스가 비극적인 보트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를 추모하며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그 외에도 동양야구에 비해 영구결번이 굉장히 후한 편이다. 놀란 라이언이나 프랭크 로빈슨처럼 유명한 선수였으면 뛰었던 2~3개 팀에서 다 영구결번이 되기도 하고, 영구결번의 기준에 원 클럽 맨이 거의 당연시되다시피 하는 한국야구에 비해 오히려 영결 선수 중 원클럽맨을 찾기가 더 힘든 지경. 해당 팀에서 고작 4~5년 뛰고 영구결번되는 사례도 흔하며 아예 선수도 아닌 감독이나 구단주를 기념해서 영구결번하기도 한다.
이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는 역사. 리그 역사가 100년이 넘다 보니 강타자도 에이스도 많아서 자연스레 숫자가 많을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선수단 로스터. 보통 등번호는 3자릿수는 자간이 좁아 모양이 안 살아 2자릿수 숫자를 선호하는데, 2군과 2군 코칭스탭까지 등번호를 공유하다 보니 선수단만 60명이 훌쩍 넘어가서 코칭스탭이나 신고선수 등은 세자릿수를 다는 경우도 흔한 동양야구에 비해 선수는 40인 로스터로 관리되며, 2군이하는 마이너리그로 이관해서 관리하다 보니 등번호 갯수에 여유가 있어서 저렇게 영구결번을 많이 줘도 2자릿수 등번호가 여유가 있다. 메이저리그 몇몇 구단들은 그들도 팀의 일원이라는 뜻에서 볼걸들에게도 배번을 주기도 하는데, 기본적으로 등번호가 남으니까 가능한 것.
셋째는 문화 차이. 일본의 경우 영구결번보다 번호세습을 좋아하는 문화 때문에 영결 자체를 잘 안 하는 편이고, KBO는 아직 리그차원의 명예의 전당이 없어서 각 팀 영구결번이 명예의 전당을 대신하는 기능도 어느 정도 하고 있어서 기준이 굉장히 높다. 실제로 KBO에서 영구결번을 받은 선수들을 보면 자살로 인해 받은 김영신을 제외하면 명예의 전당급 선수뿐이다. 반면 MLB는 각 팀별로 팀내 명전이 있고, 영구결번이 있으며, 또 리그 차원의 명전이 있다. 그래서 리그 차원의 초특급 선수들은 명예의 전당+각 팀 영구결번을 받고, 거기에 약간 못 미치는 선수들은 각 팀 영구결번+해당 팀 명전, 또 그것보다 못한 선수들은 해당 팀 명전 같은 식으로 세분화되어 있어, 지미 윈, 마이클 영처럼 성적이 그냥 그런 선수라도 오래 뛰었다는 이유로 영구결번을 주거나, 해당 팀에서 짧게 뛴 선수라도 그 짧은 기간동안 임팩트가 대단했다는 이유로 영구결번을 주는 등 동양야구보다 영구결번의 커트라인이 낮다.[66]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이유인 상업성. 모기업 돈으로 운영되는 한국프로야구 구단과는 달리 미국 구단들은 자생을 하기 때문에, 티켓 한 장, 상품 하나라도 더 팔아야 하는데, 영구결번은 좋은 사업 아이템이기도 하다. 영구결번식으로 관객을 더 끌어모을 수 있으며, 팀의 역사에 스토리를 한 줄 더 추가해 팬의 흥밋거리를 늘릴 수 있으며, 저지나 야구카드 등 관련상품을 더 많이 팔 수 있기 때문에 영구결번을 많이 해 주는 것. 영구결번으로 선수를 구단역사의 일부로 남기면 선수의 팬은 선수가 은퇴해도 해당 구단에 흥미를 잃지 않고 상품을 구매해 주는 고객으로 남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상 미국야구에서 영구결번의 기준은 '''이 선수의 이름으로 저지를 많이 팔 수 있는 인기'''에 가깝다. 약물 복용자도 영구결번을 어렵지 않게 따낼 수 있는 이유.[67]
한국프로야구는 근본적으로 모기업 돈으로 운영되는 펫스포츠이지 팬의 돈으로 운영되지 않기 때문에 크게는 영구결번같은 야구외적 스토리성, 상업성에 무심하며, 작게는 선수들 팬 서비스 태도 문제까지 차이가 나는 것. 어차피 모기업에서 수백억 원씩 운영비 쏴 주는데 몇만 원짜리 옷 몇장 더 팔자고 귀찮게 영구결번같은 이벤트를 뭣하러 늘리는가? 구장 외야에서 자전거 타던 시절에도 리그는 잘만 굴러갔다. 여튼 이런저런 이유로 메이저리그는 동양야구에 비해 영구결번이 굉장히 후한 편이다.
3.1.1. 내셔널 리그
3.1.1.1. 동부 지구
3.1.1.2. 중부 지구[68]
3.1.1.3. 서부 지구
3.1.2. 아메리칸 리그
3.1.2.1. 동부 지구
[69]
3.1.2.2. 중부 지구
3.1.2.3. 서부 지구[70]
3.2. 일본
일본은 상술된 대로 영구결번보다는 번호 세습을 선호하는 편이어서, 80년이 넘어가는 긴 리그역사에도 불구하고 영구결번이 거의 없는 편이다. 미국과 비교하면 더욱 그러한데, 등번호라는 것이 생긴 게 1929년이고 일본프로야구가 36년에 창설되었으니 적어도 등번호의 역사는 메이저리그와 거의 같은 수준이나 미국과 비교하면 그 수가 확실히 적다.
양키스나 레드삭스 같은 역사 깊은 팀은 영구결번이 십수명, 20명이 넘어가기도 하는데 가장 많은 구단인 요미우리도 6명이니 얼마나 기준이 짠지 알 수 있는 부분.[71] 대신 상술한대로 번호 세습이 일반적이다.
위대한 선배의 기운이나 정신을 물려받는다는 뜻도 있고, 팀에서 에이스나 강타자의 상징인 특정 번호를 받음으로서 그만큼 팀 내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도 있어서 선수들에게 동기부여가 되는 장점이 있다. 비슷하게는 한국에서 자릿수가 낮은 등번호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주전급은 가능하면 앞 번호를 달고싶어하고 주전급으로 자리잡을수록 낮은 자리 번호로 갈아타는데 이것과 조금 비슷한 심리. 등번호가 선수 개인의 상징이 아닌 팀의 것이고 팀에서 인정받는 선수가 팀에게서 등번호를 받는다는 점에서 팀 퍼스트 정신을 강조하는 효과가 있기도 하다. 양키스 등의 팀에서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백넘버 위에 이름을 넣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일본은 등번호로 이를 실천하는 셈. 한번 '준'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가 해제하고 물려주는 경우도 많다.
다만 역시 영구결번이 적은 만큼 마케팅적으로는 조금 아쉬운 부분도 있기도 하고, 기대를 받고 번호를 물려받은 선수가 막상 번호를 바꾼 후에는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거나, 혹은 물의를 일으켜서 해당 등번호의 이미지를 훼손할수도 있기 때문에, 여러 모로 일장일단이 있다.
또한 리그 역사가 긴 만큼 에이스도 강타자도 많았는데, 일일이 영구결번을 해주면 선수단 등번호가 부족해지게 되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어서 영구결번을 지양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현대 야구에서 선수단 규모가 늘어나며 3자릿수 등번호도 보이기 시작한 것을 생각하면 일리있는 말이기도 하다. 3자릿수는 자간이 좁아 모양이 안 살기 때문에 선수들이 선호하지 않아서 가능한 한 2자릿수 이내로 유지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 메이저리그는 2군 대신 마이너팀을 별개의 팀으로 운영하기 때문에 등번호가 모자랄 일이 없지만 한국이나 일본 프로야구는 2군도 등번호를 공유하기 때문에 선수단 규모가 커서 미국처럼 영구결번 많이 주다간 번호가 쉽게 바닥나게 된다.
3.2.1. 센트럴 리그
3.2.2. 퍼시픽 리그
3.3. 대만
3.4. 축구
3.4.1. 독일
3.4.2. 이탈리아
3.4.3. 잉글랜드
3.4.4. 프랑스
3.4.5. 일본
J리그의 경우에는 12번을 서포터즈에게 영구결번으로 헌정한 사례가 대부분이다. 예외적으로 사간 도스는 12번이 아닌 17번인데, 17번이 영구결번인 이유는 구단이 재정적으로 어려워서 선발 11명과 교체 5명에 불과한 총 16명의 인원으로 경기하던 시절 16번 다음으로 함께 싸우는 17번째 선수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특정 선수들에게 헌정한 사례들도 있다.
3.4.6. 기타
- 네덜란드
- 우크라이나
- 포르투갈
- 러시아
- 그리스
- 벨기에
- 스위스
- 브라질
- 미국
- 캐나다
- 노르웨이
- 사우디아라비아
- 중국
- 오스트리아
- 스웨덴
- 베트남
3.4.7. 스페인
스페인 프리메라 리가에서는 영구결번이 제도적으로 사실상 불가능하다. 스페인 프로축구 협회의 등번호 규정상 25인 엔트리는 1~25번의 등번호외에 다른 등번호는 달 수 없고, 25인 엔트리 외의 선수는 만 20세 이하 선수를 제외하면 등번호 배정이 사실상 불가능하며[126] 골키퍼는 무조건 1, 13, 25[127] 만 달수 있는 엄격한 규정을 적용한다.
이런식으로 영구결번이 불가능하고 등번호가 고정되니 스페인 내에서는 영구결번이 아닌 '''등번호 물림'''이 더욱 주목받는다. 애초에 축구의 등번호는 포지션과도 어느정도 연결되어 있어서 의미있는 등번호는 주로 1~11번 이내지만 팀의 레전드급 활약을 펼친 선수가 은퇴, 이적 후 그의 등번호를 누가 물려받느냐에 대해 팬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편.
등번호 물림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라면 단연 2008-09 시즌 FC 바르셀로나 10번의 주인이 '''호나우지뉴'''에서 '''리오넬 메시'''로 교체된 것, 그리고 2010-11 시즌 레알 마드리드 CF 7번의 주인이 '''라울 곤살레스'''에서 '''크리스티아노 호날두'''로 교체된 것[128] 을 꼽을 수 있다. 다만 실패사례도 많은데, 2018-19 시즌에 호날두가 레알 마드리드를 떠나자 마리아노 디아스가 7번을 이어받았으나 19경기 4골에 그치며 실망만을 안겼고, 2019-20 시즌에는 첼시 FC의 특급 윙어 에덴 아자르가 1억 유로가 넘는 이적료로 와서 7번을 이어받았지만 몸관리 실패와 잦은 부상으로 22경기 1골에 그치며 먹튀로 전락하고 말았다. 바르셀로나의 경우 바르셀로나 2000~2010년대 최고의 미드필더가 쓰던 6번을 2015-16 시즌에는 원래 22번이었던 다니 아우베스가 이어받았으나 그 뒤로는 데니스 수아레스와 장클레르 토디보가 물려받은 것이 대표적이다. 6번을 받을만한 젊은 에이스인 프렝키 더용은 아직 토디보가 남아있고 본인이 21번을 선호해서 현재 21번을 사용중.
다만, 번호 하나를 비워두고 25인이 아닌 24인 엔트리를 쓰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영구결번을 강행하던 케이스가 한 팀 있다'''. 바로 '''RCD 에스파뇰'''. 팀의 유스 출신이자 주장에 팀 레전드이자 지역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센터백 다니엘 하르케가 사용하던 '''21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려고 시도했다. 다니엘 하르케는 1983년 1월 1일 바르셀로나 지역에서 태어나 고향 팀 유스에서 시작해 레전드가 된 정통 프랜차이즈 선수로, 에스파뇰 구단뿐 아니라 바르셀로나 전 지역에서 존경받았으며 카탈루냐 더비 라이벌이자 원수 팀인 FC 바르셀로나의 선수들까지 그를 존경할 정도였다고 한다. 심지어 하르케 사후 개최된 2010년 FIFA 월드컵 '''결승전'''에서 지역 라이벌 FC 바르셀로나의 안드레스 이니에스타가 결승골을 넣은 후 상의 셔츠 안에 있는 '다니 하르케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다(Dani Jarque siempre con nosotros)'라는 메시지를 보이는 세레모니를 했을 만큼 대단한 선수였다.
이렇게 팀을 상징하던 다니엘 하르케가 2009년 프리시즌 중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구단은 스페인 리그 최초로 그의 등번호 21번을 영구결번을 지정하려 했다. 하지만 등번호 규정 때문에 스페인 축구 협회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팀은 1명을 빼고 24명만으로 스쿼드를 쓰는 방법을 사용하면서 그의 21번은 8년동안 결번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예외는 인정되지 않았고 2017년 9월부터 지역구단 유스출신 성골 마르크 로카에게 21살이 된것을 기념해주는 의미에서 21번을 주면서 현재 라리가에 영구결번은 존재하지 않는다.
3.4.8. 팬에게 헌정한 경우
말 그대로 구단 서포터즈 및 팬들을 위해 특정 번호를 영구결번으로 지정하는 것을 말하며, 이 경우 보통 '''12번'''이 영구결번이 된다.
- 독일 : (2020-21시즌 현재)
- 분데스리가 : 바이어 04 레버쿠젠, 헤르타 BSC, 1. FC 우니온 베를린, VfL 볼프스부르크를 제외한 모든 클럽
- 2. 분데스리가 :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 FC 에르츠게비르게 아우에, 포르투나 뒤셀도르프, 함부르크 SV, SC 파더보른 07, FC 장크트 파울리, FC 뷔르츠부르거 키커스를 제외한 모든 클럽
- 이탈리아
- 잉글랜드
- 프랑스
- 네덜란드
- 러시아
- 우크라이나
- 그리스
- 벨기에
- 스위스
- 브라질
- 스웨덴
3.5. 농구
- NBA에는 각 팀마다 수많은 영구결번이 있다. 각 팀별로 장기간 공헌했거나 짧지만 임팩트 있는 활약을 펼친 선수들에게 주는데 특히 원클럽맨이나 한 팀에서 오래 뛰다가 다른 팀으로 이적한 프랜차이즈 선수의 번호를 다른 선수에게 물려주지 않고 임시결번을 한 뒤에 영구결번을 시켜 준다. 그 가운데 보스턴 셀틱스는 영구결번이 너무 많아 30번대 이전에 남는 번호가 별로 없다.[129] 번외로 마이애미 히트는 전혀 상관없는 23번까지 영구결번 처리했다(...) 이 경우 팀 역사가 짧기도 하지만, 약간 대중 인기 영합의 측면이 강하다. 이후 비슷한 사례로 댈러스 매버릭스는 24번을 영구결번하기도 했다.
3.6. 아이스 하키
- NHL 역시 역시 수많은 팀이 영구결번이 있다. 웨인 그레츠키의 99번은 NHL 모든 팀에서 영구결번되었다.
3.7. 사이클
- 2011년 지로 디탈리아에서 사고로 사망한 바우터 베일란트 선수(라디오섁-트렉)의 당시 배번 108번.
지로에서의 배번은 각 팀의 경기 성적에 따라 매 해 바뀌지만 108번은 영구결번이다.
3.8. 모터스포츠
3.8.1. 포뮬러 1
2014년 일본 그랑프리에서의 사고로 혼수상태를 헤매다 2015년 7월 17일 끝내 숨을 거둔 쥘 비앙키의 당시 엔트리 넘버인 17번이 포뮬러 1 최초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이후 드라이버를 보호하기 위해 2016년부터 개발되던 헤일로 디바이스는 2018년 시즌부터 안전 규정에 따라 FIA가 주최 및 관여하는 포뮬러 클래스[130] 에 적용되어 각 팀들은 의무적으로 이것을 경주차에 장착하게 되었다.[131]
3.8.2. 포뮬러 2
2019년 8월 31일 포뮬러 2 2019 시즌 스파-프랑코샹 서킷에서 레이스 중 사고로 사망한 드라이버. 앞서가던 차가 중심을 잃고 미끄러지자 이를 피하려다 방호벽에 충돌 후 후속 차량과 측면으로 충돌하여 큰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결국 사망했다. 샤를 르클레르를 포함한 여러 포뮬러 원 드라이버와 기타 다른 모터스포츠 드라이버들이 그를 추모했으며, FIA에서는 그를 기리기 위해 포뮬러 2에 '앙투안 유베르트 상'을 새로 수여했다.
포뮬러 2의 차번은 전년도 시즌의 팀 챔피언쉽 성적 순서대로 매겨지기 때문에 매년 바뀌지만, 유베르트의 당시 차번 19번과 이와 같은 팀으로 매칭되는 18번은 영구결번이 되었다.
3.9. e스포츠
Gen.G Esports에서 김인재 선수의 이적 당시 영구결번을 약속했다. 이는 e스포츠 최초의 영구결번 사례이다. 이후 같은 Gen.G 산하 오버워치 팀 서울 다이너스티에서 류제홍의 계약 종료 소식과 더불어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그리고 토비도 계약 종료 소식과 함께 영구결번이 되었다.
4. 말말말
'''みんな胸を張ってプレーしろ。お前たちが付けている背番号は、すべて近鉄バファローズの永久欠番だ'''
'''모두들 가슴을 펴고 플레이해라. 너희들이 달고 있는 등 번호는, 모두 긴테쓰 버팔로즈의 영구결번이다.'''
자세한 것은 명언/야구 항목 참조.
5. 관련 문서
[1] 밀워키 브루어스의 경우는 창단 당시엔 아메리칸 리그 소속이었으나, 1998년 리그 확장으로 내셔널 리그로 소속을 옮겼다.[2]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경우는 창단 당시엔 내셔널 리그 소속이었으나, 2013년 아메리칸 리그로 소속을 옮겼다.[3] 특히, 재키 로빈슨의 42번 전 구단 영구결번의 경우 MLB의 인종차별에 대한 이미지 만들기로 뜬금없이 이루어졌다는 비판이 있었다. 다만, 부정적인 반향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4] 그래서 LA 레이커스 같은 팀은 영구결번에 대한 자체 규정이 꽤 까다롭다. 단, MLB에는 프랜차이즈 스타가 아닌 선수가 영구결번인 경우가 꽤 있다. 심지어는 복수 구단에서 영구결번인 경우도 있다.[5] 요미우리의 18번은 후지타 모토지-호리우치 츠네오-구와타 마스미-기사누키 히로시-스기우치 토시야로 이어진다. 그리고 2019년부터 스가노 도모유키가 스기우치의 은퇴와 우에하라 고지의 19번 재결합으로 18번을 계승하게 된다.[6] 이는 요미우리에 대한 반발 심리가 있었다. 역대로 20번을 단 주요 선수로 스기시타 시게루, 호시노 센이치, 궈위엔치(한국식 독음: 곽원치, 일본식 음독: 가쿠 겐지), 선동열 등이 있다.[7] 리틀야구보터 시작해 그 절정인 고시엔 출정때 감독이 선수에게 등번호를 부여하고 달아주는 이벤트가 프로까지 연장된 것.[8] 최근의 경우 중에는 FC 바르셀로나의 호나우지뉴와 리오넬 메시가 달았던 10번이 있다.[9] 기존에 해당 번호를 달던 선수가 팀을 떠날 경우 그 번호를 누가 이어받을 것인지 언론에서 비중있게 보도하는 등.[10] 특이하게 NFL 시애틀 시호크스의 12번도 팬들을 위해 영구결번으로 비워뒀다. 미식축구에서 12번은 보통 쿼터백(대표적으로 톰 브래디, 앤드류 럭 등)이나 와이드 리시버들이 사용하는 등번호로 인기가 있다는 걸 생각한다면 시호크스의 12번 영구결번 지정은 이례적이다.[11] 아르헨티나 축구협회에서 디에고 마라도나의 번호인 10번을 결번처리하고 싶다고 피파에 건의했으나 피파에서 거부했던 전력이 있다. 만약 허용했다면 펠레부터 해서 어지간한 축구강국 10번은 죄다 결번처리 되었을지도....[12] 후보조차 마땅치 않다. 원클럽맨이 아니거나 타 구단으로 이적한 선수를 포함해도 조성민 정도가 있지만 이상민만큼 파급력이 크지는 않아서 전망은 밝지 않다.[13] 후보로는 정영삼이 있다. 다만 팀의 모기업이 구단 운영 포기를 선언하면서 대구에서 커리어를 보냈지만 결번식은 고양에서 치른 김병철처럼 타 지역에서, 혹은 김유택과 비슷하게 모기업이 바뀌고나서야 영구결번이 되고 크게 기념되지는 않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야구의 박용택과 마찬가지로 원클럽맨이면서도 우승경력도 없는데다 국가대표경력도 없는지라 여론은 부정적이다.[14] 후보로는 양희종과 오세근 정도가 있다.[15] 후보로는 김시래 정도가 있지만 삼성으로 이적하면서 후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 한 어려울것으로 전망중이다.[16] 근데 정작 김병철은 단 한 번도 뛰어보지 않은 고양시에서 은퇴식을 가졌다. 연고이전으로 인해 빚어진 촌극.[17] 주희정이 이 등번호를 잠시 동안 썼다가 김현준 코치의 사망과 함께 이 등번호가 영구결번이 되면서 30번으로 변경.[18] KBL 최초의 영구결번이며 유일하게 영구결번자들 중 고인과 동시에 KBL 출범 전에 은퇴한 선수의 결번이기도 하다.[19] 문경은은 삼성, 전희철은 오리온의 레전드라는 인식이 강해서 영구결번에 이의를 제기하는 팬들이 많았지만, 17-18시즌 각각 감독과 코치로서 팀을 우승으로 이끈 이후로 여론이 많이 좋아졌다. 현역 시절에는 영구결번을 줄 이유가 없는데 줬다고 욕을 먹었으나 지도자로서 팬들에게 영구결번의 자격을 인정받은 매우 특이한 케이스다.[20] SK 팬들은 SK에서 정규시즌 MVP, 챔피언 결정전 MVP, 커리어 하이를 기록한 서장훈을 영구결번했으면 하는 의견이 많았으나, 본인이 저니맨이기도 하고, 영구결번에 부정적이라서 전망이 밝지 않다.[21]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시절 영구결번. 따라서 울산에서 뛴 적은 없다. 김병철과 비슷한 경우.[22] 사실 전성기는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시절이었으나, 팀과 불화를 겪으며 결국 이적하였고, 모비스로 바뀌면서 프런트가 기아 색채 지우기로 보이는 온갖 삽질을 하는 바람에 마지막 소속팀이었던 원주 DB 프로미(당시 원주 TG삼보 엑써스)에서 영구결번을 해준 케이스다.[23] 영구결번자 선수 중에서는 범죄 경력이 있다. 그것도 무면허 음주운전 뺑소니(!!!)를 포함해서 여러 번 했다. 그러나 시대상황이 90년대고, 농구계 최고의 스타플레이어라 묻힌 감이 크다. 음주 2회의 서장훈도 국내 스포츠선수 최초의 은퇴투어를 해준 것을 본다면 농구의 최고 레전드인 선수 두 명이 이러한 사고로 연루된 것을 볼때, 불명예스럽다고 봐도 무방하다. 방송에서 서장훈이 예능으로 잘나가고 농구가 인기가 없고 하니 좀 묻힌게 크다.[24] 이상민의 영구결번을 둘러싸고 KCC(현대), 삼성 사이에서 갈등이 있다. 삼성이 이상민과 서장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가 KCC의 항의에 하루만에 취소하는 일도 있었다. 이상민 본인도 KCC에서의 영구결번을 원치 않았는데 강행하는 바람에, 현재 둘의 관계는 좋지 못하며 결번식에 본인은 참여도 하지 않았다.[25] 심정지로 요절한 정재홍 선수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그의 등번호를 아무에게도 주지 않고 있다. 임시결번 지정은 2019년 10월 26일 개막전에서 배너를 공개하며 지정되었으며 20-21시즌에도 현재 30번은 결번중이다.[26] 위의 김사니와 이효희와는 달리 추모의 의미로 지정된 영구결번이다. 하지만 지정 당시 구단 측의 의도에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고유민 선수 자살 사건 항목 참조.[27] 야구 역시 선수의 해외 진출로 결번이 된 번호는 해당 선수가 본 소속팀으로 복귀할 때 까지 임시결번으로 비워두는게 관습이 되었다. 한화 이글스의 99번(류현진), SK 와이번스의 29번(김광현), 키움 히어로즈의 7번(김하성), KIA 타이거즈의 54번(양현종)이 현재 각 구단에서 임시결번 상태다.[28] 한국의 웨인 그레츠키로 불리면서 한국 최고의 아이스하키 선수로 군림한 선수이다. 은퇴 후에는 감독을 역임한적도 있으며 현재는 상무 아이스하키단 감독과 안양 한라 자체중계 해설위원이기도 하다.[29] 체코 출신 아이스하키 선수로 안양 한라에서 6년간 뛰면서 팀을 두 차례 아시아 리그 정상에 올린 선수. 한국 프로 스포츠 사상 최초의 외국인 영구결번 선수다. 선수 은퇴 후에는 안양 한라의 코치를 거쳐 감독까지 맡았다.[30] OB 베어스 항명파동으로 10번의 결번이 해제되었다고는 하나, 1993년 입단식을 한 강혁이 윤동균의 등번호였던 10번을 달 예정이었는데 이 때 해제되었을 수도 있다. 이후 최준석을 거쳐 현재는 박세혁이 달고 있다.[31] 후보로는 박병호, 서건창 정도가 있다.[32] 후보로는 나성범, 정도가 있다.[33] 넥센 히어로즈 시절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강정호의 16번은 국내복귀가 무산된 현재까지 임시결번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2020시즌이 끝나고 메이저리그 샌디에이고 파드레스로 이적한 김하성의 7번 역시 임시결번으로 지정되어 있다.[34] 하지만 2019년 음주운전 사건을 일으키며 사실상 영구결번 가능성을 셀프로 종식시켰다...[35] 다만 언급된 선수들은 혹사를 비롯한 여러 이유들로 누적 커리어가 두산을 제외한 타팀 영구결번(임시결번 제외)들에 비해 부족한 것도 있다.김응국은1500안타도 채우지 못하였고,주형광 염종석은 몸이 망가져 100승조차 채우지 못하였다.클래식 스탯의 중요성이 떨어진 2010년대에도 통산100승 미만의 선수들은 영구결번 후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데,이들이 은퇴하던 당시에는 두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아무래도 현시점 영구결번 후보인 2000안타가 코앞이고 박용택의 기록조차 깰 것이 유력한데다 은퇴 즈음에는 WAR도 60을 그냥 넘겨 역대 타자 10위권 안에서 놀 것으로 예측되는 손아섭과 KBO내에서의 성적도 이미 열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데 국대 활약,일본에서의 대활약,빅리그 플래툰 성과까지 삼위일체를 넘어 사위일체인 이대호 이 둘에겐 현저히 밀리는 감이 없잖아 있다.롯데가 영구결번에 매우 박한 것도 사실이나 저들의 성적도 원클럽맨이란 감성과 우승을 위한 혹사로 커리어를 마감했다는 눈물겨운 스토리를 배제하고 냉정히 보면 윤학길을 제외하면 전부 통산 WAR 50위권 밖인,타팀 영구결번 기준으로 봐도 누적이 매우 부족한 선수들이다.롯데 전성기 7년동안 연평균 WAR이 7이 넘고 144경기로 환산하면 9가 넘어가는 최동원에겐 두수 아래인 선수들.최동원이 마지노선이라 했을때 기준을 한참 못 넘는 것이 사실이다.저 정도면 타팀에서도 못 받는 수준.이만수 양준혁 이종범 선동열 이승엽 정민철 이병규 박경완 김광현 송진우 김용수 이상훈 박철순 장종훈 그리고 영구결번 예약인 박용택까지의 타팀 영구결번들 중 이상훈과 박철순을 제외하면 롯데 레전드 5인이 성적으로 비빌 수 있는 선수가 없다.저 선수들이 결번을 받지 못한걸 단순히 롯데의 야박함으로 치부하기엔 어폐가 있는 것이다. [36] 한평생을 치바 롯데에서만 뛰며 2000안타까지 달성한 치바의 긍지. 후쿠우라 카즈야 에게도 영구결번을 주지 않았으니 말 다했다..[37] 퍼시픽 리그에서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더불어 유이하게 영구결번이 없는 팀이다.[38] 롯데 자이언츠의 2003~2008 구단 로고는 치바 롯데 마린즈가 현재까지 사용하는 로고와 영문표기 빼고 전부 똑같으며, 마스코트 역시 그대로 가져왔다. 또한 롯데 자이언츠의 올드 유니폼이 치바롯데 올드유니폼과 거의 똑같다... [39] 공식 지정은 영구결번 지정 발표로부터 '''정확히 14년 후'''에 이루어졌다. [A] A B 영구결번 당사자가 2018년 한화 코치로 복귀하면서 코치직에서 물러난 2020년까지 해당 번호를 재사용했었다. [40] 윤규진 복귀에 따라 이태양은 22번으로 바꿨다.[B] 영구결번 당사자가 LG코치로 복귀하면서 재사용한다. [41] 그것도 아주 희귀한 우승이다. 2007년을 제외하고 주니치는 무려 '''1954년'''에 첫 우승을 한 뒤로 우승을 하지 못했기에 이전 주니치 우승 멤버를 찾기는 불가능에 가깝다.[42] 그리고 같은 팀의 사실상 영결 예정인 팀 후배가 2번째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 술 더 떠 박용택은 아예 해외 진출 사례조차 없어서 영구결번 중 커리어 우승이 하나도 없는 최초 사례가 된다. 같은 해 은퇴한 김태균은 2010년 일본시리즈를 우승해봤고, 비슷한 처지의 이대호는 아예 일본시리즈 2연패를 경험해봤다.[43] 특히 현대 시절에는 포수 최초의 20-20과 단일 시즌 40홈런, 정규 시즌 MVP 수상 등 굵직한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44] 다만 임시 결번이 반드시 영구결번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고 금방 해지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45] 이미 메이저 리그 진출 전 성적만으로도 투수 통산 swar 12위이며,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팀에게 280억의 거금을 안겨줬기에 여론도 호의적이다.[46] 다만 이 시절 이상훈과 LG 구단 간의 사이가 좋지 못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현재는 구단 측에서 47번을 일부러 비워놓을 정도로 이상훈의 존재와 상징성을 남다르게 생각하고 있고 이상훈도 LG에 대한 애정이 여전하다. 그리고 해당 선수의 은퇴 후 여러 선수들이 돌려 쓰다가 추후에 영구결번이 된 사례로는 최동원이 있었기 때문에 이상훈의 47번 역시 추후에 영구결번으로 지정될 가능성은 남아 있다.[47] 부천 SK 시절부터 내려오던 전통으로 부천 FC 1995 창단과 동시에 12번을 영구결번처리함으로써 계승.[48] 1998년 윤성효 선수가 은퇴한 후 수원 구단에서는 영구결번을 비공식적으로(?) 지정하여 이후 38번을 아무도 달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팬들도 38번을 결번으로 알고 있었으나 2008시즌 김현준 선수가 38번을 달게 되었다(...). 그래서 애초에 영구결번 같은 게 없었다는 얘기가 대세를 이루던 중 차범근 감독의 후임으로 그가 부임하게 되자 수원 구단에서는 행정에 착오가 있었다며 2011년 다시 38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였다가, 2016시즌에 유한솔이 등번호 38번을 받았다가, '''또''' 착오가 있었다며 37번으로 바꿔 달았다. [49] 원래는 1번도 수원시민을 헌정하는 영구결번이었으나 현재 박배종이 사용중이다. 원 클럽맨에 대한 예우로 취소하고 줬다.[50] 시민구단으로 출범한 취지를 살려 12번째 선수인 서포터즈와 팬들을 위해 창단과 함께 12번을 영구결번. 인천 유나이티드 12번 영구 결번[51] 창단식과 동시에 안양시민에게 헌정하는 방식으로 12번을 영구결번 처리했다.[52] 은퇴 후 18년간.[53] 은퇴 후 21년간.[54] 은퇴 후 12년간.[55] 기존 계약기간이었던 2022년까지.[56] 당시 입사 1년 5개월의 현대차 연구원이었다.[57] 그 이전에는 부상자만 있었다. 사망은 이 건이 최초이자 2019년 현재까지 유일한 사례.[58] 현 대한자동차경주협회[59] 고인의 가족, 동료, 친구들이 뜻을 모아서 설립한 단체로, 2018년부터 KARA Prize Giving 행사 때 고인의 이름을 딴 특별상이 수여된다.[60] 2016년 12월 8일 등번호 2번의 데릭 지터의 영구 결번이 확정됨에 따라 영구결번식이 있는 2017년 5월 14일 이후로 양키스에선 한자릿수 등번호를 가질수 없게 된다![61] 실제 사용 불가능한 숫자는 21개이다. 요기 베라와 빌 디키 두 명이 8번을 공유하고 있고, 재키 로빈슨의 번호 42번은 마리아노 리베라와 공유하고 있기 때문.[62] 놀란 라이언은 텍사스 레인저스와 휴스턴 애스트로스에서 34번, LA 에인절스에서는 30번이며 프랭크 로빈슨은 신시내티 레즈, 볼티모어 오리올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모두 20번이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63] 다만, 피 위 리즈는 해당 항목에서 보듯, 선수로서 아무 업적도 없는 듣보잡 선수가 아니다. 로빈슨과 리즈가 뛰던 시대는 투고타저 시대였고, 리즈 본인은 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자신의 전성기 커리어 3년을 손해봤다. 또한, 올스타 10회에 다저스 구단 통산 WAR 2위를 기록하는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유격수였다.[64] 최초는 맨 위의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NFL 뉴욕 자이언츠의 레이 플레허티다.[65] 다저스는 그전부터 영구결번되어 있었다.[66] 놀란 라이언은 텍사스에서 뛸 동안 47세의 나이로 노히트노런을 달성했고, 레지 잭슨은 뉴욕 양키스에서 월드시리즈 MVP를 따냈으며, 명예의 전당 헌액 때 양키스의 모자를 골랐다.[67] 다만 이 둘은 다른 약물 복용자들에 비해 빠르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다는 점에서 영구결번 시킨 것이고, 배리 본즈 같은 경우는 약을 하긴 했지만 그 기간(2001 ~ 2004)동안 엄청난 활약을 선보였고, 약물 이전만 봐도 명전감이라는 인식이 커서인지 샌프란시스코에서 영구결번되었다. '''결국 인기가 가장 중요하다는 말의 반증.''' 페팃이 빠르게 사과를 한 것이 도덕적이어서 영구결번을 시켜준 게 아니라, 빠르게 사죄하여 인기하락을 성공적으로 막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오티즈는 사죄도 안 했고 왜 내 몸에서 그게 검출되었는지 알 수 없다며 발뺌했다. 본즈도 마찬가지고. 그럼에도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영구결번을 한 것. 에이로드도 이대로라면 명전 입성과 영결 가능성이 크다.[68] 밀워키 브루어스의 경우는 창단 당시엔 아메리칸 리그 소속이었으나, 1998년 리그 확장으로 내셔널 리그로 소속을 옮겼다.[69] 2013시즌에는 등번호 42번인 마리아노 리베라가 은퇴하면서 전 구단 영구결번은 재키 로빈슨의 등번호 42번과 공동 영구결번이 되어 리베라는 마지막으로 등번호 42번을 단 선수였고, 등번호 2번 데릭 지터가 2014시즌에 은퇴하며 영구결번이 되면서 뉴욕 양키스는 등번호 1번부터 10번까지 사용이 불가능하다. 참고로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마지막으로 달았던 13번과 폴 오닐의 21번도 아직까지 단 선수가 없어 공식 영구결번은 아니지만 비공식 영구결번 취급한다.[70]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경우는 창단 당시엔 내셔널 리그 소속이었으나, 2013년 아메리칸 리그로 소속을 옮겼다.[71] 교진 영구결번은 딱히 기준이 짜지는 않고, 이적생 출신인 가네다 마사이치를 해준것을 보면 오히려 후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술하듯 문화적으로 영구결번을 번호세습에 비해 덜 가치있게 여기기 때문.[72] 1936년 외야수로 프로에 데뷔하여 8시즌 동안 뛰다가 장티푸스로 1947년 요절한 비운의 선수이다.[73] 호크스는 공식적인 영구결번이 없으며 실질적인 영구결번이나 다름없는 '준영구결번 취급'이라는 카테고리가 있다. 독특하게도 만화 캐릭터인 '카게우라 야스타케' 에게 90번을 준영구결번으로 부여하기도 했다. 연재가 종료되고 원작자 미즈시마 신지의 허락하에, 2016년부터 로베르트 수아레스가 번호를 사용하며 준영구결번은 사실상 해제되었다. [74] 후지이가 죽은 후 현재까지 이 번호를 단 선수가 아무도 없어 사실상 영구결번이나 마찬가지다.[75] 감독으로써 20년짜리 비밀번호를 찍던 개막장팀 호크스를 리그 우승 3회, 일본시리즈 우승 2회의 강팀으로 만든 공로를 높이 사 은퇴 후 현재까지 준영구결번 처리되고 있다. 다만 오가 은퇴 후 후임 감독으로 취임한 아키야마 코지에게 이 번호를 물려주려 했으나 아키야마가 거절하면서 무산되었다.[76] 이치로의 메이저리그 진출 이후 현재까지 오릭스에서 이 번호를 단 사람은 아무도 없다.[77] 팬들을 위해 비워 둔 번호이다.[78] 라쿠텐 구단에서 호시노 전 감독에 대한 추모와 공적을 기리기 위해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79] 정식 영구결번은 아니지만 구단 역사상 86번을 단 건 오사와밖에 없다. 사실상 오사와의 영구결번 취급.[80] 파이터즈의 現 모기업인 닛폰햄의 창업자이자 닛폰햄 파이터즈 시대의 첫 오너다. 2009년 일본 야구전당에 입성했는데 이것을 기념해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81] 은퇴 후 쭉 영구결번이었지만, 2004년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가 오릭스 블루웨이브에게 흡수합병되어 구단이 해체되면서 영구결번이 취소되었다. 오릭스 측에서 합병 후에도 1번을 영구결번으로 하는 것을 제안했으나 본인이 거절했다고.[82] 2015년 교통사고로 사망한 벨기에 국적의 유망주 주니어 말란다의 등번호였던 19번이 2019년까지 결번 처리되어있다가 2019-20시즌부터 케빈 음바부가 19번을 사용하면서 결번이 해제되었다.[83] 원래는 아르헨티나 유소년과 성인 대표팀에서도 영구결번이었으나, 피파가 허용하지 않아 취소되었다. 현재는 리오넬 메시가 이 번호를 달고 있다. 메이저급 대회인 월드컵, 남미 대륙 컵에서는 결번 없이 1번부터 23번까지를 사용하고 24번부터는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썼지만 친선 대회에서는 10번을 사용하지 않곤 했다. 대회에는 항상 달고 나가야 한다는 결정이 있은 후에는 많이 희석되어서 친선 경기에도 10번을 사용하는 일이 많지만. [84] 이탈리아 2부 소속이던 경기 당시,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말았다. 어렸을 적 부모님을 여의고 누나, 장애인 동생과 같이 살아왔는데, 이 기구한 사정을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다. 그야말로 인간승리 케이스였기 때문에 더욱 안타까운 영구결번.[85] 말디니 가문을 위한 영구결번으로, 훗날 AC밀란에서 뛰는 말디니 가문 밀라니스타는 이 번호를 쓸 수 있다.[86] 파올로 말디니의 아들 다니엘 말디니가 밀란 1군에 승선하며 드디어 그 주인공이 배출되는 듯 했으나, 본인이 당장에 3번을 달기엔 번호의 가치가 훼손될까 우려되어 거절했다고 한다.[87] 인테르에서 1960~1978년까지 뛰었던 공격형 풀백. 63-64, 64-65 2년 연속 유러피언 컵 우승에 기여했다. 이후 인테르에서만 기술 고문관, 보드진, 홍보 대사, 부회장, 회장까지 지냈다가 2006년 사망했다. 이후 영구결번.[88] 인테르의 영원한 주장, 은퇴 후 인테르의 부회장으로 임명되었다.[89] 이탈리아 역사상 A매치 최다 득점자이자 최고의 공격수이다. 왼발 슛이 폭발적이어서 천둥소리(Rombo di Tuono)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90] 영구결번이 유력한 것은 사실이나 아직 공식적으로 확정난 것은 아니다.* 물론 클럽에서는 거의 비공식적인 영구결번 취급을 받는다. 이에 대해 토티는 젊고 재능있는 선수들은 10번 셔츠를 입기를 원한다면서 클럽이 동의한다면 자신은 언제나 10번을 줄 수 있다고 밝혔다.[91] 영구결번은 아니지만 뱅상 콩파니가 달았던 4번도 임시결번에 준하는 취급을 받고 있다. 빌바오 시절 4번을 썼던 에므리크 라포르트는 여전히 14번을 유지중이고, 대표팀에서 4번을 쓰는 후벵 디아스도 맨시티 이적 후에는 3번을 쓴다. 4번을 쓴 적이 없긴 하나 네이선 아케도 맨시티 이적 후 4번을 달지 않는 등, 4번은 아직까지 비워진 상태다.[92] 카메룬 국가대표팀 출신 선수로 2003년 컨페더레이션스컵에 참가했다가 콜롬비아와의 준결승 경기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후 임대 소속이었고 완전 이적이 확실시되던 소속팀 맨체스터 시티에서 영구결번 처리.[93] 심장병으로 사망한 오스트리아의 공격수로, 그가 사망한 뒤 추모의 의미로 영구결번 처리되었다.[94]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1994년생 공격수로, 2014년 암투병 끝에 사망하였다.[95] 공식적으로 영구결번으로 지정한 것은 아니지만 졸라가 팀을 떠난 2003년 이래로 구단 차원에서 이 번호를 다른 선수가 사용하도록 하지 않고 있어 사실상 영구결번 취급을 하고 있다.[96] 위의 지안프랑코 졸라처럼 공식적으로 영구결번으로 지정한 것은 아니지만 역시 비슷한 경우로 존 테리 은퇴 후 사실상 영구결번 취급을 하고 있다.[97] 잉글랜드 청소년 대표팀 출신 유망주로 2006년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에서 데뷔했으나 2007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이후 퀸즈 파크 레인저스에서 영구결번 처리.[98] 처음에는 존중의 의미로 주전 골키퍼를 의미하는 1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으나, 2003년부터 플래허번이 생전에 사용했던 13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만 2011년 스티븐 헨더슨이 이 번호를 이어받은 이후 사이먼 이스트우드, 요하네스 에르틀이 이 번호를 사용하였다. 2018-19시즌 현재 미지정번호.[99] 2014년에 마시모 첼리노가 구단주가 된 이후, 첼리노가 불운의 숫자라고 믿는 17번을 결번시켜버렸다. 구단주가 바뀌면서 영구결번에서 풀렸으며 현재는 엘데르 코스타가 사용중.[100]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은 아니지만 레들리 킹 은퇴 이후 26번을 받은 선수는 없다. 사실상 준 영구결번.[101] 2003년생 유망주 선수이지만, 이례적으로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102] 맨체스터 시티에서도 푀의 등번호를 영구결번으로 지정했기 때문에 동일 인물이 2개팀에서 영구결번이 된 몇 안되는 축구계의 사례 중 하나가 되었다.[103] 2011년 팀의 서브 골키퍼였던 안토니 로페스가 이 번호를 이어받았다.[104] 2008년 국가대표 후배인 장 마쿤이 이 번호를 이어받았다.[105] 1995년 요코하마에 입단하여, 1999년부터 2010년까지 요코하마에서 12년간 3번을 달고 뛰다가 마쓰모토 야마가 FC로 이적한 후 2011년 8월 훈련 도중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이에 전 소속 팀인 요코하마가 그를 기려서 J리그 최초로 3번을 영구결번하기로 결정했다.[106] 군마에서는 2002년부터 2003년까지밖에 뛰지 않았지만, 팀을 군마현 리그에서 간토 지역 리그 승격으로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107] 기후의 유스 팀에서 뛰었던 선수로, 장래 프로 데뷔 가능성이 높았던 유망주였으나 2010년 원정 중 들렀던 해수욕장에서 사고로 익사하였다. 이에 팀에서 그에 대한 추모와 사고 재발 방지를 바라며 그의 요절 당시 나이이자 등번호였던 13을 1군 팀과 유소년 팀 전체의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108] 사간 도스의 팬들을 일컫는 애칭이다.[109] 사간 도스구단에서 2020시즌까지 결번시켰다.[110] 1983년부터 1998년까지 원 클럽 플레이어로 오직 피테서에서만 뛰었던 수비수 테오 보스를 기려 그의 번호 4번을 영구결번 처리하였다.[111] 헝가리 국가대표팀 출신 선수로 2004년 비토리아 SC와의 리그 경기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후 벤피카에서 영구결번 처리.[112] 1997년생. 2017년 골종양으로 사망[113] 우크라이나 국가대표팀 출신 선수로 2001년 FC 안지 마하치칼라와의 리그 경기 도중 상대 선수와의 충돌로 인해 뇌진탕을 입은 뒤 열흘 후 뇌출혈로 사망했다. 이후 CSKA 모스크바에서 추모의 뜻으로 영구결번 처리.[114] 그리스 국적의 1976년생 미드필더. 1998년 5X5 연습경기에 참여한 후 귀가하던 도중 차량 사고로 인해 사망하였다.[115] 2008년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추모를 위해 영구결번 처리되었다.[116] 1977년부터 2002년까지 원 클럽 플레이어[117]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전 골키퍼였던 그 선수가 맞다. 파우메이라스의 원 클럽 플레이어로, 12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한 구단들 중에서는 드물게 서포터즈의 의미로 두지 않은 사례.[118] 그냥 '''1번'''이 아닌 앞에 0이 붙은 '''01번'''이 영구결번이다.[119] 2017년 저메인 존스가 승계[120] 1976-1983, 213경기 193골[121] 1975~1977, 56경기 31골[122] 1989년부터 2010년까지 로센보르그에서만 원 클럽 플레이어로 뛰었던 미드필더 로아르 스트란의 번호 6번을 영구결번 처리하였다.[123] 1977년부터 1998년까지 원 클럽 플레이어로 뛰었던 공격수 마제드 압둘라를 기려 그의 번호 9번을 영구결번 처리하였다.[124] 2017년 6월 5일 훈련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한 셰이크 티오테를 추모하기 위해 영구결번 처리되었다.[125] 2006년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득점왕이었던 사넬 쿨지크의 업적을 기리고자 영구결번 처리하였다.[126] 이때문에 1군 엔트리에 포함되지 않은 유망주들이 25번 이후의 등번호를 많이 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한국인 선수의 사례만해도 29번을 달았던 김영규나 1군 계약 전까지 31번을 썼던 이강인이 대표적.[127] 25번은 1군 엔트리에 골키퍼가 2명일 경우 필드플레이어도 달 수 있다.[128] 호날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절부터 등번호 7번을 썼지만 레알로 이적한 2009-10 시즌에는 라울이 레알 마드리드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9번을 썼다.[129] 실상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더불어 NBA 에서 최대 명문팀이기에 당연히 영구결번이 많을 수 밖에 없으나, 단지 오래 활동했을뿐 큰 활약이 없었던 선수나 시즌 중 갑자기 사망한 선수들까지 애도 차원에서 지정하는 바람에 영구결번이 지나치게 많은 것도 사실이다. 라이벌인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만 해도 영구결번은 11명이 채 되지 않고 명예의 전당 들어가기가 레이커스 영구결번보다 쉽다는 말도 나온다. 레이커스는 오히려 미니애폴리스 시절 결번을 깔끔하게 무시해서 우승경력은 미니애폴리스 시절로 치면서 결번은 무시하냐고 욕을 먹기도 한다.[130] 포뮬러 1, 포뮬러 2, 포뮬러 3, 포뮬러 E.[131] 다만 FIA가 관여하지 않는 독자 규격 포뮬러 경주인 슈퍼 포뮬러 역시 안전을 위해 2019년 시즌부터 헤일로를 적용한다.[132] 오릭스 블루웨이브와의 흡수 합병으로 인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긴테쓰 버팔로즈의 시즌 최후의 시합에 앞서 선수들에게 했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