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무의 겨울
Steckrübenwinter
독일 제국에서 제1차 세계 대전 중이었던 1916년부터 1918년까지 총 세 차례의 겨울을 일컫는 말. 1차 대전 말, 당시 독일 제국의 상황이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때 독일인들이 먹었던 순무는 사실 유채의 일종인 루타바가이므로 정확한 번역은 '스웨덴순무(루타바가)의 겨울'이다.[1] 루타바가는 18세기의 순무와 양배추 교잡종이었으므로 순무라 불리는것도 아주 틀린 건 아니다.
원인은 영국이 우월한 자국 해군을 동원해 독일 해상을 봉쇄하고 다른 여러 나라가 독일 제국과의 외교를 단절했기 때문이였다. 비록 중립국이던 네덜란드가 독일과 계속 무역을 이어갔지만[2] , 네덜란드의 인구나 영토로는 아무리 교역해도 독일의 필요 물량을 충족할 수는 없었으므로 독일은 근본적으로 자급자족을 해야 했다.
전장에서 싸우는 독일 제국군 장병들, 그리고 민간인들까지 매일같이 먹여 살리려면 상당한 양의 식량 자원이 필요한데 이걸 자국 내의 물자로만 충당하기는 지극히 어려웠다. 독일이 평시에 식량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나라는 아니었지만, 전시엔 생산 활동을 할 인력들이 징집돼서 전선에 수백만 명, 군수공장에 수백만 명이 투입된 상황이니 당연히 식량과 소비재 생산량은 급감하여 파탄이 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1916년 여름부터 독일 내의 감자가 동 날 위기에 처했으며, 설상가상으로 흉작으로 인해 감자 수확량이 반으로 떨어지며 1916년 11월에는 독일산 감자의 씨가 거의 말랐다고 전해진다. 그로 인해 감자의 대용 식품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순무, 정확하게는 루타바가였다. 루타바가는 전분도 많고, 무엇보다 북극권에 가까운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겨울을 버텨낼 정도로 겨울에 강한 채소였기 때문이다.
원래 루타바가라는 식재료는 유럽에서는 빈민들의 주식 아니면 돼지에게나 먹이는 사료 작물에 불과했다. 식량만 풍부하다면 굳이 이 식재를 먹지 않았던 사람들이 유럽인들이었는데, 당시 독일 제국은 그런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독일 정부는 루타바가를 감자처럼 쪄서 먹는 것을 시작으로 온갖 요리를 창작해냈는데, 루타바카 튀김, 루타바가 샐러드, 루타바가 커틀릿, 루타바가 빵[3] 까지 만들었다. 나중에는 루타바카 즙에서 물기를 빼낸 루타바가 버터까지 만들어서 루타바가 빵에 발라먹었다고 한다. 감자처럼 전분질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요리가 가능했던 것.
물론 맛은 기존의 감자나 밀가루로 만든 것보다 별로였다고 한다. 맛도 별로였는데 제공하는 열량조차 밀빵이나 감자에 비하면 상당히 부족했다. 일반 루타바가는 같은 양의 감자 절반 좀 넘는 칼로리를 제공한다. 괜히 현대에 들어서 비만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다이어트 한다고 먹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나마 다른 식재보다 잘 자라고 재배기간도 짧아서 대량으로 양산이 가능했으니까 했던 짓.
1917년부터는 상황이 더욱 안 좋아지면서 민간인이건 군인이건 나발이건 독일인 전체가 하루 삼시세끼 루타바가로 만든 대용식을 먹는 상황에 놓인다. 겨울이 아닌데도 말이다. 이미 독일인들의 주식인 감자와 밀은 1916년 겨울에 거의 씨가 말랐기 때문에 독일인들은 1917년 봄, 여름, 가을에도 똑같이 루타바가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시기, 그래도 최소한 러시아를 제외한 프랑스나 영국 같은 협상국들은 소량의 감자나 호밀빵, 고기 통조림을 먹을 수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 전쟁 말이던 1918년 독일군 병사들의 하루 식사는 루타바가 스튜에 루타바가 빵이었다. 그나마도 전선의 배급 상황은 우선 순위가 높았던 것으로, 2선이나 민간에서는 거의 톱밥만 들어간 빵이나 루타바가 이파리 따위를 먹으며 버텨야 했다. 영양 실조로 수십만 명이 죽었으며 건강 악화로 인한 면역력 약화 등으로 다른 질병에 걸려 죽은 것까지 생각하면[4] 더 많은 피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상황은 종전 때까지 계속 되었으며[5] 이로 인해 루타바가는 서양에서 1차 대전 독일군을 상징하는 물건이 되어 버렸다.
1차대전에서 이 고충을 직접 겪었던 히틀러와 나치 수뇌부는 2차대전에선 식량 보급에 신경을 더 쓰고, 나름대로 전쟁이 잘 풀릴땐 1차대전 때보다 많이 확보한 피지배국의 주민들을 쥐어짜서 독일 군민들을 잘 먹였지만, 44년 이후로 급속도로 패망하고 외부 영토를 상실하면서 44년 말~45년 초부터는 또 식량난을 겪어야 했다. 2차대전 종전 직후에는 승전국들 역시 대부분 식량난이 심각했기에 패전국 식량 보급은 우선순위가 낮았다. 루타바가의 겨울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에도 다시 재현되었다(...).
이 두 루타바가 겨울의 안 좋은 추억 탓인지 현재까지도 독일에서 루타바가는 그다지 선호받지 못하는 채소라고 한다.
사실 1차 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은 루타바가를 이용한 대용품만 먹었던 것은 아니다. 온갖 상상치도 못할 물건들이 대용 식품(ersatz)으로 재탄생되기에 이른다. 대표적으로 치커리로 만든 대용 커피. 1차 대전으로 국교 단절이나 무역 봉쇄로 인해 커피를 수입할 수 없게 된 독일 제국은 치커리나 시금치, 그리고 초콜릿 등으로 커피를 만들었다. 전쟁 말기에는 도토리를 볶아 콜타르(...)와 설탕을 섞어서 커피를 만들기도 했는데[6] 1918년부터는 그것마저 없어서 100% 순무로 커피를 만들었다고 한다. [7]
그리고 빵은 톱밥에 극소량의 밀가루와 콩가루를 섞어 만들었으며 하얗게 만들기 위해 분필까지 넣었다(...).[8] 물론 무진장 딱딱하기도 딱딱한데다 사람이 먹지 못하는 나무 부산물이 잔뜩 들어 있는 이런 빵을 제대로 소화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외에 후추를 수입할 수 없게 되자 재로 양을 늘렸고, 기름을 얻기 위해 사람 머리카락에서 나오는 기름까지 채취했다. 그리고 1917년 가을부터는 버터조차 씨가 마르자 루타바가 전분과 오래되어서 응고된 우유, 그리고 설탕을 섞어 만들었으며[9] , 고기가 귀해지자 쌀이나 밀, 콩 등을 이용해서 고기를 만들었다. 사실상 서양 기준에서의 콩고기의 시초가 바로 이 1차 대전 당시 독일의 대용 고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18년 말부터는 달걀마저 사라져서 콩과 루타바가, 옥수수 등을 이용해서 달걀을 만들었다고 한다.
1. 개요
독일 제국에서 제1차 세계 대전 중이었던 1916년부터 1918년까지 총 세 차례의 겨울을 일컫는 말. 1차 대전 말, 당시 독일 제국의 상황이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때 독일인들이 먹었던 순무는 사실 유채의 일종인 루타바가이므로 정확한 번역은 '스웨덴순무(루타바가)의 겨울'이다.[1] 루타바가는 18세기의 순무와 양배추 교잡종이었으므로 순무라 불리는것도 아주 틀린 건 아니다.
2. 상세
원인은 영국이 우월한 자국 해군을 동원해 독일 해상을 봉쇄하고 다른 여러 나라가 독일 제국과의 외교를 단절했기 때문이였다. 비록 중립국이던 네덜란드가 독일과 계속 무역을 이어갔지만[2] , 네덜란드의 인구나 영토로는 아무리 교역해도 독일의 필요 물량을 충족할 수는 없었으므로 독일은 근본적으로 자급자족을 해야 했다.
전장에서 싸우는 독일 제국군 장병들, 그리고 민간인들까지 매일같이 먹여 살리려면 상당한 양의 식량 자원이 필요한데 이걸 자국 내의 물자로만 충당하기는 지극히 어려웠다. 독일이 평시에 식량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나라는 아니었지만, 전시엔 생산 활동을 할 인력들이 징집돼서 전선에 수백만 명, 군수공장에 수백만 명이 투입된 상황이니 당연히 식량과 소비재 생산량은 급감하여 파탄이 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1916년 여름부터 독일 내의 감자가 동 날 위기에 처했으며, 설상가상으로 흉작으로 인해 감자 수확량이 반으로 떨어지며 1916년 11월에는 독일산 감자의 씨가 거의 말랐다고 전해진다. 그로 인해 감자의 대용 식품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순무, 정확하게는 루타바가였다. 루타바가는 전분도 많고, 무엇보다 북극권에 가까운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겨울을 버텨낼 정도로 겨울에 강한 채소였기 때문이다.
원래 루타바가라는 식재료는 유럽에서는 빈민들의 주식 아니면 돼지에게나 먹이는 사료 작물에 불과했다. 식량만 풍부하다면 굳이 이 식재를 먹지 않았던 사람들이 유럽인들이었는데, 당시 독일 제국은 그런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독일 정부는 루타바가를 감자처럼 쪄서 먹는 것을 시작으로 온갖 요리를 창작해냈는데, 루타바카 튀김, 루타바가 샐러드, 루타바가 커틀릿, 루타바가 빵[3] 까지 만들었다. 나중에는 루타바카 즙에서 물기를 빼낸 루타바가 버터까지 만들어서 루타바가 빵에 발라먹었다고 한다. 감자처럼 전분질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요리가 가능했던 것.
물론 맛은 기존의 감자나 밀가루로 만든 것보다 별로였다고 한다. 맛도 별로였는데 제공하는 열량조차 밀빵이나 감자에 비하면 상당히 부족했다. 일반 루타바가는 같은 양의 감자 절반 좀 넘는 칼로리를 제공한다. 괜히 현대에 들어서 비만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다이어트 한다고 먹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나마 다른 식재보다 잘 자라고 재배기간도 짧아서 대량으로 양산이 가능했으니까 했던 짓.
1917년부터는 상황이 더욱 안 좋아지면서 민간인이건 군인이건 나발이건 독일인 전체가 하루 삼시세끼 루타바가로 만든 대용식을 먹는 상황에 놓인다. 겨울이 아닌데도 말이다. 이미 독일인들의 주식인 감자와 밀은 1916년 겨울에 거의 씨가 말랐기 때문에 독일인들은 1917년 봄, 여름, 가을에도 똑같이 루타바가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시기, 그래도 최소한 러시아를 제외한 프랑스나 영국 같은 협상국들은 소량의 감자나 호밀빵, 고기 통조림을 먹을 수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 전쟁 말이던 1918년 독일군 병사들의 하루 식사는 루타바가 스튜에 루타바가 빵이었다. 그나마도 전선의 배급 상황은 우선 순위가 높았던 것으로, 2선이나 민간에서는 거의 톱밥만 들어간 빵이나 루타바가 이파리 따위를 먹으며 버텨야 했다. 영양 실조로 수십만 명이 죽었으며 건강 악화로 인한 면역력 약화 등으로 다른 질병에 걸려 죽은 것까지 생각하면[4] 더 많은 피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상황은 종전 때까지 계속 되었으며[5] 이로 인해 루타바가는 서양에서 1차 대전 독일군을 상징하는 물건이 되어 버렸다.
1차대전에서 이 고충을 직접 겪었던 히틀러와 나치 수뇌부는 2차대전에선 식량 보급에 신경을 더 쓰고, 나름대로 전쟁이 잘 풀릴땐 1차대전 때보다 많이 확보한 피지배국의 주민들을 쥐어짜서 독일 군민들을 잘 먹였지만, 44년 이후로 급속도로 패망하고 외부 영토를 상실하면서 44년 말~45년 초부터는 또 식량난을 겪어야 했다. 2차대전 종전 직후에는 승전국들 역시 대부분 식량난이 심각했기에 패전국 식량 보급은 우선순위가 낮았다. 루타바가의 겨울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에도 다시 재현되었다(...).
이 두 루타바가 겨울의 안 좋은 추억 탓인지 현재까지도 독일에서 루타바가는 그다지 선호받지 못하는 채소라고 한다.
3. 여담
사실 1차 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은 루타바가를 이용한 대용품만 먹었던 것은 아니다. 온갖 상상치도 못할 물건들이 대용 식품(ersatz)으로 재탄생되기에 이른다. 대표적으로 치커리로 만든 대용 커피. 1차 대전으로 국교 단절이나 무역 봉쇄로 인해 커피를 수입할 수 없게 된 독일 제국은 치커리나 시금치, 그리고 초콜릿 등으로 커피를 만들었다. 전쟁 말기에는 도토리를 볶아 콜타르(...)와 설탕을 섞어서 커피를 만들기도 했는데[6] 1918년부터는 그것마저 없어서 100% 순무로 커피를 만들었다고 한다. [7]
그리고 빵은 톱밥에 극소량의 밀가루와 콩가루를 섞어 만들었으며 하얗게 만들기 위해 분필까지 넣었다(...).[8] 물론 무진장 딱딱하기도 딱딱한데다 사람이 먹지 못하는 나무 부산물이 잔뜩 들어 있는 이런 빵을 제대로 소화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외에 후추를 수입할 수 없게 되자 재로 양을 늘렸고, 기름을 얻기 위해 사람 머리카락에서 나오는 기름까지 채취했다. 그리고 1917년 가을부터는 버터조차 씨가 마르자 루타바가 전분과 오래되어서 응고된 우유, 그리고 설탕을 섞어 만들었으며[9] , 고기가 귀해지자 쌀이나 밀, 콩 등을 이용해서 고기를 만들었다. 사실상 서양 기준에서의 콩고기의 시초가 바로 이 1차 대전 당시 독일의 대용 고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18년 말부터는 달걀마저 사라져서 콩과 루타바가, 옥수수 등을 이용해서 달걀을 만들었다고 한다.
4. 같이보기
[1] 루타바가는 생긴게 순무와 닮아서 스웨덴순무라 불리기도 한다.[2] 네덜란드는 독일의 침공을 걱정하여 영국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무역을 계속했다.[3] 밀가루 반죽에 루타바가를 섞어서 구워낸 맛있는 빵이 아니고, 말린 루타바카를 갈아서 뭉친뒤 쪄낸 괴식이었다. 겉보기에는 빵처럼 보였지만 그냥 루타바가 찜인 셈. 당대에는 힌덴부르크 빵(Hindenburg-Knolle)이라고 불렀다. 물론 유래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4] 때마침 전 세계를 휩쓴 스페인 독감이 독일에서도 크게 유행하여 28만 7천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하였다.[5] 독일 군부가 결국 항복하기로 결정한 것도 미국의 참전이나 마지막 공세의 실패 때문만이 아니고, 보급이 붕괴되어 전쟁 지속이 불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으며 식량난 또한 그 중 핵심 이유였다.[6] 실제 마셔본 사람의 말에 의하면 의외로 맛이 괜찮았다고. 그러나 루타바가 커피로 다시 한 번 대체되자 맛조차 끔찍해졌다고 한다.[7] 일반적으로는 재료를 까맣게 탈 때까지 볶아서 만들었다. 순무는 몰라도 치커리의 경우 맛이 진짜 커피와 매우 흡사했다고 한다. 사실 이 치커리 커피는 원래 유럽에 커피가 들어오기 전에 마시던 음료였고, 커피 대용품으로 사용한 건 19세기 프랑스의 대륙봉쇄령 당시 나폴레옹이 커피 대용으로 삼은것이 원조다.[8] 중세시대 유럽에서 악덕 상인들이 매우 자주 저지르는 행위였다, 참고로 19세기 미국의 식품회사에서도 우유에 분필가루를 섞기도 했다.[9] 비슷한 케이스로 나치 시절 코카콜라 독일 지사가 환타를 만들 때 우유로 치즈나 버터를 만들다 남은 찌꺼기인 유장(乳漿, Buttermilk. 시큼한 맛이 난다)이라고 불리는 노란색 액체와 사과주를 빚고 남은 섬유질, 여기에 약간의 과일주스와 탄산가스를 넣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각 병마다 맛이 미묘하게 달랐다고 하며, 이걸 유래로 전후에도 환타는 콜라나 스프라이트와는 달리 다양한 맛을 제공한다. 사실 환타 자체가 대용 콜라로 탄생한 음료이며,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 설탕이 매우 귀해지자 음식에 넣을 설탕이 없어 환타를 대신 집어넣는 가정도 흔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