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바위

 

1. 개요
2.1. 개요
2.2. 교통과 등산로
2.3. 갓바위와 선본사를 둘러싼 분쟁
2.4. 갓바위의 정체 논쟁
2.5. 기타
3. 전남 목포시 갓바위
4. 서울 서초구 우면동 갓바위
5. 경기도 양주시 갓바위
6. 충북 충주시 갓바위
7. 충남 공주시 갓바위
8. 충남 보령시 갓바위


1. 개요


전국에 갓바위라는 바위나 마을이 너무나 많고, 유래전설도 대체적으로 비슷한 편이다. 하지만 경북 경산시 와촌면에 있는 '''팔공산 갓바위의 인지도가 전국구로 너무 높아서'''[1], 그나마 전라남도 목포시의 갓바위가 조금 알려졌을 뿐 나머지는 듣보잡이다.

2. 경상북도 경산시 팔공산 갓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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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산 갓바위''' 사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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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개요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갓바위로81길 176-64(대한리 산 44)에 있는 불상. 1965년에 '''보물 제431호'''로 지정되었다.[2]
팔공산 관봉 정상에 자리하여 문화재청은 정식 명칭을 '''관봉석조여래좌상(冠峰石造如來坐像)'''이라고 하였으나 일반인들은 주로 갓바위라고 부른다. 높이는 4 m, 재질은 화강암인데 관봉 정상에 넘쳐나는 화강암을 이용한 듯하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하였다. 불상 머리 위에 넓적한 바위처럼 얹은 모습이 특징적이라 갓바위라고 부른다. 통일신라 시대, 좀 더 정확히는 9세기 초반에 불상의 몸체를 만들었으나 후대에, 아마도 고려시대쯤에 갓을 따로 만들어 올렸다고 추정한다. 지금이야 이 돌 갓의 모습이 넓적한 판처럼 보이지만, 원래는 그 위에 다른 석재가 더 있어서 정말로 갓처럼 보였을 것이다. 관봉(冠峰)이라는 지명도 갓바위를 한자로 관암(冠巖)이라고 쓴 데에서 유래하였다.
불상 머리 위에 얹은 갓은 본디 팔각형이었으나, 오랜 세월에 걸쳐 지역주민들이 불을 지르거나 장난 삼아 훼손하는 바람에 지금 모양이 되었다.
경산시대구광역시가 서로 자기네 불상이라고 우기지만, 시 경계에서 100 m 떨어져 있고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산시 소재가 맞다.''' 하지만 대구나 경산이나 생활권이 같아서 거기서 거기라, 대구 측에서도 사실상 대구의 랜드마크인 것처럼 활용하고 있다. 2012년 대구광역시에서 개최된 93회 전국 체전의 선전 포스터에 대구스타디움, 83타워와 더불어 갓바위가 나왔다.

2.2. 교통과 등산로


갓바위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은데 주말, 공휴일에는 엄청나다. 특히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있는 기간에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래서 401번저상버스가 들어갔다가 한 달도 안 되어서 트레이드 됐다. 갓바위 휴게소부터 정상까지 2 km 구간을 계단으로 만들어 놨는데, '''지하철 계단을 올라가듯''' 줄을 서서 올라간다.(...)
등산로가 여러 갈래 있다. 크게는 대구 동구 능성동 중마을 관암사(冠巖寺) 쪽과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 선본사 쪽으로 나뉘는데, 관암사 쪽을 들머리로 하는 등산로가 조금 더 유명하다. 아마 401번과 803번의 배차간격 차이, 대구경산의 인구 수 및 인지도 차이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선본사 쪽 들머리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더 편하고 시간도 덜 걸린다.
관봉의 남쪽에 있는 관암사 방향을 대개 '앞갓바위'라, 북쪽에 있는 선본사 방향을 '뒷갓바위'라 부른다.[3] 관암사 쪽으로 오르면 1시간 정도[4] 걸리는 데 비해, 선본사 쪽으로 오르면 30분이면 된다.[5] 계단도 선본사 쪽 길이 잘 정비된 반면, 관암사 쪽은 급경사 구간이 많다. 그래서 겨울 내린 뒤에도 선본사 쪽은 금방 제설되어 미끄러질 걱정 없이 갓바위에 올라갈 수 있지만, 관암사 쪽은 눈이 한번 오면 며칠 동안 관암사에서 갓바위 정상까지 있는 돌계단길 등산로는 '''계단 전체가 얼어서 빙판길이 되어버린다.'''[6] 겨울에 대구 쪽으로는 올라갈 때야 조심해서 올라가면 된다지만 내려올 때에는 등산화아이젠이 필수. 아이젠이 없으면 아무리 조심하며 난간을 잡고 내려와도 '''한 손으로 난간을 잡은 채로 미끄러진다.''' 절충안으로 관암사 쪽으로 올라가서 선본사 쪽으로 내려가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관암사 등산로의 이러한 문제점은 2013년에 갓바위 등산로 정비공사를 마침으로써 사라질 줄 알았으나 현실은... 정비공사라고 했지만 돌계단은 건드리지 않은 채로 보호난간을 바꾸고 중간중간에 있는 휴식공간을 정비했을 뿐이라서 겨울철이면 여전히 빙판길이 된다. 등산로 중 일부 구간은 좁은데 확장하지도 않았고, 보호난간도 부실시공을 했는지 몇몇 곳은 잡으면 흔들거린다. 심하게 흔들거리는 난간에는 '위험'표시를 붙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난간 손잡이가 나무 재질이라 손잡이 잡을 때에는 가시를 조심하자. 잘못 잡으면 손에 가시가 박히는 수가 있다.
관암사 쪽으로 올라가려면 401번 또는 팔공2번, 팔공3번을 타면 되고, 선본사 쪽으로 올라가려면 803번을 타면 된다. 단, 팔공2번, 팔공3번 버스는 주말, 공휴일에만 운행하고 12월 초일부터 다음 해 2월 말일까지 운행하지 않으므로[7] 평일과 연말연초라면 대구에서는 401번, 경산에서는 803번을 타야 한다. (참고로 팔공3번 버스를 타면 팔공산 순환도로를 일주할 수 있다.) 803번 버스는 배차간격이 30분을 약간 넘기 때문에 운이 없으면 무료환승이 안 되었지만, 지금은 무료환승이 하차 기준 30분 이내로 바뀌었기 때문에 상관없다.
관암사 등산로 중간에 있는 관암사 대웅전 앞에서[8] 식수를 구할 수 있다. 이 물은 겨울에도 잘 안 마르는 듯하다. 선본사 등산로에서도 중간에 있는 선본사에서 식수를 구할 수 있다. 자가용이나 관광버스를 타지 않고 온 사람은 관암사 쪽으로 올라가서 선본사 쪽으로 내려가거나 반대로 하기도 한다.
선본사 쪽으로 803번을 타고 간다면 걷는 거리를 줄일 수 있다. 선본사 쪽으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주차장이 3곳 있는데, 가장 위에 있는 제3주차장에서 803번 버스 정류장까지는 700 m 정도다. 아예 제3주차장을 지나면 일반 차량은 들어가지 못하도록 차단기로 가로막지만 '''803번은 이 차단기가 설치된 지점부터 700 m를 더 올라간다.''' 거기다가 걸어가야 할 길은 당연히 '''오르막'''이다. 그래서 걷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경산 쪽 뒷갓바위로 간다면 버스를 타는 편이 유리하다.
관암사 쪽 등산로와 선본사 쪽 등산로 사이를 이어줄 대중교통이 전무해서 셔틀버스를 만들어 달라는 요구가 빗발친다. # 대구 갓바위 종점(갓바위휴게소, 관암사 방면)에서 경산 갓바위 종점(선본사)을 이동하기가 무척 어렵다. 이동하려면 갓바위휴게소에서 401번을 타고 진인동에서 내린 뒤, 길 건너편에서 팔공1번을 타고 능성동 종점까지 이동하고, 거기서 818번(능성동행)이나 하양-와촌1번(능성동행)을 타고 박사리에서 내린 뒤, 길 건너편에서 803번을 타야 한다. 버스 환승하는 횟수도 횟수지만 중간에 타야 하는 팔공1번, 818번[9], 하양-와촌1번의 배차간격이 무척 길다. 버스 기다리기가 싫다면 401번을 타고 아양교역에서 내린 뒤, 하양 가는 버스를 타고 하양에서 내려 803번을 타면 되긴 하는데 엄청 돌아가는 방법인지라... 실제로도 대구쪽에서 올라와 경산쪽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갈 방법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는 장면이 곧잘 목격된다.
게다가 위 기사에 나온 대로 셔틀버스나 노선버스를 신설한다면 그 버스는 공기수송 확정이다. 중간에 수요가 날 만한 곳이 하나도 없고, 그나마 있는 대구 갓바위 종점에서 경산 갓바위 종점까지의 수요도 대수롭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수요가 있었다면 진작에 만들었거나 버스 회사들이 시도했을 것이다.

2.3. 갓바위와 선본사를 둘러싼 분쟁


오랫동안 갓바위는 인근 주민들만 '영험한 미륵님'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초에 학술지에 보고되고, 65년에 동아일보에 보도되고 또한 보물로 지정되면서 전국구로 유명해졌다. 처음 유명해질 무렵에는 (훗날 태고종의 14대 종정이 된) 백암(柏巖) 스님[10]이 1962년 팔공산 밑에 관암사(冠岩寺)를 창건하고, 신자들이나 제자 승려들을 갓바위로 올려보내어 불공을 드리게 하였다. 그러나 갓바위가 유명해지자 1968년 선본사(禪本寺) 주지였던 도수(道秀) 스님이 대구지방법원에 소유권 확인소송을 걸었다. 소송은 대법원까지 이어져 1970년에 선본사 측이 최종승소하였다. 이후로는 선본사에서 갓바위를 관할한다.
과거에 선본사는 (역시 팔공산에 있는) 은해사(銀海寺)의 말사였지만, '''1994년 10월부터 대한불교조계종의 직영사찰이 되었다.'''[11] 막대한 이권이 걸린 갓바위 때문에, 선본사 소유권을 두고 은해사와 다른 교구 간 다툼이 잦았다. 이를 차단하고자 종단에서 직영사찰로 지정하였다.[12]
그러나 선본사에서 굴러가는 돈의 액수가 워낙에 커서 직영사찰이 된 뒤에도 분란이 일어났다. 선본사에서는 조계종단에 1994년 12월 수익을 보고하면서 1억 2천만 원이라고 하였다. 조계종단에서는 선본사에 연간 수십억 원, 많게는 1백억 원이 들어온다고 판단하였으므로 이 보고를 믿을 수가 없어서 실사단을 파견하였다. 실사단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94년 1월 17일부터 2월 8일까지 11일 동안 3억 8500만 원이 들어왔다. 선본사 측의 자체보고대로 12월 한 달 동안 겨우(?) 1억 2천만 원이 들어왔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많았다. (1995년 2월 12일 경향신문 보도내용) 비슷한 시기 다른 언론보도에 따르면, 선본사의 수익이 외부로 유출된다는 의혹이 있었다.
선본사가 직영사찰이 된 뒤로 조계종단의 주요 수입처가 되었기 때문에 그에 따른 정치적/물리적 다툼도 있었다. 1999년 조계종 총무원장 자리를 두고 법정 다툼을 벌이는 등 조계종단의 승려들이 두 파로 나뉘자, 총무원의 주요 자금줄인 선본사를 접수하려고 서로 다툼을 벌였던 것. 1999년 10월 26일 새벽에 개혁회의 승려 20여 명이 기습적으로 선본사를 점거하였다. 경찰이 양측의 충돌을 우려하여 4백여 명을 선본사 주변에 배치한 가운데, 그날 저녁 7시 20분쯤 조계종 총무원 호법부 직원들과 동화사 승려 등 60여 명이 강제로 재접수하였다. 이 와중에 개혁회의 승려 4명이 경찰에 연행되고 나머지 인원들은 자진해산하였다. 갓바위 때문에 선본사에 거금이 흘러들어오니 벌어진 일이다.

2.4. 갓바위의 정체 논쟁


학자들에게만 관심 있는 이야기지만, 갓바위 불상이 정확히 어떤 부처인지 논란이 있다. 현대에는 약사여래로 알려졌지만, 불과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미륵으로 알려졌으며, 나이든 인근 노인들은 갓바위를 '미륵님', 혹은 '갓바위 미륵님'이라고 불렀다. 그뿐 아니라 1821년에 작성된 선본사 사적기에서도 선덕여왕 7년(638)에 의현대사(義玄大師)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하여 조성한 미륵보살이라고 설명하였다.
학자들은 미륵, 아니면 아미타불이라고 추정한다. 갓바위 불상은 항마촉지인을 하였다. 본디 항마촉지인은 석가모니 불상이 취하는 수인이지만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불상에서는 아미타불이나 약사여래가 항마촉지인을 한 사례가 곳곳에 있으므로, 단지 항마촉지인만으로는 불상의 정체를 밝히기 어렵다. 아미타불이라는 주장에 따르면 갓바위는 원래 9세기 초 통일신라 시대에 아미타불로 조성됐으나, 후대 어느 시점(아마도 고려시대)에 사람들이 미륵불로 믿어 미륵이 쓴다는 천관을 뜻하는 갓을 올려놓았고, 다시 현대에 들어 약사여래불로 와전됐다고 한다. 실제로 팔공산 갓바위 돌부처님을 보면 약사여래의 지물인 약합이 없다. 예전에는 불상의 왼손에 약합이 있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조사해보니 불상의 왼손 엄지손가락이었다. 갓바위가 약사여래로 알려진 때는 광복 이후, 1960년대부터이며, 그 근거는 약합이라고 착각했던 엄지손가락밖에 없었다. 갓바위가 약사여래라 함은 민간전승도, 불상 고증도 아닌 제3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갓바위를 관할하는 선본사는 증언이나 옛 기록들을 무시하고 홈페이지에 갓바위가 극구 약사여래일 것이라고 써 놓았다. 심지어 선본사에서 발견된 선본사 사적기에서도 갓바위가 미륵보살이라고 설명하는데도, 마치 옛날부터 약사여래로 통했다는 듯이 설명하였다. 또한 과거에 약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제로는 불상의 엄지손가락임이 확실해졌는데도, 선본사 홈페이지에서는 "약합이 뚜렷하다."라고 하며 사실을 왜곡하고, 이것이 약사여래임을 지지한다고 설명한다. 선본사 홈페이지만 보면 마치 옛날부터 지역 주민들이 갓바위를 약사여래라고 생각한 줄 알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불과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미륵으로 통했다.
조선 후기부터 미륵신앙이 유행하면서 돌부처=미륵불로 인식하는 문화가 많이 퍼지자, 원래는 미륵불이 아닌데도 돌부처라는 것만으로 미륵불이라 불리는 사례들도 있고,[13] 한국의 토속 돌부처 신앙과 미륵신앙을 자신들의 교리에 꿰어맞추면서 추태를 부리는 몰지각한 자칭 민족종교 집단들과의 마찰 문제도 있어 확실히 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 마침 갓바위 불상이 처음 만들어진 9세기는 약사여래불이 많이 조성될 때이다.(참조링크), 전국의 불교 신자들에게 갓바위가 약사여래라고 유명해진 판에 이제 와서 아니라고 말하기 어렵기도 하겠고.
그러나 사찰에서 (과거에는 미륵불로 통했다는) 명백한 사실을 왜곡한단 점을 부인하긴 어렵다. 하다못해 현재 갓바위 불상이 약사여래로 통하지만, 과거에는 다르게 인식되었으며, 원래는 어떤 불상이었는지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식으로만 설명했더라도 훨씬 나았을 것이다.
2009년에 창사 46주년을 맞아 대구문화방송에서 제작, 방송한 다큐멘터리 <<팔공산 갓바위>>에서는 관암사 '''백암(柏巖) 스님이 1962년 3월부터 신도들에게 갓바위를 알리고 참배시키면서 약사여래라고 가르쳐 알렸다는''' 주장을 소개하였다. 백암 스님의 제자이자 관암자 주지인 혜공(慧空) 스님이 방송에서 설명한 바에 따르면, 백암 스님은 힘든 이 시대(1960년대)에는 약사여래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약사여래 신앙을 일으키고자, 갓바위를 약사여래라고 부르도록 신도들을 가르쳤고, 제자들을 갓바위로 보내 처음으로 갓바위 불상을 '약사여래'라고 칭하며 불공을 드리게 했다고 한다. 혜공 스님이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백암 스님도 갓바위가 원래는 지역민들에게 미륵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알았던 듯하다.
학계의 논의야 어떻든, 또한 과거의 진실이 무엇이든, 현대의 불자들은 갓바위가 약사여래라 믿으며 소원을 빌러 찾아온다. 그런데 딱 하루, 갓바위가 석가모니로 대접받는 날이 있으니 바로 4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

2.5. 기타


갓바위라고 하면 왠지 나이 든 사람들이 기도하러 오는 곳이라든지, 약간 나이가 있는 등산객들이 많이 오는 곳이라는 인상이 있지만 실제로는 20-30대 젊은 사람들이나 어린 아이들도 많이 온다. 갓바위에 올라가다 보면 커플도 생각보다 많이 보인다.
옛날에는 가뭄이 들면 마을 주민들이 갓바위에 불쏘시개를 쌓아두고 불을 질렀다고 한다. 신성한 불상이 불 때문에 그을려지게 생기면, 갓바위를 지키는 호법룡이 비를 내려 씻어줄 수밖에 없으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갓바위가 있는 팔공산 관봉 정상 일대는 온통 바위 투성이인데, 삼국시대에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산악숭배로 신성시한 곳이다. 정상 일대 바위 곳곳에 구멍이 파인 자국이 있는데, 성혈(性穴)이라 하여 옛날 바위신앙의 흔적이라고 한다. 불교 전래 이전부터 신성시하던 바위에 일부러 불상을 새긴 것이다.[14]
경북 경산시 소재이고 대구 생활권이지만, 불상의 시선이 쪽을 향한다 하여 부울경 지역에서 만만치 않게 대절버스로 이쪽을 찾아온다. 대구문화방송제작 다큐멘터리 <<팔공산 갓바위>>에 따르면, 갓바위 불상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은 동남 50도라고 한다. 동남쪽보다 15도 더 남쪽으로 치우친 방향인데, 지도상에서 선을 그어보면 간절곶이 나온다.
호사가들은 선본사 갓바위 부처님을 양(陽)으로 보고 약 6 km 떨어져 마주보는 불굴사 약사전의 약사여래입상(문화재자료 401호)을 약사여래입상을 음(陰)으로 보아 한 쌍을 이룬다고도 말한다 카더라.
현대에 들어 사람의 왕래가 많아지면서 지반에 문제가 생겼는지 석불이 다소 기울어졌다.# 이곳에 철새 신도들(수험 때만 찾아오는 신도)이 자주 찾아오는데, 지역 스님들은 "부처님, 소원 너무 쉽게 들어주시면 버릇 나빠집니다." 하고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말하기도.

3. 전남 목포시 갓바위



전남 목포시 용해동 산86-24번지에 있고 '''천연기념물 제500호'''다. 근처에는 목포해양유물전시관과 생활도자전시관, 목포자연사박물관 등 박물관 거리가 조성되었다. 파도에 의해 암석의 아랫부분이 깎여나가 풍화된 결과 형성된 타포니이다. 형상이 마치 삿갓을 쓴 사람처럼 보인다고 하여 갓바위라고 불린다.
불교와 관계 깊은 팔공산 갓바위와 달리 이 쪽은 갓 모양의 바위 2개가 있음이 특징이다. 여기에는 민간전설이 전한다. 옛날 어느 청년이 살았는데 아버지 병환 때문에 소금팔이, 머슴살이 등으로 힘들게 일해야 했다. 어느 날 청년이 품삯을 받고 집으로 돌아와보니 이미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 후였다. 청년은 아버지를 간호하지도, 임종을 지켜보지도 못한 죄책감에 하늘을 보기 부끄러워 갓을 쓰고 통곡하다가 그대로 바위가 되었는데 큰 바위를 아버지 바위, 작은 바위를 아들 바위라고 한다.
또다른 전설도 있다. 모든 번뇌를 끊고 부처님의 도를 깨달은 어느 불교성자가 영산강을 건너 이 곳에서 잠시 쉬었다. 그는 깜빡하고 삿갓을 놓고 갔는데 그 삿갓이 그대로 바위가 되었는데 중바위(스님바위)라고 부른다고 한다. 산 위에 있는 팔공산 갓바위와 달리 이 쪽은 해안절벽에 있어 바다와 함께 보면 절경이다.
하지만 절벽 아래에 바다에 면해 있어 바다에서 보아야 '갓바위'인 탓에 산 위에서 보면 그냥 바위일 뿐이었으나, 목포시가 해상잔교를 설치하여 바다 위에서 갓바위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4. 서울 서초구 우면동 갓바위


서울 서초구 우면동 큰말 앞산에 있으며 바위 모양이 갓처럼 생긴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5. 경기도 양주시 갓바위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하패리, 남면 입암리 일대 망당산 북쪽 기슭에 있는 바위로 마치 관을 쓰고 있는 듯한 모양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300여 년 전 갓바위장이 섰던 곳이라 하여 '구 갓바위'라고도 하며 전설에는 갓바위로 불리는 지역으로부터 북쪽에 '흔터'로 불리는 빈터가 있었다. 옛날 이곳에 어느 욕심 많은 부자가 살았는데 하루는 어느 늙은 승려가 시주를 하러오자 부자는 거지 등쌀에 못살겠다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그 승려는 거지를 오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있다고 하였다. 귀가 솔깃해진 부자가 방법을 묻자 승려는 산에 있는 갓바위의 갓을 벗겨버리면 소원대로 될 것이라고 한 뒤 사라졌다. 부자는 승려의 말대로 갓을 벗겨서 고개에 버렸고 그 후 부자는 망하고 동네까지 폐허가 되니 거지는 다시 찾아들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부터 고개이름을 갓바위 고개라 하고 동네 이름 또한 갓바위라 불렸다고 한다.

6. 충북 충주시 갓바위


충북 충주시 동량면 조동리 관암 마을에 있는 바위로 자연암이 논자리에 놓여 있는 모습이 뚱뚱한 사람이 갓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여 갓바위라고 했다. 이 바위로 인해 관암(冠岩)마을이라는 이름이 생겼으며 우리말로는 '갓바우마을'라고 부른다. 바위의 모양새가 갓을 쓰고 있는 것처럼 자연석 암반 위에 20톤이 넘는 무게의 큰 돌이 올려져 있고 그 위에 모자처럼 두께 1m 정도의 납작한 돌이 올려 있어 생겨난 이름이라고 전한다. 갓바위는 지등산의 기슭과 논이 맞닿은 지점에 있으며 이 갓바위 중간에는 불상이 새겨져 있는데 선각으로 묘사되었다. 얼굴은 크고 원으로 감싸여 있고 가슴에 양손을 맞대고 있으며 배 부분에는 원호의 옷 주름이 확인되며 하반신은 다소 마모가 되어 구별이 잘 안 된다. 이 마애불은 조선 시대에 지방인이 개인적으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7. 충남 공주시 갓바위


이 갓바위는 특이하게도 상술했던 다른 지역의 갓바위들과 달리 바위가 아니라 '''지명'''이다. 충남 공주시 우성면 용봉리에 있는 갓바위마을로 마을에 갓처럼 생긴 바위가 있었던 데서 유래하였다. 옛날 이 마을에 갓 모양의 바위가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갓바위를 부귀를 주는 바위라 하여 오래도록 섬겼다.
현재는 5가구가 살고 있는 한가하고 자그마한 산촌 마을로 정작 그 갓바위는 현재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다. 그 갓바위는 일제시대에 많은 돈을 받고 팔렸다고 하는데 현재 주변 산이나 밭에서도 갓 모양의 바위를 찾아볼 수 없으며 오랫동안 갓바위에 산 촌로조차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갓바위에는 다른 마을처럼 큰 돌이 있는 산이 없으며 볏가마보다 조금 큰 바위가 산에 조금 있었으나 마을 사람들이 집을 지을 때 쪼개어 주춧돌로 썼다고 한다.

8. 충남 보령시 갓바위


충남 보령시 신흑동 남포 방조제의 북쪽 끝에 위치한 바위로 흑포 마을 남서쪽에 있다. 바위가 갓처럼 생겼기 때문에 갓바위며 전설에는 고려 말기에 오랑캐의 침입이 잦을 때 김성우 장군이 여기를 지키며 갓을 걸어 놓았던 바위라고도 전해진다.

[1] 부산, 대구, 대전, 서울에서 갓바위로 정기적으로 운행(!)하는 대절버스편이 있을 정도인데, 특히 부울경 지역 대절버스가 많다. 다만 대절버스이기 때문에 갓바위를 방문했을 때 선본사 신도회 등의 연락처를 알아둘 것.[2] 2007년에 국보 승격을 문화재청에 건의했으나 국보로 승격시키기에는 가치가 다소 떨어진다고 유보되었다. 2013년에 다시 국보 승격을 요청하자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여전히 소식이 없다.[3] 갓바위를 중심으로 선본사가 북북동쪽, 관암사가 남남서쪽으로 거의 정반대에 있다. 갓바위 시선이 남남동쪽을 향하기 때문에, 당연히 관암사 쪽이 갓바위의 앞, 선본사 쪽이 갓바위의 뒤가 된다. [4] 쉬지 않고 빨리 올라가면 40분만에 올라갈 수 있다. 체력이 약한 사람이 중간에 쉬면서 올라가면 1시간 30분까지도 걸린다. 내려오는 시간은 빨리 내려오면 30분 정도 걸린다.[5] 이쪽은 빨리 내려오면 803번 버스 정류장까지 20분도 채 안 걸린다. [6] 산 속이라 겨울에 한번 눈이 오면 날씨가 추워서 며칠이 지나도 얼음이 잘 녹지 않는다. 더구나 산간지역이라서 평지보다 더 추우니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봄이 될 때까지는 등산로가 빙판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7] 겨울에는 추워서 등산 수요가 적고 눈이 내려 길이 얼어붙으면 등산하기도 힘들다.[8] 401번 종점에서 여기까지 걷는데 20~25분 정도 걸린다.[9] 본선은 배차 간격이 매우 짧지만 능성동행은 배차간격이 매우 길며 그나마 하양-와촌1번을 위한 지원운행이다.[10] 속명은 우효생(禹孝生), 생몰 1917-1994. 1930년에 출가하여 43년에 비구계를 받았다. 1993년에 태고종의 14대 종정으로 추대되었으나 이듬해 입적하였다.[11] 본 문서의 구판에는 은해사가 아니라 동화사라고 설명했지만 은해사가 맞다. 은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 교구의 본사이며, 선본사가 직영사찰이 되기 전에는 은해사의 말사였다.[12] 본 문서의 구판에서는 1994년 5월 3일에 직영사찰이 되었다고 썼으나, 막상 선본사 홈페이지에서는 94년 10월에 되었다고 설명한다. 94년 신문기사 등을 참조하면, 조계종 개혁회의에서 94년 5월 3일에 선본사를 직영사찰로 삼자고 결의하고, 동년 10월에 직영사찰이 된 듯하다.[13] 대표적인 예가 '은진미륵'이란 이름으로 유명한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다. 민간과 자칭 민족종교들은 미륵이라 부르지만 사실은 관세음보살이다.(관련기사) 더욱이 선본사 사적기도 미륵신앙이 유행하는 조선 후기 기록.[14] 이렇게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신성시하던 바위에 불상을 새기거나 안치한 사례는 월출산 등 우리나라의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