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생애

 


1. 개요
2. 어린 시절
3. 세자 시절
3.1. 부왕과의 대립
4. 폐세자
4.1. 폐세자의 원인에 대해서
5. 폐세자 이후
6. 세종 사후


1. 개요


조선 전기의 왕족으로 태종의 장남이며 세종의 형이다.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폐위된 후 전국을 누비며 풍류를 즐겼다. 시, 서예에 능하였다.

2. 어린 시절


세자가 되기 전부터 양녕대군태종원경왕후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이었다. 사실상 그들의 모든 자식 중 부부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이라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일반적인 부부의 장남에 대한 애정을 초월하는 깊은 사랑으로 길렀던 자식으로 추정된다. 양녕대군태종원경왕후의 세 아들들이 줄줄이 요절하여 상심이 크던 중 겨우 다시 얻은 4남(겸 7번째 자식)이었으므로, 그가 형들처럼 요절하지는 않을지 걱정하며 끔찍이도 아꼈다고 한다.
태종원경왕후와의 사이에서 7남 4녀를 얻었지만, 그 아들 중에서 요절하지 않은 것은 4남 양녕대군, 5남 효령대군, 6남 충녕대군 뿐이다. 대신 양녕의 누나 3명을 포함한 딸들은 최소한 시집가고 나서도 살아 있었다.[1] 장남과 차남과 3남은 이름에 대한 기록도 없이, 겨우 태종의 회고기록 정도에서 그 존재가 확인될 정도인 것으로 보아, 그들은 상당히 어린 나이[2]에 요절한 것으로 여겨지고, 7남 성녕대군도 겨우 14살의 나이에 죽었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에는 아들 3명을 뺀 4남 4녀로 기록되어 있다. 태조 2년에 양녕의 셋째 누나가 태어났고, 태조 3년에 양녕이 출생하였으니, 양녕의 형들은 모두 조선 건국 전에 태어나서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단 실록은 조선 건국 이후의 왕가 가족들의 출생과 사망사실은 무조건 다 기록하게 되어 있다.
그 뒤의 아들들도 나름 상태가 좋아 어릴 때부터 태종이 예뻐하긴[3] 했으나, 아들 다 잃고 하나 살아 있던 상황부터 길렀던, 실질적으로는 장남인 양녕에 대한 사랑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양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이리저리 깽판치고 다닐 때도, 태종이 바로 세자 자리에서 자르지 못한 건, 본인이 젊을 때 왕자의 난을 일으킨 것에 대한 죄의식으로, 장자상속에 집착한 것도 있지만, 사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너무 사랑했던 것 때문인 게 더 크다. 태종이 양녕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깊게 속상해 했던 모습을 보인 기록은 실록에도 꽤 많이 나온다.
조선 시대의 대부분 왕과 왕자의 관계는 보통 특별하게 가까울 수는 없다. 보통은 왕자가 태어날 때부터 다른 궁에서 기르고, 왕의 업무가 항상 바쁘기 때문에 그리 자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녕대군태종왕자의 난을 일으키기 전, 잠저[4] 시절 태어난 자식인데다가, 형들의 요절로 가장 특별한 자식이기까지 하니, 자식에 대한 사랑이 다른 조선시대 왕이 대를 이을 귀한 아들로 생각하는 감정보다 오히려 더 깊었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구절이 있다.

그때 가 정도전 일파의 시기로 말마암아 형세가 용납되지 못하게 되니, 실로 남은 날이 얼마 없지 않나 생각되어 항상 가슴이 답답하고 아무런 낙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대비와 더불어 서로 양녕을 안아 주고 업어 주고 하여, 일찍이 무릎 위를 떠난 적이 없었으며, 이로 말마암아 자애하는 마음이 가장 두터워 다른 자식과 달랐다.

- <세종실록 3권 1년 2월 무인조>

가장 어려울 때 위안이 되어준, 태종에게 양녕은 그야말로 항상 '왕자'가 아니라, '아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때 태종양녕대군명나라 영락제의 딸과 결혼시키기 위해, 조선에 단골 사신으로 오던 황엄에게 이야기하여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기도 했지만, 이후 황엄 측에서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김한로 측에서 반발해 흐지부지 되었다.[5]

3. 세자 시절


훗날 양녕대군이라고 불리는 태종의 장남 이제는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장자승계의 원칙에 의해 세자 자리에 올랐다.
태종은 재위 기간 동안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몇 번의 선위 파동을 벌였는데 아직 이때까지만 해도 나름 정상이었던 세자 이제는 자신은 아직 왕좌에 앉을 수 없다면서 눈물을 흘리며 선위를 하지 말아달라고 신하들과 함께 부왕에게 간청했다. 문제는 이게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이었다는 것... 나중에 희대의 망나니가 되는 이제의 모습을 생각하면 적어도 이때까지는 나름 정상적이었다.[6] 그래서 세자 이제가 타락한 이유가 태종의 선위 파동 쑈 때문에 개고생을 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왕이 선위 파동을 벌이면 세자는 울며불며 왕에게 선위를 멈춰달라고 간청해야 하는데 이게 보통 힘들고 스트레스 받는 일이 아니다. 훗날 동생의 후손 광해군, 사도세자도 부왕 선조, 영조의 선위 파동 때문에 온갖 개고생을 다 해야만 했다. 선위라고 하는게 아버지가 준다고 넙죽 받으면 역심을 품느니 하면서 몰릴 수도 있었고 권력을 노리고 있었다고 오해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보니...선조의 경우에는 광해군이 임진왜란을 통해 인망을 얻고 백성들의 민심을 얻자 광해군의 충심을 시험하려는 마음에 선위를 하겠다고 계속 이야기를 꺼낸 바가 있었다.
그는 공부에 신경 쓰지 않고 노는 것을 좋아해서 태종의 골치를 썩였지만, 태종은 세자를 함부로 교체할 수 없었던 터라 얼마 동안은 타이르기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자가 계속해서 말썽을 부리자, "세자궁을 대궐 가까이에 지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자주 살피라"는 우빈객 이래의 말에도, "다 큰 부자지간에 그렇게 간섭하면 반드시 서로의 사이가 나빠진다"며 듣지 않았을 정도.
태조가 왕위 서열을 무시하고, 형제 중 막내인 방석을 세자로 세우자,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제들의 피를 보고 권좌에 오른 이였던 만큼, 태종으로서는 장자인 양녕에게 피를 보지 않고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3.1. 부왕과의 대립


그러나 양녕은 이오방, 구종수와 궐을 나가 논 것을 비롯하여, 전 중추부사 곽선의 첩, 어리를 납치해 궐로 데려온 큰 사건 이전에도 숱하게 말썽을 부리고 공부를 게을리 해, 태종원경왕후의 속을 시꺼멓게 태웠다. 실록에 보면, 태종이 지신사(도승지) 조말생을 은밀히 불러 세자가 공부를 않고 놀기만 좋아하며 황음(荒淫)[7]하는 것이 심하니 어쩌면 좋으냐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潛然下淚) 한탄을 했다는 내용이 있을 정도이다.[8]기사
태종이 양녕이 저지른 사고들을 마무리 짓고자, 그와 어울리던 패거리를 벌주고, 그 중 몇은 파직시키자 양녕이 곡기를 끊은 적이 있었는데, 이를 보다 못한 원경왕후가, '''"너는 어리지도 않은데 지금 어째서 부왕께 이와 같이 노여움을 끼치느냐? 이제부터는 조심하여 효도를 드리고 또 밥을 들도록 하라"'''며 꾸지람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상술했다시피, 양녕은 어리라는 여인과 나누던 밀회가 발각되어 태종으로부터 크게 꾸지람을 듣고, 장인인 김한로가 태종으로부터 문책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를 '''장인의 집'''에 숨겨두고[9] 아이까지 갖게 한 일이 드러나 태종이 대노하여 질책하자, 양녕은 "'''아바마마도 많으면서 왜 내가 축첩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까?'''" 라며 반박하는 내용의 글을 올려 태종이 분노를 넘어 황당케 한 일도 있다.[10]태종은 답답했는지,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박은에게 이를 보여주며, "얘를 어쩌면 좋냐"며 한탄했다. 양녕대군이 당시 쓴 글 내용에 따르면, 양녕대군은 스스로를 한고제에 비유하면서, "어질다고 알려진 수양제가 나라 말아먹은 것은 아시느냐"고 주장했다.기사 그 외에도 양녕은 기생들과 놀고, 매사냥을 즐기며, 꾀병을 부려 서연(書筵)[11]을 피하는 등 온갖 말썽이란 말썽은 다 부렸다.
'세자양보설'과 반대로, 충녕대군이 인격과 학문 양쪽 모두에서 뛰어난 자질을 보이자, 세자 자리에 있었음에도 아우에게 경계심을 가졌던 듯하다. 여러 대군들과 함께 매형 이백강[12]의 연회에 가서 기생과 놀다가, "충녕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기사 여기까지만 봐도, 양녕대군의 행적만 보면 그간 태종화병이 안 생긴 것이 신기한 걸 넘어 이상할 따름이다. 양녕대군이 영조의 아들이었다면, 폐세자로 끝나는 게 아니라 임오화변과 같은 변을 당했을 일이다.
하루는 옷을 멋들어지게 빼입은 뒤 옆에 시중꾼에게 잘 어울리냐고 물어봤다가 충녕대군에게 정신차리라는 일침을 듣기도 했다.

4. 폐세자


계속해서 큰 사고를 치는 바람에 양녕은 결국 폐세자가 되었고(1418년 6월 3일), 그를 대신하여 훗날 세종이 되는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세종은 훗날 태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세종이 되었다. 그러나 양녕대군은 태종이 상왕이 된 후에도 계속 사고를 쳐서, 견디다 못한 상왕 태종이 그를 가두다시피하고 철저히 감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다만 이것을 근거로 삼아 태종이 양녕을 미워했다고 여겨서는 안 되는 연유는, 태종은 왕자의 난 당시 보여주던 눈물도 없을 거 같은 이미지와 달리 양녕이 폐위되던 날, 태종은 엉엉 통곡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태종은 의외로 자식에게는 상당히 관대하였는데, 그는 양녕을 폐위한 뒤에도 늘상 그를 걱정했다. 아마도 아들 셋을 연이어 잃은 뒤에 겨우 얻은 아들이라 그 정이 무척 각별했던 것 같다. 《세종실록》을 보면, 태종은 정도전의 위세에 눌려 하릴없이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는데, 그때 원경왕후와 함께 어린 양녕을 업어주고 안아주며 무릎에서 떼어놓은 적이 없다보니, 자애하는 마음과 정이 다른 자식들과 달랐다고 술회하고 있다.
양녕대군은 폐세자 이후에도 밤에 담을 넘어 도망가고, 태종에게 병든 매를 바치고, 남의 을 빼앗으려 하는 등 온갖 사고를 치고 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과 고기, 베를 자주 내리고 강화도에 100칸짜리 집을 지어주었다. 더불어 신하들이 그를 궐로 부르는 것을 반대하자, 태종은 양녕을 밤에 몰래 불러서 얼굴을 보기도 하고, 매까지 하사하면서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게 했다'''. 이쯤 되면 아들바보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상술한 대로 왕과 왕자의 관계가 아니었을 때부터 부모자식이었던 두 사람의 관계를 보면, 태종이 왕도 유력한 세자도 무엇도 아닌, 그냥 왕자 중 1명 시절에 유일한 아들이라고 허구한 날 금지옥엽보다 더하게 걱정하며, 그야말로 가장 사랑했던 자식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태종에게 양녕대군이 단순히 피를 이어받은 왕자가 아니라, 앞서 태어난 아이들 셋이 먼저 죽고, 나이 30살 다 되어[13] 하나 건진 '''아들'''이었기에 가능했던 일.
폐위시켜 광주로 보낼 때도, 신하들이 원지로 보내라고 청했지만 당시 사이가 안 좋던 원경왕후 핑계를 대면서까지, 도성과 가까운 광주(전라도가 아닌 경기도의 광주)로 보냈다. 양녕대군이 종묘사직에 누를 끼친 죄인이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궁전에서 쓰던 기물들도 모두 딸려 보내고, 수발을 들 노비들, 생활비까지 줘가며 사는 데 부족함이 없게 해주었으며, 신하들이 참수하라고 닦달했던 '''어리까지''' 광주로 같이 보내주었다. 결국 왕권에 위험 요소가 될 만한 인물은 형제이든 외척이든 뭐든 가차 없이 제거했던 태종도, 자식에겐 한없이 무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태종이 왕권 강화과정에서, 부부 사이가 최악으로 벌어진 원경왕후의 핑계를 대면서 자기 곁에 두고자 한 것도, 자신이 한 짓이 있다 보니, 자기 자식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게 아닐까, 그리고 권력에서 밀려난 양녕이 죽음을 당하는 게 아닐까 걱정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폐세자 시킨 후, '''그''' 태종이, 다른 사람도 아닌 '''그 태종 이방원이''' 통곡하며 흐느끼다 목이 메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14]기사

4.1. 폐세자의 원인에 대해서


왕위를 사이좋게 양보했다는 야사(野史)가 있긴 하지만 별다른 근거는 없다. 세자 시절 양녕이 기행과 방탕함으로 입지가 약화되어 가고 있을 때에 맞추어, 충녕대군이 공적인 자리에서 총명함을 드러낸다거나, 양녕의 행태에 직언으로 간하는 모습 등이 실록에 자주 나타난다. 양녕대군이 세종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했다는 주장들은, 실록에 버젓이 기록되어 있는 양녕의 충녕에 대한 각종 비방과 폄하[15]를 보면 더더욱 신빙성이 떨어짐을 알 수 있다.[16]
참고로 양녕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은 태종의 정치적 선택에 따른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는 설이 있다. 태종이 사저에 있던 시절, 양녕대군은 외가인 민씨 집에서 자랐으며, 태종은 왕위에 오른 후 이 민씨 집안을 멸문시켰고, 왕실의 안정을 위해 외가와 비교적 친밀도가 낮았던 충녕대군을 선택한 것이라는 이야기. 하지만 이 역시도 각종 사서에 남아 있는 양녕의 망나니짓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양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던 태종의 행동을 보면 근거가 부족한 설이다.
태종도 양녕보다 충녕이 훨씬 영특하고 어질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양녕을 폐세자 시키기 전, 그러니까 장자계승원칙을 밀어붙이던 시점에도, 실록을 비롯한 각종 기록에, 태종이 당시 세자였던 양녕을 까면서 충녕을 본받으라고 말했다는 구절이 여러 차례 나온다. 태종이 양녕의 수많은 망나니짓을 끝끝내 참고 참다 그를 폐한 것은, 그만큼 '''양녕의 행동이 죽어도 못 봐줄 만큼 도를 너무 많이 넘었기 때문'''이다.[17]
여담으로, 명재상으로 유명한 황희가 태종이 그를 폐세자하려 할 때 혼자 반대해서, 몇 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세자시절 양녕의 행동에 대하여 황희는, '''"뭐, 젊을 때 그럴 수 있지"''' 정도로 평가. 양녕의 능력과는 별개로 개국초기의 선례로서, 장자가 아닌 셋째가 왕위를 이어받는 사례를 남길 수 없다는, 지극히 정치적 입장의 충돌이었던 셈이다.

5. 폐세자 이후


세종대왕은 형제간의 우애 때문이었는지[18] 나름대로 미안해서였는지, 폐세자가 된 후에도 계속 문제를 일으키던 양녕대군을 감싸줬지만, 양녕대군은 그 후로도 끝없이 사고를 쳤다. 선왕의 적장자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현 국왕의 정통성이 시비에 오르거나 그를 중심으로 반역의 무리가 일어날 수 있으므로, 이런 경우 화근을 제거하기 위해 일찌감치 숙청해버리는 게 상식이다. 게다가 세종대왕 초기까지만 해도, 조선은 아직 완전히 안정된 왕조가 아니었음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양녕이 조종(祖宗)에 죄를 끼쳤으니 벌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상소를 끝까지 물리쳤다.[19] 나중에는 아예 화를 내기까지 했다.
양녕대군세종대왕이 자신을 타이르려고 보낸 편지에, "계속 막으려 하신다면, 다시는 주상을 보지 않겠습니다"라는 식의 답장을 보낸 적도 있었다 . 일단 양녕은 세종보다 3살 많은 '''큰형님'''이었고, 비록 세종이 동생이며 그 편지도 명령보다는 부탁에 가까운 편지라지만, 그 이전에 세종은 ''''''이다. '''대왕대비조차 왕에게 존대를 하는''' 가족 관계에서 윗사람이라고 해봤자, 왕에게 개겨대는 건 절대 허용 안 되는 일이었다. 흥선대원군(헌의대원왕)도 고종황제가 성인이 되면서 말을 듣지 않자 어쩌지를 못했다.[20] 즉 '''상왕이 아니고서는''' 아버지조차 왕인 아들에게는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였다. 설사 어명을 들을 수 없고 거절한다면 정중하게 자신의 사정을 진실되게 고하고 자신을 낮추어 예를 갗추어 사양하는게 도리이다. 막말로, 저 편지로 군주의 권위를 해쳤다는 핑계를 대서 역모죄로 죽여버려도 무방한 상황이었다. 세종은 조선의 왕이고 양녕은 종친이므로, 최소한 왕의 말을 들으려는 시늉이라도 해야 정상이다. 그런데도 왕의 편지에 대놓고, "내 말 안 들어주면 너랑 안 놀 거임"이라 답한 것.
이외에도 뭔가 또 말썽을 저질러 추궁을 당하자, ''''죽었다 깨어나도 내가 안 그랬다고 하늘에 대고 맹세한다!''''고 왕인 세종에게 말했는데, 알고 보니 '''사실 저질렀다'''. 이는 원칙대로라면, '''사형'''에 해당하는 '''기군망상죄(欺君罔上罪)'''다.[21] 조정대신들은 이걸 알고서 역모를 꾀한다느니 엄히 다스려야 한다느니 하면서 난리가 났었는데[22] 세종이 형제간의 사사로운 일이라며 진정시켰다. 이렇듯 세종 즉위 후에도 정말 생양아치가 따로 없었다.
양녕의 계속되는 또라이짓은 그가 살아남기 위한 보신책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세종대왕 즉위 후, 일각에서는 양녕대군을 사사(賜死)해야 한다는 주장이 심심찮게 제기되었다. 그래서 사고를 치되 적당히 수위를 조절하여, 적어도 임해군이나 순화군처럼 인간 쓰레기 수준으로 막나가는 않았다. 사실 왕위계승에 위협이 되는 왕족의 처신은 그냥 신중하고 겸손한 걸로는 안 된다. 월산대군처럼 왕족이 아니라 거의 수도승에 가깝게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지 못할 바에는[23] 제안대군처럼 악독하지 않은 사고 좀 치면서, 처신이 못나고 남들에게 바보 같아 보이고 평판이 나쁠수록 목숨 보전과 만수무강에 이로운 것이다. 흥선대원군 역시 야사에 전해져 오는 수준의 파락호 건달급은 아니더라도, 중인이나 상인계급들과 어울리며 돈 꾸러 다니는 등의 구차하고 좀스러운 처신으로 연막을 쳤을 정도다. 이러한 행동은 동생 세종대왕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 의도한 행동이라는 의견도 있다. [24]

6. 세종 사후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세종대왕 덕분에 여생을 편히 누렸는데도 그 아들인 문종 사후엔 수양대군 편을 들어서, 문종의 아들이자 본인의 조카손자인 단종을 폐하는 걸 묵인했을 뿐만 아니라, 앞장서서 상소를 올려 단종을 죽이라고까지 했다는 것이다. 세조가 단종을 죽이는 데 주저하자, "'''내 너 같은 놈을 조카로 두고 있다니!'''" 라며 격분했다는 야사의 기록도 있다. 단종 뿐만이 아니라 양녕은 세조의 '''친동생들'''이자 세종의 아들들, 즉 '''자신의 친조카들'''인 금성대군[25]과 영풍군, 화의군마저 죽이라고 하는 데 앞장을 섰다. 당시 양녕은 왕실의 어른으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왕위를 빼앗긴 복수라는 시각도 있지만, 세종이 양녕을 감싸던 모습이나, 양녕이 지지한 수양대군이 세종의 차남이라는 걸 감안하면, 그럴 가능성은 낮다.[26]
사실 실록에 남은 양녕의 진면목을 보면, 왕실지상주의자였다고 볼 수도 있다. 태종이 외척인 민씨 일가를 숙청할 때의 기록들을 보면, 양녕은 자신의 외가를 말 그대로 풍비박산내 버리는 데 단단히 한 몫을 해냈다. 민무구, 민무질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원경왕후가 앓아누웠는데, 살아남은 외삼촌 민무휼, 민무회가 병문안을 온 김에 양녕대군에게, "우리 형들은 죄가 없는데도 죽었습니다. 부디 우릴 가엾게 여겨 주십시오" 라고 했는데, 양녕대군이 코웃음을 치며, '''"민씨 집안은 교만방자하여 화를 입어도 쌉니다"''' 라며 받아쳤다.[27]
이에 민무회가 폭발하여, '''"세자 저하께서는 어릴 적 어느 집안에서 자라셨습니까"''' 하며 울부짖었다. 이를 들은 민무휼이 허겁지겁 달려와서 "이놈이 뭘 잘못 먹은 모양입니다"라고 사과했으나 분위기는 이미 이상해져 버렸고, 양녕대군은 몇 년 뒤, 민무휼과 민무회가 곤경에 처했을 때, 그 일을 죄다 일러바치면서 외삼촌들을 죽일 것을 청했다. 태종이 "넌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여기서 뭐하냐"고 면박을 주었지만, 신하들이 "종사에 관한 일에 어찌 세자가 관심이 없을 수 있겠냐"고 양녕대군을 추켜올려 주었다. 결국 그게 결정타가 되어, 민무회, 민무휼도 자결해야만 했다.[28] 즉 양녕으로서는 어린 탓에 대신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 단종이 눈에 안 찼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려는 세조를 더 좋게 본 것일 수도 있다. 이쪽의 해석이 맞다면 태종의 아들답다고도 볼 수 있을듯.
다만 외숙인 민무구 형제들 문제의 경우, 자신의 비행이 문제가 되자 외숙들을 희생해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는 시각도 있으며, 세조 지지의 경우, 왕좌를 빼앗은 동생 세종이 사랑하던 장손을 내몰아 한을 풀고, 한편으로는 수양에 붙어 자기 목숨을 보전하는 동시에 친인척들의 이익을 얻고자 한 것이라 보기도 한다. 여기에서 지능형 소시오패스에 가깝다는 수식어 등극이 되어버린 것도 덤이다.
또한 양녕대군은 세조가 왕자 시절일 때부터 꽤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양녕대군이 종친들을 초대해서 술자리를 가졌는데 손님들이 모두 꽐라가 되었으나, 자신과 수양대군만 멀쩡한 것을 보고, "수양이야말로 진짜 호걸이다" 라고 칭찬했다고 하며, 수양도 이 큰아버지 양녕대군을 평소부터 잘 따랐다고 한다.
이러한 모습이 대부분의 사극에 나오지 않아서 일반대중들은 알 수가 없다. 그나마 약간이라도 나온 것이 KBS의 역사교양 프로그램이었던 '역사의 라이벌' 수양대군 vs 김종서 편이다. 수양대군에게 계속해서 왕실의 권위를 지키라는 식의 말을 한다.[29]
또 하나 나온 것은 KBS 대하드라마 왕과 비이다. 실록에 나온 양녕대군의 왕실주의행보를 잘 구현해냈으나 드라마 자체가 반 쯤 망해버려서 언급조차 안된다(...)
죽기 전까지 사고를 치고 다녔던 것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세조 8년인 1462년에 죽었고, 시호를 강정(剛靖)이라고 했다.

[1] 그나마 셋째 딸과 막내딸은 시집간 지 10년도 안 되어 20대에 요절.[2] 생후 100일 혹은 1년이 돌아오기전에 요절했을것으로 추정된다. 당장 백일잔치, 돌잔치의 기원을 생각해 보자.[3] 양녕 위로 태어났던 세 아들들은 영아기를 넘기지 못하고 요절했다. 이에 원경왕후의 친정어머니가 용한 승려에게 집터가 문제라는 조언을 듣고 양녕은 태어나자마자 외가에서 키워 요절을 면했다는 야사가 있다. 어쨌든 외가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외숙들과 각별한 친분을 쌓은 것은 사실이다.[4] 潛邸, 나라를 세우거나 임금의 친족에 들어와 임금이 된 사람의, 임금이 되기 전의 시기. 또는 그 시기에 살던 집.[5] 비록 무산되긴 했으나, 영락제의 딸이든 조카든 간에 명나라 황실과의 통혼이 성사되었다면 양녕대군의 폐위는 어렵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후일 세종이 영락제에게 한확(누나는 영락제후궁이고, 여동생은 선덕제의 후궁. 인수대비의 아버지이기도 하다.)의 간통사건을 두고 '저 사람은 내가 죄 줄 수 있는 이가 아니다'라고 했는데, 하물며 영락제의 사위 혹은 조카사위가 된 세자를 건드리는 것은 그 이상으로 부담스러운 일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6]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태종이 선위 파동을 벌일 당시 아직 정상적이던 어린 이제가 태종에게 눈물을 흘리며 자신은 아직 어려서 보위를 받을 수 없다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중에 망가질 이제를 생각하면 이제에게 저런 개념있는 시절이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이 만화에서 태종이 선위 파동을 한 번만 한 걸로 알 수 있으나 이게 한 번이 아니었다는 거...[7] 함부로 음탕한 짓을 함[8] 태종 35권, 18년(1418 무술/ 명 영락 16년) 3월 6일 병진.[9] 그러니까 내연녀를 본처의 친정에 숨겨놨다는 얘기다. 아무리 축첩이 당연시되던 시대라지만 도가 지나친 행동임은 분명하다. 심지어 어리는 그냥 여염집 여성이 아니라 고위관직자였던 전 중추부사 곽선의 첩이였던 여자였으니, 왕이 분노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못해서 부족한 것이였다.[10] 그냥 여염집 여성이라거나 했으면 쿨하게 받아 줄 수도 있지만, 어리는 고위직에 있었던 곽선의 첩이였던 여자다. 이걸 어떻게 넘길 수 있단 말인가?[11] 왕세자에게 경전을 강론하는 자리[12] 첫째 누나 정순공주의 남편. 즉, 부마[13] 물론 누구나 첫째 아들을 낳을 수 있겠으나, 앞에 3명이 죽고 낳았다는 건 평범한 경우는 아니니, 첫째 아들에 대한 마음이 남다를 수밖에 없으리라. 더군다나 10대 청소년이 결혼적령기였던 당시 기준으로는 대단한 늦둥이였을 것이다. 애정이 각별할 수밖에 없다.[14] 태종 35권, 18년(1418 무술 / 명 영락(永樂) 16년) 6월 3일(임오).[15] 간단히 말해, 양녕이 태종한테 충녕을 까는(?) 소리를 꽤 많이 했다. "제가 볼 때 충녕은 소심한 것 같습니다" 라느니 어쨌다느니 하는 나쁜 말들을 했다.[16] 양녕이 막장 짓을 계속하는 걸 보고 그가 폐세자 될 것을 예견한 효령대군이 갑자기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공부에 열중하기 시작하자 그걸 본 양녕이 찾아가 "넌 진짜 내가 미친 놈인 줄 알았냐"하고 충녕대군에게 세자위를 양보하려 한 의도를 밝혔다는 야사가 있기는 하다.[17] 친동생인 성녕대군이 죽었는데도 망나니 짓을 하는 데다 더 결정적으로 태종 본인의 화를 치밀어 오르게 하기까지 한 일이 있었다. 여자 문제로 양녕대군을 야단쳤더니 양녕대군이 "그럼 아바마마는요?" 이라고 되받아친것. 태종 성격에 자기에게 도전한 양녕대군을 더 참고 있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18] 아버지 태종이 고려 → 조선으로 정권이 교체되는 피비린내 나는 시기를 겪은 반면, 양녕과 형제들은 어릴 때부터 안정된 궁궐생활을 했기 때문에,(아주 아기일 때는 궐 밖에 살았었다.) 형제들 간에 큰 마찰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위에서 보이듯, 태생적으로 정치적 인물일 수밖에 없는 왕자들이니, 서로를 견제하기도 하고 썩 훈훈하기만 한 사이는 아니었던 듯하지만, 적어도 형제들끼리 사생결단을 벌였던 태종 대(代)보다는 훨씬 온건했다. 그리고 뭣보다도 바로 그 태종이 자신의 경험을 거울 삼아 자신의 자식들에게는 우애를 그렇게도 강조했다.[19] 심지어 태종은 양녕이 왕권에 문제가 된다면 죽여도 좋다는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 양녕이 폐위될 때 목이 메일 정도로 엉엉 울었다는 그 태종이 말이다. 사실 이만하면 유교사상적인 문제는 있어도 극형은 아니되 엥간히 끝장내버린다는 정도의 처벌은 충분히 가능하며, 당시 태종이 구축했던 강력한 왕권을 보아할때 양녕을 숙청하는 것은 세종으로서는 일도 아닐 뿐더러 명분도 타당했다. 선왕뿐만 아니라 온갖 신하들까지 난리를 치면서 상소까지 올리는 터이니 몇 번 거절하는 시늉을 하다가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면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라고 체면세우면서도 숙청할 수 있었겠지만, 세종은 양녕을 끝까지 안고 간다는 선택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20] 당장 고종황제가 성인이 되었을 때부터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정반대 정책을 폈음에도. [21] 임금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속이는 죄에 대한 처벌은 앞서 말했듯 사형. 사극에서, 가끔 신료들이 왕에게 "소신이 어찌 거짓을 아뢰겠나이까" 라고 하는 것은 기군망상죄 때문이다.[22] 조선의 역모는 현대의 내란반란처럼 실제로 들고 일어날 것을 요구하지 않고, 그냥 "왕에게 진심어린 충성을 바치지 않는다"는 것만 입증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저것도 충분한 역모죄였다. 연산군《조의제문》 등과 관련하여 분노하고, 이전까지 연산군에게 뻗대던 대간들과 신료들이 납작 엎드렸던 것도 이 때문.[23] 부리는 노비들도 시비에 휘말리지 않게 철저히 관리했으며, 이 스트레스 때문인지 30대에 단명했다[24] 흔히들 잊고 있는 거지만 촌수 따지면 그 조카손자 죽인 세조도 엄연히 양녕대군 조카이자 세종 아들이다. 양녕 입장에서는 첫째 조카 아들내미랑, 둘째 조카 사이에서 둘째 조카 손을 들어준 것에 불과한 일이었을 거다.[25] 금성대군은 세종이 1차 왕자의 난때 사망한 의안대군의 양자로 입적시켰는데, 이렇게되면 양녕대군과 항렬이 같아진다.[26] 그러나 양녕이 왕위를 빼앗긴 복수라는 의견도 어느정도는 가능하다고 할 수 있는것이 세종의 정통성은 양녕의 아비인 태종이 만든 것이였다. 당장에 조선 건국자 태조 이성계는 왕자의 난에서 사실상 실질적인 권력을 잃어버렸고, 이때부터 태종은 조선의 체계를 구축하였다. '''즉, 조선이라는 국가의 정통성을 태종에게서 찾아야 하는 상황'''이였다. 이런 판국에 태종의 장남이지만, 폐위된 양녕이 세종의 아들인 조카들을 몰아내고 본인 스스로 왕이 된다는 것은 가능성이 없는 일이였다. 차선책으로 태종과 세종이 만들어 놓은 적장자 계통을 끊어버리고자 하였을 가능성도 있다.[27] 민무구와 민무질의 죄목은 세자(양녕대군) 이외에 다른 아들은 필요없다며 제거하려고 했다는 것인데, 이는 누이였던 원경왕후도 막아 줄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저런 의도를 가졌다면 막아주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직접 창을 들고 죽이러 가야할 정도, 왜냐하면 저기서 제거할 대상자는 원경왕후의 아들들인 효령과 충녕이지, 다른 서자 나부랭이들이 아니다. 그런데 이것을 세자가 긍정적으로 반응을 한다면 자기의 개인적인 세력을 키우는 것이 되는 것이기에 반역으로 몰릴 수 있는 일이였다.[28] 태종은 양녕대군이 외가에 휘둘릴 것 같다고 예상했고, 이 탓에 처가를 박살낸 건데, 정작 양녕은 아버지를 닮아서 외숙부들을 토사구팽.[29] 왕실과 조정대신들의 싸움이라는 큰 틀을 주로 다루었기에 양녕대군뿐만 아니라 세종의 2남인 수양대군과 함께 3남이었던 안평대군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