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저승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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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昌德宮 儲承殿
창경궁의 동궁으로, 왕세자의 처소였다.
현대에는 남아있지 않으며 정확한 위치 역시 모른다. 다만 기록을 통하여 유추할 수는 있다. 《궁궐지(宮闕志)》[1] 에는 ‘건양문 밖에 있는 옛 구현전(求賢殿), 광연정(廣延亭)의 터에 위치했다.’고 적혀있다. 건양문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에 있는 문으로, 원래 창덕궁의 동쪽 문이었다가 창경궁이 생기면서 두 궁을 잇는 문이 되었다. 그러니까 건양문 밖은 창경궁 영역이다.
또한 시민당의 북쪽에 있었다하는데, 《동궐도》를 보면 시민당의 위치는 현재 낙선재 권역의 동남쪽이다. 낙선재 영역은 지금은 창덕궁이지만, 원래는 창경궁이었다.
이를 종합했을 때, 저승전은 낙선재 일곽의 일부 언저리에 자리했던 듯 하다. 현재 기준으로 보면 창덕궁 영역에 있었던 것이다.
2. 이름
건물 이름이 '''저승'''이라(...)[2] 이름을 듣고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런 뜻으로 이름지은 건 아니고(...) 세자를 상징하는 글자인 '儲'(버금 저)[3] 에 계승한다는 뜻의 '承(이을 승)'을 넣어 지었다. 즉, '다음 왕위를 이을(承) 세자(儲)의 집'이라는 뜻이다.
3. 역사
창덕궁을 창건한 것은 1405년(태종 5년)이지만, 처음부터 동궁(세자궁)을 세우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성종 시기 원자 이융을 세자로 책봉하여 창덕궁에 세자가 머물 공간이 필요하자[4] , 1485년(성종 16년) 1월에 창덕궁의 동문 인 건양문 밖에 동궁을 짓기로 하였다. 그러나 추위가 너무 심해 공사 시작을 미룬 끝에 1487년(성종 18년) 7월에야 완공하였다. 이 때 동궁의 처소로 건립한 것이 저승전이다. 마침 시기적으로 창경궁을 창건한 지 얼마 안지났을 때이므로, 대부분의 자재는 창경궁 공사 후 남은 것들을 활용하였다. 창덕궁에 딸린 동궁으로 세웠으나, 위치때문에[5] 창경궁 영역으로 들어갔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불탄 후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복구하였고 한 때 소성대비(인목왕후)가 머물렀다.# 이후 인조반정으로 다시 불탔다.
1647년(인조 25년) 8월에 당시 세자[6] 가 머물던 임시 처소에 흉물이 묻혀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마침 창경궁을 재건하던 터라 동궁을 제대로 다시 지었는데, 이 때 인경궁의 동궁인 승화전(承華殿)을 옮겨다 세웠다.[7] 공사는 9월에 시작했으나 추위 때문에 잠시 멈췄다가 다음 해 2월에 다시 시작하여 4월에 완공했다. 공사 중에 실제로 흉물들을 발견했는데 이걸 강빈의 옥사와 관련한 증거물로 조작하기도 하였다.#[8]
이후 숙종 초부터는 왕세자의 부재 시 임금이나 왕비, 대비가 아프거나 재변이 일어날 때# 간간히 머무르는 용도로 사용했다. 왜냐하면 동궁은 궁궐의 핵심부와는 따로 떨어져서 조용히 머물기 좋았고, 규모도 나름 있어서 생활하는데에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는 몸이 안좋아지자 저승전으로 거처를 옮기고 이 곳의 서쪽 별당에서 승하하였으며#, 인경왕후도 아플 때 잠시 여기서 머물렀다.#[9] 이후 경종이 이 곳에서 세자 시절을 보냈고, 영조 연간엔 경종의 왕비인 경순대비(선의왕후)가 머물다가# 후에 사도세자가 거처했다.
1746년(영조 24년)엔 월랑이#, 1764년(영조 40년)에는 건물 전체가 불에 타 사라졌다. 이후 신하들이 다시 지을 것을 청하였으나, 영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재건하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른다.
3.1. 재건하지 않은 이유
영조는 '조종의 검소하신 덕을 본받아야한다'며 저승전 재건 공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건 명목상이고 실제로는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영조 재위기간에 저승전에 머물던 사람은 경순대비(선의왕후)와 사도세자이다. 그런데 선의왕후는 영조의 가장 강력한 정적 중 한 명이었으며[10] , 사도세자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영조 입장에서는 자신의 인생에 걸쳐 가장 껄끄러운 두 사람이 살았던 저승전을 다시 짓는 게 아마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4. 구조
- 1647년(인조 25년)에 새로 지을 때 제작 된 《저승전의궤(儲承殿儀軌)》에 따르면, 총 28칸이며 온돌방이 동, 서에 각각 6칸 씩 있고 대청이 16칸이었다. 그리고 익각[11] 이 동, 서, 북쪽에 각각 1칸 씩 딸려 있었다. 월랑은 동쪽에 9칸이었으며 남쪽에도 있었으나 정확한 칸 수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동행각은 2칸, 남행각이 1칸이었다.
5. 여담
6.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 KBS 드라마 스페셜 《붉은 달》에서는 극의 중심 공간으로 나온다. 영조(김명곤 분)가 경종 독살의 주장하던 역적들에게 습격당한 후, 자신은 관련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차원에서 경종이 세자 시절 살았던 저승전에 사도세자(김대명 분)를 살게 한다. 그런데 첫 날부터 장희빈(조미령 분) 귀신을 보며, 점점 정신이 혼란해지면서 미쳐간다. 아마 이 설정[14] 은 위에 언급한 혜경궁 홍씨가 남긴 기록에서 모티브를 얻었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로 이 드라마는 노론 음모론을 전면 부정하고, 임오화변의 원인이 사도세자의 정신 질환 및 광기에 있다고 묘사한[15] 거의 유일한 드라마이다.[16]
[1] 조선시대 궁궐의 위치 · 이름 · 연혁 등에 관한 사실을 기록한 책.[2] 참고로 사후세계를 가리키는 저승은 원래 고유어와 한자어의 조합으로 지금은 고유어로 분류되어있다. 정확히는 저(이, 그, 저 등의 지칭) + 생(生) = 저생이었는데 발음 변화로 저승이 된 것.[3] '임금에 버금가는 존재 = 세자'라는 뜻이다. '쌓다'라는 뜻도 있다.[4] 당시 성종은 창덕궁에 거주했다.[5] 위에 언급했듯, 창덕궁 건양문 밖에 지었는데, 창경궁이 생기면서 건양문 밖은 창경궁 영역이 된다.[6] 여기서 말하는 세자는 소현세자가 아니라 봉림대군이었던 훗날의 효종이다. 소현세자는 1년 전에 사망.[7] 이 무렵 창덕궁과 창경궁을 재건할 때 다른 건물들도 저승전과 마찬가지로 인경궁의 건물들을 대거 옮겨 지었다. 대표적으로 경훈각(景薰閣)이 된 정전#s-6 홍정전(弘政殿)과 선정전(宣政殿)이 된 편전 광정전(光政殿), 그리고 창경궁 통명전(通明殿)이 된, 침전 중 하나인 청와전(靑瓦殿) 등이 있다.[8] 당시 강빈은 ‘역강(逆姜, 역적 강씨)’이란 멸칭으로 불렸다.[9] 이들이 머물던 때는 숙종의 세자인 경종이 태어나기 훨씬 전이다.[10] 영조의 왕위 계승을 극렬하게 반대했고, 효장세자가 요절했을 때는 독살의 배후로 지목받을 정도였다.[11] 가장 메인이 되는 집채에 날개(翼)처럼 딸려 있는 전각(閣).[12] 창덕궁과 창경궁의 모습을 담은 《동궐도》는 영조의 증손자 순조가 재위하던 기간에 그렸다.[13] 취선당은 희빈 장씨의 처소였던 곳이며 사도세자가 저승전에 머물 당시 주방으로 개조되었다.[14] 사도세자의 정신 질환과 저승전을 연관지은 것.[15] 사실, 이게 정사에 가깝다.[16] 영화 중에선 《사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