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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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을 다룬 러시아측 일러스트. 딱 봐도 일본인들이 동남아 지역 주민들의 인종에 가깝게 그려져 있을 뿐더러, 복장도 당시 일본 군경들이 입던 서구식 제복은 고사하고 일본 전통 의상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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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을 다룬 일본측 일러스트
1. 개요
大津事件(おおつじけん)
1891년 5월 11일, 일본을 방문 중이던 러시아 제국 황태자 니콜라이(후의 니콜라이 2세)를 시가현 시가군 오쓰정(滋賀縣 滋賀郡 大津町), 현재의 오쓰시의 경비를 맡고 있던 경찰관 쓰다 산조(津田三藏)가 칼을 휘두르며 습격하여 중상을 입힌 암살 미수 사건.
2. 배경
1891년, 니콜라이 황태자는 시베리아 철도의 기공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러시아 해군 함대를 이끌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던 길에 일본에 들렸다. 나가사키, 가고시마를 들른 다음 고베에 상륙, 사건 당시에는 교토로 향하는 길이었는데, 요코하마, 도쿄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당시 서구화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약소국이었던 일본은 서구열강 대국 러시아의 황태자를 극진한 예우로 환영했다. 황족인 아리스가와미야 다케히토 친왕(有栖川宮威仁親王)이 방일 접대원을 맡아 황태자를 환대하였다. 니콜라이 황태자의 일정은 비교적 느긋하게 일본 관광을 즐기는 것이었는데, 교토에서는 시기가 아닌데도 황태자 환영 행사로서 교토의 명물인 큰 대(大)자 태우기를 벌였다.
5월 11일 오후, 비와호를 구경하는 당일치기 관광을 마친 니콜라이 황태자는 역시 일본에 와 있던 그리스 왕자 요르요스(요르요스 1세의 차남이자 니콜라이 황태자의 외사촌), 다케히토 친왕과 함께 인력거를 타고 오쓰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3. 사건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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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과하는 길에서 경비를 담당하고 있던 경찰관 쓰다 산조가 갑자기 경찰도를 뽑아들고 니콜라이에게 중상을 입혔다. 니콜라이 황태자는 인력거에서 뛰어내려 골목으로 숨었는데, 쓰다는 니콜라이를 쫓아가 칼로 베려고 했다. 게오르기오스 왕자는 대나무 지팡이를 휘둘러 쓰다의 등을 때리고, 니콜라이의 인력거를 끌던 인력거꾼 무카이하타 지사부로(向畑治三郞)는 쓰다의 다리를 걸어 넘어트렸다. 게오르기오스 왕자의 인력거꾼 기타가이치 이치타로(北賀市市太郞)는 쓰다가 떨어뜨린 경찰도를 주워 휘둘러 쓰다의 목에 상처를 입혔다.
결국 쓰다는 경비 중이던 다른 순사에게 붙잡혔다. 니콜라이 황태자는 오른쪽 머리에 9cm 정도 상처를 입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다케히토 친왕은 현장에 있었지만 구경꾼들이 몰려들어서 가까이 갈 수 없었고, 쓰다가 잡힌 뒤에야 현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케히토 친왕은 이 사건이 자기 수준에서 해결할 수 없는 중대한 외교 문제라고 파악하여 메이지 덴노에게 전보를 보내, 덴노가 직접 교토로 와서 러시아 측에 성의를 보여줄 것을 부탁했다.
메이지 덴노는 이 사건이 중대한 문제라고 판단해 사건 다음날인 5월 12일 아침에 기차를 타고 저녁에 교토에 도착, 13일 니콜라이 황태자가 머무는 도키와 호텔에서 황태자를 문병했다. 메이지 덴노는 친왕 3명과 함께 니콜라이를 고베까지 배웅했으며, 고베 항구에 정박하고 있던 러시아 군함 파먀티 아조노바급 장갑순양함까지 문병을 갔다.[1]
니콜라이 황태자는 일정을 중지하여 도쿄 방문은 하지 않고 함대를 이끌고 5월 20일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갔다.
4. 사건 경과
4.1. 범행의 동기
일본은 이전부터 러시아와 영토 문제로 대립하고 있었으며, 시베리아 횡단철도도 러시아의 극동 진출을 상징하는 것이라 일본 내에서는 반발이 있었다. 암살 미수범 쓰다는 이런 분위기 때문에 이전부터 러시아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이 무렵에 세이난 전쟁에서 전사한 사이고 타카모리가 러시아에 망명해 있다가 돌아온다는 헛소문이 돌았는데,[2] 세이난 전쟁에 군인으로 참전해 훈장을 수여받은 공로로 경찰관에 특채되었던 쓰다는 사이고가 돌아오면 자신의 훈장이 박탈되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한다.
쓰다는 이전에 동료 경찰관에게 폭력을 휘둘러 권고사직 처분을 받았다가 다른 지역에서 재임용된 전적이 있으며, 정신병 전적 역시 있었다고 한다. 현재 기준으로 보면 망상장애를 앓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쓰다는 말도 안되는 편집증적인 망상과 근거 없는 헛소문, 개인적 감정 때문에 국빈을 공격한 것으로, 정신병, 혹은 전쟁으로 인한 PTSD가 있었던 것을 보인다. 오늘날에 이런 일이 있었으면 복무 부적격 인원으로 분류되거나 정신병원에 갔을 것이고, 심신미약으로 감형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정신병에 대한 이해가 전세계적으로도 부족했고 결정적으로 쓰다 본인이 조현병 같이 누가 봐도 자기 판단력이 없다는 것이 보이는 병이 있는 게 아니라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망상장애를 앓고 있었기 때문에 가차없이 엄벌이 내려졌다.
4.2. 사죄
당연히 외교적인 결례와 문제를 범한 일본은 '''국가적인 위기'''를 맞았다. 사라예보 사건에서 보듯이, 당시 국제정세에서 이러한 사건은 충분히 전쟁의 명분이 될 수 있었다. 미친 경찰관 한 명 때문에 러일전쟁이 훨씬 일찍 터질지도 모르게 된 판.
일본에선 분노한 러시아가 자신들을 공격해서 식민지로 삼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그야말로 '공러증[恐露病]' 상태가 되었다. 실제로 당시 일본은 러시아에 대항할 수 있는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 이 당시 근대화가 덜 된 일본의 국력은 러시아와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으므로 이 사건을 명분으로 전쟁이 터진다면 절망적이었다. 일본인들은 민·관을 가리지 않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필사적으로 러시아에 사죄했다. 학교는 휴교를 하고 신사, 절, 교회에서는 황태자의 회복을 비는 기도를 했다. 황태자 앞으로 보내진 문안 전보는 1만통을 넘었고, 야마가타현 모가미 군 가네야마 촌(山形縣 最上郡 金山村, 현재의 가네야마 정)에서는 '쓰다'와 '산조'라는 이름을 금지하기로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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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일에는 하타케야마 유코(畠山勇子)라는 여성이 교토에 가서 '''목숨을 끊어''' 니콜라이 황태자에게 사죄를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당시 일본 언론에서는 이 여성을 매우 찬양했다.(...)
4.3. 재판
오쓰 사건의 재판은 또 다른 논쟁거리가 되었다. 당시 일본 형법은 '덴노나 황족에게 위해를 입힌 범죄'를 대역죄로 규정하여 사형까지 가능하다고 규정했는데, 이 법조문은 일본 황족에만 적용되고 외국 황족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즉 일반 살인죄를 적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니콜라이 황태자가 사망했다면 사형이 가능하지만 부상만 입었으므로 사형 선고는 절대로 불가능했다.
일본 정부는 쓰다를 사형에 처하고 싶었지만 대심원(大審院)[3] 원장 고지마 고레가타(兒島惟謙)가 반발하였다. 쓰다를 사형에 처하라는 압력이 내려왔지만 고지마는 근대적인 독립된 사법체계를 열망했고, 만약 서구열강이 일본의 법제도의 미숙함을 트집잡아 불평등조약을 계속 강요하고 경멸한다면, 서양 열강의 경멸을 영원히 떨쳐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고지마의 고집 때문에 사법부는 외압에 굴하지 않는 판결을 내린다. 쓰다는 사건 발생 16일 뒤인 5월 27일 살인미수로 무기징역을 판결받았다. 러시아 정부는 황태자가 살해당하지 않은 이상 무기징역도 충분하다고 판단했는지 별다른 반발 없이 사건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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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도 보관되고 있는 오쓰 사건 관련 증거물
쓰다는 당연히 파면되었고, 훈장도 박탈당했으며 홋카이도에 있는 아바시리 형무소[4] 에 갇혔다. 그리고 징역형에 수반되는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9월 29일 급성 폐렴으로 감옥에서 병사하였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일찍 사망했는데, 이 때문에 일본 정부가 의도적으로 가혹하게 대하여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음모론도 존재하지만 증거는 없다. 그냥 아바시리 감옥의 혹독한 환경 때문에 병사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이 당시 아바시리 감옥에 수감된 자들은 개간에 동원되는 중노동에 시달려 사망자가 속출하는 등 가혹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홋카이도는 상당히 추운 곳이기도 하고. 물론 사람이 살기 힘든 아바시리로 보냈다는 점에서 거기서 의도적으로 옥사시키려고 보냈을 가능성이 높지만.
5. 결과
러시아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5] 결과적으로 보면 무기징역으로도 만족했고, 따라서 일본이 우려하고 있던 배상금 요구나 무력 보복 역시 일어나지 않았다. 누가 봐도 특정 개인이 비상식적인 망상 때문에 저지른 범죄였을 뿐 일본 정부와 연관성이 전혀 없음도 고려했을 것이다. 니콜라이 2세는 일본의 신속한 사건 해결에 비교적 우호적이고 관용적인 태도로 대했으며, 니콜라이 2세의 일기에서 이후로도 일본에 혐오감을 품는 일은 없었다고 확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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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를 제압한 인력거꾼 두명이 러시아 군함에서 훈장을 수여받은 후 찍은 사진. 오른쪽에 이들을 호위하는 러시아 수병이 보인다. 여담으로 두 명이 국빈으로 초청받게 되자 일본 외무성은 급히 두 사람에게 입힐 정장을 주문했으나, 원래 그대로의 모습이 보고싶다는 니콜라이 황태자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이런 차림으로 왔다고 한다.
이때 쓰다를 제압하는데 도움을 줬던 인력거꾼 무카이하다와 기타가이치는 정박중이던 러시아 군함 파먀티 아조노바급 장갑순양함에 초대되었고, 선상 파티에서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과 상금을 받아 한 살림 차렸으나 그리 행복하게 살지는 못했다. 당초에는 큰 사건을 막은 영웅으로 여겨졌으나, 13년 뒤 러일전쟁이 벌어지자 상황이 뒤집혀서 '러시아를 도운 비국민'으로 취급받아 주변에서 집단괴롭힘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중 한명은 도박과 매춘, 강간혐의로 체포되어 훈장을 박탈 당했고, 설상가상으로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 정부에서 연금 형식으로 지급하던 보상금이 없어지면서 가난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래도 둘 다 큰 사고 없이 여생을 무사히 마쳤다고.
한편 일본에서 고지마와 그의 사법권 독립에 관한 신념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쓰다 사건을 통해 일본이 전근대적인 체계에서 벗어나 계속 근대적이며 독립적인 사법체계를 가지게 되었다고 평가하는 것. 그러나 이를 계기로 일본 사법부는 정부와 군부에게 미움을 받았다.
6. 매체에서
야스히코 요시카즈 화백의 하늘의 혈맥에서 니콜라이 2세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일본도의 맛이 매서웠다."는 식으로 잠깐 언급한다.
에가와 타츠야의 러일전쟁 이야기에서도 상세히 언급된다. 니콜라이 황태자와 동행했던 요르요스 1세가 묘사되지 않아서, 쓰다 산조의 기습 직후 느닷없이 중절모를 쓴 남자가 쓰다를 지팡이로 후려치는 묘한 장면이 되었다. 이후 메이지 덴노가 납치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황태자의 전함을 방문하여 사과를 해서 잘 해결되었다는 분위기도 있다.
웹소설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 완화군 이선이 이를 이용해 니콜라이 2세의 반일 감정과 경계를 부추긴다.
7. 여담
- 사건 당시 니콜라이 2세가 입었던 티셔츠는 훗날 그의 신원을 확인하는데 도움을 줬다. 러시아 혁명 이후 피살되어 암매장되었다가 발굴된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들의 신원을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됐던 것이다. 현재도 니콜라이 2세가 당시 입었던 티셔츠가 있는데 당시 입은 상처에서 나온 혈흔이 남아 있다. 여기서 추출한 유전자와 유해의 유전자를 대조했더니 일치하였다. 거기다 로마노프 왕조의 방계 인물들과 대조해도 일치했으니 이 유해들은 틀림없이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으로 밝혀졌다.
- 마크 리퍼트 前 주한 미국대사가 김기종에게 공격을 받은 사건이 벌어졌을 때, 당시 한국 내 시민단체의 반응을 두고 이 오쓰 사건과 비교하는 사례도 있었다. 사건도 어느 망상에 사로잡힌 개인이 강대국의 외교사절에게 테러를 행했다는 점에서 유사하고, 무엇보다 리퍼트 대사의 쾌유 기원을 내세운 각종 시민단체 집회 및 과도한 거국적 사과 분위기가 이 오쓰 사건 당시 일본의 분위기와 유사하였기 때문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주한미국대사 피습 사건 문서에 나와 있다.
[1] 이 때 일본의 중신들은 덴노가 러시아에 납치되어버릴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2] 메이지 천황이 "사이고가 돌아온다면 메이지 10년 전쟁(세이난 전쟁) 때의 수훈자들의 서훈을 모두 박탈하고 나서 그를 맞이하겠다"고 했다는 소문까지 있었다.[3] 현재의 일본 최고재판소. 참고로 이때 대심원은 지금처럼 독립된 사법기관이 아니라 사법성의 산하기관이었다.[4] 일본의 유명한 감옥으로 인지도로 따지면 한국의 청송교도소 같은 곳. 현재는 박물관이 되었다.[5] 다만 러시아 당국은 일본이 쓰다에게 사형을 선고한다면 선처를 해주려 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