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야구
1. 개요
올림픽의 종목 중 야구 종목에 관해 정리한 문서.
2. 역사
올림픽에 참가한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으나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시기는 짧은 편으로 1984 LA 올림픽 이전까지는 뜨문뜨문 야구 경기가 펼쳐졌다.
2.1. 초창기
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개최되었다. 당시 올림픽 조직위원장이었던 앨버트 스폴딩[1] 은 메이저리그 출신 사업가로, 투포환, 단거리 달리기등과 함께 시범경기로 채택되는데 힘을 썻다.
하지만 이때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고, 어떤 팀끼리의 맞대결이 펼쳐졌는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후 올림픽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12 스톡홀름 올림픽 때로, 아이슬란드의 전통 레슬링인 글리마(Glima)와 함께 시범종목으로 채택되면서 였다. 미국 대표팀과 스웨덴 대표팀간의 맞대결이 펼쳐졌으나 제대로된 선수단을 꾸리지 않은 두팀은 마이너리거 짐 소프[2] 등을 포함시킨 미국이 13-3이라는 압도적인 스코어로 승리를 거둔다.Baseball at the Summer Olympics had its unofficial debut at the 1904 Summer Games, and it had a long history as an exhibition.demonstration sport in the Olympics.
하계 올림픽에서의 야구는 1904년 하계 올림픽에서 비공식적인 데뷔를 했으며, 올림픽에서 친선/시범 스포츠로써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Historical Dictionary of Baseball 254p
이후 한동안 올림픽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야구는 야구의 세계화를 외치던 레슬리 만(Leslie Mann)[3] 의 적극적인 로비로 인해 1936 베를린 올림픽에 다시금 참가하게 되었다. 레슬리 만은 일본과 미국간의 매치업을 구상했고 이를 이루기 위해 미국 대표팀 선발전을 개최해 21명의 대표팀 선수를 선발하고, 일본 야구계에도 접촉했으나 결국 미국이외에는 그 어떤 국가에서도 야구 대표팀을 내보내지 않았고 어쩔수 없이 미국 대표팀을 청백팀으로 나누어 7이닝 야간 경기를 치렀다.[4] 아이러니 하게도 경기가 열린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을 찾은 독일인은 무려 90,000명이 들어차 유럽에는 생소한 야구라는 종목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1940 도쿄 올림픽에서 본격적으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될 예정이었고 이때는 미국과 일본뿐 아니라 중국, 필리핀, 하와이, 영국, 쿠바, 멕시코, 독일이 참가하는 올림픽 토너먼트가 구상되었다. 1944 런던 올림픽 때까지 9개국이 참가하는 토너먼트로 진행한 후 1948 올림픽 때 정식 종목으로 도입 시키려고 한 것이 당시 미국 야구계의 플랜이었다. 이를 위해 레슬리 만은 국제야구연맹(IBF)를 1938년에 창설하며 이를 실현화 시키려 했다. 하지만 온 세계를 뒤엎는 화마는 올림픽 개최를 무산시키기에 이르렀고 이후 야구의 올림픽 도전 의지는 점차 시들어져 갔다.
1952 헬싱키 올림픽에서 다시 시범종목으로 개최되었지만 이때는 정식 야구가 아닌 페새팔로(Pesäpallo)라는 핀란드식 야구가 개최되었으며 그나마도 핀란드 팀간의 친선경기만이 열렸다. 이후 1956 멜버른 올림픽에서는 호주와 미국간의 친선 경기가[5] , 1964 도쿄 올림픽에서는 일본과 미국의 친선 경기가 열렸으나 모두 단 1경기만을 치른 시범 종목에 불과했다.
2.2. 정식 종목으로의 승격
이렇듯 단판 친선 경기만이 개최되던 야구가 본격적으로 토너먼트로 진행되기 시작한 것은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이 시작이었다. 1980년 1월, 국제야구연맹이 일본야구협회의 제안에 따라 미국올림픽집행위원회에 야구 종목을 신청했고, 1981년 11월 6일에 공식적으로 올림픽 시범종목으로 채택 되었다. 미국 야구계의 숙원중 하나이자, 앨버트 스폴딩, 레슬리 만의 꿈이 이루어진 순간이었으나 정작 결승에서 일본에게 우승컵을 내주며 자존심을 구겼다. 하지만 다저 스타디움에서 열린 야구 경기는 평균관중 4만명을 기록하며 호평을 받았고[6] 첫 단추가 성공적으로 꿰여진 야구는 1988 서울 올림픽에서도 시범경기로써 자리 잡았으며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정식종목으로 승격, 당당히 올림픽의 한 자리를 꿰찬 종목이 되었다.
이후 1996 애틀란타 올림픽, 2000 시드니 올림픽, 2004 아테네 올림픽, 2008 베이징 올림픽까지 정규 종목으로 선정되며 승승장구 하고 있었다.
2.3. IOC와 MLB 사무국과의 갈등
그러나 IOC는 메이저리그의 적극적이지 못한 모습에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사실 이전부터 이런 갈등은 조금씩 보여왔었는데 와일드카드 제도로 인해 스타급 선수들이 참가하는 축구나 드림팀으로 대표되는 농구와 달리 한국과 일본, 대만 이상 3개국만이 프로선수들을 참가시키며 관심도가 타 종목에 비해 떨어지는 것에 IOC가 불만을 표한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메이저리그라는 막강한 시장성을 가진 미국의 적극적이지 않은 점에서 중계권료를 벌어들이지 못하는 것이 IOC의 가장 큰 불만이었다. 따라서 올림픽 퇴출 논란은 언젠가는 터질 화약과 같았고 미국은 이를 대비해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라는 자신들이 주도하는 국제대회를 준비하기에 이른다.
이 두 단체간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표면화 된 것이 바로 2008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개최된 2007 IOC 싱가포르 총회였다. 여기서 자크 로게 IOC 위원장은 "메이저리거들이 참가 안하면 정식종목 그딴거 없어!"라는 엄포를 놓았고, 이에 메이저리그 사무국을 이끄는 수장 버드 셀릭은 "올림픽 때문에 시즌 중단은 안해 ㅅㄱ."라며 맞받아 쳤다.
2.4. 2008년 퇴출 이후
그리고 2008 베이징 올림픽 이후 IBAF와 일본 야구계의 주도로 올림픽 복귀를 꾸준히 두드렸으나 불발되었고 IOC에서 개최국에게 선택권을 준 올림픽 어젠다 2020을 도입한 2020 도쿄 올림픽에 들어서야 개최국 일본의 선택으로 올림픽에 12년만에 복귀하게 되었다. 허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올림픽 어젠다 제도로 인한 일회성 복귀고 2024 파리 올림픽에서는 역시 채택되지 못했다. 2028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개최국이 미국인지라 채택될 것으로 보이지만 정식 종목이 되지 못하는 이상 한미일 3개국이 아닌 나라에서 개최하는 하계 올림픽에서는 야구가 선택받을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3. 위상과 수준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 열리기 전까지, 야구 월드컵이라는 대회가 있지만 그럼에도 국제 대회에서 올림픽이라는 무게감 때문인지 단연 국제 대회에서 가장 높은 위상을 차지했다. 아마추어 대회 최강국이던 쿠바를 비롯해, 대한민국과 일본, 대만의 경우 대부분의 국제 대회를 다 중요시 여기고 그 중에 올림픽은 WBC 이전까지는 최우선 순위 대회였다. 1998년 아시안 게임, 2000 시드니 올림픽부터 프로 선수의 대회 참가가 결정나자 곧바로 대표팀에 프로급 선수들을 차출하기 시작한 것도 대한민국과 일본이었다.[7]
반대로 주요 메이저리거들이 다수 포함된 미국, 도미니카 공화국 등은 "올림픽에는 40인 로스터에 포함된 선수는 참가할수 없다."메이저리그 사무국의 규정에 따라 주축 선수들이 대거 빠지고 대학 선수, 마이너리그 유망주를 중심으로 대표팀을 꾸렸다. 대표적으로 2000 시드니 올림픽 당시 벤 시츠, 로이 오스왈트, 덕 민트키에비치 등이 참가해 금메달을 딴 2000년 대표팀을 꼽을수 있다.
아마추어 선수들만 참가가 가능했던 1996 애틀란타 올림픽까지 올림픽 금메달을 위해서 대한민국은 프로 입단이 가능한 연령대의 아마추어 선수들을 강제로 실업 야구에 합류시켜 아마추어 신분을 유지한채 대회를 참가토록 했으며 일본은 사회인 야구 선수들 중 베스트 멤버를 선별해 참가시켰다. 쿠바는 야구 월드컵 뿐 아니라 올림픽에서 가장 많은 우승 횟수를 자랑하며 아마추어 야구 강국이라는 이름을 공고히 했을 정도.
대한민국과 일본의 경우에는 프로 선수 참가가 가능하게 된 2000 시드니 올림픽부터는 양국의 프로 선수들이 대거 참여해 메달 경쟁을 펼쳤고 2004 아테네 올림픽 예선이던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8] 외 2008 베이징 올림픽[9] 에서는 메이저리거를 제외한 리그 최정예가 총 출동하기도 했다.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WBSC 프리미어 12가 창설된 이후에도 예전 만큼 압도적인 위상을 자랑하진 못하지만, 그럼에도 국제 대회에서 올림픽 금메달은 상당히 중요한 이름값을 자랑한다.
또한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동메달만 따도 얻을 수 있는 병역특례 때문인지 상당히 적극적인 선수 선발이 이루어 진다.
3.1. 대한민국의 올림픽 대표팀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올림픽 항목 참조.
3.2. 일본의 집념
일본의 경우에는 올림픽 금메달을 향한 집념이 있는데,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이후로 최고 성적이 1996 애틀란타 올림픽 은메달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에게도 야구로써 자신감을 내비쳤던 일본은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대만에게 일격을 당해 동메달에 그쳤으며, 1996 애틀란타 올림픽에서는 결승까지 진출했으나 쿠바에게 13:9라는 석패를 당하며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마쓰자카 다이스케등 일본 프로선수들이 대거 참여했지만 구대성이 마운드에 오른 김응룡호에 동메달을 내주며 무관에 그쳤고, 삿포로 참사로 인해 김재박호가 광탈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미국 또한 팬아메리카 게임에서 광탈하는 바람에 참가하지 못해 그 어느때보다 메달 획득의 기회가 높았던 상황에서 호주의 선발 크리스 옥스프링[10] 에게 꽁꽁 묶이며 1:0 석패를 당해 결국 동메달 결정전으로 내려가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이를 만회하고자 2008 베이징 올림픽땐 아오키 노리치카, 와다 츠요시, 다르빗슈 유, 와쿠이 히데아키등 당대 내노라는 스타급 선수들을 총 출동 시켰음에도 대한민국에게 2번이나 패하고 심지어 동메달 조차 따지 못하는 베이징 쇼크를 당하며 온갖 비난을 받아야 했다.
2020 도쿄 올림픽 야구 종목에서도 단 6개국만 참가시키고, 패자조가 존재하는 라운드 로빈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도 적은 국가가 참가하고, 단기 토너먼트보다는 패하더라도 한번의 기회가 더 존재하는 방식이 홈에서 열리는 대회에서 금메달을 딸 확률이 더 높아지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4. 특징
4.1. 아마추어리즘과 프로페셔널 사이
1996 애틀란타 올림픽까지는 아마추어리즘을 표방해 프로 선수 참가도 불가했고, 아마추어 선수들이 사용하는 반발력 높은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했다. 하지만 2000 시드니 올림픽부터는 프로 선수 참가가 허용되었고, 엔트리 또한 24명으로 확대되었다. 야구 장비들 또한 프로들이 사용하는 장비로 바뀌게 된다.
국가간의 편차가 큰 만큼 머시 룰(Mercy Rule), 일명 콜드 게임이 유지되고 있으며 2008 베이징 올림픽부터는 성인 국제 대회 최초로 승부치기가 도입되었다.
4.2. 소프트볼과의 관계
올림픽에 야구는 남자의 종목인데 반해, 소프트볼은 여자의 종목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유는 프로리그가 활성화 되어 있는 야구에 비해 소프트볼은 아마추어 활동이 더 활발하고, 비슷한 종목이기에 개최국 비용 절감의 이유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로인해 올림픽에서 야구가 포함되면 소프트볼도 포함되며, 야구가 제외되면 소프트볼도 함께 제외된다.
5. 대회 연혁
6. 역대 우승국
7. 관련 문서
[1] 메이저리그 단일시즌 47승을 기록한적이 있던 투수 출신 사업가. 이후 헐버트와 함께 메이저리그 내셔널 리그의 창설에 주도적인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으며, "미국의 국기는 야구"라는 신념하에 야구 세계화를 위해 노력한 인물이기도 하다.[2] 비운의 메달리스트로 유명한 인디언계 미국 스포츠 선수.[3] 과거 전 미식축구 및 농구 코치 및 메이저리그 선수.[4] 이때 미국 대표팀의 투수중 한명인 빌 세일리스는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게 된다.[5] 이때 모인 114,000명의 관객 수치는 꽤 놀라우나 실제로는 경기 중반 이후 들어온 관객이 대다수이고 이들은 모두 야구 경기 종료후 펼쳐질 육상 경기를 보러 온 것이다.[6] 당시 기사.[7] 다만 일본은 현재 아시안 게임에는 사회인 야구 선수들로 내보낸다. 아시안 게임까지 프로팀 선수를 내보내며 적극적으로 나서는 국가는 사실상 병역특례가 걸려있는 대한민국 뿐이다.[8] 삿포로 참사로 진출은 실패.[9] 예선이던 2007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 때는 박찬호(뉴욕 메츠), 류제국(템파베이 레이스)가 소집되었다. 다만 메이저리그 일정과 겹쳐지는 대륙별 플레이오프와 베이징 올림픽 본선무대는 참가하지 못했다.[10] 후에 롯데 자이언츠, kt wiz에서 뛰었던 선수가 맞다.[11] 핀란드 퍼새팔로(Pesäpalloliitto) 대표팀.[12] 노동자 선수 협회(Työväen Urheiluliit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