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도심(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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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의 옛 중심지였던 중구와 영도구, 동구와 서구 등 역사적으로 부산부였던 지역을 통틀어 부를 때 사용되는 단어. 부산광역시청의 소재지였던 만큼 과거 부산에서 가장 번화한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던 지역이다. 그래서 이름도 '''원'''도심인 것. 옛 구(舊) 자를 써서 구도심이라 부르기도 하나, '몰락한 과거의 도심'이라는 부정적 뉘앙스가 강해서 원도심에 비해 잘 사용되진 않는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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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롯데백화점 광복점 위치에 있던 구 부산광역시청의 모습.[2]
현대적 도시로서의 부산이 처음 번성했던[3] 부산항 인근 지역에 해당한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왜관을 중심으로 한 일본인 집단 거류지였는데,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산을 없애고[4] 원도심 해안가를 모두 매립하였다. 또한 일본인들이 많이 살던 데다가 항구가 있어 일본과의 교통이 편리한 이곳이 부산의 중심지로 거듭난 것이었다. 부관연락선이 닿던 곳도 이쪽이었고, 부산역전 대화재 이전의 부산역도 현재보다 이쪽으로 더 붙어 있었으며[5] 무엇보다 부산부청이 여기 있었기 때문에[6] 그야말로 명실공히 부산의 중심이라 할 만했지만, 역시 일본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다 부산잔교역을 통해 공출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했고, 특히 경성역이 아닌 이쪽 방면을 (도쿄 방면이라) 상행이라 불렀던 점이 조선인들의 반감을 사 당시엔 이쪽 동네에 대한 인식이 좋지만은 않았다.
그러다 1945년 해방이 이루어지고, 일본인들이 축출당하면서 용두산신사는 헐렸고, 동네 이름들도 해방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광복', '충무'로 바뀌었지만 곧바로 몰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원도심권이 밀려나게 된 시발점은 옛 동래 지역권의 발전에 있었는데, 특히 현 부산 최대 도심인 서면 지역의 발전이 원도심에 치명상을 입힌 것으로 회자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산시청과 부산지방법원 등의 공공기관 이전, 문현금융단지 조성으로 한국은행과 금융기관의 이전, 부산신항 개장으로 항만기관의 이전이 큰 타격을 줬으며 부산국제영화제는 협소한 남포동에서 더 이상 진행이 불가능해 센텀시티로 이전[7] 을 하는 바람에 원도심은 그야말로 쇠퇴기가 찾아오고 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런 쇠퇴기가 2010년대 이후 주춤해졌다는 것인데, 광복로의 가로 재정비 사업과 함께 구 부산시청 자리에 롯데백화점 광복점 등이 개장하면서 관광상권으로 다시 유동인구가 늘어나 어느정도 회복세를 보이고 있으며 2010년대 기준으로 서면에 이은 부산 제2의 상권에 해당한다. 문제는 젠트리피케이션도 함께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지만.
실생활에서는 말 그대로 도심이었던 지역만을 칭하는 경우가 많아 좁게는 남포동을 중심으로 광복동, 충무동, 부평동, 중앙동, 동광동 정도를 묶어 부르는 데 쓰이고, 넓게 잡아도 보수동, 토성동, 남부민동, 송도(암남동) 정도의 선을 벗어나지 않으며, 드물게 옛 부산전차 종점과 부산운동장이 있었던 대신동까지 이 범위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이 선을 따르면 맨 위 지도의 영역보다 좁아져, 동구는 사실상 제외되고 중구와 서구 일부만을 부르는 명칭이 되는데, 행정적으로만 재생 필요 지역이라는 의미로 '원도심'이라는 단어 안에 동구-영도-사하까지 묶어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면 적당하다. 다만 아무리 넓게 잡아 동구까지 묶어도 좌천동이나 범일동까지를 구도심으로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8] 좀 늦게 부산부에 편입되고 90년대 초반에 서구에서 분구된 사하구 지역의 경우 아예 강서구와 묶어 별도로 서부산으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이 때는 서구도 은근슬쩍 서부산에 끼기도 한다.
흔히 남포동이라 불리는 번화가 지역인 광복로와 BIFF거리, 롯데백화점 광복점, 자갈치시장, 부평깡통시장과 보수동 책방골목 등 다수의 상업시설이 밀집해 있다. 주로 부산 토박이가 원도심 또는 남포동 가자고 말하면 십중팔구 중구를 칭한다. 부산역은 행정구역상 동구에 위치해 있어 이 경우에는 보통 포함하지 않는다.
부산시에서는 인구 감소와 고령화가 급속도로 이루어지고 있는 서구, 중구, 동구, 영도구를 하나의 구로 통합하여 통합 자치구로 출범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찬성 여론이 우세하다. 한국지방정부학회가 의뢰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서구-동구-영도구에선 찬성 여론이 60~67%대로 압도적이나, 중구에서는 반대가 55%다. 이쪽은 오래된 역사와 전통이 있는 구를 통합한다는 것 때문에 강한 반대 여론이 있는듯. 인구 4만 2천여명에 웬만한 행정동 면적만한 중구에 부산 제2의 번화가 및 상권이 밀집해 있으니 그럴만도 하다. 2017년 하반기에 통합 반대 현수막을 걸어놓고 시위까지 했다. 학교의 경우는 서구, 중구랑 동구는 학군이 서로 갈리는데[9] 네 개의 구가 통합이 되면 학군 개편을 다시 해야 하는 등 행정적인 절차가 복잡해진다.[10]
결국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선거구가 서구·동구와 중구·영도구로 통합되었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통합을 추진하던 서병수 시장이 낙선하고 통합 반대파인 오거돈 시장이 당선되었다. 또한 4개구 구청장 모두 통합반대파가 당선되어 4개구 통합은 전면 무산되었다. 원도심 중에 유일하게 자유한국당 소속인 공한수 구청장마저 통합반대파에 속한다.
고령화가 심각하여 서구,중구,동구의 교육기관이 가장 큰 영향을 받고있다. 서구는 충무초등학교, 알로이시오중학교, 알로이시오전자기계고등학교 폐교, 중구는 삼육초등학교 이전, 남일초등학교, 동광초등학교, 남성여자중학교 폐교, 동구는 중앙초등학교, 좌성초등학교, 좌천초등학교, 금성중학교가 폐교했다. 이 외에 부산고등학교와 경남고등학교도 센텀시티로 이전하려고 했으나 주민과 동문들의 반발로 무산된 바 있다.
원도심 지역 일대에 낙후된 건물이 굉장히 많다. 지금은 재개발로 신축 건물이 많아졌지만 10년전만 하더라도 평균 40년된 건물이 수두룩 했다.
부산 최초의 주상복합건물 부산데파트가 중앙동6가에 있으며 1969년에 개장했다.
부산 최초의 아파트인 청풍장, 소화장이 남포동에 있으며 1941년에 준공되었다.
부산 최초의 민간호텔인 반도호텔이 중앙동4가에 있었으며 1954년에 개관, 1994년에 폐업했다.
부산 최초의 제과점인 백구당이 중앙동4가에 있으며 1959년에 개장했다.
부산 최초의 백화점인 미나카이 백화점이 중앙동7가에 있었다. 현 롯데백화점 광복점 부지다.
부산 최초의 영화관인 행좌가 남포동에 있었으며 1903년에 개장했다.
부산 최초의 유치원인 부산유치원이 동광동에 있었다.
부산 최초의 근대학교인 봉래초등학교가 영주동에 있으며 1896년에 개교했다.
부산 최초의 근대병원인 제생병원이 동광동에 있었으며 1877년에 개원했다.
부산 최초의 교회인 초량교회의 전신 영선현교회가 영주동에서 시작했었으며 1892년에 설립했다.
부산MBC가 중앙동6가에 있었으며 현재는 민락동으로 이전했다.
광복동 한복판에 동주여자고등학교와 대각사가 있다.
향토백화점인 미화당과 유나백화점이 있었으나 1990년대 후반 부도로 없어졌다.
미화당 신관 옥상과 용두산공원을 연결하는 사랑의다리가 있었으며 지금은 없어졌다.
향토서점인 문우당서점과 남포문고가 있었으나 현재는 규모를 대폭 축소해 남포문고는 남포동비프광장 인근, 문우당서점은 중앙동으로 이전했다.
범일동과 함께 영화관이 밀집한 곳이였다. 많은 향토영화관이 있었으나 경영난과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생겨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하거나 인수되어 지금은 향토영화관이 없다. 여담으로 부산국제영화제의 시초는 바로 이 곳 남포동이다.
중앙동은 1980년대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어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 인기가 있다. 대표적인 영화는 범죄와의 전쟁.
원도심을 주무대로 만든 드라마 피아노가 있다. 2000년대 초반, 영화와 드라마촬영은 모두 서울과 수도권에서 이루어졌으며 부산에서의 촬영은 희박할 정도로 없을 정도다보니 당시 드라마 피아노와 영화 친구가 촬영했을 때 구경온 인파가 굉장히 많았다고 한다.
동광동과 중앙동의 동 경계지점은 옛 부산항의 해안선을 따라 나누어져 있으며 부산데파트~백산기념관 구간은 고저차가 크게 나지 않으나 백산기념관~부원아파트 구간은 고저차가 매우 심하다. 이후 영주교차로 일대에서 같은 평지가 된다. 부원아파트 일대 고저차가 매우 심한 이유는 과거 영선산이 있었기 때문. 영선산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의해 없어진 산이다.
동광동에는 부산인쇄업의 시초이자 원조인 동광동인쇄골목이 있다.
서구청은 복개된 보수천 중 하류지점인 검정다리~서구청 구간으로 서울의 청계천 처럼 복원공사를 계획하고 있었으나 무산됐다. 유사한 시기에 복원계획이 잡힌 초량천은 복원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원도심 지역에 있는 초등학교 중 몇몇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영주동 봉래초등학교는 1896년 개교, 대청동 구.남일초등학교[11] 는 1912년 개교, 동광동 구.동광초등학교[12] 는 1921년에 개교를 했다.
1960년대~1970년대 당시 서구 충무동에 고속,시외버스터미널이 있었다. 1970년대 이후 범일동으로 이전을 하였으며 1980년대 중반 온천동[13] 과 괘법동으로 각각 이전을 했다.
1. 개요
부산광역시의 옛 중심지였던 중구와 영도구, 동구와 서구 등 역사적으로 부산부였던 지역을 통틀어 부를 때 사용되는 단어. 부산광역시청의 소재지였던 만큼 과거 부산에서 가장 번화한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던 지역이다. 그래서 이름도 '''원'''도심인 것. 옛 구(舊) 자를 써서 구도심이라 부르기도 하나, '몰락한 과거의 도심'이라는 부정적 뉘앙스가 강해서 원도심에 비해 잘 사용되진 않는다.[1]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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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롯데백화점 광복점 위치에 있던 구 부산광역시청의 모습.[2]
현대적 도시로서의 부산이 처음 번성했던[3] 부산항 인근 지역에 해당한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왜관을 중심으로 한 일본인 집단 거류지였는데,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산을 없애고[4] 원도심 해안가를 모두 매립하였다. 또한 일본인들이 많이 살던 데다가 항구가 있어 일본과의 교통이 편리한 이곳이 부산의 중심지로 거듭난 것이었다. 부관연락선이 닿던 곳도 이쪽이었고, 부산역전 대화재 이전의 부산역도 현재보다 이쪽으로 더 붙어 있었으며[5] 무엇보다 부산부청이 여기 있었기 때문에[6] 그야말로 명실공히 부산의 중심이라 할 만했지만, 역시 일본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다 부산잔교역을 통해 공출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했고, 특히 경성역이 아닌 이쪽 방면을 (도쿄 방면이라) 상행이라 불렀던 점이 조선인들의 반감을 사 당시엔 이쪽 동네에 대한 인식이 좋지만은 않았다.
그러다 1945년 해방이 이루어지고, 일본인들이 축출당하면서 용두산신사는 헐렸고, 동네 이름들도 해방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광복', '충무'로 바뀌었지만 곧바로 몰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원도심권이 밀려나게 된 시발점은 옛 동래 지역권의 발전에 있었는데, 특히 현 부산 최대 도심인 서면 지역의 발전이 원도심에 치명상을 입힌 것으로 회자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산시청과 부산지방법원 등의 공공기관 이전, 문현금융단지 조성으로 한국은행과 금융기관의 이전, 부산신항 개장으로 항만기관의 이전이 큰 타격을 줬으며 부산국제영화제는 협소한 남포동에서 더 이상 진행이 불가능해 센텀시티로 이전[7] 을 하는 바람에 원도심은 그야말로 쇠퇴기가 찾아오고 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런 쇠퇴기가 2010년대 이후 주춤해졌다는 것인데, 광복로의 가로 재정비 사업과 함께 구 부산시청 자리에 롯데백화점 광복점 등이 개장하면서 관광상권으로 다시 유동인구가 늘어나 어느정도 회복세를 보이고 있으며 2010년대 기준으로 서면에 이은 부산 제2의 상권에 해당한다. 문제는 젠트리피케이션도 함께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지만.
3. 범위
실생활에서는 말 그대로 도심이었던 지역만을 칭하는 경우가 많아 좁게는 남포동을 중심으로 광복동, 충무동, 부평동, 중앙동, 동광동 정도를 묶어 부르는 데 쓰이고, 넓게 잡아도 보수동, 토성동, 남부민동, 송도(암남동) 정도의 선을 벗어나지 않으며, 드물게 옛 부산전차 종점과 부산운동장이 있었던 대신동까지 이 범위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이 선을 따르면 맨 위 지도의 영역보다 좁아져, 동구는 사실상 제외되고 중구와 서구 일부만을 부르는 명칭이 되는데, 행정적으로만 재생 필요 지역이라는 의미로 '원도심'이라는 단어 안에 동구-영도-사하까지 묶어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면 적당하다. 다만 아무리 넓게 잡아 동구까지 묶어도 좌천동이나 범일동까지를 구도심으로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8] 좀 늦게 부산부에 편입되고 90년대 초반에 서구에서 분구된 사하구 지역의 경우 아예 강서구와 묶어 별도로 서부산으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이 때는 서구도 은근슬쩍 서부산에 끼기도 한다.
3.1. 중심지
흔히 남포동이라 불리는 번화가 지역인 광복로와 BIFF거리, 롯데백화점 광복점, 자갈치시장, 부평깡통시장과 보수동 책방골목 등 다수의 상업시설이 밀집해 있다. 주로 부산 토박이가 원도심 또는 남포동 가자고 말하면 십중팔구 중구를 칭한다. 부산역은 행정구역상 동구에 위치해 있어 이 경우에는 보통 포함하지 않는다.
4. 통합 논의
부산시에서는 인구 감소와 고령화가 급속도로 이루어지고 있는 서구, 중구, 동구, 영도구를 하나의 구로 통합하여 통합 자치구로 출범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찬성 여론이 우세하다. 한국지방정부학회가 의뢰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서구-동구-영도구에선 찬성 여론이 60~67%대로 압도적이나, 중구에서는 반대가 55%다. 이쪽은 오래된 역사와 전통이 있는 구를 통합한다는 것 때문에 강한 반대 여론이 있는듯. 인구 4만 2천여명에 웬만한 행정동 면적만한 중구에 부산 제2의 번화가 및 상권이 밀집해 있으니 그럴만도 하다. 2017년 하반기에 통합 반대 현수막을 걸어놓고 시위까지 했다. 학교의 경우는 서구, 중구랑 동구는 학군이 서로 갈리는데[9] 네 개의 구가 통합이 되면 학군 개편을 다시 해야 하는 등 행정적인 절차가 복잡해진다.[10]
결국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선거구가 서구·동구와 중구·영도구로 통합되었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통합을 추진하던 서병수 시장이 낙선하고 통합 반대파인 오거돈 시장이 당선되었다. 또한 4개구 구청장 모두 통합반대파가 당선되어 4개구 통합은 전면 무산되었다. 원도심 중에 유일하게 자유한국당 소속인 공한수 구청장마저 통합반대파에 속한다.
고령화가 심각하여 서구,중구,동구의 교육기관이 가장 큰 영향을 받고있다. 서구는 충무초등학교, 알로이시오중학교, 알로이시오전자기계고등학교 폐교, 중구는 삼육초등학교 이전, 남일초등학교, 동광초등학교, 남성여자중학교 폐교, 동구는 중앙초등학교, 좌성초등학교, 좌천초등학교, 금성중학교가 폐교했다. 이 외에 부산고등학교와 경남고등학교도 센텀시티로 이전하려고 했으나 주민과 동문들의 반발로 무산된 바 있다.
5. 여담
원도심 지역 일대에 낙후된 건물이 굉장히 많다. 지금은 재개발로 신축 건물이 많아졌지만 10년전만 하더라도 평균 40년된 건물이 수두룩 했다.
부산 최초의 주상복합건물 부산데파트가 중앙동6가에 있으며 1969년에 개장했다.
부산 최초의 아파트인 청풍장, 소화장이 남포동에 있으며 1941년에 준공되었다.
부산 최초의 민간호텔인 반도호텔이 중앙동4가에 있었으며 1954년에 개관, 1994년에 폐업했다.
부산 최초의 제과점인 백구당이 중앙동4가에 있으며 1959년에 개장했다.
부산 최초의 백화점인 미나카이 백화점이 중앙동7가에 있었다. 현 롯데백화점 광복점 부지다.
부산 최초의 영화관인 행좌가 남포동에 있었으며 1903년에 개장했다.
부산 최초의 유치원인 부산유치원이 동광동에 있었다.
부산 최초의 근대학교인 봉래초등학교가 영주동에 있으며 1896년에 개교했다.
부산 최초의 근대병원인 제생병원이 동광동에 있었으며 1877년에 개원했다.
부산 최초의 교회인 초량교회의 전신 영선현교회가 영주동에서 시작했었으며 1892년에 설립했다.
부산MBC가 중앙동6가에 있었으며 현재는 민락동으로 이전했다.
광복동 한복판에 동주여자고등학교와 대각사가 있다.
향토백화점인 미화당과 유나백화점이 있었으나 1990년대 후반 부도로 없어졌다.
미화당 신관 옥상과 용두산공원을 연결하는 사랑의다리가 있었으며 지금은 없어졌다.
향토서점인 문우당서점과 남포문고가 있었으나 현재는 규모를 대폭 축소해 남포문고는 남포동비프광장 인근, 문우당서점은 중앙동으로 이전했다.
범일동과 함께 영화관이 밀집한 곳이였다. 많은 향토영화관이 있었으나 경영난과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생겨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하거나 인수되어 지금은 향토영화관이 없다. 여담으로 부산국제영화제의 시초는 바로 이 곳 남포동이다.
중앙동은 1980년대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어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 인기가 있다. 대표적인 영화는 범죄와의 전쟁.
원도심을 주무대로 만든 드라마 피아노가 있다. 2000년대 초반, 영화와 드라마촬영은 모두 서울과 수도권에서 이루어졌으며 부산에서의 촬영은 희박할 정도로 없을 정도다보니 당시 드라마 피아노와 영화 친구가 촬영했을 때 구경온 인파가 굉장히 많았다고 한다.
동광동과 중앙동의 동 경계지점은 옛 부산항의 해안선을 따라 나누어져 있으며 부산데파트~백산기념관 구간은 고저차가 크게 나지 않으나 백산기념관~부원아파트 구간은 고저차가 매우 심하다. 이후 영주교차로 일대에서 같은 평지가 된다. 부원아파트 일대 고저차가 매우 심한 이유는 과거 영선산이 있었기 때문. 영선산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의해 없어진 산이다.
동광동에는 부산인쇄업의 시초이자 원조인 동광동인쇄골목이 있다.
서구청은 복개된 보수천 중 하류지점인 검정다리~서구청 구간으로 서울의 청계천 처럼 복원공사를 계획하고 있었으나 무산됐다. 유사한 시기에 복원계획이 잡힌 초량천은 복원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원도심 지역에 있는 초등학교 중 몇몇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영주동 봉래초등학교는 1896년 개교, 대청동 구.남일초등학교[11] 는 1912년 개교, 동광동 구.동광초등학교[12] 는 1921년에 개교를 했다.
1960년대~1970년대 당시 서구 충무동에 고속,시외버스터미널이 있었다. 1970년대 이후 범일동으로 이전을 하였으며 1980년대 중반 온천동[13] 과 괘법동으로 각각 이전을 했다.
[1] 다만 몰락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오늘날 제1의 상권인 서면을 비롯해 해운대, 부산대, 대연동, 덕천, 하단, 사상 등 새로운 상권들이 치고 올라왔지만 원도심(정확히는 남포동-광복동 일대)은 여전히 서면에 이어 부산 제2의 상권을 유지하는 중이며, 서면과 유동인구 및 방문객 수 경쟁을 이어가고 있다.[2] 때문에 이 교차로의 명칭을 옛시청교차로라고 지정하였다. 교통정보 안내방송에 옛시청이라고 하면 십중팔구 이곳 남포동을 일컫는다.[3] 근현대 이전, 삼국시대 때부터 부산 지역의 중심지는 쭉 지금의 동래구 일대였다. 동래는 정체된 상태로 존재하다가 남쪽에서 시작한 부산 시가지의 확장으로 비로소 부산의 변두리로 편입되는 과정을 거쳤다.[4] 영선산, 용미산[5] 지금의 중앙역 인근. 현재의 부산역은 그 당시 초량역이었다.[6] 지금 롯데타운타워 공사 중인 곳이다.[7] 이후 남포동 상인들의 반발로 프로그렘의 일부는 남포동으로 다시 이전했다.[8] 대신 이 곳에는 부산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된 산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부산광역시의 2번 항목에 나와있다.[9] 서구와 중구는 서부교육지원청 소속이고 동구는 무려 남부교육지원청 소속이다. 이는 부산에 동부교육지원청이 별도로 없기 때문이다. [10] 물론 평강천을 경계로 1학군과 3학군이 갈리는 강서구, 그리고 바다와 접하냐 안접하냐에 따라 4학군과 5학군이 갈리는 기장군처럼 중구와 동구를 경계로 하여 그대로 둘 수도 있다. 물론 명지신도시 지역의 인구가 많아질 경우 원도심 전체를 남부교육지원청에 두는 걸로 조정해버릴 수도 있는데, 남부지원청은 동구와 남구만 들어가서 면적이 가장 좁기 때문이다.[11] 현 광일초등학교[12] 현 광일초등학교[13] 이후 노포동으로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