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할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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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때 활약한 독일 국방군의 육군 장군으로 최종 계급은 상급대장.
발터 폰 브라우히치, 알프레트 요들과 같은 참모장교로 특히 독일군의 리즈시절 때였던 2차대전 초반에 육군 총참모장을 맡아 독일군의 대승에 일조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를 그리 신용하지 않아 전쟁 중반 이후로는 히틀러 반대파와 지지파 사이에서 오락가락했고, 결국 히틀러에 의해 파면당한 후 반히틀러 음모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운좋게도 미군에게 구출되면서 다른 주모자들처럼 처형되지 않고 천수를 누렸다. 반나치 성향의 인물이기는 했으나 그와 별개로 학살 명령을 내린 바 있는 엄연한 전범이다. 나치 도이칠란트 내에도 재판에 피고로 기소되지 않았어도 전범인 사례는 많다.
2. 경력
2.1. 초기이력
바이에른의 뷔르츠부르크에서 바이에른 공국군 장군인 막스 할더의 아들로 태어났다. 독일 제국 성립 후에도 이전의 제후국들과 공국들의 군대가 기존 편제를 유지한 채로 프로이센군이 중심이 된 독일제국군에 편입되었고, 바이에른군도 이런식으로 편제를 유지하면서 독일 제국군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편제만 유지된 게 아니라 독자적인 교육기관 까지 갖추고 있었다.[1] 할더도 바이에른 포병연대에서 사관후보생으로 군생활을 시작했고, 1904년에 소위로 임관하면서 뮌헨에 있던 포병학교와 참모학교를 졸업했다.
1914년 1차대전이 발발하자 알더는 제3바이에른군단의 보급장교로 복무하였다. 이후 대위로 승진하여 여러 야전군의 참모장교로 대전기간을 보냈다.
2.2. 바이마르 공화국
제1차대전에서 독일제국이 패망한후 수립된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군의 훈련부분에서 일했다. 특히 참모의 역할을 중시하는 독일군이었기 때문에, 야전보다는 참모와 보급, 훈련쪽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서서히 승진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후 제7군관구(Wehrkrei VII)의 작전과장을 맡았고, 1931년에는 국방부 본부로 와서 훈련부장으로 일했다. 이후에도 여러 요직을 거치다가 1934년 소장(한국군의 준장에 해당)으로 승진하였다.
2.3. 히틀러 집권 초기
[image]히틀러 집권 이후에도 계속 승진을 거듭하여 참모와 훈련 담당을 거치면서 1938년 2월 포병대장(한국군의 중장에 해당)으로 승진했다. 1938년에 총참모장이었던 루트비히 베크가 국방군 지휘권을 침범하는 히틀러에 항의하여 사임했다. 히틀러의 가신이었던 빌헬름 카이텔은 공석이 된 육군 총참모장의 자리를 육군의 지지를 받고 있으면서도 상명하복에 철저한 프란츠 할더가 적임자라고 생각해 그를 추천했다. 이때 할더는 카이텔의 제안을 받고, 육군 총사령관으로 내정된 발터 폰 라이헤나우와 함께 일하지 않는 조건으로 수락했다.[2] 의외로 히틀러는 할더의 조건을 순순히 받아들였고, 육군 총사령관의 자리는 카이텔의 천거로 온화한 성격의 발터 폰 브라우히치를 임명했다. 할더가 선택된 이유는 나치의 본거지인 바이에른 출신이라는 점을 좋게 본 히틀러와 그의 능력을 신망하던 군부 모두 타협하여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할더는 이보다 훨씬 전부터 베크와 함께 반히틀러 음모에 참여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1935년에 베르사유 조약을 무시하고 라인란트 진군을 감행했는데, 이 때문에 독일 군부의 장교들은 히틀러가 제대로 된 재무장을 하기도 전에 전쟁을 일으켜 다시 한 번 독일을 멸망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험주의자 히틀러를 끌어내려야 한다고 생각한 장교들 여러 명이 음모를 꾸미고 있었고, 할더도 이 중 한 사람이었다. 이후 오스트리아 병합, 주테덴란트 병합 등의 여러 위기에서 독일 군부는 이러한 극단적 조치들을 조마조마하게 생각했지만, 히틀러의 도박은 그 때마다 성공을 거두었다. 이제 히틀러의 대박을 본 군부는 히틀러를 끌어내리려는 생각을 그만두고 히틀러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기로 한다.
할더 또한 이런 위기에서 한때는 히틀러를 친견할때 자신이 직접 권총으로 암살할 계획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히틀러의 정책이 계속 성공하는 모습을 보자 반히틀러 운동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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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폴란드 침공과 프랑스 침공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전투 한 번 없이 손에 넣은 히틀러는 폴란드에 단치히 회랑을 내놓으라고 협박했지만, 폴란드는 앞선 두 병합 때와 달리 히틀러의 협박에 굴하지 않았다. 이 단치히 회랑은 원래 프로이센의 영토였고, 동프로이센과 독일 본토를 갈라놓고 있었기 때문에 나치든 비나치든 독일 국수주의자들에게는 반드시 되찾아야할 땅으로 인식되고 있었다.[3] 이 때문에 할더도 그동안 히틀러의 도박적인 노선을 반대했지만, 폴란드에 대한 태도에서는 히틀러와 의견이 일치했다.
할더와 독일 국방군은 이런 맥락에서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계획에 적극 협력했다. 물론 이들도 폴란드와 전쟁을 벌일 때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독일의 서부로 침공해 맞불을 놓으면 독일은 또 다시 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폴란드와 전쟁을 시작하기 직전 독소 불가침조약이 맺어지자 조금은 안도하여 폴란드를 목표로 한 전쟁 준비에 전념하게 된다. 총참모장이었던 할더는 빈틈없는 계획을 짜서 폴란드군을 분쇄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1939년 9월 1일 개전된 폴란드 침공에서 독일군은 한 달 만에 강한 육군을 갖고 있었던 폴란드를 간단히 제압하고 9월 17일 동부에서 침공해온 소련군과 함께 폴란드를 반분하였다. 다만 할더의 우려대로 폴란드 침공에 더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히틀러는 다시 프랑스 정복을 위해 1939년 11월 중 X-day를 발동해 공세를 시작하려고 했고, 할더와 음모자들은 이 직전에 히틀러를 제거하려고 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갑자기 X-day의 무기한 연기를 지시했고, 다시 반히틀러 음모는 길을 잃고 말았다.
그동안 할더는 뒤로는 히틀러에 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덴마크와 노르웨이에 대한 침공 작전인 베저위붕 작전과 프랑스 및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삼국에 대한 세부 침공 작전을 수립하고 검토하였다. 어쨌든 할더가 지휘하는 총참모부의 작전 계획은 1940년 1월의 덴마크-노르웨이 침공과 1940년 5월의 프랑스 침공에 큰 효과를 발휘했고, 독일군은 세계의 예상을 뒤엎고 단 6주만에 프랑스를 쓰러뜨렸다.
이렇게 되고 보니 히틀러의 모험주의 때문에 독일이 또 패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없어졌고, 반히틀러 세력들의 영향력은 매우 약화되었다. 심지어 할더는 대놓고 이런 음모가들에게 "나는 이 계획에서 발 빼겠다"고 선언해 버렸다.
2.5. 바르바로사 작전
히틀러는 프랑스를 정복한 직후 영국 본토 항공전을 시작해 영국을 정복하려고 했지만 영국 공군에 참패했고, 해군과 육군을 동원해 대규모로 진행될 예정이었던 영국 상륙 작전인 제뢰벤(바다사자) 작전은 무기한 연기 되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영국 본토 항공전 이전에 벌써 소련 정복을 염두에 두고 참모본부에 계획을 실행하라는 명령을 내려놓고 있었다."아군이 적 12개 사단을 섬멸하면, 적은 그냥 12개 사단을 새로 투입한다...아군은 표류하는 난파선의 조각 처럼 전선 여기저기를 떠돌고 있다"
할더 뿐만 아니라 구데리안, 만슈타인, 룬트슈테트 등 독일군 고참 장성들 대부분이 영국과의 전쟁을 하는 상황에서 소련과의 전쟁을 할 필요가 있는가 회의적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들도 막상 전쟁에 돌입해서 독일군이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회의적이었다는 주장 자체도 거짓이었을 가능성이 커진 상태다.[4] 여하튼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인해 미국이 독일을 상대로 선전포고할 가능성이 있다는 경고를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할더는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렸다. 그래서 그런 왜곡적인, 장밋빛 환상에 젖은 작전계획이 수립될 수 있었던 것.[5] 시간이 날 때마다 수학 문제를 푸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해서 "수학 교수"라는 별명이 있었던 할더조차 이럴 정도였으니 히틀러의 의지는 꺾을 수 없었고 참모본부는 소련을 10주 안에 정복할 수 있다는 작전 계획안을 내놓았다.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었고, 독일군은 소련군 600만명을 섬멸하는 등 초반에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소련은 이런 대패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았고, 시간이 갈수록 소련의 거대한 잠재력에 독일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특히 1941년 12월에 벌어진 모스크바 전투에서 진 독일군은 결정적으로 패퇴하기 시작했다. 할더는 일단 병력을 후방으로 후퇴시켜 전투력을 보존하기를 원했으나 히틀러는 현 진지에 대한 고수를 고집했고, 결국 이 견해 차이는 할더에 대한 히틀러의 신임이 떨어지기 시작한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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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블라우 작전
1942년 봄철이 되고 해빙기가 찾아오자 전선은 소강 상태에 이르렀고, 다시 해빙기를 지나자 독일군은 다시 공세를 준비했다. 히틀러는 모스크바를 직접 공략하기 보다는 소련의 남부 캅카스 방면으로 진격하여 소련의 유전 지대를 점령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독일 남부집단군을 두 갈래로 나누어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 원수가 지휘하는 B집단군은 스탈린그라드로,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가 지휘하는 A집단군은 바쿠 방면으로 진격하는 블라우 작전을 세웠다.
6월 부터 벌어진 블라우 작전에서 A집단군의 진격은 순조로웠지만, B집단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과 일진일퇴의 소모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때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 점령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많은 사단을 스탈린그라드에 밀어넣었고, 이들 부대들은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도 못한채 불지옥에서 하나하나 박살이 났다. 할더는 이런 소모전이 의미없다고 생각하고 볼가강의 운송 능력만 끊어놓자고 요청했지만, 히틀러는 이를 거부했다.
이런 독일군의 축차투입을 본 소련군은 대규모 양익 포위를 통해 전세를 뒤집으려고 했고, 이 움직임은 할더의 정보망에 포착되었다. 할더는 히틀러에게 스탈린그라드 양익에 대규모의 소련군이 집결하고 있다고 보고를 했다. 할더는 히틀러가 안믿을까봐 사단을 여단으로 축소 보고하기까지 하면서 소련군의 대규모 병력 투입을 경고했지만, 히틀러는 "그런 미친 소리는 개도 안믿겠다"며 비웃고, 제1차 세계 대전 때 전상장 흑장을 딴 자기 앞에서 최전선의 병사들 걱정을 하냐며 할더를 매도했다.
결국 할더는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한창이던 1942년 9월에 작전에 너무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육군 총참모장 직책에서 해임당해 사실상의 예편 조치인 대기발령 명령을 받았고, 후임에는 47세의 쿠르트 차이츨러 소장이 보병대장으로 2계급 승진하여 임명되었다. 하지만 할더가 경고한 대로 소련군은 11월 21일에 스탈린그라드 방면의 독일군을 포위했고, 결국 독일군은 역사상 미증유의 대패를 당했다.
2.7. 해임 이후와 체포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패배 후 점차 독일의 패전이 확실해지던 전쟁 후반이 되자, 할더는 히틀러를 가만히 내버려 두다가는 독일이 망할 것이라고 우려하면서 다시 반히틀러 음모자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할더는 이러한 반히틀러 세력의 시도가 절정에 달했던 1944년 7월 22일의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전혀 없었다.
어쨌든 이 암살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게슈타포는 관련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게슈타포는 용의자들을 고문해 결국 할더가 일련의 히틀러 제거 음모에 가담했다는 것을 밝혀냈고, 할더도 체포되어 강제 예편당한 뒤 사형을 선고받고 다하우 강제수용소에 감금되었다. 전쟁 최후반기였던 1945년 4월에 다하우도 함락 직전까지 가게 되자 친위대에 의해 티롤 지방으로 후송되었는데, 도중에 친위대원들이 이들[6] 을 학살하려고 하자 이를 제지하던 독일 국방군에 의해 구출되어 미군 측에 넘겨졌다. 할더는 이후 미군의 포로 수용소 캠프에서 지내게 된다.
2.8. 전후
할더는 미군에 적극 협조하여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기소되지 않았다. 1950년대에는 주독미군의 전사(戰史) 연구관으로 일한 공적으로 훈장을 받기도 했고, 전후 새롭게 편성된 독일 연방군(서독군)의 재건에도 깊숙히 관여했다. 1972년 바이에른에서 사망했다.
3. 평가
다른 장성들과 달리 야전 지휘관이 아니었기 때문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노련한 참모장교로 활약한 만큼 독일군의 초기 승리에 크게 이바지한 장성들 중 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 본질적으로 히틀러를 싫어했고 히틀러 제거 음모에도 관여했지만, 히틀러의 침략 전쟁에 적극 참여했으며 무고한 사람도 아니다.
게다가 히틀러에 대한 반대와 지지 사이에서 오락가락한 기회주의적 면모까지 보여주었다. 할더는 전후 포로 심문 과정에서 자신이 반히틀러 음모에 가담했다는 과거를 강조하면서 미군에 적극 협조했고, 양심적인 군인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후 전쟁사 조사 과정에서 독소전쟁 때 유대인이나 정치장교, 빨치산을 사살하라는 전쟁 범죄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전사학자로 활동했던 경력도 문제가 되는데, 할더가 '히틀러의 간섭 때문에 무적의 독일군이 그 장점을 발휘하지 못했고, 동장군과 무식한 소련군의 인해전술 때문에 독소전쟁에서 패했다'는 식으로 서술했기 때문에 자신을 비롯한 독일군 장성들이 벌인 잘못을 이게 다 히틀러 때문이다는 식으로 묻어버렸고,[7] 또 게오르기 주코프나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같은 소련군 장군들의 유능한 전쟁 수행 능력을 지나치게 과소 평가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는 물론 할더뿐 아니라 살아남아 회고록을 남긴 독일 장군들의 전반적인 특징이긴 하다.[8]
사실 연합군의 2차대전 전사학에서 소련 측 자료의 경우 소련 정부와 군 당국이 서방측 학자들에게 거의 정보 공개를 하지 않아 연구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그 공백을 메꾸는 데 사용한 자료들은 대부분 독일군 장성들의 회고여서 승자와 패자 간에 얽힌 편파적인 입장이 섞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러한 미군 관점의 전사 편찬에서 광범위하게 관여한 인물이 할더였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소련이 붕괴하기 시작한 1990년대 이후 러시아 정부에 의해 2차대전 당시의 자료가 공개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양측의 사료를 바탕으로 한 교차검증이 가능해졌고 연구 결과가 나오기 시작하니 할더나 독일군 장성들의 관점에서 서술된 전쟁사는 점차 권위를 잃었다. 그리고 지금은 거의 자기 변명쯤으로 치부되어 현재로선 참조만 할뿐 그 이상의 가치는 없다. 다만 할더의 저서들과 일기는 독일 측에서 여전히 구데리안과 만슈타인의 회고록과 함께 독소전쟁 연구의 중요한 사료로 꼽히고 있다.
4. 주요 보직 내역
- 1902.7.14 : 육군 입대
- 1902.7.14 ~ 1903.3.1 : 바이에른 제3포병연대 사관후보생
- 1903.1.29 : 사관후보생 계급 부여
- 1903.3.1 ~ 1904.2.28 : 뮌헨 참모학교 파견
- 1904.3.9 : 장교 임관
- 1906.10.1 ~ 1907.7.31 : 포병 기술학교 파견
- 1911.10.1 ~ 1914.7.31 : 뮌헨 사관학교 파견
- 1914.8.2 ~ 1915.1.6 : 바이에른 3군단 참모부 관리보좌관
- 1915.1.6 ~ 1916.12.28 : 바이에른 6보병사단 선임 보급장교
- 1916.12.28 ~ 1917.3.26 : 바이에른 5보병사단 선임 작전장교
- 1917.3.26 ~ 1917.6.14 : 2군 참모장교
- 1917.6.14 ~ 1917.7.12 : 4군 참모장교
- 1917.12.24 ~ 1918.12.20 : 루프레히트 집단군 장군참모장교
- 1919.10.1 ~ 1920.3.1 : 국방부 육군 훈련과 부관장교
- 1920.3.1 ~ 1920.7.30 : 국방부 육군 훈련과 연락장교
- 1923.10.1 ~ 1925.12.1 : 란츠베르크 암 레흐 7포병연대 4포대장
- 1925.12.1 ~ 1926.4.1 : 뮌헨 7사단 작전과장
- 1928.7.3 ~ 1928.8.5 : 7차량수송대대 배속
- 1931.10.1 ~ 1934.10.1 : 뮌스터 6사단 참모장
- 1935.10.15 ~ 1936.11.12 : 7사단장
- 1937.10.12 ~ 1938.2.10 : 육군참모본부 2실장
- 1938.3.1 ~ 1939.9.1 : 육군참모본부 1실장
- 1939.9.1 ~ 1942.9.24 : 육군참모총장
- 1942.9.24 ~ 1945.1.31 : 대기발령
- 1944.7.23 : 히틀러 암살 시도에 관한 혐의로 게슈타포에 체포
- 1945.1.31 : 퇴역
- 1945.5.8 : 연합군에 신원 인도
- 1945.5.8 ~ 1947.9 : 연합군 감시 하에 복역
- 1947.9 : 출소
- 1947.9 ~ 1961 : 쾨니히슈타인/칼스루헤 주둔 미 육군 전사연구부 감독관
5. 진급 내역
- 1903.1.29 : 육군 사관후보생(Fähnrich)
- 1904.3.9 : 포병 소위(Leutnant)
- 1912.3.7 : 중위(Oberleutnant)
- 1915.8.9 : 대위(Hauptmann)
- 1924.3.17 : 소령(Major)
- 1929.2.1 : 중령(Oberstleutnant)
- 1931.12.1 : 대령(Oberst)
- 1934.10.1 : 소장(Generalmajor)
- 1936.8.1 : 중장(Generalleutnant)
- 1938.2.1 : 포병대장(General der Artillerie)
- 1940.7.19 : 상급대장(Generaloberst)
6. 주요 서훈 내역
- 시기 미상 : 1914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 시기 미상 : 1914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 1918.10.2 : 호엔촐레른 왕가 검 기사 십자 훈장
- 1939.9.22 : 1939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39.10.2 : 1939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39.10.27 : 기사 철십자 훈장
- 1961.11.25 : 미합중국 명예 시민 수훈장
[1] 그래서 독일군 장교의 출신 군사학교는 한 군데가 아니라 프로이센, 바이에른, 작센, 뷔르템베르크 등 여러 군데에 있었다.[2] 할더가 라이헤나우를 거부한 이유는 라이헤나우가 직선적인 성격이라 협조관계에 문제를 일으킬 것이란 게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실질적으론 라이헤나우가 나치정권에 빌붙어 육군의 반발을 사고 있었던 게 진짜 이유였다,[3] 폴란드 회랑은 1772년 폴란드 1차 분할 이전에는 폴란드 영토였다.[4] 독일 국방군 장성들의 회고가 대체로 히틀러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경향이 크다.[5] 《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년》, p. 246 - 247[6] 미군에게 구출될 당시에 할더와 같이 있던 수용자들은 나치 독일이 유럽 각국을 점령하면서 생포한 피점령국의 고위 장성/장교와 정치인들, 왕국의 왕족과 귀족들이 있었다.[7] 대전략관의 부재로 소련을 우습게 보고 소련 침공 작전 입안에 적극 참여했기는 할더 등 독일 군부도 마찬가지였다.[8] 보통 독일계 회고록에서 무식하지만 용감하고 우직한 소련군, 수는 적지만 잘 싸우는 영국군, 정신력은 없고 물량에만 의지하는 나약한 미군과 같은 류의 변명이 흔히 관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