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미군

 



1. 개요
2. 사용 장비
3. 당시 미국 내의 여론
4. 실상
4.1. 전술적 측면
4.2. 물자 낭비
4.3. 기강 해이
4.4. 병영부조리
4.5. 전쟁 범죄
4.6. 집단적인 병역거부
5. 결론
6. 여담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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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군사원조사령부 문장

1. 개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남베트남의 끈질긴 요구와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 속에 도미노 이론을 철썩같이 믿었기 때문에, 1962년 베트남 군사원조사령부를 창설해 미군을 주둔시키고,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1] 본격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다. 이 문서는 오로지 '''베트남전 당시 미군에 대해서만''' 서술한 문서이다.

2. 사용 장비




3. 당시 미국 내의 여론


베트남 전쟁하면 반전시위를 외치는 히피들과 좌파 단체들의 시위 행렬을 떠올리기 쉽지만 의외로 베트남 전쟁 파병 당시 미국 내의 여론은 그리 나쁘지 않은 편이었고 파병 찬성자가 훨씬 더 많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당시에는 통킹 만 사건이 미 정부의 조작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때인 데다가 미 정부 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도 공산주의에 대한 병적인 두려움, 그리고 도미노 이론을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제1차 세계대전제2차 세계대전에서 악의 마수로부터 세상을 구했고 비록 제대로 끝맺지 못하였으나 어쨌든 대한민국이 공산화되는 것만큼은 막았다 라고 인식되었던 한국 전쟁의 승전국이라는 자부심에 한창 젖어있을 때였기에 때문에 미국 국민들은 '베트남빨갱이들로부터 구하자!'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응오딘지엠이 무개념짓을 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군사정변을 거쳐 대통령을 응우옌반티에우로 갈아치운 직후였던데다가 아직 재임초반이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 아직은 여론이 나쁘지 않았던 것도 있다.
고로 1964년부터 1967년까지 미국 내 베트남 전쟁에 대한 여론은 굉장히 좋은 편이였고 당연히 미국이 이기고 있다고 믿었으며 네이팜탄을 맞고 불바다가 되는 북베트남 마을과 북베트남인들이 나오는 뉴스를 보고 환호를 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1968년, 구정 공세의 실상이 낱낱히 드러나고 미 대사관이 베트콩북베트남군에게 공격받는 모습이 여과 없이 방영되면서 급격하게 기울어진다. 우리가 생각하는 미국의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의 모습은 대부분 1968년 구정 공세 이후의 모습이다.

4. 실상


'''미군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 미군 창설이후 현재까지 미군의 군기, 행정, 제반사항 등에서 '''총체적 개막장''' 이었던 시기로 일컬어지고 있다.
2차대전은 나치즘, 파시즘에 대항한 결기, 한국전은 먼저 평화를 깨고 참략해온 북한과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결기 등의 "명분"이라도 있었지만 베트남전은 파병된 미군들이 생각하기에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명분조차 없었던 전쟁이며 미군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 시기로 알려져 있는 전쟁이다.
무엇보다도 북베트남의 '''구찌터널'''이 가장 컸다. 이 구찌터널은 입구인지 터널인지 알지 못했고 구찌터널의 유래는 농민이 호미로 땅굴 파기시작한 1946년에 시작되었는데 프랑스에 맞서고자 비정규군 베트남군이 48km의 터널을 만들었고 통킹만 사건 이후 200km를 더 팠다고 한다. 유독 석회질을 포함한 토지는 비가 오면 굳어버려서 탱크가 지나가도 절대 무너지지 않으며 구찌유격대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

4.1. 전술적 측면


베트남전 당시 미군의 실상을 보면 실로 참혹하기 그지 없었다. 당시 미군은 게릴라전에 전혀 익숙하지 않아서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월맹군)의 게릴라 전술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전쟁 초기 미군의 주력소총이었던 M14 소총은 베트남과 같은 정글전에서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목제 스톡을 사용하는 M14는 베트남의 습기, 하천지대 등에서 내구성 문제를 드러냈다.[2]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북베트남 정규군을 상대로는 1대 9, 베트콩을 상대로는 1대 20 정도의 교환비를 내긴 했으나 이는 동맹국들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낮고, 태평양 전쟁과 한국전쟁 때의 미군과 비교해도 너무나도 형편없어진 교환비였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은 북베트남 정규군을 상대로도 1대 24의 교환비를 냈고, 베트콩을 상대로는 1대 40의 교환비를 자랑했다. 호주군 같은 경우, 북베트남 정규군 상대로 1대 50, 베트콩 상대로는 거의 1대 100 이상의 정신나간 교환비를 낸 것에 비하면 미군의 교환비는 너무나도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한국전쟁에서 미군도 북한군이나 중공군을 상대로 1대 50 이상의 교환비를 냈었는데 과거에 비해서도 훨씬 모자란 수치였다.
특수부대나 일반 전투 부대의 정예병 중심으로 파견한[3] 한국군, ANZAC군과 달리 미군은 일반 징집병이 비교도 안되는 규모로 동원됐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세간의 인식과 달리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 미군 중에는 자원병이 훨씬 많았다. 심지어 단순 비율로는 2차 세계대전보다 훨씬 높다. 즉 아무나 그냥 막 잡아서 전쟁터에 투입 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도 불특정 다수로 징집된 질낮은 자원과 베트남전 특유의 분위기에 점차 물들어가게 된 것이다.
1967년 중반부터 '''M16 소총'''이 미군에 보급되었고. 이 총은 M14에 비해 성능은 분명히 우수했으나 초기에는 총기 자체의 결함, 장약의 미스매치, 잘못 퍼진 총기 관리에 대한 루머 등으로 인해 고장으로 악평을 들었다.[4] 그래서 지급받은 M16을 버리고 '''AK'''를 주워쓰는 미군들이 꽤 있었는데 문제는 MACV-SOG 산하 특작대원들의 여러 임무 가운데 하나가 베트콩의 탄약고에 잠입해 AK용 7.62x39mm M43 탄의 정밀모형 내지는 불량품 등을 끼워넣는 것이었다. 원래는 베트콩 및 이들에게 파견된 북베트남군이 총을 썼을 때, 작동고장 및 이로 인한 폭발까지 노려[5] 자신들의 주력 소총을 불신하게 만들려는 것으로 당시 미군 상층부도 '적군의 AK는 원래 불량률 높은 총이다'라고 일선의 병사들에게 이러한 내용의 교육을 해 특작부대들의 행동에 대한 연막 및 이로 인한 아군의 피해를 방지하려고 했지만, 혼란스럽고 급박한 전장에서 불량탄이 삽입된 AK를 가릴 틈도, 능력도 없는 미군 보병들에게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고, 결국 이런 랜덤박스급 상황에서 '불량탄 삽입 AK'라는 꽝카드를 선택한 미군 병사들까지도 베트콩 및 이들을 지원하러 온 북베트남군 병사들과 같이 펑펑 터져나갔다.[6]
'''M60 기관총''' 같은 경우도 오염에 취약하여 총기고장이 잦아 베트남에서는 부적합한 총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장병들에게 지급되었으며 쓸데없이 무겁기만 해서 병사들에게 '화약 먹는 돼지' 라는 별명을 얻었다. 영화 람보 같은 데서는 남자의 상징, 마초이즘의 상징 격인 총으로 등장하지만 실제 M60은 베트남전 당시 미군들에게 악평이 자자한 잔고장이 많은 총기였던 것이다.
미군의 자랑인 미합중국 공군 또한 베트남전에서는 희한하리만큼 자기 성적을 내지 못했다. 미군은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에서 일본 육군항공대나 일본 해군항공대, 조선인민군 공군, 중국 공군, 소련 공군을 상대로 최소 1:3 이상의 교환비를 접하고 있었으나 베트남에서 북베트남 공군을 상대로는 1대 2을 간신히 넘기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F-4 팬텀'''이 미그기들을 상대로 1:3.67의 교환비를 내었지만 '''F-105''' 기종은 MiG-17를 상대로 1:1.6을 간신히 넘기는 초라한 전과만 올리는 등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7] 사실 전투기보다 더 큰 문제는 북베트남의 방공망으로 롤링썬더 작전에서 공중전 손실비는 미군의 우위였으나 소련에서 제공한 베트남군의 소련제 지대공 장비에 미군기가 무더기로 격추당했다. 그래서 미국은 북베트남 방공망을 조지기 위해서 '''와일드 위즐''' 기체를 도입한다. 물론 북베트남 공군의 방해로 고생하지만 볼로 작전을 통해서 북베트남 공군을 일방적으로 털어버리는 등[8] 그럭저럭 대처할 수 있었다. 미사일의 문제는 '''미사일 만능주의'''의 탓도 있지만 당시 기술 수준으로 발칸포와 진공관 레이더를 기수에 쑤셔넣기는 어려웠던 것도 있고, 단순히 기관포의 부재탓을 하기에는 기관포가 없는 해군의 F-4가 나중에 기관포를 장착한 공군보다 우수한 전과를 올렸다.[9] 결론적으로 미군 항공기가 북베트남 항공기에게 일방적으로 털린 적은 없고, 고전하기는 했어도 손실비에서는 미국의 우위라는 건 사실이다. 이따금 지대공 장비에 의한 손실까지 전부 베트남 공군기의 전과로 밀어넣어서 미군이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을 당했다고 기술하는 경우가 있는데 엄연한 왜곡이다.
그리고 미군의 헬기 손실 역시 엄청났다. 하루에 한 대 꼴로 헬기가 북베트남의 대공기관포와 미사일, 로켓 등에 의해 허다하게 격추됐으며, 착륙지점이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작전에서는 부비트랩이나 적의 매복으로 인한 손실도 엄청났다. 특히 소련중국의 지원 덕분에 월맹군의 방공망은 매우 탄탄했다. 그래서 미군 항공기는 '''UH-1, AH-1, CH-47, OH-6, F-4 팬텀, F-105, AC-47, AC-130, A-1, B-52''' 등 모든 항공장비들은 늘상 '''SA-2나 RPG, 중기관총'''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고, 베트남 전쟁 동안 미군이 손실한 항공기의 총 수량은 최소한 네자릿수를 넘는다. 마이클 매클리어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이라는 책에 따르면 이 중 1,000대 이상이 북베트남 상공에서 파괴됐다 한다.
그나마 그 교환비도 불명확한 것이, 미군 뿐만 아니라 남베트남 진영 연합군 모두가 해당되는 문제로, 당시 연합군의 사살 전과 계산이 발견한 적군 시신 한 구당 몇 명 사살, 적군 총기 노획 한정당 몇 명 사살 이런 식으로 주먹구구식 계산이었던 관계로 실제로 더 교환비가 좋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북베트남 정규군을 상대로 하는 경우. 애초에 베트남전 특성상 적을 몇 명 사살했는지 알기도 어렵다는 것을 감안해야 하긴 하지만.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최대의 전투 중 하나였던 케산 전투만 해도 케산 요새 포위전에서 미군이 실제 발견한 시신은 1,600구에 불과했으나 미군은 이를 10,000명 이상 사살했을 거라고 대충 추정을 때려버린다.
특히 호주군 일반 부대나 한국군의 경우에는 작전구역 특성상 실제로 북베트남 정규군보다는 베트콩과 전투를 벌이는 빈도가 더 많았다. 북베트남 정규군과 맞서야 했던 건 대부분 미군이었다. 실제로 북베트남 정규군이 상대였던 야전의 경우에는 연합군은 거의 예외없이 고전해야 했다. 주월 한국군의 경우 안케패스 전투에서 실제 작전기간 내내 고전하다가 마지막에 638고지 점령 직후 실제 발견한 적 시신은 4구, 무기노획 36정에 불과했는데 이걸 별 근거도 없이 436명을 사살했다고 보고하는 희대의 뻥튀기를 보여줬다. 1대 100의 신화에 빛나는 호주군도 호주군대로 롱탄 전투에서 실제 발견한 적 시신은 50구였으나 600명 이상의 사상전과를 올렸다고 과장해서 보고했다.[10] 보고부터가 이 꼴이니 1대 몇십 어쩌고 교환비 가지고 누가 높니 낮니 해봐야 과연 얼마나 이게 정확한 수치일지는 의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연합군이 주장한 전과가 전부 진실이라면 북베트남의 지상전 수행역량이 크게 약화되었을 것이나 현실은 전쟁기간 내내 북베트남의 지상전 수행역량은 전혀 감소하지 않았다는 게 현실. 물론 실제로 발견한 시신이나 무기 기준으로도 수십대 1의 교환비를 보인 전투들도 적진 않았으나[11] 많은 부분에서 과장이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북베트남 측도 과장은 연합군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이들이 주장하는 연합군을 상대로 한 전과는 엄청나게 높고, 자신들의 손실은 매우 적은데 이쪽은 가히 월맹무쌍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전과 과장의 정도가 더더욱 심하다. 양측 모두 과장 및 축소가 있을 것이고 양측 주장의 중간쯤으로 추정하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미군의 대민 정책은 군이 아닌 민간 단체가 하도록 규정되 있는데 그렇다고 위험한 지역에 민간 단체가 올리가 없으며 미군이 다 해결해야 하는 판이고 미국스러운 원조 방식으로 트럭에 쌀을 갖고와서 마을에 던져 놓고가기 일쑤였다.[12] 베트남 주민들은 우리 쌀 뺏어놓고 인심 쓴다고 불평했을 정도.
그렇다고 해서 북베트남이 전투에서 생각보다 잘 싸웠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교전비가 정확히 무엇이든지간에 전투 대부분은 남베트남 파병군의 승리였다. 교전비와 다르게 실제 피해가 적었다면 호찌민이 사기가 떨어질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해 가며 확실하게 이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면 '''한국군과의 교전은 피하라'''는 지시를 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특정 국가와의 교전을 아예 피하라는 명령은 매우 굴욕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데 그걸 감수해가면서까지 그런 명령을 내렸다면 한국군과 전투를 할때마다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13] 한국보다 교전비가 더 좋았던 호주뉴질랜드 군은 말할 필요도 없고, 미군도 북베트남 진영에 대해서 교전비가 현저하게 우세하다는 것은 정황상 명확하다. 단지 정확한 수치를 알 수 없을 뿐이다. 교전비가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북베트남이 전투에서 피해를 적게 입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며, 막대한 전술적 손실을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전략적인 면, 그리고 여론이라는 측면에서 북베트남 진영이 남베트남 진영에 비해 우세했기 때문에 승리했다고 보는 게 맞다. 특히 전쟁을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주체인 남베트남이 총체적으로 부패에 시달렸고, 그에 따라 남베트남군도 겉보기와는 다르게 보급이 엉망인데다 내부에 스파이가 넘쳐나고 전투수행 의지도 낮은 오합지졸로 구성된 막장군대였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유엔군이 큰 역할을 했던 6.25 전쟁조차도 한국군 지휘부가 정신 차리고 활약하지 않았으면 결국 공산화가 되었을 것이다. 6.25 전쟁 승리의 일등공신이 한국군인 것처럼, 남베트남 패망의 가장 주요한 요인은 남베트남의 낮은 국가 역량이었다.

4.2. 물자 낭비


미군의 낭비는 말 그대로 '''개념을 상실한 상태'''였다. 당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 군인들은 모두 미군들 보급 나오는 것을 보고 부러워했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이건 지금 기준으로 봐도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의 물량 소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트남 전쟁 시기에 미군에서 베트콩 하나 잡겠다고 평균적으로 들어간 비용이 무려 1명당 '''33만 2천 달러'''[14]였다. 애초에 포병들은 하루 평균 10,000발을 쏘아대었고, 소총수들은 새로 등장한 M16을 맹신한 채 자동으로 놓고 갈기기가 일쑤였다.[15] 사실 당시 베트콩들은 정글에서 기습공격하며 부비트랩, 지뢰 등 함정을 깔아놓은터라 미군이 여기에 큰 피해를 입었고, 베트콩이 나타나는데, 적이 보인다고 무식하게 그냥 추격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참전 용사에 따르면 베트콩이 확인됐을 때 소총부대가 바로 진입하기보다는 그 위치에 포격 지원을 요청해서 200발쯤 쏟아부어놓고, 전진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압권은 '''B-52 폭격기'''였다. B-52 폭격기가 호찌민 루트의 베트콩 하나 잡는데 필요한 폭탄량은 '''100톤.''' 실제로 B-52는 한참 심할 때는 연간 20억 달러를 폭격으로 소모했고, 그 결과 약 1,500명을 사살했다. 문제는 '''같은 기간 동안에 그 100배의 숫자가 남파되었다'''라는 것이다. 20억 달러 들여서 평균적으로 100명 중 1명 잡았던 셈이다.
B-52의 위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앞서 언급한 '''북폭''' 역시 돈 많이 들어가고 효율 없기는 돈 문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평균적으로 10억 달러를 북폭에 소모했는데, 그 타격이 평균 1억 달러 정도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이 정도는 중국과 소련의 계속된 지원으로 금방 복구되었으니 북폭이 아무 효과가 없었다. 단기간 전투로 꼽자면 구정 공세의 일환이었던 '케산 전투'가 있다. 미군은 케산이 제2의 디엔비엔푸 되는걸 막으려고, 모든 항공기를 동원하여 케산 주변에 폭탄을 아주 그냥 들이부었는데 77일간 벌어졌던 이 전투에 쓰인 폭탄의 양이 12만7천 톤이었다.[16] 그래서 기지 반경 2마일은 아예 무인지대가 되버렸을 정도.
이 돈 때문에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1971년에 의회의 동의 없이 '''기존 브레튼 우즈(Bretton Woods) 체제의 금본위제를 무너뜨리기까지 했다.'''
물론 정규전에 한정해서, 물량으로 적을 깔아뭉개는 건 효율적인 판단이기는 하다. 실제로 2차 대전 당시, 연합군이 추축국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미국의 물량빨이다. 오죽하면 렌드리스라는 신조어가 탄생했겠는가. 당시 소련영국은 미국에 신청만 하면 탱크와 전투기들이 무작위로 쏟아져 들어왔다. 게다가 육군항공대가 꾸준히 나치 독일에 폭탄을 뿌렸으니.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까지 했으면 이겨야하는데, '''이기질 못했다'''. 2차 대전을 물량빨로 승리하였으나 그것에 버금가는 돈이 들어간 베트남전은 이기지 못한 것이다.
미군의 보급물자는 차고 넘치는 수준이어서 동맹국은 물론, 적국인 북베트남까지 그 수혜를 받았는데, 미군이 남베트남군에게 준 물자가 다음날 암시장에 나온다거나 베트콩에게 팔려가는 등 개판이 속출했다. 한국군도 이런 점을 이용해서 당시 최신 화기였던 M16을 많이 얻어낼려고 꼼수를 부렸다.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을 짱박고 새로 신청해서 수령한 뒤 그걸 또 짱박고 또 새로 신청해서...[17] 한국군도 이때 M113 장갑차를 비롯한 적지 않은 물자를 국내로 반입했으며, 나중에 미군이 물자 이동을 감시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상당히 많은 M16이 국내로 반입되었으며, 현재에도 향방작계 훈련시 예비군에게 지급되는 M16중 베트남전 특유의 튤립형 소염기와 콜트 마킹이 들어간 오리지널 베트남 M16들이 종종 보여진다.

4.3. 기강 해이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서 나온 것을 보면 이 전쟁 당시 벌어진 어느 '''실화'''에서 당시 미군이 얼마나 개판인지 알 수 있다. 한밤중에 술에 질펀하게 취한 연대장이 휘하 소대장에게 "찰리 몇 놈 잡아와"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것도 오밤중에 밀림 깊숙히 들어가서. 그러면 미군들만 죽어나갈 것이 뻔하지만, 명령은 명령. 결국 소대장 브로일스 중위는 부하들을 불러와서 웃기게도 연극을 했단다. '''나뭇가지도 꺾어오고, 물도 그릇에 떠와서 무전기로 나무를 밟는 소리를 내고, 나뭇가지를 꺾으며 숲을 지나는 것처럼 들리게 하며, 물을 첨벙첨벙 치면서 강물도 건넌다고 무전기로 뻥을 쳐가면서 1시간 넘게 보고했다.''' 당연히 취한 연대장은 속아 넘어갔고, 나중에 그냥 잠을 자버렸는데, 다음 날 그 연대장은 그런 명령을 내린 걸 전혀 기억 못하더란다.(...) 이런 기가 막힌 실제 뻘짓들은 이 전쟁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The normal problems of red-blooded Americans posted in a tropical war zone—sex, alcohol, madness—multiplied in Vientiane, most often at a nightclub called the White Rose. Lilley recalled the day that “one of our senior CIA officers briefed a visiting congressional delegation on the secret war up-country. That evening the delegation was taken to the White Rose for exposure to nightlife in Vientiane.

Members of the delegation saw a large American man stark naked on the floor of the bar yelling, 'I want it now!" A hostess lifted up her skirt and sat on his face. '''It was the same officer who had briefed the delegation earlier in the day.'''”

적도의 전쟁 지역에 배치된 혈기 왕성한 미국인들이 맞닥뜨릴 수 있는 정상적인 문제들 즉 섹스와 술과 광기는 비엔티안에서 특히 심했다. 이런 문제들은 거의 대부분 '화이트 로즈' 라는 나이트클럽에서 벌어졌다. 이와 관련된 일을 릴리는 생생하게 기억했다.

"간부 요원 한 명이 그 곳을 찾아온 의회 대표단에게 시골 오지의 CIA 사업에 대해서 브리핑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에 의회 대표단은 비엔티안에 있는 화이트 로즈라는 나이트클럽으로 안내를 받아서 갔습니다. 현지 요원들의 실태를 보기 위해서였죠.

그런데 이 술집의 무대 위에 덩치가 커다란 미국인 한 명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홀랑 벗은 채로 '지금 당장 하고 싶다아아아!'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한 여종업원이 스커트를 훌렁 걷어 올리고는 이 남자의 얼굴 위에 앉았어요.

'''그런데 이 남자가 누구였느냐 하면, 낮에 대표단에게 브리핑을 했던 바로 그 요원이었던 겁니다.'''"

-출처 : 팀 와이너, <잿더미의 유산(Legacy of Ashes)>[18]

이런 어처구니 없던 상황 속에서 미군들이건 미군과 함께 작전하던 CIA 요원들이건 모두가 다 같이 말 그대로 '''미쳐갔다.''' 헬기 조종사들은 '''맥주에 절어 음주조종을 했고''', 다른 장병들은 술이랑 성매매는 물론 '''마약'''까지 했는데, 당시 베트남 정글에는 야생 대마가 흔했고 미군은 TV 카메라가 촬영하는 가운데서 대놓고 피우기도 했다.(...) 징집되어 베트남에서 싸우던 올리버 스톤도 이 당시, 마약에 빠져 제대 후에도 갱생하느라 고생해야 했고, 이 경험으로 이라크 전쟁이라든지 걸프전때 미군 파병을 부정적으로 대했다.
당연히 1969년에서 1971년 사이에 미군의 환각제 사용자는 5%에서 14%로, 헤로인 복용자는 2%에서 22%로 폭증했다. 더구나 이는 상원위원회의 보고서로, 실상은 이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인데 단적으로 1981년 미국 통계에 의하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서 '''실제로 싸웠던 군인'''의 25%가 마약류 범죄로 체포되었다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덕분에 1971년 미군 야전병원에는 "전투로 부상당한 병사가 5,000명도 되지 않던 상황에서 마약문제로 입원한 환자는 20,000명이 넘었다"라는 엽기적인 기록이 남아있다. 한국군 참전 용사에 따르면, 한국군은 풀밭에 지뢰가 있을까봐 앞사람이 걸어간 발자국을 그대로 밟으며 조심스럽게 행군했는데, 미군은 '''마약에 취한 채로 일렬 횡대로 행군'''하는 걸 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에 대해서는 80년대에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군 장교가 쓴 <그날>이란 책자에서도 일화가 나와 있다. 한국군 지원 미군 헬기 조종사가 거나하게 취한 채로 와서 한국군들도 경악한 일화가 나와 있다. 그래서 그 장교가 영어로 "왜 술을 먹냐?"고 하자 그 조종사는 살기 어린 눈빛으로 "이런 외국에서 개죽음 당하러 왔는데 맨정신으로 버티라구? 이 XX것들아. 네놈들은 여기서 죽는 게 좋냐? 좋아?"라고 소리치는 통에 그 장교는 '''"이 전쟁은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전쟁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계적으로 헬리콥터, 전투기 조종사는 최소 중위부터 준위, 소령급들인데, 그런 계급을 부여받은 자들이 이랬으니 그 밑의 계급은 말할 것도 없다.
참고로 호주군은 알아서 절제했고 한국군도 제한적으로 매점에서 술을 사 마실수 있었으나 당시 미군 피엑스에서는 마구잡이로 뒷돈을 받으면서 술을 팔아댔다고 한다. 주말 한국군 부대 앞에 술을 살수 있는 연합군 "군표"를 현금으로 사기위해 죽치고 있는 미군들도 많았다고 한다.[19]
게다가 군인의 기본소양이라 할 수 있는 복장과 장구류 불량도 심각했다. 물론 베트남이 엄청나게 더웠던 것도 한몫 했지만, 문제는 미군이 군복을 제대로 입고 있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맨몸에 플랙재킷 하나 걸치고 다니는게 비일비재했고, 군장도 무겁다고 버리기 일쑤였으며 심지어 총기 관리도 개판이었다고 한다. 특히 전투복 상의의 팔을 잡아뜯어 나시 형태로 만들거나 하의를 잘라 반바지로 만드는 것 정도야 양반이었을 정도. 그리고 마구잡이 징집으로 불량배, 사회부적응자, 술집 기도 등의 따라지 인생들이 대거 유입됐는데 이들이 군대 내에서 각종 문제를 일으켰으며 이들은 제대 후 미국에서 바이크 갱으로 편입되어 많은 사고를 쳤다. 미국 바이크갱 서열에는 "SGT. at arms"라는 직책이 있는데 이는 베트남전 출신의 무기 담당이라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이 시기의 미군들의 방탄헬멧을 보면 온갖 낙서와 잡동사니로 도배가 되어 멀쩡한게 별로 없는데, 담배나 포커카드[20] 끼워놓은건 얌전한 축에 속하고, '집에 가고싶어.' 같은 평범한 문구부터 ''''우리에겐 오스왈드가 한명 더 필요하다.(Where is Lee Harvy Oswalt[21] Now that we really need him.)'''' 같은 불온문구나, 위장 따윈 개나 준 휘황찬란한 노즈 아트까지 각양각색이었다.[22] 한술 더 떠서 장난감이나 염소 뿔(...) 같은걸 끼워놓은 것도 있었다. 전술적 문제[23]를 생각해서라도 근절해야 했지만 일선 지휘관들도 말리지 못할 정도로 심했다. 기록 사진으로 확인 가능한 지금 시각에서야 낭만이겠지만 이는 심각한 군율위반이다. 오히려 방탄헬멧을 온전히 쓰고 다니는 것은 장교들밖에 없었을 정도. 상술한 상황에 대해서 "군율로 다잡을수는 없었는가" 라는 의문점을 제기 할수 있지만, 타들어갈 것만 같은 더위, 푹푹 찌는 습도, 미치도록 꼬이는 벌레들, 지천에 널려있는 야생 대마, 빽빽하고 무성한 정글에서 보이지도 않는 적에게 사살 당하는 공포, 수틀리면 뒤통수에 총알이 박힐 것 같은 긴장감은 군율로 통제할수 있는 성향의 것이 아니었다. 온실속에 자라온 사관학교 출신이나 학군후보생 출신 초임장교들은 정글의 악귀가 되어버린 병사들에겐 상급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실제로 적지 않은 수의 신임 소위들이 프래깅에 희생당했다. 감독이 곧 고증전문가였던 (올리버 스톤)영화 플래툰을 보면 이러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신임 소위가 병사들의 포커판에 끼어 친해져보려고 하나 오히려 대놓고 무시당하고 적당히 마시도록... 하면서 멋적게 물러난다. 나중에 이 소위는 계속 겉돌다가 허무하게 전사한다.
이런 개판 오분전의 상황에서 기강붕괴라는 극단적 상황까지 가지 않은것은 부사관단의 노력이 컸다. 2차 세계대전, 한국전 출신의 노련한 상사나 일등상사들이 아직 군에 남아있었고 실전경험 및 군 생활이 풍부한 중사급들이 나름 장교를 보좌하고 병사들을 통솔하고 눌렀기에 망정이지 이들마저 미쳐버렸다면 결과는 어땠을지 불보듯 뻔한 일이다. 예를 들자면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작전의 의미가 뭐냐고 밀러대위에게 항명하는 일병에게 호바스 상사가 권총을 뽑아 위협하면서 "똑바로 다시 말해봐" 라면서 으름장을 놓는 장면이 있다. 부사관들의 역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의 한 장면이다. 베트남전의 대표적인 부사관으로 영화 위워 솔저스에 나오는 바실 플럼리 원사가 있다. 실존인물이며 82공수사단으로 마켓가든작전과 노르망디에 강하했고 한국전쟁에는 2사단으로 참전했다. 영화상에 플라스틱으로 만든 총(M-16)은 못 믿겠다며 M1911만 들고 정확히 베트콩들을 조준사격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화이다. 게다가 머나먼 정글을 보면 지크 앤더슨 중사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극 중에서 그는 무려 3번이나 베트남전에 자원하여 3년이 넘게 베트남에 고인물로 있었던 인물이다. 극 중에서 그는 웬만한 장교들보다 경험이 풍부하고 실력이 출중하며 병사들 그 누구도 개기지 못하고 대위급 장교들도 그를 함부로 까지 못한다.[24] 놀라운 것은 이게 머니먼 정글에서만의 픽션이 아닌 실제로 이런 부사관들이 미군 내에 상당히 존재했었다는 것이고 철저한 고증이라는 것이다. 또한 플래툰에 등장하는 일라이어스 하사와 반즈 중사 같이 역전의 용사들의 묘사 역시 고증을 철저히 따른 것이다. '''이런 부사관들에게 어떤 병사가 함부로 개기겠는가?'''
여담으로 영화 위워 솔저스가 전쟁초기, 플래툰이 전쟁 중후기이다. 위워 솔저스에서는 병사들의 전투복이 깔끔하고 군장도 제대로 착용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다가 플래툰을 보면 개판 오분전의 복장상태를 보여준다. 이는 영화 고증이 제대로 된 것이며 전쟁 초기의 미군과 중후기의 미쳐가는 미군을 제대로 비교해서 볼수 있다. 참고로 부사관단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호주군은 2차대전, 한국전 출신의 노련하고 강철같은 부사관들을 선별해서 파견하여 병사들을 통제, 훈련케 했으며 한국군은 일본군 징집에 따른태평양 전쟁부터 해서 한국전쟁과 후방의 빨치산 토벌작전을 수행해본 3~40대 부사관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호주군과 한국군이 일정한 군기를 유지할수 있었던것은 이들의 역할이 컸다.

4.4. 병영부조리


미국은 이때까지만 해도 병역이 징병제였고, 베트남 전쟁기는 미군 내에서 가장 구타가혹행위, 병영부조리가 심각한 시기였다. 물론 일본군 수준은 아니라지만 최소한 530GP 사건, 윤일병 사건, 임병장 사건이 일어나는 한국군이 떠올라도 어색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사실 그 내지 그 이상은 되는 병영 분위기였다. 간부들은 폭력과 폭언으로 병사들을 다스렸고[25], 선임병들은 후임병들을 놀려먹거나 괴롭히거나 구타하기 일쑤였다. (첨언하자면 한국 해병대의 태권도 시범을 본 미 해병대 베트남 참전자가 과거 한국군 특유의 구타 문화를 목도하고 그대로 본인의 중대로 도입했다는 참전후기도 존재한다.) 전반적으로 동시대 인종 문제와 맞물린 것도 있고, 병사들은 사회적으로 자유주의적인 태도, 반권위주의적인 가치관이 퍼졌던 전후 세대인데 반해 장교들은 여전히 2차 세계대전 시대의 보수적 가치관을 갖고 있음으로 인해 군 내부 세대갈등이 심했던 시절로 평가된다. 비로소 본격적으로 백인, 흑인, 히스패닉, 동양인이 혼성 편제되던 시기였고 이 때문에 인종간 싸움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으며 심한 경우 아예 흑인, 백인끼리 안면몰수하고 따로 행동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는 전쟁 후로 갈수록 동고동락 개념이 생기면서 희석되기는 했지만 심각한 문제였다. 일례로 중국계 해병대원이 육군 헌병에게 베트콩이라고 조롱받자 동료 해병대원들에게 육군 헌병이 뭇매를 맞는 사건도 있을 정도였으니 심각하지 않았다고 말을 할 수 없다. 게다가 불량배, 전과자 등의 따라지인생 징집병들은 대학 출신 병사들을 컬리지 키드등의 멸칭으로 부르며 조롱하는 경우가 대다수였고 이는 나중에 미국사회의 해묵은 계층갈등의 씨앗이 된다.
한국전쟁 당시의 미군은 비록 강제로 징병되었지만 2차 대전이 끝난지 얼마 안된 때였고 미국의 설득으로 민주주의 노선을 선택 했다가 침략당한 신생국가김일성과 공산주의로부터 어떻게든 구해내야한다는 책임과 명분하에 미국을 중심으로 민주주의 국가들이 단결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아무리 징병당한 게 기분나쁘더라도 한국의 공산화를 막자는 명분이 더 앞서서 군복무는 적극적으로 임한 편에 속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은 그런 명분조차 한국전쟁에 비해 매우 약했고, 결국 약한 명분에서 비롯된 개개인의 불만이 병영부조리를 증폭시킨 것이다.
위의 병영부조리 문제와 더불어 미국 내에서도 반전운동 여파와 여러가지 부정적인 일들도 크게 퍼져버리면서 '''프래깅'''이 미국 역사에서 가장 많은 전쟁으로까지 언급되어버렸다. 1967년만 해도 공식적으로 800건이 넘는 프래깅이 적발될 정도[26]였으니, 미군 장교들은 눈 앞의 적군보다 등 뒤에 있는 부하들을 무서워해야 했다.
일례로 1967년 11월 미군 헌병이 입수한 어느 포스터에는 베트남어와 영어로 어느 미군 대위 이름과 여러가지 신상명세, 심지어 주둔지 정보까지 써있고 적군들에게 "이 놈 죽이면 1,500달러 포상금을 선물하겠다"라는 말까지 쓰여있었다. 미군 측이 난리가 난 건 물론이다. 하지만, 헌병들의 수사에도 결국 이걸 만든 범인은 잡히지 않았고, 얼마 뒤 그 중대장은 기관총에 벌집이 된 시체로 발견된다. 헌병들은 미군 기지 안에서 등 뒤에 M-16 총알로 벌집이 된 점을 주목했으나 부대원 전원이 적군 공격으로 죽었다고 주장하는 터라[27] 결국 전사로 처리되었다. 군대라는 '''닫힌 사회'''의 전형적인 폐해(...).
거기에 영관급 장교 이상의 상급 장교들은 사이공의 장교 클럽에서 휴가를 즐기고 더운 한낮의 땡볕을 에어컨이 나오는 사무실에서 보냈는데[28] 이 판국에 위관급 장교, 부사관, 사병들이 회의감을 느끼지 않을 리가 없다.

4.5. 전쟁 범죄


리드 : 공산주의자로 의심이 가는 사람들을 구금한 후 심문은 어떻게 진행되었습니까?

오즈번: 심문과정에서 살아남은 구금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모두 죽었습니다.'''

리드: 심의나 재판 절차 없이 전원이 죽었단 말인가요?

오즈번: 베트콩에 협조했다는 아무런 합리적 근거 없이 전원이 처형되었습니다.[29]

출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467

도망치는 놈은 베트콩이다! 그대로 있는 놈은 잘 훈련된 베트콩이다!

Anyone who runs is a V.C.! Anyone who stands still is a well-disciplined V.C.!

- 풀 메탈 자켓

1971년 열린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오즈번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 내용이다. 캐나다 종군기자 마이클 매클리어가 쓴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따르면 미군과 CIA가 공동으로 전개한 '''"피닉스 전략(Phoenix Program)"'''을 통해서 1968년부터 1971년 까지 약 27,000명을 체포하여 20,000명을 어떠한 물증이나 근거도 없이 학살했다고 한다. 이 작전에는 그린베레를 비롯한 수많은 미국의 특수부대들이 참여했고, 성고문, 전기고문, 거꾸로 매단 상태에서 행하는 물고문 그리고 무차별 구타와 같은 잔혹한 고문들을 자행했다고 한다.[30] 그리고 오즈번은 "피닉스 작전은 인간이 자행할 수 있는 가장 야수적인 범죄"였다고 털어놓았고, 6인치 나사못으로 뇌를 관통 당해 사망한 시신을 자신이 직접 확인했다고도 증언했다. 확실한 물증없이 사살된 사람들 대다수는 고문으로 죽거나 산 채로 헬기에 실려 태평양에 던져졌다고 한다.
1970년 봄 사이공 농과대학에 다니던 남녀 학생 11명이 반정부시위와 관련하여 가혹한 고문을 받은 사실이 보도되기도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70년 7월 인권유린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맥클로스키 등을 포함한 미 하원의원 4명이 베트남을 방문하여 이를 확인해보는 일까지 있었다. 심지어 베트남 수용시설 조사단에 참가했던 호킨스 하원의원은 '''북베트남 미군포로 수용시설이 남베트남의 미군 관할 수용시설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라며 미군의 범죄행위를 규탄하기도 했을 정도였다.[31]
특히 월맹군이나 베트콩을 상대로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허구헌 날 자기네들만 피해를 보자 화가 난 미군들은 애꿎은 베트남 민간인들에게 행패를 부리기도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미군 최악의 학살인 '''미라이 학살'''이다. 1968년 3월 16일, 윌리엄 켈리 중위가 이끄는 미군은 미라이 촌에 들어가 단 하루 동안 총 504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들 중 대다수는 여자와 노인 그리고 어린아이들이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이는 결국 1969년 어느 양심있는 기자에 의해 진상이 드러난다.
그 외에도 미군이 저지른 학살로는 '''탄퐁 학살, 송탄 학살''' 등이 있는데 한국군의 학살 의혹과는 달리 모두 진상조사와 진실규명이 확실하였고 당시 종군기자가 학살 당시를 확실하게 찍었기 때문에 빼도박도 못하고 미군의 짓임이 드러난 사건들이다.
그외에도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타이거 부대'''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가 있다. 1965년 말에 창설된 타이거 부대는 1967년부터 베트남의 꽝응아이성에서 무고한 베트남 민간인에게 베트콩이라는 혐의를 씌워 고문 및 살해하고, 생업에 전념하는 오지 마을을 습격하여 어린이 부녀자 노약자 등 주민을 학살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젊은 부녀자를 강간한 뒤 살해하고, 부녀자의 품에 있던 유아도 목을 베거나 군홧발로 밟아 죽였다고 한다.[32]
미국의 이런 폭압적인 행위는 베트남 민간인들의 반감을 불러왔고, 민간인들이 베트콩에 가입하는 불씨가 된다.[33]
다만 베트남 전쟁은 그야말로 전쟁 범죄의 소굴이라 참전국 모두가 범죄행위 사실이나 의혹이 있다. 전술했든 한국군도 '''퐁니, 퐁넛'''과 같은 몇건의 의혹이 있고 1건의 범죄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북베트남도 포로로 잡힌 이들을 가혹하게 대했으며, 그들 또한 학살 문제에 대해서 떳떳하지 못하다. 한국과 미국 측이 현재 베트남 정부에게 베트남전으로 인한 피해를 사과했고 베트남 측에서도 과거사에 대해서 따지지 않겠다고 나오는것이 이런 이유다. 괜히 베트남이 미군과 한국군의 범죄사실을 찾겠답시고 들쑤셨다가 자신들이 은폐해왔던 범죄 사실까지 드러나면 역으로 비난받아서 난처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융단폭격을 하고 수많은 고엽제를 뿌리며 수백만의 민간인에게 피해를 준 미군에 비해 덜 캥기긴 하더라도 말이다.

4.6. 집단적인 병역거부


거기에 미국 내에서는 "징병제 엿먹어라"라는 소리가 나올정도로 젊은 남성들이 집단으로 징집을 거부하며 반전운동 시위, 징집영장 불태우기, 전쟁규탄 시위까지 터지면서 미국은 벌집을 쑤신 듯이 소란스러워졌다. 아예 미국을 떠나 캐나다로 도망가는 젊은이들도 많았다. 사이버펑크의 시초인 뉴로맨서 작가 윌리엄 깁슨도 이 당시, 미국에서 태어나 전쟁반대를 외치며 캐나다로 이민 간 경우다. 당시 신병교육대는 시애틀에 위치해 있어서 불과 90분만 차로 이동하면 캐나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캐나다를 떠돌면서 히피 문화를 실천하며 막장에 가까운 히피 퍼포먼스를 보였으며, 많은 이들은 사회 부적응자로 살며 마약중독 등에 빠져 자살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전쟁이 막바지였던 69년도에는 미군에 의한 강간, 민간인 학살과 같은 반인륜 범죄, 불평등한 징병제[34] 등이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그 누구도 전쟁에 참전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물론 미국 내에서 징병을 피해 캐나다로 이민을 갔던 사람들을 배신자, 탈영병, 겁쟁이 취급하며 하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반인륜적 범죄행위에 가담하지 않고 양심을 지킨 이들이 보여준 용맹으로도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캐나다로 이민을 갔던 젊은이들이 모두 캐나다 시민권을 부여받은 것은 아니었고 단 25%에게만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이들을 전부 사면했고, 이 후 미국으로 돌아가는 사례도 적지는 않았다.
의외로 21세기의 미군들 가운데에서도 이렇게 캐나다로 도망치는 경우가 꽤 되는데, 곧 만기 전역자들의 모든 인사명령을 중단시켜버리는 것(Stop and Cut) 때문이다. 이는 제 2의 베트남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라크 전쟁에서 전투병력이 부족했던 미국이, 전역예정자들의 전역을 미루면서 발생한 일이다.
미국 내부의 상황도 엉망이긴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남북전쟁 이래 부병제를 유지해왔는데, 이는 국민의 군 복무를 법으로 강제한다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징병제와 같으나 세부적으로는 차이가 있는 방식이다. 미국의 부병제는 베트남 전쟁 이전까지는 미혼 남성을 동원 목록 최상위에 두고, 자식이 없는 기혼 남성을 그 밑에, 그리고 자식을 둔 기혼 남성을 목록의 가장 하위에 둔다는 원칙을 줄곧 고수해왔다. 그러나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한 이후 수많은 남성들이 동원을 피하기 위해 섣불리 결혼식을 올리는 일이 발생하자, 1965년 8월 26일 오후 5시, 린든 존슨 대통령 본인이 "'오는 자정부터 결혼 여부 및 자녀 유무를 군 복무 관련으로 전혀 법적 반영하지 않겠다"'는 '''폭탄 선언'''을 한다. 또한 미국의 경우, 부병제가 있던 당시에는[35]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나 지리적으로 고립된 오지로 동원되는 일을 피하기 위해 차라리 주 방위군(National Guard)으로 자의적으로 들어가 복무하는 일이 잦았는데, 미국 정부는 60년대 후반 즈음 주 방위군 소속 부대 일부마저도 베트남으로 파병 보내기 시작했다.

5. 결론


'''1964~1972년까지, 세계 역사상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가 한 작은 농업국가의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을 파괴하기 위해 원자탄을 제외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군사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패배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싸웠을 때, 그것은 조직화된 '''현대의 테크놀로지조직화된 인간''' 사이의 싸움이었으며 결국 '''인간이 승리했다.'''

<미국 민중사 2 p.207>

'''이 따위 상황이니 당연히 열심히 싸우겠다는 의욕이 있을리가 없다.''' 1969년 전투기피로 기소된 건만 117건, 1970년에는 131건 등 꾸준히 증가추세였다. 종전이 다 되어가던 1972년에는 탈영한 이들만 무려 7.3%나 되었고, 미군의 무단 이탈은 무려 17.6%나 되었다. 이렇게 탈영한 이들은 북베트남을 거쳐서 중국이나 소련까지 넘어가서 미국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망명하기까지 하였다. 심지어 당시 기항지였던 일본에서 탈영하여 유럽으로 망명한 사례도 있었다. 그리고 주한미군도 마찬가지여서 베트남으로 보내질 것이 두려워 월북하여 북한에서 활동한 월북 미군도 있었을 정도이다. 해당문서 참고바람.

6. 여담


반전 운동 측에서도 흑역사에 가까운 뻘짓이 저질러 졌던 적이 있는데, 헨리 폰다의 딸인 제인 폰다는 단순히 전쟁을 반대하는 것을 넘어서 베트남을 방문해서는 '''아예 북베트남의 선전 방송에 출연하는 나팔수 매국노 짓'''을 하고 다녔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하노이 제인"으로, 반전운동의 선을 넘어 '''이적행위'''에 가까운 행동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36] 물론 법적으로는 문제 없었다지만, 베트남에 파병가서 개고생 하고 있는 군인들 입장에서는 전쟁은 고사하고 미국에서 고생 없이 안락하게 살던 주제에 갑자기 베트남으로 건너가서 그 적들의 나팔수 짓을 하고 있는 행동이 좋게 보일 리는 만무하다.
또한, 이들의 과격한 행동은 도를 넘어서, 지나가는 군인만 보면 아기 살인자(Baby Killer)라고 욕하거나[37], 정복에 부착한 약장 등을 뜯어내고 침 등을 뱉거나 구타하는 등 모욕을 행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이후 걸프 전쟁 등 큰 전쟁이 이어지며 군인을 대하는 이미지가 뒤바뀌고 이들의 행각은 흑역사가 된 상태이다.
또한 그렇게 미국의 삽질을 즐겁고 유쾌하게 바라보던 라이벌 소련은 훗날 자기네들도 똑같은 실수를 하게 되어 소련이 몰락하는 원인제공을 하게 된다.[38] 그리고 역으로 소련의 실수와 몰락을 보며 조소했던 미국이 약 20년 뒤에 소련과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실수를 해버렸으니 역사의 아이러니함이란....

7. 관련 문서



[1] 일단 공격을 받은 것 자체는 사실이다. 문제는 1차는 진짜였지만 2차는 날조이거나 착각이었다는거.[2] 반면 한국군은 6.25전쟁때 경험했으니 게릴라전에 익숙했고 전략촌 전술로 차근차근 진지를 쌓으며 나가는 등 베트남 마을 주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전진하는 작전이었다. 적은 인원수로 처음에는 방어전을 시행했다가 역으로 한국군이 공격 모드로 전환하면서 포위망 전술을 써버림으로써 베트콩 상대로 상당한 교환비를 내었다. 미군은 그냥 경고사격을 주는 반면 한국군은 끝까지 쫓아가서 베트콩들을 사살하였다. 베트콩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국군의 전술을 모방했으나 한국군은 우회 전략을 내세우는걸로 해결하였다. 이 때문에 호치민은 한국군이나 한국 민간인만 만났다하면 죽은 목숨이니 동향을 살피라고 했다고 한다.[3] 일선 보병사단 병력들 중 자원한 우수 인원들로 사단을 구성해 파병했다.[4] 미 의회에서 아이코드 의원을 중심으로 한 아이코드 위원회는 M16의 원인 중 하나로 화약을 짚었다. 223 레밍턴 민수용 탄약의 IMR4475 과립형 탄약은 약실에 탄매가 끼는게 덜했지만 WC846 군 제식 볼 파우더가 탄속이 더 높아서 교체됐는데, 이게 탄매가 끼는걸 가속화 시키고 오작동 하는데 어느 정도 기여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XM16E1이 30,000정 정도 소수 운용될 때부터 “미래적인 총이라 총기손질을 할 필요가 없다” 라는 소문이 퍼저서 다들 총기손질을 안한 것과 신형 총이라 총기손질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은게 문제였다. 그래서 전용 청소도구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만화 형식으로 총기손질 교육 만화를 배포했고, 그제서야 작동불량 문제가 해결된다. 총기 자체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던건 1967년 5월 경으로 약실 크롬도금 외에는 크게 없었고, 총신 크롬도금과 함께 화약도 70년대쯤이나 개량된다.[5] 실제로 어떤 베트콩의 경우 자신이 쓰던 AK가 폭발해 노리쇠가 눈에 박혀 죽은 사례도 있다 카더라.[6] 아무리 AK를 쓰기 싫어도 M16소총이 고장나거나 탄약이 바닥난 상황에서 적군의 무기라도 주워쓰는게 이치다. 그렇다보니 결국 애꿎은 미군 병사들만 부상당하거나 죽어나갔다. 이렇다보니 당시 월맹군이나 북베트남군 무기 중에서 AK가 아닌 PPSh-41이나 MAT-49 기관단총 같이 다른 무기가 있다면 횡재했다고 그걸 주워 쓰는 미군들도 있었다.[7] 사실 F-105는 지상공격용으로 만든 기체다. 억지로 공대공 전투에 넣다 보니 이렇게 된 것.[8] 북베트남은 MiG-21 7대가 격추되었고' 미국의 피해는 없음. 당시 북베트남이 보유한 MiG-21은 16대였으니 거의 절반을 한번에 날려버린 셈이다.[9] 미 해군의 F-4는 1:5.71의 교환비를, 미 공군은 1:3.24의 교환비를 기록했다.[10] 다만 롱탄 전투의 경우 교환비와 별개로 당시 호주군이 거기서 지원군이 오기까지 수 시간이나 버텨낸 것부터가 엄청난 분전이었다.[11] 그 유명한 짜빈동 전투두코 전투의 전과계산은 실제 시신발견 및 무기노획 기준으로 이뤄졌다.[12] 한반도 휴전 협정 후에도 원조할때도 그랬었다.[13] 만일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 아닌 한국군에 지휘를 맡겼다면 북베트남은 100퍼센트 무조건 완패했을 것이다. 소련과 중국이 경쟁 대상은 미국이지 한국이 아니란 것이다.[14] 지금 기준으로도 그정도 달러면 한화 3억 5천만원과 맞먹는 돈인데 그 당시의 달러 가치는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 애초에 '''금본위제'''가 폐지된 원인 중 하나가 베트남전이다.[15] M16 소총은 발사 속도가 분당 700~950발인데 이렇게 갈겨대면 당연히 탄약량이 남아나질 않는다.[16]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안 간다면 배틀 오브 브리튼 기간 동안 루프트바페가 영국 전역에 투하한 폭탄이 12만톤이다. 다만 케산공방전은 어쨌건 막대한 공중폭격을 퍼부은 대가로 케산이 제2의 디엔비엔푸가 되는 상황을 저지하는데 성공했기에 낭비의 예시로서 드는건 적절치 않다.[17] 청구서에 '손망실'이라고만 적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달라는 만큼 다 줬다고 한다. -[18] 해당 이야기는 베트남 전쟁 당시 라오스블랙 옵스에 투입된 CIA의 이야기를 다루는 파트에서 나오는 일화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에 미국 측에서 돌던 분위기가 어떠했을지를 짐작할 수 있는 일화.[19] 심지어 한국군은 미군이 주는 전투음식(스테이크, 스파게티 등)을 받지 않고 자신들만의 전투음식을 직접 만들어서 쓴다고 한다.[20] 이건 갖고 놀려고 끼워놨다기 보다는 징크스로 끼어놨다고 한다.[21] 오타 아님.[22] 그중엔 당연하게도 핀업 걸 같은 음란물도 있었다.(...)[23] 저격수에겐 '''아주 좋은''' 표적이다.[24] 다만 앤더슨 중사 역시 PTSD에 심각하게 시달리고 있었고 이로 인해 이혼까지 당하게 되며 사회에 적응을 못하여 군대에 있었던것이다.[25] 괜히 영화 풀 메탈 자켓에서 하트먼 상사 같은 캐릭터가 나온 게 아니다.[26] 기간은 다르지만 좀 더 온건하고 확정적인 상원의 보고서에 의하면 '1969년에서 1970년 사이에 살해나 협박용까지 포함하여 미군 부대에서 수류탄 사고가 총 790회 발생하였고, 그 결과로 사망한 장교가 83명이나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우발적 사고를 포함하겠으나 수류탄으로 한정된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기록이라고 하겠다. 애초에 프래깅의 원 뜻도 '''수류탄을 사용한 상관 살해'''이다.[27] 당시엔 M16조차도 남베트남군에게 지원하다가 오히려 남베트남군이 빼돌려 팔아버린 경우가 많아서 이것만으로 아군에게 죽었다고 할 증거가 못되었기 때문이다. 등뒤에서 총알을 맞았다고 해도 전투 도중 늘 앞만 보는 게 아니라 뒤돌아보던 터에 당할 수도 있다는 주장도 나오니 이것도 증거가 못된다.[28] 당시 파병되었던 전두환 대령의 일화와 비슷하다. 전두환 대령 역시 휘하 사병들은 물이 부족해 죽겠는데 본인은 매일같이 샤워를 했고 완전히 놀고 먹었다.[29] 참고로 한국도 빨치산 토벌 당시 빨치산과 조금이라도 협력한 경우에는 통비 분자라 해서 처벌했고 빨치산 항복자들은 다 처벌했지만 이후에는 이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는(이렇게 되니 빨치산과 접촉했던 이들은 뭘 해도 안된다고 꺠닫고는 빨치산이 되기도 했다.) 반대로 빨치산의 항복을 유도하는 쪽으로 선회했고 특히 빨치산에서 전향한 자들을 토벌에 적극 활용했다. 당연하지만 전직(?) 빨치산들은 빨치산의 습성을 너무 잘 알았고 목숨만 살아도 감지덕지라 여겼는데 오히려 빨치산 토벌에 참여하게 되자 더 열렬하게 빨치산을 잡아들여 빨치산들이 이를 갈 정도였다고... 여튼 한국은 기존 전술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고 변경이라도 했는데 이쪽은 끝내 깨닫지 못했다는 문제가 드러난 것이다. 대민 지원을 군이 아닌 민간 단체에 맡겨버렸고 베트남 주민들이 대민 지원을 충실히 하는 한국군보다 '쌀 줬으니까 됐지?' 해놓고 쌀을 던져놓고 가버리는 미군들을 곱게 볼 리가 없었다.[30] 출처: 아메리카 제국의 몰락 p.415[31] 출처: 아메리카 제국의 몰락 p.416[32] 출처: 아메리카 제국의 몰락 p.423[33] 로빈 윌리엄스가 주인공으로 출현했던 굿모닝 베트남을 보면 극중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친구로 여겼던 베트남 청년을 예시로 들 수 있다. 자세한 건 영화 참조. 사실 베트남 사람들이 베트콩과 북베트남을 지지했던 데에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들 입장에서 미국은 프랑스를 떠난 뒤 대신 들어온 제2의 프랑스였던 측면도 많이 반영됐다.[34] 가난한 사람들은 최전선에 배치되고, 부유한 사람들은 미국 본토 또는 안전한 후방에서 장교로 복무하는 경우가 많았다.[35] 사실 지금도 명목상으로는 미국에서 부병제가 유지되고 있으나 현재 미군은 오히려 매년 자발적으로 입대하는 이들을 처리하기에도 벅찬 상황이 된 관계로 자연히 법적으로 동원이 강제되었다는 사례는 나오지 않고 있다.[36] 이때 미군 포로들로 부터 가족에게 전해달라고 받은 쪽지를 북베트남군에게 넘겨서 포로들 - F-4 파일런 래리 캐링턴(Larry Carrington) - 이 죽게 만든 짓을 했다는 주장도 나왔을 정도. 단 이건 나중에 루머로 판명났다.[37] 람보 1을 보면 고생하고 귀국한 람보에게 단체로 모여서 아기 살인자라고 욕하는 반전주의자들을 비판한다.[38] 특히 이때 미국은 아프간 반군을 지원해서 소련군을 고전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