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엘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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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제61대 감독 움베르투 코엘류의 대표팀에 대해 다룬 문서.
2. 선임과정
UEFA 유로 2000 4강의 업적을 세웠음에도 포르투갈 축구협회는 코엘류와의 계약을 갱신하지 않았고, 코엘류는 모로코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잠시 맡았다가 팀이 세네갈의 이변의 희생양이 되며 2002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하자[1] 다시 백수 신세가 된다.
그러다가 거스 히딩크의 후임자를 물색하던 대한축구협회의 제안을 받아들여 2003년 1월부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게 되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대한축구협회가 감독직 후보로 마지막까지 코엘류와 저울질하던 상대방이 세네갈 감독으로 코엘류에게 아픔을 안겨줬던 브루노 메추 감독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계약 기간은 1년 6개월, 즉 2004년 7월에 열리는 2004 AFC 아시안컵 중국까지였다.[2]
(히딩크가 추천한 감독이 코엘류 감독이였다는 말도 돌기도 했다)
3. 활동
3.1. 2003년
3.2. 2004년
4. 평가
대표팀 부임 초기 코엘류는 홍명보가 은퇴한 수비 라인을 포백으로 변화를 꾀했고, 패스와 테크닉 위주의 전술을 표방했다. 당시 유행하던 일명 '크리스마스트리 전술'이라는 4-3-2-1 전술을 썼고 당시 한국으로는 파격적으로 맨 앞선의 1에 안정환을, 2에는 박지성, 이천수를 배치하기도 하는 등 한국이 그 동안 금과옥조처럼 지켜오던 '떡대되는 타겟 스트라이커'를 버리고 기술적인 공격진으로 청사진을 그리기도 했다.[3] 이관우가 중용된 것도 바로 코엘류 시절의 일이다.[4] 조재진, 조병국, 김두현, 김동진, 정경호, 등 젊은 선수들을 과감히 발탁하면서 2002 한일 월드컵 이후의 국대 방향성을 제시하였다.[5]
코엘류호 시절에는 전임 히딩크 감독이 다져놓은 강력한 체력과 압박을 기본으로 패스와 테크닉을 도입하기 시작했는데, 코엘류호 경기를 보면 유럽 팀처럼 패스를 구사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아마 시간과 제대로 된 지원을 코엘류 감독에게 해주었다면 또다른 대한민국만의 축구 스타일이 생겼을 거라는 관측을 하면서 아쉬워하는 올드팬들이 있다.
코엘류가 처했던 문제는 히딩크 직후의 시기였다는 것이다. 선수부터 국민까지 모두 뽕에 취해 있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한국으로는 히딩크처럼 직설적으로 뽕을 깨부수는 힘과 카리스마가 필요했다. 그러나 히딩크와 달리 코엘류는 덕장에 가까웠다. 성격이 불 같고 다혈질적인데다 강압적이었던 히딩크는 여론의 질타와 한국 축구인의 무조건적인 비하에도 강하게 대처하며 선수단을 하나로 만들었다. 반면 코엘류는 히딩크에 비하면 부드럽고 신사적인 성격의 소유자라 조금 흔들릴 때마다 한국 축구인들과 언론들이 만만하게 보고 계속해서 찔러댔다.
또한 월드컵 개최라는 초유의 이벤트를 위해 K리그를 포함한 한국 축구 전체가 국가대표팀를 위해 희생했던 히딩크호 때와는 달리, 월드컵 이후에는 K리그 구단들도 무조건적인 희생을 김수하지 않았고, FIFA의 차출 규정을 준수할 것을 축구협회에 요구하기도 했다. 코엘류가 한국을 떠나면서 남긴 '''"14개월 동안 실제 훈련장에서 훈련한 시간이 72시간에 불과하다."'''는 말이 이러한 국가대표팀과 K리그의 갈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박성화, 최강희 당시 코치들도 도움은 커녕 감독의 말을 듣지 않는 등, 온갖 월권을 행사하면서 간섭하였는데, 그 전말은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프로그램에서 조셉 아우구스토 피지컬 트레이너가 증언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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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것은 한국 축구로서는 겪을 수밖에 없는 진통이었는데, 빠따로 유명한 박종환 감독이 일화로 3연패를 달렸던 것이 93~95였다. 강한 카리스마가 필요했던 이유는 뽕에 취해있었던 것도 있지만, 본격적으로 유럽 축구를 직수입하기 시작했던 과도기였기 때문에 이런 변화의 시기에 축구계 전반적으로 삐걱대고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잡아줄 만한 카리스마가 코엘류에게 없었다.
상황이 안 좋긴 했다. 오만 쇼크 당시 기술위원이 아무도 국가대표팀에 동행하지 않는 등, 대한축구협회의 지원도 히딩크 때에 비하면 부족했고, 올림픽 축구의 중요성만을 타국에 비해 높게 보는 한국 풍토도 코엘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축협은 한국 문화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신임 감독을 잘 지켜주지 않았다. 02년 이후 기대가 너무 높아진 국민들은 평가전이나 중요하지 않은 경기도 무조건 닥치고 승리, 그것도 압도적 승리만을 원했다. 게다가 감독이 원하는 축구가 한국이 기존에 해오던 축구도 아니라서 국민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던 점도 있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성적이 좋았으면 경질까진 가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오만 쇼크나 베트남에 패한 걸 넘어가더라도 적어도 몰디브에 0:0으로 비긴 건 그 어떤 변명의 여지가 없는 건 사실이다.
사실 코엘류가 선수 시절 스펙으로만 따지면 울리 슈틸리케와 차범근 다음으로 화려할 만큼 뛰어난 스타 플레이어였기는 했으나, 은퇴 후에는 주로 축구 행정가로 커리어를 보냈지 감독 경력은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을 유로 2000 4강에 진출시킨 것 말고는 일천한 수준이었다. 분명 선진 축구를 한국에 이식하려 했고 다양한 선수들을 선발한 것은 긍정적인 부분이었으나 마무리를 좋게 끝맺지 못했던 데에는 본인의 능력 부족도 있었다. 그러나 전술적인 능력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인상적이었다는 사람들이 많다.
5. 경기 결과
'''결과 : 총 18전 9승 3무 6패'''
중견 이상팀과의 친선경기에서 승리는 일본전이 유일하다. 18번의 A매치 통틀어 단 3번만 무승부를 기록했는데, 문제는 그 중 하나가 '''몰디브'''와의 무승부였다.
[1] 마지막 한 경기를 남겨놓고 7경기 무패로 잘 나갔는데, 최종전에서 세네갈에 0-1로 뜬금패를 당하며 승점은 동률, 골득실에서 뒤지며 세네갈에 밀려 탈락한다.[2] 하지만 코엘류 본인은 나중에 '''"나는 한국이 좋고 더 머무르고 싶다."'''라면서 2006년 독일 월드컵까지 지휘봉을 잡겠다는 속마음을 드러냈다.[3] 결과적으론 결국 최용수, 설기현, 조재진 등 타겟 스트라이커로 회귀하긴 했다.[4] 불운하게도 이관우는 오만 쇼크와 몰디브 참사에 모두 출장했다(...).[5] 참고로 이 당시 기회를 얻었던 젊은 선수들 중 상당수가 이후 2000년대 중후반 국가대표팀에서 중심 역할을 담당하는 선수가 되었다. 다만, 이 선수들이 2002년 월드컵 선배들을 뛰어넘지 못해 그대로 묻힌 것이 다소 아쉬운 부분. 축구계에서는 소위 골짜기 세대라고 부른다고 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