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엘류호/2003년
1. 개요
코엘류호의 2003년 경기 기록을 다루는 문서.
2. 경기 과정
2.1. 친선경기
2.1.1. 콜롬비아전
2003년 3월 29일,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콜롬비아를 상대로 감독 데뷔전을 치렀다. 결과는 0-0 무승부. 이어 3주 후인 4월 16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일전에서 비록 후반 막판 개그골을 허용하며 (0대1로) 패하긴 했지만, 일본을 상대로 유례없이 가둬놓고 패는 좋은 모습을 보였다. 두 경기 모두 내용면에선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수 개월 전 '''월드컵 4강'''에 진출했던 영광의 기억에 지나치게 도취된 탓에, 중견 강호들을 상대로 1무 1패의 성적을 받아든 코엘류에게 여론은 그리 미덥지 않았단 거다. 감독으로 겨우 2경기를 치렀는데 벌써부터 미덥지 않다고? 문제는 앞서 말했지만 수 개월 전 4강의 기억에서 그 누구도 헤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감독으로서 코엘류도 첫 승을 고대할 수 밖에 없었고...
이 경기가 2020년까지 부산아시아드경기장에서 유일하게 승리하지 못한 경기이다. 그 이전과 이후로 부산아시아드에서 열린 나머지 경기들은 모두 승리했다.
2.1.2. 일본전
그 해 5월, 일본 도쿄에서 다시 치러진 한일전에서 후반전 교체 출장한 안정환의 결승골로 (1대0으로) 승리하며, 드디어 감독 부임 이후 첫 승을 신고했다.[1] 뒤이어 국내에서 벌어진 남미 강호와의 2연전... 참고로, 경기장은 둘 다 상암구장이다.
2.1.3. 우루과이전
첫 상대는 우루과이였다. 우루과이가 저력있는 강호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우루과이를 상대로 대표팀은 무차별 공세를 퍼부었다. 우루과이전 슈팅수는 17-7. 믿지 못하겠지만 '''대한민국이 17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애무축구는 이때도 빛을 발했다. 17-7이라는 압도적 슈팅수에도 불구하고, 0-2로 패배하고 만 것. 당시 스트라이커로 나섰던 최용수와 차두리는 적절한 찬스에서 적절하게 홈런(...)을 때려주었다. 참고로, 이날 경기에서 데뷔한 선수가 바로 조재진인데, 프랑스 월드컵 조별리그 네덜란드전에서 이동국이 선보였던 것과 비슷한 중거리포를 남기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당시 상주 상무에서 뛰느라 짧은 머리로 간지를 뿜었던 것은 덤(...).
월드컵 4강 신화에서 헤어나지 못한 국민들은 '''자신보다 한 수 아래'''로 여긴 우루과이에 홈에서 0-2로 패배한 사실을 놓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성급하게 코엘류 경질론까지 다 나올 지경이었다. 더구나 남미 강호 2연전의 다음 상대는 '''아르헨티나'''.
당시 분위기가 얼마나 초상집이었냐면, 4강 진출로 병역의무를 면제받고 기본군사훈련을 받느라 훈련소에 입소한 안정환을 '''잠시 훈련소에서 빼오기까지 하였을 정도였다'''. 상상이나 가는가? 이등병도 아니고 '''훈련병'''을 훈련소에서 상암으로 끌고 오다니... 물론 안 그래도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AC 페루자에서 방출당한 뒤 J리그로 선회하며 기량이 주춤했던데다, 군사훈련까지 받았으니 도저히 필드에서 뛸 상태는 못 됐다(...).[2]
2.1.4. 아르헨티나전
그리고 치뤄진 아르헨티나전. 대한축구협회는 지난 경기에서 2골을 허용한 것을 수비 불안으로 파악했다. 코엘류는 데뷔전부터 우루과이전까지, 포백 수비의 정착에 힘썼다. 문제는 홍명보의 존재로 인해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은 3백에 익숙한 상태였단 거다. 한동안 홍명보를 대표팀으로 부르지 않고 송종국 등 대체자들을 활용하며 3백, 4백을 다양하게 시험해 왔던 전임 감독 거스 히딩크도 다시 홍명보 중심의 3백 수비로 복귀한 바 있었다. 국내리그를 파행까지 시켜가며 전폭적 지원을 받았던 히딩크마저 이럴진대, 코엘류가 월드컵 4강으로 높아진 기대 앞에서 단기간에 4백을 정착시키기는 불가능했다.
결국 아르헨티나전에서 대표팀은 다시금 전가의 보도를 꺼내든다. 바로 멀티플레이어 유상철 카드였다. 유상철을 중심으로 다시 3백으로 전환한 대표팀은 놀라울 만큼 끈끈한 수비력을 보여줬고, 비록 (0대1로) 패배하기는 했으나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단 한 골만 내주며 경기 내용면에서도 나무랄 데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렇지만 여전히 국민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 모두 지난 월드컵에서 조별리그도 통과하지 못한 팀들인 반면에, 우리는 지난 대회 4강팀이니까...
2.2. 오만 쇼크와 기타 경기들
남미 2연전의 충격 탓이었는지, 한동안 대표팀은 흔한 친선전도 없이 수개월을 흘려 보냈다. 그리고 맞이한 2004 AFC 아시안컵 중국 예선전. 대한민국은 오만 - 베트남 - 네팔 등과 한 조로 묶였고, 각각 1-0, 5-0, 16-0 등으로 대파하며 간만에 시원한 승리를 거두었다. 비록 아시아 약체팀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기록들이었지만, 같은 해 3월 일본 원정에서 한 골 차 승리 이후 승리라는 것을 구경도 못 해봤기에, 다시금 여론은 호의적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기어이 대형사고가 터졌다'''.
국내에서 3경기, 오만에서 3경기를 치루기로 합의하고 진행된 예선전이었기에 대표팀은 곧바로 오만으로 건너갔는데, 그리고 한국시간으로 새벽, '''베트남에 0-1로 패배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만 것이다'''. 한국은 물론이고 FIFA조차도 경악한 참사가 벌어진 것. 이날 FIFA 홈페이지의 메인은 한국의 충격패로 장식되었다. 그리고 베트남전 패배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2차전인 오만과의 경기에서는 '''오만에 1-3으로 역전패'''한다. 그리고 또다시 FIFA 홈페이지는 한국의 충격적 연패를 메인으로 다루었다. 이른바 '''오만 쇼크'''. 자세한 내용은 옆의 해당 문서를 참조. 하지만 네팔을 7-0으로 이겨 AFC 아시안컵 본선에 간신히 진출한다.
이 기록적 대참사로 코엘류호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경질 여론이 드디어 수면 위로 부상한 것. 하지만 아직 부임 1년 밖에 안 된 점을 감안, 대한축구협회는 유임을 결정한다. 유례없는 참사와 감독의 경질론이 불거진 어수선한 상황에서 그 해 가을, 대표팀은 유럽 강호와의 평가전을 계획한다. 본래 크로아티아와 상대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오만 쇼크의 충격 탓인지 그보다 한 수 아래인 불가리아로 평가전 상대가 결정되었다. 그리고 '''또''' (0대1로) 패했다. 안정환이 1:1 상황에서 때린 슈팅이 골포스트를 맞고 나가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2.3. 2003년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한중일 3국은 '동아시아축구연맹'의 창설을 합의했다. 그 결과물로 그해 12월, 일본 도쿄에서 제1회 동아시아연맹컵이 개최되었다.
최종 명단 전원 K리그와 J리그 소속 선수들로 구성되었다. 1년 전에 월드컵에 출전한 23명 중 K리그와 J리그에 소속된 8명[3] 이 발탁되었으며, 월드컵이 끝난 이후 아시안 게임에 출전한 U-23 출신 선수 4명[4] 도 포함되었다. 한편, 리그가 진행 중이고, 의무 차출을 할 수 없는 유럽파는 제외되었다. 기존에 유럽에서 뛰던 설기현(RSC 안데를레흐트, 벨기에) 이외에도, 월드컵이 끝나고 유럽 진출에 성공한 이천수(레알 소시에다드, 스페인), 차두리(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독일), 김남일(SBV 엑셀시오르, 네덜란드), 박지성, 이영표(이상 PSV 에인트호번, 네덜란드), 송종국(페예노르트 로테르담, 네델란드) 등은 당시 유럽에서 뛰고 있어서 차출할 수 없었다. 이들의 빈 자리는 2004 아시안컵 예선에서 주전으로 뛰었던 이관우, 김도훈, 정경호, 김대의 등이 메웠다.
홍콩과의 1차전에서 대표팀은 홍콩에 동점골을 얻어맞아 불안함이 되살아나는가 싶었지만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게 경기해서 3-1 낙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2차전 상대는 중국. 10여년 전 뜨거운 화제를 모은 '''을용타'''가 등장한 바로 그 경기였다. 전반부터 대표팀은 중국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마침내 후반 막판, 코너킥 경합 상황에서 주장 유상철의 헤딩이 골문 앞에 가로선 중국 수비수의 머리에 맞으며 들어가 결승골을 뽑아낸다. 그러나 후반전 들어 중국 선수와의 충돌로 이을용이 퇴장당하며 대표팀은 수적 열세에 빠진다. 그러나 중국은 수적 우위를 전혀 살리지 못했고, 안정환이 수비수를 여럿 제치며 때린 중거리슛이 중국의 골포스트를 맞고 흘러나오기도 했다. 후반 막판 경합상황에서, 중국측의 헤딩이 우리측 골라인에 아슬하게 걸렸다. 당연히 골라인에만 걸리고 말았으니 경기는 그대로 속개되었는데, '''중국 선수들은 떼거지로 골 세레머니를 하며 뛰어갔다'''(...). 이렇게라도 하면 주심이 득점으로 인정해 줄 것으로 여겼, 아니 '''우겼다'''고 밖엔... 당연히 주심은 휘슬을 불지 않았고, 볼을 잡은 이관우는 그대로 중국 진영을 향해 돌진했다(...). 몇몇 제정신인 중국 수비들이 이관우에게 달려들었고, 이관우는 1:1 상황에서 중국 키퍼를 제치지 못하며 추가골을 넣지 못했다. 결국 경기는 1-0 승리로 마감.
마지막 3차전 경기는 홈팀 일본과의 한일전. 이로써 2003년에만 우연찮게도 일본과 3차례 한일전을 가지게 된 셈이 되었다. 대표팀은 일본과 막상막하의 치열한 경기를 펼쳤다. 후반에 들어 대표팀은 호재를 맞는다. 일본의 공격수 오쿠보 요시토가 퇴장당한 것. 수적으로 앞선 대표팀은 일본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안정환이 상대 수비수와 골키퍼까지 따돌리며 텅 빈 골문을 향해 날린 크로스가 아쉽게 흘러나가기도 했다.[5] 결국 열 명이서 싸운 일본에게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경기는 무재배로 막을 내렸다. 이로써 3차례의 한일전에서 1승 1무 1패를 기록했고, 제 1회 동아시아 연맹컵에서는 2승 1무로 우승을 차지했다. 코엘류호의 첫 국제 대회 우승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여론은 싸늘했다. 앞서 수차례 언급했지만, 오만 쇼크에도 불구하고 작년에 이룩했던 4강 신화의 기억은 잊기에는 너무도 가까운 영광의 과거였다. 그런 마당에 오만 쇼크는 물론이고, 수적우위에서 싸운 '''일본'''에도 승리를 거두지 못한 점은 국제대회 우승에도 불구하고 여론을 반전시키기엔 한참 부족했다.
[1] 이 당시 일본은 유효슈팅을 단 '''1개'''만 기록했다. 모든 슈팅을 합쳐도 겨우 3개.[2] 실제로 안정환은 이날 경기에서 대기만 했을 뿐 출전하진 않았다. 가끔 중계화면으로 짧게 머리를 민 안정환이 비칠 때마다, 관중석에서는 환호성이 울렸다.[3] 이운재, 최진철, 유상철, 김태영, 현영민, 이을용, 최용수, 안정환[4] 김용대, 김동진, 김두현, 김은중[5] 이때 빈 골문을 향해 정경호가 몸을 날렸는데, 정작 공은 정경호의 머리에 맞지 않고 그대로 흘러나가고 정경호의 몸만 골망을 갈랐다(...). 당시 중계를 하던 송재익의 해설이 일품이었다. '''"아! 머리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