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리스트/생애

 


1. 개요
2. 생애 초반
2.1. 유년기
2.2. 신동 리스트의 연주여행
2.3. 파리로 이주
3.4. 마리 다구 백작부인
3.5. 아이돌(?) 거장 리스트
4. 필생의 여인
4.1.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
4.2. 바이마르의 황금기
4.3. 슬픈 시절
5. 생애 후반기의 리스트
5.1. 성직자의 길과 코지마 바그너
5.2. 3중 생활
5.3. 말년의 리스트


1. 개요


1811(출생) 오스트리아 동부 부르겐란트 주의 라이딩 지역에서 출생함.
1819(8세) 피아노 교습을 요청하기 위해 아버지와 카를 체르니를 방문함.
1820(9세) 외덴부르크에서 최초로 대중 공연을 열고 신동으로 유명해짐.
1822(11세) 빈으로 이주하고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 음악이론 수업을 받음.
1823(12세) 오페라 <동상슈, 사랑의 성>을 작곡함.
1825(14세) 테아트르 이탈리엥에서 <동상슈, 사랑의 성>의 초연이 열림.
1826(15세) <12개의 연습곡>을 작곡함.
1827(16세) 장티푸스로 인해 아버지 아담 리스트가 사망함.
1833(22세) 마리 다구와 처음으로 만남.
1834(23세) 마리 다구와 연인 관계가 됨.
1835(24세) 마리 다구와의 사이에서 첫째 딸 블랑딘이 출생함.
1837(26세) 마리 다구와의 사이에서 둘째 딸 코지마가 출생함.
1838(27세) <순례의 연보> 제1권을 완성함.
1839(28세) 마리 다구와의 사이에서 셋째 아들 다니엘이 출생함. 베토벤 추모동상 기금 마련을 위한 자선 공연을 엶. <6개의 파가니니 초절기교 연습곡>을 작곡함. 마리 다구와의 불화설이 심화됨.
1840(29세) 단독 공연으로 순회 연주를 시작함.
1841(30세) <노넨베르트의 작은 방>을 작곡함. 바이마르에 도착함.
1842(31세) <방랑자의 밤노래>와 <모든 산봉우리 너머 안식이 있고>를 작곡함.
1845(34세) 베토벤 추모동상 공개 행사에 참석하여 이 행사를 위해 작곡했던 <베토벤 동상 개막 기념 축제 칸타타>를 직접 지휘함. <나는 떠나련다>와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 사랑하라>를 작곡함.
1846(35세) 마리 다구가 리스트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소설 <넬리다>를 출간하고 베스트셀러가 됨. <헝가리 광시곡>을 작곡함.
1847(36세) 카롤린 자인 비트겐슈타인과 처음으로 만나 연인 관계가 됨. <고독 속 신의 축복>과 <시적이며 종교적인 선율>을 작곡함.
1848(37세) 카롤린 자인 비트겐슈타인과 바이마르에서 동거함. <헌정 패러프레이즈>를 작곡함.
1849(38세) <순례의 연보> 제2권을 완성함.
1850(39세) <사랑의 꿈>을 작곡함.
1851(40세) <초절기교 연습곡>을 완성함. <파가니니 대연습곡>과 <타소, 비탄과 승리>를 작곡함.
1853(42세) 제자였던 아네스와 연인 관계가 됨.
1854(43세) <파우스트 교향곡, 세 개의 성격 묘사>를 작곡함.
1855(44세) <바흐 이름 주제에 의한 전주곡과 푸가>를 작곡함.
1856(45세) <단테의 신곡 교향곡>을 작곡함.
1857(46세) 코지마가 한스 폰 뵐로와 결혼함. 블랑딘이 변호사였던 에밀 올리비에와 결혼함.
1859(48세) 특별 카펠마이스터 직위에서 사임함. 다니엘이 폐결핵으로 사망함.
1860(49세) 아네스와 친구 관계가 됨. <메피스토 왈츠 1번>을 작곡함.
1861(50세) 카롤린 자인 비트겐슈타인과 결혼하기 위해 로마에 감.
1863(52세) 코지마가 바그너와 연인 관계가 됨. <스페인 광시곡>을 작곡함.
1864(53세) <죽음의 무도>를 완성함.
1865(54세) 신부가 됨.
1866(55세) 어머니 안나 리스트가 사망함.
1868(57세) <피아노 기법 연구> 제1권을 완성함.
1869(58세) 바이마르에 돌아와 정기적으로 피아노 교습을 시작함.
1872(61세) 첫사랑이었던 카롤린 드 생 크리크가 사망함.
1876(65세) 마리 다구가 사망함.
1877(66세) <순례의 연보> 제3권을 완성함.
1883(72세) 바그너가 사망함.
1885(74세) 건강이 쇠약해짐.
1886(75세) 폐렴 악화로 인해 사망함.

2. 생애 초반



2.1. 유년기


1811년 10월 22일 헝가리 쇼프론 현 라이딩(Raiding) 근처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 아담 리스트(Adam Liszt)는 요제프 하이든이 전속음악가로 재직하기도 했던 에스테르하지 공작 가문의 집사였으며 집사가 되기 전에는 아마추어 음악가로 하이든을 비롯하여 베토벤, 훔멜, 케루비니 등과 인연을 맺기도 했다. 참고로 프란츠 리스트 본인은 하이든이 사망한지 약 2년 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두 사람이 만날 일은 없었다.
그의 어머니 안나 리스트(혼전 성은 라거)는 임신 초기부터 하늘에 대혜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 자신이 특별한 아이를 가졌다고 확신했다고 한다. 마치 위인전에서 위인의 비범함을 강조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 같지만 실제로 1811년 3월부터 육안으로 8개월 이상 볼 수 있었던 대혜성이 나타났고, 특히 리스트가 태어났던 10월에 가장 밝게 빛났다. 하지만 어린 리스트의 몸은 허약했고 죽을 고비도 몇번을 넘긴지라 리스트의 부모는 관 까지 준비한 적도 있었다.
리스트의 아버지 아담 리스트는 에스테르하지 궁정 음악가들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들은 아이젠슈타트에서 라이딩의 평범한 가정집까지 와서 실내악을 함께 연주하곤 했다. 덕분에 리스트는 요람에 있을 때부터 이미 음악 소리에 친숙해졌다. 여섯살 때는 아담이 페르디난트 리스[2]의 피아노 협주곡의 피아노 파트를 연주하는 소리를 듣고 그날 저녁에 외워서 따라 부르는 일도 있었다. 아담은 감동을 받았고 프란츠에게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가르쳐주었다. 아담은 아들에게 암보 연주, 즉흥 연주, 초견을 비롯해 여러가지 기법을 익히도록 권했고 리스트는 짧은 시간 안에 굉장한 수준에 도달했다.
아담은 아들에게 놀라운 재능이 있음을 확신했고, 1819년엔 집에서 80키로나 떨어진 빈으로 무작정 가서 당시 빈에서 가장 유명한 피아노 교사였던 카를 체르니[3][4]에게 리스트의 피아노 연주를 들려줬다. 체르니는 리스트의 재능을 보고 다른 귀족 학생들보다 훨씬 적은 수업료만 받고 그를 가르치다가 중간부턴 아예 수업료를 받지 않게 됐으나 리스트 가족은 빈 체류비 때문에 경제사정이 힘들어졌고, 아담은 1820년 헝가리로 돌아와 리스트의 데뷔콘서트를 기획했다. 콘서트는 두번 다 성공적이었으며, 특히 두번째로 열었던 콘서트는 관객으로 있었던 헝가리에서 강한 권력, 영향력, 재력을 가진 인사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이 콘서트 이후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본 헝가리 귀족들의 후원으로 1822년 초에 으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한다.
빈으로 돌아온 리스트는 다시 체르니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 작곡을 배운다. 이 시기에 체르니와 함께 그토록 존경했던 베토벤을 만나기도 했다. 리스트는 11살 때인 1822년에 비인에서 첫 데뷔 콘서트를 열었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의 피아노 실력은 점차 빈에서 유명해졌으며 빈 바깥까지 이름을 알리게 됐고, 12살의 나이로 당당히 안톤 디아벨리의 변주곡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다.[5]

2.2. 신동 리스트의 연주여행


리스트 가족은 헝가리 귀족들로부터 1년에 600굴덴씩 후원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사정은 좋지 않았다. 아버지 아담 리스트는 빈으로 이주하기 위해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니콜라우스공에게 빈에서 가문의 업무를 보겠다고 전출요청을 했으나 거절당하자 무급휴가를 신청하고 아들과 함께 빈으로 온 상태였기 때문에 리스트 가족의 수입원은 사실상 리스트의 연주회 밖에 없었다.
아담은 당시 유럽에서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떠오르던 파리에 주목했다. 파리로 가면서 마치 모차르트의 연주여행을 재현하듯 리스트는 뮌헨, 아우크스부르크, 슈투트가르트, 스트라스부르에서 잇달아 공연을 열었고 1823년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파리음악원에 입학원서를 넣었는데, 당시 파리음악원의 원장이었던 케루비니(Luigi Cherubini)는 그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하였다. 케루비니 본인도 이탈리아인이니 프랑스음악원 입장에서 보면 외국인일텐데 외국인이라고 입학을 거절하는 것은 무슨 심보인가 싶을 수도 있는데, 이러한 외국인 입학 제한 정책은 입학 희망자가 많은 피아노과에 한정된 것이었다.[6]
음악원에 입학하지 못한 리스트는 개인교습으로 음악을 배울 수 밖에 없었는데, 테아트르 이탈리엥의 음악감독이었던 페르디난도 파에르(Ferdinando Paer)에게 작곡을 배우고 파리음악원의 대위법교수인 안톤 레이하에게 음악이론을 배웠다. 그래도 헝가리와 빈에서 받은 소개장이 빛을 발한 덕분에 파리의 여러 살롱에서 연주활동을 할 수 있었다. 테아트르 이탈리엥에서 연 파리에서의 첫 공개연주회는 대성공이었고, 이 시기에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오페라인 돈 상슈를 위촉받아 작곡하였다. 이 때만 해도 리스트는 자신의 음악환경에 걸맞게 연주법나 작곡양식이나 빈 고전파양식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 주었으며, 후대의 '경이롭고 악마적인' 리스트의 모습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파리에서 성공을 거둔 뒤에도 리스트는 아버지와 함께 영국으로 연주여행을 떠나야 했다. 1825년에는 런던과 맨체스터 등의 도시에서 연주회를 열었는데 <모닝 포스트>지는 아직 고작 14살의 신동이었던 리스트의 연주에 대해 '거장 리스트의 연주를 제대로 다루기 힘들 정도로 우리는 완전히 무력해지고 말았다'고 평했다. 이 때 리스트는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수천명의 소년들의 합창과 연주를 듣고 종교적인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리스트는 3년동안 일상생활처럼 순회연주를 위해 끊임없이 여행을 다녔고 1824년에 어머니 안나는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자매와 그라츠시에서 살기로 했다. 어머니와도 떨어져 연주여행을 계속하던 리스트는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지쳐가기 시작했고 무대에 오르는 것도 싫어했으며 나중에 이 시절을 회상하며 스스로를 '서커스의 동물'이라고 자조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리스트는 정신적인 안정을 찾기 위해 종교에 심취해 종교서적을 잔뜩 읽었으며 연주를 그만두고 신학교에 들어가고 싶다며 아담에게 간청하기도 했지만 거절당했다. 1827년 8월 아담은 지친 아들을 데리고 휴양 목적으로 볼로뉴 지방의 온천에 갔는데, 여기서 아담이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하고 만다.[7] 아담은 자신이 사망한 볼로뉴의 묘지에 묻혔는데, 이후에도 리스트는 가끔 볼로뉴지방을 방문했지만 부친이 묻혀 있는 묘지는 방문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아담의 사망 당시 부자간의 사이가 그리 좋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3. 파리로 이주


여튼 그의 음악 교육과 연주 매니지먼트를 담당했던 부친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리스트의 인생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그간 아버지가 맡아왔던 일들이 전부 리스트 몫이 되었고 어머니까지 부양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
부친 사후 리스트는 연주여행도 중단했으며 돈벌이를 위해 어머니 안나 리스트와 함께[8] 프랑스 파리의 작은 아파트로 이주했다. 파리에서 그는 피아노 과외와 연주 알바, 작곡 등의 음악관련 일을 닥치는 대로 맡아서 했는데, 자신에게 배우는 학생들의 집이 여기저기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그는 아침 일찍부터 밤까지 파리 구석구석을 돌아다녀야 했다.
이듬해인 1828년 리스트는 자신의 제자로 피아노를 배우던 당시 프랑스왕 샤를 10세의 상공대신(商工大臣)의 딸 카롤랭 드 생크릭( Caroline de Saint-Cricq)과 생애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잘 나가는 정치인이었던 카롤랭의 아버지 피에르에게 리스트 같은 빈털터리에다 사회적 신분도 낮은 음악가는 당연히 안중에도 없었으며[9], 피에르의 반대로 리스트와 카롤랭은 결국 헤어진다. 아직 소년이었던 리스트는 꽤 오랫동안 이 실연의 충격에 시달렸는데, 고통이 너무 커서 마비증세를 일으키기도 했으며 죽고 싶다는 말이 와전되어 지역 신문에 그의 부고기사가 오보로 실리기도 했다. 작곡과 연주활동도 이 시기에는 거의 중단되었으며 지인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살았다. 이 시기 리스트는 고통을 잊기 위해 가톨릭 신앙에 깊이 빠져들었다. 한동안 피아니스트를 포기하고 또한번 사제가 되려는 생각도 했었는데 어머니와 지인들의 만류로 결국 성직자의 길은 단념했다.[10]
이처럼 빠리 시절 초기는 그에게 매우 어려운 시기였지만 나름 발전도 있었는데, 제대로 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던 리스트는 학생들을 가르치러 다니는 동안 남는 짜투리시간에 빅토르 위고, 하인리히 하이네 등 당대 유명작가들의 문학작품을 탐독하면서 교양을 쌓았다. 그가 평생 가까이 했던 술과 담배도 이 시기에 배웠다고 한다.
음악적으로도 중요한 변화가 찾아왔는데, 그는 파리 정착 직후 크레티엥 위앙(Chrétien Urhan, 1790-1845)이라는 독일 출신의 비올리스트이자 작곡가를 알게 되었으며 20살 무렵에는 베를리오즈와 친분을 맺었다. 리스트는 이들을 통해 낭만주의 음악사조를 본격적으로 접하고 비인의 고전파 양식에서 점차 벗어나게 되는데, 후술할 거장 연주자 한사람이 본격적으로 그의 음악인생을 바꾸어 놓게 된다.
한편으로 그는 출세한 이후에도 계속 바쁘게 살았으며, 평생동안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선과 후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파리 시절 초기에 어렵게 살았던 자신의 경험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3. 비르투오소 시기



3.1. 니콜로 파가니니


1832년 파리콜레라가 창궐하면서 희생자가 속출하자 당대의 거장 바이올리니스트인 파가니니가 이들을 돕기 위한 자선콘서트를 개최하였다. 이 콘서트의 관객 중에는 21살의 리스트도 있었는데, 이 연주회 관람은 그의 음악에 일대 전환을 가져다 주는 '사건'이 되었다.
그는 파가니니의 엄청나게 화려하고 기교가 충만한 연주를 듣고 큰 충격에 빠졌으며 파가니니처럼 청중을 휘어잡을 수 있는 피아노 테크닉의 연마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게 된다. 리스트 특유의 과시적이고 화려한 패시지는 바로 이 시점부터 시작되었다.
리스트의 제자이자 친구였던 피에르 올프에게 썼던 편지에는 당시 그가 받은 충격이 잘 드러나 있다.

2주 동안 내 마음과 손가락은 마치 길 잃은 영혼처럼 움직이고 있다네.

호메로스, 성서, 플라톤, 로크, 바이런, 위고, 라마르틴,

샤토브리앙[11]

, 베토벤, 바흐, 훔멜, 모차르트, 베버가 모두 내 곁에 있다네.

나는 이들을 공부하고, 이들에 대해 명상하며, 분노로 그들을 집어삼킨다네.

뿐만 아니라 나는 하루에 4시간에서 5시간정도를 손가락 연습(3도, 6도, 옥타브, 트레몰로, 연타, 카덴차 등)에 쓰고 있다네.

아! 만약 내가 미치지 않는다면 자네는 내 안에서 예술가를 찾을 수 있을 걸세!

그래, 예술가... 지금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지.

이처럼 리스트는 파가니니의 연주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 후 그의 작품은 극악의 난이도로 악명을 휘날리게 된다. 리스트는 파가니니의 영향을 받은 최초의 작품으로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 b단조 중 3악장을 모티브로 한 '''작은 종에 의한 화려한 대 환상곡(Grand Fantasia de Bravoure sur La Clochette, 1832)'''을 작곡했는데, 이 곡이 바로 오늘날까지도 어렵기로 악명높은 라 캄파넬라의 시초다.

Liszt, Grand Fantasia de Bravoure sur La Clochette(Ivan Linn)
이 곡은 너무나 어려워서, 당시 "리스트 외에 그 누구도 연주할 수 없는 곡"이라는 말이 나돌았을 정도이다. 과도한 난이도 때문에 사람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지만, 리스트가 얼마나 테크닉 연습에 매진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곡이다.
파가니니에 대한 리스트의 관심은 계속되어서, 몇 년 후인 1838년 파가니니의 곡을 바탕으로 하여 '''6곡의 '파가니니 초절기교 연습곡'''을 작곡하였다. 슈만이 '리스트 본인조차 몇몇 패시지는 자세히 연습해야 했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로 어려웠던 이 곡을 1851년 좀더 쉽게 수정한 작품이 오늘날의 그 유명한 '''6곡의 파가니니 대연습곡'''이다.[12]

3.2. 쇼팽베를리오즈


한편 이 시기를 전후하여 편곡자로서의 리스트의 재능도 본격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파가니니에게 충격을 받은 이듬해(1833)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을 피아노로 편곡하였다.
당시 베를리오즈는 연극배우 해리엇 스미슨(Harriet Smithson)과 어렵게 결혼한 후에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으며,[13] 그의 출세작인 환상교향곡은 작곡된지 3년이 지났는데도 악보가 출판되지 못해서 아직 널리 연주되지 못하고 있었다. 리스트는 그의 작품을 피아노로 편곡해서 1834년 베를린에서 자비로 출판하였고 연주회마다 이 환상교향곡 편곡을 연주하여 이 곡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14]
당시만 해도 유럽에는 관현악단이 그리 많지 않은데다 관람료가 무척 비쌌다. 게다가 당연히 녹음기술 같은 것도 없었으니 귀족이나 대도시의 부유계층을 제외한 일반 사람들이 관현악이나 오페라를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정말 드물었다. 리스트는 환상교향곡을 편곡한 이후 각종 관현악곡이나 오페라 아리아를 피아노로 편곡하여 간접적으로나마 일반 대중들이 큰 규모의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으며, 한편으로 재능있는 신인작곡가 또는 무명작곡가들의 음악을 편곡하여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기도 했다. 물론 여기에는 자신의 피아노 솜씨를 뽐내려는 과시욕도 한몫 했지만.
이 시기 리스트는 자신의 음악인생에 중요한 또 한명의 음악가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폴란드 출신의 프레데리크 쇼팽이다. 당시 파리 사교계 입문에 적극적인 도움을 줬다고 하며, 이후 쇼팽과 리스트는 1849년 쇼팽이 사망할 때까지 서로 경쟁심과 경외감이 섞여 있는 미묘한 관계를 쌓아왔는데[15] 기본적으로 는 서로 돕고 서로 영향을 받는 사이였다. 쇼팽은 그의 첫 번째 피아노 연습곡집(op. 10)을 리스트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쇼팽과 베를리오즈 두 사람은 파가니니 못지 않게 리스트에게 많은 영향을 준 작곡가였음에도 불구하고, 파가니니의 임팩트가 워낙 커서 그런지 이런 부분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파가니니가 리스트에게 천둥번개처럼 순식간에 강렬한 충격을 주었다면, 이 두 사람은 리스트가 평생동안 유지했던 작곡양식과 음악철학의 기초를 제공해 준 작곡가였다. 리스트의 음악에 나타나는 각종 관현악 기법, 대담한 화음, 화려하고 웅장한 음악양식, 종종 드러나는 악마적 경향은 주로 베를리오즈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한편으로 쇼팽으로부터는 시적인 서정적인 표현을 배웠다.

3.3. 라이벌 지기스문트 탈베르크


스위스 출신의 피아니스트 탈베르크는 리스트의 일생 최대의 라이벌이었다. 탈베르크는 리스트와 거의 동년배였고(리스트가 1살 위) 14살에 피아니스트로 데뷔한 이후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리스트가 파리에서 본격적으로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할 무렵인 1836년에 탈베르크도 파리에서 콘서트를 개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 때부터 두 피아니스트 사이에는 본격적인 라이벌관계가 형성되었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사항은 탈베르크 항목에 나와 있으니 참고 바란다.
다만 탈베르크가 리스트의 라이벌의식만 자극한 것은 아니다. 탈베르크가 사용한 화려한 아르페지오와 세손효과(three-hand effect)는 당시에는 신기에 가까운 기교로 여겨졌으며 리스트의 음악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리스트는 자신의 스타일과 탈베르크의 스타일을 자주 혼용해서 사용했으며, 덕분에 리스트 곡의 난이도는 더욱 괴랄해졌다.

3.4. 마리 다구 백작부인


[image]
마리 다구 백작부인의 초상화
1830년대의 프랑스 파리의 음악계는 리스트와 쇼팽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피아노 거장들의 경연장이 되었다. 리스트와 비슷한 연배의 샤를 발랑탱 알캉(Charles Valentin Alkan, 1813-1888)이나 지기스문트 탈베르크(Sigismond Thalberg, 1812-1871), 알렉산더 드레이쇼크(Alexander Dreyschock, 1818-1869) 등의 뛰어난 피아니스트들이 속속 파리에서 데뷔하였고 큰 각광을 받았다.[16][17]
피아노의 파가니니로 본격 이름을 알린 리스트는 1833년부터 프랑스의 사교계에 진출하였으며, 여기서 6살 연상의 마리 다구 백작 부인(Comtess Marie d'Agoult, 1805-1876)을 만나게 된다.[18]
나이 많은 남자와 정략결혼을 한 탓에 부부관계에 흥미가 없었던 그녀는 집안일보다는 사교활동에 전념하고 있었고, 그녀가 주도하는 사교클럽에 피아노계의 떠오르는 샛별 리스트가 참여하게 된 것이다.[19] 리스트는 귀족에 대한 로망을 제대로 선사해주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다. 도도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마리 다구부인은 처음에는 리스트를 쌀쌀맞게 대했다고 여겨졌으나 그녀가 세월이 흐른 뒤에 쓴 회고록을 보면 그녀도 첫만남부터 리스트에게 끌렸던 듯 하다.

문이 열리고 묘한 '유령'이 나타났다. 나에게 격한 감정을 일으킨, 내가 만났던 가장 비범한 사람을 표현하는데 '유령' 외에 적절한 표현을 생각해내기는 힘들다. 그는 하얗디하얀 얼굴에 맵시 있는 큰 키 그리고 마른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큰 눈은 바다 색깔이었고 머리카락은 햇살에 너울대는 물결같이 빛났다. 아픔을 숨기고 있는 표정은 강렬했다. 마치 바닥을 닿지 않고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1835년, 리스트는 당시 갓 설립된 스위스의 제네바 콘세르바토리(Geneva Conservatory)에 교수로 취임하는 한편 유럽 각지로 연주여행을 다니기 시작한다. 이에 마리 다구는 같은 해 8월에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20] 주변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을 외면한 채 제네바로 가서 그와 동거를 시작한다. 12월에는 이미 이혼 전부터 임신하고 있던(...) 리스트의 첫째 딸 블랑댕을 출산한다. 블랑댕 이후 4년간 두 사람 사이에서 1남 1녀가 더 태어났다.
  • 장녀 블랑댕(Blandine, 1835–1862) - 후에 프랑스 총리가 되는 에밀 올리비에르(Émile Ollivier)와 결혼했으나 26살에 사망. 13살에 연주회에서 탈베르크의 모세 환타지를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난 피아노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 차녀 코지마 바그너(Cosima, 1837–1930) - 93살까지 장수했으며 후술하다시피 아빠 못지 않은 연애편력을 자랑하게 된다.
  • 아들 다니엘(Daniel, 1839–1859) - 아빠에 버금가는 재능을 인정받고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성장했으나 결핵으로 20살에 사망
마리 다구는 리스트에게 뮤즈(Muse) 역할을 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리스트의 창작력(과 편곡력)의 포텐이 다구 백작부인을 만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터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21]
그러나 4년의 동거기간 동안 두 사람은 점차 사이가 벌어지게 된다. 기본적으로 다구 부인은 사교계의 꽃으로 불릴만큼 활발하고 자부심 강한 성격으로, 남에게 주목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즐기는 여성이었다. 안 좋게 말하면 공주병 기질이 강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런 성격에 걸맞게 씀씀이도 상당히 헤프고 사치스러웠다. 그녀는 리스트가 연주여행 등으로 밖으로 돌아다니지 말고 자신에게 집중해 주기를 바랐으며, 한편으로는 아이가 셋이나 생겼으니 가정에 충실한 가장이 되기를 바랬다.[22]
하지만 리스트는 그럴 생각이 없었으며, 현실적으로 그럴 수도 없었다. 한때 부친을 잃고 어렵게 살았던 리스트는 이제 막 자신의 전성기가 시작된 상황인데 애인의 요구 때문에 이런 황금기를 자기 손으로 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리스트는 물려받은 재산과 부동산으로 놀고 먹거나 가문의 후광으로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귀족 출신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성장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자신이 이룩한 것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계속 일하고 노력해야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애인의 대책없는 낭비벽도 감당해야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는 마리 다구의 반대를 뿌리치고 유럽 각지로 연주여행을 다니고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바쁜 생활을 즐겼으며, 이 과정에서 자주 다른 여자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한편으로 마리 다구 입장에서는 그의 오지랖이 너무 넓은 것도 문제가 되었는데, 예를 들면 리스트가 자신과 딱히 상관이 없는 본(Bonn)에 베토벤 기념비를 건립하는 사업엔 후원자로 자처하고 나서자 "쓸데 없는데 돈과 노력을 들인다"고 불평했다.
이렇게 밖으로 도는 리스트의 태도를 받아들이지 못한 마리 다구는, 결국 막내 다니엘을 낳은 직후 리스트와 별거를 선언하고 파리로 돌아가 버린다. 이후 두 사람의 애정관계는 더 이상 회복되지 못했으며, 자식 양육문제 등으로 5년 정도 관계를 질질 끌다가 결국 1844년에 완전히 갈라선다.
리스트는 다구와 헤어지자 본격적으로 자신의 대인배기질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평생 바쁜 생활을 유지했다. 마리 다구 백작부인과 헤어진 이후 리스트는 평생동안 수십 명의 애인을 사귀었는데, 마리 다구 수준으로 깊은 관계까지 간 경우는 후술할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밖에 없다.

3.5. 아이돌(?) 거장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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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아이돌스타 리스트를 풍자한 그림(1842)
사생활과 별도로 리스트는 연주자/작곡가로서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었는데, 마리 다구와의 결별로 인해 눈치를 볼 대상이 사라지자 오히려 그의 음악이력 은 더욱 화려해졌다. 그는 유럽 전역을 순회하며 피아노 연주회를 열면서 빠순이들을 양산했고, 지휘자로도 종종 활동하였다. 또한 그간 자신의 돈을 낭비하던 사람이 떠난 덕분이었지 본격적으로 자선 연주와 각종 음악사업의 후원에도 힘을 쏟았다.
사족이지만 리사이틀, 즉 독주회의 개념이 정립된 데에는 리스트의 공로가 매우 크다. 리스트 이전까지 피아노 연주회에서는 항상 찬조 연주자가 등장하였다. 예를 들어, 피아노 연주회라는 타이틀로 연주회가 열리더라도 바이올린, 성악 등의 다른 음악이 찬조로 연주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데 리스트의 라이벌이었던 탈베르크가 1836년 파리에서 피아노곡만으로 이루어진 독주회를 개최해서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다. 이에 자극받은 리스트도 이듬해에 피아노 독주회를 개최하였고 역시나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후 리스트는 독주회에 걸맞는 피아노 배치와 세팅을 통해 공연효과를 극대화시켰고, 덕분에 본격적인 비르투오소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이 시절에는 독주회를 리사이틀[23] 대신 솔리로퀴[24]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당시 리스트가 자신의 독주회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지루한 음악의 독백(나의 창작품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 지 모르겠소)을 나는 로마인들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고안하였으며, 이제 그것을 파리로 가지고 갈 생각이오. 그러면 나의 오만이 끝이 없다고들 하겠지! 상상해 보시오. 한 음악회 프로그램에 여러가지 다른 것들을 섞어 넣을 수 없는 것이 상식인데도, 전쟁터같이 여러 사람이 같이 연주하는 이런 음악회가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나 자신만이 연주하는 음악회를 열라고 뽐내어 말할 것이오. 당신이 궁금하게 생각할 것 같아 나의 음악의 독백(솔리로퀴(soliloquies)의 프로그램을 복사하여 보내오. 1.윌리엄 텔(William Tell) 서곡, 연주자 - 리스트 2. 청교도 (I Puritani)의 주제에 의한 환상곡, 작곡,연주자 - 리스트 3.연습곡과 소품들, 작곡,연주자 - 리스트 4. 주어진 주제에 의한 즉흥연주 - 리스트

또한 리스트는 피아노 뚜껑을 적절한 각도로 열어 놓아 반사된 소리가 청중들을 향하도록 했는데, 이와 같은 연주장 세팅은 오늘날까지도 계속 사용되고 있다[25]. 그는 순회 연주자로 생활하는 동안 이런 연주회를 '''무려 1,000번 넘게''' 열었는데, 가는 곳마다 성황을 이루었다. 그의 공연장은 항상 관람석이 부족했으며, 때로는 수천명이 몰려들어 아수라장이 되기도 했다.[26]
1842년쯤에는 이미 리스트 광풍(Lisztomania)으로 명명된 그의 유명세와 영향력이 전 유럽으로 확대되어 있었으며, 음악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조차도 그의 이름은 알고 있을 정도였다. 유럽 각지에서 리스트에게 연주회를 열어달라는 요청이 쏟아졌으며, 심지어 유럽 음악의 변방에 속한 포르투갈이나 터키 지역[27]에서도 초청장이 날아왔다. 부지런한 리스트는 조건이 맞는 한 이런 요청을 거의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아마 리스트는 역사상 최초로 광적인 팬덤을 창시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연주회의 공연효과를 높이기 위해 초절기교 외에도 이제까지 다른 연주자들이 실행한 바 없는 각종 음악 외적인 퍼포먼스와 기행을 선보였다[28]. 좋게 말하면 쇼맨이고, 안 좋게 말하면 19세기형 관심병 환자라고 할 수 있었던 셈. 그 유명한 파가니니조차도 당시의 리스트에 비하면 점잖은 편의 수준일 정도였다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도중에 일부러 기절하는 척[29]하거나, 위에서 나온 것처럼 치다가 장갑을 벗어던지는 퍼포먼스도 고안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당시의 상류층 귀부인들 사이에선 현재의 아이돌 팬덤마냥 리스트를 추종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어느 정도였냐면, 그가 연주를 끝내면 젊은 귀족 부인들은 체통을 잊고 무대 위로 올라가 그가 피우던 시가 꽁초[30]나 연주하다 끊어먹은 줄, 혹은 연주 도중에 그가 연주 도중 삘받을 때 벗어던지곤 하던 장갑 따위의 잡동사니들을 차지하려고 미친 듯이 싸우곤 했다고. 그걸 주워서 평생동안 지니고 다닌 부인도 있다고 하니, 과연 남편이 어떻게 생각했을지 의문. 때로는 가짜로 실신하거나 무대 위로 보석들을 던져서 의도적으로 청중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이러한 과도한 퍼포먼스는 리스트 당대나 지금이나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는데, 그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의 순회 연주를 '묘기'로, 남의 이목을 끌려고 하는 순회서커스단에 빗대어 비아냥대기도 했다.[31] 어쨌거나 그는 이제까지 유럽의 어떠한 음악가도 누려보지 못한 전무후무한 경지의 인기와 명성을 얻었으며, 당연히 이 덕분에 많은 돈뿐만 아니라 많은 여성들과의 하룻밤까지 챙겼다(...)
사생팬도 양산한 모양인지, 당시 문헌(신문)에 의하면 1842년 베를린 연주회가 끝나고 그가 떠날 때, 그의 뒤에 수백 대에 달하는 개인 마차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리스트는 백마 6마리가 끄는 마차를 비롯해 30대가 넘는 마차의 호위를 받으며 떠났다고 하는데, 기사를 쓴 기자가 "그는 왕과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아니라 바로 왕이었다"라고 비유하며 평했을 정도.
그 외에도 왕족들을 제멋대로 능욕하기도 했고[32] 심한 경우엔 국가간의 전쟁도 불사하게 만들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일화만 보면 자기과시적인 성향이 거의 민폐 수준에 도달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리스트가 없었더라면 현대에 있어서 아이돌 연예인 같은 직업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사실 그 당시까지 음악가라는 직업은, 돈이나 권력이 있는 집안 사람들[33]이 아니면 하인이나 종과 다를 게 없이 멸시받고 천대당하는 직업이었다. 그나마 모차르트나 베토벤과 같은 위대한 음악가들이 등장한 이후 이런 분위기가 많이 개선되기는 했지만, 19세기가 된 지 한참 후까지도 음악가를 천시하는 경향은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그런데 리스트는 그들에게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정도가 아니라, 충분히 그들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가능성과 비전을 제시한 인물이었던 것이다.[34] 리스트로부터 비롯된 병적인 팬덤은 파데레프스키(Paderewski)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최소한 기록상으로는) 그에 비할 만한 상대가 없었다.

4. 필생의 여인



4.1.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


이처럼 20대 초반부터 십수년 정도 계속된 리스트의 순회연주자 생활은, 그의 앞에 2번째 여인이 나타나면서 일종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1847년 2월, 리스트는 당시 러시아의 영토였던 키예프[35]에서 일종의 자선공연을 했는데, 이 연주회에서 이후 리스트 필생의 여인이 된 카롤리네 추 자인-비트겐슈타인(Carolyne zu Sayn-Wittgenstein, 1819-1887) 공작부인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그녀의 본명은 카롤리나 엘츠비타 이바노프스카(Karolina Elżbieta Iwanowska). 현재 우크라이나 영토인 보로니치(Voronivtsi) 태생이며, 본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원래 카롤리나의 친정은 폴란드의 귀족 가문이었다. 카롤리나는 17살에 러시아의 비트겐슈타인 공작가문[36]의 니콜라우스 비트겐슈타인(Nikolaus zu Sayn-Wittgenstein, 1812-1864)과 결혼하면서부터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으로 불렸다. 이 비트겐슈타인 부부 사이에는 딸 하나만 있었다.
카롤리네 비트겐슈타인 부인은 이 자선공연에 거액의 돈을 기부하여 리스트의 관심을 끌었고, 리스트는 수소문 끝에 그녀를 만난 후 한 눈에 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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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7년 경의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
카롤리네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 역시 마리 다구 백작부인과 마찬가지로 정략결혼을 한 탓에 남편에게 별 애정이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명의로 폴란드령 우크라이나에 많은 영지를 상속받은 탓에 경제적으로도 남편으로부터 독립한 상태였고 딸 하나만 낳은 후 줄곧 남편과 별거중이었다. 돈 걱정은 없었지만 외롭게 살고 있던 그녀의 동네에 온 유럽을 들끓게 한 마력의 남자 리스트가 찾아왔으니, 그녀 입장에서 리스트를 만나는 것은 정말 하늘이 내려준 기회였던 것이다.[37]
비트겐슈타인 부인은 도도하고 자기 중심적이었던 마리 다구와 달리 조용하고 배려심이 깊은 여성이었으며 특히 집안 내력답게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데, 특히 그녀의 독실한 신앙심은 만만찮게 신앙에 심취해 있던 리스트와 정말 잘 맞았다. 두 사람은 급격하게 가까와졌고, 리스트는 "마리 다구와 헤어진 이후 오랜만에 진정한 사랑할 수 있는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 시점에서 공작부인은 리스트 인생의 전환점이 될 중요한 제안을 하게 되는데, "그간 연주자로서 명성도 충분히 얻었고 나이도 들었으니 이제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작곡과 후학양성에 전념하는게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떠돌이 생활을 끝내고 어딘가 정착해서 살자는 것이었다. 물론 정착은 '자신과 함께'.[38]
리스트는 고민 끝에 이 제안을 받아들였으며, 1847년 8월 우크라이나 연주를 마지막으로 순회연주자 생활을 마감한다.[39]

4.2. 바이마르의 황금기


순회연주자로서의 삶을 마감한 리스트는 파벨 1세의 딸이며 당시 바이마르의 영주 부인, 즉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비 러시아의 마리아 파블로브나(Maria Pavlovna of Russia)가 초빙하는 형식으로 바이마르 궁정악단의 악장직을 제안받는다.[40]
리스트는 이를 승낙하였으며 이에 신혼부부(?)는 1848년 바이마르에서 꿈에도 그리던 정착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리스트는 바이마르에서 작곡가이자 교육자(공식적으로는 궁정음악가)로 새로운 음악인생을 시작했는데, 1861년까지 계속된 이 바이마르의 생활은 과거 순회연주자의 삶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그의 연주녹음이나 공연실황이 전혀 남아 있지 않는 현재까지도 리스트가 계속 명성을 날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시기에 그가 작곡 또는 편곡한 수많은 작품들과 그가 길러낸 뛰어난 제자들 덕분이었다. 바이마르에 머무는 동안 리스트는 초절기교 연습곡, b단조 소나타, 2곡의 피아노 협주곡 등 오늘날까지 널리 연주되는 작품들을 써내기도 하였고, 단악장의 표제 관현악곡인 교향시 장르를 개척하여 새로운 음악양식으로서 가치와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또한 당대에 유행하던 오페라의 선율을 기초로 화려한 파라프레이즈 작품을 썼으며 베토벤의 교향곡 전곡, 로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 멘델스존의 축혼 행진곡, 슈베르트의 다수의 가곡,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 같은 우리에게 익숙한 명작들을 피아노로 연주할 수 있도록 편곡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그는 후학양성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의 지도하에 한스 폰 뷜로나 카를 타우지히같은 당대의 명연주자들이 등장하였다.[41] 그는 각지에서 몰려든 신인 연주자들과 작곡가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일일이 응해 주었으며 일년에 수백번의 마스터 클래스를 열어서 연주를 지도하였다.
한편으로 그는 당시 수배명령을 받고 장기간 도피중이었던 바그너의 음악활동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는 바그너의 음악을 높이 평가했으며 글과 강의를 통해 자주 그의 음악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였다. 그는 바그너의 몇몇 작품을 연주하고 피아노로 편곡하기도 했는데, 특히 오페라 로엔그린은 리스트의 지휘로 1850년 바이마르에서 초연되기도 했다.[42]
한평생 바쁘게 산 그였지만 아마 바이마르에서의 삶은 그중에서도 가장 바빴을 것이다. 그의 언급에 의하면 1년에 2천통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는 편지에 일일이 답장하고 마스터 클래스에서 수백명의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리스트의 명망이 워낙 높았기 때문에 거의 전 유럽에서 편지가 날라왔는데 대부분은 그의 평가와 손질을 부탁하고 보낸 음악작품이었다. 그런데 친절하게도 일일이 평가해 주었다. 작곡가가 직접 악보를 들고 찾아온 것까지 치면 정말 셀 수 없을 정도의 부탁을 받았던 것이다.
때문에 매년 그의 본거지인 바이마르는 시민보다 많은 수의 피아니스트나 작곡가, 심지어 바이올리니스트까지 모여 북적였다. 게다가 소개장만 가져오면 누구이건 묻지 않고 곧장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기본적인 테크닉이나 음악에 대한 이해가 모자란 사람들은 공개적으론 받지 않았다.[43] 그의 지도는 어디까지나 마스터 클래스였지 기초실력을 길러주는 피아노교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상하게도 신동으로 평가되는 사람은 가급적 제자로 받지 않으려고 했다.
한편 가정생활도 과거 마리 다구 백작부인과 동거하던 시절과 달리 별 문제가 없었다, 비록 아이를 얻지는 못했지만 리스트와 공작부인간의 관계는 바이마르 시절 내내 원만했는데,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은 기본적으로 리스트의 바쁜 생활을 이해하고 간섭하지 않았으며, 종종 그가 다른 여자들과 놀다가 들켜도 못본 척 눈감아주었다고 한다. 다만 보수적인 가톨릭 신자였던 그녀는 바그너의 음악을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상당히 싫어했고 리스트가 바그너와 친하게 지내는 것도 못마땅해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딱히 바그너와 리스트를 갈라 놓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다만 공작부인은 주변에 눈치 보이고 법적으로도 불안한 동거생활을 계속하기보다는 리스트와 정식으로 결혼하여 부부가 되기를 원했는데, 문제는 자신의 법률상 남편이 아직 살아 있었으며 이혼을 허락하지도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리스트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자신의 법적인 남편과 이혼해야 했다. 공작부인은 바이마르에서 지내던 시절 내내 이 이혼 문제에 매진했다.

4.3. 슬픈 시절


바이마르에서 얻은 리스트의 행복은, 촉망받는 피아니스트로 성장하던 아들 다니엘이 20살의 나이에 결핵으로 급사하면서 끝나버렸다. 아들의 죽음과 함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연이은 불행이 찾아왔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은 공식 남편과 이혼하기 위해 "나의 결혼은 나의 의사와 무관하게 집안의 강압으로 인해 성사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지속적으로 교황청에 탄원과 로비를 했다. 꽤나 복잡한 과정이 있었지만, 리스트와 만난 지 13년 만인 1860년, 드디어 그녀의 청원이 수리되어 바티칸으로부터 "비트겐슈타인 공작과의 혼인은 무효"라는 답변을 얻었다.
결혼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얻은 리스트와 공작부인은, 리스트의 50세 생일(1861년 10월 22일)에 맞춰 로마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결혼 날짜가 다가오자 공작부인은 바티칸으로부터 확답을 얻기 위해 먼저 바티칸으로 출발했으며, 리스트는 결혼식 전날인 1861년 10월 21일에 로마에 도착했다.
그러나 결혼의 꿈에 부풀어 로마에 도착한 리스트에게 '공작부인과 결혼할 수 없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표면적으로는 공작부인의 로비가 성공한 듯 했지만, 실제로는 그녀의 남편과 남편을 감싸주고 있던 러시아 제국 황제의 역로비 때문에 이미 바티칸에서는 "혼인 무효 불가"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러시아 황제는 폴란드우크라이나에 있던 그녀의 영지를 모조리 압류하여 설령 현재 남편이 죽더라도 재혼하기 어렵도록 돈줄을 막아버렸으며, 추가로 "하나뿐인 딸의 혼삿길을 막지 말라"는 협박까지 전했다.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은 리스트와 결혼할 가능성이 없어지고 재산도 빼앗길 위기에 처하게 되자 리스트와의 동거생활을 정리했으며, 이후 로마로 이주하여 평생을 거기서 집필 활동을 하면서 살았다. 다만 그녀는 리스트와 헤어진 이후에도 평생동안 그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친분을 유지했다.
한편으로 공작부인과 리스트가 헤어진 이유가 단순한 결혼 불발 때문이 아니라, 공작부인의 신앙심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즉 리스트는 지나칠 정도로 보수적이고 독실한 그녀의 신앙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으며, 결혼 불발된 참에 관계를 정리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편지나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서 그가 공작부인에게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는 정황이 확인되며, 그녀와 헤어진 이후 봇물 터지듯이 다른 여자를 만나고 다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이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리스트가 공작부인의 남편과의 이혼노력에 협조를 아끼지 않았으며 결혼이 불발되자 크게 낙담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44]
1862년에는 장녀 블랑댕이 26살로 사망했다. 잇따른 불행을 겪게 된 리스트는 바이마르의 궁정악장을 사임한 후 이곳 저곳에 머무르다가 10대 때부터 꿈꾸었던 성직자의 길로 들어서기로 한다. 1863년 프란치스코 수도회 로사리오 성모 마리아 수도원(Madonna del Rosario Monastery)에 입회[45][46] 그는 2년 후 시종품까지 받았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더 이상 품은 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879년 알바노 수도원의 명예 참사원(honorary canon)이 되기도 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가톨릭에서 사제가 되려면 수문품, 강경품, 구마품, 시종품, 차부제품, 부제품, 사제품의 7품을 모두 받아야 했다(오늘날은 부제품과 사제품만 남아 있다).[47] 하지만 리스트는 4품인 시종품까지만 받고 더 이상의 품위는 받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정식 사제가 아니라 수사(남성 수도자) 신분이었다. 그나마도 수도원에 머물러 있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녔던데다가 술담배도 끊지 않았으니 제대로 된 수도자라고 보기도 어렵다. 로마에서 리스트를 만난 역사가 페르디난트 그레고로비우스는 그에 대해 "사제의 탈을 쓴 메피스토펠레스"라고 비아냥 거리기도 했다.

5. 생애 후반기의 리스트



5.1. 성직자의 길과 코지마 바그너


정식 사제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여튼 수도자의 길로 들어선 리스트는 이후 다수의 종교음악을 작곡한다. 이 때 작곡된 주요 작품으로는 오라토리오 '그리스도', '대관식 미사' 등이 있다.[48] 성악곡 외에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일화에서 영감을 얻은 2개의 전설(Deux légendes, 1862-63)과 같은 종교색이 짙은 피아노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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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와 재혼할 당시의 코지마
하지만 수도원에 입회한 후에도 그는 여성관련 스캔들에 휘말리게 된다. 올가 야니냐 코사크 백작 부인이라는 리스트의 젊은 여성 제자가 그에게 접근한 것인데, 처음엔 리스트가 그녀의 대쉬에 애매하게 반응하다 나중에는 자신으로부터 떼어놓으려 하자 올가 야니냐 부인이 로마에 있는 리스트의 아파트에 찾아가 권총으로 위협한 것이다. 이 사건 이후로도 그녀는 대놓고 리스트를 저격하는 자전적 소설을 출간했으며 그녀와 리스트가 교제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리스트는 59세 나이에 사람들 사이에서 스캔들로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게다가 리스트의 뒤통수를 제대로 오함마로 후려갈기는 일이 발생하는데, 그의 수제자 중 하나였던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한스 폰 뷜로와 결혼한 차녀 코지마가 리하르트 바그너와 눈이 맞아 아빠 몰래 남편을 버리고 바그너와 결혼한 것이다. 장인 어른과 새 신랑의 나이 차이는 겨우 2살!
코지마와 뷜로는 1857년에 결혼했고 딸을 둘 낳았는데, 바그너 광팬이었던 코지마는 이미 결혼 초에 바그너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다. 1864년 경부터 코지마와 바그너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심상치 않은 수준이 되었으며, 이 둘은 정식 결혼하기 전에 이미 자식을 3명이나 낳기도 했다.[49]
뷜로는 코지마와 바그너의 관계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세간의 이목과 바그너에 대한 빠심 때문에 이를 묵인하고 있었으며, 다만 이혼만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뷜로는 코지마의 완강한 태도에 결국 두 손을 들고 1869년 이혼하였고, 코지마와 바그너는 이듬해인 1870년에 정식 결혼하였다.[50]
그런데 정작 코지마의 아빠인 리스트는 코지마와 바그너가 결혼할 때까지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가, 언론 기사를 통해 딸의 재혼소식을 접한 후에야 이 사태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그는 당연히 분노와 배신감에 펄펄 뛰었고, 딸과 사위에게 절교를 선언해 버린다. 하지만 몇년 후, 리스트는 대인배스럽게도 두 사람을 용서하고 다시 관계를 회복한다.[51][52]

5.2. 3중 생활


리스트는 대타협으로 인해 1867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거행될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왕 페렌츠 요제프 1세의 대관식에 사용될 대관식 미사음악의 작곡을 맡게 되는데,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정신적 모국 헝가리와 인연을 맺게 된다.
1869년 그는 8년만에 바이마르에 다시 마스터 클래스를 열었으며, 2년 후에는 부다페스트에 있는 헝가리 국립음악원에도 마스터 클래스를 개설하였다. 이후 그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죽기 얼마 전까지 정기적으로 로마와 바이마르, 부다페스트를 오가면서 마스터 클래스를 열어 제자들을 가르치고 자선 연주회 등에 참석했는데, 사람들은 그의 이런 활동을 가리켜 vie trifurquée(threefold life, 3중 생활)이라고 불렀다.[53] 소시적에는 거장 순회 연주자였는데, 나이가 들면서 거장 순회 교육자(?)로 탈바꿈한 것.
이처럼 노년의 리스트는 힘든 장거리 여행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후학양성에 많은 힘썼는데, 그의 레슨 기록에 따르면 리스트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기계적으로 손가락만 움직이는 연주에 대해 많은 비판을 했으며, 그들에게 음악성을 많이 강조하였다.

5.3. 말년의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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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3년 전의 리스트
하지만 천하의 리스트라도 노령에 이와 같은 강행군을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도 바람직한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술과 담배를 즐겼기 때문에 더더욱 문제가 생기기 쉬웠다.
결국 70세가 되던 1881년, 그는 바이마르의 숙소에서 갑자기 정신을 잃고 계단에서 쓰러졌다. 당시 그의 다리는 심하게 부어 있었는데, 다행히 의식은 회복했지만 다리의 움직임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54] 그간 건강했던 리스트는 이 때를 기점으로 급격하게 쇠약해졌으며 이후 천식, 불면증, 백내장, 심부전등 각종 노인성 질환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삼중생활은 당분간 계속되었다.
1886년 7월, 리스트는 리스트는 딸의 주관으로 열린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에서 바그너의 오페라를 관람한 후 감기증상을 호소하는데[55][56] 갑자기 증상이 악화되는 바람에 혼수상태에 빠지게 된다.
결국 리스트는 회복되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그의 장례식은 8월 3일에 바이로이트에서 거행되었고 시신은 바이로이트 시립 묘지에 안장되었다. 공식적인 사망원인은 폐렴이었다.[57]
그는 1869년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장례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나의 장례식은 되도록이면 화려하지 않고 간결하며 적은 비용으로 치뤄지길 강하게 바랍니다. 로시니 때 같은 장례식은 제 때는 싫기도 하고, ...친구나 지인을 부르는 것 조차 반대합니다. 화려함, 음악, 행렬, 쓸데없는 조명, 그리고 장례식마다 들어가는 그 어떤 추모연설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유해는 교회가 아니라면 어떤 묘지든 좋으니 그곳에 묻어주십시오. 거기서 다른 장소로 옮기는 것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죽은 토지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묘지가 아닌 곳에 묻히는 건 바라지 않고, 교구교회에서의 독송미사 이외의, 레퀴엠을 부르는 것도 포함해서 그 어떤 종교적 의식도 원하지 않습니다. 묘비에는 시편 140편의 이 부분을 새겨주십시오.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리스트는 1860년에 바이마르에서 유언을 세심하게 작성했으나 어디에 묻히고 싶은지는 명시하지 않았다. 그의 시신을 이장하는데 아무런 법적 하자가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각 지역에서 리스트를 이장하려고 나섰는데, 헝가리에서는 리스트 말년이 될 수록 그의 고국이 헝가리라고 진심으로 믿었으므로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가 리스트 최후의 안식처가 되는 게 당연하다고 주장했으며, 바이마르의 카를 알렉산도 대공은 리스트가 예전에 바이마르의 특별 카펠마이스터 시절에 남겨놓은 유품을 넣어 지위에 걸맞게 위엄 있는 묘를 짓겠다고 공언했다. 리스트의 출생지 라이딩에서도 유지들이 나름의 근거를 끊임 없이 설파했다. 코지마는 처음엔 부다페스트 이장에 대해 긍정적이었으나 1887년 2월 헝가리 의회에서 이 제안이 논쟁거리가 되었다. 헝가리 총리는 리스트를 '헝가리의 애국자'가 아니었다고 표명했고 호의적인 제안이 묵살되자 코지마는 바이로이트에 리스트의 묘를 두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리스트는 지금까지도 바이로이트에 묻혀 있다.
한편 리스트와 헤어진 후에도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며 그를 잊지 못했던 필생의 여인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은, 리스트의 사망소식을 접하고 심한 충격에 빠졌다. 삶의 의욕을 잃은 그녀는 평생 멈추지 않았던 글쓰기도 중단했으며, 리스트가 사망한 지 8개월 만인 1887년 3월에 사망한다.[58]
[1] 라이딩이라는 이름은 독일식 이름으로 헝가리어로는 도보르얀(Doborján)이다. 전통적으로 헝가리의 일부였으나 트리아농 조약으로 인해 현재는 오스트리아 영토가 되었다.[2] 베토벤의 바이올린 선생이었던 프란츠 안톤 리스의 아들이자 베토벤의 제자이자 친구로, 리스트와 쇼팽 이전세대의 인기 작곡가 겸 실력파 피아니스트이다[3] 피아노를 쳤던 사람들이라면 모두 한번쯤은 쳐봤을 체르니 교본을 쓴 그 사람이다. 체르니의 스승이 바로 베토벤이다[4] 체르니는 리스트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피아노 스승이었다. [5] 자세한 것은 디아벨리 변주곡 항목 참조.[6] 오늘날 음악가 케루비니에 대해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사안이 바로 천재소년 리스트의 파리음악원 입학을 거절했다는 것이다.[7] 그간 건강했던 아담이 치사율이 그리 높지 않은 장티푸스를 견뎌내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아들의 연주여행에 무리하게 따라다니다가 건강을 해쳤다는 주장도 있고 엉터리 치료로 증세가 악화되어 사망했다는 주장도 있다. 일설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가 임종 전 리스트에게 "너는 여자가 걱정이야. 아마 그걸로 평생 괴로워하고 또 지배받을 거야."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8] 리스트는 외아들이었다. 그에게 형제가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으나 확실치 않다. 설령 형제가 있었더라도 유년기를 넘겨 생존한 사람은 본인이 유일하다.[9] 지금도 그렇지만 음악가나 예술가는 물질적인 부와는 거리가 먼 직종이다. 그래서 슈베르트와 마찬가지로 개인교사직이라도 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 교사직마저도 슈베르트는 유지하지 못해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유명 화가였던 피카소는 자신의 작품들이 잘팔려서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갈때 이삿짐 직원이 복권에 당첨되셔서 축하드린다는 인사까지 할 정도였다. 당장 오늘날의 아이돌 그룹만 해도 초특급 아이돌 그룹이 아니면 물질적인 부를 누리는건 고사하고 몇년 반짝하다가 쓸쓸하게 사라지는 예가 부지기수다. 음악이나 예술이 대중적인 입지를 누리는 오늘날도 이럴진데 리스트 당시의 사회는 두말하면 잔소리 아니겠는가.[10] 다만 그는 이 때의 신앙적 체험을 평생 잊지 않았으며, 생애 후반부에는 결국 수도회에 입회한다. 한편으로 그가 출세한 후 귀족 여성들에게 집착하고 그녀들과 화려한 여성편력을 펼쳤던 것도, 이 첫사랑의 충격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11] 프랑스의 낭만파 작가. 풀내임은 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브리앙. 이 사람으로부터 프랑스 낭만파가 시작된다. 흑역사지만 말년에 샤를 10세와 극우 왕당파당에 속했다.[12] 기본적인 작품 구도는 1838년 버전과 동일하며 지나치게 어렵거나 불필요하게 장식적인 패시지를 다듬었다. 그래서 난이도는 낮아졌지만 작품성은 일련의 파가니니 트랙 가운데 가장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유명한 라 캄파넬라는 이 연습곡집의 3번에 해당된다.[13] 결국 이 결혼은 불행하게 끝나버리는데, 자세한 것은 베를리오즈 항목 참조. 한편 리스트는 이 두 사람의 결혼식의 입회인 중 한명이었다.[14] 이 환상교향곡의 원래 악보는 편곡판이 출판된지 11년 후인 1845년에야 간신히 출판된다.[15] 전술된 각주에도 나오지만 쇼팽은 리스트의 인기와 외모, 큰 음량을 구사할 수 있는 체력을 부러워 했던 반면 리스트는 쇼팽의 시적 감수성과 서정적인 표현력을 부러워 했다.[16] 리스트는 이들 대부분과 친분을 유지했고 서로 도와주는 관계였으나 유독 탈베르크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리스트는 웬만하면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을 비난하지 않는 대인배였지만 유독 탈베르크의 피아노 연주에 대해서만큼은 날선 비판을 퍼부었다. 훗날 파리에서 벌어진 둘의 경합 이후 화해를 하긴 했지만. 여담으로 현대의 기준으로 리스트의 탈베르크에 대한 비판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전반적으로 악감정에 의해 폄하된 부분과 타당한 지적이 공존한다는 평이다. 현대에 와서 탈베르크의 평가는 피아노 연주자로서는 분명 반론의 여지가 없는 당대 최고, 더 나아가서 역대로 따져도 충분히 이름이 거론될만한 급의 피아니스트였지만, 작곡가로서는 높게 평가하기 힘들다는게 중론이기 때문.[17] 이들 중 알캉은 리스트 스스로도 자기가 겪은 피아니스트들 중 가장 테크닉이 뛰어난 피아니스트라고 인정했을 정도로 대단한 실력의 소유자였다. 다만 피아니스트로 오래 활약하진 않았다. 자세한 것은 알캉 항목 참조.[18] 그녀의 본명은 마리 카트린느 소피(Marie Catherine Sophie, 1805-1876)였고 22살에 15년 연상의 다구백작과 결혼을 하면서 다구 백작부인으로 불렸다. 그녀와 다구 백작과의 사이에 두 딸을 낳았는데 첫째 딸은 6살에 죽었다. 한편 다구 백작부인은 나름 문학에 재능이 있어서 다니엘 스턴(Daniel Stern)이라는 필명으로 소설이나 여행기를 출판하기도 했다.[19] 리스트의 친구였던 쇼팽도 이 클럽에 함께 참여했다. 쇼팽은 전술했다시피 자신의 첫 번째 연습곡집을 리스트에게 헌정했는데, 그의 2번째 연습곡집(op. 25)은 이 다구 백작부인에게 헌정했다.[20] 공식적으로는 이혼했지만 실제로는 버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21] 리스트의 순례의 해(Années de pèlerinage) 1권 '스위스' 편은 마리 다구와 지내던 스위스 시절에 작곡되었다.[22] 애인과 살기 위해 자기 남편과 자식을 거침없이 버린 것만 봐도 그녀의 기질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이런 무지막지한 결단을 내리고 리스트 곁으로 왔기 때문에 더더욱 리스트에게 집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23] 프랑스어 동사 reciter(암송하다)에서 유래[24] soliloquies(독백)[25] 피아노 연주 시 악보를 현장에 갖다놓지 않고 암보해서 연주하는 관행도 리스트가 창시했다는 설이 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지금의 피아노배틀 이미지처럼 기교 과시, 즉흥 연주 등은 이 사람이 탄생시킨 것이라고 생각하면 쉽다.[26] 특히 귀부인들이 지위와 인맥을 동원해서 공연장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과 다툼을 벌였다고 한다. [27] 당시에는 오스만투르크의 영역[28] 파가니니 역시 무대효과를 썼지만, 리스트에 비하면 얌전했다[29] 사실 과로로 쓰러진 것이었지만, 사람들은 퍼포먼스라고 생각했다.[30] 불을 붙인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연주했다는 기록이 있다[31] 쉽게 예를 들어, 랑랑이 지금 어떤 평가를 받는지 생각해 보자.[32] 프로이센 국왕이 선물로 준 다이아몬드를 '''면전에서 무대 밖으로 집어던진(...)''' 일화가 유명하다.[33] 대표적인 예로, 멘델스존처럼 부유한 은행가 집안 출신 음악가[34] 낭만주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기 전까지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던 음악가는 베토벤, 모셸레스, 리스트 이 세 사람 외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 중에도 리스트는 가장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임했기에, 실질적으로 나머지 두 사람보다 공헌한 바가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때 리스트는 31살이었는데, 31살이면 그때 나이론 상당한 중년에 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인기를 누렸다. [35] Kiev, 현재는 우크라이나 영토이다[36] 독일식 성에서 눈치챘을 수도 있지만, 선조가 독일인으로서 러시아에서 장군으로 복무한 페테르 비트겐슈타인이다.[37] 사실 이렇게 리스트에게 흑심(?)을 품은 여자는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이 처음이 아니었다. 다만 대부분의 경우 이런 식의 만남은 일회성 만남이나 엔조이 수준에 머무르는게 상례였는데, 아마 공작부인에게는 리스트의 마음을 사로잡을만한 특별한 매력이 있었던 것 같다.[38] 공작부인의 은퇴 제안은 여러 가지 취지로 나온 것이겠지만 사실 자신과 리스트가 함께 살기 위한 목적이 가장 컸다.[39] 물론 리스트의 연주활동 자체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후에도 그는 각종 자선연주나 특별한 이벤트가 있을 때 피아노 연주자 및 지휘자로 활약하였다. 다만 명성과 돈벌이를 목적으로 한 순회연주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40] 당시 바이마르 궁정에서 리스트에게 부여한 직함이 Kapellmeister Extraordinaire였는데, 이것이 임시직을 의미하는 것인지 리스트의 명성을 배려해서 특별히 Extraordinaire라는 칭호를 부기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41] 특히 한스 폰 뷜로는 이후에 리스트의 딸 코지마와 결혼하기도 하는데 후술하다시피 코지마는 뷜로를 매정하게 차버리고 바그너와 재혼하여 물의를 일으킨다.[42] 정작 바그너 본인은 수배령 때문에 초연에 참석하지 못했다. 자세한 내용은 바그너 및 로엔그린 항목을 참조.[43] 그런데 애초에 소개장을 받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를 소개받는 입장인 만큼 귀족의 자제나 부유층이 아닌 이상 수준 미달인 사람들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44] 후술하다시피 공작부인은 리스트가 사망하자 '따라 죽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8개월 만에 68세로 사망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 맺어지지는 못했지만, 평생 리스트를 잊지 못했던 것.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처럼 필생의 여인이라는 표현은 딱 어울린다. 그리고 이 둘의 결혼을 막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는, 1881년 폭탄에 맞아 몸이 절반 날아간 상태로 끔살당한다.[45] 이렇게 수도회에 입회한 남성 수도자(수사)가 성품성사를 받아 사제가 된 경우를 성직수사, 수도사제, 수사신부라고 부른다. 한편 성품성사를 받지 않은 남성 수도자는 평수사. 여성 수도자는 수녀라고 한다.[46] 사제는 교구사제와 수도사제로 나뉘는데, 일선 성당에서 볼 수 있는 신부들이 바로 교구사제다. 사제는 반드시 교구 또는 수도회에 소속되어 있어야 한다.[47] 대신 강경품은 독서직, 시종품은 시종직으로 바뀌었다. 신학교 4학년 때 독서직, 5학년 때 시종직, 6학년 때 부제품, 7학년 때 사제품을 받고 신부가 된다.[48] 미사와 같은 가톨릭 전례음악을 제외한 그의 종교음악은 주로 독일어 가사로 되어 있으며 이외에도 이탈리아어라틴어로 된 작품도 있다.[49] 사실 코지마가 낳은 3명의 자식 중 딸인 이졸데와 에바는 아빠가 바그너인지 뷜로인지 확실하지 않으며, 아들인 지크프리트만 아빠가 바그너인 것이 확실하다. 공식적으로 이졸데와 에바는 뷜로의 자식으로 되어 있다.[50] 보통은 당장 의절하고도 남을 이런 사건을 두고 오히려 그는 코지마에게 수차례나 '용서한다'라는 편지를 보냈는데, 주변인들이 전하곤 했던 평소 뷜로의 그 불같고 괴팍한 성격을 고려하면, 저 당시 뷜로가 얼마나 인내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이처럼 뷜로는 코지마와 이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뼛속까지 바그너빠였는데, 아내를 도둑맞은 이후 결국 공적으로는 바그너 작품을 지휘하거나 했지만 사적으로는 바그너에게 등을 돌리고 브람스의 편에 서게 된다. 그리고 1882년에 27세 연하인 배우와 재혼했다.[51] 1883년에 바그너가 죽자 '자, 이제 내가 죽을 차례다.' 라고 하면서 통곡했을 정도.[52] 그러나 리스트의 이런 반대 때문에 코지마는 앙심을 품었는지, 그 이후로 바그너가 죽었을 때까지도 리스트를 의도적으로 백안시한듯 하다. 그의 사후 거의 직전까지 그가 편지를 보냈을 때 항상 코지마의 딸인 다니엘라가 대신 대필한 기록을 보면... [53] 이미 60줄의 나이에 들어선 상황에서도 이런 3중 생활을 계획하고 실천한 것을 보면 리스트는 정말 대단한 열정과 체력의 소유자로 볼 수 있다. 한편으로 리스트의 이런 강행군은 유럽 각지에 그의 가르침과 지도에 목말라 했던 후배 음악가들이 매우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다.[54] 이때 다리에 생긴 장애는 그가 죽을 때까지 남아 있었다. 전문가들은 쓰러졌을 당시의 증상을 울혈성 심부전으로 진단하고 있다. [55] 상술한 각주에 서술되어 있듯 바그너와의 화해 이후로도 코지마와는 그녀의 냉대로 인해 제대로 된 화해를 이루지 못한 탓에, 리스트는 주치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딸을 보기 위해 무리를 했다고[56] 원래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의 주관은 바그너가 맡았는데 그가 1883년 사망한 후 아내 코지마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57] 한편으로 리스트가 얻은 감기는 목숨을 잃을만큼 심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엉터리 치료를 받는 바람에 오히려 증세가 악화되었다는 견해도 있다.[58] 한편으로 그녀가 자살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확인된 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