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역사
1. 중세
우랄어족에 해당하는 핀족이 살던 곳으로서, 스웨덴의 지배를 받기 이전에는 각 족장들이 난립하는 형태였던 일종의 군장 국가들이 존재했다. 바이킹들은 오늘날에 핀란드에 해당하는 지역에 우랄어족 핀인들을 정기적으로 공격하여 노예로 삼았으며, 핀란드 동부에서는 카렐인들과 이조라인들이 노브고로드 공화국과 교류와 충돌을 반복했다. 핀란드보다 먼저 가톨릭을 받아들인 스웨덴이 12세기부터 북방 십자군 전쟁 을 일으켜서 핀란드를 공략했고, 13세기에는 스웨덴에 완전 정복되었다. 스웨덴의 핀란드 지배는 이후 18세기까지 500년간 이어졌다.13세기 투르쿠에 주교구가 설치되었는데, 주교 중 상당수는 스웨덴인 대신 개종한 핀인으로 채워졌다. 비슷한 시기 에스토니아인 대신 독일인만 주교로 임명되던 에스토니아에 비하면 핀란드의 상황이 비교적 나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기독교로 개종한 핀인 지방 유력자들은 스웨덴 왕국에 봉건적 의무를 수행하였으나, 화전 농업이 주가 되던 핀인들의 생활 양식 때문에 농노제는 확립되지 않았다[1] . 16세기 말 스웨덴에서 루터 교회를 받아들인 것을 계기로 핀란드도 개신교 지역이 되었다. 18세기에 스웨덴은 헬싱키 항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 위치한 지역에 수오멘린나 요새를 지어 관리하다가 이후 러시아가 핀란드를 장악하며 소유했다.
2. 근대
스웨덴 왕국과 러시아 제국은 북유럽의 패자 자리를 놓고 여러 번 맞붙었는데 중간에 끼어있는 핀란드는 당연히 여러 번 전장이 되었고 러시아가 점령했다가 스웨덴으로 돌아가다가를 반복하다가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핀란드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면서 전리품으로서 러시아 땅이 되어 핀란드 대공국이 되어 약 100년간 지배를 받았다. 1809년 3월 29일 열린 포르보 신분의회에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스스로 핀란드 대공을 겸임하는 동군연합을 성립해 핀란드를 다스리기 시작했는데, 러시아는 직접 다스리는 유라시아의 여러 소수민족 지역들보다 더 높은 자치권을 핀란드에 부여했으며 스웨덴 시대의 헌법을 비롯해 정치, 행정, 사법, 사회 제도를 그대로 계속할 수 있게 했다. 러시아 정교회를 강요하지 않고 루터교의 지위가 인정되었으며 심지어 공식 언어도 스웨덴어가 유지되었다.
이렇게 핀란드를 대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핀란드는 스웨덴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의 다른 지역보다 사회와 제도가 선진적이었고, 지나치게 무단정치를 시행하면 다시 스웨덴으로 돌아가려는 여론이 일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핀란드의 원래 수도였던 투르쿠에서 화재가 일어나자 핀란드의 수도를 스웨덴에 가까운 투르쿠에서 좀 더 동쪽에 있는 헬싱키로 옮겼고, 헬싱키에 대대적인 투자를 해서 초기에는 러시아에 대한 핀란드인의 여론이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헬싱키의 랜드마크인 헬싱키 대성당이 바로 이 시기 러시아가 핀란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지어준 것이다. 러시아의 국교인 정교회 성당도 아닌 루터교 교회인데도.
이렇게 식민지가 아닌 동군연합으로 통치를 시작했고 초기 핀란드 자치에 호의적이었던 알렉산드르 1세 시기까지만 해도 스웨덴 시절과 달리 핀란드에게 높은 자치권을 주었고 스웨덴 시절에 비해 불만이 크지 않았으나, 알렉산드르 1세가 죽은 틈을 타 아르세니 자크렙스키(Арсе́ний Андре́евич Закре́вский) 총독은 핀란드를 러시아와 동화시키는 것을 적극 추진했다. 많은 유럽 국가가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타협을 시도하는 와중에도 러시아는 전제군주제를 고집했고 이것에 대한 핀란드인의 불만은 상당했다. 특히 1848년 혁명은 이러한 불만을 확산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핀란드 민족주의가 대두하여 핀란드의 민족 서사시 《칼레발라》가 편찬되었고, 불안하게 여기던 러시아 제국 정부와 핀란드에 남아있는 스웨덴계 귀족들이 핀란드 민족주의를 탄압했다. 크림 전쟁을 계기로 핀란드의 여러 지식인들은 러시아 정부의 감시를 피해 스웨덴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이후 북유럽에서 등장한 범스칸디나비아주의의 쇠퇴, 알렉산드르 2세 황제의 관용 정책과 근대화 정책을 계기로 핀란드 민족주의는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2세는 사회주의자들에게 암살당했고, 아버지의 암살을 본 알렉산드르 3세는 반동 정책과 강력한 소수민족 러시아 동화 정책, 소수민족의 민족주의 탄압 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많은 핀란드인의 반감을 샀다. 이러한 직접 지배 정책은 알렉산드르 3세에 뒤이어 즉위한 니콜라이 2세 치세에도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결국 핀란드 총독을 역임하고 있던 니콜라이 보브리코프가 암살당하는 사태가 일어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러시아 본국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핀란드도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결정타로 1917년 2월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황제 니콜라이 2세가 폐위되었고 이는 동군연합이라는 핀란드 통치 구조가 흔들리는 일이었다. 러시아 공화국 임시정부는 핀란드를 달래기 위해 1899년 이후 핀란드의 자치를 축소하기 위해 취했던 조치를 모두 폐기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국 핀란드 사회민주당이 1917년 6월 완전한 주권 달성을 당의 목표로 선언, 결국은 독립해서 1918년까지 잠시 핀란드 왕국이 세워졌다. 이 핀란드 왕국은 독일계 헤센-카셀 가를 핀란드 왕가로 추대하는 입헌 군주국을 계획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패배하면서 실패했다.
독립하는 과정에서 핀란드도 러시아가 적백내전을 겪은 것과 마찬가지로 각각 적위군과 백위군으로 갈라져 핀란드 내전을 일으켰다. 여기에 소련과 독일이 서로 지원하면서 전쟁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군대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적위군에 블라디미르 레닌이 병력 지원을 많이 해주지 않았고,[2] 군대 체계가 잘 갖춰진 백위군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얻은 많은 피해로 적은 인원수가 파견되긴 했지만 독일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승리를 거두었다. 내전 기간 중에는 백위군이 저지른 학살로 전쟁이 일어났던 1월~5월 사이에 적위군과 혁명을 지지했던 노동자들이 5만 명 이상 사망했는데, 이는 전체 인구의 1~2%에 달했다.
그러나 이런 학살 때문에 많은 국민들이 반발했다. 이후 핀란드의 정치가 민주적으로 정착되자 다양한 정치집단이 나타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유럽에 퍼졌던 극단주의적인 정치 상황에서도 핀란드인들은 극우 정당에 준 지지율은 많아야 5~6%에 불과했다. 이때 백위군을 지휘했던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Carl Gustaf Emil Mannerheim)은 제2차 세계 대전 후반에 대통령 직위를 수행하기도 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많은 유럽 국가들처럼 미국 정부로부터 채무를 졌고 이후에는 예외적으로 열심히 지불하기도 했다. 이것이 미국 의회의 신뢰를 얻어서 이후 겨울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F2A 버팔로 전투기[3] 와 농산물을 지원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소련의 침공을 받았다.(겨울전쟁) 소련군은 수가 적은 핀란드 국방군을 무시했다가 물량 공세로 겨우 힘겨운 승리를 거두었다. 소련이 합병시켰던 핀란드의 영토에는 카렐리야-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현재까지도 러시아의 영토로 남았다. 독일-소련 전쟁이 개전되자 핀란드는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고 점령당한 땅을 회복했지만(계속전쟁), 추축국이 패배할 듯하자 소련과 휴전하고 연합군 측으로 돌아서서 전 국토를 전장으로 만들며 독일군을 몰아냈다(라플란드 전쟁). 일부 병사는 한때는 적이었던 소련군과 함께 베를린 전투까지 참여하기도 했고 소련 편에서 싸웠던 핀란드 공산군도 있었다. 반대로 핀란드가 소련과 협상하자 독일군 내에 있던 핀란드인들 대다수는 자국의 이러한 결정에 반대하며 독일군에 남아 베를린 결전까지 참여하기도 했다.
1944년 3월 말에 이루어진 휴전 회담 때 소련은 6억 달러의 배상금을 요구하였다. 배상금 이외의 조건도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4월 12일에 핀란드 국회는 소련의 강화 조건을 모두 거부했다. 소련은 핀란드가 독일과 동맹 파기를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9월 15일까지 독일군 병력을 핀란드 영토 내에서 축출하는 조건으로 재강화 협상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5개월 후 강회회담이 다시 열렸다. 소련은 이전과 같은 조건에 해군 기지 임차, 병력 감축 등의 요구 사항을 추가했지만 전쟁 배상금은 3억 달러로 줄였다.[4]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미국-소련 간 냉전이 일어나려는 상황에서 중립을 선언하며 마셜 플랜을 거부했고, 소련에는 배상금 3억 달러를 5년 만에 모두 지불했다.
3. 현대
이런 중립적인 관계를 통해 서방측과의 교역도 계속하면서 소련으로부터 여러 가지 우방국의 혜택을 받아서 낮은 가격으로 원유나 지하 자원을 공급받아 1970년대 오일 쇼크가 벌어졌을 때도 핀란드는 다른 국가들보다는 그래도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지정학적 위치를 이용하여 이득을 보기도 해서 핀란드와 소련은 서로 많은 무역을 했다. 핀란드는 소련과 두 번째로 많은 무역을 했는데, 핀란드에서 소련으로 목재가 많이 수출되었다. 소련의 레닌그라드와 에스토니아 SSR의 위치는 핀란드와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서구 세계의 문화가 동구권으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동시에 냉전 기간에는 소련의 눈치를 보아야 했고 마셜 플랜을 포기했지만 바르샤바 조약기구 가맹 등을 하지 않는 대신 T-72 전차와 MiG-21 전투기 같은 소련 무기로 군대를 무장했다. 소련의 심기를 거스르게 할 수 있는 주장, 학설 등은 자체적으로 자제하기도 했다. 이렇게 소련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거나 유화적으로 지내면서도 공산화 하지는 않는 것을 '핀란드화'(독 Finnlandisierung, 영 Finlandization)라고 칭하기도 했다.
냉전 시기에는 서유럽 자유진영과 소련 사이에서 중립국의 지위에 있어서 베트남 전쟁 때 베트남 난민들이 핀란드로 유입되기도 했고, 소련 쪽에서 망명한 이들도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로 핀란드에 정착하곤 했다. 최근에는 아프리카, 이란 등의 정치 망명객들이 선호하는 곳이기도 했다.
1990년대 전반에 공산권이 붕괴하고 소련이 해체하자 소련 무역으로 많은 이익을 얻던 핀란드도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려워졌고, 소련에서 독립한 핀란드 옆 에스토니아도 영향을 많이 받아서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의 좋지 않은 상황에도 1990년대 말부터 핀란드는 다시 회복을 시작했다.
아직도 러시아와는 국경을 맞대고 있고, 워낙 두 국가가 생활 수준 차이가 많이 나서 러시아 사람들이 들어와서 문제를 일으켜 러시아와는 마냥 사이가 좋지는 않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러시아와 가장 긴 국경을 접하고 있는 지리적 위치상 러시아와 여전히 많은 교류를 하고 있는 편이며 국민감정도 러시아에 원수진 수준인 동유럽 몇몇 나라들보다는 좀 더 괜찮은 편이다. 냉전이 끝난 현재는 유럽연합 가입국으로 레오파르트2와 F/A-18이 주전력이 되었다.[5]
4. 관련 항목
[1] 스칸디나비아 반도 일대는 농사에 매우 불리한 지역인데다, 일찌감치 농노제를 폐지했던 서유럽과의 접촉이 잦은 곳이라서, 농노제가 확립되는게 불가능했다.[2] 장갑차 등 약간의 물자 지원은 했다.[3] 당시 기준으론 최신기였는데 이걸 44대나 공여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동안에는 항공기 제작 기술이 많이 발전해서 전쟁 초기 이후의 전투기들에 비해 성능이 부족해져 그보다 우수한 연합군 전투기가 대거 등장, 다른 전선들에선 쓸모없는 전투기가 되었지만 핀란드의 전쟁에서는 추운 기후와 시설이 미비했던 열악한 상황에서 높은 가동률을 보여줬다.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같은 다른 전선에서 호평 받은 전투기는 핀란드의 혹독한 환경에서 하절기에나 가동할 수 있어 '여름철 전투기'란 평을 받을 정도였기 때문에, 핀란드는 버팔로를 고평가했고 '하늘의 진주'란 별명을 붙일정도였다. 고공전투가 주된 대서양과 태평양에선 취깁이 나빴지만, 이런 서방 연합군과 공중전 양상이 달라 저공 전투가 주요했던 소련에선 공중전에 많이 투입했고 냉전 시기까지도 써서 NATO 코드명을 부여받은 미제 전투기 P-39 에어라코브라와 비슷했다.[4] 지불을 1938년 기준의 금화로 하라고 요구해서 실제로는 당시 시세로 4억 5천만 달러 정도였다.[5] 그래도 좋은 러시아 무기들은 아직도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T-55는 2선급에서 현역으로 쓰고 있고 야포는 서방 규격인 155mm가 있긴 하지만, 2014년 핀란드군 훈련을 보면 아직도 견인포들은 러시아 규격인 122mm와 152mm가 많이 보인다. 총기들은 Rk 95의 7.62x39mm탄과 PKM의 7.62x54mm R과 NSV의 12.7x108mm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