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39 에어라코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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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l P-39 Airacobra
에어코브라가 아니고 '''에어라코브라'''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전투기 이자 요격기. 다만 최대 운용국은 고향이 아닌 소련으로, 현재의 헬리콥터 명가인 벨(Bell) 항공사에서 개발했다. NATO 코드명은 프레드(Fred). NATO 결성 이후에도 소련에서 한동안 현역으로 잘 굴려먹었기 때문에 미국 전투기로는 유일하게 나토 코드명이 붙는 기묘한 대우를 받았다.
미 공군의 전신인 미 육군항공대는 미군의 고전적인 떡밥 중 하나인 '어디선가 날아올지 모를 적 폭격기를 요격하기 위한 전투기'의 개발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사실 여기에는 조금 더 복잡한 뒷배경이 있는데, 1930년대 미 육군항공대는 '폭격기무적론'이 지배적인 시대라 전투기 특히 고성능 전투기의 개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나아가 당시 미 육군항공대에선 '전투기 - 당시는 추격기(Pursuit)라고 칭했다 - 에 필요한 화기와 탄약의 중량은 총 500lb(225kg)면 충분하다고 판단, 그에 맞춰 전투기 개발하라는 자의적 독트린을 세워놓고 있었다. 이렇게 맞추려면 최대한 해봐야 12.7mm 기관총 2정 + 7.62mm 기관총 2정 정도가 한계일 듯.
미 육군항공대 내에서 이에 반발하며 전투기에 대한 투자를 주장한 인물 중의 하나가 육군항공대 전술학교의 전투기 전술교관이던 고든 새빌(Gordon P. Saville)이었다. 그는 이후 플라잉 타이거즈를 이끌며 유명해진 클레어 셰놀트의 후임자이자, 또한 셰놀트와 함께 미 육군항공대의 '전투기 파'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강력하게 무장한 장거리 폭격기를 막을 방법은 없다'는 주장을 믿지 않았으며, 따라서 항공우세를 위해선 고성능의 전투기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또한 그는 향후 공중전에서 우세를 확보하려면 이후의 전투기는 육군항공대가 충분하다고 주장한 500lb가 아니라, 그 두 배(450kg)의 무장과 탄약을 탑재 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참고로 2차 대전시기 미군 전투기의 표준이 된 12.7mm 기관총 6정에 탄약 3-400발을 탑재하면 450kg은 가볍게 넘긴다.
하지만 당시 미 육군항공대의 분위기에선 그런 주장을 실제화할 방법이 별로 없었다. 때문에 새빌은 '폭격기 만능론'을 뒤집어 바로 '어디선가 날아올지 모를 적 폭격기를 요격하기 위해 강력하게 무장된 고성능 전투기'라는 떡밥을 만들어 낸 것. 그리고 이를 일반적인 전투기 즉 '추격기(Pursuit)'와 구분해서 '요격기(Interceptor)'라고 칭했다. 즉 잘 무장된 고성능 전투기 개발을 추진하기 위해 별도의 기종 분류를 만들어낸 셈. 아무튼 그 주장이 받아들여져 새빌은 항공공학자이지 테스트파일럿이던 벤자민 켈시(Benjamin S. Kelsey)와 함께 자신이 주장하던 '요격기'의 개발을 추진, P-39와 P-38 라이트닝의 개발을 추진하게 된다.
이러한 미 육군항공대의 신예기 요구에 벨사가 응했다. 당시 신생 항공기 개발업체이던 벨사는 타사와의 차별화를 위해 신규기술을 대량으로 도입한다.
먼저 엔진을 조종석 뒷쪽에 두어 무게 중심이 기체 중앙에 오게 만들어 높은 선회성을 얻었고 공기 흡입구를 기체 뒤편으로 옮겨 유선형 디자인이 가능해져 공력을 향상시켰다. 이로 인해 비게 되는 전면 공간에는 전투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대형 폭격기도 한 두발로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던 대구경 기관포(M4 37mm)가 탑재 가능해져 무시무시한 펀치력도 얻었다. 사실 엔진을 뒤쪽에 둔 이유가 이 37mm 기관포를 장착하기 위해 기수 부분에 공간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다만 위 같은 조치는 후에 P-39에게 있어서 양날의 검으로 작용하게 된다. 왜냐하면 엔진을 동체중앙에 장착한 결과 37mm 기관포의 성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었던 반면에, 역으로 실속 상황에서는 오히려 기수가 내려가지 않고 그대로 수직하강을 해버리는 치명적인 결함을 낳았기 때문이다.
또한 엔진을 동체중앙에 장착함으로써 잃게된 한가지 단점이 더 있는데, P-38과 마찬가지로 엔진의 위치탓에 높은고도에서 엔진의 열기에 의한 조종석의 난방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어쨌거나 엔진을 동체 중앙에 박아넣었으니 그 대안으로 배나 자동차 등에서는 이미 쓰이고 있던 동력 전달 방식[3] 을 채용한 최초의 실용기로, 비행기에는 새로운 방식이라며 망설이는 기술진에게 설계자가 '''"아니 왜 안 된다고만 하는 겁니까? 배나 자동차를 보세요! 이미 샤프트를 통해서 동력을 얻는데 왜 비행기는 그게 안 된다는 겁니까?"'''라고 질책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발상의 전환인 셈이랄까... 다만 피탄이나 폭발시 고속으로 회전하는 샤프트가 부러지면 조종사를 덮칠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으므로 조종석 하부에 방탄철판을 삽입하여 문제를 해결하였으며, 실제 그런 식으로 발생한 사고도 없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P-38 라이트닝처럼 기존의 Tail dragger가 아닌 이착륙시 전방시야가 우수한 Tricycle방식 랜딩 기어와 측면에 자동차와 비슷한 여닫이식 탑승구같이 동세대 전투기들과는 다른 특이한 면모가 많은 기체였다.
아무튼 카탈로그 데이터만큼은 킹왕짱인 P-39의 등장에 미군은 물론이고 영국 공군까지 좋아를 외치며 대량 발주에 나섰고 벨사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된다. 그리고 1941년부터 미 육군항공대에 배치가 시작된다.
P-39 에어라코브라가 한참 개발이 진행되던 1938년 즈음에 미 해군이 이 비행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XFL-1 에어라보니타 라는 함재기 프로토타입이 개발된 적이 있다. 이 버젼은 트라이사이클 방식이 아닌 일반적인 테일드래거 방식 랜딩기어가 달려 있었고, 프로펠러 중심의 37mm 기관포가 12.7mm M2 브라우닝 중기관총으로 변경되었었다. 1941년까지 개발과 개량이 진행되었으나 역시나 부족한 고고도 성능과, 전체적인 성능이 훨씬 뛰어난 F4U 콜세어의 개발이 진행되고 있었기에, 곧 XFL-1은 개발이 취소되게 된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예상 성능보다 시제기의 속력이 계획되었던 시속 400마일에서 10마일 정도 좀 더 느리게 나오자 육군항공대 사령관이던 헨리 아놀드 대장의 요구에 따라, 제작사에서는 NASA의 전신인 NACA("미국 국가항공자문위원회 National Advisory Committee for Aeronautics")에 풍동실험을 의뢰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이 비행기의 운명을 뒤틀어 놓았다. 풍동 실험을 비롯한 여러 실험 결과 NACA에서 처음 내놓은 제안은 내부의 터보차저(과급기) 관련 덕트와 냉각 시스템, 배기구 시스템등의 효율을 높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P-39는 이미 시제기까지 만든 상태여서 재설계도 어려웠을 뿐더러, 내부 공간을 대구경 기관포와 엔진이 잡아먹고 있다보니 공간상 여유도 없었다. 또 다른 대안으로 내놓은 것은 '''튀어나온 터보 차저(과급기) 장치의 공기흡기구를 아예 떼어버리는 것. 1939년 미육군항공대와 NACA, 그리고 벨은 이에 대해 논의하였고 결국 벨은 터보차저를 떼어내고 엔진에 1단-1속 수퍼차저(과급기)만 다는 것을 제안하였다.[4]
게다가 시제기엔 없던 방탄판이 곳곳에 증설되어 양산기는 프로토타입의 두배에 달하는 중량으로 뚱보가 되어 버렸다! 당장 프로토타입에서 1.8t이었던 기체가 양산형인 D형에서는 3.7t에 달했다. 당연히 이 늘어난 중량은 비행성능에 크게 악영향을 미쳤다.[5][6]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된 과정에는 원래 개발계획을 담당하던 벤자민 켈시가 바로 이 시점에 영국 복무 명령을 받고 자리를 비운 사이 벌어진 일이라는 것도 영향을 끼쳤다. 원래 개발을 주관했던 벤자민 켈시와 고든 새빌은 위에서도 지적했듯 보다 강력한 무장과 고성능을 갖춘 전투기 개발을 위해 '고공으로 침공해오는 적 폭격기를 요격할 전투기'라는 명분을 세웠고, 때문에 P-39의 P-38 개발과정에서 바로 '터보수퍼차저 사용'을 명시적인 요구사항으로 내걸었고 기체 전체의 설계방향도 터보수퍼차저 사용을 전제로 진행되었다. 이를 알고 있는 켈시는 이후 터보수퍼차저의 공기흡입구 형상 문제의 개선을 이끌고 싶어했지만, 영국 복무 명령을 받고 손을 떼어야 했고 이후 개발과정은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리고는 떡하니 터보수퍼차저 삭제라는 황당한 해법이 나온 것.[7]
이 과정에서 최고로 웃기는 것은 애초 개선요구의 출발점이 된 속도 미달이, 바로 '6000m 고고도에서 최고속도가 계획치에 (10마일 정도) 부족하다'에서 시작했다는 것.
이렇게 되니 고공성능이 매우 실망스런 수준이 된 것은 당연했다. 터보 차저 없는 엔진은 고도 4,000m만 올라가도 '''숨이 끊어질 듯 헐떡거렸고''' 37mm 기관포는 한번 쐈다하면 조종석 안으로 초연과 일산화탄소를 사정없이 불어넣어 가뜩이나 산소 마스크도 없는 조종사 또한 '''숨이 끊어질 듯 헐떡거리게''' 만들었다.
또한 속도는 최초 설계보다 50km/h나 떨어져서 600km/h 근방을 왔다갔다 했으며, 그나마 이 속도를 유지했으면 대전 초반의 전투기로서는 매우 준수했지만, 문제는 조금만 고공으로 올라가면 미친듯이 속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다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상승력[8] 과 가속능력, 항속거리 또한 당시 미군 전투기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미 육군의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실전에서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는 기체결함이 무려 19가지나 발견되었다고 한다. 결국 이런 문제 때문에 고공까지 올라갈 일이 없어져 버려 고공용으로 만든 산소공급장치 등의 고공전용 장비들이 제거되어 영·미 공군에서는 저공 전투기 겸 공격기로나 좀 사용되었다.
물론 저공에서의 비행성능은 기대만큼 뛰어났으나 정작 상대해야 할 제로센이나 Bf109는 고도 5,000m 이상에서 득시글댔으니 적을 잡으러 가기는 커녕 표적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다.
미제 원형을 카리브(Caribou)I으로, 주문 생산형을 에어라코브라I(미군명 P-39D-1)으로 이름붙여 도입했던 영국마저 실망스런 성능에 더 이상 도입하지 않기로 하였고, 이미 받았던 기체들은 전부 소련으로 렌드리스를 통해 보내버린다. 반면 주문이 취소되어 재고로 쌓여 있던 물건들은 진주만 공습 이후 급히 물자가 필요한 미군에 의해 P-400으로 재명명하여 도입됐다. 이 물건들은 이미 영국의 요구에 맞추어 생산되었으므로 37mm 대신 20mm 히스파노를 장착했다. 400이라 붙인 이유는, 그 당시 400 mph를 최고 속도로 낼 수 있다는 카탈로그 스펙 덕분이었으나,[9] 영국에서 실제로 테스트해본 바에 의하면 350 mph도 간신히 낼 수 있던 수준이었다.
미국은 이렇게 퇴짜맞은 물건을 태평양 전쟁에 투입했다가 영 시원치 않은 성과를 내고 있었으며, 새로운 전투기들을 찾게 되는 바람에 사용률이 바닥을 쳐서 덕분에 재고가 넘쳐나게 된다. 그러다 마침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이 헬프신공을 보내자 남아돌던 기체들을 선심쓰듯 아낌없이 무기대여법으로 공여해주었다. 정작 미군과 영국군은 1942년 중반까지 완전히 전선에서 강판시켜 버린다.
그런데 해군의PT 보트들은 부무장이 M2중기관총이라 고속정과 싸울때는 아무래도 화력이 부족했고 화력을 강화할 필요를 느꼈는데 추락한 P-39등에서 M4 37mm 기관포를 뜯어내서 PT보트에 달아봤더니 경장갑인 고속정 상대하기엔 그만인지라 아예 포를 개량해서 PT보트들이 달고 다녔다
미국내에선 상당량의 기체들이 일선에서 사용되지 못하고 물러나 조종사들의 훈련기로 사용되었는데 훈련병들조차 자신들이 P-39를 타고 훈련을 받는데 불만을 토로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심지어 이런 가사의 노래를 불렀다.
역도입 버전의 기체 명칭이 P-400인 걸 이용한 이런 농담도 있었다
그래서 이 전투기는 이미 제2차 세계대전 중반을 넘기지도 못하고 태평양 전선 및 서부 전선에서는 실패작으로 분류되었다. 영국군에서도 됭케르크 근처 독일 선박 공격하는 데 한 번 투입하고 전부 뒷전으로 돌렸으며, 해당 비행대는 스핏파이어로 기종 전환하게 된다. 안습의 안습...
물론, 연합군에서도 무작정 미운오리가 된 것은 아니었다. 태평양 전선에서 그야말로 적 멀티를 바로 탈취해서 초반 버티기를 해야 하는 과달카날 전역에서는 캑터스 비행단에 배속되어 분전한다. 당시 미군은 해병대의 와일드캣, 던틀레스, 육군의 P-40, 그리고 P-39 정도 밖에는 없었고 이것들로 당시 일본군의 숙련된 조종사들과 객관적으로도 비행성능이 우월했던 제로센을 상대했던 것. P-39는 저공에서 그럭저럭 쓸만한 성능을 이용해 주로 저공을 커버하는 방공전투기 혹은 해상공격(일본군의 수송선 등)에 사용했으며 덕분에 사보 섬 해전에서 탈탈 털려서 위태위태했던 헨더슨 비행장을 지켜내는 데 일조를 했던 것이다. 중간에 프로젝트가 산으로 가는 바람에 미운오리새끼가 되어버렸으나 그나마 태평양에서는 가장 위태로운 상황에 가장 중요한 역활을 해낸 셈이다. 당연하게도 P-38이 도착하자 버려지기는 했지만(...)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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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소련에 공여된 P-400(영국에 랜드리스 되었던 모델)[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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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소련 공군에 공여되는 P-63 킹코브라.
'''서부전선과 달리, 동부전선에서 P-39는 전혀 다른 물건이 되었다!'''
이곳의 공중전 양상은 지상군을 지원하는 공격기와 이 공격기들을 노리고 달려드는 전투기, 그리고 이런 적 전투기들을 가로막는 호위기끼리의 도그파이트였고, 대부분의 공중전이 고도 2,000m 이하의 저공에서 벌어지는 독소전쟁의 하늘이 바로 P-39가 제 실력을 발휘할 전장이었던 것이다.
호위기로는 물론이고 폭장하여 공격기로도 활용가능한 범용성에 미제다운 튼튼한 맷집, 높은 생존성, 통상탄으로도 전투기고 공격기고 폭격기고 한방에 두 동강내는 강력한 '''브라우닝(Browning)''' M4 37mm 기관포의 파괴력에 소련 공군은 홀딱 반하고 말았다. [11] 그래서 전쟁 후에도 서방 세계에서는 신통치 않은 전투기로 평가되었던 이 기체가 소련에서 지상공격이나 했을 걸로 생각했지만, 냉전이 끝난 후 소련측 기밀 문서가 풀리면서 경악할 만한 사실이 드러난다. 소련군은 이 기체를 '''적 항공기와 싸우는 게 전문인 방공군에서 굴렸던 것이다!!'''
기수에 장착된 M4 37mm 기관포는 분당 150발의 발사속도에 장탄수도 30발 밖에 안 됐지만, 항공기에 '''한 발만 맞추면 두 동강을 내버리는''' 가공할 위력을 자랑했다. 미국은 37mm 철갑탄을 소련에 공급하지 않았지만, 공중전은 고폭탄만으로도 충분한데다가 지상지원용으로도 위력이 대단했던 것이다. 독일군이 운용한 동급의 무기로는 MK 103과 M K108이 있었는데, 비록 구경은 7mm작지만 미넨게쇼스라는 대량의 작약이 들어간 탄종을 시용해 고폭탄 자체의 위력은 M4보다 뛰어났다. 그러나 MK 103은 150kg가까이 되는 중량과 탄속을 높이기 위해 사용한 많은 장약에 의한 큰 반동으로 Bf109등의 소형 전투기에는 장착할 수 없았으며, MK 108은 탄속이 540m/s에 불과해 표적에 명중시키기가 어려웠다.
특히 소련은 공여받은 P-39의 성능 향상을 위해 현지 개조도 했다. 소련 공군은 이전부터 전투기들에게도 20mm 기관포를 표준장비화 할 정도로 전투기의 화력에 집착한 화력덕후였으므로 과감하게 주포인 37mm 기관포와 기수의 12.7mm 기관총 2정만을 남기고 주익의 기관총[12] 은 철거해버렸다. 이로서 500kg 이상 몸무게를 줄여 약점 중의 하나인 느린 발과 짧은 항속거리를 어느 정도 개선할 수 있었고, 선회력도 향상되었다. 또한 복잡한 화기관제장치가 하나로 단순화되어 정비가 쉬워지고 포 발사 가스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미국의 선심으로 조종석 전면에 방탄유리를 도입하여 더욱 생존성을 향상시킬 수 있었고 몸무게도 좀 더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P-39를 몰던 미국이나 영국 등 서방측 연합군 파일럿들은 형편없는 고공성능 뿐 아니라, 엔진이 중앙에 배치된 '미드십' 기체의 비행특성 때문에도 애를 먹어야 했다. 하지만 소련 공군에는 이미 (짜리몽땅한 기체 덕분에) 비슷한 비행특성을 지녔던 폴리카르포프 I-16를 몰아보았던 조종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소련 조종사들은 P-39의 까탈스런 비행특성에도 그리 어렵지않게 적응하여 기체의 제 성능을 끌어낼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독일군의 입장에서는 동체 중앙에 안정적으로 장착되어 탄도와 정밀성까지 좋은 37mm 기관포탄은 그야말로 '''한방만 맞으면 사망'''급의 재앙이었다. 덕분에 소련의 에이스들 중 P-39로 10기가 훌쩍넘는 격추기록을 세운 이들이 득시글대는 최고의 에이스 메이커로 군림하게 되었다. 당장 소련측에서 50대 이상을 격추한 에이스 중 두 명이 P-39로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이 수치는 '''역사상 모든 미제 전투기로 올린 격추 기록 중 최고치다.''' 반면에 전후 독일 에이스들은 모든 면에서 뒤떨어지는, 가장 만만한 기체였다라는 소감을 말하기도 했다. 다만 이 부분은 조종사 개인의 주관이 어느정도 반영되어있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는 있다. 가령 P-38 라이트닝의 경우 갈란트같은 경우에는 가장 만만한 기체라고 평가했지만 슈타인호프같은 경우에는 제법 위협적인 상대로 평가했다.[13]
이러니 저러니 해도 9,500여대나 생산되어 미국의 생산력을 체감할 수 있는 전투기. 다만 좀 더 고성능으로 고쳐달라고 NACA에 의뢰했더니 고공에서는 쓸모없는 바보로 만들어 버려서 사장 이하로 열 좀 받았을 듯. 게다가 서부전선의 공중전은 고고도에서 벌어진 탓에 이 기체의 잠재력이 나타날 수가 없었던 전장이었다.
애초에 만약 2단 과급기를 떼어버리고 이녀석을 뚱보로 만드는 개악이 없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뛰어난 성능을 보였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도 에어라코브라의 저고도 기동성은 어느정도 괜찮다고 평가되며 속도도 대전 초반 등장 시기 기준에선 쓸만했다. 그런 녀석의 체중을 대폭 감소시키면? 중량이 감소하니 추중비가 상승하고 추중비가 상승하니 상승력과 속력도 좋아졌을 것이다. 또한 중량 감소로 익면 하중이 작아져 기동성이 더욱 좋아졌을 것이다. 미제 2단 과급기는 타 기체들이 보여주듯 뛰어난 성능을 가졌고, 에어라코브라의 고고도 성능을 대폭 향상시켰을 것이다. 장갑이 감소한만큼 지상공격중 손실률이 커졌겠지만, 킹코브라를 보면 그래도 잘 써먹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애초에 이런 점을 해소한 것이 킹코브라다. 물론 동체 길이나 주익의 길이 등이 차이점이 있지만 대전 초기에 저런 물건이 등장했다면 미군기 역사에 한 획을 그었을지도 모른다.
생산량 중 절반 이상을 쓸어간 소련 이외에도 자유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이탈리아의 바돌리오 정부 등 전선 뒤쪽에서 어영대는 잉여스런 연합국 공군에 뿌려져서 전투기에 목마른 자들의 갈증을 달래주었다.
1943년 후반부터 고고도 성능을 향상시킨 사실상의 최종개량형인 P-63 킹코브라도 등장했지만 역시 짧은 항속거리와 P-51 머스탱보다 느린 속도로 인해 이 물건도 3,303대라는 전체 생산량의 70%를 소련이 쓸어담아가서 쏠쏠하게 잘 써먹었다. 참고로 킹코브라란 이름은 후에 벨이 코브라를 대규모 업그레이드한 버전에도 쓰였으나 '''아무도 사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미 공군의 LWF 사업 때도 노스롭은 YF-17 코브라를 들이밀었으나 또 YF-16에게 밀려 패배했다.[14] 아무래도 '코브라'라는 이름은 전투기에 쓰기에는 마가 낀 모양. 불굴의 벨 항공사는 끝까지 코브라라는 이름을 포기하지않고 결국 최초의 공격헬기에 코브라란 이름을 붙여 성공시켰다.
제트기 시대에 들어선 이후에도 소련 공군이 37mm 기관포에 집착했던 이유 또한 이 기체가 보여준 강력한 성능이 원인이라고 한다. 사실 MiG-15, MiG-17에 탑재된 N-37은 IL-2 37, Yak-9T에도 탑재되었던 NS-37을 제트기에 맞게 개량한 것이다. 덤으로 M4의 설계자는 다름아닌 '''존 브라우닝''' 선생.[15]
여담으로 2차대전이 끝나고 소련에 남아있던 P-39 중 소수가 한국전쟁 때 북한에 넘겨져 조선인민군 공군 마크를 달고 미군을 공격했다는 일부 미군 조종사들의 증언이 있다. 다만 이를 증명할 구체적인 자료가 존재하지 않아 확증은 어려운 상황이다. 참고로 80년대에 동네 문방구에서 팔던 손바닥만한 1천원짜리 무기백과 중에, 6.25때 북한군 야크기라며 P-39와 매우 흡사한 사진을 실어놓은 책이 있기는 했다.
미군 3티어 전투기 P-39 에어라코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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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 랜드리스된 프리미엄 전투기 P-39 에어라코브라
1. 제원(최신형인 P-39Q 기준)
- 전장 : 9.2m
- 전폭 : 10.4m
- 전고 : 3.8m
- 공차중량 : 2,955kg
- 적재중량 : 3,433kg
- 최대이륙중량 : 3,800kg
- 익면하중 : 169kg/m²
- 엔진 : 앨리슨 V-1710
- 출력 : 1,200hp
- 최소제한속력[1] : 152km/h, 82kn
- 최대속력 : 626km/h, 338kn (고도 10,000ft, 3,048m 기준)
- 최대제한속력[2] : 845km/h, 456kn
- 전투반경 : 845km
- 최대항속거리 : 1,690km(연료를 최대로 채웠을 경우)
- 상승고도 : 10,700m
- 무장 : 37mm T9 기관포 1문, 12.7mm 기관총 4정 또는 7.62mm 기관총 4정, 폭탄 225kg
- 승무원 : 1명
- 생산량 : 9,584대
2. 개요
Bell P-39 Airacobra
에어코브라가 아니고 '''에어라코브라'''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전투기 이자 요격기. 다만 최대 운용국은 고향이 아닌 소련으로, 현재의 헬리콥터 명가인 벨(Bell) 항공사에서 개발했다. NATO 코드명은 프레드(Fred). NATO 결성 이후에도 소련에서 한동안 현역으로 잘 굴려먹었기 때문에 미국 전투기로는 유일하게 나토 코드명이 붙는 기묘한 대우를 받았다.
3. 역사
3.1. 개발
미 공군의 전신인 미 육군항공대는 미군의 고전적인 떡밥 중 하나인 '어디선가 날아올지 모를 적 폭격기를 요격하기 위한 전투기'의 개발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사실 여기에는 조금 더 복잡한 뒷배경이 있는데, 1930년대 미 육군항공대는 '폭격기무적론'이 지배적인 시대라 전투기 특히 고성능 전투기의 개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나아가 당시 미 육군항공대에선 '전투기 - 당시는 추격기(Pursuit)라고 칭했다 - 에 필요한 화기와 탄약의 중량은 총 500lb(225kg)면 충분하다고 판단, 그에 맞춰 전투기 개발하라는 자의적 독트린을 세워놓고 있었다. 이렇게 맞추려면 최대한 해봐야 12.7mm 기관총 2정 + 7.62mm 기관총 2정 정도가 한계일 듯.
미 육군항공대 내에서 이에 반발하며 전투기에 대한 투자를 주장한 인물 중의 하나가 육군항공대 전술학교의 전투기 전술교관이던 고든 새빌(Gordon P. Saville)이었다. 그는 이후 플라잉 타이거즈를 이끌며 유명해진 클레어 셰놀트의 후임자이자, 또한 셰놀트와 함께 미 육군항공대의 '전투기 파'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강력하게 무장한 장거리 폭격기를 막을 방법은 없다'는 주장을 믿지 않았으며, 따라서 항공우세를 위해선 고성능의 전투기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또한 그는 향후 공중전에서 우세를 확보하려면 이후의 전투기는 육군항공대가 충분하다고 주장한 500lb가 아니라, 그 두 배(450kg)의 무장과 탄약을 탑재 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참고로 2차 대전시기 미군 전투기의 표준이 된 12.7mm 기관총 6정에 탄약 3-400발을 탑재하면 450kg은 가볍게 넘긴다.
하지만 당시 미 육군항공대의 분위기에선 그런 주장을 실제화할 방법이 별로 없었다. 때문에 새빌은 '폭격기 만능론'을 뒤집어 바로 '어디선가 날아올지 모를 적 폭격기를 요격하기 위해 강력하게 무장된 고성능 전투기'라는 떡밥을 만들어 낸 것. 그리고 이를 일반적인 전투기 즉 '추격기(Pursuit)'와 구분해서 '요격기(Interceptor)'라고 칭했다. 즉 잘 무장된 고성능 전투기 개발을 추진하기 위해 별도의 기종 분류를 만들어낸 셈. 아무튼 그 주장이 받아들여져 새빌은 항공공학자이지 테스트파일럿이던 벤자민 켈시(Benjamin S. Kelsey)와 함께 자신이 주장하던 '요격기'의 개발을 추진, P-39와 P-38 라이트닝의 개발을 추진하게 된다.
이러한 미 육군항공대의 신예기 요구에 벨사가 응했다. 당시 신생 항공기 개발업체이던 벨사는 타사와의 차별화를 위해 신규기술을 대량으로 도입한다.
먼저 엔진을 조종석 뒷쪽에 두어 무게 중심이 기체 중앙에 오게 만들어 높은 선회성을 얻었고 공기 흡입구를 기체 뒤편으로 옮겨 유선형 디자인이 가능해져 공력을 향상시켰다. 이로 인해 비게 되는 전면 공간에는 전투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대형 폭격기도 한 두발로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던 대구경 기관포(M4 37mm)가 탑재 가능해져 무시무시한 펀치력도 얻었다. 사실 엔진을 뒤쪽에 둔 이유가 이 37mm 기관포를 장착하기 위해 기수 부분에 공간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다만 위 같은 조치는 후에 P-39에게 있어서 양날의 검으로 작용하게 된다. 왜냐하면 엔진을 동체중앙에 장착한 결과 37mm 기관포의 성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었던 반면에, 역으로 실속 상황에서는 오히려 기수가 내려가지 않고 그대로 수직하강을 해버리는 치명적인 결함을 낳았기 때문이다.
또한 엔진을 동체중앙에 장착함으로써 잃게된 한가지 단점이 더 있는데, P-38과 마찬가지로 엔진의 위치탓에 높은고도에서 엔진의 열기에 의한 조종석의 난방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어쨌거나 엔진을 동체 중앙에 박아넣었으니 그 대안으로 배나 자동차 등에서는 이미 쓰이고 있던 동력 전달 방식[3] 을 채용한 최초의 실용기로, 비행기에는 새로운 방식이라며 망설이는 기술진에게 설계자가 '''"아니 왜 안 된다고만 하는 겁니까? 배나 자동차를 보세요! 이미 샤프트를 통해서 동력을 얻는데 왜 비행기는 그게 안 된다는 겁니까?"'''라고 질책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발상의 전환인 셈이랄까... 다만 피탄이나 폭발시 고속으로 회전하는 샤프트가 부러지면 조종사를 덮칠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으므로 조종석 하부에 방탄철판을 삽입하여 문제를 해결하였으며, 실제 그런 식으로 발생한 사고도 없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P-38 라이트닝처럼 기존의 Tail dragger가 아닌 이착륙시 전방시야가 우수한 Tricycle방식 랜딩 기어와 측면에 자동차와 비슷한 여닫이식 탑승구같이 동세대 전투기들과는 다른 특이한 면모가 많은 기체였다.
아무튼 카탈로그 데이터만큼은 킹왕짱인 P-39의 등장에 미군은 물론이고 영국 공군까지 좋아를 외치며 대량 발주에 나섰고 벨사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된다. 그리고 1941년부터 미 육군항공대에 배치가 시작된다.
P-39 에어라코브라가 한참 개발이 진행되던 1938년 즈음에 미 해군이 이 비행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XFL-1 에어라보니타 라는 함재기 프로토타입이 개발된 적이 있다. 이 버젼은 트라이사이클 방식이 아닌 일반적인 테일드래거 방식 랜딩기어가 달려 있었고, 프로펠러 중심의 37mm 기관포가 12.7mm M2 브라우닝 중기관총으로 변경되었었다. 1941년까지 개발과 개량이 진행되었으나 역시나 부족한 고고도 성능과, 전체적인 성능이 훨씬 뛰어난 F4U 콜세어의 개발이 진행되고 있었기에, 곧 XFL-1은 개발이 취소되게 된다.
3.2. 마개조와 좌절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예상 성능보다 시제기의 속력이 계획되었던 시속 400마일에서 10마일 정도 좀 더 느리게 나오자 육군항공대 사령관이던 헨리 아놀드 대장의 요구에 따라, 제작사에서는 NASA의 전신인 NACA("미국 국가항공자문위원회 National Advisory Committee for Aeronautics")에 풍동실험을 의뢰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이 비행기의 운명을 뒤틀어 놓았다. 풍동 실험을 비롯한 여러 실험 결과 NACA에서 처음 내놓은 제안은 내부의 터보차저(과급기) 관련 덕트와 냉각 시스템, 배기구 시스템등의 효율을 높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P-39는 이미 시제기까지 만든 상태여서 재설계도 어려웠을 뿐더러, 내부 공간을 대구경 기관포와 엔진이 잡아먹고 있다보니 공간상 여유도 없었다. 또 다른 대안으로 내놓은 것은 '''튀어나온 터보 차저(과급기) 장치의 공기흡기구를 아예 떼어버리는 것. 1939년 미육군항공대와 NACA, 그리고 벨은 이에 대해 논의하였고 결국 벨은 터보차저를 떼어내고 엔진에 1단-1속 수퍼차저(과급기)만 다는 것을 제안하였다.[4]
게다가 시제기엔 없던 방탄판이 곳곳에 증설되어 양산기는 프로토타입의 두배에 달하는 중량으로 뚱보가 되어 버렸다! 당장 프로토타입에서 1.8t이었던 기체가 양산형인 D형에서는 3.7t에 달했다. 당연히 이 늘어난 중량은 비행성능에 크게 악영향을 미쳤다.[5][6]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된 과정에는 원래 개발계획을 담당하던 벤자민 켈시가 바로 이 시점에 영국 복무 명령을 받고 자리를 비운 사이 벌어진 일이라는 것도 영향을 끼쳤다. 원래 개발을 주관했던 벤자민 켈시와 고든 새빌은 위에서도 지적했듯 보다 강력한 무장과 고성능을 갖춘 전투기 개발을 위해 '고공으로 침공해오는 적 폭격기를 요격할 전투기'라는 명분을 세웠고, 때문에 P-39의 P-38 개발과정에서 바로 '터보수퍼차저 사용'을 명시적인 요구사항으로 내걸었고 기체 전체의 설계방향도 터보수퍼차저 사용을 전제로 진행되었다. 이를 알고 있는 켈시는 이후 터보수퍼차저의 공기흡입구 형상 문제의 개선을 이끌고 싶어했지만, 영국 복무 명령을 받고 손을 떼어야 했고 이후 개발과정은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리고는 떡하니 터보수퍼차저 삭제라는 황당한 해법이 나온 것.[7]
이 과정에서 최고로 웃기는 것은 애초 개선요구의 출발점이 된 속도 미달이, 바로 '6000m 고고도에서 최고속도가 계획치에 (10마일 정도) 부족하다'에서 시작했다는 것.
이렇게 되니 고공성능이 매우 실망스런 수준이 된 것은 당연했다. 터보 차저 없는 엔진은 고도 4,000m만 올라가도 '''숨이 끊어질 듯 헐떡거렸고''' 37mm 기관포는 한번 쐈다하면 조종석 안으로 초연과 일산화탄소를 사정없이 불어넣어 가뜩이나 산소 마스크도 없는 조종사 또한 '''숨이 끊어질 듯 헐떡거리게''' 만들었다.
또한 속도는 최초 설계보다 50km/h나 떨어져서 600km/h 근방을 왔다갔다 했으며, 그나마 이 속도를 유지했으면 대전 초반의 전투기로서는 매우 준수했지만, 문제는 조금만 고공으로 올라가면 미친듯이 속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다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상승력[8] 과 가속능력, 항속거리 또한 당시 미군 전투기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미 육군의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실전에서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는 기체결함이 무려 19가지나 발견되었다고 한다. 결국 이런 문제 때문에 고공까지 올라갈 일이 없어져 버려 고공용으로 만든 산소공급장치 등의 고공전용 장비들이 제거되어 영·미 공군에서는 저공 전투기 겸 공격기로나 좀 사용되었다.
물론 저공에서의 비행성능은 기대만큼 뛰어났으나 정작 상대해야 할 제로센이나 Bf109는 고도 5,000m 이상에서 득시글댔으니 적을 잡으러 가기는 커녕 표적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다.
미제 원형을 카리브(Caribou)I으로, 주문 생산형을 에어라코브라I(미군명 P-39D-1)으로 이름붙여 도입했던 영국마저 실망스런 성능에 더 이상 도입하지 않기로 하였고, 이미 받았던 기체들은 전부 소련으로 렌드리스를 통해 보내버린다. 반면 주문이 취소되어 재고로 쌓여 있던 물건들은 진주만 공습 이후 급히 물자가 필요한 미군에 의해 P-400으로 재명명하여 도입됐다. 이 물건들은 이미 영국의 요구에 맞추어 생산되었으므로 37mm 대신 20mm 히스파노를 장착했다. 400이라 붙인 이유는, 그 당시 400 mph를 최고 속도로 낼 수 있다는 카탈로그 스펙 덕분이었으나,[9] 영국에서 실제로 테스트해본 바에 의하면 350 mph도 간신히 낼 수 있던 수준이었다.
미국은 이렇게 퇴짜맞은 물건을 태평양 전쟁에 투입했다가 영 시원치 않은 성과를 내고 있었으며, 새로운 전투기들을 찾게 되는 바람에 사용률이 바닥을 쳐서 덕분에 재고가 넘쳐나게 된다. 그러다 마침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이 헬프신공을 보내자 남아돌던 기체들을 선심쓰듯 아낌없이 무기대여법으로 공여해주었다. 정작 미군과 영국군은 1942년 중반까지 완전히 전선에서 강판시켜 버린다.
그런데 해군의PT 보트들은 부무장이 M2중기관총이라 고속정과 싸울때는 아무래도 화력이 부족했고 화력을 강화할 필요를 느꼈는데 추락한 P-39등에서 M4 37mm 기관포를 뜯어내서 PT보트에 달아봤더니 경장갑인 고속정 상대하기엔 그만인지라 아예 포를 개량해서 PT보트들이 달고 다녔다
미국내에선 상당량의 기체들이 일선에서 사용되지 못하고 물러나 조종사들의 훈련기로 사용되었는데 훈련병들조차 자신들이 P-39를 타고 훈련을 받는데 불만을 토로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심지어 이런 가사의 노래를 불렀다.
역도입 버전의 기체 명칭이 P-400인 걸 이용한 이런 농담도 있었다
그래서 이 전투기는 이미 제2차 세계대전 중반을 넘기지도 못하고 태평양 전선 및 서부 전선에서는 실패작으로 분류되었다. 영국군에서도 됭케르크 근처 독일 선박 공격하는 데 한 번 투입하고 전부 뒷전으로 돌렸으며, 해당 비행대는 스핏파이어로 기종 전환하게 된다. 안습의 안습...
물론, 연합군에서도 무작정 미운오리가 된 것은 아니었다. 태평양 전선에서 그야말로 적 멀티를 바로 탈취해서 초반 버티기를 해야 하는 과달카날 전역에서는 캑터스 비행단에 배속되어 분전한다. 당시 미군은 해병대의 와일드캣, 던틀레스, 육군의 P-40, 그리고 P-39 정도 밖에는 없었고 이것들로 당시 일본군의 숙련된 조종사들과 객관적으로도 비행성능이 우월했던 제로센을 상대했던 것. P-39는 저공에서 그럭저럭 쓸만한 성능을 이용해 주로 저공을 커버하는 방공전투기 혹은 해상공격(일본군의 수송선 등)에 사용했으며 덕분에 사보 섬 해전에서 탈탈 털려서 위태위태했던 헨더슨 비행장을 지켜내는 데 일조를 했던 것이다. 중간에 프로젝트가 산으로 가는 바람에 미운오리새끼가 되어버렸으나 그나마 태평양에서는 가장 위태로운 상황에 가장 중요한 역활을 해낸 셈이다. 당연하게도 P-38이 도착하자 버려지기는 했지만(...)
'''그러나...'''
3.3. 미운 오리새끼, 백조가 되다
[image]
1942년, 소련에 공여된 P-400(영국에 랜드리스 되었던 모델)[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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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소련 공군에 공여되는 P-63 킹코브라.
'''서부전선과 달리, 동부전선에서 P-39는 전혀 다른 물건이 되었다!'''
이곳의 공중전 양상은 지상군을 지원하는 공격기와 이 공격기들을 노리고 달려드는 전투기, 그리고 이런 적 전투기들을 가로막는 호위기끼리의 도그파이트였고, 대부분의 공중전이 고도 2,000m 이하의 저공에서 벌어지는 독소전쟁의 하늘이 바로 P-39가 제 실력을 발휘할 전장이었던 것이다.
호위기로는 물론이고 폭장하여 공격기로도 활용가능한 범용성에 미제다운 튼튼한 맷집, 높은 생존성, 통상탄으로도 전투기고 공격기고 폭격기고 한방에 두 동강내는 강력한 '''브라우닝(Browning)''' M4 37mm 기관포의 파괴력에 소련 공군은 홀딱 반하고 말았다. [11] 그래서 전쟁 후에도 서방 세계에서는 신통치 않은 전투기로 평가되었던 이 기체가 소련에서 지상공격이나 했을 걸로 생각했지만, 냉전이 끝난 후 소련측 기밀 문서가 풀리면서 경악할 만한 사실이 드러난다. 소련군은 이 기체를 '''적 항공기와 싸우는 게 전문인 방공군에서 굴렸던 것이다!!'''
기수에 장착된 M4 37mm 기관포는 분당 150발의 발사속도에 장탄수도 30발 밖에 안 됐지만, 항공기에 '''한 발만 맞추면 두 동강을 내버리는''' 가공할 위력을 자랑했다. 미국은 37mm 철갑탄을 소련에 공급하지 않았지만, 공중전은 고폭탄만으로도 충분한데다가 지상지원용으로도 위력이 대단했던 것이다. 독일군이 운용한 동급의 무기로는 MK 103과 M K108이 있었는데, 비록 구경은 7mm작지만 미넨게쇼스라는 대량의 작약이 들어간 탄종을 시용해 고폭탄 자체의 위력은 M4보다 뛰어났다. 그러나 MK 103은 150kg가까이 되는 중량과 탄속을 높이기 위해 사용한 많은 장약에 의한 큰 반동으로 Bf109등의 소형 전투기에는 장착할 수 없았으며, MK 108은 탄속이 540m/s에 불과해 표적에 명중시키기가 어려웠다.
특히 소련은 공여받은 P-39의 성능 향상을 위해 현지 개조도 했다. 소련 공군은 이전부터 전투기들에게도 20mm 기관포를 표준장비화 할 정도로 전투기의 화력에 집착한 화력덕후였으므로 과감하게 주포인 37mm 기관포와 기수의 12.7mm 기관총 2정만을 남기고 주익의 기관총[12] 은 철거해버렸다. 이로서 500kg 이상 몸무게를 줄여 약점 중의 하나인 느린 발과 짧은 항속거리를 어느 정도 개선할 수 있었고, 선회력도 향상되었다. 또한 복잡한 화기관제장치가 하나로 단순화되어 정비가 쉬워지고 포 발사 가스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미국의 선심으로 조종석 전면에 방탄유리를 도입하여 더욱 생존성을 향상시킬 수 있었고 몸무게도 좀 더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P-39를 몰던 미국이나 영국 등 서방측 연합군 파일럿들은 형편없는 고공성능 뿐 아니라, 엔진이 중앙에 배치된 '미드십' 기체의 비행특성 때문에도 애를 먹어야 했다. 하지만 소련 공군에는 이미 (짜리몽땅한 기체 덕분에) 비슷한 비행특성을 지녔던 폴리카르포프 I-16를 몰아보았던 조종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소련 조종사들은 P-39의 까탈스런 비행특성에도 그리 어렵지않게 적응하여 기체의 제 성능을 끌어낼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독일군의 입장에서는 동체 중앙에 안정적으로 장착되어 탄도와 정밀성까지 좋은 37mm 기관포탄은 그야말로 '''한방만 맞으면 사망'''급의 재앙이었다. 덕분에 소련의 에이스들 중 P-39로 10기가 훌쩍넘는 격추기록을 세운 이들이 득시글대는 최고의 에이스 메이커로 군림하게 되었다. 당장 소련측에서 50대 이상을 격추한 에이스 중 두 명이 P-39로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이 수치는 '''역사상 모든 미제 전투기로 올린 격추 기록 중 최고치다.''' 반면에 전후 독일 에이스들은 모든 면에서 뒤떨어지는, 가장 만만한 기체였다라는 소감을 말하기도 했다. 다만 이 부분은 조종사 개인의 주관이 어느정도 반영되어있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는 있다. 가령 P-38 라이트닝의 경우 갈란트같은 경우에는 가장 만만한 기체라고 평가했지만 슈타인호프같은 경우에는 제법 위협적인 상대로 평가했다.[13]
4. 평가와 후일담
이러니 저러니 해도 9,500여대나 생산되어 미국의 생산력을 체감할 수 있는 전투기. 다만 좀 더 고성능으로 고쳐달라고 NACA에 의뢰했더니 고공에서는 쓸모없는 바보로 만들어 버려서 사장 이하로 열 좀 받았을 듯. 게다가 서부전선의 공중전은 고고도에서 벌어진 탓에 이 기체의 잠재력이 나타날 수가 없었던 전장이었다.
애초에 만약 2단 과급기를 떼어버리고 이녀석을 뚱보로 만드는 개악이 없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뛰어난 성능을 보였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도 에어라코브라의 저고도 기동성은 어느정도 괜찮다고 평가되며 속도도 대전 초반 등장 시기 기준에선 쓸만했다. 그런 녀석의 체중을 대폭 감소시키면? 중량이 감소하니 추중비가 상승하고 추중비가 상승하니 상승력과 속력도 좋아졌을 것이다. 또한 중량 감소로 익면 하중이 작아져 기동성이 더욱 좋아졌을 것이다. 미제 2단 과급기는 타 기체들이 보여주듯 뛰어난 성능을 가졌고, 에어라코브라의 고고도 성능을 대폭 향상시켰을 것이다. 장갑이 감소한만큼 지상공격중 손실률이 커졌겠지만, 킹코브라를 보면 그래도 잘 써먹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애초에 이런 점을 해소한 것이 킹코브라다. 물론 동체 길이나 주익의 길이 등이 차이점이 있지만 대전 초기에 저런 물건이 등장했다면 미군기 역사에 한 획을 그었을지도 모른다.
생산량 중 절반 이상을 쓸어간 소련 이외에도 자유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이탈리아의 바돌리오 정부 등 전선 뒤쪽에서 어영대는 잉여스런 연합국 공군에 뿌려져서 전투기에 목마른 자들의 갈증을 달래주었다.
1943년 후반부터 고고도 성능을 향상시킨 사실상의 최종개량형인 P-63 킹코브라도 등장했지만 역시 짧은 항속거리와 P-51 머스탱보다 느린 속도로 인해 이 물건도 3,303대라는 전체 생산량의 70%를 소련이 쓸어담아가서 쏠쏠하게 잘 써먹었다. 참고로 킹코브라란 이름은 후에 벨이 코브라를 대규모 업그레이드한 버전에도 쓰였으나 '''아무도 사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미 공군의 LWF 사업 때도 노스롭은 YF-17 코브라를 들이밀었으나 또 YF-16에게 밀려 패배했다.[14] 아무래도 '코브라'라는 이름은 전투기에 쓰기에는 마가 낀 모양. 불굴의 벨 항공사는 끝까지 코브라라는 이름을 포기하지않고 결국 최초의 공격헬기에 코브라란 이름을 붙여 성공시켰다.
제트기 시대에 들어선 이후에도 소련 공군이 37mm 기관포에 집착했던 이유 또한 이 기체가 보여준 강력한 성능이 원인이라고 한다. 사실 MiG-15, MiG-17에 탑재된 N-37은 IL-2 37, Yak-9T에도 탑재되었던 NS-37을 제트기에 맞게 개량한 것이다. 덤으로 M4의 설계자는 다름아닌 '''존 브라우닝''' 선생.[15]
여담으로 2차대전이 끝나고 소련에 남아있던 P-39 중 소수가 한국전쟁 때 북한에 넘겨져 조선인민군 공군 마크를 달고 미군을 공격했다는 일부 미군 조종사들의 증언이 있다. 다만 이를 증명할 구체적인 자료가 존재하지 않아 확증은 어려운 상황이다. 참고로 80년대에 동네 문방구에서 팔던 손바닥만한 1천원짜리 무기백과 중에, 6.25때 북한군 야크기라며 P-39와 매우 흡사한 사진을 실어놓은 책이 있기는 했다.
5. 미디어에서
- 워 썬더에서 P-400, P-39, P-63이 나온다. 63은 고도 3000미터까지는 빠른 상승력, 37mm의 강력한 화력이 있지만 독일이나 일본에게 얻어터지기 딱좋은 안습한 기체. 그래도 옆동네 Yak-9T/Yak-9K 와 비교했을때 비행성능은 떨어지더라도 P-39 시리즈는 BR값 3.0부터 시작하기에 고성능 기체들을 만나는 일이 적어서 37mm 기관포로 적 폭격기 요격에 사용하면 쏠쏠한 재미를 볼 수 있다. 튼튼한 폭격기들이라도 37mm 두방 맞으면 골로간다.
- 월드 오브 워플레인에서 미국 프리미엄 전투기에 P-39N-1이 6티어, 함재기 사양인 XFL-1이 5티어로 등장하며, 소련 프리미엄 전투기에 P-39Q-15가 6티어로 등장한다.
- 히어로즈 인 더 스카이 에서도 미군 육군전투기 정규트리에 등장한다. 하지만 HIS온라인의 시스템상 37mm 기관포 따위는 구현되어 있지 않아서 아무도 탑승하지 않는 버려진기체가 되었다.
- 전함소녀에서 소련군 에이스 알렉산드로 포크리시킨 기체가 함재기로 등장한다. 화력을 2나 올려주는 강력한 기체다.
- 모바일 전투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인 Gunship Sequel WW2에 전투기로 등장한다.
미군 3티어 전투기 P-39 에어라코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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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 랜드리스된 프리미엄 전투기 P-39 에어라코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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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속도 이하로 내려가면 추락하는 최하한 속력을 뜻한다.[2] 이 속도 이상으로 올라가면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최상한 속력을 뜻한다.[3] 연장 샤프트가 조종석 아래를 지나 내치차로 연결된 프로펠러를 돌리는 방식.[4] 단, NACA는 어디까지나 육군항공대의 헨리 아놀드가 의뢰한 속도향상에 대한 조언을 하였을 뿐이고 실제 설계변경을 결정한 것은 이를 제안한 벨과 그 제안을 받아들인 미 육군항공대였다.[5] 그런데 시제기에서 실제 양산기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방탄판을 비롯한 방탄, 내탄 설비가 추가되는 것은 2차 대전시기의 전투기라면 당연한 일이다. 특히 이 2차대전 직전에서 전쟁초기까지 개발되던 많은 기종들이 실제 전쟁의 경험의 결과로 참고로 개발 중간에 무장과 방어력의 강화를 요구받은 경우는 많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P-39에 방탄장갑으로 추가된 무게는 111kg 정도라고 한다. 물론 자동방루 연료탱크나 방탄유리 등이 더 붙어야 했으므로 무게는 조금 더 늘었을 것이다. 참고로 F4F 와일드캣의 조종석 방탄장갑 무게는 68Kg, F6F 헬캣의 경우 96Kg 정도다. 물론 이 외에 연료탱크와 오일쿨러 주변의 방탄장갑이나 방탄유리, 연료탱크의 자동방루설비 등은 제외한 무게다. 그 작은 Bf109도 기본적인 방탄장갑 방탄유리를 달고 날아다녔고, 스핏파이어도 방탄장갑 방탄유리에 연료탱크와 콕핏 사이엔 강철제 방화벽도 설치하고 날아다녔다. 만일 실험기 성격의 시제기에 애초부터 방탄설비가 장착되어있지 않았다면 이는 특별히 많이 늘어난 것도 아니라는 것. 굳이 따진다면 P-39의 경우 엔진이 조종석 뒤쪽에 위치하는 탓에 조종석 전면의 방탄장갑 면적이 더 넓게 필요해 다른 기체보다는 조금 더 많은 방탄장갑이 사용될 수는 있지만 그 차이는 많이 잡아도 50kg 미만일 듯. 하지만 그걸 못 버틸 정도로 원래 설계가 여유가 없었다면 결말은 F2A 버팔로나 A6M2 짝이 날 수밖에 없다. P-39가 애초 그런 정도로 휘청일 기체도 아니었고. 애초 개발 컨셉부터가 '총 중량 1000lb 즉 450kg 이상의 무장과 탄약을 탑재하고도 빠르게 상승해 고공에서 고속으로 비행하며 적 폭격기를 요격할 수 있는 전투기'였다.[6] 다만 고작 방탄판이 1,000kg씩 될리가 없는데(이정도 개량이면 그냥 전차다) 중량이 거의 2배가 된 걸 봐서는 이상한데서 손을 봐서 기체를 망친듯하다.[7] 애초 시속 10마일 정도의 속도차이를 이유로 NACA 풍동시험을 지시한 헨리 아놀드 사령관도 굳이 따지면 당시 미 육군항공대의 폭격기무적론의 적극적 주창자는 아니어도 동조자 정도는 되었는데, 그것이 P-39의 이런 당황스런 개악과정과 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8] '스펙상'으로는 그냥 그런 정도다. 초기형인 P-39D도 우수하지는 않지만 대충 해군의 와일드캣 정도는 된다. 그리고 후기형인 P-39M이나 P-39Q의 경우 17m/s, 19m/s 이므로 꽤 좋다. 어쨋든 원래 요격기를 목표로 개발한 물건이라 스펙상 숫자 자체로 완전한 x망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봐야 실제로 올라갈 곳이 없으니 그저 종이 위의 숫자일 뿐.[9] 렌드리스 물자로 광고를 때린 거다...[10] P-400은 무장이 37mm M4대신 HS.404 20mm 이스파노 기관포로 바뀐 버전으로 영국에 공여되었다가 영국이 소련으로 재고 처리를 한 것이다.[11] 대전기 주력 전투기 Yak-9 또한 자국제 37mm, 45mm 기관포를 달고 대지공격임무에 편성된 예가 있다.[12] 버전에 따라 7.62mm 기관총 4정 혹은 12.7mm 기관총 2정[13] 재미있는 점은 정작 갈란트는 라이트닝에게 격추당할뻔한 적이 있고 슈타인호프는 라이트닝을 여러 대 잡아먹었다고 한다.[14] 다만 YF-17은 운 좋게도 해군이 관심을 보여 지금의 F/A-18으로 재탄생하였다.[15] 부무장인 7.62mm 기관총(M1919)과 12.7mm 기관총(M2) 역시 브라우닝이 설계한 기관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