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럼 요새

 

Fort Drum
1. 개요
2. 설계
3. 건설
4. 특징
4.1. 무장
4.1.1. 주포
4.1.2. 보조화기
4.2. 사격관제 및 관측, 통신장치
4.3. 방어력
4.4. 시설
5. 실전
5.1. 태평양 전쟁 개전
5.2. 일본군의 요새 공격
5.3. 바탄 반도의 함락
5.4. 파괴되는 요새들
5.5. 드럼 요새의 탈환
6. 그 이후
7. 기타
8. 관련 문서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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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럼 요새의 현역시절 컬러 사진
필리핀의 수도인 마닐라가 있는 마닐라 만의 입구인 코레히도르 섬 근처에 있는 옛 미 육군해안포 요새.
이름의 유래는 미국-멕시코 전쟁남북전쟁에서 활약한 미 육군준장 리처드 C. 드럼(Richard C. Drum) 장군이다.[1]
특이한 모양으로 인해 콘크리트 전함이나 군함섬으로 불린다.

2. 설계


1898년에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필리핀을 획득한 미국은 곧바로 이곳을 서태평양 상의 항구적 거점으로 만들기 위한 방위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시 요새위원회(Board of Fortifications) 위원장을 담당하던 윌리엄 태프트에 의해 요새건립계획을 추진했다.
그에 따라 1909년에는 마닐라 만 입구에 있는 4개의 섬인 코레히도르, 카발로, 카라바오, 그리고 엘 프레일을 요새화하는 계획을 입안했다. 이 요새들의 목표는 적함의 마닐라 만 출입을 막고 필리핀과 미국 군인들이 미국 본토에서 구원군이 당도할 예상 기간인 6개월 동안 바탄 반도에서 지연전을 펼치는 것을 지원하는 것이다.
왜 항구를 방어하기 위해 요새를 건설하는가 하면, 비행기가 발전하기 전까지는 해안을 지키는 방법은 강력한 해군 함대를 보유하거나 근처 요지에 해안요새를 건설하고 해안포를 배치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지상군이 동원되는 경우는 이미 적 함대가 해안선을 장악하고 상륙정으로 병력을 상륙시키는 상태로 이미 항구는 파괴되었거나 점령당해서 아군이 밀리는 상황인 경우에 한한다.
그런데 함대를 해안 방어에 쓰자니 함대라는 전력의 특성과 장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활용법, 즉 기동하면서 적 함대를 포착해서 격멸하거나 항로 순찰을 통해 통상로 안전을 확보하는 업무를 수행하기에도 함선이 모자란데 해안 방어 임무에 묶어놓을 함선을 배치할 여력이 없게 마련이고, 항구를 방어한답시고 항구 안에 정박해서 함포사격만 하려면 오히려 적 함대에 의해 독안의 쥐 신세가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회피기동을 할 수 없으므로 방어력이 반감되는 등 함대의 기능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낭비하게 되는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중요한 항구마다 해안요새를 건설해놓으면 적은 수의 함선만 있더라도 요새와 협력해서 장기간 항구를 방어할 수 있으며, 설사 배 한척도 없는 상황에서 적 함대와 대결하더라도 '''요새 특유의 중장갑 및 중무장 + 해안포 특성상 함포보다 정밀한 사격이 가능 + 중요지점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무시하고 지나갈 수 없음'''이 합쳐지므로 상당기간 독자적으로 버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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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닐라 만 지도. 만 입구에 표시된 4개의 별이 요새화된 4개의 섬이다. 4개의 섬 북쪽에 위치한 반도가 바탄 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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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화된 4개의 섬들의 위치. 붉은 타원안의 섬이 드럼 요새다.
당시 해안포를 미 해병대와 함께 관할하던 육군의 해안요새 건설도 이런 논리를 당연히 따랐는데, 물론 크기와 중요성에서 코레히도르 섬이 압도적으로 중요했고, 당연히 건축역량이 집중되었지만, 요새 건축과 형상에 있어서 가장 독특하고도 특이한 양상을 보였던 것은 4개의 섬중 가장 작은 엘 프레일 섬, 바로 드럼 요새였다.
일단 다른 3개의 요새들이 전통적인 구세대 요새의 모습인 흉벽과 포좌와 대피호를 가지고 있는데 반해, 드럼 요새가 들어설 엘 프레일 섬은 작은 면적의 바위섬인 탓에 그런 여유공간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었다. 그래서 원래 계획상으로는 엘 프레일 섬에는 기뢰 설치 및 통제시설과 이걸 보호할 포곽 수준의 해안포대 몇 문을 배치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마닐라 만의 입구를 완전히 봉쇄하기 위해서는 해당 지점에 반드시 강력한 요새가 있어야 했는데, 기존 방식대로 하면 바위섬 위에 잘 해봐야 소형 대포 몇 문을 설치하는 선에서 끝날 것이고, 이런 식의 요새는 적 함대가 밀려들 경우 한순간에 날아가버리니 건설하나마나란 결론이 나왔다.
결국 한정된 공간 안에 강력한 요새가 요구하는 모든 설비들을 탑재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효율적인 공간활용이 필요했고, 기나긴 고민 끝에 설계진들이 다다른 결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마닐라 만 방위를 위한 요새라는건 적 전함을 상대하는 고정포대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전함 역시 바다 위에 떠있는 부유포대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요새를 전함처럼 만들어도 괜찮지 않을까?

한정된 크기와 배수량의 틀 안에서 합리적인 설계를 통해 최대의 전투력을 끌어내야 하는 전함의 설계는 그 당시의 드럼 요새가 처한 상황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설계는 진전을 거듭하여, 배를 만드는 강철 대신 철근 콘크리트로 함체를 만들고 당시의 전함과 동일한 새장형 마스트를 설치하며, 12인치(305mm) 2연장 해안포탑을 2기 설치하는 것으로 설계를 크게 변경한다.
그리고 이 계획을 받아든 미 육군에서는 장래를 대비하기 위해 당대 전함들의 12인치 함포를 능가하는 14인치(356mm) 해안포를 2연장 포탑식으로 2기 탑재하는 것으로 계획을 확장해서 결국 강력한 콘크리트 전함을 드럼 요새의 최종 설계안으로 결정했다.

3.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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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 전 엘 프레일 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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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럼 요새의 단면도
요새 건설은 엘 프레일 섬의 바위들을 수면 높이까지 남기고 모두 깎아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이유는 기존 암석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포구만 뚫어서 사용하기에는 형태와 강도면에서 모두 부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아있는 바위를 기반으로 하여 콘크리트제 벽체가 올라가는 방식으로 건설이 진행되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1919년 5월에 드럼 요새는 약 10년간의 공사를 마치고 정식으로 요새로써 기능하기 시작했다.
준공 이후 전함과 비슷한 크기와 외관을 가진 드럼 요새의 특징 때문에 많은 미 해군 장병들이 요새를 “USS Drum(USS는 미 해군 소속 군함을 의미함)”이라고 부르기도 했고[2] 마닐라를 방문하는 선박들이 종종 '''요새를 만내에 떠있는 전함으로 인식'''하여 신호를 보내오는 일도 잦았다. 그럴 법도 한 것이, 드럼 요새의 생김새는 모니터함과 매우 흡사하다.

4. 특징



4.1. 무장


요새의 무장체계는 주포, 부포, 대공포 등으로 구성된다.

4.1.1. 주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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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럼 요새의 14인치 40구경장 2연장 주포탑
주포는 14인치 2연장 주포탑 2기로 총 4문으로 구성한다. 해당 화포는 미 육군의 14인치(356mm) 40구경장 M1909 2연장 해안포탑으로[3][4] 중량이 포탑 1기당 1,053톤에 이르며, 상하각도는 -0도 ~ +15도까지 조정이 가능하고, 좌우각도는 360도 회전이 가능한 포탑이나 1번 포탑은 위치 및 후방에 있는 2번 포탑으로 인해 방해를 받으므로 230도로 제한된다. 주포의 위력은 포탄중량 548.39kg의 주포탄을 포구초속 721.76m/s으로 최대사정거리 20.76km까지 날릴 수 있으나, 실전에서는 17.55km 정도를 한계로 보고 있었다. 포탑은 전기구동방식으로 모든 행동을 수행하며, 고장시 인력에 의한 수동도 가능하긴 하지만 반응속도가 매우 느려지므로 실전에 쓸 수 없는 지경이라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배치방식은 당대의 전함과 완전히 같은 2연장 360도 선회회전포탑방식으로 1번 포탑 후부에 계단식으로 2번 포탑을 설치했으며, 하부의 탄약고까지 전함과 동일한 원통형 바벳 세트로 구성되었다. 배와 달리 상부가 무거워지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포탑의 장갑은 당대의 전함들보다 훨씬 더 두껍게 만들어서 전면 16인치, 상면 4.5에서 6인치였으며, 바벳은 9인치에서 16인치의 두께를 자랑했다. 그리고 방어력 증대를 위해 밖으로 드러나는 포탑 외부에는 승무원 출입구 같은 개구부를 만들지 않았으며, 사격관측을 위한 잠망경 3기를 살짝 꺼낼 시설만 존재했다. 주포탑들이 공용으로 사용하는 탄약고는 의외로 장갑이 얇아서 2인치에서 3인치 수준인데 함선과는 달리 고정된 요새이며, 외부를 강력한 콘크리트 장갑으로 보호받으므로 어뢰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없기에 장갑이 얇은 것이다.
전반적으로 강력한 장갑을 자랑하지만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포탑의 크기가 바벳에 비해 작기 때문에 포탑으로 덮어서 보호할 수 없는 바벳 상면 부위가 외부로 노출되는데, 이 부위를 덮는 장갑은 포탑에 비하면 얇기 때문에 전함이 쏘는 강력한 주포탄에 의해 관통당할 위험성이 존재했다. 그리고 잠망경의 경우 관측을 위해 포탑 외부로 8인치 정도 돌출하게 되는데, 이를 보호하는 장갑은 고작 0.75인치 수준이라서 적의 공격에 의해 쉽게 손상된다. 덕분에 실전에서는 잠망경 부위의 손상이 심해서 자주 교체해야 했으며, 외부 관측에 지장을 받았다고 한다.

4.1.2. 보조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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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럼 요새의 6인치 부포곽과 3인치 대공포좌
부포로는 6인치 포 4문을 탑재했다. 이 역시 당대의 전함과 마찬가지로 요새 측면에 포곽식으로 각 현당 2문씩 설치했다. 해당 화포는 미 육군의 6inch(152mm) 45구경장 M1908 해안포를 원형으로 한다. 이 대포는 상하각도는 0도 ~ +15도가 가능하고 좌우각도는 120도가 가능하다. 화포의 위력은 40.82kg의 포탄을 포구초속 471.8304m/s 으로 최대사정거리 13.48km까지 날릴 수 있다. 그러나 드럼 요새에 설치된 것은 수직으로 2층 방식의 포곽형인 M1908 MII기 때문에 구조상 상하각도가 최대 +12도로 제한되며, 실제로는 장전문제로 인해 +10도가 한계였다. 이 때문에 실제로는 +10도일 때 9.32km의 사정거리만 가능하며, 전쟁이 터진 이후에 더 긴 사정거리가 필요하자 각도한계를 +12도로 해서 10.42km의 사정거리가 가능해졌다.
포곽의 방어를 위해서 포곽 자체는 6인치의 장갑을 부착했고, 설치 방식도 요새 측면에 함몰하는 형식을 사용하여 요새 본체의 콘크리트 장갑의 보호를 받도록 했다. 그러나 강력한 장갑으로 보호받는 요새의 노출된 면적 중 방어력이 가장 약한 곳인지라 실전에서는 이 부분에 공격을 집중적으로 받는 바람에 위험에 처한 상황이 몇 번 발생했다.
2번 주포탑이 후방으로 사격이 가능하긴 하지만 드럼 요새의 후방, 특히 요새에 근접한 수역지대는 요새의 화기가 커버하지 못하는 사각(死角)이다. 그 이유는 장거리라면 2번 주포탑의 후방 사격으로 대응이 가능하나, 요새에 근접하게 되면 2번 주포탑이 포신 상하각도의 한계 및 마스트 및 부수시설의 방해로 인해 사격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부포곽의 경우에도 정후면에서 근접하는 적을 상대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후방에 별도의 부포를 설치하는 것을 결정했으나, 전쟁이 터진 직후에나 간신히 완성했다.
후방에 설치한 부포는 3inch(76mm) 55구경장 M1903 해안포를 개량한 M1906이다. 해당 화포는 원본인 M1903의 경우에는 상하각도는 0도 ~ +16도가 가능하고, 좌우각도는 360도가 가능하며, 포탄중량 6.8kg의 포탄을 포구초속 852.83m/s으로 최대사정거리 10.31km까지 날릴 수 있으나, 요새 후방 상면에 콘크리트 방어물과 조합해서 설치했다는 특성상 실제로는 상하각도 및 좌우각도에 제한이 붙으므로 사정거리가 약간 짧았다. 그리고 후방 부포의 경우에는 원래 설계에 반영하지 않은 긴급설치였고 설치시기도 1942년 1월 12일로 전쟁중인 상황이라 상세한 구조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놀라운 것은 일본군이 바로 다음날인 1942년 1월 13일에 기존에 파악해놓은 약점인 요새 후방에 근접해서 상륙하기를 실행하기 위해 소형 선박을 이용해서 근접하는 것을 확인하고 발포했으며, 격퇴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 당시 상황은 설치가 막 끝난 상태라서 콘크리트가 아직 완전하게 굳지도 않았으므로 방어력이 매우 빈약하다는 약점을 가진 상황에서 성공적인 전투를 수행했다. 그리고 이 발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적에게 포격을 한 최초의 미국 해안포라는 기록을 남기게 된다.
그리고 어뢰정 격퇴용 및 대공포 용도로 3인치 포 3문을 요새의 상부에 설치했다. 해당 대포는 미 육군의 3인치 M1917 대공포다. 여기에 더해서 M2 브라우닝 중기관총의 수냉식 버전 4정과 미 육군 항공대에서 넘겨받은 공랭식의 M2 중기관총 2정이 급조한 대공기관총좌에 설치해서 운용했다. 당시의 기준을 생각한다면 적절한 대공화력이지만,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빈약한 화력이었다.
대인용 화기로는 요새 주둔병이 사용하는 M1917 브라우닝 수냉식 기관총 13정이 주력으로 활약했고, 요새로 증원된 미 해병대의 톰슨 기관단총 4정이 추가된다. 개인용 화기로는 스프링필드 M1903이사카 M37을 쓴다.

4.2. 사격관제 및 관측, 통신장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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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럼 요새의 새장형 감시탑
탄착관측 및 사격지휘를 위해 당대의 전함들이 채용한 높이 약 20m의 새장형 마스트가 설치되어 있었고, 야간 전투를 위해 3m 직경의 서치라이트 2기도 배치했다. 그리고 대공포용 이동식 60인치 서치라이트도 보유했다. 이외에도 요새가 위급상황에 몰릴 때 긴급연락 및 예비용으로 쓰기 위해 12인치의 해안 조명용 서치라이트를 보유한다.
통신장치의 경우에는 각 요새를 연결하는 해저케이블을 써서 전화연락이 가능했다. 이 시스템은 일본군의 공격이 격렬해지는 상황에서도 다른 요새의 전화단자에 이상이 생겨서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끝까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그 외에는 단파라디오를 이용해서 연락을 받을 수 있으나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원시적인 봉화와 같은 신호용 램프를 사용한 연락이 야간에 이루어졌으며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는 신호를 일본군등 다른 존재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6인치 부포의 포신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사용방법은 6인치 부포의 포신을 미리 약속한 위치를 포구가 똑바로 바라보도록 상하좌우각도를 조절해서 움직인 후, 포미에 신호용 램프를 넣고 작동시키는 것이다. 미리 약속한 특정 방위에 위치한 관측원을 제외하고는 신호가 켜졌는지 꺼졌는지 여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보안 문제도 극복할 수 있었다.

4.3. 방어력


요새의 길이 80m, 폭 50m, 높이 13m로 전함보다는 작지만, 전함의 전반부와 비교하면 비슷하거나 큰 정도다. 이런 구조물을 구성하는 벽체의 두께는 10m ~ 13m에 천정의 두께도 약 7m로 대응방어는 물론이요, 당시의 전함 함포사격을 견딜 수 있다. 여기에 더해서 취약부위라고 판정된 곳은 3인치 ~ 4인치의 철판을 추가로 붙였다.
그래서 전술한 일부 약점부위을 제외하고는 자신이 가진 14인치 주포로 자신의 장갑을 사격해도 1발로는 절대로 관통이 불가능하므로 대응방어는 충분히 달성가능하며, 애초에 바다 위에 부유하고 있는 선박이 아니라 섬 위에 건조된 고정 구조물이므로 보통의 군함 상대로 쓰이는, 침수로 인한 침몰을 노리는 병기(흘수선을 노리는 어뢰공격 등)들에는 완전한 내성을 갖춘 것이나 다름없었다. 항공 폭탄도 철갑폭탄같은 것을 사용하더라도 몇 발의 피탄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요새의 장갑을 뚫으려면 재래식 병기로는 지진폭탄같은 크고 아름다운 폭탄을 정확하게 명중시키던지, 16인치 이상의 주포를 가진 전함이 드럼 요새의 주포탄이 닿지 않는 원거리에서 다량의 주포탄을 명중시켜야 한다. 육상의 화포로는 대형 열차포를 사용해야 이빨이 먹힐 것이다. 물론 핵폭탄을 쓰면 간단하겠지만 그건 2차대전 말기에나 미국이 간신히 몇 발 생산한 물건이라 추축국의 입장에서는 사용이 불가능하다.

4.4.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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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내부의 각종 시설
요새 내부는 3~4개의 층으로 구성되었고 240명의 주둔군을 수용할 수 있는 내무실, 식당, 발전실, 그리고 요새와 외부를 연결하는 갱도로 구성된다.
요새 내부의 창고는 주둔군이 장기간 생활 및 전투가능한 물자를 대부분 충분하게 적재할 수준으로 넓기 때문에 실전에서 매우 유용했다. 실제로 전쟁이 터진 후에는 1942년 2월의 어두운 밤에 있었던 보급을 끝으로 전투가 종료될 때까지 보급이 없었던 데다가, 드럼 요새의 보급을 담당한 넵튠이라는 보트는 일본군의 포격에 박살났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중 하나는 식수의 공급이었다. 다른 요새와는 달리 자체적인 샘물도 없었고, 다른 물품과는 달리 물은 평상시에는 외부에서 공급받으며 물이라는 것 자체가 요새 내부에 아무곳에나 적재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요새 내부에 금속으로 만든 물탱크를 넣어서 해결하려고 했으나, 그걸로는 포위당할 경우에 충분하지 않기에 추가적으로 평시에 요새 위에 나무로 만든 큰 물탱크 2기를 추가했으며, 전쟁이 터지자마자 해당 물탱크를 분해한 후, 요새의 동력실 아래의 공간에 이설하는 것을 맨 첫번째 임무로 할 정도로 빠른 처리를 했다. 그 후에는 14인치 주포탄의 장약을 담는 통을 물을 채운 드럼통 대용으로 해서 수백개를 사용했다. 원래 요새에는 구식의 담수제조기가 있었으나, 이걸 돌리려면 많은 연료가 들어가므로 실전에서 포위당한 뒤에는 사용이 어려웠다. 그래서 전투기간중에 식수문제는 상당히 부족했지만 전투원들의 절약으로 인해 간신히 해결이 가능했다.
식량문제의 경우에는 전쟁전에 자체적으로 30일 정도를 버틸 수 있는 전투식량을 확보한데다가, 전쟁대비용으로 비축한 식량도 있었고, 보급이 끊어지기 전까지 다른 요새에서 소량의 식량이 도착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양을 확보한데다가, 전쟁이 터지자 배급량을 절반으로 줄였으므로 전투 끝날때까지 식량부족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다.
유류문제의 경우에는 연료저장고가 상당히 크고, 전쟁이 터진 후에는 꼭 필요한 때만 엔진을 가동시켰으므로 항복시를 기준으로 할 때 아껴쓰면 30일 미만 수준으로 사용할 연료를 확보가능했다. 이렇게 절약한 이유는 상술했듯이 14인치 주포탑을 비롯한 모든 시설물이 전기가 끊어지면 사실상 사용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가급적 연료를 아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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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럼 요새 상부에 설치된 가건물
완공 이후에는 콘크리트 장갑 내부의 시설을 더 이상 확대할 수 없는 관계로 마스트 주변에 가건물을 지어서 늘어난 설비를 수용하거나 창고 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평시에는 환기 및 일광등의 이유로 인해 요새 주둔군이 내무반 중 일부를 가건물에서 운용했다. 전쟁이 터지자 가건물 안에 있던 시설물은 대부분 요새 내부로 이동했고, 가건물 자체는 공격에 의해 화재가 나지 않도록 철거가 시작되었으며, 남은 뼈대는 일본군의 공격으로 박살난다.

5. 실전



5.1. 태평양 전쟁 개전


요새 완성후 약 20년이 된 1941년 12월 7일에 일본진주만 공습으로 기습공격을 통해 태평양 전쟁을 개전하면서 미국은 전쟁에 뛰어들었다. 필리핀 역시 곧바로 최전선으로 돌변했으며, 12월 10일에 이르면 일본 육해군기의 공습으로 각지의 육해군 비행장과 어뢰정, 잠수함 기지 등이 괴멸되었고 22일에는 일본 육군중장 혼마 마사하루 장군이 이끄는 육군 16사단, 48사단, 65여단 등 합계 43,000명의 일본군 주력부대가 마닐라 북부에 상륙했다. 한편 미군과 필리핀군의 총지휘관인 미 육군대장 겸 필리핀 육군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이미 마닐라의 유지가 불가능함을 깨닫고 12월 23일 부로 각 부대에게 전쟁 전에 수립한 작계대로 바탄 반도로 후퇴하도록 명령했다.
맥아더가 이토록 쉽게 마닐라를 포기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일본군이 마닐라를 거점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마닐라 항이 기능을 발휘해야 하고, 마닐라 항이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입구인 마닐라 만을 장악해야 했다. 따라서 연합군이 코레히도르 섬과 다른 3개의 요새, 그리고 코레히도르 섬으로 이어지는 통로인 바탄 반도를 장악하고 있는 한 일본군의 마닐라 점령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이를 두고 '적은 병을 가지고 있지만 병마개는 우리에게 있다.'고 비유했지만, 어쨌거나 이 때문에 일본군은 싫든 좋든 마닐라 만 장악을 위해 막대한 희생을 치러야 했다.

5.2. 일본군의 요새 공격


12월 29일에 최초로 일본기에 의해 코레히도르와 다른 3개 요새에 대한 폭격이 있었고 해를 넘긴 1942년 1월 2~6일중 또다시 일본기의 폭격이 있었다. 이때 드럼 요새 및 다른 2개의 요새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코레히도르 섬만은 크기가 크고 중요한 시설이 있었으므로 폭격이 집중되었는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다만 미군의 대공포화도 이때까지는 만만치 않았기에 일본은 1942년 3월까지 항공기에 의한 공습을 중단했다.
대신에 일본군은 1942년 1월 25일부터 마닐라 만 남단의 카비테 군항 부근에 105mm 견인곡사포 4문과 150mm 견인곡사포 2문을 배치하기 시작했고 2월 5일부터는 드디어 만 입구의 요새에 포격을 시작했다. 첫날의 주 표적은 포대에서 가장 가까운 드럼 요새였는데, 약 103회 정도의 명중탄이 있었으나 앞서 언급한 가건물이 날아간 것을 빼고는 요새의 기능은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그날 이후 일본군은 만 입구의 4요새에 고르게 포격을 가해왔고 2월 중순에는 150mm 견인곡사포를 2문 더 증강하기도 했다. 물론 요새들 역시 그들의 요새포로 반격을 가했으나 정찰기 등을 날릴 수 없는 상황에서 일본측 포대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관계로 반격의 효용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2월말이 되자 일본군은 기존의 포대에서 포문 수를 줄이는 대신, 보다 요새들과 가까운 곳에 비장의 240mm 야포 10문을 배치하고 3월 15일부터 22일까지 약 1주일간 맹렬한 포격을 시작했다. 이것은 당시 일본 육군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 구경의 포병 화력이었는데, 덕분에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최남단의 프랭크 요새는 요새포 전부를 파괴당하고 완전히 기능이 정지되었으며 드럼 요새 역시 새장형 마스트대파되고 서치라이트와 대공포 전부를 상실한데다가 6인치 부포곽도 틈새로 포탄의 파편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14인치 주포탑은 전혀 손상 없이 멀쩡했으며 요새 외벽 역시 몇 군데 패인 것을 제외하고는 별 이상이 없었다. 본래부터 전함을 능가하는 방어력을 가졌던데다 요새의 특성상 사실상 '''가라앉지 않는 불침전함'''이었으므로 포탑의 장갑은 전함 이상이었기 때문에 240mm 정도의 화력으로는 이빨도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6인치 부포곽은 현지에서 파편 방어용 장갑을 최대한 붙였으며, 본의 아니게 일본군 포병의 포격 목표로 선정받아서 포탄을 뒤집어 쓴 새장형 마스트는 설령 멀쩡하더라도 더 이상 아군 사격관제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적의 포탄을 끌어들인다는 판정을 받아서 완전히 철거한다.

5.3. 바탄 반도의 함락


한편 이런 와중에 바탄 반도는 점점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다. 원래 바탄 반도 일대가 말라리아의 온상지나 다름이 없는데다가 반도 내부에 식량도 얼마 쌓지도 못하고 전쟁에 돌입했으며, 결정적으로 전시에 바탄 반도로 운송할 예정이었던 쌀등의 식량이 이동하지 못한데다가 피난민까지 바탄 반도로 들어와서 예상 계획보다 많은 인원이 식량과 물자 없이 반도에 들어가버린 것이 큰 문제였다.
덕분에 연합군은 식량부족과 정글의 악조건, 그리고 일본군의 야습 등으로 인해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1942년 3월말에 이르면 연합군 육해군 병력 중에서 전투수행이 가능한 병력 처음의 25%에 지나지 않았던데 비해, 일본군은 2선병력의 일부로만 진행된 1차 공격의 실패를 계기로 만주 등지에서 전력을 대폭 증강하여[5] 150문의 야포와 60대의 폭격기, 30대의 전차가 증원되었다. 물론 이 시점까지 중화포를 비롯한 미군의 화기는 어느 정도 충실했지만 식량부족으로 힘이 없고 말라리아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는 병력들이 제대로 싸울리가 없었다. 결국 4월 3일을 기해 일본군이 2차 공격을 감행해오자 바탄 반도는 결국 함락되고 말았으며, 남은 것은 만내에 있는 코레히도르 섬 외에 3개의 요새뿐이었다.

5.4. 파괴되는 요새들


4월 11일, 일본군은 바탄 반도 끝에 75mm~240mm에 이르는 각종 화포 110문을 방열하고 만내의 요새들에 대대적인 포격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지난 1월 이후 나타나지 않았던 항공기들마저 출현하여 매회 평균 50기 정도의 일본 육군 폭격기들이 수 일마다 한 차례씩 폭격을 했다. 게다가 지상과 공중에서 정확한 포격 관측까지 수반해서 정확한 명중탄이 날아오는 바람에 요새들의 피해는 점점 늘어났다. 물론 요새에서도 대공사격을 했으나 대구경 대공포는 초반에 박살난 상태고, 그 이후의 대공화기 주력이라고 볼 수 있는 M2 중기관총의 12.7mm 기관총탄으로는 항공기의 폭격 방해도 제대로 못할 수준이었다. 그리고 일본군의 지상 포대를 노리고 요새들이 역시 간간히 포격을 가하긴 했으나 여전히 관측 수단이 제한된데다 나날이 피해가 심해져서 반격은 이미 산발적인 몸부림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4월 29일은 천황히로히토의 생일이었다. 이 날까지 필리핀을 완전히 점령하라는 상부의 압력을 염두에 두고 일본군은 더욱 더 막대한 포격을 가해왔고, 특히나 성가신 드럼 요새의 포탑들을 박살내기 위해 글라이더에 폭탄을 매달아 직접 요새에 돌진시키는 카미카제 전법도 감행했다. 일단 사람이 탑승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조종했는지 글라이더는 요새 측면의 우현 부포 포곽에 명중해서 포곽을 통째로 날려버렸으나 다행히 부포의 탄약은 인화하지 않아 그 이상의 피해는 없었다.
그 후로도 4일동안 일본군은 쉬지 않고 포격을 계속했고 마침내 5월 2일에는 코레히도르 섬의 마지막 탄약고가 직격탄을 맞았다. 그 순간 10톤이 넘는 요새포의 포신이 하늘을 날 정도로 큰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런 식의 포격에서는 구시대 요새적 발상인 포대와 엄폐호 구성의 요새는 제대로 버틸 수가 없으므로 결국 장갑덮개가 없는 포대들은 차례차례 파괴되어 5월 5일에는 드럼 요새의 14인치 포탑과 코레히도르의 12인치 구포 1문, 155mm 견인곡사포 수 문을 제외한 전 화력이 완전히 정지되고 말았다. 한마디로 말해 드럼 요새 빼고는 중화기가 완전히 없어진 셈이나 다름이 없었고, 그날 밤, 일본군이 일제히 코레히도르 섬에 상륙했을 때 제대로된 방어를 하지 못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덕분에 일본군은 4시간이 되기도 전에 해안선의 방어진지를 돌파하고 사령부로 접근했다.
그리고 마침내 1942년 5월 7일, 이미 어뢰정 편으로 야간에 오스트레일리아로 탈출한 맥아더 장군을 대신하여 연합군 측의 총지휘관인 미 육군중장 웨인라이트 장군이 필리핀 전역의 연합군에게 항복 명령을 내림으로써 5개월에 걸친 마닐라 만 공방전은 끝을 맺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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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된 드럼 요새의 주포탑
하지만 웨인라이트 장군이 항복 메시지를 방송할 때까지, 드럼 요새는 마닐라 만에 남은 최후의 화력으로써 여전히 포격을 지속하였으며, 항복 방송이 들리자 주둔군은 주포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도록 파괴한 후 항복했다. 여기에 더해서 부포나 개인화기도 재사용이 불가능하도록 파괴하고, 탄약에는 바닷물을 부어버리는 등 최대한 파손했다. 결국 '''일본군은 최후까지 드럼 요새를 파괴하지 못했다.''' 그리고 교전 시작부터 항복할 때까지 드럼 요새에서 발생한 사상자는 부상자 5명 뿐으로, 이 중 병원에 입원할 수준의 부상자는 단 1명에 불과했다.

5.5. 드럼 요새의 탈환


코레히도르 공방전이 종결된지 약 2년 후, 전황은 다시금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변했다. 미군은 1944년 10월 20일에 레이테 섬에 상륙하고 레이테 만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서 필리핀의 탈환을 시작했고 1945년 2월 3일에 마닐라가 함락될 때까지 일본군과 격렬한 지상전을 펼쳤다. 마닐라에서 지상전이 격화되는 동안, 미국 해군 역시 함대 거점 확보를 위해 마닐라 만의 입구로부터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던 요새들을 하나하나 공략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문제는 드럼 요새였다. 2년 전의 코레히도르 공방전에서 최후까지 버텨냈던 드럼 요새인만큼, 이제 미군 측이 공격자로 입장이 바뀐 지금에서는 과거의 요새가 최대의 골칫거리가 되어있었다.
  • 요새의 14인치 주포와 6인치 부포는 2년전 요새가 일본군에게 넘어갈 당시 항복 과정에서 요새 주둔군들이 꼼꼼하게 파기해 두었고 그 뒤 일본군이 수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포격의 위험은 없었다. 다만 총기류는 소지하고 있어 일본군들이 만을 지나가는 선박에 총격이라도 가해오면 항구의 기능도 완전히 발휘되지는 못할 것이 분명하기에 반드시 요새를 함락시켜야 한다.
  • 요새의 콘크리트 장갑은 그대로, 매우 튼튼해서 16인치 이상의 주포를 가진 전함을 동원해도 장시간 포격을 가해야한다.
  • 폭격의 경우도 최소한 1000파운드 이상급의 철갑폭탄을 요새 상면에 십수발 이상 정밀 폭격하는게 아니면 역시 이빨이 안먹힌다.
  • 면적이 좁고 사방이 절벽이나 마찬가지라서 공수부대에 의한 강습이나 해병대에 의한 상륙이 매우 어렵다.
  • 특수부대를 동원해 침투를 시키더라도 요새 내부로 들어가는 진입로가 한정된데다가, 내부구조가 매우 복잡해서 방어측에게 유리하므로 장시간의 총격전만 발생하고 희생이 커질 우려가 높다.
그러나 요새를 제압하기 위해 16인치 주포를 가진 최신예 전함이든, 2000파운드 철갑폭탄을 장착한 함재기든 아쉬울 것 없이 동원할 수 있었던 미군이 선택한 방법은 의외로 소박했다. 1945년 4월 13일, 미군은 2척의 상륙정에 각각 1개 소대씩의 병력을 탑승시킨 후 조용히 요새로 접근하도록 했다. 1개 소대는 모조리 저격수로 구성되어 요새의 어느 틈바구니에서든 일본군이 나타나면 바로 쏴버리도록 하였고 다른 1개 소대는 요새에 장착할 폭약을 잔뜩 짊어진 공병들이었다. 요새에 접안한 공병들이 저격수들의 엄호 하에 폭약 설치 작업을 마치자, 이번에는 또다른 상륙정 1척이 다가와서는 요새의 환기구를 통해 약 '''11,000리터'''에 달하는 기름을 투입했다.
이 작업까지 끝나고 모든 상륙정들이 안전한 곳으로 물러나자 공병들이 장치해둔 폭약을 기폭시켰다. 다음 순간, 요새 후방부에 설치된 직경 1m, 무게 1톤에 육박하는 두꺼운 강철제 출입문이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고 요새는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모든 구멍에서 엄청난 화염을 내뿜었다. 워낙 강력한 화염 덕분에 미군들이 요새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로부터 5일이 지난 후였고, 그들은 요새 안에서 불타 죽은 65명의 일본군 병사들을 발견했다.
기록뉴스 동영상 (Destruction of Fortifications on Caballo Island & Fort Drum Concrete Battleship) 영상의 1분 50초부터 이 드럼요새의 작전이 나온다.

6.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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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럼 요새의 2009년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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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럼 요새 내부의 모습
탈환 작전시 발생한 대폭발로 인해 요새 내부의 모든 장비와 시설은 파괴되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 드럼 요새는 그냥 콘크리트 덩어리에 불과했다. 게다가 이미 제2차 세계대전의 경험, 그리고 핵무기의 개발로 인해 이미 이런 종류의 요새는 돈만 들어가지 실제 능력은 거의 없는 구닥다리로 전락했으므로 미군도, 그리고 필리핀군도 더 이상 이 요새를 복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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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형 등대가 설치된 드럼 요새
그 이후 드럼 요새는 검붉게 녹슨 포탑을 가진 채 그대로 방치되었으며, 마닐라 만에 진입하는 배를 위해 간이형 등대가 건설된 것 외에는 파괴된 상태 그대로인 모습으로 남아있다.

7. 기타


대체역사소설 타임라인-191 시리즈에서도 드럼 요새가 출연한다. 다만 건설한 나라는 영국이고 하와이에 설치되었다.[6] 북부와 독일이 연합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동일한 방법으로 드럼 요새를 북부가 탈환한다.

8. 관련 문서



[1] 미국 본토에도 같은 이름의 육군 주둔지가 있는데, 이쪽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미 육군 중장 휴즈 A. 드럼(Hugh A. Drum) 장군의 이름을 땄다. 여기에는 미 육군 제10산악사단이 주둔하고 있다. 리차드 드럼과 휴즈 드럼은 성은 같지만 아무런 혈연 관계가 없는 남남이다.[2] 그런데 실제로 이 이름을 가진 군함이 나중에 등장하기도 했다. 물론 이 드럼은 당시 미 해군의 잠수함 명명법에 따라 물고기 이름을 붙인 것이다. 여기의 Drum은 민어를 뜻한다.[3] Artillery: An Illustrated History of Its Impact. 2007. Jeff Kinard. p371[4] 미 해군의 14인치 45구경장 Mark 1 함포와는### 전혀 다른 화포이며, 미 육군 고유의 물건으로 해안포로만 사용했다.[5] 이런 이유로 혼마 장군의 작전 능력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는 의견도 있다. 혼마 자신도 이때의 실책과 도조 히데키와의 불화로 인해서 전쟁전에 예편하는 수모를 겪는다. [6] 남북전쟁의 패배로 인해서 북부는 외부로 세력을 넓히지 못했고 필리핀은 스페인령, 하와이는 영국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