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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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댄서, 래퍼, 가수, 음반제작자. 전설적인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의 맏형이자 댄서 출신으로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 이후로도 잘 나가는 듯 하다가 잇따른 사업 실패와 성범죄로 서태지와 아이들 멤버 3명 중 양현석과 더불어서 유이하게 쌍으로 밑바닥으로 떨어진 인물이다.[3][4]
2020년, 베리스토어 부사장에 취임하여 재기를 준비 중에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전 멤버이자 댄스 아카데미 DM SKOOL의 대표다. 본명은 이상우로, 당시 잘 나가던 솔로 가수인 이상우와 동명이인이었기 때문에 이를 피해서 주노라는 가명을 썼다고 이주노 본인이 쓴 My Story라는 책에서 밝힌 바 있다.[5]
2. 가수로서
2.1. 데뷔 이전
경기도 안양에서 서울특별시의 명문 집안 출신인 아버지와 어머니 송영자의 무녀독남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 학자를 배출한 잘 나가는 집안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나온 뒤, 농촌의 야학교사로 잠깐 활동하다 농촌 처녀인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집안의 반대가 심했지만 결국 두 사람은 1966년에 결혼했고, 이듬해 이주노를 낳았다. 하지만 이주노가 돌이 되던 해 당시 공무원이 되기를 바라던 아버지는 결국 외딴 섬마을 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했지만, 그 곳에서 결국 화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젊은 나이에 홀몸이 된 어머니는 외판원 일 등을 하면서 힘겹게 살아왔다고...[6]
어렸을 때부터 소문난 춤꾼으로 유명했다고 하며, 소래종합고등학교(현 소래고등학교) 중퇴 이후[7] 박남정, 박철우 등과 함께 한국 비보이 1세대로 분류되며, 80년대 후반부터 각종 비보이 팀은 물론이거니와 인순이와 리듬터치, 김승진과 하얀손, 박남정 등과 써브웨이 등의 유명 가수의 백댄서로서 활동해왔다. 이른바 장판 갖고 다니면서 춤추던 시절이었다고... 빠른 67년 생으로서 66년 생들이랑 같이 학교를 다녔다.
서태지와 아이들에 발탁되기 전인 1991년 '제미니 뉴스'라는 팀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 제미니 뉴스에 대한 정보는 전무한 상태다.[9]
1989년에는 가수 오복이 주축이 된 '오복과 오복성'이라는 그룹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
2.2.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 직후
1995년에 발매된 서태지와 아이들 콘서트 앨범('95 다른 하늘이 열리고)의 수록곡 중 이주노의 솔로곡인 '너희가 소망이 되어'는 그가 작사, 작곡하였으며, 이상우라는 이름을 앨범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는 공연, 음반발매 등을 할 때 정부의 '사전심의'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10]
양현석과 함께 서태지와 아이들의 안무 담당 멤버로 발탁된 이주노는 인생의 큰 반전을 맞이하게 됐고, 4년간의 짧다면 짧은 서태지와 아이들로서의 활동을 통해 충분히 대스타의 반열에 올라섰다. 외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며 궁핍한 삶을 살았던 이주노로서는 인생에 큰 반전을 맞이한 셈이다.
그러나 이 시기 나머지 두 멤버와는 약간의 거리가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지방 행사를 가면 서태지와 양현석 둘이서 같은 방을 쓰고, 이주노는 매니저와 한 방을 쓰는 식이었다고...[11] 아마도 1967년 생으로 팀 내 최연장자였던 이주노를 1972년 생인 서태지와 1970년 생인 양현석이 대우하기 껄끄러워했던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이 있긴 하나, 진실은 본인들만 알 뿐이다.
일단 팀 결성 이전에 이주노와 양현석은 백댄서 세계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이미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으나, 서태지는 양현석하고만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리고 서태지가 가수 데뷔를 위해서 춤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자 양현석이 3인조로 가는 게 좋다면서 이주노를 데려온게 서태지와 아이들의 출발이었고 4년넘게 활동하는 동안의 정황이나 주변 사람들의 증언들을 볼때, 서태지가 양현석은 정말 마음이 맞는 친구로 생각했지만 이주노와는 단순한 비지니스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게 둘이서 한명을 왕따 시켰다기 보다는 사람을 극도로 가리는 서태지가 음악이나 인생관 등 여러가지 측면에서 양현석과는 말이 잘 통하면서 친구사이가 됐지만, 이주노와는 딱히 공통점을 찾지 못했고 나이차이도 꽤 나는지라 그냥 동료 사이로만 지냈던 걸로 보인다.[12][13] 일단 팀 해체의 원인은 이것과 관련이 없다고 이주노가 분명히 못을 박아놨다.
이주노가 어려운 사정에 처한 와중에도 일절 도움을 주지 않는 서태지와 양현석을 보며 너무 박정한 것 같다고 느끼는 이들도 있었으나, 이후 드러난 바들로 미루어 보면 이주노는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줘선 안 될 인물이었다.
2.3. 해체 직후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체 후 1996년부터 KBS 2FM에서 '이주노의 FM인기가요'의 DJ로 활약했다. 밤 10시 라디오 프로그램의 최강자였던 MBC '별이 빛나는 밤에', 그것도 초인기 DJ 이문세와 경쟁했다. 당시 수도권에서는 별밤의 인기가 단연 독보적이었으나, 지방에서는 별밤을 지역 MC가 진행했기 때문에[14] FM인기가요가 인기가 더 높았다.[15] 2015년 6월 26일에 KBS 2FM 50주년 특집으로 다시 진행하기도 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체 후 본격적으로 DJ로 활동하다 보니, 매주 일요일 밤에 있었던 신청곡 차트에는 항상 서태지와 아이들의 곡이 올라와 있었다. 당시 KBS에서 심의결과 TV방송금지를 먹었던 시대유감을 두 번이나 기습적으로 틀어주기도 했고, 김준선이 주축이 된 View to의 'High High'를 몇 주에 걸쳐 방송해주기도 하는 등 가끔 이주노 본인의 취향에 맞는 노래를 거는 경우가 있었다. [16]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 이후 이주노는 기획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 1996년에는 혼성댄스 그룹 '영턱스클럽'을 발굴 및 육성하면서 인기가수의 반열에 올려놓는데 성공한다. 비슷한 시기 역시 기획자로 전향한 양현석의 킵식스가 처참하게 실패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빛났던 성공이다.
한편, 이 시기 이주노 소속사에 연습생으로 김재덕과 이재진이 있었는데, DSP 사장 이호연이 찾아와서 이 둘을 픽업해간다. 이 둘은 후에 젝스키스로 데뷔하게 된다.
그러나 영턱스의 인기는 앨범이 거듭될수록 떨어져 3집부터 완연한 쇠락세를 걷기 시작하고, 영턱스에서 탈퇴한 임성은의 솔로 1집 또한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1999년에는 본격 힙합에 눈을 돌려 허니 패밀리를 발굴해내지만 역시 큰 인기를 얻진 못했다. 비슷한 시기 킵식스로 나락을 맛봤던 양현석은 지누션과 원타임의 히트에 힘입어 정상을 향해 치고 오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2000년에는 개인적으로 친한 사이인 김준선[17] 의 프로듀싱 하에 '무제의 귀환'을 타이틀곡으로 하여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담은 솔로 1집 '6 mill Bionic Juno'를 내놓으며 오랜만에 다시금 무대에 올랐다. 그러나... 이 앨범은 시대를 너무 앞서갔다는 평을 받으며 서태지와 아이들 세 멤버 각각의 첫 솔로 앨범 중 제일 실패한 물건이 되어 버렸다.
기획자 및 솔로 가수로서의 실패는 결국 기획사가 문을 닫는 결과를 낳아버렸고 한 때 잘 나가는 가수였던 이주노는 연이은 사업 실패와 사기 등을 겪으며 40억의 빚을 떠안은 신용불량자 신세까지 굴러떨어지게 된다. 이에 뮤지컬[18] 제작이나 배우, 그리고 스타 골든벨 고정 게스트 출연 등 이리 저리 바쁘게 뛰어다니며 2009년 결국 빚을 다 갚긴 갚았다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40억을 다 갚는 것을 보면 그 역시 능력자다. 이후 웨딩홀 및 댄스 아카데미를 경영하며 살림이 안정된 것 같았으나...[19]
2011년에는 SBS 플러스에서 '90년대 톱가수들의 재기'라는 컨셉으로 방영된 리얼리티쇼 '컴백쇼 톱10'에 고정 출연하기도 했다. 참고로 같이 출연한 이들은 조진수,[20] 김성수, R.ef, 김정남, 구피, 리아, 김현성, 클레오 등 듣기만 해도 절로 아련해지는 이름들.
3. 기타 사항
3.1. 가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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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에는 45살의 나이로 자그마치 '''23살 연하''' 여자친구 박미리를 공개하고 혼인신고부터 하여 화제가 되었다. 장인과의 나이 차이가 불과 4살, 장모와의 나이 차이가 불과 2살로, 거기에 혼전임신이라 그야말로 도둑 중의 상도둑. 게다가 이주노가 서태지와 아이들 1집 활동을 할 때 박미리는 갓난아기였다. 당시 아직도 장모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2011년 12월, 딸 이재이의 탄생으로 아버지가 됐다. 결혼식은 2012년 9월에 성대하게 올렸으며, 서태지도 이주노 부부에게 축하의 화환을 보냈다고 한다. 방송에서 장모가 만나주지 않는다는 식으로 불쌍함을 자주 어필하며 장모를 압박한다는 식으로 있어 까이는 측면도 있다.[21]
늦게 얻은 딸을 애지중지하는지 방송에서 딸바보 모습을 보였다. 2013년 10월에는 아들 이산희를 낳았다. 가끔 세바퀴나 기분 좋은 날 같은 프로에 출연해서 근황 토크를 하기도 하였다.
3.2. 안습한 위치
2012년 결혼이 임박하면서 서태지에 대한 언플이 약간 있었는데, 서태지와 아이들에서 이주노를 뺀 나머지 두 명의 영향력과 존재감이 워낙 대한민국의 연예계에서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그냥저냥 묻혔다.[22] 서태지와 있는 친분은 다 과시하는데 정작 연락처는 모른다며 서태지의 부모도 모를 것이라 했다. 하지만 8집 때 서태지의 텔레비전 활동을 보면 알겠지만 의외로 활동 중이지 않을 때 조용히 살면서도 '''친한''' 사람들과는 잘 논다고 한다[23] . 서태지와 아이들에서 서태지와 양현석은 실제로 친했고,[24] 그 둘과 이주노의 관계는 한때 같이 일했던 아는 사람 정도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양현석이 힐링캠프에 나왔을 때 서태지와 아이들 활동 당시에 수익 배분을 공개했는데, 당연히 서태지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양현석은 이에 대해 작사와 작곡을 서태지가 했으니 서태지가 많이 가지는 게 당연하다며 만족하는 모습을 보인 반면 이주노는 상당히 뒤끝있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2014년에 서태지의 평창동 자택에서 부부 동반 모임을 가졌다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사이가 나쁘다고 보긴 어렵다. #
이와는 별개로 잘 나갔던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을 그리워하는 유일한 멤버. 서태지나 양현석이나 서태지와 아이들 재결합 얘기가 나올 때면 "할 만큼 했기 때문에 재결합은 안한다."라고 밝힌 반면 이주노는 재결합을 할 수만 있다면 하고 싶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하기도 하여 팬들에게선 쿨하지 못하다고 얘기를 듣고 있다.[25]
3.3. 사건사고와 몰락
3.3.1. 사기 사건
2015년 8월 31일 사기혐의로 검찰에 송치됐다. 돈을 꿔서 시작한 돌잔치 사업의 실패와 연예전문 자산운용회사 부회장직에서의 퇴진이 겹쳐서 빈털터리가 됐다고 한다.
2014년 1월에는 지인에게 식당 동업을 제안하며 1주일 안에 갚는 조건으로 1억원을 빌렸으나, 이를 갚지 않아 사기 혐의로 고소됐다. 전화 녹취 파일도 공개됐는데, '''정 안 되면 서태지를 만나 무릎을 꿇고서라도 돈을 받아오겠다'''는 발언으로 파문을 불러왔다.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주노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도와주지 않은 서태지와 양현석의 선택은 이래저래 옳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
하지만 2018년 1월, 이주노의 변호인에 의하면 양현석이 이주노의 빚을 갚아주었다고 한다.
3.3.2. 성추행 사건
‘서태지와 아이들’ 이주노 또 성추행 혐의
2016년에 클럽에서 여성 2명의 가슴을 만지고 하체를 밀착하는 성추행을 하다가 말리는 클럽 사장 뺨까지 때렸다고 한다. 그러잖아도 이미 2002년에도 성추행 때문에 기소유예를 받은 적이 있어서 이번 성추행이 사실이라면 연예계에서 방출당할지도 모른다. 결국 7월 11일에 대한민국 검찰청에 송치되었다.
10월 14일에는 불구속 기소가 되면서 사실상 재판까지 가게 생겼다. #
2017년 5월 24일, 사기와 성추행 혐의로 징역 2년+신상정보공개명령을 구형받았다. #
재판부는 2017년 6월 30일 오전 서울중앙지방법원 서관 526호법정에서 사기 및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이주노에 대해 징역 1년 6개월 및 40시간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해당기사, 그리고 10년의 신상정보등록명령을 선고했다. 법원 "1년6개월 실형 선고" 그나마 피해자와 합의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법정구속은 면했다.
2018년 1월 18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제1형사부 주관으로 열린 2심 재판에서 1심 판결보다 낮은 형량인 징역 1년 2월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120시간, 신상정보등록 10년을 선고받았다. #
참고로, 해당 사건으로 2015년에 얻을 수도 있었던 셋째는 유산되었다고 한다.
4. 재기
2020년 3월 4일에 BERRYSTORE의 부사장으로 취임했다. 이주노 부사장은 "BERRY를 통해 다양한 분야의 연예인들을 함께 건강한 기부문화를 조성하고 싶다"라는 의사를 전했다. #
5. 관련 문서
[1] 경주 이씨 39세손 '相'자 항렬이다.[2] 1997년 3월 1일, 소래고등학교로 교명 변경.[3] 그나마 아내 박미리와 이혼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 걸 보면 아내가 보살이거나 아니면 그나마 자녀 때문에 참고 사는 거거나 둘 중 하나일 듯.[4] 왜 양현석이 나왔냐면, YG엔터테인먼트 관련 문제와 더불어서 본인과 관련된 이런저런 문제들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양현석/사건사고 참조. 사실 스케일로 따지면 양현석이 이주노보다 더 문제가 많긴 하다.[5] 그리고 가수 이상우의 히트곡 중 하나인 '그녀를 만나는 곳 100미터 전'의 안무를 가르쳐 주었다.[6] 훗날 어머니는 새아버지와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둘 사이에 아이는 없다고 한다.[7] 무단결석 누적으로 제적이 맞으나, 담임선생님의 도움으로 졸업장은 받았다.(TV는 사랑을 싣고에서 나온 장면)[8] 80년대 당시 국내에 드물던 독특한 전자음악과 춤을 선보였던 가수로, 양동근이 리메이크한 골목길의 원곡 가수다. 한참 뒤에 비트볼 레코드에서 앨범을 재발매해 인디 음악 팬들에게 소소한 인기를 끌기도 했다.[9] 80년대 중반 잠시 관심을 끌었던 '골목길'이라는 노래를 발표한 적이 있는 이재민이라는 뮤지션의 프로젝트였다는 정도로만 언급되고 있다. 참고로 '골목길' 발표 당시 백댄서 중에 박철우가 있다.[10] 서태지의 경우 사전심의번호가 1~2집은 서태지란 명의로 되어 있는데 3집~4집은 정현철로 되어 있다. 이주노도 이상우라는 본명으로 사전심의를 받았으며 심의번호가 당시 앨범에 기재되어 있다. 이후 4집에서 서태지가 시대유감 가사심의에 반발하며 가사를 아예 빼버렸고, 이것이 당시 정태춘, 박은옥 부부가 진행하던 사전심의 폐지운동에 불을 붙여서 마침내 1996년 사전심의제도가 폐지되게 된다.[11] MBC에서 방영한 서태지와 아이들 1집 시절 다큐를 보면 그날 일정이 모두 마무리 되자, 이주노는 자기 승용차를 몰고 혼자서 퇴근하고 (차가 없던) 서태지와 양현석은 매니저가 집으로 배달해주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12] 헤비메탈을 전면에 내세운 3집 발표후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모 라디오프로에 출연했을때 이런 일화가 있다. DJ가 양현석과 이주노한테 "헤비메탈 사실 생소하지 않냐? 좋아하나?"는 내용의 질문을 하자 양현석은 평소에 메탈도 즐겨듣는다면서 메탈리카, 메가데스 등등 수많은 밴드와 노래에 관한 자신의 감상평을 신나게 풀어냈다. 옆에서 서태지도 맞장구치고 말이다. 반면에 이주노는 "전 잘 모르고 우리 음반의 그런 요소들을 좋아해요."라고 짦게 이야기하고 끝. 방송 내내 서태지와 양현석만 메탈음악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이주노는 꿔다 논 보릿자루 행(..) 이런 것을 보면 서태지와 양현석은 평소에도 음악에 관한 대화나 사적인 교류도 많이하고 서로 취향도 맞았던 걸로 보인다.[13] 팀 해체 이후 서태지는 양현석과는 개인적인 연락을 유지하고 콘서트에 게스트로 부르기도 했다. 양현석은 서태지가 9집 앨범으로 컴백했을 때 개인적으로 찾아가 시간을 가졌고 서태지 역시 양현석에 대해 친근하게 양군으로 부르며 언급 해주는 등, 과거처럼 붙어다닐 정도의 절친함까진 아니지만 여전히 나름의 친분을 보여준다. 대외적으로는 교류가 많지 않아 보였던 이주노는 결혼식에 서태지를 초대했고, 이주노 부부는 서태지의 집에서 서태지 부부와 식사를 나눴다고 말했다. 주로 가족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14] 별밤의 전국방송화는 2014년에 완료됐다.[15] 당시에는 밤 10시에 지방에서도 2FM을 릴레이하던 시기였다(2001년 가을 개편 후 사실상 1FM화됐다). 지방에서 공개방송을 하기도 하였는데, 예를 들면 지금은 KBS 2FM이 나오지 않는 경상북도 안동시 지역을 찾아가 공개방송을 열었을 정도다. FM인기가요는 2001년 KBS 제2라디오로 이전했다가, 폐지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16] 사실 이 당시는 DJ의 취향에 맞춰서 이러는 경우가 방송사를 막론하고 가끔 있었다. 동시기 경쟁프로였던 MBC FM의 '김현철의 디스크쇼'에서는 삐삐롱스타킹의 '바보버스'가 5일 연속으로 전파를 타기도 했고...[17] 연세대 철학과 3학년 때 1990년 KBS 대학가요축제에서 입상한 후 1992년에 데뷔하여 "아라비안 나이트", "마마보이" 등의 실험적인 곡으로 유명했던 가수. 방위병으로 복무한 후 컬트, 뷰투 등의 밴드로 활동하다가 현재는 프로듀서 및 음악감독으로 주로 활동하며 간간히 곡을 발표하는 중이다. 김준선은 2016년 9월 4일 복면가왕에 가을 전어는 며느리를 남기고라는 이름으로 출연해 1라운드 듀엣전에서 뮤지컬곡 대결을 벌였으나,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가마니로 보이니에게 34:65로 밀려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18] 주로 논버벌 퍼포먼스라 하여 대사없이 동작과 율동만으로 이끌어나가는 뮤지컬을 맡았다.[19] 그 이전에 팝핀 현준, 허니패밀리 출신의 MC주라 등과 Asian이란 프로젝트를 기획했으나, 역시 보기 좋게 말아먹었다. 양현석이 자신의 솔로로 흑역사를 생성했어도(그래도 '악마의 연기'는 서태지 빨로 가요프로 10위권 내에는 들었고. 음반을 22만장 팔아 이후 원타임과 지누션을 데뷔시킬 자금을 마련했다.) YG패밀리라는 거대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것을 보면 눈물이 앞을 가릴 뿐이다.[20] 과거 ZAM 멤버.[21] 게다가 아래 항목에 적혀져 있는 성추행 사건 때문에 이젠 장모와의 관계가 좋아질 경우는 제로에 가까워졌다.[22] YG는 국내 3대 연예기획사 중 하나를 운영하는 곳인데다 신인 가수가 나오는 때마다 대박을 내고, 서태지는 컴백만 하면 모든 기획사와 평론가의 주목을 받고 비록 9집의 성과는 예상했던 것에 비해 낮았지만, 성공하면 성공했지 망하지는 않았다. 서태지가 컴백할 때 기획사나 평론가들이 그를 주목한다는 건 서태지만큼 파격적인 시도를 하는 뮤지션이 얼마 없다는 방증이기도 하다.[23] 서태지 또한 사적으로도 만남을 자주 가지는 인물로 신해철, 김종서(가수), 양현석을 꼽았다.[24] 실제로 양현석은 힐링캠프에 출연해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로 서태지를 뽑았다. 7집 다큐에서도 한국에서 일본으로 서태지에게 선물로 도착한 택배(추억의 불량식품이 그 내용물) 또한 양현석이 보내준 거라고.[25] 물론 이주노가 원해서 해체한 것도 아니었고, 그리워하는 게 당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