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도

 




[image]
'''본명'''
이현도 (李賢道)
'''예명'''
D.O[1]
'''출생'''
1972년 9월 5일 (51세)
'''국적'''
[image] 대한민국
'''신체'''
174cm, 62kg, O형
'''학력'''
상문고등학교 중퇴
안양예술고등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가족'''
2남 중 차남, 배우자, 슬하 1녀(2019년생)
'''소속사'''
소비어스[2]
'''데뷔'''
1990년 현진영과 와와
'''종교'''
개신교
'''SNS'''

1. 개요
2. 최종학력
3. 가족
4. 비주얼
5. 과거의 행적
6. 최근의 행적
7. 대한민국 음악사에 남긴 의의
8. 음악적 스타일에 대한 비판
9. 영주권과 병역 문제
10. 신정환, 고영욱과의 에피소드
11. 룰라와의 관계
12. 방송 활동
14. 기타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가수프로듀서.

2. 최종학력


안양예술고등학교[3]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는데 원래는 상문고등학교를 다녔으나 당시 상문고에서는 이사 비리사건으로 시끄러웠고, 친구 김성재가 학교에서 담배를 피우다 걸리는 등의 일을 겪자 학교 생활에 회의감을 느껴 자퇴했다.
이후로 서울예대에 지원을 했으나 자신이 다룰 수 있는 악기를 실기고사 때 연주하지 못해서 불합격했으며 그 이후로 그냥 고졸로 남게 되었다. 그래서 의외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현도는 정식으로 음악을 전공한 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안양예고 문예창작학과에서의 배움이 작사 활동에는 충분히 도움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작곡가/작사가에게 필요한 관련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듀스의 곡 모두를 비롯해 수많은 곡들의 가사를 직접 쓴 그이다.
그가 작사한 곡이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기도 했을 정도로, 작사가로서도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이현도 “듀스 힙합곡 ‘비틀린 세상’ 고교 교과서에 실렸다”

3. 가족


이현도의 부모님은 꽤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두 분 다 '''실향민 출신이자 서울대학교 출신'''이다.[4] 그러나 정작 아들인 이현도는 대학을 들어가지 못한 고졸이다 보니 자서전 '스물네 살의 사자후'에서는 '''대졸 서울대 출신의 부모님 밑에 고졸 아들'''이라고 자신을 자조적인 어투로 언급한 바가 있다.[5]

4. 비주얼


[image]
솔로 활동 당시의 기사.
전 그룹 듀스의 멤버였던 김성재에 비하면 잘생긴 건 아니지만, 듀스 시절 카리스마적 눈빛에 여자처럼 묶어놓은 헤어스타일로 김성재만큼 괜찮은 외모 평가를 받기도 했다.

5. 과거의 행적


연예인, 음악인으로서의 이현도의 등장은 1990년으로 현진영과 와와 1기로 활동했던 클론강원래구준엽이 입영하게 되자 친한 동생사이였던 이현도, 김성재를 이수만에게 소개해서 김성재와 함께 현진영 밑으로 들어가 '현진영과 와와'에서 활동한 것이 처음이다.[6]
그러다가 1991년 부산의 야외무대에서 현진영과 와와가 공연을 하는 도중에 갑자기 건장한 남자들이 무대 위로 뛰어올라 현진영을 무대 아래로 끌어내리는 모습을 지켜본 이현도와 김성재는 현진영의 모습에 큰 실망을 했다. 뉴스를 통해 알고보니 현진영이 구속된 이유가 대마초 때문이었고 그 여파로 최진열, 정해익, 김경욱 같은 SM 직원들이 경찰에게 수사를 받아 큰 고초를 겪었으며 이 과정을 지켜본 이현도는 현진영의 무책임한 행동에 크게 분노했다. 당시 현진영의 대마초 사건으로 SM기획이 경찰의 수사를 받아 회사의 모든 활동이 정지되었고 와와의 활동도 중단되었다.
이 때 이현도는 현진영의 대마초 사건으로 댄서 활동이 중단되면서 현진영에 대한 분노와 갑작스러운 활동정지로 인한 좌절감으로 고통스러워하다가 이대로 댄서로서 끝날 수 없다고 마음을 먹게 되면서 음악을 만들고 싶은 강렬한 열망과 창작욕구에 불타올라 신디사이저를 구입하면서 본격적으로 곡을 쓰기 시작했다.
그 후 진로를 고민하기 시작한 김성재는 대학진학을 목표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이현도는 다시 문나이트에 다시 출입을 하면서 춤을 추게 되는데 이 때 춤을 추면서 울분을 풀고 있는 이현도를 지인이 안타까워 하면서 오디션을 권유했다. 그래서 가수로 데뷔하기로 마음 먹고 김성재와 함께 코어의 김광수에게 오디션을 봤지만 합격하지 못 했다. 미안해진 이현도의 지인은 다시 뮤즈기획을 소개했는데 이 기획사는 환경이 매우 열악해서 사무실이 없었고 안무를 연습할 무용실도 없어 무용실을 빌려 연습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난 후 현진영이 교도소에서 출소한 다음 자신의 첫곡인 "너에게만"을 완성해서 현진영에게 들려주었더니 매우 좋다면서 곡을 달라고 했다.
이에 반신반의하며 이수만에게 들려주었는데 이 곡을 극찬하면서 현진영의 "New Dance 2"의 앨범에 수록했다. 이때 현진영이 와와를 다시 하자고 제안을 하지만 큰 자신감을 얻은 이현도는 거절했다. 그 후 김성재는 한양대에 진학했고, 이현도는 실용음악과에 응시를 했으나 떨어지면서 더욱더 작곡활동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악기만으로는 편곡까지 완성한다는 게 무리여서 유대영의 작업실을 빌려 작곡을 하게 된다.
마침내 앨범을 완성해서 듀스를 결성했고, 1993년 4월에 데뷔 앨범인 <DEUX>를 발표했다. 타이틀곡은 나를 돌아봐. 그러나 앨범을 발표한지 한 달이 지나도 방송국에서 불러주지 않아 방송 활동을 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 때 듀스의 곡을 높게 산 SBS의 가요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게 되었고 이후 듀스는 대한민국 힙합계에 매우 큰 족적을 남기게 되었다.#
1994년에 '너 하나만을 위해' 라는 곡을 작업하였고 이 곡은 듀스의 다음 앨범에 수록될 예정이었으나 당시 신인가수 였던 구본승에게 타이틀곡[7]으로 넘겨줬다. 특히 멜로디가 듀스의 스타일이 상당히 짙다.
이후 1995년에 소속사의 입김에서 벗어나 더 듀스다운 활동을 하자는 취지에서 해체 선언을 했고, 김성재솔로로 내세운 뒤 자신은 뒤에서 음악적인 지원을 하는 식으로 활동 범위를 넓히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게 되었으나 김성재가 SBS에서 '''첫 컴백 무대에 오른 바로 다음 날''' 호텔에서 싸늘한 시체가 된 채 발견되었고, 김성재 사망의 유력 용의자가 무죄를 선고받으며 사건이 미궁으로 빠지면서 심경에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김성재의 장례식에 참석한 뒤 그는 곧바로 미국으로 가서 1년 여 간 칩거 아닌 칩거를 했다. 그 뒤 친구를 잃은 아픔을 딛고 새로이 솔로 활동을 시작하기로 하면서 1996년에 '사자후'를 타이틀곡으로 한 1집 <Do It>으로 재기를 했고, 이후 2000년까지 2집 <The Saga Continues>, 2.5집 <D.O Funk>, 3집 <완전 힙합> 등 총 4장의 LP를 냈다. 또한 1집 활동 중에 열린 콘서트 실황을 라이브 앨범 <Still A Live>로 발표했고, 봄여름가을겨울의 곡을 리메이크해 <사랑해> 싱글 앨범[8]을 발표했다. 싱글을 제외한 모든 솔로 앨범에는 김성재를 그리워하는 곡을 실었다.[9]
다만 친구의 죽음 이후로는 자신이 직접 무대에 오르기보다는 후배 가수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음악을 만들어 주는 등 프로듀서로서의 활동에 더 무게를 두게 되었다는 것이 특징. 가장 대표적인 앨범으로 룰라의 4집(타이틀곡: 3!4!)[10], 지누션의 1집[11](후속곡: 말해줘), 유승준의 3집(타이틀곡: 열정), 4집(타이틀곡: 비전, 후속곡: 연가)이며 이들 모두 엄청난 대박을 터뜨렸고[12], 타이틀곡의 멜로디나 가사 또한 이현도의 손길이 느껴지는 곡들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이름을 내건 앨범은 일단 2004년 말경 힙합 가수들을 총집합시켜 만든 프로듀싱 앨범 <The New Classik>이 마지막이다. 이 이후로는 완전히 프로듀싱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6. 최근의 행적


2008년영화 쿵푸 팬더의 삽입곡인 Kung Fu Fighting의 리메이크를 담당했고, 이 과정에서 의 음악 지도를 하기도 했다.[13] 또한 간미연, 휘성 등의 음악을 작곡해 주기도 하는 등 한국과 한국 외의 국가의 글로벌 프로듀서로 활동 중이다.
과거 낸 모든 앨범들의 작사 작곡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프로듀서로서의 능력이 출중한데 1990년대 초 구본승의 히트넘버인 《너 하나만을 위해》를 제공해 준 것을 시작으로 지누션[14], 엄정화, 유승준 등의 가수들 타이틀곡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마이더스의 손으로 불리기도 했다...만 정작 본인이 전력을 다해 키우려고 했던 D.BACE는 그다지 반향을 끌어내지 못한 것이 아이러니하다.
일본에서 반짝하다 망한 AKB계열 아이돌인 SDN48에 <愛よ, 動かないで> 악곡을 제공한 적도 있다. 그나마 SDN의 악곡들 중에서는 건질만한 축에 속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2013년부터 듀스 20주년 헌정 음반을 준비하고, MnetSHOW ME THE MONEY 2에 출연하는 등 다시 활동하고 있다. 다만 가수로서는 더 이상 활동할 계획이 없는 듯. 인터뷰에서 홍명보에 비유하며 이제는 더 이상 선수(가수)가 아닌 감독(프로듀서)을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고.
대한민국에서 활동하지 않은 기간 동안 외모가 많이 변해서 못 알아본 사람이 많았다고...
2014년 기획사 원포원엔터테인먼트를 설립했다.#
2016년 7월 성추행 논란이 있었으나 2017년 1월 16일에 무혐의 처분되었다.#

7. 대한민국 음악사에 남긴 의의


90년대 가요를 기억하는 대중들에게는 '랩'하면 듀스보다 서태지와 아이들 쪽이 먼저 떠오를 테지만, 사실 처음부터 흑인음악에 몰두했던 이현도와는 달리 서태지는 학창시절부터 지독한 메탈헤드(메탈빠)였고 그 자신이 록커이자 메탈 베이시스트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그의 흑인음악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한 외도였을 뿐. 애초에 아이들 시절 히트곡들 대부분이 댄스/힙합을 가장한 록음악이었을 정도로 두 사람은 음악적 색깔이 전혀 달랐다. 즉 흑인음악에 애정을 가지고 더 깊게 파고든 건 이현도였다는 것. 이후 그가 뿌려놓은 음악적 성취들이 후배들에게 적지않은 유산이 되었고 특히 2000년대 들어 힙합이 대세가 되면서 평가가 점점 올라가게 되었다.[15]
이 외에도 훵크, 부갈루 등 당시 한국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거나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다른 흑인음악 장르로 영역을 확장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고장난 신디사이저를 음악에 활용하거나 각종 콜라보를 시도하는 등 여러 창의적인 시도를 하였다.
분야의 공적도 무시할 수 없는데 당시 대중들에게 '그냥 빠르게 지껄이는 것'이라고 여겨졌던 랩 수준을 정말 랩답게, 즉 플로우를 살리면서 적절하게 라임을 배치하는 등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에 걸맞는 랩을 선보였다. 이에 따라 정통 랩의 라임을 살려내어 한국 문학계에서 한시 이후 맥이 끊겼던 운자를 부활시켰다. 민중서림의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서도 그의 <비틀린 세상>의 가사 일부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작사가로서의 평가도 좋은 편이다. 역시 문예창작과 출신답다.[16]
그의 가사중 백미는 3집 '完全HIPHOP'의 '삐에로'인데 얼핏 들으면 인지하지 못 하나 가사를 잘 들여다보면 ㄱ부터 ㅎ까지 차례로 삽입한 것이다.[17] 그만큼 문장이 전체적으로 자연스러웠다.[18]
정리를 하자면 힙합은 물론, 뉴 잭 스윙, 훵크 등 흑인음악의 문법을 우리 대중음악에 맞게 이식, 대중화한 큰 공로가 있다고 하겠다.

8. 음악적 스타일에 대한 비판


그가 대중 음악계에 남긴 영향력이나 발자취에 대해 언급할 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본인만의 확고한 음악적 스타일이 없다는 것이다. 시기적으로 유행하는 프로듀서의 사운드를 소름끼칠 정도로 완벽히 재현해내곤 하는데, 좋게 말하자면 음악적 수용력이 뛰어난 것이지만 현실은 짝퉁에 불과하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2000년도 초반에 미국에서 승승장구하던 프로듀싱 듀오 넵튠스의 사운드를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카피했다. 넵튠스의 초기 사운드를 완벽히 집대성한 Kelis의 Wanderland, Kaleidoscope 등의 앨범 사운드와 이효리의 2집 앨범 수록곡 Do Me를 비교하면 이뭐병...넵튠스 특유의 스네어 샘플도 그대로 가져다 썼고, 사용한 사운드 모듈도 넵튠스의 그것들과 모두 같다. 거기에 웬만한 리듬의 작법이나 드럼의 운용 방식도 완전히 카피를 했으니 이건 '''명백한 짝퉁'''이 맞다.
그 외에도 대표적으로 알려진 넵튠스 짝퉁으로는 '''이현도 본인이 직접 인정한''' Clipse의 Grindin'을 베낀 주석의 Ballin' 2k3[19], Noreaga의 Superthug의 사운드를 가져온 What Da Fxxx U Want?![20]
무서운 사실은 이현도가 스타일을 완전히 참고한 아티스트가 한 둘이 아니라는 점이다. 당장 듀스 시절의 뉴 잭 스윙 곡들도 테디 라일리의 스타일을 완전히 흡수했었기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바비 브라운의 We're back[21]와 듀스의 데뷔곡 나를 돌아봐 등등을 비교하면 참담하다. 근래의 곡들도 이런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데 휘성의 Girls와 T-Pain의 Chopped N Skrewed를 비교해서 들어보면 그 영향을 확인할수 있다.
이에 대해 이현도 본인은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밝혔다.

제 프로그래머도 그랬어요. 휘성 곡('Girls')이 너무 똑같은 것 아니냐고. '나도 한번 그런 스타일을 해 보자. 휘성의 목소리를 오토튠으로 꾸며 보면 재미있겠다.'라는 생각에 시도해 봤는데 그걸 표절이라고 하면 너무 편협한 거죠. 어떻게 보면 오마주라고 할 수도 있겠죠. 편협하게 보자면 티 페인(T-Pain)도 에이콘(Akon)을 표절한 거라고 할 수밖에 없잖아요. 유명 프로듀서 중에도 마음먹고 샘플을 따서 결국에는 자기 것으로 만든 사례도 많아요. 하지만 그런 것을 표절이라고 하지는 않죠. 비슷하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런 풍으로 만들고 싶었을 뿐이에요.

하지만 이것은 이현도가 음악을 다루는 방식에 큰 문제가 있다는 점만을 시사할 뿐이다.
업계의 거의 모든 작곡가, 프로듀서들은 다른 이들의 음악을 들으며 영감을 얻는다. 이는 곧 이전의 음악들을 참고한다는 말인데, 완전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기 위한 참고일 뿐이다.
위에서 설명한 프로듀싱 집단 '넵튠스'의 경우도 수많은 음악가들의 스타일을 답습했으나 그들은 그것이 샘플링이라는 사실을 항상 밝혔으며, 해당 곡들의 크레딧에도 원작자의 이름을 실었다. 그리고 그들은 샘플링한 음악을 자신들의 독자적인 스타일로 재해석하므로써 이후에 발생할 수 있는 자질 논란을 미연에 방지했다.
대부분의 음악가들이 행하는 창작이라는 것도 사실은 모두 이런 것이다. 기존의 것에 대한 참고와 분석, 그리고 재해석인 것이다. 하지만 이현도의 경우는 그 참고의 정도가 너무나도 지나쳤다.
이현도가 위에서 예로 든 티페인과 에이콘은 물론 같은 음악 스타일을 공유하고, 때로는 협연하기도 하는 관계이지만, 그들은 적어도 서로의 음악을 완전히 배껴내지는 않으므로 '작곡가 고유의 영역'을 침해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현도는 위에서 다루었듯 항상 다른 음악가들의 스타일과 고유의 것들을 철저하게 표절했다.
때문에 이현도의 음악이 가지는 독자적인 것, 고유의 요소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만든 음악이 그의 음악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요소는 그가 사용하는 모듈과 악기의 음색 등의 기술적인 것들 뿐, 구조적인 특징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들을 참고는 했지만 재해석은 전혀 하지 않았다.
물론 듀스 초창기 테디 라일리의 카피본이었던 모습이나, 클럽튠을 추구하다가 뭔가 크게 뒤틀려버린 지금의 모습만 보고 이현도의 모든 작업물을 아류로 매도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한상원과의 합작인 'D.O FUNK'나 3집 '完全 HIPHOP'은 각각 훵크와 힙합이라는 커다란 틀 아래에서 다양한 시도를 보여줬던 앨범이며, 2집에 수록됐던 'Accorade (Of Hiphop)'[22]을 한국 힙합 최고의 곡으로 꼽는 올드팬들도 심심찮게 있다. 다만 이런 '모험'을 감행한 작업물들은 대중들의 인기와는 꽤 거리가 있는 경우가 많았기에 이런저런 방황 끝에 지금의 스타일이 되어버린게 아닌가 하는 안타까운 추측을 내세워볼뿐이다. 뭣보다 아류 논쟁에 휩싸이고 있는건 죄다 2001년 이후의 작업물들이기도 하고.
과거 인터뷰 때에는 존경하면서 영향을 받는 뮤지션으로 일본 작곡가 겸 뮤지션인 류이치 사카모토(일본명: 사카모토 류이치)를 종종 언급하기도 하였는데, 사람들은 전혀 힙합이나 흑인 음악에 관련이 없는 뮤지션을 언급하라고 종종 까긴하였다. 하지만 류이치 사카모토를 단순히 피아니스트 뉴에이지 음악가라고 착각하면은 큰 오산이다. 실제 그는 악기(신디사이저, 샘플러 등등)나 시퀀싱, 미디 능력도 대단하여서 일본 전자음악잡지에도 종종 거론되는 대가이다. 80년대 초에는 YMO라는 전자음악을 다루는 멤버에 한 사람으로는 그 당시 팀의 메인 키보드리스트였고, 90년대 초쯤 앨범(Heartbeat, Sweet Revenge) 음반만 들어보아도, 하우스, 힙합, 팝음악을 시도하였으면 알 수 있다. 위에 언급했듯이 모든 장르 음악을 시도하는 일본의 국보급 아티스트이다. 아마도 이현도는 저 두 앨범으로 인하여, 영향을 매우 깊게 받은 듯 하다. 윤상, 유희열, 국내 작곡가가 존경하거나 영향을 받았으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정도이다. 이현도 페북에 가보아도 영향을 받은 인물로도 류이치 사카모토가 링크되어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9. 영주권과 병역 문제


음악적으로는 천재라는 평가를 받는 이현도이지만, 병역 문제를 매우 논란이 있는 방법으로 대처해서 현재까지도 비판이 많다. 이현도가 평생 감내해야 할 꼬리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이현도는 듀스 결성 이전 가족과 친지들이 모두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가게 되면서 아르헨티나 영주권을 취득했고, 이후 듀스 활동을 위해 귀국하면서 한국과 미국[23], 아르헨티나를 오가며 생활하게 되었다.
정확히는 활동할 때만 한국에 들어오고, 그렇지 않을 때는 외국에서 프로듀싱을 주로 맡았다.[24] 병역법상 재외 국민이 국내에서 경제 활동을 하면 외국 거주로 인한 병역 면제가 해제되기 때문.
한편 2000년 당시 이현도의 나이는 만 27~28세였고, 당시 병역법으로도 징병 검사 후 현역 판정이 가능한 시기였다. 그러나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아무도 이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없었고, 2004년 송승헌, 장혁, 한재석의 병역기피 사건으로 인해 연예계 병역비리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시기가 되어서야 이현도의 병역비리 문제에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이후 국내에서는 이현도가 군대에 가지 않기 위해 아르헨티나 영주권을 딴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퍼졌고, 이것은 일부 팬들이 싸이월드 방명록에 병역비리 문제로 그를 까는 글을 올리면서 특히 문제가 커졌다. 이에 이현도는 '''욕설을 써 가며 이들을 물리쳤고''' #일명 '존만한 씹새지원' 사건, 이로 인해 기존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은 채 앨범 활동을 해야 하는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25] 이 사건에 관해 오인용에서 이현도를 '아르헨도'로 출연시켜 간접적으로 비판한 바가 있으며, 수많은 네티즌들이 이현도를 '아르헨도'라고 부르며 두고두고 까게 된다. 싱하형 VS 아르헨도
이에 대해서 이현도는 본인의 홈페이지를 통하여 글을 남긴 적이 있는데[26] 요약하면 '이현도의 외가식구는 모두 아르헨티나에 거주 중이고 초청을 받아 듀스 결성 1년 전부터 이민 수속을 밟아 이미 이민 예정 중이었는데 듀스 활동을 하게 되면서 국내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고, 94년 연예인들 병역기피가 문제 되었을 때 자진출두해서 무혐의 판정으로 상황 끝.'
덧붙이자면 이현도 때는 아르헨티나 영주권만으로도 면제가 가능했지만 2001년 개정된 병역법대로면 연간 60일 이상 국내에 체류하며 영리활동을 하는 국외 이주 연예인은 국적변경을 하지 않는 이상 병역의무가 부과되게 된다. 물론 이현도는 바뀌기 이전에 이미 병역면제였기 때문에 바뀐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쉽게 말해 이현도는 요즘 언급되는 병역법 문제랑 전혀 상관없는 상황이라는 말. 당시의 많은 연예인들이 지금의 기준으로 군 면제 사유에 해당되지 않는 (3대, 4대 독자, 중졸, 영주권 등) 사유로 군 면제를 받았음에도 지금와서 번복되지 않기에 이현도 역시 동일하게 판단해야 함이 옳다. 법률불소급의 원칙 참조.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 한국이 아르헨티나와 조별 경기를 벌일 당시 네이버 지식IN에서 "이현도는 한국을 응원할까요? 아르헨티나를 응원할까요?"라는 질문이 오가기도 했었다...
2013년, 듀스 20주년을 맞아 방송에 복귀하면서 병역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는데, 병역의혹이 공소시효가 만료되는 것과 같이 해소된 것이라는 개드립을 시전했다.
즉 법적으로 문제될 것은 없고 스티브 유처럼 군대 간다고 설치지도 않았으나, 영주권 취득과 관계없이 입영을 해도 전혀 문제되지 않을 상황이었기 때문에 계속 비판받게 될 듯하다.[27]
이 문제 때문인지 구 연예인 지옥에서 '아르헨도'로 패러디되어 나왔다.[28]

10. 신정환, 고영욱과의 에피소드


이현도가 신정환고영욱LA로 초대했는데 정작 초대해놓고 자기는 박찬호[29]와 놀러다녔다고 신정환과 고영욱이 라디오 스타에서 밝힌 바있다. 결벽증 같은게 있어서 TV 각도를 조금만 틀어놓은 것과 스타워즈 포스터를 조금 구겼다고 신정환을 엄청나게 깠다고 한다. 그래서 신정환이 분한 마음에 "나 정말 이현도보다 잘 될거야"라고 울분을 터트렸다고 한다.
그리고 고영욱두시탈출 컬투쇼에서 한 말에 따르면 게임하다가 지면 쿠션을 찢고 난리를 피우기 때문에 꼭 져줘야 한다고 한다. 라이머도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자기가 지면 후배들이 보는 앞에서 게임 CD를 꺼내서 부수고, 패드를 박살낸다고 한다. 그래서 집에 게임기 패드가 잔뜩 있다고 한다. 이현도가 라스에서 한 변명에 따르면 어쩌다가 같은 CD가 3장이나 있어서 장난으로 하나 깨봤다고 하는데.
이후 본인이 직접 라디오 스타에 나와서 신정환과 고영욱이 한 얘기에 대해 해명했는데, 1994년 당시 '''최고 크기의 브라운관 TV'''를 고가의 대형 장식장에 각도에 맞게 셋팅해뒀는데, 신정환이 큰 브라운관 TV의 각도를 억지로 틀면서 600불짜리 장식장을 망가뜨려서 혼낸 것이라고 한다.(다만, 이현도는 자기가 좀 편하게 보려고 틀었을 것이라고 했는데, 당시 신정환의 말을 들어보면 캠코더를 연결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장난감 좀 비틀린거 가지고 쪼잔하게 식으로 언급한 것은 그 장난감이 '''시리얼 넘버까지 붙은 한정판 X-wing'''이었다고 한다. 신정환과 고영욱은 스타워즈 포스터 구긴 얘기만 했는데, 한정판 X-Wing이 더 비싼걸 몰랐던듯.
박찬호 건도 박찬호가 초대장을 줬는데, 본인들이 당시 신인이던 박찬호를 무시하고 쇼핑을 간 것이라고 한다.(신정환이 1995년 초에 입대했고, 이 사건이 신정환이 제대하고 얼마 안있어 간 여행이며, 박찬호가 한국에서 주목받기 시작한게 97시즌 중반이므로 얼추 시기는 맞아 떨어진다.)
이 해명을 하면서 '''거짓말의 말로는 이렇다'''며 둘을 디스. 다만, 게임에서 졌다고 게임 디스크를 부순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티나게 져주면 일부러 져주지 말라고 화내고, 이기면 졌다고 화낸다고... 축구할 때 풀을 쥐어뜯는 등 국가대표급 리액션을 한다는 얘기도 공개되었다. 쉽게 자신에게 화를 내는 성격인 듯.

11. 룰라와의 관계


하지만 신정환, 등 룰라 멤버와 이현도는 대단히 친분이 두텁다. 이들의 친분이 두터워지게 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이현도의 분신과도 같았던 김성재 사망 사건에서 비롯된다. 사건 초기 김성재의 사망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을 때, 그의 팔에 주사바늘 자국을 보고 많은 언론들이 마약 복용 쇼크사가 아니냐는 추측성 보도가 판을 치고 있었고, 그로 인해 처음에는 김성재의 빈소에 그렇게 많았던 연예인 조문객들이 그 보도 이후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룰라 멤버들만 김성재의 빈소를 이현도와 함께 끝까지 지켜주었고, 결국 마약 복용설은 사실 무근으로 밝혀져 김성재의 누명이 벗겨지게 되었다. 이현도를 비롯한 김성재 가족 및 측근들은 추측성 보도에 또 한 번 큰 상처를 받게 되었지만, 어찌보면 그 사건을 계기로 힘들때 함께 해 준 룰라 멤버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당시 최고의 인기그룹이었던 룰라는 김성재 사건 이후 약 1달 뒤 3집 타이틀곡 '천상유애' 표절시비로 인기가 나락으로 떨어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상민의 자살기도로 인해 그룹 자체가 와해되기 직전까지 갈 뻔 했던 최대 위기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이현도는 룰라 4집에 타이틀곡 '3!4!'[30]를 비롯한 대부분의 수록곡을 프로듀싱하였으며,[31] 덕분에 룰라는 4집의 타이틀곡 '3!4!'를 통해 재기를 하게 되었다.[32] 이현도가 룰라에게 받았던 고마움을 가장 어려운 시기에 매우 큰 도움으로 보답해 준 것이다. 그만큼 이들의 관계가 돈독하고 얽혀진 사연이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정작 '3!4!' 녹음하는 동안 고영욱이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노래를 잘 못해서 프로듀서인 이현도에게 수없이 지적을 받았고, 계속된 비판과 재녹음 끝에 감정이 상한 고영욱은 이현도에게 "형은 그렇게 잘해? 형도 노래 못하잖아"를 시전했다고 한다(...)
미국에서의 에피소드의 경우 애초에 과 신정환이 본인을 만나기 위해 미국에 왔던 것도 아닌데, 미국 간다고 하자 호텔 잡지 말고 우리 집에서 자라고 했다는 것만 보아도, 그들의 관계를 오해 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아무리 친해도 한번 싸운적 없는 친구 없듯이.
이상민과도 친분이 있는데, 음악의 신에서 이상민 컨셉이 아무래도 허세다 보니 본인을 전설과도 같은 존재라고 드립을 치는 경우가 많은데 3대 프로듀서라며 본인과 더불어 김진표와 이현도를 언급하기도 했다.물론 나중에 이현도가 이상민과의 전화통화에서 이현도가 '''"뭐 3대 프로듀서 누구? 뭐야 그거 너 그러다 형한테 3대 맞어"'''라며 짜증을 내기도.[33] 나중에 쇼미더머니 특집 비틀즈 코드에서도 그러지 말라고 짜증을 내기도. 물론 짜증 낸뒤 곧바로 시키지도 않았는데 "형은 그래도 널 사랑한다."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12. 방송 활동



12.1. SHOW ME THE MONEY 2


2013년 Mnet SHOW ME THE MONEY 2에 출연했으며 그것도 D.O 크루의 수장 자격으로.
처음 소식이 알려졌을 때는 부정적인 여론이 많았다. 예나 지금이나 이현도의 랩 실력이 현역 MC들에 비해 좋은 편은 아니고, 2004년 이후 눈에 띄는 활동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이현도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 더구나 상대 크루의 수장은 가리온의 MC 메타여서 "이현도가 왜 수장임?" 식의 글이 범람했다.
첫 방송 이후 여론이 반전…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해졌다. 참가자들을 심사하면서 했던 패션지적이나[34] 여러 언더 MC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나[35] 취향드립[36]처럼 방송으로 나간 부분은 까일 여지가 다분했다.
그러나 본선이 진행되면서 여론이 많이 달라졌다. MC 메타가 크루원들과 갈등도 많이 일으키고 본인의 주관을 잘 꺾지 않았던 반면, 이현도는 크루원의 주관을 존중하는 모습, 인간적으로 좋은 모습도 많이 보여줬고,[37] 무엇보다 프로듀서로서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줬다. 비슷한 시기에 MC 메타가 프로듀싱으로 열심히 까였던 것과 비교하면 뭐...
본선에서 대중들에게 재평가는 받았지만 방송 내에서의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크루 대결에서 계속 지기만 했다. 심지어 칼을 갈고 나와도 져서 이현도가 직접 "이래도 져?"라고 했을 정도. 그나마 유일하게 승승장구하는 스윙스는 소년가장 타이틀을 획득. 공연보다 프로듀싱적인 관점에서 멤버를 뽑았는데, 이것이 패착이 되었다. 본인도 방송을 하면서 잃은 것은 시간, 건강, 근육, 그리고 승리라고 하면서 농담조로 한 몸 바쳐 언더힙합의 승리를 이끈 논개라고 했다.
제작진과의 사이는 썩 좋지 않았던지 제작발표회도 제작진과 싸운 후 표정관리가 안 된다며 빠졌고, 쇼미더머니2를 까려고 안하던 트위터 계정을 파기도 했다(…). 방송을 '''속 썩이는 여자친구'''에 비유하기도 했다.
방송에 대해 MC 메타와 함께 힙합플레이야와 인터뷰를 했다. #1 #2 방송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둘의 가치관이나 향후 계획에 대한 내용도 있다.
방송에 사용했던 비트를 무료 공개하기도 했다.#
2015년 2월 MC 메타와 함께 언프리티 랩스타의 4화에서 1:1 배틀 심사위원으로 참가했고, 언프리티 랩스타2의 첫 트랙 프로듀서로도 출연했다.

12.2. SBS 슈퍼매치


2013년 8월 16일, 23일 방영된 SBS 슈퍼매치의 선배 측 가수로 출연했다. 여기서도 선호도 조사에서 하위권이 되고 순번 1번을 뽑는 등 안습행진...김태우와 goDO라는 팀을 만들어서 "여행을 떠나요"를 불렀다. 이현도 본인은 프로듀싱만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무대에 섰다고 한다. 쇼미더머니2에서 본인의 크루였던 딘딘이 피처링으로 참여했다.
무대에 대한 평판은 썩 좋지 않으며, 가수 그만뒀던 티가 난다는 반응이다.

13. 음반 목록


이현도/음반 목록 문서로...

14. 기타


  • 이현도는 김성재의 사망 이후 표면으로 드러난 활동이 적었고, 가수로서의 인기도 듀스 시절에 비해 다소 떨어졌다. 게다가 2004년 이후로는 프로듀서 일에만 열중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한국 가요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직접 활동하던 시절에 비해 미미하다. 또한 싸이월드 사건으로 인해 기존의 좋은 이미지도 많이 실추되었다.
  • 취미는 전자 오락으로, 꽤 중증의 오락실 덕후라고도 한다.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호기심이 많고 원래부터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고 하며, 프라모델 덕후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지금은 폐간된 국내 프라모델 전문지 취미가에도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사실 상문고등학교에서 김성재와 처음 만나서 급속도로 친해진 계기도 바로 프라모델 덕분이었다. 일본에서 살다 온 김성재는 프라모델이 일본에서 얼마나 유행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이현도와 이야기가 잘 통했던 것이다. 하지만 학교의 다른 급우들을 비롯해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은 프라모델을 좋아하는 이현도를 이상하게 생각했고, 그래서인지 듀스 2집 수록곡 Go! Go! Go!의 랩 가사엔 프라모델을 비롯한 자신의 취미와 관련된 마음 고생했던 경험담이 들어가 있다. 동심을 가진 어른을 이상하다 하고, 전자게임, 프라모델, 만화를 싫어하고, 그게 왜 재미있는지 이해를 못하고, 그런 사람을 보며 나는 답답하고...
  • 위와 맞물려서 이현도 솔로 2집 타이틀곡 '미래'에 데이터 이스트의 1986년작 고전 슈팅게임 다윈 4078의 메인 테마곡 멜로디를 사용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이게 나온 시기에 MAME에서 다윈 4078을 막 지원하기 시작해서(...).
  • 애프터스쿨에서 활동했던 가희손담비와 더불어 미국에서 활동하던 그룹 S-blush의 프로듀싱 경력도 있다. 빌보드 클럽뮤직 부문 10위 안에 들며 나름대로 선방. 클럽차트 2위까지 올랐었다고 한다.
  • 듀스가 해체된 후 김성재와 사이가 나빠졌다는 루머가 퍼지기도 했는데 위에서 보다시피 사실이 아니며 실제 김성재가 사망했을 당시 이현도는 미국에서 즉각 귀국해 김성재의 빈소를 찾았으며 카메라나 주위 사람들조차 신경을 못쓰고 오열할 정도로 슬퍼했었다.[38] 김성재가 사망하기 바로 전날에도 무대가 훌륭했다며 들뜬 목소리로 전화통화를 하며 칭찬을 해주기도 했었다고.
  • 전북 현대에 응원가로 '전북 승리의 찬가'라는 곡을 헌정했다. 전북 경기도 종종 보러 가며, 선수들과 같이 있는 사진도 트위터에 간간이 올라온다.
  • 위에 언급했다시피 연예인 지옥에 등장하는 아르헨도가 그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이다.[39]
  • 정식으로 음악을 공부한건 아니지만 어릴적부터 피아노를 잘 치는것으로 나름 유명했고 후에 따로 화성학 등 공부를 했을때 피아노에서 늘 치던 5도권 진행이나 전조, 2-5-1 진행 등이 나와서 그간 피아노를 치면서 늘상 해오던 작법 스타일이 '이론'적으로 있다는걸 알고 놀랐다는 후문도 있다.

  • 김성재를 다시금 재조명했던 투유 프로젝트 - 슈가맨 2 11화에서 특별 게스트로 이현도가 출연할 것이라 추측했던 일부 시청자들과 팬들의 기대와 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물론 출연진들과 MC들 사이에서도 전혀 언급되지 않아 의구심을 품게 하기도 했는데, 이는 서술되어 있는 김성재 유가족과의 불화가 원인인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 NRG김환성과 친분이 깊었는데 생전에 그와 함께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자신의 팬카페를 통해서도 "환성이는 제게 동생과도 다름없었습니다."라며 그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바 있으며, 이 때문에 그의 사망 당일 예정되어 있던 서세원쇼 토크박스 왕중왕전 녹화 내내 말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또한 발인식 당일 NRG 멤버들과 함께 관을 운구하기도 하였으며, 3집 앨범 4번 트랙의 후속곡 'Party' 랩가사에서는 NRG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도. [40] NRG 3집 땡스 투에서도 이현도가 언급된 바 있다.

[1] D.O는 솔로 활동 때부터 쓰고 있는 예명으로, 여권에 적힌 영문명 DO를 보고 그냥 지었다고 방송에서 밝혔다. '''D'''eux Lee Hyund'''O'''라는 뜻도 있으며, 김성재잃은 후듀스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앞의 글자를 D로 찌그러진 O를 표현한다고 한다. '도'가 아닌 '디오'라고 읽는다. 그러나 본인은 물론 힙합계에서도 주로 본명을 부르고 D.O는 별명쯤으로 취급하는 듯하다.[2] 원래 D.O엔터테인먼트였으나 이후 사명을 바꾼듯하다.[3] 당시 예술고 중에서 문창과가 있는 학교는 전국에 안양예고 뿐이었다.[4] 어머니는 평안도, 아버지는 함경도 출신.[5] 참고로 김성재의 아버지는 고려대학교, 어머니는 이화여자대학교 출신이시다.[6] 이수만이 창립한 SM기획에서 구준엽과 강원래가 와와 1기로 활동하다가 군입대를 하게 되자 현진영은 박남정의 라이벌로 급부상했다.[7] 지상파 가요프로 1위에 올랐다.[8] 물론 한국 CD시장에는 1~2트랙이 실리는 싱글컷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이 앨범은 총 6트랙의 Maxi Single이다.[9] 친구에게(1집, 라이브), 여름은 가득히(2집), Sunshine(D.O Funk), Lifetime(3집)[10] 룰라에게 곡을 줬던 이유는 김성재 사망 당시 동료였던 룰라가 김성재의 빈소를 끝까지 지켜주고 발인까지도 함께 해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해 겨울 룰라는 3집 앨범을 발표 했으나 얼마가지 않아 표절의혹으로 인해 활동을 중단함과 동시에 그동안 얻었던 인기를 잃어 몰락을 겪게 된다. 이 상황을 지켜본 이현도는 친구의 장례식을 끝까지 지켜준 보답으로 룰라의 재기를 돕기로 마음을 먹고, 4집 타이틀곡 '3! 4!'를 만들어줬다.[11] 팀 자체를 양현석과 공동 프로듀싱했다.[12] 열거된 곡들은 모두 지상파 가요프로에서 1위에 올라본 곡들이다. 이 당시 이현도는 본인의 앨범은 실험적으로 만들면서, 다른 가수들에는 대중적인 곡들을 써줬다.[13] 이 이후 비는 직접 제작한 앨범을 내게 되는데, 그 첫 작품이 <Rainism>이었다. 그러나 이 때까지도 JYP의 색깔에서 못 벗어 난듯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이후 <Back To The Basic> 앨범에선 완전히 달라졌다. 참고로, 이 때 몇몇 곡에서는 이현도의 곡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좀 있는데(특히 김성재의 스타일을 대놓고 오마쥬했던 'Hip Song'이 그랬다. #) 이게 이현도에게 받은 영향. 특히 이후에 나온 싱글 <부산여자>는 대놓고 뉴 잭 스윙이었다.[14] 서태지와 아이들과 듀스가 해체한 후 양현석과 이현도가 2인조로 돌아온다는 소문이 돌아서 많은 이들을 설레이게 했다. 이런 소문 속에서 이현도의 음악과 양현석이 마케팅이 결합된 지누션이 데뷔해서 대성공을 거둔다. 사람들은 지누션에게서 서태지와 아이들과 듀스의 흔적을 느낀 것이다. 킵식스의 대실패 이후에 미래가 불투명하던 YG는 지누션의 성공으로 기반을 다지게 된다.[15] 사실 2000년대 초만해도 듀스가 무슨 힙합이냐며 평가절하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지금은 평론계나 리스너들이나 그의 공적을 대체로 인정하는 추세이므로 이런 소리를 하는 경우는 강경한 일부를 제외하곤 없다.[16] 후에 그가 소회하기를, 학창시절 때 '왜? 배째실라고 그려?(백제 신라 고구려)같은 말장난을 자주 쳤다고 하는데 이런 드립력이 후에 가사를 쓰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친구들 반응은 안좋았다고..[17] 난 이''''겼''''어 부와 명예 모두를 지''''녔''''어 어린시절 원하던 걸 다 이루게 ''''됐''''어 그러나 더 중요한걸 난 잃어버''''렸''''어 새로움에 ''''맞''''서 자신을 단련함을 이미 ''''벗''''어나 작은 성공속에 안주하며 편히 ''''쉬''''었어 그건 내게 가장 크나큰 enemy''''였''''어 이런 깨달음 속에 자신이 싫어''''졌''''어 이제는 새로운 세기에 다시 발맞''''춰''''서 꺼져가는 가슴 속의 불을 다시 ''''켰''''어 나의 뜻은 새롭게 불''''타''''서 새 날개를 활짝 ''''폈''''어스스로 자부할 수있는 더 큰 나로 거듭나기로 ''''했''''어.[18] 여담이지만 비슷한 시기에 발매된 드렁큰타이거의 2집 '위대한 탄생'의 가~하를 이용한 가사와 비교되기도 했는데 이현도 쪽이 압도적으로 퀄리티가 높았다. 드렁큰타이거는 퀄리티도 퀄리티지만 카와 타를 바꿔써서 더욱 까였다. 당시 틀을 벗어난다는, 기성세대의 대한 반항으로 일부러 바꿨다고 했지만, 글쎄.. 과연 진실은..[19] 심지어 이현도는 자신이 만든 비트가 레퍼런스의 대상이 된 넵튠스의 비트보다 더 깔끔하다고 자평하기까지 했다.[20] 클럽 마스터플랜의 컴필레이션 앨범인 MP Hip-Hop 2002 풍류에 수록된 곡. 스퀘어가 불렀다.[21] 고스트 버스터즈 2의 ost[22] 1998년 초에 발매된 곡으로서 2016년 기준 무려 18년전 곡이다. 당시 힙합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는 힙합바지와 플로어댄스가 90%이상을 점유했던 시절이었다. 1997~1998년 대다수 미디어는 HOT의 늑대와 양, 신화의 해결사를 일컬어 '메세지를 담은 정통 힙합곡'이라고 표현도 하곤 했다.1999년 '1999대한민국', '드렁큰타이거'등의 등장으로 힙합뮤직은 본격적으로 수면위에 오르게 된다.[23] 한국에서는 아르헨티나로 직접 가는 비행기 노선이 없다. 남아메리카 노선도 직접 가는 노선은 아예 없었다가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이 개최되면서 서울발 상파울루행 직항로가 뚫렸는데 이게 현재로서는 대한민국에서 남아메리카로 가는 유일한 직항 노선이다.[24] 1집 사자후부터 4집 힙합구조대까지 전부 미국에서 작업했고, 다른 가수들의 앨범 작업도 대부분 미국에서 했다.[25] 이현도의 싸이월드를 오래전부터 봤던 몇몇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처음에는 점잖게 답변했으나 몇몇 사람들이 '김성재에게 부끄럽지 않느냐' 등의 인신비방과 욕설을 계속 퍼부으며 끈질기게 악플을 달자 참지 못하고 막말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런 발언에 면죄부가 주어지지는 않는다.[26] 현재는 삭제되어서 원본글을 찾을 수 없다.[27] 10대~30대 남성층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유명인의 병역에 대해서 상당히 민감한 게 대한민국 정서이다.[28] 나온지 얼마 지나지 않자 이현도는 오인용에게 유감을 표했고 비슷한 시기에 오인용이 문희준 측에 의해 고소당하는 상황까지 닥쳐와서 구 연예인 지옥은 강제 종영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29] 의외의 인맥이지만 둘은 친분이 있다. 이후 D.O Funk 앨범에 박찬호가 나레이션으로 참여했다. 듣기[30] 3번 쓰러져도 4번 일어난다는 의미이며, 듀스 고별 콘서트에서 이현도가 '상처'를 부르기 전에 외쳤던 구호이기도 하다.[31] 그로 인해 그의 솔로 1집 '사자후' 발매가 3개월 가량 늦어졌다고 한다.[32] 하지만 체감인기가 절정기에 비해서는 많이 못 미쳤으며, 4집에서 유일하게 이상민이 작곡한 '아자'가 다시 한 번 표절시비로 곤혹을 치르면서 활동을 일찍 접어야 했다.[33] 물론 진심으로 화가 난건 아니고 어처구니 없다는 투로 얘기했었고,음악의 신이 적힌 모자를 쓰고 사진을 보내줘서 전화통화 당시 음악의 신 쪽에서 사용하기도. 애시당초에 그 얘기를 들으며 얼굴이 뻘게지도록 껄껄대는 이상민 반응만 봐도 뭐.[34] 거기에 이현도 본인이 아저씨가 다 된 모습이어서…[35] 이 역시 어쩔 수 없이 알 수밖에 없던 스윙스를 제외하면 일부러 찾아보지 않았다고 한다.[36] 대표적인 게 프리스타일로 호평을 받으며 MC 메타에게 합격했던 지조를 본인은 취향 차이였다며 떨어트린 부분.[37] 다만 이는 대립 구도를 만들기 위해 편집으로 과장된 면이 있긴 하다. 7명 중 한둘과만 갈등한 것을 전체와 갈등한 것으로 편집한다든지... [38] 다만 김성재 사후 김성재의 어머니와는 저작권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39] 하지만 이를 의식했는지 오인용측 에게 강한 유감을 표했다.[40] '마치 나와 친구같이 노는 NRG 동생들처럼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