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본선 1라운드/A조 승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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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패자조 1경기에 이어 벌어진 한국과 일본의 경기는 많은 이들의 이목을 받았다. 특히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의 한국의 선전과 2008 베이징 올림픽 야구에서 일본을 2번 연속 잡아내며 금메달을 따내는 모습에 일본의 관심은 상상 초월이었다. 베이징 올림픽 준결승전 이후 오랜만에 일본과의 국제대결인 만큼 이날 도쿄돔은 만원 관중이였으며 외부 구역에도 많은 관중들이 몰려 있었다.
일본은 대표팀 에이스이자 '''현역 메이저리거''' 마쓰자카 다이스케가, 한국은 선발 투수로 '''新 일본킬러'''로 평가받던 김광현이 나섰다. 마쓰자카는 한국 대표팀과의 악연이 있었는데 2000 시드니 올림픽 야구 경기에서 2번 모두 선발로 나왔지만 '''이승엽'''에게 결승 홈런과 결승타를 주면서 패전 투수를 기록, 일본 대표팀의 목메달에 기여한 바가 있다.[1]
경기 경기 중계는 SBS에서 맡았으며 캐스터 배기완, 해설 박노준.[2]
2. 경기 결과
기록지
- 승 : [image] 마쓰자카 다이스케(1승)
- 패 : [image] 김광현 (1패)
- 홈런 : [image] 무라타 슈이치(2회 3점, 2호), [image] 조지마 겐지(6회 3점, 1호) [image] 김태균(1회 2점,1호)
- Man of the Match : [image] 마쓰자카 다이스케
2.1. 선발 타순
2.2. 선발 수비 포메이션
2.3. 경기 내용
선취점은 1회초인 일본의 공격이였다. 스즈키 이치로가 '''2구'''만에 김광현에게 안타를 치며 나카지마 히로유키의 안타까지 무사 1,2루의 위기가 있었다. 3번 아오키에게 안타를 맞으며 1점을 빼앗겼다. 이후 4번 5번 무라타와 오가사와라 미치히로를 삼진으로 봉쇄 했으나.. 6번 우치카와 세이이치에게 2타점 적시타를 맞았다. 이후 시애틀 소속의 후쿠도메 타석에는 삼진을 잡으며 1회부터 기류가 이상하게 흘러 들어갔다.
이후 대한민국도 점수를 냈다. 정근우가 안타를 치며 출루 3번 김현수가 우전 안타를 때렸지만 3루까지 내침 노렸던 정근우가 아슬하게 세잎이 되었고 마침 이치로의 송구에 3루 수비 무라타가 중계플레이를 받아 2루로 뛰어가던 김현수를 태그 아웃을 시키며 아쉽게 아웃 카운트를 만들어 버렸다. 이 후 4번타자 김태균이 빡쳤는지 마쓰자카를 상대로 좌중간 '''대형 140M 2점 홈런'''을 치며 순식간에 기류는 한국의 방향으로 기세가 흘렸다. 그러나, 점수는 여기까지뿐 다시 2회로 넘어와 조지마에게 안타를, 이와무라에게 볼넷, 이치로에게는 '''기습 번트''' 내야안타를 주며 나카지마 타석에 밀어내기 볼넷 및 무라타의 10구 승부 끝에 3점 홈런을 내주며 2회부터 승부가 기울렸다. 결국, 김광현은 3이닝 8실점을 하며 국제 대회에서 일본에게 큰 점수와 패전을 먹힌건 이 때가 처음이였다. [3]
이 후 정현욱과 장원삼이 올라와서 불을 끄려 했지만, 되려 추가 점수를 주면서 10:2 까지 달아 났으며. 이 후 이재우가 대표팀 마지막 투수로 나왔으나 조지마 겐지에게 3점 홈런 포함 4실점을 하며 완패를 당했다.
일본의 1선발 마쓰자카 다이스케를 비롯한 일본 투수진에 실력차를 드러내면서 완전히 밀리며 일본에게 14:2라는 충격적인 스코어로 7회 콜드패 당했다.''' 이때의 자칫 포기한듯한 투수운용[4] 은 일부러 진것이 아니냐는 주장을 낳았으나, 모든 경기가 중요하지 않은 이번 WBC 새로운 룰을 고려해볼때, 김인식 감독은 중국전을 쉽게 잡을 수 있다는 판단하에 선발이 일찍 무너진 경기의 중요도를 크게 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일본도 마쓰자카가 4회까지 2실점 호투를 하며 나머지 불펜들을 대거 가동시키며 와타나베 슌스케 - 스기우치 토시야 - 이와타 미노루 이어지는 무실점 호투를 하였다.
대한민국의 선발투수였던 김광현이 초반 1⅓의 이닝 동안 8실점을 한 것은 그날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일본이 김광현에 대해 철저히 공략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일본은 2연승을 거두며 2라운드 진출을 확정지었고, 대한민국은 대만전 승자인 중국과 2라운드 진출권을 가지고 다투게 된다.
3. 여담
- 이날 경기는 프로선수가 참가한 1998년 방콕 대표팀 이후, 유일무이한 콜드게임 패배이자, 최다 실점 경기이기도 하다. 의외로 박빙의 승부가 아닌 콜드게임 이라는 면에서 충격이 좀 크긴 했었다. 이 때만 해도 다음 투수를 생각했어야 할 정도로 대표팀에게는 심각한 고민거리로 남았다. SBS는 이 날 클린업 트리오 타선을 중계 내내 이야기 하면서 결정적 일 때 한방 해줘야 한다고 그리 말했는데, 보는 사람들도 내내 기대했지만, 경기 내용대로 대패 하여 기존의 기대감이 술술 사라지나 했으나, 어디까지 예선이였을 뿐.
[1] 일본은 그간 일본의 사회인 야구 대표팀으로 국제대회를 참가했으나 처음으로 대표팀 선수들을 차출하기 시작한 것은 2000 시드니 올림픽 아시아 예선이었던 1999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였다.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포수로 손꼽히는 후루타 아쓰야를 비롯, 헤이세이의 괴물 마쓰자카 다이스케 등 프로급 선수들과 사회인 야구 선수들로 구성한 대표팀은 잠실에 열린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해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이후 베스트나인을 프로 선수로 꾸린 것은 2004 아테네 올림픽의 아시아 예선인 2003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우리에겐 삿포로 참사로 유명한 그 대회)였으며 메이저리거가 포함된 올스타가 출전한 것은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부터 였다.[2] 이 두사람은 같은해에 있던 코시 해설을 말아먹었는데 일조 하셨으며 각종 커뮤니티에서 엄청나게 까였었다. 잘 모르는 위키러나 야빠들은 '''기아우승''' 항목 참조.[3] 사실 김광현이 부진했다기보다는 일본이 김광현을 굉장히 연구했다는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일본은 2008 베이징 올림픽 직후, 김광현에 대해 철저한 연구를 했었다.[4] 김광현을 계속 두고, 잘던진 정현욱을 일찍 빼는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