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터키 관계
1. 개요
이웃 국가인 그리스와 터키는 투르크의 서진이 시작된 무렵부터 줄곧 앙숙이었다.
2. 역사적 관계
2.1. 전근대
셀주크 제국, 룸 술탄국, 오스만 제국 등, 동로마 제국과 해당 국가들은 끝없이 반목해 왔다. 특히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동로마 군대가 참패하고 1204년 제4차 십자군까지 연타당하며 쇠망하고 오스만 제국이 14세기 이래 소아시아와 발칸 반도를 점령하면서[1] 1453년 동로마 제국이 완전히 멸망하고 트레비존드 제국까지 합병당한 뒤, 헬레니즘의 후예인 '그리스 세계' 전역이 튀르크의 판도에 들어간다. 그야말로 '''그리스 역사상 최악의 암흑시대.''' 이후 간헐적인 독립 움직임이 몇 번 있었지만 튀르크에 의해 대부분 쉬이 진압당했다.[2]
오스만 제국의 속지정책은 근대화된 식민제국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 없다. 애초에 오스만 제국은 전근대제국이다. 오스만 제국의 지방정책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도 단위쯤에 해당하는 상위 행정단위는 중앙에서 파견한 총독들이 통치하고, 면이나 리 쯤 되는 하위단위는 현지 유력세력들이 자치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때문에 그리스 독립전쟁 직전까지 발칸 지역은 그리스인 군주가 통치하는 지역들도 있었고 현지의 유력가인 그리스인 상인이나 귀족들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던 것이다. 전근대 제국들이 다 그렇지만, 누가 어쨌든 오스만 제국 황제의 신민일 뿐. 오스만 제국의 신분은 군인 및 관료, 성직자들인 아스케리(Askeri)와 평민인 라야(Rayah), 노예인 쿨(Kul) 등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오스만의 법에 따르면 라야나 쿨은 물론이고 아스케리조차 황제가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제국 내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오스만 제국은 그 반란 주체가 누구든 똑같이 가혹하게 진압했는데, 이는 청나라의 상황과도 비슷하다. 군벌과 향토 유력 세력들이 자치를 하고 있는 곳이 많았고 그들이 지방의 군사나 경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반란을 방치하거나 미적지근하게 처리해버리면 오스만 제국의 근간 자체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오스만 제국은 전근대 이슬람 국가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민족적 관점으로 보고 차별한 것이 아닌 종교적 관점으로 지배층, 피지배층을 나누어서 차별했는데, 오스만의 팽창기 및 성장기인 15세기 중엽까지는 당시 기준으로 차별이 심하다고 할 수는 없는 수준[3] 이었으나 오스만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17세기 이후에는 그 수준이 달라지게 된다. 딤미들에게 거둬들이는 인두세인 하라지는 차차 증가하기 시작하여 가면 갈수록 비(非) 무슬림의 부담을 가중시켰으며, 이걸 버티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 산발적인 반란을 일으키기에 이르렀으며, 오스만 정부는 그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종교적인 박해를 가하기 시작하게 된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들이 쫓겨나 살해당하기 시작했으며, 수도 코스탄티니예에서는 이교도들을 살해하는 것이 처벌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묵인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4]
결국 박해를 받다 못한 비 무슬림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거나 타국으로 빠져나가기에 이르렀으며, 그 결과 상당수 정교도 지식인층은 이탈리아로, 농민이나 상공업자들은 헝가리나 독일, 러시아, 폴란드 등으로 유출되는 등 발칸지역은 지속적으로 쇠락, 17세기에 이르러 카파도키아의 정교도(그리스인)들은 개종이나 추방등으로 대부분 사라지고 무슬림인 투르크인들로 대체되었으며, 그리스인들이 영향적이 비교적 강했던 시노페와 트라브존등의 폰토스 지역도 18세기에 이르면 역시 투르크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20세기 그리스-터키 전쟁 시기 그리스인들은 소아시아에서 이즈미르와 트라브존 시노페, 에게해 제도, 카스타모누, 삼순 같은 몇몇 해안 지역들에 분리된 채 남아있었으며 이것마저도 전쟁 후 인구교환으로 그리스로 넘어간 에게해 지역을 뺀 나머지는 완전히 사멸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제국은 멸망 당시까지 이상하게 발칸에 집착했는데, 아무래도 가장 인구밀집도가 높기도 하거니와 수입이 많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장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기 이전까지[5] 중용된 재상이나 주요 대신들을 보면 이 지역 출신 아닌 사람 찾기가 더 힘들 정도.
민족주의의 시대(19세기) 이전까지는 그리스인이라는 개념조차도 애매모호한 개념이었다. 앞서 로잔 조약 당시 인구교환 문제를 언급했지만, 이 지역에서 민족의 구분은 혈통도, 출신도 아닌 '''종교'''였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발칸 지역에 거주하는 '''동방정교회'''를 믿는 모든 민족들을 싸그리 '룸'(Rum)이라고 불렀으며, 당시 그리스인들도 스스로를 '로메이'(Ρομαίοι)라고 불렀다. 둘 다 '로마인'이라는 뜻이다.[6] 이는 자신들의 신민을 민족 불문하고 '로마인'이라고 불렀던 동로마 시대의 용례에서 유래된 것으로서,[7] 동로마가 건재하던 시절에는 '국가적인' 개념으로 쓰였던 '로마인'이란 단어가 동로마 멸망 이후에는 동로마인의 절대다수가 정교회 신도였다는 점에 기인하여 '종교적인' 개념으로 변한 것이었다.[8] 즉 오스만 시대에는 그 민족이 뭐든 모국어가 뭐든 관계없이 오로지 종교만을 가지고 로마인인지 아닌지를 판단했기 때문에, 그리스인뿐 아니라 루마니아인과 불가리아인 등도 정교회 신도라면 모조리 '룸'이라고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9] 마찬가지로 무슬림은 튀르크인이든 쿠르드인이든, 알바니아인이든, 심지어 그리스인이든 전부 무슬림이라고 불렸다.[10] 근대 루마니아, 불가리아인, 터키인 등의 근대적인 민족 개념이 생겨난 것은 그리스의 독립 이후 자극받은 각 지역 민족주의자들의 활동으로 인해서이다. 그리스의 독립 이후 그리스 본토에 살고 있던 알바니아인 및 정교회를 믿는 튀르크계 주민들의 그리스화 정책도 마찬가지로 민족주의의 영향하에 이루어졌지만, 이건 별개의 항목으로 적어야 할 일이다.
2.2. 1830년 그리스의 독립 이후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19세기 초 쟁쟁한 열강의 동방문제에 의한 지원에 힘입어 그리스는 가까스로 독립한다. 이때부터 양국의 대립은 점점 더 강해졌다. 1850년대부터 양국은 러시아-튀르크의 대립이 있을 때마다, 혹은 그 사이사이마다 무력 충돌과 작은 규모의 전쟁을 계속했으며, 1896년 크레타 섬의 정교도 반란으로 일어난 크레타 전쟁 때는[11] 이듬해까지 그리스와 튀르크가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1896년 전쟁 당시 그리스는 테살로니키 일대의 발칸반도 북부까지 점령하려 북진했지만 오스만 제국에 가로막혔고, 한편 러시아의 압력으로 전쟁은 오스만 제국이 크레타 섬을 독립시키는 것으로 끝났다. 크레타에는 크레타 자치국이라는 사실상 그리스의 괴뢰국가가 들어섰으며[12] 결국 발칸전쟁 직전인 1911년에 그리스에 합병되는 수순을 밟았다.
이런 상태에서 1911년 이탈리아가 리비아의 영토를 노리고 튀르크와 전쟁에 돌입하여 튀르크를 몰아붙이자, 그리스는 러시아의 지원을 등에 업고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불가리아, 루마니아와 동맹을 맺고 -발칸 동맹- , 1912년 튀르크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니 이것이 제1차 발칸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동맹군은 열강의 예상을 깨고 튀르크군을 격파해 발칸 반도에서 튀르크를 거의 축출했다. 그리스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제외하면 유럽 내 튀르크 영토 중 가장 중요한 '마케도니아'[13] 남부와 소아시아 연안의 에게 해 제도를 장악했는데, 이때의 대성공으로 튀르크와 그리스와 관계는 크게 역전된 것처럼 보였다.
이런 기세를 탄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제외한 동부 트라키아와 스미르나 일대까지 장악하면서 아나톨리아에 발을 들이자, 자국의 힘을 과대평가한 그리스는 소아시아에 거주하는 그리스인을 보호하고 동로마 제국 고토를 수복한다는 이유로 터키의 본토인 아나톨리아에까지 침공하면서 터키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14] 그리스 본토에서 벌어진 독립 전쟁이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게릴라전으로 터키, 이탈리아 등의 강대국도 물리친 그리스였으나… 터키의 홈그라운드인 소아시아에서는 패배하여 역으로 소아시아에 살고 있던 그리스계 주민이 죄다 쫓겨나 버렸다.[15] 다만 로잔 조약에 따라 에게 해의 섬은 터키 영토의 코앞에 있는 것까지 죄다 그리스에게 넘어갔다(...). 같은 패전국이었던 독일에 비하면 좋은 대접이었지만... 현대 터키 영토의 코앞에 있는 섬들까지 그리스 영토가 된 것은 터키의 해군이 약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터키와 그리스의 현재의 국경선이 설정된 것은 제1차 세계 대전 직후이며, 오스만 제국이 세계 대전에서 패배, 항복한 뒤 이스탄불에 진주한 연합군의 우두머리인 영국인 고등판무관이 그리스-터키 전쟁을 지켜보다가 그리스군이 터키군에게 져서 에게 해로 밀려나자 궁지에 몰린 그리스군을 구하고, 전쟁이 확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신생 터키 정부에 압력을 넣어 이스탄불 부근의 땅 아니면 에게 해의 섬들 둘 중 하나를 가지라고 제안하자 터키 정부가 이스탄불 주변 땅을 가지겠다고 선택해서 에게 해가 그리스 땅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는 로잔 조약으로 공식화된다. 그리스는 제1차 세계 대전 연합국으로 참가해 득본 셈. 터키는 독일편을 든 덕분에 영국에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고 그 결과 망했어요...[16] 이것 때문에 아직도 싸우고 있다.
정작 이 전쟁의 양당사자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와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전쟁이 끝나고 딱 10년이 지난 1933년 서로 만나 동맹 및 우호 협력 조약을 체결했고, 1934년에는 베니젤로스가 아타튀르크를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다. 후술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그리스, 터키 양국간 국민감정의 악화는 키프로스 문제와, 양국의 정권을 잡고있던 군사독재세력이 자국의 민심을 돌리기 위해 주변 국가들을 "민족의 자주독립을 방해하는 적"으로 여기는 극단적인 민족주의 사상을 강조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2.3.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런 상황이었으니 그리스가 나치에 의해 털렸을 때 터키는 내심 고소했겠지만(…)[17] , 그래도 터키는 20여 년 전 독일 편을 들었다가 나라가 완전히 절단날 뻔한 경험 때문에 독일의 수많은 참전 권유에도 추축국에 가담하지 않고 소련의 압력으로 독일 패망 직전에 연합국에 가담할 때까지 중립을 고수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동유럽 일대를 휩쓴 소련군과 그에 동조한 파르티잔의 활약, 그리고 얄타 회담에서의 세력권 획정 결과 그리스를 제외한 발칸 반도 전체가 공산화되면서 소련의 영향권 안에 떨어졌다. 그리고 유일하게 공산화를 피한 그리스 역시 영국으로 망명했던 왕실 및 정부군과 점령된 본토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던 공산주의 계열 파르티잔 사이에 내전이 벌어져 수만 명의 사상자 끝에 정부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터키는 독립 전쟁 당시의 우애 관계는 어디로 가고 소련이 카르스, 반, 트라브존 등의 동부 영토와 다르다넬스, 보스포루스 해협의 무해통항권을 요구하며 터키 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야욕을 드러내자 위기감을 느꼈다. 위기의식을 느낀 두 나라는 공산주의에 대항해야한다는 생각에 중재국 미국에 의해 사이좋게(?) NATO에 가맹하기에 이르렀고 오히려 1950년대 초반만 해도 서로가 이제 동맹을 맺었던 적도 있다. 한국전쟁 때 둘이 같이 UN군으로 한국을 도와 참전도 했었다. 당시 터키에선 그리스보다 더 악랄한 소련과 공산주의를 견제하자는 움직임이 거셌고 그리스와 이제 동맹이라는 인식을 정부에서 홍보할 정도였다. 그리고, 소련을 견제하고자 공산국가였으나 소련이 주도 하의 질서를 거부하고 독자노선을 채택한 유고슬라비아와도 우호를 다지며 1953년에는 터키, 그리스,유고슬라비아 3국 발칸 동맹까지 맺었다.
터키군들이 그리스로 파병훈련가서 반갑게 인사하고 같이 스포츠 대회도 치루며 사이가 조금은 좋아지는가 했으나, 이스탄불 포그롬(약탈)이 벌어졌다. 이것은 1955년 키프로스에서 독립움직임과 같이 터키계에 대한 테러가 벌어지자 터키에서 반그리스 감정이 폭발해 동맹도 깨지고 나아가 터키 내 그리스계에 대한 테러로 이어진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1000개가 넘는 그리스인이 운영하는 가게가 박살나고 100여개의 그리스계가 운영하던 호텔 및 70개가 넘는 그리스 정교회 성당이 파괴되었으며 약 30여명 그리스계가 살해되었던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많은 그리스계 터키 거주자들이 터키를 떠나가야 했다.
거기에 키프로스 전쟁까지 일어나면서 이제 두 나라 국민감정의 악화가 극에 달한 나머지 터키인은 '''TV에 그리스인이 나타나기만 해도 토마토를 던지며 괴성을 지른다'''고 한다.[18] [19]
1970년대 이후 오스만 제국과 영국 제국주의가 남긴 유산인 키프로스를 두고 양국간의 전투가 벌어진 뒤에는 키프로스를 남북으로 쪼개져서 각자가 지원하는 정부를 세워버림으로서 비공식 분단국을 만들어 놓았다. 터키가 지지하는 북 키프로스(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에는 터키인을 마구 이주시켜서 인종비율까지 변해버렸다. 그러나 북 키프로스를 국가로 인정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오직 터키뿐이다…
심심하면 국경지대에서 군인들이 총격전도 벌인 바 있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저서 《먼 북소리》를 봐도 1980년대에 그리스 여행갔더니 터키와 국경분쟁으로 그리스군이 터키군 총에 맞아 죽은 일로 사람들이 터키 욕을 하고 있더란다. 며칠 뒤에 터키 여행갔더니 터키 사람들도 똑같이 터키군도 총에 맞아 죽었다면서 그리스 욕을 하고 있고(…).
헐리웃에서 대박을 거둔 영화 <나의 그리스식 웨딩>이란 영화에서는 터키놈들처럼 멍청하게~ 라는 말이 욕으로 나오는 그리스인들이 자주 나오는 걸 봐도 알 수 있다.
2000년이 지난 현재 그리스와 터키 관계는 유사이래 최고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20] 그리스가 터키의 EU 가입을 지지하고 있고, 현재진행형인 유럽 난민 사태에 있어서도 양국은 적극 협력하고 있다. 그리스 경제위기에 터키가 투자지원을 하기도 하고, 양국 간 관광객 수도 점차 늘고 있는 추세였다. 비록 터키에서 2016년 7월 15일에 벌어진 쿠데타 미수사건 이후 그리스로 피신한 쿠데타 측 군인 7명을 그리스에서 억류하고 터키로 돌려보내주지 않고 있어서 다시 양국 간 갈등이 벌어질 조짐이 보이고는 있으나, 적어도 양국민 간의 감정은 과거에 비교해 매우 우호적이다. 무흐테솀 유즈이을을 비롯한 터키 드라마가 그리스에서도 인기를 끌면서 터키어를 배우고자 하는(!) 그리스인들도 늘고 있으니,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겨우 10년 전만 하더라도 무심코 터키어를 쓰거나, 터키에 대해 우호적으로 발언하면 "왜 그딴놈들 편 드냐?"라고 따지는 그리스인이 많았던 것에 비하면 말이다.
2.4. 현재
한국전쟁 때 터키와 그리스 모두 한국에 파병을 하였다. 어찌 보면 같이 싸운 셈. 이와 관련된 일화도 있는데 중공군 당국이 자기네 포로수용소에 있는 터키군 병사들에게 공산주의를 가르치려고 했는데, 자기들 중에 터키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할 줄 아는 사람을 뽑아서 보낸다는 것이 하필 '''그리스군 포로'''를 보냈다. 효과는 전혀 없었다는 듯.
우선 그리스는 그리스 내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상황이었으며, 터키보다 영토와 인구가 다섯 배는 더 작은 소국이면서도, 그리스와 비슷한 처지에 처해 있던 한국에게 5000명이나 파병했다. 그리고 그중 192명의 사망자와 543명의 부상자라는 희생을 치렀다(터키는 15000명 파병, 전사자 721명과 부상자 2,111명.).
그래도 문화적으로는 꽤 가까운 편이다. 동유럽과 중동에서 인기 많은 터키 드라마의 주요 수입국중 한 곳이 그리스이다. 그리스에서 터키 드라마의 자국 흥행을 분석하는 영화가 나올 정도. 가끔씩 그리스 가수들과 터키 가수들이 양국 간의 화해를 주제로 함께 콘서트를 열고 음반을 같이 내기도 한다.
2016년 터키 군부 쿠데타 불발 사태로 쿠데타에 참여했던 터키군 8명이 그리스로 망명하면서 두 나라 사이에 망명 반란군의 처리를 놓고 양국간 외교 분쟁이 벌어지고 있다.
2019년 2월 5일에 에르도안 대통령은 앙카라를 방문한 치프라스 총리와 만나 회담을 가졌고, 양국간에 화해를 모색한다고 밝혔다.
치프라스 총리가 에게 해의 섬으로 가던 도중에 터키 전투기로부터 위협비행을 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게다가 에르도안 대통령이 하기아 소피아를 모스크로 바꿀 수 있는 발언을 하자 그리스측은 반발했다.
터키와 리비아가 EEZ 경계를 새롭게 확정시키면서 그리스와의 무력충돌이 생길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모스크로 바꿀려는 움직임이 생기자 그리스에선 반발하고 있다. 그리스 정부도 하기아 소피아의 모스크 전환은 문명 세계에 대한 도발이라고 비판했다. 하기아 소피아가 모스크로 전환된 7월 24일에 그리스는 터키를 비난했다.
터키 해군이 영해 조사에 나서자 그리스가 반발하고 있다.#
터키 정부는 그리스와 키프로스 등의 반발을 불러일으킨 동지중해 천연가스 시추를 잠정 중단하기로 했다.# 동지중해 분쟁과 관련해 훌루시 아카르 국방부장관은 그리스와 며칠뒤에 회담을 가진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집트-그리스 EEZ 합의를 하자 다시 시추 지시했다.# 이러면 미중갈등의 대리전이 된듯.
훌루시 아카르 국방부장관은 그리스와의 갈등은 대화로 풀어야 한다고 밝혔다.#
양국 간 긴장도가 높아지자 프랑스군이 지중해 동부를 파견했다.#
동지중해 천연가스 탐사를 두고 대치 중인 가운데 양국 군함 간 '접촉사고'가 발생했다.#
둘이 죽어라 뭐라고 헤도 그래도 이득이 된다면 서로 손잡는건 당연히 있다. 아제르바이잔을 통해 카스피 해 가스 자원을 러시아에 연결하지 않고 조지아-터키를 통해 유럽으로 연결하려던 나부코 가스 라인도 처음에는 터키 다음에 불가리아를 거쳐 이탈리아까지 연결하려고 했으나 무산됐다가 2018년부터 실제 건설을 시작한 트랜스 아나톨리아 가스 파이프 라인은 불가리아 대신 바로 그리스가 터키에 연결되어 유럽 중심으로 가스를 공급한다.
그리스가 터키와의 군사력 충돌 예방 차원에서 프랑스제 라팔 전투기 18대와 소형 구축함·해군 헬기 각 4대 등의 구매 계획을 밝혔다.# 터키가 동지중해에 파견했던 지질조사선을 철수한다.#
그리스 대통령이 터키와 인접한 작은 섬을 방문하자 터키측이 반발했다.#
9월 15일에 메블뤼트 차우쇼을루 외무장관은 그리스 신문 카티메리니에 기고한 글에서 조건없는 대화를 주장했다.#
그리스와 터키가 그리스 외무장관이 탄 비행기의 터키 영공 통과 문제를 두고 신경전을 벌였다.#
10월 30일날 발생한 대지진으로 터키 서부 해안지방, 그리스 도서지방의 피해가 발생했다. 미초타키스 총리는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위로의 말을 전달했다. 에르도안 대통령 또한 "본인 및 터키 국민의 이름으로 모든 그리스에 위로의 말을 전합니다. 터키 또한 그리스의 상처를 극복하는데 도움을 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 두 이웃이 어려운 시기에 서로 의지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삶에서 대부분의 것들보다 더 소중합니다." (Şahsım ve Türk halkı adına tüm Yunanistan'a başsağlığı diliyorum. Türkiye de Yunanistan'ın yaralarını sarmasına yardım etmeye her zaman hazır. İki komşunun zor zamanlarda dayanışma göstermesi hayattaki birçok şeyden daha değerlidir)라고 말해 오랜만에 그리스-터키간에 훈훈한 대화가 오갔다. 또한 에르도안 대통령은 트위터로 미초타키스 총리의 계정에 리트윗해 해당 문구를 영어로 실었다. #
2016년에 동지중해 관련 회담이 중단되었다가 5년만에 재개했다.#
3. 무기 구입
또한 두 나라 전투기끼리 서로 꼬리물기를 하는(하지만 무장을 발사하지는 않는) 일촉즉발 상황이 발생한다. 심지어 이 와중에 공중충돌 사태가 나서 두 나라 전투기가 추락하는 사건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두 나라 모두 미국에서 구매한 F-4와 F-16을 주력으로 쓰고 있다(터키와 그리스의 경쟁덕에 돈 버는 것은 미국…?)[21]
그리스가 BMP-3 구입계약을 러시아와 체결하면서 터키의 K-21 도입이 기정사실화 되어가고 있는 상황. 이유는 간단하다. '''터키는 만약 그리스가 신무기를 산다면, 터키도 동급 혹은 그 이상의 무기를 같은 수량으로 산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BMP-3와 동급이면서 터키가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의 서방제 무기는 K-21이기 때문이다.
만약 K-21의 구입계약이 진짜 체결된다면, 터키는 세계에서 첫 번째로 한국제 기갑무기 패키지(…)를 갖게 되는 나라가 된다(K-9 + K-2 + K-21). 어쩌면 한국제 무기들의 첫 실전은 터키군이 치를 지도 모르겠다고 예상해왔지만, K-9의 경우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 사태에서 대한민국 국군이 '''데뷔전'''을 기록했다. 다만 전면적인 첫 실전은 역시 터키가 시리아에서 치르게 될 듯하다.
대한민국의 K-9 자주포의 엔진은 독일 것을 사용 중인데, 터키의 숙적인 그리스가 독일에 압력을 넣어서 독일이 한국에 엔진을 못 팔게 하려 한 적이 있다. 물론 터키에 비해 그리스의 국력상 한계가 명백했기에 결국은 실패했지만 말이다.
4. 터키의 EU 가입
터키는 유럽연합 가맹을 열심히 노리고 있지만 1960년대 EU 준회원국 가입 신청을 통해 준회원국 자격만 얻고, 1987년 신청한 정회원 자격은 지금까지 승인이 나지 않고 있다. 현재 회원국 가입을 위한 협상이 진행중이다. 결렬될 가능성은 매우 낮으나 시간이 매우 걸릴 듯하다. 빨라도 가입은 2014~2016년 사이에나 가능할 듯하다는 전망이었으나 2020년까지도 가맹을 못 하고 있는 현실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그리스와 키프로스의 반대는 사실 EU에서 내세우는 표면적인 이유일뿐, 실제 그렇게 큰 영향은 미치지 못하고 있다. 본질적인 문제는 EU의 주도국가들이 자신들과 민족/종교/언어/문화가 모두 다른 새로운 대국의 가입을 꺼리는데 있다. 안그래도 EU 역내의 무슬림 이민자들과 난민 때문에 다문화주의에 대한 회의감이 팽배해 있는 상황에서 인구 8200만의 이슬람 국가 터키가 EU에 들어온다는 것은 큰 파장을 불러 올 수 있다. 더군다나 에르도안 집권 이후 터키는 오랜 세속주의 전통을 버리고 점점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이 조금씩 짙어지고 있어서 유럽의 지식인들이 상당히 불안해 하고 있다.
당장 터키가 EU에 가입한다면 독일을 넘는 최대의 인구대국이 EU에 등장하게 되고 6700만의 프랑스는 세번째로 밀려난다. 현재는 독일과 프랑스가 압도적인 인구와 경제력을 바탕으로 EU를 주도하고 있지만, 낮은 출산률 때문에 두나라 모두 장기적으론 인구감소가 거의 확실시 되는 상황에서 터키의 가입은 향후 EU의 세력구도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때문에 터키 가입문제를 두고 EU 국가들은 매우 난감한 상태. 문제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터키의 국력 때문에 유럽연합 내의 세력구도 자체가 개편될 가능성이 높고 이를 독일과 프랑스가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22] 그래서 이 EU의 두 거두는 모두 터키 가입에 반대한다. 그러나 대놓고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없는 게 터키의 지정학적 위치가 매우 훌륭해 친러시아 등 적국편으로 돌아설 경우 노답인지라...
2011년 이후 이스라엘과 터키 사이가 나빠져 그리스가 반사적으로 이스라엘과 우호관계를 맺기도 했지만 정작 그리스는 아랍연맹과도 우호관계가 깊고 이스라엘도 그리스처럼 죽기살기로 터키와 싸워보자는 반응은 아니다.
5. 지명 분쟁
이스탄불의 옛 이름이 콘스탄티노폴리스이며, 오스만 제국의 점령 이후 이스탄불로 바뀌었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상식이다. 그런데 그리스는 아직까지 이스탄불을 콘스탄디누폴리(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η)라고 표기한다. 사실 오스만 제국 시절만 해도 터키인들은 이스탄불을 '콘스탄티니예'(Konstantiniye)라고 불렀으며, 이스탄불이란 이름이 정착된 것은 공화국 이후의 일이다. 1930년대 터키의 우체국에서는 콘스탄티노플, 콘스탄티노폴리스, 콘스탄디누폴리… 아무튼 콘스… 뭐시기로 주소를 쓴 소포 및 편지를 일절 받지 않는 초강경수를 두며 '이스탄불'이란 이름을 각인시키려 했다.[23][24]
이는 비단 콘스탄티노폴리스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고, 터키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들은 거의 대부분 그리스-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지명도 그리스-로마 시대의 것이 발음만 살짝 바뀌어서 그대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앙카라(앙기라), 이즈미르(스미르니), 이즈니크(니케아), 부르사(프루사), 콘야(이코니온), 안탈리아(아탈리아), 카이세리(케사리아-마자카), 시와스(세바스티아), 에디르네(아드리아누폴리/하드리아노폴리스), 안타키아(안디오히아), 시놉(시노피), 아마시아(아마시아), 트라브존(트라페준다/트레비존드), 베르가마(페르가모) 등등…
이 때문에 그리스에서는 가끔 이런 도시들 이름을 자기들 식으로 쓰곤 한다. 예컨대 이즈미르를 연고로 하는 축구팀 이즈미르스포르가 그리스 AEK 아테네와 경기를 벌였을 때 그리스에서는 "스미르니(Σμύρνη)의 이즈미르스포르"라고 불렀다고 한다. 물론 그리스나 남키프로스 정도나 그렇게 하고, 같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불가리아나 세르비아 등은 두나라 모두와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들 식으로 부르거나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이름을 쓴다. 한 예로 불가리아는 그리스 제2의 도시 테살로니키를 솔룬이라고 부른다. 그리스가 테살로니키! 라고 해도 솔룬이라면서 고칠 생각을 안한다(…).
6. 인터넷에서
엄청나게 치고박고 싸우며 두 국가 네티즌들 간의 대립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편. 유튜브 등지에서 장황한 키배가 열리는데. 역사, 영토 문제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여러가지 황당한 주제로 싸움이 날 정도.
가끔씩 터키/그리스인이 그리스/터키에 여행을 갔는데 나쁜 놈들인 줄 알았던 그리스/터키인들이 친절해서 좋았다는 훈훈한 후기들이 올라오기도 한다.
그외에 뿌리깊은 그리스어내 터키어 영향, 터키어내 그리스어 영향을 알아내 놀라는 경우도 있다.
한일관계와 여러 모로 비슷한 점이 많다. 흔히 외국인들, 특히 서양인들에게 한일관계를 설명할 때 영불관계에 빗대 설명하는데, 비슷하긴 해도 현실적으로는 더 험악하단 면에서 그리스-터키 관계에 더 가깝다 보니 최근에는 이에 빗대어 설명하는 일도 많아지고 있다. 다만 상대방이 그리스-터키 관계를 잘 모르면 별 소용이 없다.
7. 관련 문서
- 그리스/외교
- 터키/외교
-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
- 그리스-터키 전쟁
- 국제정세
- 남유럽
- 분쟁
- 서아시아
- 전쟁
- 그리스/역사
- 터키/역사
- 그리스/문화 / 터키/문화[25]
- 그리스인 / 터키인
- 그리스어 / 터키어
- 그리스-키프로스 관계 / 터키-키프로스 관계
- 대국관계일람/아시아 국가/서아시아 국가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남유럽 국가
- 그리스-터키 지진 외교
[1] 사람들이 간과하는 게 있는데, 소아시아는 헬레니즘 시대 이래로 가장 그리스화가 잘 된, 그리스인들의 홈그라운드였다. 지금처럼 발칸 반도 남쪽 끄트머리에서만 사는 게 아니었다. 사실 현대 터키인도 대부분 그리스화된 아나톨리아인이 다시 튀르크화된 경우이며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그리스인들이 터키인과 사이좋게 잘 살았다.[2]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한 때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끄트머리 일부 를 수십 년 간 영유한 적이 있었다. 다만 테살로니카는 베네치아가 오스만 영토를 함락한 것이 아니라 동로마가 방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베네치아에 건네준 것이므로 애매하다. 해운국이고 도시국가인 베네치아로서는 거대한 영토형 국가인 튀르크처럼 거대한 영역을 그리스에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다만 테살로니카를 노리던 오스만은 도시의 주인이 동로마에서 베네치아로 바뀐 것을 미처 몰랐고 베네치아도 오스만이 자기네를 공격하려 하는 줄로 오해하여 1422년부터 1430년까지 테살로니카를 중심으로 전쟁을 벌였다. 이것이 이후 몇 차례 동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전쟁을 벌이게 되는 오스만 제국과 베네치아 사이의 제 1라운드.[3] 현대 영국의 역사가인 버나드 르위스(Bernard Lewis) 같은 이는 오스만 내 비(非) 무슬림의 지위가 동시대 유럽에서 이단으로 판정된 기독교도보다 나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4] 17세기 이전 같은 경우는 좀처럼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었다. 메메드 2세 같은 경우 보스니아를 정복하자 보스니아의 기독교도들을 철저히 보호할 것이라는 칙령을 발한 바 있으며, 쉴레이만 1세는 유대인 주치의인 모세스 하몬(Moses Hamon)의 진언을 받아들여 유대인들을 보호할 것이라는 칙령을 반포하기도 했다.[5] 구체적으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1453년부터, 17세기 중엽까지.[6] 제국 내에 거주하던 가톨릭을 믿는 주민들은 프랑기(Frangi)라고 불렀다. '프랑스인'이라는 뜻으로 마찬가지로 그리스인들도 가톨릭을 믿는 주민들을 프랑기(Φράγκοι)라고 불러 구분을 두었다.[7] 사실 '로마인'이란 개념이 민족을 넘어 국가적인 개념이자 하나의 사상으로 확대된 것은 기원전 1세기 초의 동맹시 전쟁을 계기로 로마 시민권이 이탈리아 반도의 모든 민족들에게 부여된 데서 비롯된 것으로서 매우 오래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제정 전환 이후 로마의 판도가 확장되어 감에 따라 자연히 시민권의 부여 대상 또한 확대되어 갔으며, 마침내 서기 3세기 초에는 카라칼라 황제의 안토니누스 칙령에 의거하여 이탈리아 반도와 속주를 불문하고 제국의 모든 자유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이 부여됨으로써 '로마인'이란 개념에 민족적인 색채는 공식적 · 법적으로 완전히 지워지게 되었다. 라틴계 로마인, 그리스계 로마인, 게르만계 로마인, 일리리아계 로마인, 트라키아계 로마인, 아르메니아계 로마인, 슬라브계 로마인 등등 민족이 뭐든 관계없이 제국 정부에 충성하며 스스로를 제국의 신민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으면 '로마인'이라는 하나의 통일된 기치 아래에 뭉칠 수 있었다는 것.[8] 사실 '종교적인' 개념으로서의 역사를 따진다면 '그리스인'이 '로마인'보다 훨씬 대선배다.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이후에도 이에 반항한 채 제우스와 헤라 등을 섬기는 다신교 신앙을 고수했던 '이교도'들을 당대인들은 '엘리네스(그리스인)'라고 불렀으니...[9] 오스만을 비롯한 이슬람 세력이 (동)로마인을 일컫던 명칭인 '룸'은 '그리스인'을 뜻한다는 설명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웹상에 널리 퍼져 있는데, 상술했듯이 '로마인'이란 개념은 그리스인만의 전유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같은 설명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당연히 이를 우리말로 옮길 때에도 '그리스인'이 아닌 문자 그대로 '로마인'이라고 번역해야 한다.[10] 유럽에서는 당대에 무슬림보단 튀르크라고 더 많이 불렀다. 19세기 이전의 그리스 문헌에서도 인종 상관없이 무슬림이면 죄다 무술마니(Μουσουλμάνοι) 혹은 투르키(Τούρκοι)라고 썼다.[11] 아이러니하게도, 크레타 반란이 일어난 바로 이해에 '평화의 제전'인 제1회 올림픽이 그리스 아테네에서 개최됐다.[12] 명목상 군주가 그리스의 왕세자이고 총리로 뽑힌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스스로부터가 열렬한 민족주의자로 통합(에노시스) 지지자였다.[13] 현대의 그리스 북부 거의 대부분, 북마케도니아 대부분, 알바니아 동부, 세르비아 남부, 불가리아 서부[14] 이러한 사상 자체는 그리스 독립 직후부터 있어왔다(이를 '위대한 사상(Megali Idea)' 이라 한다.). 즉 그리스가 독립하기는 했지만 그리스인들을 모두 끌어안은 나라가 되지는 못했으므로, 다른 민족의 차별과 폭정에 신음하는 각국(주로 튀르크인이 지배하는 소아시아 일대)의 그리스인들을 해방시키고 그들을 모두 끌어안은 대국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 서쪽으로는 알바니아에게 넘어간 에피로스 북부부터 동쪽으로는 흑해 연안 폰토스까지 정복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테네는 그리스의 수도로 부적합하고 옛 로마 황제께서 계신 곳인 콘스탄티노폴리스야말로 위대한 그리스 제국의 수도가 되어야 한다는 발언까지 나왔다.[15] 일방적으로 그리스인만 터키 영내에서 쫓겨난 건 아니고, 그리스령에 살던 터키인 또한 터키로 이주했다. 이는 1923년의 로잔 조약의 조항 가운데 하나로, 그리스의 '위대한 사상' 이 '그리스인들을 모두 포함한 대제국을 세워야 한다!'이라는 논리라는 점을 이용해 '그럼 그리스인들을 다 그리스 땅으로 보내줄게. 그럼 문제 안 일으켜도 되지?'라는 생각에서 결정된 사항. 이로써 백만 단위의 인구가 양측으로 이주했다. 이때의 기준은 무슬림인가, 동방정교도인가로, 무슬림이면 그리스어를 쓰더라도 터키인 취급을 당해 터키로 이주되었다.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 문서 참고.[16] 터키가 독일편을 든 것은 빼도 박도 못할 영국 탓이었다. 하지만 국제관계는 냉혹했다.[17] 하지만 국민관계는 당시까지만 해도 그리 나쁘진 않은 편이라 2차 세계대전 당시 사모스 등 터키에 인접한 섬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피난 혹은 생필품 거래를 위해 터키에 들어갔을때 터키인들은 이들을위해 먹을것과 피난처를 마련해 주었다. 특히 테살로니키에 거주하던 수많은 유대인들 또한 상당수가 터키로 피난해 살 수 있었다. 그럴수 있던게 1923년 로잔 조약 체결 후 겨우 20여년밖에 지나지 않던 상황이라, 터키에서 그리스로 이주한 (본래 터키에서 살던) 그리스인들의 일가친척이나 옛 이웃들과의 관계가 여전히 끊어지지 않았던 경우가 많았으며 그리스도 추방되지 않고 남은 그리스계 터키인들도 상당했기 때문. 개중에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척이라도 해서 그리스로 추방되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도 많았다.[18] 터키 가서 그리스가 그리도 싫어요? 하는 질문에 일부 터키인들은 "사실 우리 터키가 그들을 지배했으니까 그들이 싫어할 만하지… 뭐, 땅 문제 가지고 양보할 마음은 없지만." 또는 "그리스보단 이스라엘이 더 싫어. 사실 그리스는 우리에게 몇 백 년이나 지배당했으니 이갈릴 만하잖아?" 이런 사람도 있긴 하다. 키프로스 사태나 독립전쟁을 기억하는 나이 지긋한 분들은 이를 간다. 그들이 피해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지만 터키어로 그리스인을 뜻하는 'yunan'은 '바보, 멍청이' 정도의 욕으로도 쓰인다. 반대로 그리스에선 터키놈 같다는 욕이 쓰인다(...).[19] 다만 '터키가 그리스를 지배했으니까' 라는 생각은 민족주의 발흥 이후의 일. 애초에 '오스만 제국' 과 '터키'는 같지 않다. 물론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전까지는 투르크인이 지배층의 대다수를 이루었지만 오늘날의 터키인들이 모두 그 튀르크인들의 피를 받은 것도 아니고, 동로마 제국 멸망 이후에는 그 동로마인들을 비롯해 동유럽인들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층을 이루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항목 참고.[20] 동시기 한중일 3국 관계와 비교해도 관계가 매우 좋아졌다.[21] 여담으로 미국은 그리스와 터키 둘 다 한번씩 큰 도움을 준 적이 있다. 그리스는 1947~48년의 공산화 저지, 터키는 '''구소련의 팽창 저지'''[22] 대체로 EU 가입과 관련 터키 측 입장을 지지하는 쪽은 미국과 중국 등 외부 세력이며 이미 1999년에 터키는 가입이 미적지근한 것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이라크 및 이란,시리아,수단 같은 반미적 나라들과 관계개선을 밝히는 회담을 열어 미국을 경악시킨 적도 있다. 물론 이들 국가의 막장성을 터키도 잘 알기 때문에 관계를 오래 이어가지는 않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는 상황.[23] 여담으로 이스탄불이란 이름 자체도 그리스어의 ''είς την πολίν(이스 틴 폴린)'', "도시로" 라는 표현에서 왔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그 도시(η πολή)"라고 불렸기 때문에, 초기에 너 어디가냐? 고 물었을 때 그 도시에 간다고 답했던 것이 이름으로 굳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로 지금도 그리스에서는 통용되는 말이다. 이스탄불 가는 버스나 기차표를 살때 '그 도시'로 가는 티켓을 달라고 하면 알아서 이스탄불행으로 끊어준다.[24] 그 외에도 비슷한 식으로 터키어로 음역된 지명들이 여럿 있다. 가령 이즈미르는 그리스어의 "είς Σμύρνην" (이스 스미르닌, 발음을 빨리하면 연음화되어 이즈미르닌이 된다) "스미르나로", 코스섬의 터키어 지명인 이스탄쾨이(İstanköy)는 "είς την Κώ" (이스 틴 코) "코스로"에서 비롯되었다.[25] 양국은 문화교류가 활발했고 문화적인 영향도 많이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