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타이완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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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Integrity, Diligence, Fidelity, Compassion.'''
敦品勵學,愛國愛人
▲ 국립대만대학 총도서관(NTU Main Library)[1]
국립대만대학(국립타이완대학)은 대만 타이베이에 있는 최고 명문 국립대학으로, 일본 제국에 의해 1928년에 설립되었다. 이는 일본 제국의 7번째 제국대학으로, 당시 이름은 '''다이호쿠제국대학'''[2] 이었다.
2. 학술적 평가
역사적으로 최고의 위상을 자랑하는 제국대학을 전신으로, 모든 학술 분야에서 타이완 1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대만 최고의 대학으로서 대만 학벌의 정점에 위치하고 있다. 1986년에 타이완 첫 노벨상을 수상한 리위안저 역시 국립대만대학 출신이며, '''이 대학 출신 노벨상 수상자는 2명이다.''' 출신 인물들 가운데 장징궈 이후 민주선거를 통해 선출된 총통 4명, 부총통 5명, 수도 타이베이의 시장 2명 등이 있다.
1990년대 이전에는 물론이고, 중국 대학들 세계순위가 본격적으로 인플레 되기 시작하기 전인 2000년대 중반까지 중국 홍콩 등 중화권 전체에서 최고 명문교로 꼽혔다. 중국의 상해교통대가 발표한 ARWU 세계500대 대학 순위로는 제1회(2003년) 중화권 1위를 기록했다.[3] 중화권 최고 명문 '국립대만大' 기사 참고.
국제적인 기관의 평가로는 2021년 QS 세계 대학 랭킹에서 66위를 기록했다.[4] 2021년 THE 세계 대학 랭킹에서 97위, 2021년 ARWU(세계 대학 학술 평가) 에서는 201-300위를 기록했다.
이공학, 의학 분야에서는 중국 본토에서도 명성이 드높다. 중국은 의학 교육이 아직 체계적이지 않은 것에 반해 타이완의 경우 과거 서양 의학을 빠르게 받아들여 체계화를 단행하였었다. 또 의사에 대한 대우 및 교육도 한국과 비슷한 노선을 걸음으로 인해 전반적 수준이 높은 편이다. 공학의 경우 세계 유수의 반도체 회사들이 타이완에 있는 만큼 정밀 공학, 그중에서도 반도체 공학에서 특출나다. 학내에 TSMC와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NTU-TSMC 연구소도 존재한다.
3. 역사
3.1. 다이호쿠제국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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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호쿠제국대학 정문(출처)
일본제국의 통치방침이 내지연장주의로 변경되고, 제2차 대만교육령(1922년)이 공포됨 따라 대만에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기로 결정되자 1928년에 '''다이호쿠제국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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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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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면도
주로 의학전문학교를 모체로 승격된 제국대학들과 달리, 홋카이도제국대학처럼 농림전문학교를 모체로 삼았다. 현재 국립대만대학 캠퍼스 일대에 위치하고 있었던 다이호쿠고등농림학교(臺北高等高等農林學校)[6] 를 다이호쿠제국대학 부속 농림전문부로 흡수하면서 이농학부를 설치하고 그 주변에 문정학부와 부속도서관 등을 세우면서 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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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정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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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농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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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속농림전문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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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속도서관[8]
1928년 개교 당시에는 문정학부,[9] 이농학부[10] 등 2개 학부와 부속농림전문부로 구성되어있었다(출처). 1928년 설치된 부속도서관은 최초 다이호쿠고등농림학교 교사 건물에 입주하였다가(참조) 별도의 부속도서관 건물이 1930년 준공되었고 지속 확장 증축(참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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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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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학부 부속의원
1936년에는 다이호쿠의학전문학교(臺北醫學專文學校)[11] 를 부속 의학전문부로 흡수하면서 의학부를 설치했고, 1938년 대만총독부병원(臺灣總督部病院)을 다이호쿠제국대학 부속의원으로 흡수했다. 1939년에는 대만총독부 중앙연구소 위생부(臺灣總督部 中央研究所 衛生部)[12] 를 흡수하여 열대의학연구소를 부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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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호쿠제국대학 예과 이과공류[13] 단체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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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학부
1941년 다이호쿠제국대학 예과를 부설하고, 1943년에는 공학부를 설치하였으며(참조),[14] 이농학부를 이학부와 농학부로 분리하였다. 또 남방인문연구소, 남방자원과학연구소를 부설하였다.
1945년 종전시 기준으로는 경성제국대학보다 많은 문정학부, 이학부, 농학부, 의학부, 공학부 등 5학부로 구성되어있었다. 1945년 당시 조직은 본부,[15] 문정학부,[16] 이학부,[17] 농학부,[18] 의학부[19] 공학부,[20] , 예과,[21] 부속의학전문부, 부속도서관, 열대의학연구소[22] , 남방인문연구소[23] , 남방자원과학연구소[24] 등이 있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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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다이호쿠제국대학 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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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호쿠제국대학 예과(臺北帝國大學 預科) - 쇼와 16년(1941년) 칙령 제388호 다이호쿠제국대학 관제 제16조의2에 의거 설치.[25] - 다이호쿠주(臺北州) 시치세이군(七星郡) 시린마치(士林街)[26] → 국립대만대학 선수반(先修班, 우리나라의 의예과)[27]
일본제국의 제국대학 진학희망자는 제국대학의 예과격으로서 오늘날의 대학교 1~2학년에 해당하는 구제고등학교를 졸업해야했다. 그런데 홋카이도와 조선에 제국대학을 설립할 당시에 당지에 구제고교가 없었기 때문에 각각 홋카이도제국대학과 경성제국대학 소속으로 부속 예과를 두었다(구제고등학교 문서의 제국대학예과 항목 참조). 그런데, 대만에는 구제고등학교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에도[28] 다이호쿠고등학교 졸업생들은 내지의 제국대학 진학을 선호했고,[29] 결국 대만총독부는 그와 별개로 1941년 다이호쿠제국대학 예과를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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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3회 수료생[30] 배출 후 종전으로 학부 본과에 통합되어 사라졌으나, 다이호쿠제국대학 예과는 다이호쿠고등학교와 라이벌로서 교류전을 치렀다고 한다(링크 참조). 이 교류전은 다이호쿠제국대학 예과가 개교한 1941년 제1회 대회가 개최되어 다이호쿠고등학교가 승리하고, 이듬해 1942년 제2회는 다이호쿠제국대학 예과가 승리하여 1승1패를 기록했으나 1943년 전쟁의 격화로 운동회가 중단되었고 종전되면서 양교가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끝나버렸다고 한다. 관련 자료는 현재 국립대만대학에 보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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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호쿠제국대학 예과와 다이호쿠고등학교의 교류전(다이호쿠제국대학 운동장)
다이호쿠제대 예과 관련 상세한 내용은 링크 사이트를 참조하고, 구제고등학교들을 소개해놓은 사이트의 다이호쿠제국대학 예과 페이지와 다이호쿠고등학교를 참조하기 바람. 전반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나무위키 구제고등학교#s-3.3 항목 및 일본어 위키백과 제국대학 예과와 구제고등학교 항목을 참조.
3.2. 중화민국 시대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했다.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 제2조 (b)에 의거해 대만섬은 중화민국에 귀속되는 것으로 결정된 바, 10월 25일부로 중화민국군에 접수된다. 다이호쿠제국대학은 1945년 11월에 국민정부 교육부에 접수되어 '국립대만대학'이 되고, 공식적으로는 동년 12월 15일에 중화민국 행정원 결의로 교육부 결의에 따라 '국립대만대학'으로 개칭되며 중국식 학제에 따라 예과를 통합하며 '학부' 명칭이 '학원'으로 바뀌고 문정학부가 문학원과 법학원으로 분리되어 6개 학원(學院) 22개 학계(學系) 체제로 개편되었다. 다이호쿠제국대학이 국립대만대학으로 개편되는 과정과 관련해서는 링크 참조.
1947년에는 대만총독부 다이호쿠경제전문학교[31] 를 1947년 법학원 상학계[32] 로 흡수통합하였다. 일제시대 대만의 구제전문학교 중 의학전문학교는 1936년에 이미 제국대학에 부속 의학전문부로 흡수된 상태였으며 공업전문학교는 타이난에 있었고 농림전문학교[33] 는 타이중에 위치해있어서 개별 대학으로 승격됐다. 대만 유일의 구제고등학교#s-3.4였던 다이호쿠고등학교는 다이호쿠제국대학과 가까이 있었지만, 시급했던 중등교원 양성에 집중하기 위해 국립대만사범대학으로 별도 승격되었다.
1928년 개교 후 현재까지 자타공인 명실상부 대만의 최고학부로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다. 대만에서는 물론이고, 1949년 국부천대로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대만으로 천도한 이후 지금까지 중화민국을 넘어 중화권[34] 전체에서 수위로 꼽히며 해당 권역으로 진학을 희망하는 전세계 화교들이 지망하는 학교다. 2003년부터 상해교통대학에서 발표하기 시작한 세계대학순위 ARWU에서 2003-2004년 연속으로 중화권 최고 명문 '국립대만大'가 꼽혔다.[35] ARWU 대학순위 참조. 2005-2007년에는 칭화대와 공동 1위, 그리고 2008-2013년에 다시 대만대가 단독 1위를 기록했다.
본래 대륙 시절 중화민국의 명목상 최고학부는[36] 난징에 있었던 국립중앙대학(國立中央大學)이었고,[37] 대만대학은 일본제국 대만의 최고학부인 다이호쿠제국대학이었으므로 2차대전 종전 후 중화민국이 일본제국 대만총독부를 접수한 후 한국으로 치면 거점국립대학교 중의 하나가 될 수도 있지 않았겠냐는 상상도 있지만,[38] 국공내전에서 패배하고 대만으로 도주하면서 대만이 중화민국의 사실상 전부가 되었고, 국립대만대학은 경쟁자도 없이 독보적인 중화민국(대만)의 최고학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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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국부천대 이후 중화민국에서 대만대학 다음 순위인 2위 대학으로는 국립칭화대학, 문과로 한정하면 국립정치대학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국민당 일당 독재의 중화민국은 당이 모든 것을 조종하는 당-국가체제로 국민당의 黨校인[40] 국립정치대학에 엄청난 지원을 해주었다. 그렇게 외성인 엘리트들은 정치대로 진학하고 중화민국 정부는 정치대 졸업생들을 우대 특채하는 공생관계로 문과에서 인기가 좋았었는데,[41] 대조적으로 대만 본성인 및 대만 정체성 느낌이 강한 대만대[42] 에는 미치지 못했으며,[43] 계엄 해제 후 정권 교체가 이뤄지고 중국국민당이 쇠락해가면서 이제는 국립정치대학 문과가 타이난'''고등공업학교'''의 후신인 국립성공대학 문과에게도 위협 당하는 상황이다. 국립성공대학 문과는 대만대학보다도 더욱 대만 고유성이 강조되는 분위기로, 대만문학계(대만문학과)와 그 연구소는 대만 최고 학교로 꼽히고 있다.
이과에서는 신주에 재대복교한 국립칭화대학이 마찬가지로 중국국민당 일당독재 시절 장개석-장경국 부자의 집중적인 지원에 힘입어 2위 학교로 꼽혔으나, 해엄 이후에는 명실상부한 대만 2위의 의대까지 갖추고 공대가 근본인 국립성공대학에 밀리고 있는 상황이다. 성공대학은 대만 내의 평가로는 이미 청화대학을 제치고 2위 자리를 굳히고 있는 것 같은 양상이다. 심지어 기업들을 대상으로 채용대상자로 어느 대학 출신을 선호하냐는 설문조사에서는 대만대학을 추월하여 선두를 하기도 했다. 일단 대만의 4대 명문대학 자리를 굳히고 있는 중. 臺清交成(위키백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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遠見 발표 2019 대만대학 순위
대만대학은 언제나 그래왔듯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고, 교통대학이 4위를 유지하고 있다면 성공대학과 청화대학이 매년 2~3위를 자리바꿈하고 있는데,[44] 시간이 가면 갈수록 성공대학이 점점 더 우세해지는 분위기다.
4. 조직
한국 대학의 단과대학에 해당하는 곳을 원(院)이라고 부른다.[45]
현재 11개 학원으로 구성되어있다. 학원과 학계•연구소[46] 순서는 홈페이지의 서열을 따랐다. 학과명은 최대한 직역 하였는데 명칭 중간의 기, 여, 급 등은 전부 '~ 및 ~'로 번역할 수 있다.
5. 국제 교류
- 서울대학교
- KAIST
- 포항공과대학교
- 연세대학교
- 고려대학교
- 이화여자대학교
- 서강대학교
- 성균관대학교
- 한양대학교
- 경희대학교
- 동국대학교
- 숭실대학교
- 아주대학교
- 부산대학교
- 순천대학교
- 영남대학교
- 신한대학교
- 그 외 교류협정대학명단
이 중 '학생교류협정'까지 맺고 교환학생을 상호파견하고 있는 곳은 다음과 같다. 대만대 국제사무처 출처
- 서울대학교(1999년부터)
- 포항공과대학교(2005년부터)
- 순천대학교(2005년부터)
- 이화여자대학교(2009년부터)
- 한양대학교(2009년부터)
- 성균관대학교(2010년부터)
- 부산대학교(2011년부터)
- 고려대학교(2013년부터)
- 연세대학교(2013년부터)
- KAIST(2015년부터)
6. 출신 인물
대만 최고의 대학으로서 대만 학벌의 정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만의 수많은 정치인, 기업인들이 이 학교 출신이다. 1986년에 타이완 첫 노벨상을 수상한 리위안저 역시 국립대만대학 출신이다. 또한, 출신 인물들 가운데 장징궈 이후 민주선거를 통해 선출된 총통 4명(리덩후이, 천수이볜, 마잉주, 차이잉원), 총통 선거에 출마했던 유력 정치인 4명(펑밍민, 롄잔, 셰창팅, 주리룬), 부총통 5명(롄잔, 뤼슈롄, 우둔이, 천젠런, 라이칭더), 수도 타이베이의 시장 2명(하오룽빈, 커원저), 타이베이 옆의 신베이 시장(주리룬)이 있다.
한국 최고 명문인 서울대학교 출신 대통령이 불과 1명(제14대 김영삼). 국제기구로 확장해도 총 3명 (WHO 이종욱, UN 반기문)뿐임을 생각하면, 국립타이완대학은 그야말로 대만 정치 지도층의 산실인 셈. 물론 타 부문에서도 명성을 떨치고 있는 동문들이 매우 많다. 중화민국의 민선 총통은 전부 대만대 출신이며(리덩후이 천수이볜 마잉주 차이잉원) 그 중 '''대만대 법대'''는 천수이볜(8년), 마잉주(8년), 차이잉원(8년) 연달아 세명이 총통에 당선되어 '''무려 24년간 정권을 독식(...)'''하는 위엄을 보여주는 중이다. 한국식으로 비유하자면, 1987년 직선개헌 이후로 서울대 법대 출신들이 민선대통령직을 다 해먹은 것과 같은 셈.[48] 차이잉원이 총통에 당선될 때 대결했던 후보가 주리룬과 쑹추위인데 우스갯소리로 주리룬은 법학과 안 나와서, 쑹추위는 대만대 안 나와서(국립정치대학 출신)차이잉원에게 졌다는 말도 나온다.
- 리위안저 - 1986년 노벨 화학상 수상. 타이완 본성인 첫 노벨상 수상자[49]
- 리덩후이 - 농업경제학과 : 1949년 졸업(편입), 정치인. 8, 9대 총통.
- 천수이볜 - 법학과 : 1974졸업. 정치인. 10, 11대 총통.
- 마잉주 - 법학과 : 1972졸업. 정치인. 12, 13대 총통.
- 롄잔 - 정치학과 : 정치인.
- 차이잉원 - 법학과 : 1978졸업. 정치인. 14, 15대 총통.
- 주리룬 - 경영학과 : 정치인.
- 커원저 - 의대 : 외과의사, 정치인.
- 하오룽빈 : 정치인.
- 뤼슈롄 - 법학과 : 1967졸업. 정치인.
- 우둔이 - 역사학 : 정치인.
- 셰창팅 - 법학과 : 변호사, 정치인.
- 천젠런 - 의학대학원 : 1977졸업. 정치인.
- 라이칭더 - 보건의학 : 정치인.
- 린자룽 - 정치학과 : 정치인.
- 딩서우중 - 정치학과 : 정치인.
- 정원찬 - 전기학과, 사회학과 : 정치인.
- 황웨이저 - 농업경제학과 : 정치인.
- 천치마이 - 의학전문대학원 의학박사 : 정치인.
- 쑤전창 - 법학과 : 정치인.
6.1. 한국인 동문
- 정두현 - 다이호쿠제국대학 1941년 12월 졸업(제3회).[50]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내과학/생리학연구실 연구생(1942.4~1945.6), 평양의학전문학교 교장, 김일성종합대학 의학부장(초대).
- 마형옥 - 다이호쿠제국대학 이농학부 1942년 졸업(참조). 교토제국대학 이학부 연구실 조수,[51]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교수, 북한 경공업성 중앙연구소 소장, 과학원 화학섬유연구소장.
- 김준엽 - 역사학계 1955년 졸업(참고). 고려대학교 총장.
- 김학주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1961년 졸업(최초의 한국인 석사/박사 졸업생).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박사, 서울대학교 교수,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국립대만대학 한국총동창회 회장.
- 김충렬 - 철학계 1960년 졸업, 철학연구소 석사 1962년 졸업. 고려대학교 교수, 대학원장.
- 김시준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1965년 졸업.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박사, 서울대학교 교수.
- 이동향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1970년 졸업.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박사, 고려대학교 교수.
- 전락희 - 정치학연구소 1970년 졸업. 단국대학교 교수.
- 구양근 - 역사학연구소 석사 1971년 졸업. 도쿄대학 동양사학과 박사, 성신여자대학교 총장(직대). 주 타이베이 대한민국 대표부 대사(2008~2011).
- 신승하 - 역사학연구소 석사 1971년 졸업. 고려대학교 교수.
- 이남영 - 철학연구소 박사 1972년 졸업. 서울대학교 교수.
- 송영배 - 철학연구소 석사 1972년 졸업. 서울대학교 교수.
- 김용옥 - 철학연구소 석사 1974년 졸업.[52] 고려대학교 교수, 철학자.
- 박원호 - 역사학연구소 석사 1974년 졸업. 도쿄대학 인문과학연구과 박사, 고려대학교 교수.
- 이충양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1976년 졸업. 고려대학교 교수.
- 손예철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1980년 졸업, 박사 1986년 졸업. 한양대학교 교수.
- 이재훈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1982년 졸업.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박사, 고려대학교 교수.
- 오수형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1983년 졸업.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박사, 서울대학교 교수.
- 최용철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1983년 졸업. 박사 1990년 졸업. 고려대학교 교수.
- 이승환 - 철학연구소 석사 1984년 졸업. 고려대학교 교수.
- 이인호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1985년 졸업. 한양대학교 교수.
- 최규발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1985년 졸업. 고려대학교 교수.
- 김정훈 - 역사학계 1986년 졸업, 역사연구소 석사 1988년 졸업(참조).
- 강충희 - 중국문학연구소 박사 1987년 졸업. 고려대학교 교수.
- 하영애 - 정치학연구소 박사 1989년 졸업. 경희대학교 교수.
- 명동성 - 법학연구소 석사 1989년 졸업. 광주고검장, 서울중앙지검장, 법무연수원장.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 전광진 - 중국문학연구소 박사 1992년 졸업. 경희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교수.
- 김재기 - 농학원 박사 1994년 졸업. 순천대학교 총장.
- 한동수 - 건축•성향연구소[53] 석사 1994년 졸업. 한양대학교 교수.
- 류동춘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1989년 졸업, 박사 1996년 졸업. 서강대학교 교수.
- 이연승 - 철학연구소 박사 1999년 졸업.[54] 서울대학교 교수.
- 김태용 - 철학연구소 석사 1999년 졸업, 한양대학교 교수.
- 송갑호 - 역사학연구소 석사 졸업. 고려대학교 교수.
- 김귀달 - 역사학연구소 석사 졸업. 전북대학교 교수.
- 이한조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졸업. 교토대학 박사, 고려대학교 교수.
- 양승무 - 철학연구소 석사/박사 졸업. 중앙대학교 교수.
- 전인초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졸업. 연세대학교 교수.
- 박재우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졸업, 박사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 선정규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졸업. 고려대학교 교수, 세종캠퍼스 부총장.
- 이강수 - 철학연구소 석사 졸업. 경희대학교, 중앙대학교, 연세대학교 교수.
- 변인석 - 역사학연구소 석사 졸업. 아주대학교 교수.
- 이명한 - 철학연구소 석사 졸업. 중앙대학교 교수.
- 김백현 - 철학연구소 석사 졸업. 강릉원주대학교 교수.
- 정상봉 - 철학연구소 석사/박사 졸업. 건국대학교 교수.
- 오이환 - 철학계 수료. 교토대학 석사/박사, 경상대학교 교수.
- 최무장 - 인류학연구소 석사 졸업. 건국대학교 교수.
- 김병채 - 철학연구소 석사 졸업. 한양대학교 교수, 부총장.
- 문정구 - 경제학연구소 석사 졸업. 건국대학교 교수.
- 오승렬 - 경제학연구소 석사 졸업.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7. 찾아가는 길
- 정문 : 타이베이 첩운 쑹산신뎬선 궁관역 바로 앞에 있다.
- 후문 : 타이베이 첩운 원후선 커지다러우역에서 남쪽으로 500m 걸어가면 된다.
8. 기타
- 국립대만대학교에는 명소가 하나 있는데, 부종(傅鐘)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 종은 1950년 타계한 국립대만대학교의 4대 총장 푸쓰녠(傅斯年)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종이다. 학교 로고에도 등장할 정도. 그런데 이 부종에는 괴담이 하나 전해지는데 만약 부종 곁을 지나다가 여자가 시간을 물어본다면 자정 이후에는 절대 대답해서는 안된다라는 것이다. 이 괴담에 의하면 1950년대에 국립대만대학을 다니던 대륙 출신 학생이 가난한 대만 토박이 여성과 사랑했는데 그 사랑이 이뤄지지 못해 여성은 부종에서 자살했고 이후 부종 곁을 떠돌면서 지나가는 행인에게 시간을 물어보고 다닌다는 것이다. 이런류의 이야기가 그렇듯이 사실인지의 여부는 알수 없으나 꽤 유명한 이야기인듯 하다. 토요미스테리극장에서도 소개된 바 있는 괴담.
- 비슷한 썰로는 밤 12시 정각에 남자 혼자 부종 옆을 지나가지 말라는 괴담이 있다. 만약 어쩔 수 없이 지나가게 되었을 때 뒤에서 여자 목소리가 시간을 물어온다면 뒤돌아보지 말고 최대한 빨리 살아있는 다른 여성 근처로 도망가야한다고 한다. 물론 자신에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과연 여자가 먼저 다가오게 생겼는지 생각해 보자.
- 대만에서 대만대(台灣大)라고 하면 통신사인 타이완 따거다(台灣大哥大)를 말하는 경우가 많으니 주의. 台大라고 해야 알아듣는다.
- 대만의 대형 커뮤니티중 하나인 PTT의 운영주체이기도 하다. 원래는 텔넷 사설 BBS에서 시작했지만, 규모가 커지고 웹 페이지로 전환되기도 하였다. 웹 페이지가 생겨도 텔넷 접속 역시 현역으로 돌아가고 있다.
- 경성제국대학의 직접적 후계자라는 것을 쉬쉬하는 서울대학교와는 다르게 이 대학은 대만일치시기 제국대학의 역사를 공식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대학 홈페이지에서도 제국대학 당시의 일본인 총장들까지 전부 소개하고 있다.
9. 둘러보기
[1] 1930년 완공된 다이호쿠제국대학 도서관(舊總圖書館, 현재 校史館으로 사용 중) 건물이 노후화됨에 따라 1982년 신총도서관 건립계획에 착수하여 1989년 회계에 반영, 1998년 11월 14일 준공 개관한 건물이다. [2] 臺北帝國大學 , 대북제국대학, 타이베이제국대학[3] QS, THE와 달리 ARWU 순위에서는 201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밀리기 시작함[4] 세부적으로 보면 1위 대만대학(66위), 2위 청화대학(168위), 3위 성공대학(234위), 4위 교통대학(240위), 5위 대만과기대학(267위), 6위 양명대학(298위), 7위 사범대학(331위), 8위 타이베이의학대학(387위), 8위 중산대학(416위), 9위 중앙대학(465위), 10위 타이베이과기대학(488위), 11위 창겅대학(493위), 12위 정치대학(581~590위), 13위 중흥대학(601~650위), 14위 가오슝의학대학(701~750위), 15위 중정대학(801~1000위) 등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5] 다이호쿠제국대학, 타이호쿠제국대학, 대북제국대학, 타이베이제국대학, 타이페이제국대학 등으로 읽을 수 있다. [6] 1919년 4월 대만총독부 농림전문학교(臺灣總督部 農林撰文學校)로 농업과와 임업과 2개과를 갖추고 개교하여 1922년 4월 대만총독부 고등농림학교(臺灣總督部 高等農林學校)를 거쳐 1927년 5월 다이호쿠고등농림학교(臺北高等農林學校)로 개편. 다이호쿠제국대학 부속 농림전문부이자 이농학부의 모체였으나, 1942년 다이쥬고등농림학교(臺中高等農林學校)로 다시 독립해 1943년 타이중 新校舍로 이전하게 된다.[7] 다이호쿠고등농림학교를 흡수[8] 1930년 준공되어 사용개시 후 1998년 총도서관 신관 개관 이전까지 국립대만대학 총도서관이었으며 현재는舊總圖書館으로 불리며 校史館으로 사용 중[9] 12개 강좌(국어학&국문학(일어일문학), 서양문학, 동양사학, 철학&철학사, 동양윤리학&서양윤리학, 심리학, 경제학, 토속학&인종학, 헌법, 행정법, 민법&민사소송법, 형법&형사소송법)를 갖춘 4개 학과(철학과, 사학과, 문학과, 정학과)로 구성됨.[10] 10개 강좌(생물학, 화학, 지질학, 기상학, 식물학, 동물학, 식물병리학, 농예화학1-토양비료학, 응용생물학, 곤충학&양잠학)를 갖춘 4개 학과(생물학과, 화학과, 농학과, 농예화학과) 및 이농학부 부속 식물원, 이농학부 부속 농장 등으로 구성[11] 1897년 다이호쿠병원 의학강습소(臺北病院 醫學講習所)로 개설되어 1899년 대만총독부의학교(臺灣總督部醫學校), 1918년 대만총독부 의학전문학교(臺灣總督部醫學專文學校)로 승격되었고 1927년 다이호쿠의학전문학교(臺北醫學專文學校)로 개칭됨.[12] 1909년 대만총독부 전매국 제약소 검사과로서 대만총독부연구소가 창설되고, 조직 확대를 거쳐 1921년 대만총독부중앙연구소로 발전해 농업부, 임업부, 공업부, 위생부 등 4개 부서를 두고 있었다. 1939년 중앙연구소 폐지시 위생부가 대만대학에 피흡수됨.[13] 공학부 진학반[14] 1940년 대만총독부 내부에 다이호쿠제대 총장, 대만총독부 관원들 및 대만전력, 대만척식주식회사 사장으로 구성된 ''다이호쿠제국대학공학부창설준비위원회''를 출범시키면서 설치 작업 개시.[15] 서무과, 회계과, 학생과[16] 25개 강좌를 갖춘 4개 학과(철학과, 사학과, 문학과, 정학과)로 구성.[17] 1943년 이농학부가 이학부/농학부로 분리되어 13개 강좌를 갖춘 4개 학과(화학과, 동물학과, 식물학과, 지질학과) 및 부속 식물원으로 구성[18] 1943년 이농학부가 이학부/농학부로 분리되어 22개 강좌를 갖춘 5개 전공(농학전공, 농업경제학전공, 농업토목학전공, 농예화학전공, 수의학전공) 및 부속 농장으로 구성. 다이호쿠제국대학 농림전문부는 이미 다이쥬고등농림학교(臺中高等農林學校)로 독립해나간 상태.[19] 24개 강좌를 갖춘 각과 교실과 부속 병원(1932년 다이호쿠주 明石盯에 신축 이전한 대만총독부다이호쿠의원이 1938년 다이호쿠제국대학 의학부 부속 병원으로 흡수. 現국립대만대학 의학원 부속병원 구관 건물로 사용 중)으로 구성.[20] 30개 강좌를 갖춘 4개 학과(기계공학과, 전기공학과, 응용화학과, 토목공학과)로 구성.[21] 문과(문정학부 진학생반), 이과이농류(이학부/농학부 진학생반), 이과의류(의학부 진학생반), 이과공류(공학부 진학생반) 등 4類로 구성.[22] 열대병학과, 열대위생학과, 세균혈청학과, 화학과, 후생학과, 서무과, 士林지소, 臺中지소, 臺南지소 등으로 구성.[23] 제1부(정치, 법제, 재정, 경제 연구), 제2부(문화, 민족 연구), 서무계로 구성.[24] 제1부(농림가축품종 개량 등 농학 연구), 제2부(농림산품 가공 등 농예과학 연구), 제3부(천연자원 관련 이화학 연구 및 지질조사), 해남도유림연구소(海南島榆林研究所), 실험실, 서무계로 구성.[25] 1941년 4월 당시 다이호쿠제국대학 학부 교지의 문정학부와 병기고 사이(現 국립대만대학 보통교학관 자리)에 가교사를 건설하여 예과를 개교하고, 이듬해인 1942년 臺北州 七星郡 士林街 石角에 준공된 예과캠퍼스로 이전.[26] 1941년 설립 당시 주소로 臺北州七星郡士林街石角字大石角42番地, 現 타이베이시 스린구 雨聲街와 雨聲國小 사이에 해당(1945년 미공군 촬영 항공사진)으로 현재의 스린역 기준으로 북동쪽이다(2017년 현재 기준 지도). 참조[27] 士林의 다이호쿠제국대학 예과캠퍼스는 종전 직전인 1945년 일본제국 해군에 징발되었다가 일본의 항복 후 대만에 진주한 중화민국 국군에 의해 접수되어 현재까지 중화민국 국군 군사정보국 청사(속칭 芝山莊)로 사용 중이다. 국립대만대학 도서관 참조.[28] 1922년 제2차 대만교육령 반포 당시에 이미 제국대학 설립까지 계획한 대만총독부에서는 총독이 도쿄로 상경시위를 벌이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다이호쿠고등학교 고등과 제1회 졸업생이 배출되는 1928년에 맞추어 다이호쿠제국대학(臺北帝國大學)을 설립, 개교하면서 당시 다이호쿠고등학교 졸업생에게 다이호쿠제국대학 무시험 입학자격을 부여하고 별도의 예과를 설치하지 않았다.[29] 리덩후이 총통도 다이호쿠고등학교 졸업 후 교토제국대학으로 진학한 경우이다. 대만총독부에서는 이들을 다이호쿠제국대학 입학으로 유도하기 위해 다이호쿠의학전문학교를 흡수하여 1936년 의학부를 설치했으나 다이호쿠고등학교의 대만인 졸업생들은 의학부로만 지원자가 몰릴 뿐(의학부 과반수가 다이호쿠고교를 졸업한 대만인 학생이었다고 한다), 그나마 특화가 된 농학부를 제외한 이학부와 특히 문정학부는 미달이 심했다. 특히 문정학부가 심각했는데, 도쿄제대 일부는 물론이고 교토제대 문학부 등 대부분의 문과 계열 학부가 구제고교 학생들로 정원을 채우지 못해 미달이 나던 상황에, 외지의 신설 제국대학이 문과계열 정원을 모두 채우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30] 본래 구제고등학교가 3년제이나 전시 수학연한 단축에 따라 3년→2년6개월→2년으로 단계적 단축[31] 1919년 대만총독부 고등상업학교(台灣總督部 高等商業學校)로 설립, 1926년 다이호쿠고등상업학교(臺北高等商業學校)를 거쳐 1944년 다이호쿠경제전문학교(臺北經濟專文學校)로 개편됨. 1945년 중화민국에 접수되어 1946년 대만성립법상학원(臺灣省立法商學院)으로 개칭된 상황[32] 1987년 관리학원(우리나라의 경영대학)이라는 개별 단과대학으로 독립[33] 원래 다이호쿠제국대학 캠퍼스 자리에 1919년 먼저 개교했던 다이호쿠고등농림학교(臺北高等農林學校)였으나, 제국대학 설립의 모체가 되어 흡수당했다가 1943년에 타이중으로 독립해나감[34] 중국,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35] 2004년 기준 서울대와 동일한 153-201위권으로 중국의 칭화대 베이징대, 홍콩의 홍콩대 홍콩중문대를 모두 꺾고 수위를 차지했다. 중국 대학들은 2005년에야 칭화대가 처음 대만대와 공동 1위(153-202위)를 차지했고 2006-2007년에도 동일, 2008-2013년에는 다시 대만대가 단독 1위, 2014년에 베이징대 칭화대 상하이자오퉁대와 싱가포르 난양공대와 공동 1위(101-150위)를 기록했다. [36] 그러나 인식 차원에서 칭화대나 상해교통대보다 앞섰다고 할 수는 없다.[37] 국립중앙대학은 1962년 대만에서 재대복교하여 다시 문을 열었지만 중화민국 최고학부의 위상은 잃어버렸다. 아니, 최고 명문의 위상을 잃어버린 수준이 아니라 현재는 같이 재대복교한 국립칭화대학, 국립교통대학, 국립정치대학 3개교와 함께 대만대처럼 일본제국 시대에 지어진 공업전문학교인 국립성공대학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대만에서 명문대라면 보통 대성청교(臺成清交) 4개교를 꼽고(우리나라의 SKY처럼), 여기에 하나를 더하자면 특히 과거에 政까지 더해 '대성청교정' 즉 대만대, 성공대, 청화대, 교통대, 정치대 이 5개의 대학교를 꼽는 경우가 많다. 국립중앙대학은 한때 진짜로 중국의 중앙을 자부했던 과거가 무상하게도 현재에는 이 리스트에도 들지 못한거다(...). 국립중앙대학은 위 5개교와 국립대만사범대학 다음 순서로 역시 일본제국 시대에 지어진 농업전문학교인 국립중흥대학, 국립중산대학, 국립중정대학과 함께 4中대학의 하나로 꼽힌다. 그래도 중국 남경에 남은 후신 대학 중 1개인 남경대학은 구교연맹에 들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도 전통적으로 상위권을 자랑하는 아직도 나름 세계구 명문대인데 그저 안습.[38] 일제 때는 교명에 다이호쿠(타이베이)를 썼지만 중화민국 시대는 도시명인 타이베이를 교명으로 계속 쓰지 않고 섬 이름 또는 성 이름인 타이완으로 바꿨는데 아직 국부천대 전이었던 중화민국 정부는 이 학교를 타이완성을 대표하는 국립대로 만들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다.[39] 이는 사실 일제가 만들어놓은 다이호쿠제국대학의 존재가 넘사벽이었기 때문이다. 장개석이 국공내전의 와중에 대만으로 천도하게 된 이유는 일본이 조성해놓은 공업 시설 등 인프라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2차대전 종전 직후 국민당과 공산당이 만주쟁탈 레이스를 벌인 것도 일제가 개발해놓은 만주의 공업지대를 먼저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시대 대만의 발전 역시 만주 못지않게 엄청나서 1935년 대만총독부가 주최한 시정 40년 기념 대만박람회에 참석했던 중화민국 복건성 주석 진의는 대만의 발전상에 경악을 금치 못했을 정도였고, 귀국 후 자신이 통치하고 있던 복건성에 대만 발전모델을 이식하려 했을 정도였다.[40] 그래서 2020년 현재도 정치대 교가에는 '吾黨(우리당=중국국민당)'이 들어가고 교내에 장개석 동상이 있을 정도.[41] 양안관계 연구는 여전히 탑클래스이고, 외교부의 정치대 인맥은 여전히 막강한 수준. 국민당 정치인들도 많이 배출하였다. 외성인인 쑹추위는 정치대 출신, 훙슈주는 문화대 출신, 한궈위는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정치대에서 석사를 받았다. 국민당 정권의 양안관계 담당자로 92공식을 제창한 쑤치도 정치대 외교학과를 나왔고, 현 국민당 주석인 장지천 역시 정치대 외교학과 출신이다.[42] 역대 민주진보당 총통 후보인 펑밍민(彭名敏), 천수이볜, 셰창팅, 차이잉원이 모두 본성인 출신 엘리트로 대만대 법대를 나왔다. 국민당에서도 대만 본성인인 리덩후이, 롄잔 등이 대만대 동문[43] 마잉주처럼 외성인도 대만대를 갈 수 있을 정도로 공부를 잘 하면 대만대로 진학했다.[44] 위 遠見의 台灣最佳大學 排名에서 2016 2017 2019년에 성공대학이 2위, 2018 2020년에 청화대학이 2위를 기록[45] 일제시대에는 당시 한국과 같이 학부(단과대학)-학과로 이어지는 일본 舊制학제를 따르고 있었으나, 1945년 중화민국이 대만섬을 점령하고 대학을 접수한 12월 이를 학원(단과대학)-학계(학과)의 중국식 학제로 명칭을 바꾸었다.[46] 학사 과정은 계(系), 대학원 과정은 연구소(研究所)이며 일반적으로 학사과정이 설치된 곳은 연구소가 부설되어있기 때문에 ~계로만 표기하였다.[47] 재무학 분야에서 국내 대학 박사학위 소지자가 해외 대학으로 교수가 된 사례가 있기는 하나, 한 국가를 대표하는 대학으로 교수임용이 된 사례는 박 박사가 처음이다. 또한, 주목할만한 점은 박 박사의 서울대 박사졸업 논문과 교수 추천서만으로 임용이 되었다는 것이다. 대만대에서 박 박사 졸업논문의 잠재성을 인정하고 저명한 교수진들의 추천서를 높이 평가한 것으로 해석된다.[48] 정작 한국의 경우 역대 대통령 중 서울대 출신은 김영삼(심지어 법대가 아닌 철학과)이 유일하며, SKY까지 범위를 확장해도 고려대 출신인 이명박이 고작.[49] 후에 미국으로 귀화해, 수상 당시는 미국 국적였다. 수상 후에는 타이완 국적을 회복하였다. 다만 타이완섬 출생자 및 본성인 중 최초며, 그보다 먼저 상을 받은 중화민국 국적자(양전닝, 리정다오)와 대만의 외성인(딩자오중)도 있다. 단, 화학상은 한족 중 최초이다.[50] 다이호쿠제국대학 의학부의 유일한 조선인 졸업생이라고 한다.[51] 리승기의 심복 중 심복이었다고 한다(참조).[52] 1972년 2월 고려대 철학과 졸업 후에 가을학기가 1학기로 신입학이 이뤄지는 대만 학제에 맞춰 1972년 봄학기에 고려대 철학과 석사과정을 다닌 후 1972년 가을학기 입학, 1974년 봄학기 이수 후 졸업[53] 建築與城鄉研究所 = 건축•도시공학 대학원.[54]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종교학과 학사/석사 졸업[55] 중국은 어차피 전부 국립이므로 국립을 따로 붙이지 않는다. 비슷한 예로 고궁박물원과 국립고궁박물원의 차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