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정

 


1. 개요
2. 역사
3. 결말
4. 관련 문서

[image]
왼쪽부터 정병국, 원희룡, 남경필

1. 개요


대한민국의 보수정당계 내 개혁파, 쇄신파인 남경필(1965년 1월생) 전 경기도지사, 원희룡(1964년 2월생) 제주특별자치도지사, 정병국(1958년 2월생)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까지의 3인을 일컫는 단어이다.[1]

2. 역사


1999년, 한나라당의 당내 혁신 차원에서 이회창 총재의 이른바 '젊은 피 수혈'로 들어온 이들[2]로, 그 전엔 남경필이회창 후보의 대변인, 원희룡변호사, 정병국문민정부 청와대 제2부속실장 출신이였다. 1998년 재보궐선거로 먼저 정치에 들어온 남경필과 달리 다른 둘은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로 들어왔는데, 남경필도 사실상 이때부터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남원정의 출발은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로 대부분 여겨진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에 성공한 세 사람은, 김부겸, 권영진[3]과 함께 젊은 피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게 개혁적이고 소신있는 언행들로 유명해졌는데, '''미래를 위한 청년연대''' 줄여서 미래연대의 주축 멤버로서 미래연대가 생기고 부터 보수 일색을 넘어 수꼴이라는 비아냥까지 듣던 한나라당 내부에 이 때부터 젊은 개혁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하였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에 당의 강령에 따라 찬성을 하였으나 이후 박근혜 당시 대표에게 탄핵 철회를 주장하지만 기각된다.
이후 제17대 대통령 선거 당시 정병국, 남경필이 강하게 이명박을 지지하던 것과 달리 원희룡은 경선에 출마하였지만 3등으로 낙선한다.[4] 사실상 이 당시부터 3명은 각자도생을 걷게 된다. 한나라당 쇄신특별위원회 위원장이 된 원희룡은 서울 시장 경선에서 나경원, 오세훈에게 밀리며 낙선하고 총선 불출마를 건 당 대표 선거에서 '''4등으로''' 떨어지며 최고위원이 되지만 이듬해 중앙 선거권을 떠나게 된다.
반면 대표적인 친이 정치인이 된 정병국[5] 2010년 초 한나라당 사무총장에 임명되었으며 제18대 국회 후반기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장에 선출된다, 2011년 1월부터 같은 해 9월까지 문화체육관광장관을 역임하였고, 재임 중에 평창동계올림픽을 유치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프랑스와의 협상을 통해 국보급 문화재인 외규장각 의궤를 환수받았고 한국문화원을 설치하거나 K-POP 산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등 이명박 정부의 핵심, 양심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승승장구한다.
강하게 이명박을 지지했던 정병국과 달리 남경필은 2008년 이명박 정부의 광우병 파동때, 경찰의 폭력진압 논란에 대해서 비판하고 미국에게 양해를 구하고 재협상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이명박의 형인 이상득 의원에게 이명박 정부가 잘 되려면 형까지 권력의 핵심에 있으면 곤란하다면서 이상득에게 국회의원 총선 불출마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이 실용보다는 '정치와 이념' 잣대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정두언, 정태근과 함께 사찰대상이 되었다는 논란에 휩싸이며 사실상 친이계를 떠난다.[6] 이후 홍준표 신임 당 대표와 함께 최고위원에 선출되어 유승민, 정병국, 원희룡을 그 곳에서 만난다.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 패배와 선관위의 디도스 공격 논란이 일자 유승민과 함께 지도부 사퇴를 주장해 홍준표 체제가 무너지고 박근혜 대표 체제로 전환되어 비대위에 들어간다.
이후 박근혜 정부 이후 경기도지사가 된 남경필, 제주도지사가 된 원희룡과 국회의원직을 유지하던 정병국은 배신의 정치라 불리며 찍힌 유승민, 이혜훈, 유의동, 새롭게 개혁적 성향을 보이던 김성태, 장제원, 지상욱, 하태경과 함께 쇄신파라 불리게 되는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며 개혁파, 소장파들과 새누리당을 탈당, 바른정당을 창당한다.
하지만 바른정당이 지지율 부진을 겪고 바른정당 탈당사태가 반복되며 결국 남경필은 탈당하여 자유한국당으로 돌아가 경기도지사 재선을 노렸고, 원희룡의 경우 바른정당의 후신인 바른미래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제주도지사 재선에 도전한다. 반대로 정병국은 바른정당에 남으며 바른미래당에도 잔류함으로서 남원정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7]

3. 결말


자유한국당에 복당해 경기도지사 재선을 노리던 남경필은 2018년 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에 패해 재선에 실패했으며, 2019년 3월 30일에 정계은퇴 선언을 하였다.
유승민을 따라 바른정당에 남은 정병국은 이후 바른정당국민의당과 통합한 후신인 바른미래당에까지 잔류했다. 그러나 바른미래당 내부에서 친유 출신과 호남계와 극심한 갈등을 겪으면서, 바른미래당을 탈당했다. 바른미래당 탈당 후 새로운보수당을 창당했고, 새로운보수당자유한국당, 미래를향한전진4.0과 같이 미래통합당을 창립했다. 그러나 황교안, 친박, 친황황교안의 대선가도에 방해가 되는 정병국을 컷오프하고, 그 자리친박김선교를 공천하였다. 그런데 김태호, 홍준표와 달리 그는 미래통합당에 남아서 유승민과 같이 수도권 내 후보, 청년정치학교 출신 정치인, 청년정치인들의 유세지원을 하기로 결정했다.[8] 현재는 청년정치학교의 교장직을 담당하면서 청년정치인들과 후학을 양성하는 것에 중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정병국이 컷오프 된 자리를 차지한 친박 출신 김선교가 공직선거법, 정치자금법 위반혐의에 연루되어있는 상황이라 2021년 재보궐선거나 차기 재보궐선거, 총선에 출마해서 당선될 가능성이 있어서 정계은퇴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
바른미래당을 떠난 원희룡제주도지사 재선에 성공해 미래통합당에 합류, 최고위원을 맡게 된다. 이후 21대 총선에서 미래통합당이 참패하며 최고위원직은 내려놓게 되었지만 제주도지사, 그리고 대권주자로서 여전히 정치 인생을 이어가고 있다.

4. 관련 문서



[1] 나이 순으로 따지면 역순으로 가야겠지만, 언론에서 이 표현을 쓰면서 사실상 대명사로 굳혀졌다. 이준석 전 바른미래당 최고위원은 아마 어감 때문에 그렇게 부르지 않았는가라는 추측을 한 바 있다.[2] 친박으로 분류되었던 유승민 또한 이러한 의도로 들어온 것이다.[3] 단, 권영진은 나중에 합류했다.[4] 4등은 홍준표였다.[5] 사실 당시 한나라당 소속이 가장 많았던 상도동계에서는 서청원(대표적인 친박), 김무성(후에 범친이성향 비박으로 이탈),강삼재(이회창 지지)나 민주당계 정당으로 이탈한 일부를 빼고는 거의가 이명박을 지지했으며, 상도동계 핵심 인물 중 한 명이었던 김덕룡은 아예 이재오, 이상득, 최시중, 박희태와 친이 핵심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상도동계정병국친이계라는 건 딱히 이상할 이유가 없기도 하다.[6] 이 때, 이상득남경필, 정두언, 정태근에게 '참 나쁜 사람들'이라는 격한 표현을 사용했고, 남경필은 이에 반발해 사찰 의혹을 철저히 수사해야한다고 맞받아쳤다.[7] 다만 이렇게 갈라진 것과는 별개로 친분은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8]정병국은 본인이 컷오프된 원인인 김선교를 지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