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히토
1. 개요
일본의 황족. 쇼와 덴노(히로히토)와 고준 황후(나가코)의 차남이자 아키히토 상황의 남동생. 미치코 상황후에게는 시동생, 나루히토 천황과 후미히토 친왕, 구로다 사야코에게는 작은아버지, 마사코 황후와 키코 비에게는 시숙부, 마코 공주, 카코 공주, 아이코 공주, 히사히토 친왕에게는 작은할아버지이다. 어릴 적 칭호는 요시노미야(義宮), 현재의 궁호는 히타치노미야(常陸宮).[2] '''2019년 5월 1일 부로 현재 승계서열 3위'''이다.[3]
2.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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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1935년 11월, 히로히토 덴노와 나가코 황후의 차남이자 6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형인 아키히토 덴노와는 2살 터울. 천황의 아들로 태어났으므로 결혼 전까지는 칭호#s-3[4] 인 요시노미야(義宮)로 호칭했다.
만 4살이던 1939년부터, 일본 황실의 오랜 관례에 따라 부모의 곁을 떠나 시종들에 의해 양육되었다. 이 무렵 아버지 히로히토 덴노는 "영국이나 유럽 왕실에서는 자녀를 부모가 직접 키우는데, 일본은 왜 이래야만 하는가?!"라며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다고.[5]
어린 시절에 소아마비를 앓았고, 몸이 허약했다. 패전 후에는 마사히토 친왕 자신을 모티브로 만들었다는 만화 캐릭터의 이름인 '카세이(火星) 쨩'이라는 애칭으로 국민들에게 친숙한 존재가 되었고, 형 아키히토 황태자와 함께 새로운 '열린 황실'의 상징적 존재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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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카세이 짱
1958년 가쿠슈인 대학 이학부 화학과를 졸업했고[6] , 도쿄대학 대학원 연구생으로 지내며 동물학을 전공했다.
조지 워싱턴 대학교 명예박사, 미네소타 대학교 명예박사 등의 학위를 가지고 있으며, 독일 암 학회 명예회원이기도 하다.
3. 결혼
1964년 9월 30일 지금의 아내인 츠가루 하나코와 결혼했으며, 결혼과 동시에 새로운 미야케#s-3(宮家)인 '히타치노미야(常陸宮) 궁가'를 창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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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히타치노미야 궁가는 전후(戰後) 처음 창설된 미야케#s-4(宮家)인데다, 결혼 다음날인 10월 1일에는 도카이도 신칸센이 개통되고, 10월 10일에는 1964 도쿄 올림픽이 열리는 만큼, 전후 부흥을 실감케 하며 당시 일본인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식을 올렸다. 그러나 하나코 친왕비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을 얻지 못했다.[과거][7][8] 특히 평민[9] 출신 미치코 황태자비를 몹시 미워했던 어머니 나가코 황후를 비롯한 황족 및 구황족 인사들은, 이번만큼은 화족 가문의 딸을 뽑아서 결혼시켰는데도 자식이 없다는 사실에 속이 쓰렸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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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전범 상 양자를 들일 수도 없는 상황이라서,[10] 히타치노미야 부부의 애견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이후 암 연구를 계속하여, 1969년부터 재단법인 일본 암연구회 암연구소의 객원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2001년 1월부터는 암연구회 명예총재로 있다.
4. 기타
- 가뜩이나 내성적인 성격에 자식도 없어서 일본 황실의 마이너한 존재. 조카 후미히토 친왕은 말할 것도 없고, 승계서열이 밀린 사촌동생 토모히토(寬仁) 친왕[11] 보다도 존재감이 없었을 정도이다.
- 하지만 이런 이미지와 달리 일본 황가의 가장 가까운 방계 존속으로서 조카인 나루히토 신임 천황의 3종신기 승계식(璽等承の儀) 때도 옆에 휠체어를 탄 채 배석했다.
- 마사히토 친왕은 그리스도교에도 관심을 가져 교황 바오로 6세를 알현하기도 했다. 또한 형수 미치코 황태자비에게도 그리스도교에 관하여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미치코 황태자비의 친정 쇼다(正田) 가문은 가톨릭 집안이고, 미치코 황태자비도 가톨릭 미션스쿨 출신이기 때문.[12] 미치코 황태자비는 대답해 주었다. 그런데 이것을 시어른들에게 들켜, 안 그래도 호된 시집살이를 당하고 있던 미치코 황태자비만 또 꼬투리를 잡혀 호되게 꾸중을 들은 일이 있다.
- 형 아키히토 상황과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듯하다. 새해인사나 각종 황실관련 행사에서도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13] , 온화하고 차분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아키히토 천황도 마찬가지이다. 갈등의 골이 깊은 조카 나루히토와 후미히토 형제와는 대비되는 모습.
- 마사히토 친왕의 저택은 구 히가시후시미노미야 저택 및 황실목장 부지의 일부였고 1960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해당 부지들은 멀쩡하게 존재해서 형 아키히토 상황 내외와 같이 지내기도 했으나 1960년 형 내외가 현 토구고쇼로 이사함에 따라 막대한 토지를 놀릴 이유가 없었던 일본 정부에 의하여 마사히토 저택 구역을 제외한 나머지 부지들이 매각되었다. 여담이나 이우나 모모야마 켄이치의 도쿄별저도 이 근방에 자리했다.
[1] 미국의 전설적 투수 샌디 쿠팩스, 인도 발리우드 영화배우 다르멘드라, 한국 정치가 이회창, 이상득과 동갑[2] 궁호는 지명에서 따오는 게 일반적이다. 히타치(常陸)는 지금의 이바라키 현의 옛 이름.[3] 승계서열 1위는 나루히토 덴노의 동생인 후미히토 친왕, 2위는 후미히토 친왕의 아들인 히사히토 친왕이다.[4] 일본 황실에서 칭호#s-3란, 천황과 황태자의 자녀에게 주어지는 '~노미야' 형태의 이름을 뜻한다. (친왕의 자녀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5] 1959년 "최초의 평민 출신 비(妃)"로 화제를 모으며 아키히토 황태자에게 시집온 미치코 황태자비는, 관례를 깨고 2남 1녀를 직접 키우는 파격을 보여주었다. 이때부터 일본 황실에서도 아이들을 친부모 곁에서 길렀다.[6] 히로히토 덴노의 2남 5녀 가운데서 유일한 학사학위 보유자이다. 아키히토 덴노는 가쿠슈인 대학 시절 1년간 외유했던 것 때문에 동기들과 함께 졸업할 수 없게 되자, 학교 수업만 듣고 졸업은 하지 않았다. 즉 학적상 수료 상태. 첫째 누나 히가시쿠니 시게코는 여자 가쿠슈인, 셋째 누나 다카쓰카사 가즈코는 가쿠슈인 여자 고등과만을 졸업했다. 넷째 누나 이케다 아츠코는 가쿠슈인 여자단기대학(現 가쿠슈인 여대) 가정생활과를 졸업했고, 여동생 시마즈 타카코는 가쿠슈인 대학 영문과를 다니던 중 결혼 관계로 중퇴했다. 둘째 누나 히사노미야 사치코 공주는 생후 6개월 만에 요절.[과거] 일본국민 소수에서 고자설이 돌기도 하였다고 한다.[7] 마사히토 친왕이 무정자증이라는 소문이 거의 정설 취급받고 있다.[8] 하지만 "마사히토 친왕과 하나코 비가 자녀를 출산했었다 해도, 장남이자 쇼와 시대 당시 천황 승계 서열 1위에 있었던 아키히토 황태자와 미치코 황태자비 내외에게 상대가 되지 못 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자세한건 미치코 황후/갖가지 시집살이 에피소드 문서 참조[9] 말이 평민이지 대 재벌가의 딸이며 외가는 옛 화족 가문.[10] 현행 황실전범 9조에서는 '天皇及び皇族は、養子をすることができない', 즉 황족의 양자연조를 금지하고 있다. 당연히 양녀도 들일 수 없다.[11] 2012년 암으로 사망. 자유분방한 성격의 영향인지 언론노출이 꽤 잦은 편이었고, 구설수에 오른 적도 많았다. 특히 여성 천황 논의에 강력히 반대하며, "첩을 두어서라도 아들을 낳아, 남성으로 황위를 계승해야 한다."라고 주장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본인도 두 딸 아키코 공주와 요코 공주만을 두고 있었다. 생전에 똑똑한 큰딸 아키코 공주를 자랑스러워했다.[12] 생 모르 수녀회(아기 예수의 애덕 교육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후타바(雙葉) 여학원 유치원과 초등과를 거쳐, 성심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세이신 여학원 중등과와 고등과를 마친 후, 동(同) 학원의 세이신여자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생 모르 수녀회는 아직 한국에 진출하지 않았고, 성심수녀회는 1956년 한국에 진출하여 한국에서도 성심학교를 운영하고 있다.[13] 다만 2019년 영상에선 걸어다니는 형과 달리 휠체어를 타고 다니고 있는 걸로 보아 건강이 다시 악화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