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쿠니 시게코

 

東久邇成子, 1925년 12월 6일 ~ 1961년 7월 23일(향년 만 35세)
1. 개요
2. 출생
3. 어린 시절
4. 결혼
5. 화려한 혼수
6. 결혼 생활
7. 신적강하 후의 삶
8. 병과 사망
9. 기타


1. 개요


쇼와 덴노(히로히토)와 고준 황후(나가코)의 2남 5녀 중 맏이이다. 만약 일본 황실이 여성의 황위 계승을 인정했더라면, 황태녀로 책봉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결혼 전의 이름은 데루노미야 시게코 내친왕(照宮成子內親王), 결혼 후의 이름은 모리히로 왕비 시게코 내친왕(盛厚王妃成子內親王), 1947년 신적강하를 당한 후로는 히가시쿠니 시게코(東久邇成子).

2.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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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쇼와 덴노, 어머니 나가코 황후와 함께.
다이쇼 덴노데이메이 황후의 첫 손주이기도 해서 많은 축복을 받으며 태어났다.[1] 다이쇼 덴노에게 있어서는 생전에 본 유일한 손주이기도 하다.
시게코 공주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 나가코 황태자비를 비롯한 황실 가족들은 첫 아이가 딸이라 섭섭해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 히로히토 황태자는 '여자아이는 다정해서 좋다'라며 기쁨을 표현했다고. 첫 자식이어서 그런지 부모에게는 아들 딸 막론하고 많은 사랑을 받고 자라났다.

3. 어린 시절


시게코 공주는 일본 황실의 전통을 깨고 친부모의 곁에서 어머니의 모유로 자랐으나, 1930년부터 부모와 떨어져 궁성 내에 있는 구레타케(吳竹) 기숙사에서 양육되었다. 양육계가 시중들기 어려우며, 응석을 받아주는 친부모의 곁에서 버릇없이 자라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훗날 태어난 시게코 공주의 여동생 다카노미야 가즈코 공주, 요리노미야 아츠코 공주, 스가노미야 타카코 공주도 이곳에서 함께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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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시게코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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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후리소데 차림의 시게코 공주.
1932년 4월, 만 6세의 시게코 공주는 여자 가쿠슈인[2]에 입학했다. 닌코 덴노 시절에 세워진 관립학교인 가쿠슈인은 황족과 화족을 위한 전용 학교였으며[3], 남학교와 여학교로 분리되어 있었다. 정기적으로 학우들 몇몇이 조를 이루어 시게코 공주의 거처를 방문했는데, 이는 궁내성에서 정해준 일이었다. 시게코 공주와 친한 친구들은 더 자주 초대되기도 하였다.
여자 가쿠슈인 시절, 시게코 공주는 작문과 과학 과목을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공부를 잘하고 총명해, 부모와 황실 가족들은 시게코 공주가 아들이 아님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만 11~12세이던 1937년부터는, 휴가 때마다 전국 각지를 다니며 단독으로 공무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특수한 신분을 의식한 탓인지, 아니면 천황일본 황실의 신격화(국가신토)가 한창이었던 시대적 배경 때문인지, 시게코 공주는 여자 가쿠슈인 중등과 5학년 시절에 이러한 글을 남기기도 했다.

나는 어떠한 인연에서인지 고귀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나는 끊임없이 세상의 주시 속에 있다. 언제 어디에서나 나는 우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황실을 짊어지고 있다. 나의 언행은 즉시 황실에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 어찌 태평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후략)


4.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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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히로 왕과 시게코 공주 부부.
시게코 공주는 과학 과목을 좋아해서, 장래 대학교에 진학하여 생물학을 공부한 후 아버지 쇼와 덴노연구소에서 일하고 싶었다. 현대라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적극 권장될 만한 일이지만, 당시의 공주로서는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대신 그녀는 어른들의 뜻에 따라 시집을 가야 했다.
1941년에 시게코 공주의 결혼이 정해졌는데, 신랑은 나가코 황후의 숙부이자 쇼와 덴노의 고모부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의 장남인 모리히로(盛厚) 왕이었다. 촌수로 따지자면 신랑은 시게코 공주에게 시게코 공주의 부계로도, 모계로도 오촌 종숙(從叔)[4]이 된다. 모리히로 왕 입장에서는 5촌 당조카.[5] 히가시쿠니노미야 가문으로서는 2대에 걸친 내친왕[6]과의 혼인이기도 했는데, 모리히로 왕의 어머니는 메이지 덴노와 측실 소노 사치코의 9녀인 야스노미야 도시코(泰宮聰子) 내친왕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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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게코의 고모할머니이자 외종조모이자 시어머니인 히가시쿠니 도시코(1896.5.11 - 1978.3.5) 조카 겸 시조카의 딸이 며느리가 된 셈이다.
1943년 3월, 만 17세의 시게코 공주는 여자 가쿠슈인 중등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고등과에는 진학하지 않고 신부수업을 몇 개월 받은 후, 동년 10월에 모리히로 왕과 결혼식을 올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던 시절이라 공주의 결혼식이지만 간소하게 치러져, 시게코 공주는 어머니 나가코 황후가 입었던 쥬니히토에를 입고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이렇게 호화로운 혼수를 장만해 갔다.

5. 화려한 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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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게코 공주가 혼수로 장만해 간 도자기들. 오오쿠라 도원(大倉陶園)이라는 도자기 회사에서, 36인분 683개의 도자기를 2년에 걸쳐 일일이 수작업으로 제작했다. 도자기마다 무늬를 전부 다르게 그렸다고 한다. 가장자리의 붉은 꽃은 시게코 공주의 오시루시(お印)[7]홍매화(紅梅花)이며, 테두리에는 금박을 입혔다. 도자기만도 이렇게 어마어마하니, 전체 혼수의 규모는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6. 결혼 생활


시게코 공주는 어머니 나가코 황후를 많이 닮아, 시집갈 무렵 옷의 치수를 재었더니 나가코 황후의 결혼 당시 체형과 정확히 일치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결혼 당시 어떤 기분이었느냐"는 질문에 대해, 훗날 그녀는 "슬프기도 했고, 싫기도 했고, 행복하다는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라고 했다. 당사자들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고 어른들끼리 정한 혼사인데다가 맞선 한 번도 없이 결혼한, 전형적인 옛날식 혼인이었기 때문에 부부의 사이는 어려웠다.[8] 다행히 남편 모리히로 왕이 좋은 사람이라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부부 사이에 애정이 싹텄다고 한다.
도쿄 대공습이 한창이던 1945년 3월, 시게코 비는 도쿄의 한 방공호에서 첫 아이 노부히코(信彦) 왕[9]을 낳았다. 당시 군인이었던 남편 모리히로 왕은 군대의 일로 치바현에 가 있었고, 시게코 비는 조산부들에게 둘러싸여 첫 출산을 했다. 친정어머니 나가코 황후는 직접 찾아가는 대신 궁중의 시녀들과 간호부들을 보내어 모정을 나타냈다. 그 후로 장녀 후미코(文子) 여왕[10], 차남 모토히로(基博)[11], 3남 나오히코(眞彦), 차녀 유코(優子)의 3남 2녀를 낳았다.

7. 신적강하 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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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적강하 후 첫째 노부히코, 둘째 후미코와 함께.
시게코는 같은 황족 신분이었던 모리히로와 결혼했기 때문에 내친왕에서 친왕비로 신분이 바뀌었을 뿐, 결혼 후에도 여전히 황족의 신분을 유지했다. 그러나 패전 후 히가시쿠니노미야 가문은 황족의 신분을 잃고 평민으로 전락했다.[12]
황족 군인이었던 히가시쿠니 모리히로는 평민 직장인이 되었다. 공주이자 친왕비였던 히가시쿠니 시게코는 아이들을 직접 돌보고, 직접 장을 보면서 조금이라도 저렴한 상점을 찾아다니고, 가계를 돕기 위해 부업을 하는 등, 보통의 주부들과 똑같은 고생을 했다.
그러나 시게코는 어린 시절 타의로 포기해야만 했던 향학열을 되살려, 통신교육[13]을 공부하고 뉴트리아의 양식을 독학으로 성공시키기도 했다.[14] 1958년 1월 2일, 시게코는 NHK의 <나의 비밀>이라는 생방송 프로그램에 깜짝 출연했다. 당시 궁중에 모여 있던 황족들은, 하던 놀이를 팽개치고서 TV에 집중했다고 한다.
<나의 비밀>에 출연한 시게코. 1분 10초쯤부터 나온다.
1959년 4월, 남동생 아키히토 황태자가 황실의 오랜 전통을 깨고 평민[15] 여성인 쇼다 미치코와 연애결혼을 했다. 미치코 황태자비를 몹시 미워한 친정어머니 나가코 황후와 달리, 첫째 시누이인 시게코는 남동생 부부를 응원하는 메시지를 신문에 실었다. 또한 큰올케 미치코 황태자비를 친정 부모 및 형제들과 함께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파티를 열어주기도 했다.

8. 병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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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첫째 시누이 시게코의 3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미치코 황태자비. 당시 남편 아키히토 황태자, 시아버지 쇼와 덴노[16], 아들 나루히토 친왕을 빼곤 황족들과 화족들 거의 전부에게 핍박당하고 견제받던 미치코 황태자비로서는, 일본 황실 내에서 유일하게나마 자신을 이해하고 지지해주던 시누이 시게코의 죽음이 안타깝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시게코의 죽음을 알리는 뉴스.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17]되었나 싶을 무렵인 1960년, 시게코는 ''''''에 걸렸다. 수술을 시도했으나 이미 의학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말기 암의 상태였다. 천황 부부는 시게코를 궁내청 병원으로 옮겨 거의 매일 문병했고, 나가코 황후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어느 황족으로부터 소개받은 주술사까지 불러왔으나 주술로써 이 고쳐질 리가 만무했다.
1961년 5월 7일, 시게코는 친정아버지 쇼와 덴노환갑 잔치에 참석했으나, 몸이 너무 쇠약해져 연회 내내 누워 있어야 했다. 이것이 최후의 외출로, 결국 시게코는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친정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7월 23일 세상을 떠났다(향년 만 35세).''' 시게코의 장례식은 아오야마에서 거행되었고, 시신은 화장되어 도쿄도 분쿄구의 도시마가오카(豊島岡) 묘지에 안장되었다. 나가코 황후는 시게코의 무덤 곁에, 시게코의 공주 시절 오시루시인 홍매화를 심었다. 쇼와 덴노와 나가코 황후는 큰 충격과 슬픔에 잠겼으나, 지난 해에 태어난 장손 히로노미야 나루히토 친왕을 위안삼아 이겨냈다고 한다.[18]
시게코가 죽은 후 모리히로는 데라오 요시코(寺尾佳子)라는 여성과 재혼하여 아츠히코(厚彦)와 모리히코(盛彦)라는 두 아들을 더 낳았지만, 그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합하여 5남 2녀의 자녀를 두고 1969년에 사망하였다. 시게코의 사후 40년이 되는 2001년 7월 23일, 남동생 부부인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가 시게코의 묘지에 참배했다.

9. 기타


  • 아키히토 상황의 둘째 손녀[19]아키시노노미야 카코 공주가 시게코를 닮았다고도 한다.
  • 아키히토 상황의 셋째 손녀[20]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의 결혼 상대 후보자로, 모리히로의 자손들이 거론되었다. (즉, 시게코의 자손들과 요시코의 자손들) 구 황족 가문들 중에서 히가시쿠니 가문이 현 황실과 가장 가까운 친족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이코 공주 항목 참조.

[1] 이때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는 생후 7개월이던 첫아이(장남) 이진을 잃은 직후라, 일본 전역이 사촌 여동생 나가코 황태자비가 낳은 첫 아이 시게코 공주의 탄생으로 떠들썩한 것을 보고 '누구는 아이를 낳아서 좋겠네…'라고 생각하며 침울해했다고 한다.[2]가쿠슈인 여자 중등과, 가쿠슈인 여자 고등과, 가쿠슈인 여자대학의 전신[3] 패전 이전에는 "황족과 화족이 다니는 학교는 가쿠슈인"이라고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전후 이 법은 폐지되었으나, 그래도 '황족이 다니는 학교는 가쿠슈인'이라는 암묵의 룰이 있었다. 이것이 깨지기 시작한 것은, 2008년 9월 다카마도노미야 쓰구코 공주와세다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이다. 이 이후로 일본 황족들의 '탈 가쿠슈인' 사례가 줄을 이었다.[4] 부모의 사촌 형제. 당숙(堂叔)이라고도 한다.[5] 쇼와 덴노&고준 황후 부부 입장에서는 고모-고모부 혹은 숙부-숙모가 同 항렬인 사돈이 된 것이다.[6] 현재 일본 황실에서 천황손녀까지는 내친왕(內親王), 증손녀부터는 여왕(女王)이라 한다. 남자는 친왕/왕. 단 1947년 황실전범이 개정되기 전까지는 4대손까지를 친왕/내친왕이라 했고, 5대손부터 왕/여왕이라 했다.[7] 일본 황족에게 주어지는 개인 표식. 주로 식물이며, 사용하는 물건 등에 붙는다.[8] 그래서 시게코의 여동생들은 중매로 결혼하긴 했어도 형식적으로나마 결혼식 전에 맞선데이트 등의 과정을 거쳤고, 어머니 나가코 황후도 이를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막내 시마즈 타카코를 제외하고) 다들 오히려 맏언니 시게코보다 더욱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다.[9] 훗날 쇼와 덴노는 이 첫 손주의 결혼 문제에 대해 "양친이 계신 건전한 가정의 로, 노부히코 본인이 좋아하는 여성이면 된다."고 말했다 한다. 1947년의 신적강하로 노부히코 왕도 "평민 히가시쿠니 노부히코"가 되었고, 게이오기주쿠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평민 여성 시마다 요시코(島田吉子)와 결혼하여 유키히코(征彦)라는 외아들(1974년생, 50세)을 낳았다. 2010년에는 손자(14세)도 보았다. 어디까지나 '만약'이지만, 일본 황실이 오늘날 유럽입헌군주국들처럼 '남녀 구분 없이 맏이 우선'이라는 계승 원칙을 따랐더라면, 노부히코는 천황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 아이러니한 것이, 노부히코의 아버지 모리히로가 황족 출신이기 때문에 노부히코가 천황이 되어도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만세일계에 어긋나지 않는다. 노부히코는 2019년 3월 20일, 만 74세라는 요즘 세상에는 다소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10] 1946년생(78세). 출생 당시에는 여왕이었으나, 불과 1년 후인 1947년의 신적강하로 여왕의 지위를 잃었다. 후미코의 동생들은 신적강하 이후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평민 신분이었다.[11] 초명은 히데히코(秀彦)로, 훗날 미부(壬生) 가문의 양자로 입적되었다.[12] 1947년의 신적강하. 다이쇼 덴노의 직계 후손들을 제외한 모든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은 평민 신분으로 전락했다.[13] 자녀들의 증언에 따르면, "통신교육을 열심히 공부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고.[14] 아버지인 쇼와 덴노 역시 생물학 연구를 좋아했던 것을 보면, 부전녀전인 듯. 남동생 아키히토 덴노와 그의 둘째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 셋째 구로다 사야코생물학에 관심과 조예가 깊다.[15] 말이 평민이지 미치코 황후의 친가인 쇼다(正田) 가문은 닛신(日淸) 제분이라는 대기업을 운영하는 대 재벌가이며, 외가인 소에지마(副島) 가문은 옛 화족(백작) 가문이다.[16] 나가코 황후가 장남 아키히토 황태자와 쇼다 미치코의 결혼을 반대할 때, 쇼와 덴노는 "황실에도 새로운 신붓감이 필요하다"며 사실상 두 사람의 결혼을 찬성하며 큰며느리를 두둔했다. 그러나 미치코가 약 40여년 동안 겪었던 시집살이를 생각하면, 그다지 중재 역할 등 도움이 되진 않았을 듯하다.[17] 홍콩, 싱가포르 등으로 해외여행도 다녀왔다고 한다.[18] 그런데 나가코 황후를 비롯한 황족들과 화족들은, 시게코가 젊은 나이에 죽은 것을 두고 "여자가 잘못 들어와서 그렇다!!!"며 트집을 잡아 미치코 황태자비를 비난했다. [19] 차남 후미히토 친왕의 차녀[20] 장남 나루히토 덴노의 무남독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