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다 사야코

 

1. 개요
2. 어린 시절
3. 성년기
4. 가족들과의 좋은 관계
5. 요시키와의 만남과 약혼
6. 사야코 공주의 결혼일본에 미친 영향
7. 결혼에 따른 사야코 공주의 변화
8. 결혼 후의 생활
8.1. 의혹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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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前 노리노미야 사야코(紀宮清子)/
後 쿠로다 사야코(黒田 清子)
생년월일
1969년 4월 18일(54세)
출생지
일본 도쿄 궁내청병원
(일본 도쿄 도 치요다 구)
아버지
아키히토 상황
어머니
미치코 상황후
큰오빠
나루히토 천황
큰올케
마사코 황후
작은오빠
후미히토 친왕
작은올케
키코 비
남편
쿠로다 요시키(黒田 慶樹)
자녀
슬하 없음
조카
아이코 공주 내친왕
(큰오빠의 자녀)
마코 공주, 카코 공주, 히사히토 친왕
(작은오빠의 자녀들)
학력
카키노키자카(柿の木坂) 유치원
가쿠슈인 유치원
가쿠슈인 초등과(76~82)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82~85)
가쿠슈인 여자 고등과(85~88)
가쿠슈인 대학 문학부 일어일문학과
미혼 시절의 이름은 '노리노미야 사야코(紀宮清子)', 신분은 내친왕(内親王)[1]이었다. 2005년 11월 15일 '''평민 구로다 요시키와 결혼, 내친왕(황족)의 신분을 잃고 평민이 되었다.''' 2012년부터 이세신궁의 보조 신관으로 일했고, 2017년 6월부터 정식 신관이 되었다.
외모로 인하여 (특히 젊은 시절 미인이었던 어머니와 비교되어) 네티즌들 사이에는 종종 웃음거리 대상으로 취급받지만, 선량한 성품과 원만한 대인관계로 호평받는 인물이다. 외모지상주의로 인한 과소평가,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케이스.[2] 역시 3남매 중에서 홍일점이자 최연소로, 막내다. 사야코는 오빠들인 나루히토 천황과 후미히토 친왕과는 달리 자녀 조차도 없다.

2.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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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4월, 사야코 공주를 낳고 궁내청 병원에서 퇴원하는 아키히토 황태자와 미치코 황태자비 내외.
사야코 공주가 태어났을 당시, 병원을 방문하는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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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7월, 백일을 맞은 사야코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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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오빠 나루히토 덴노, 작은오빠 후미히토 친왕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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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만 둘이던 아키히토 황태자의 고명딸이라,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다. 황실은 물론 국민들에게도 반가운 공주였다고. 9살 위인 큰오빠 나루히토 친왕은 물론이고, 5살 위인 작은오빠 후미히토 친왕 역시 어린 여동생을 몹시 귀여워했다.[3] 특히 나이 차이가 비교적 적은 작은오빠 후미히토가 사야코 공주를 정말 살갑게 대했다.
일본 황족들이 다 그러하듯 황족의 전통이자 관례로 가쿠슈인에서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코스를 밟으면서 졸업했다. 다만 '''가쿠슈인 유치원에 입학하기 전의 1년 동안, 다른 민간 유치원에 다녔다.''' 언젠가는 시집가서 출가외인(出嫁外人)이 될, 게다가 평민이 될 딸이라는 생각에 그런 듯하다.
한 성깔들씩 했던 오빠들과 달리[4], 사야코 공주는 어린 시절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당시 미치코 황태자비가 시어머니(즉 사야코의 할머니 고준 황후)으로부터 시집살이에 마음고생하며 병약하던 때라, 사야코 공주도 내성적인 성격이 되어버린 것 같다.
이런 성격에다 여자아이라는 점 때문인지, 가쿠슈인에서 급우들에게 (훗날 조카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가 당했던 것처럼) 상당한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큰오빠 나루히토는 황태자 부부의 결혼 이듬해에 바로 태어난 첫아이+장남이자, 장차 천황이 될 국가적 보배와도 같은 귀한 신분이기 때문에, 나루히토를 건드리기에는 후환이 두려웠을 것이다. 작은오빠 후미히토는 신분도 신분이지만 성장해 영 좋지 않은 방향으로 바뀔 정도로 워낙 외향적인 성격이며 활달하고 장난끼가 많았기 때문에, 급우들 사이의 중심이 되면 되었지 결코 당할 성격은 아니었다.
게다가 가쿠슈인은 일명 '금수저 학교'[5]이다 보니, 학생들은 일단 본인부터가 남 부러울 것 없는 집안에서 왕자공주처럼 자란 애들이다. 그래서 가쿠슈인 학생들은 진짜 왕자와 공주를 그렇게 존경하지도 않고, 오히려 어릴 적엔 반감을 드러낸다. 가쿠슈인은 교칙이 엄한 학교지만, 재학생들이 다들 특권층 자녀들인지라 선생들도 문제행동을 지도할 엄두도 못 낸다고. 각자 집에서 귀하게 자란 애들이니 고칠 구석이 한두 군데도 아닐 테고.[6] 남학생 몇몇은 사야코 공주의 필통이나 필기구 등을 빼앗고서 "이건 우리 부모님이 내는 세금으로 산 거니깐 우리 것이야!!"라며 적반하장으로 굴거나, 연못에 사야코 공주의 책가방을 빠뜨려놓는 일도 다반사였고, 심지어는 사야코 공주를 물웅덩이에 밀어 넘어뜨렸다고도 한다.
결국 초등과 시절 사야코 공주는 (당연히) 등교거부 증상을 보였다. 마침 어머니 미치코 황태자비모진 시집살이로 고통을 받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모녀는 1977년부터 1987년까지, 매년 둘이서 짧은 여행을 다녔다. 이는 시집살이를 당하고 있던 미치코 황태자비에게도, 학교에서의 괴롭힘으로 힘들었던 사야코 공주에게도, 퍽 위로가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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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가쿠슈인 초등과 3학년이던 사야코 공주. 가쿠슈인 중등과(남중) 1학년이던 작은오빠 후미히토 친왕과 함께. 아무래도 큰오빠 나루히토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그런지, 비교적 후미히토와 친근하게 지내며 어울려 놀았다.
자라면서 점점 부모의 공무(公務)에도 동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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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3월,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를 졸업하는 사야코 공주. 이후 가쿠슈인 여자 고등과를 거쳐 가쿠슈인 대학 문학부 일어일문학과에 진학했다.

3. 성년기


1989년 4월 18일, 만 20세로 성년이 되었다. 축하 행사도 예정되어 있었으나, 그해 초에 할아버지 쇼와 덴노가 사망하여 다음 해 3월로 연기되었다.
가쿠슈인 대학 문학부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했다. 성적이 우수하여 주위에서는 대학원 진학도 권유했으나, 사야코 공주는 '''조류 연구소 근무'''를 택했다. 야마시나(山科) 조류 연구소[7]에서 비상근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주 2회의 통근 시에는 스스로 만든 도시락을 가져가서 동료 연구원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고.[8] 헤이본샤(平凡社)에서 출판된 《일본동물대백과》 중 물총새 항목은 사야코 공주의 작품이기도 하다.
'''일본 황족들 중에서 일을 하여 정식으로 급여를 받은 인물은 사야코 공주가 최초'''였으며, 연구소에서 받은 급여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모아두었다고 한다. 사야코 공주는 '''돈을 잘 쓰지 않아'''서, 궁내청 측에서는 그녀에게 지급하는 금액을 줄였다.
그 외에 안내견 육성과 자원봉사 등에도 흥미가 많다고 한다. 를 좋아하며, 만화책 및 애니메이션도 좋아한다고. 영어, 요리, 일본무용 등 '''특기도 많다'''고 한다. 일본무용의 경력은 20년이 넘어,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황족으로서 국내외의 공무 활동도 꾸준히 했다. 1997년에는 프랑스 파리를 방문하여 일본 문화센터 개관식에 참여하기도 했다.[9]

4. 가족들과의 좋은 관계


사야코 공주는 아버지 아키히토 덴노가 전립선암으로, 어머니 미치코 황후실어증으로 힘들어 했을 때 열심히 그 곁을 지켰으며, 특히 시집살이로 모진 고통을 겪은 어머니에게 많은 위로가 되었다고 한다. 1993년 실어증에 걸려 쓰러졌던 미치코 황후를 내내 간병했기에, 미치코 황후가 이듬해에 '''회복되자마자 가장 먼저 한 말이 "사야코"였다'''고. 2005년, 미치코 황후는 하나뿐인 딸을 시집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발언으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사야코는 내가 울적해 있을 때 곁에 다가와서 위로해 주는 딸이었습니다. 나의 친정어머니[10]

께서 그랬던 것처럼, 나도 시집가는 딸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못할 것 같습니다.

작은올케 키코 비와는 같은 가쿠슈인 출신이어서, 키코 비가 황실로 시집오기 전부터 친하게 지냈다. 조카인 마코 공주카코 공주고모인 사야코 공주를 잘 따랐다고 한다.
착하고 성격 좋기로 소문났다. 상냥하고 친절하며 의지되는 성품이라고. 어머니를 간병한 에피소드나, 학창 시절에 황족(특권계층)이라는 이유로 심한 이지메를 당했지만 꿋꿋이 이겨낸 것, 후미히토 친왕이 황족 모임에서 시녀를 희롱하다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꾸짖음을 듣자 오히려 화를 내어 큰 싸움으로 번질 뻔했을 때[11], 두 오빠를 잘 타일러서 말린 것이 사야코 공주였다는 이야기 등등.

5. 요시키와의 만남과 약혼


남편이 된 구로다 요시키(黒田義樹)는 도쿄도청에서 근무하고 있는 공무원이며 평민인데, 사야코 공주의 작은오빠인 '''후미히토 친왕과는 가쿠슈인 동창이며 절친한 친구'''이다.
(가쿠슈인 출신이니 요시키도 금수저라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요시키의 부친[12]은 도요타 자동차에 근무하던 직원이었고 어머니는 옷가게집 딸. 요시키의 고모들 중 하나와 큰아버지가 자작 가문과 결혼한 정도이며, 조부 역시도 미츠이 물산 출신의 실업가 정도로, 그렇게 큰 돈을 벌지 않았다. 즉 금수저는 아니라는 것. 어떤 인맥인지 몰라도, 구로다 부친이나 요시키 모두 가쿠슈인에 보냈다.)
자연히 요시키와 사야코 공주는 어려서부터 알고 지냈을 것이다. 이후 2003년 후미히토 친왕이 주최한 테니스 시합에서 두 사람은 재회하여 사랑을 키우기 시작했다. 외출이 자유롭지 못한 사야코 공주의 사정 때문에, 주로 고쿄(황거) 내에서 데이트를 하거나 전화이메일(펜팔 편지)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2004년 12월 30일 약혼을 공식 발표'''했다. 본래 약혼 발표는 11월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니가타 현의 지진과 다카마츠노미야 키쿠코 비의 사망으로 인해, 2차례나 미루어졌다.

6. 사야코 공주의 결혼일본에 미친 영향


'''천황의 딸이 시집가는 것은 무려 45년 만의 일[13]'''이어서, 일본열도는 오랜만의 경사에 들떴다. 한 경제연구소의 분석에 의하면, 사야코 공주의 결혼식이 결혼 관련업계에 미친 파급효과가 무려 1,160억 엔(약 1조원)에 이른다고.
참고로 요시키와 사야코 공주의 결혼은 양쪽 모두에게 '''만혼'''에 해당한다. 결혼 당시 요시키는 40세, 사야코 공주는 36세였다. 사야코 공주의 고모들이 모두 17세에서 많아야 21세에 시집간 것과 비교해 보면, 시대의 변화도 감안해야겠지만[14] 대단히 늦은 셈. 그러나 사야코 공주는 평소부터 '''"내 결혼 시기는 내가 정하겠습니다."'''라며 자신이 원하는 시기에 결혼하겠다고 밝혔고, 많은 일본 여성들은 그런 태도에 깊이 공감했다고 한다. 이는 최근 '''일본 여성들의 만혼 풍조'''를 반영하고 있다고 AFP 통신에서는 전했다.
그러나 만혼 탓인지 다른 문제인지는 몰라도 자녀는 없다.[15]

7. 결혼에 따른 사야코 공주의 변화


결혼과 함께 사야코 공주의 '''신상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먼저 황족의 신분을 잃고(황적이탈) 남편을 따라 평민이 되었으며, '''이름도 미혼 시절의 '노리노미야 사야코'에서 남편의 성씨를 따라 '구로다 사야코'로''' 바뀌었다. 운전면허도 취득했으며, 처음으로 은행 통장도 만들었다. 호적과 선거권도 가지게 되는 등, 일반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들이 주어졌다. 결혼을 앞두고서는 일반 가정에 가서 요리를 배우는 등, 신부수업도 받았다. 품위 유지비로 1억 5,250만 엔(약 13억 2천만 원)의 돈도 받았다.
본래 황실의 결혼식고쿄에서 치러지는 것이 전통이었으나, 요시키와 사야코 공주의 '''결혼식은 도쿄 테이코쿠(東京 帝國) 호텔에서''' 치러졌다. 약 150명이 초대되어 '''간소한 티타임 형식'''으로 치러진 이 결혼식에는, 요시키의 상관인 이시하라 신타로도 초대되었다. 처음으로 황실의 결혼식을 맡은 호텔 측에서는 긴장하여 '''만반의 경비와 보안'''을 했다고 한다. 심지어 하객들의 사진을 일일이 입수하여 대조했다는 소문도 있으나, 호텔 측에서는 "손님에게 큰 실례"라며 강하게 부인했다. 한 하객의 말에 따르면 "결혼식장에 올 때 청첩장 봉투를 꼭 지참하라는 당부가 있었습니다. 봉투에 적힌 주소와 이름이 명단과 일치하지 않으면 입장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한다.[16]
일본의 공영방송인 NHK 및 민영방송 5사는 대대적으로 결혼식을 중계하여 방송했다. 사야코 공주의 막내 고모인 시마즈 타카코가 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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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에서. 일본 황실의 전통에 따라, 사야코 공주는 신랑 요시키와 함께 나란히 걷지 못하고 3발자국 뒤에서 따라가야 했다.
애니메이션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의 여주인공 클라리스의 의상을 본뜬 웨딩드레스를 입어 화제가 되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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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야코 공주의 결혼식에 참석한 큰오빠 부부, 나루히토 황태자와 마사코 황태자비. 마사코 황태자비는 시누이의 결혼식에 웨딩드레스와 비슷한 하얀 드레스를 입고 와서 비판을 받았다.[18]

8. 결혼 후의 생활


비상근으로 근무하던 조류 연구소를 그만두고, 한동안 전업주부 생활을 했다. 궁성과 구로다 본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신축 아파트를 구입했으나, 이듬해 아파트가 완공될 때까지 임대아파트에 임시로 거처해야 했다. 신축 아파트는 도쿄의 주택치고는 드물게 과 맞닿아 있어 외부에서 훔쳐보기 어려우며, '''안전과 사생활 보호가 철저한 집'''이라서 선택했다고.[19]
2008년 4월에는 친정 부모의 결혼기념일을 구로다 자택에서 축하했다. 또한 2009년 12월에는 남편 요시키와 함께 황실 일가의 모임에도 참석하는 등, '''결혼 이후에도 친정과 친밀하게 교류'''하고 있다.[20]
2012년 4월 26일에는 '''이세신궁의 임시 신관'''으로 취임했다. 1988년부터 신관을 맡아 온 넷째 고모 이케다 아츠코[21]가 고령으로 쇠약해졌기 때문이라고. 2017년 6월 아츠코는 신관을 완전히 그만두었고, 사야코가 그 뒤를 이어 새 신관으로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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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신궁신관으로 활동하는 사야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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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야코의 티아라. 미키모토 사에서 제작되었다. 일본 여성 황족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예장에 갖추는 티아라는 모두 국비로 지출되어, 여성 황족이 결혼으로 황적에서 이탈하면 국고에 반납된다. 하지만 사야코의 티아라는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의 사비용에서 지출해 비용을 치른 것으로, 사야코의 사유재산. 이 비싼 것을 자신들의 사비용에서 냈을 정도면, 아키히토 덴노 내외가 딸을 정말로 아꼈던 모양이다.
2019년 4월 9일, 아키히토미치코 황후의 이사 준비를 사야코가 주도하여 돕고 있다. 황실 기자는 사야코를 "아키히토 내외가 사적인 부분을 부탁할 유일한 자녀"라고 말하면서, "사야코가 앞으로 작은오빠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의 의사소통을 도울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래도 장남 나루히토 황태자는 그 위치에 있어서 어느 정도 선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다, 곧 천황직을 계승하기 때문에 할 일이 많다. 차남 후미히토 친왕은 애초에 아키히토 부부조차도 기대할 구석이 없는 사람인 동시에, 사실상 유일한 황족 남성으로서 형을 도와 해야 할 것도 제법 많다. 결국 남은 사람은 사야코뿐이다. 그녀는 가족들의 사이를 잘 중재하고, 가족들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편이며, 이제 평민이기 때문에 행동의 제약도 비교적 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야코는 첫째 조카 마코 공주와 둘째 조카 카코 공주가 어렸을 때부터 잘 따랐던 상대인 만큼 고립된 자매의 좋은 상담자가 될 것이라는 게, 아키히토 내외가 상당히 기대하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마코 공주가 (코무로 케이와의) 결혼 문제가 터진 이후 아야코 공주의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 사야코의 바로 옆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포착되는 등, 여전히 사이가 좋은 것이 알려졌다.
2019년 4월 천황 부부로서 마지막 이세신궁 참배 행사에 사야코가 신관으로 참석해서 '천황 퇴위 의식(天皇御退位の礼儀式)'을 끝마친 그날 밤, 어머니 미치코 황후와 숙박지에서 하루 밤을 묵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2019년 5월 1일 큰오빠인 나루히토의 제126대 천황 등극 이후, 축하연 등 각종 황실 행사들에 남편과 함께 자주 참석하고 있다.
2019년 9월 8일 어머니 미치코 상황후가 유방암 수술을 받을 때, 아버지 아키히토 상황과 함께 병원에 왔다.[22]

8.1. 의혹


2014년 들어서 "남편 구로다 요시키와는 별거하면서 친정(황궁)에 살고, 세금을 몰래 타 쓴다"는 이야기가 일본인들 사이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행사 때나 남편을 불러서 다정한 부부인 척하고, 결혼 후에는 본인이 집안일을 하지 않고 남편이나 친어머니가 하녀처럼 일해준다"는 소문도 돌고 있다. "일반인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으면서, 언론에는 적응한 척 위장보도한다"고 욕을 엄청 듣고 있으며, 요시키의 이름만 빌린 위장 결혼설도 떠도는 중이다.
사야코는 결혼 전까지만 해도 못생긴 외모(…) 외에는 이미지가 굉장히 좋았는데, 결혼하고 시간이 흐른 후로는 이런 소문들로 인해 이미지가 추락하고 있다. '로얄 도부스 니트'[23], '세금 도둑', '부사야' 등 별명들도 생겼다. 서녀설까지 나오면서[24], '황족도 아닌 주제에 황족 행세한다.'고 또 비난받고, '그동안 알려졌던 착하다는 이야기도 사실은 거짓말 아니냐.'는 이야기가 돈다.
일본인들은 성격 좋고 평판이 좋았던 사야코가 세금 도둑이라는 소문이 충격인 것인지, 이제는 하다하다 '어머니 미치코 황후의 잘못된 교육이 문제가 아니냐.'는 논란도 있다. 사야코가 어린 시절 왕따를 당할 때 어머니와 함께 다녔던 여행에서 고급 여관과 음식 가격 비싼 식당만 골라서 묵거나 외식을 했던 것까지 다시 트집을 잡혔다.
하지만 이러한 비난 여론은 2018년 조카인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 이후 순식간에 사그러들었다. 2014년 의혹 제기 이후에는 별 다른 이야기[25]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부모님의 생전퇴위 이후 두 오빠들과 달리[26] 부모님의 생전퇴위 준비를 적극적으로 돕는 등 여러가지 활동을 보여주면서, 그나마 황실에서 강하한 여성 황족 출신자로서 가장 이상적인 행동을 함에 따라서 호의적인 여론으로 돌아선 것이라고 한다.

8.2. 여성 미야케#s-3


카코 공주가 태어난 1994년도부터 간간히 "여성 황족도 미야케#s-3(황족 가문) 창설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아이코 공주여성 천황 여부 논란과 2006년 히사히토 친왕의 탄생 이후로도 일본 황족 수가 적자, 본격적으로 여성 미야케 창설 허용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만약 여성 황족도 미야케#s-3를 창설할 수 있도록 인정되면, 이미 시집 가서 황실을 이탈한 공주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여성 황족의 미야케를 인정하면, 세금 때문에 일본 여론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이런 식으로 의견이 분분했다.
한 때, 아키히토 상황의 고명딸인 구로다 사야코가 황족 신분으로 복귀될지도 화제가 되고 있다.
큰조카 마코 공주의 결혼 소동 탓에, 큰오빠인 나루히토 황태자의 천황 즉위가 확정된 이후에도 계속하여 여성 미야케 창설에 관한 논쟁이 지속되고 있어서, 이 문제는 경과를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 하지만 사야코는 만혼을 했기에 현재까지 자녀가 없어서, 미야케 창설을 하더라도 곧바로 후손 부족으로 단절될 운명을 맞이할 수 있기에, 미야케 창설이 될 가능성은 비교적 낮다.

[1] 천황의 딸과 손녀까지는 내친왕, 증손녀부터는 여왕이라 한다. 단 현행 황실전범이 제정된 1947년 이전에는 4대손까지를 내친왕, 5대손부터를 여왕이라 했다. 남자는 친왕/왕.[2] 사실 작은오빠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과 더불어, 미치코 상황후의 친자식이 아니라 아키히토 상황이 다른 여성과 내통하여 낳은 혼외자식이라는 카더라 통신일본 내에 암암리에 퍼져 있는 듯.[3] 3남매의 어린시절 영상과 사진들을 보면 두 오빠들이 사야코를 잘 챙겨주며 오냐오냐 예뻐하는 모습들이 많이 보인다.[4] 사실 나루히토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말 젠틀하고 동생에게도 웬만해서는 화를 안 내었지만, 동생이 너무 심하다 싶으면 부모처럼 호되게 혼을 내었다.[5] 본래 황족들과 화족들을 위해 세워진 관립학교였다. 패전 후에는 평민에게도 개방되고 사립학교로 전환되었지만, 말이 '평민'이지 금수저들이 많이 다닌다고.[6] 아버지 아키히토 덴노도 학창시절 별명이 '''흑돼지'''였다고 한다.(전시라 식량이 부족한 때에, 그 혼자만은 신분상의 이유로 잘 먹어 통통하니까.)[7] 막내고모부 시마즈 히사나가가 이사장을 지낸 곳이다.[8] 후미히토 친왕의 장녀 마코 공주도, 고모 사야코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박물관에서 비상근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9] 원래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황태자 부부를 초청하고 싶었으나, 궁내청에서는 사야코 공주를 대신 보냈다. 황태자 부부, 특히 마사코 황태자비는 아들 출산에 전념해야 한다는 이유로.[10] 쇼다 후미코(正田富美子). 후미코의 친정 소에지마(副島) 가문은 옛 화족(백작) 가문이다.[11] 이때 새댁이었던 키코 비는, 남편의 포악한 행동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고 한다.[12] 요시키가 고3 때 사망.[13] 1960년, 쇼와 덴노고준 황후의 막내(5녀) 스가노미야 타카코 공주가 시마즈 가문에 시집갈 때 이후 처음. 시마즈 타카코는 자매들 중에서 유일하게 행복하고 무난한 삶을 살아간 인물로, 화려하고 활달하며 떠들썩한 성품이라고 한다.[14] 첫째 고모 히가시쿠니 시게코1943년, 막내 고모 시마즈 타카코가 위 각주에서 서술했듯 1960년에 결혼했다.[15] 원래 늦은 나이에 임신을 시도할수록 확률이 떨어진다. 아이를 만약 가졌다고 쳐도 노산의 상황이 오면 위험하기도 하고.[16] 다만 원래 일본에서는 결혼식에 참석할 때 청첩장은 필수적으로 지참해야 하며, 생각보다 제한된 사람만 초대하니 크게 이상하거나 유난을 떠는 것은 아니다. 다른 점이라면, 일본 황족이 참석하다 보니 일반인들보다 좀 더 엄격하게 초대하고 경호인원만 더 추가되는 정도로 보면 된다.[17]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 시절부터 동경해 왔다는 보도가 있었고#, 동인지를 만들거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음악을 궁내청 주최 음악회에 추천했다는 말이 있다.#[18]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의상 선정 탓에, 이 해프닝을 마사코 황태자비가 당한 시집살이 일환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일본 황실에서는 서양식 의복을 입기로 한 자리에 마사코 황태자비에게만 기모노를 입고 오라든지 해서, 마사코 황태자비 혼자 잘못된 드레스 코드로 웃음거리가 되게 하는 짓들을 상당히 자주 했다. 이러한 심술궂은 시집살이는, 마사코 황태자비의 시어머니미치코 황후도 젊은 시절 종종 당했던 일이었다. 미치코 황후/갖가지 시집살이 에피소드 참조.[19] 북향이라, 어머니 미치코 황후가 반대했다는 소문도 있다.[20] 사실 말이 좋아서 친밀한 교류지, 황실 일가에 뭔가 문제가 생기면 여지없이 달려와주는 '''해결사'''나 다름없다. 일례로 아키시노노미야 일가가 히사히토 친왕 하나만 남겨놓고 모두 집안을 비웠을 때 마사코 황태자비아이코 공주와 같이 놀게 하면서 돌보려고 히사히토를 데리러 왔더니만, 아키시노노미야 쪽 시종들이 안 된다고 바득바득 우기는 통에 사야코가 달려와서 사람들을 중재해야 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두 오빠의 사이가 험악해질 때마다 이걸 말리는 건 사야코 공주의 역할이었으니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21] 쇼와 덴노고준 황후의 4녀. 바로 위의 언니인 다카쓰카사 가즈코신관직에서 퇴임한 후, 카즈코의 뒤를 이어 이세신궁의 신관이 되었다.[22] 참고로 큰오빠 나루히토 덴노는 8일 아키타현에서 공식 행사가 있어 방문하고 있었다.[23] '도부스'는 '아주 못생긴 여자'를 일컫는 말, '니트'는 '취업 의욕이 없는 자발적 실업자'를 일컫는 말.[24] 진지한 설은 아니고, 젊은 시절 미모로 이름났던 미치코 황후와 사야코의 외모가 너무 달라서 도는 가십이다(…). 작은오빠 후미히토 친왕 역시 일본 황족치고는 키가 지나치게 크다고(178cm) 서자설이 돌았다. 다만 키에 대해서는, 어머니 미치코 황후의 키가 꽤 큰 편이다. 1959년 황실로 시집올 당시 쇼다 미치코의 키는 161cm였는데, 당시 일본 여성치고는 굉장히 큰 키였다. 현재 젊은 일본 여성들도 신장평균을 내면 158 내외를 오가는 수준에 불과하다. 그리고 친정 부모와 형제들은 그보다 더(!) 컸다.[25] 작은오빠 후미히토 부부는 주기적으로 싸웠니 어떻니하는 소문 이 튀어나왔지만, 구로다 부부 사이에서는 그러한 소문이 일절 나오지 않았다.[26] 다만 나루히토와 후미히토의 입장 차이가 있다. 나루히토는 황태자로서의 의무는 물론 아내 마사코 황후의 건강상태가 아직 회복되지 않아서와 같은 이유라 어느정도 납득이 가는 이유이지만, 후미히토는 형의 왕위 승계가 확정되고 난 뒤에도 사사건건 형에게 반박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 대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