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개척시대

 

1. 개요
2. 상세
3. 창작물에서
4. 치안 체계


1. 개요


[image]
1875년 캔자스 주 도지시티(Dodge City)의 모습.
빅토리아 시대 문서의 런던 사진과 비교해보면 벽돌건물 위주의 도시와 목조건물 위주인 개척촌의 분위기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American Frontier, The Wild West, Old West, Westward Expansion
1607년에서 1912년까지 계속된 개척과 이주, 전쟁으로 미국 영토가 완성되는 시기를 아메리칸 프론티어라고 부르는데 그 중에서도 19세기 말, 1850년~1890년, 후기 서부개척시대까지 포함하는 서부신화에서는 1924년까지의 기간을 흔히 서부개척시대라 정의한다. 기간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19세기 말로 한정하는 설부터 20세기 초까지 포함하는 설이 있는등 다양하다.
미국의 통치권이 서부로 뻗어나가며 금광 개발을 위해 대량의 사람들이 이주하던 시대다. 카우보이, 총잡이, 무법자, 아메리카 원주민, 황금 등으로 대표되는 시대.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대중문화의 무대로, 남북전쟁과 함께 미국을 무대로 한 극에서 자주 다루는 시기이다. 동시기 유럽은 벨 에포크 시대에 해당한다.

2. 상세


초기 유럽에서 신대륙으로 이주한 이주민들은 동부 해안에 상륙했기 때문에 미국은 동부를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현재도 보스턴이나 뉴욕 등 미국의 전통적인 대도시들은 동부에 집중되어 있다. 동부 해안의 극히 일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땅은 대부분 아메리카 원주민의 영역이거나, 멕시코의 영토, 프랑스의 식민지 등이었다.
영국 식민지인들은 눈 앞에 있는 땅을 서서히 이른바 '''개척'''이라는 명목으로 점차 장악하면서 땅주인인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대립했다. 영국 정부는 불필요한 대립을 막고, 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우호관계를 고려하여 이를 저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인들은 정부의 규제를 어기고 무단으로 야금야금 개척을 하고 있었고, 미국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이후에는 '''거리낄 것 없이 자유롭게''' 서쪽으로 개척을 나간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미국에 루이지애나 식민지를 팔아버림으로써 동부 식민지 확대의 장애물이던 프랑스 영토가 사라지고, 그 길을 가로막고 있던 미국 남쪽의 멕시코와도 미국-멕시코 전쟁의 승리를 통해 멕시코를 텍사스 바깥으로 쫓아내면서, 동부의 미국인들이 중부와 서부로 가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미국인들은 영국에게서 독립을 하려면 국가를 발전시켜야 하고, 국가를 발전시키려면 인구가 많아야 하고, 인구가 많으려면 땅덩이가 넓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지속적으로 미 대륙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서진했고, 시기를 나눌때 초기를 유럽 식민지군과의 전쟁, 중기를 멕시코와의 전쟁이라면, 후기는 주로 서부에 산재한 원주민들과의 전쟁이었으며 이 시대를 '서부개척시대'라고 부른다.
남북전쟁 당시 미국 정부는 이른바 'Homestead Act"[1]를 통해 이민자들에게 저렴하게 서부의 땅을 나눠주는 한편 유럽 일대에 일명 아메리칸 드림에 관한 이야기를 풀기 시작하면서 많은 백인들을 미국으로 이주하게 만들어서 서부를 "식민화"하기 시작한다.[2]
텍사스, 캘리포니아 등을 두고 갓 독립한 멕시코와 충돌이 벌어지는데 결국 전쟁을 벌여서 승리하여 멕시코를 몰아내고 텍사스 공화국, 캘리포니아 공화국을 독립시킨 다음 연방으로 가입시켜서 서부지역의 영토를 확장했다. 이 시기 즈음해서 등장한 것이 '명백한 운명'이라는 주장으로 미국 땅은 신이 자기들에게 준 축복이고, 이걸 먹는 것은 당연하고 올바르다라는 것이었다. 이 주장은 미국의 확장에 도덕적·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명백한 운명은 서부 해안에 닿고도 끝나지 않아서 하와이 침략, 신미양요, 쿠로후네 사건, 미서전쟁 등으로도 이어진다.
서부에서 많은 금광이 발견되면서 골드 러시 시대로 돌입했고 수많은 동부인들이 금을 찾아서 서부로 이주를 하기 하면서 서부개척시대는 전성기에 이르게 된다.
서부는 동부와는 달리 농사를 지을 만한 땅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서부 해안은 예외) 가축을 방목하여 기르는 목장이 많이 세워졌는데, 이 때 목장에서 가축을 돌보던 사람들을 카우보이라고 불렀다. 실상 동부의 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서부에서는 그야말로 힘센 놈이 짱먹는 약육강식의 무법지대였기 때문에 수많은 무법자와 도적들이 활개쳤고, 또한 서부개척으로 인해 영토를 빼앗긴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백인들을 공격하는 일[3]도 빈번히 일어나는 위험한 곳이었다. 하지만 저렴하고 넒은 땅과 금이라는 두가지 이점 덕분에 그 위험을 무릅쓰고 서부개척을 하기 위해서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문화적인 측면에선 비록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게 되었음에도 미국은 여전히 유럽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독립 초기 미국으로 건너오던 이민자들의 대부분은 영국, 아일랜드, 이탈리아 등 유럽계 백인계통이었기 때문. 이런 경향은 서부개척시대가 한창인 19세기에도 계속되지만 이후 노예무역을 통해 아프리카에서 유입된 흑인들, 중국이나 일본 등 아시아에서 유입된 이주민들로부터 다양한 문화가 스며들고, 서부개척시대를 거치며 생겨난 특유의 개척자 정신이 미국사회에 자리잡게 된다. 다시 말해, 서부개척시대는 이후의 남북전쟁과 노예해방을 거치며 미국이 인종의 용광로로써, 그리고 개척자들의 나라로써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의 첫걸음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물론 백인들에게는 "개척시대"였을지라도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겐 이 시대 역시 뼈아픈 침략과 양민학살, 강제이주로 점철된 어두운 시기였다. <식민자 식민주의:이론 개관(Settler Colonialism: A Theoretical Overview)>이란 책에선 서부개척시대라는 역사관 자체를 식민자 식민주의를 정당화하고 원주민을 역사에서 지워버리는 교묘한 신화 만들기로 설명하고 있다.
19세기 말 존슨 카운티 전쟁이라는 미국사에서 더러운 내전이 일어난 적이 있는데, 개척지를 엄청 차지한 선이주민들이 후발 개척자들을 협박 및 강압적으로 내쫓으면서 이들과 갈등으로 용병 및 온갖 조직까지 고용하면서 연방군의 기병대까지 참전한 내전이다. 이 와중에 미국 유력 언론들이나 정치권은 당연히 강자인 부유층 선이주민들을 편들면서 폭동이라고 규정하여 연방군을 파견해 재산을 지키고자 총을 든 이들을 학살 및 체포하면서 미국사에서 수치스러운 역사(백인들끼리 벌였던 일이니)로 남아있다. 이 사건에 대하여 가장 잘 다룬 작품이 바로 저주받은 걸작 천국의 문이다.

3. 창작물에서


영화, 게임, 만화 등 미디어에서는 '''서부극'''의 배경으로도 자주 등장하는 시대이다. 게임부분에서 대표적으로는 락스타 게임즈레드 데드 시리즈, 테크랜드콜 오브 후아레즈 시리즈.
20세기에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떠오르게된 미국에서 이 시기를 각종 영화나 음악을 통해 그려냈다. 미국에서는 시어도어 루즈벨트존 F. 케네디 등이 '개척자(프론티어) 정신'을 미국을 대표하는 미덕으로 홍보했기 때문에 더욱 이 시대가 낭만적으로 그려질 수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이 만든 서부극이 크게 흥행하자 이를 벤치마킹한 이탈리아에서도 서부극을 만들기 시작한 것. 너무 많이 나오다 보니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는 장르로 불리울 지경.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스파게티 웨스턴 작품들이 실제 서부개척시대의 고증에 미국산 서부극보다 더 충실한 경우도 많다. 미국의 영향을 받은 많은 나라에서도 서부극을 즐겨 보았고, 태국이나 일본, 러시아 영화에도 서부극이 있다.[4] 한국, 중국에서도 만주 웨스턴이라는 장르를 내세우며 서부극을 변주시켰다.
보드게임 뱅!이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4. 치안 체계


서부 개척 시대는 단기간에 광활한 영토에 많은 사람이 퍼져 살기 시작했기 때문에 치안의 문제가 크게 대두되었다. 범죄자들이 많았지만 각종 창작물에서 묘사되는 것 같이 범죄자들이 휩쓸고 다니던 무법천지는 아니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식민지인들의 고향인 유럽에서는 이미 빅토리아 시대부터 현재 우리가 아는 '''경찰''' 시스템이라는 게 정립된 지 오래라 그런 듯.
사실 범죄자와 민간인의 구분도 어려웠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돈없고 빽없어서 서부로 온 미국인이며, 손에는 총 하나씩 들려있었으니까. 먼저 온 사람이 알박으면 민간인 마을이고, 나중에 온 사람한테 꺼지라고 하면 민병대고, 죽여서 털면 도적. 광활한 서부에서는 마을사람이 행인을 쏴죽여도, 행인이 마을사람을 쏴죽여도 알 방법이 없었다. 피해자와 가해자는 그때그때 달라졌다. 이런 구도는 인구가 늘고 정착지가 늘어나면서 조금씩 안정되었다.
사실 무법자도 물마시고 밥먹고 잠을 자야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인데다가 직업적 특성상(?) 당장 내일 점심때라도 제대로 된 상대와 맞딱드려서 이승 로그아웃 할 확률이 민간인보다 몇 배는 높은 팔자였기 때문에 하다못해 어디 숨어지낼 돈이라도 털 수 있는, 최소한 어느 정도 정착이 이루어지고 물류가 통하는[5] 지역으로 가게 마련이다. 그조차도 안 되는 개척 일선지역은 25센트 소설에나 나오는 무법자 그딴 거보다 '''목숨줄 붙잡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빡세고 팍팍했다.[6][7]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범죄에 대항하려는 수단으로써의 경찰력만 유지가 되었을 뿐, 범죄자를 제도적으로 처리하는 능력은 많이 역부족이었다. 일단 잡힌 범죄자들은 대부분 법원으로 가지 못하고 제대로된 법리 검토 없이 즉결심판을 받기 십상이었다.[8] 법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판사들이 범죄자를 재판하기에는 판사와 법원 수가 턱없이 모자라 마을과의 거리가 멀었고, 순회 판사가 마을을 돌며 잡아놓은 범죄자들을 재판하긴 했으나[9] 마을에서는 범죄자들을 오랫동안 가두어 놓는 것을 다양한 문제로 꺼렸다.[10] 서부 개척시대의 유명한 로이 빈(Roy Bean) 같은 인물은 텍사스 주에서 치안 판사(Justice of the Peace)로 임명되고 주변 지역에 대한 강력한 통치력을 보였으나 사실 법에 대해 공부해본 사람이 아니었다. 미국이 상당히 발달된 법체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한 현실이었다. 여담으로 이 시기에는 말을 훔치는 것은 높은 확률로 교수형 등의 강력한 형벌이 집행되었는데, 당대의 말은 자동차가 나오기 전에 거의 유일한 교통수단이라 매우 중요한 가축이었기 때문. 가령 구체적인 예시를 하나 들자면, '''역마차'''를 턴다든가...
우선 마을 주민들이 선출하거나 마을 시장이 임명해 마을에 머무르면서 법질서를 유지하는 보안관(Sheriff)이 존재했다. 영화에서는 스토리 진행을 위해 보안관이 악당에게 힘없이 쓰러지고 개척 마을 주민들이 숨거나 굽신거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실제로는 서부로 진출한 개척민들 역시 적지 않게 전쟁을 겪은 베테랑들이었고[11] 무법자들이 말을 타고 총을 휘두르며 나타나면 개척민들 역시 엽총이나 권총을 들고 나와서 완강하게 저항하면서 맞서 싸워 주민들에게 사살당한 무법자도 제법 많았다. 이렇게 주민들이 알아서 치안을 지키던 경험이(겸사겸사 짜증나는 놈을 쏴버리는 경험도) 현대로 이어져서 미국에서 개인의 총기 소지가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되는데 한몫 했다.
그리고 특정 범죄자가 너무 설치면 미국 '''연방보안관'''(United States Marshals Service)이라고 쓰고 인간백정이라고 읽는 국가 공인 살인전문가들이 들러 붙었다. 이들은 '''연방정부''' 법무부에서 임명, 파견하는 "연방보안관"인데 현대의 FBIUSMS 같은 제대로 된 경찰이 아니라, 실전경험이 풍부하고 전장의 살인에 이골이 난 군인 출신들이었다. 주로 북군 출신들로 구성됐으며, 당대 기준으로는 고성능의 권총과 소총을 소지하고 다니면서 무법자들을 사냥하듯이 쫓아다녀 소탕했다. 참고로 이 무법자들 역시 상당수는 남북전쟁 당시 연맹군(남부) 소속의 민병대나 의용군 출신이었으므로, 이들 입장에서는 그냥 '전쟁이 아직 안 끝난 것'이었다.[12] 당시 유명했던 무장강도단 두목 제시 제임스의 경우도 이 경우에 속했다. 게다가 군대도 파견되어 치안을 잡았기 때문에 범죄자들은 대놓고 설쳐대지 못했다.
다만 미국 정부의 치안력이 광활한 미국 영토 전역을 커버할 수 없는 시대적 한계 때문에 '''핑커톤'''이라 불리우는 일종의 현상금 사냥꾼들을 고용하여 범죄자들을 추적 하기도 했다. 물론 뛰어난 총잡이들로 이루어진 소수의 현상금 사냥꾼들도 존재했지만 압도적인 정보망, 각종 지원 문제로 대부분 핑커톤 사무소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이러한 현상금 사냥꾼들은 남북전쟁 이후 어수선한 정세로 인한 미국 연방정부, 주 정부의 치안부재와 막대한 인원의 참전 군인들이 핑커톤 사무소로 유입되면서 한 때는 미국 군대와 보안관보다 그 숫자가 많다고 할 정도로 최전성기를 겪게 되면서 미국의 악명 높은 범죄자들을 추적하였다. 이로 인해 범죄자들이 핑커톤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와일드 번치 같은 악명 높은 유명 갱단들을 소탕하면서 그 명성이 더 높아져서 미국 정부의 사설군대 노릇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 때문에 핑커톤은 서부개척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많은 창작물에서 무법자, 보안관과 함께 등장하는 단골소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으로 미국 전역이 개척되어 개발되는 시대의 변화로 서부개척시대가 마무리 되면서 막대한 자금과 무장을 갖춘 핑커톤은 미국 정부를 위협하는 눈엣가시가 되었다. 결국 미국 의회와 연방 정부, 주 정부 주도로 국가 공권력인 미국 경찰의 현대화가 진행되며 경찰의 규모와 권한이 크게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핑커톤의 이권이 줄어들어 쇠퇴하게 되었다. 무법자와 함께 서부개척시대의 야만을 상징했던 현상금 사냥꾼들도 문명의 발달이 고도로 이루어진 이때를 기점으로 크게 쇠퇴하였다. 현대의 미국 경찰의 시스템이 성립되었던 시기도 바로 서부개척시대가 마무리되는 시기로 1905년에 펜실베이니아 주 경찰 기관이 미국 주 경찰 최초로 미국 연방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1908년에는 FBI의 전신인 BOI(Bureau of Investigation))가 설립되면서 현재와 같은 주 경찰 - 연방 경찰의 관할권이 설정되었다.


[1] 집을 짓고 살면서 5년 이상 농사를 지은 사람에게 무상으로 160에이커의 토지를 준다는 것이 주요 내용으로 의회에서는 이미 통과되었지만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이 남부의 반발(이 법은 자영농을 육성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남부는 이와 반대로 노예들을 부려서 면화 등을 키우는 플랜테이션 농업 중심이었다.)을 의식해 서명하지 않고 버텼는데 링컨 대통령이 1862년에 서명, 발효했다.[2] 90년대 영화 파 앤드 어웨이가 대강 이런 내용이다. 물론 많이 미화되었다. 또한 로라 잉걸스 와일더의 '초원의 집' 시리즈 후반부에서도 잘 드러난다.[3] 당연히 이런 일이 일어나면 연방군이 출동하여 원주민들에게 보복을 펼쳤다. 특히 장비와 병력에서 연방군이 압도적이라서 나중에는 원주민들이 패하였다.[4] 이 경우 보통 해당 국가의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로컬라이징 하는데, 일본의 경우 19세기 홋카이도개척기, 러시아는 19세기 그레이트 게임, 혹은 적백내전 당시의 중앙아시아(대부분의 백군이 1920년대에 끝난 가운데에 중앙아시아의 백군은 1934년대까지 활동했다.)를 배경으로 삼는다.[5] 그리고 은행을 털어도 어음이 증발할 일이 없는...[6] 토미 리 존스, 힐러리 스웽크 주연의 영화 <더 홈즈맨>에 이런 개척지의 시궁창스러운 상황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야말로 "버티지 못하면 부서진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미개척지에서는 살아남는 것 자체가 미션으로, 수천 수만명이 야생에서 살아남기를 현실에서 찍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작중 배경인 네브라스카는 현재 대규모 농/축산업으로 유명한 곳이다.[7] 이런 식으로 서부개척시대 외따로 살아가던 개척자들 사이에서 번졌던 신경증을 흔히 프레리 광증(Prairie Madness) 혹은 프레리 열병(Prairie fever)라고 부른다. 서부 프레리 지역에 사실상 홀로 떨어져 살아가야 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주로 나타났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극단적 상황을 버텨나가다 생기는 우울증, 폭력성의 증가, 행동의 변화, 그리고 극단적인 경우 자살까지를 넓게 포함하기 때문에 병리학적 명칭보다는 특정 시대의 현상을 설명할 때 쓰는 명칭이다. 앞에서도 언급된 <더 홈즈맨>에서 여성진 상당수를 잡아먹은 게 바로 이 것. 주로 여성들이 걸린다는 인식이 있지만 실제론 남녀 안 가리고 다 걸렸다. 이 프레리 광증은 19세기 말 전신과 교통수단의 확대로 인해 사실상 '''프론티어가 소멸하고 나서야''' 사라진다. 이 현상들은 현대에도 격오지 근무자, 집단따돌림 피해자, 독방 재소자 등 사회적으로 고립된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8] 악명높은 범죄자 빌리 더 키드도 마지막에는 보안관에게 현장사살 당했다.[9] 미국 대통령 선거가 11월 첫 월요일 다음의 화요일로 고정된 것도 순회 판사가 한몫했다. 순회 판사가 보통 매달 첫째 날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재판을 진행했기 때문.[10] 비용문제도 있고 마을주민들이 당장 안 죽이고 뭐하냐며 집단으로 몰려와 린치를 가할 위험에 수감된 범죄자의 동료들이 구출하러 올 수도 있었다.[11] 당장 미국만 해도 남북 전쟁이 있었고, 당대 유럽은 나폴레옹 전쟁만큼 큰 규모는 아니지만 각국에서 시민 혁명과 자잘한 전쟁이 자주 일어났다. 이런데서 싸우다 쫒겨나거나 갈 곳을 잃은 사람들의 상당수가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12] 몇몇 서부극에서는 이런 구도를 대놓고 가져다가 쓴다. 연출과 극본과 연기가 받쳐주면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대결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실은 둘 다 전후 사회에 적응 못하는 전쟁의 피해자라는 점에서 처지가 같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