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좌파
Christian left
기독교 우파와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기독교적 문화와 전통을 지닌 채 진보적 성향[1] 을 띄는 정치 세력들을 뜻한다.
기독교 보수주의 성향의 기독교 우파와 달리 기독교 사회주의 성향을 띄며[2] 복지나 시장규제정책에 대해서는 기독교 우파와는 달리 아가페 사상과 역사적 예수 연구에 따른 0세기 근동에 실제 살았던 혁명적 예수의 발굴에 따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기독교 우파와 달리 매춘을 제외한[3] 성소수자, 낙태 등의 문제에 대해서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끌어들이는 기독교 우파와는 달리 개인적 성향에서 선을 긋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성소수자의 인식은 전향적인 비기독교인보다 좋지 않다고 해도[4] 차별금지법에 대해서는 용인하거나 찬성하는 입장을 보이며 낙태에 대해서도 엄한 잣대를 적용하기보단 예외적인 상황[5] 을 염두에 두기도 하는 등의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에 더 나아가 믿는 페미, 기독여민회 등의 페미니즘, 후기 자유주의 성향 단체와 해외 진보적 교단(세계 감리회, PCUSA, UCC, UMC, 그리스도의교회 제자파 등과 같이 아예 성소수자를 긍정하고 낙태에 대해 찬성하는 경우도 있다.
기독교 좌파는 이웃·약자 사랑과 베풂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좀 더 강조하는 입장이다. 기독교 좌파가 복지, 평등에 적극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도 이런 맥락.
해외의 경우, 특히 기독교가 오래 전부터 뿌리내린 유럽과 유럽인 위주의 국가에서는 기독교 좌파도 많이 볼 수 있다. 대표적 인물로는 마틴 루서 킹, 마이클 무어 등이 있다. 그 외에도 기독교민주당을 흡수한 이탈리아의 '민주당'도 있으며, 남미에는 좌파적인 성향과 기독교 위주라는 점이 결합하여 기독교 좌파가 상당히 많다. 우고 차베스도 기독교 좌파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으나 기독교 우파와 충돌하면서 베네수엘라 내 기독교는 거의 분열 상태에 도달했다고 한다.[6] 기독교와 사회주의가 결합한 사상인 해방신학도 남미에서 태동하였다.
일본이나 인도처럼 기독교 자체가 소수세력으로써 탄압받은 역사를 가진 곳에서는 현대에도 기독교 자체가 진보 성향을 나타낸다. 일례로 인도의 케랄라 주는 기독교인들이 인도 공산당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다. 유럽에서도 프랑스, 이탈리아처럼 가톨릭이 다수이고 보수 성향일 경우 반대로 개신교 전체가 진보 성향을 나타내게 된다.
한국에서 기독교 우파와의 관계는 굉장히 좋지 않으며[7] , 실제로 우파 측에선 좌파를 아예 사탄이라 치부하는 경우도 자주 보인다. 동성애를 공식 지지하는 기독교인들이 가끔 보이면 격한 논쟁이 오가기도 한다.[8]
기독교 좌파적 성향을 보이는 큰 단체로는 대표적으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있고, 소수지만 좌파색이 굉장히 뚜렷한 단체들도 있다. 교단의 공식적인 차원에서는 한국 주류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민주화 운동, 평화통일 지지 등의 입장표명이나 유순한 활동만을 하는 경우가 많다. 과거 국가적으로 반북 성향이 짙던 시절 교단 소속 일부 목사들이 무단 방북, NL세력과의 연계 등으로 인해 논란이 됐던 적이 있다.
기독교 좌파에 속한 교단으로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대한성공회[9] 를 들 수 있으며, 이들은 한국 기독교계에서 가장 기독교 좌파적 색체가 선명한 교단이다.[10][11][12] 진보적인 편에 속하는 감리회, 루터회와 신정통주의를 받아들여 중도적인 모습을 보이는 예장통합의 경우 (정치적으로든 신학적으로든) 보수적인 목회자/평신도와 진보적인 목회자/평신도가 공존하며, 스펙트럼이 넓은 만큼 매우 선명한 기독교 좌파 성향을 띄는 목회자나 신자가 있다[13] . 한국 가톨릭의 경우 마찬가지로 보수적인 성직자/평신도와 진보적인 성직자/평신도들이 공존하고 일부가 기독교 좌파 성향을 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같은 단체야 알려져있다시피 매우 진보적이지만, 한국 가톨릭의 무게 중심은 기독교 우파에 가까운 기독교 민주주의로 향해있다. 물론 대한성공회 · 한국기독교장로회 · 한국 가톨릭 내에도 보수적인 성향을 띠는 종교인이나 평신도들도 꽤 있다.
특히 여운형과 김창준을 비롯한 해방정국의 중도 좌파 및 민족주의 좌파 세력중에는 기독교인들이 꽤 많았다. 심지어 김일성도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기독교 좌파였던 적이 있다.[14] 이들은 해방정국의 혼란 속에서 상당 부분 월북하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 영 좋지 않은 최후를 맞았다. 반대로 38선 이북의 반공주의적 기독교도들은 대부분 월남하여 서북청년회를 비롯한 반공 기독교의 기반이 된다.
한국 기독교 우파에서는 '기독교와 좌파는 공존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과 한국의 개신교 우파들은 좌파가 모두 신을 인정하지 않는 세속주의자거나, 형식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더라도 그들의 사상인 후기 자유주의 혹은 신정통주의 신학이 성경을 그냥 도덕책 정도로 인식하는 얼치기 나이롱이라 보기 때문이다.
리버럴까지 포함한다면 미국 민주당 소속 기독교인 대통령들도 포함할 수 있겠다.[15] 물론 미국 민주당은 그 스펙트럼이 매우 넓은 정당으로, 민주사회주의자에 가까운 당원도 존재한다. 역대 민주당 출신 대통령 중에는 없었다고 봐도 좋을 수준이다. 역대 미국 대통령들 대다수가 2010년대 기준으로는 진보에 속하는 '주류 개신교파'(mainline protestant) 출신이긴 한데, 주류 개신교파에 속한 교인이라고 무조건 좌파 성향은 아니다.
일본의 경우 주류 교계가 정치적으로 혁신 세력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 교계가 한국과 달리 워낙 비주류인데다가 주류인 신토, 불교 중심 사회에서 상당한 차별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파로도 우파보다는 자유주의 신학 내지 좌파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홍콩의 경우 주로 대륙에 친화적이며 보수주의자가 많은 친설립파(친중파)와 대립하는 홍콩 기준에선 진보 진영인 민주파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해 교파들도 다소 우파보다는 좌파에 더 가까워 친성소수자 성향을 보인다. 다만 복음주의자들은 예외로 전통적 가족 가치를 지지하기 때문에 친중파이자 동시에 사회보수 성향을 보이는 민주건항협진연맹과 협력하기도 한다.[16]
종합해보면, 기독교 우파에 비해 '종교적 측면'에서의 비판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따라서 하기의 비판 문단은 '정치적 측면'에서의 비판이 주를 이룬다.
자유주의적 입장, 혹은 북한 체제에 비판적인 좌파 정파들의 입장에서, 대체로 NL 계열의 정파들이 비판의 대상이 된다. NL 자체에 대한 비판의 연장선상에 있다.
무단방북 및 NL 세력과의 연대는 외부에서 보기에는 기독교 우파와는 다른 의미로 개독교라고 할 만 하다는 비판도 있으며, 정치와 종교가 어떻게든 엮이는 걸 싫어하는 세속주의 성향의 사람들에게 역시 기독교 우파와 더불어서 비판을 받는다. 또한 NPOV의 입장에서는 기독교 우파의 정치적 편향성을 비판하면서 이들 역시 정치적으로 뚜렷한 편향성을 보이는것이 내로남불이라는 비판도 있다. 이들이 문제시하는 것은 기독교 우파의 '정치적 편향성'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편향성'의 방향이 지배자와 권력자들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세속주의적 자유주의의 시각에서 볼 때, 이들은 기독교 우파와 방향만 정 반대일 뿐, 특정 종교(기독교)에 입각한 이상을 제시하고, 이것을 종교적 가치관이 다른 사회 구성원들에게까지 적용하려는 시도를 한다는 점에서는 원론적으로 별반 다를 바가 없다.[17]
또한 정말 통일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정파에 대해서는[18] 북한 체제에서 종교의 자유를 극도로 제한하고[19] 인민을 노예로 삼는 등 남한의 기득권층과 지배자들보다 훨씬 더 악질이면 악질이지 낫지 않다는 점에서, 그 일부가 그들을 옹호하고 추종하는 일부 NL세력과의 연대에 대한 비판이 있다. 또한 남한의 기득권층을 비판하면서, 반면에 북한 주민들을 억압하는 북한의 기득권층에는 그다지 비판적이지 않으며, 단지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루빨리 통일을 이루기 위하여 대화해야 할 대상이라는 이유만으로 우호적이기까지 하다는 점은 모순적이라는 비판 역시 받는다.
또 환빠도 없잖아 있다(...) 강희남 목사는 2000년대 이후 세상을 떠나기까지 중국 동북 3성을 드나들며 환빠질에 한참 열을 올린 바 있다. 경기동부연합의 지역 기반인 성남시 수정구와 중원구를 기반으로 하는 주민교회를 개척하였고 은퇴할 때까지 거기에서 담임목사로 재직한 이해학 목사의 경우에도 현역 시절 행보를 보면 NL 성향이 상당히 강한데, 은퇴 후 '한민족의 역사가 9000년'이라는 환빠성 발언을 대놓고 다른 교회에 초청 설교자로 가서 설교할 때 했을 정도(...)[20] 물론 기독교 환빠는 기독교 좌파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반동적인 기독교 우파에도, 또 중도 자유주의자들 중에도 존재한다.
이런 것들은 기독교 좌파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그냥 NL 자체에 대한 비판이다(...) 1980년대 이 시기에 신학대학 학부를 다닌 목회자들이 NL과 문제의식을 공유하다보니 남한의 기독교 좌파 역시 NL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것이다. 게다가 이 시기에 형성된 진보적인 신학 노선들 역시 통일 문제를 강조하는 쪽으로 흘러가지 않을 수가 없었고... 통일을 지상과제로 여기는 운동판의 분위기와 그런 정파가 헤게모니를 잡은 운동판의 역학 구도가 운동판의 일부인 기독교 좌파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당시의 시대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받고, 그에 따라서 그 때 그 상황에서 운동판 굴러가는 분위기에 맞춰서 해석을 해석하고 정치적 활동에 참여하는 방향으로 굴러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니까... 결국 이러한 비판들은 기독교 좌파 자체를 향한 비판이 아니라, 운동판의 정파에 대한 비판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또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비판 역시, 신자유주의를 어느 정도 긍정하는 중도좌파 사회자유주의자들에게는[21] 논란의 대상이다.
좌파 전반에서 이루어지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난은 즉 좌파적인 시각에서 불만스러운 것들을 죄다 신자유주의라고 싸잡아 부르는 '''좌파판 색깔론'''이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사실 신자유주의라는 개념 전반에 대해서 의문 역시 제기되고 있다.[22] 또한 이들은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를 거의 사탄과 동일시 하고 있는 정도의 매도하는데, 과연 이러한 식의 극명한 이분법적 사고가 옳은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시선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꼭 이것이 기독교 좌파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므로 신자유주의 항목 참조.
물론 신자유주의 경제노선에 전반적으로 비판적인 시선을 취할 수는 있고, 이의 부작용이나 일면에 대해서 비판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신자유주의의 다양한 바리에이션, 그 빛과 그림자를 모두 인정하는 중도좌파 사회자유주의적 입장에서는 과연 사탄과 동일시 될정도로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게 과연 옳을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23] 반대급부로 시장질서 안에서 복지 확대를 추구하는 주류 개혁주의에 대해서는 무조건 빛만을 보려 하고 그림자를 놓치는 경향이 있는데[24] 주류 개혁주의는 '좋은 자본주의'고 신자유주의는 '나쁜 자본주의'라며 칼 같이 딱딱 잘라서 이원론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중잣대일 수 있는 것이다. 아예 자본주의 전체를 갖다가 속 시원하게 까 버리고 사회주의적 대안이든 무정부주의적 대안이든 자본주의 이외의 다른 대안을 어떠한 형태로든 추구하면 모르겠는데, 주류 개혁주의에 대해서는 모종의 판타지를 품으면서 신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절대악, 타도 대상으로만 간주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비판, 나아가서는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한 비판에 전적으로 동조하는 세속 좌파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논리와 사실에 근거하여 이성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자체를 절대악으로 규정하고서 쳐부숴야 할 적, 영적전쟁의 대상쯤으로 간주하고 종교와 감성의 언어를 앞세워 맹목적으로 매도하는 것을 방법론적인 차원에서 비판할 수도 있다.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든 자본주의 자체를 비판하든 논리와 사실에 근거하여 과학적이고 이성적으로 접근을 해야 하는데, 기독교 좌파는 무조건 신자유주의는 사탄의 세력이고 예수 이름으로 쳐부숴야 할 악한 영의 세력이라는 관념론적이고 또 전근대적 세계관에 입각한 비이성적인 선동에만 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종교 자체의 한계다 보니...
최근에는 기독교 좌파 전반적으로 메갈리아로 대표되는 뒤틀린 페미니즘에 대한 옹호가 나타나고 있다. 남성 일반을 적대시하고 타도 대상으로 간주하는 래디컬 페미니즘은 기독교적 세계관에서도 거리낄 것이 없기 때문에 기독교 좌파 일부가 뒤틀린 페미니즘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으며, 이는 이들 사상에 동조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분명히 큰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보수적 복음주의자에서 페미니스트로 넘어오며 보수 복음주의자들의 호모포비아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거부감을 버리지 못한 채 넘어오는 경우에는 교차 페미니즘을 위시한 3세대 페미니즘에 대한 거부와 TERF가 되는 경우가 있다(이들을 기독교 좌파라 해도 될 지는 모르겠지만).
2010년대 들어서 운동판에서 NL의 헤게모니가 퇴조하고 메갈 사상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면서 이쪽의 문제점이 기독교 좌파에도 슬슬 영향을 뻗치는 중이다. 실제로 전술한 강성 NL 성향의 기독교 좌파는 2010년대 들어서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연성 NL은 여전히 많지만 강성 NL은 해당 인사들의 은퇴, 서거[25] 으로 인해 대부분 퇴색하였다. 오히려 지금 기독교 좌파 안에서는 여성신학에 입각하여 뒤틀린 페미니즘 사상을 신봉하고 남성혐오와 여성 우월주의를 부추기는 노선이 더 큰 문제이다.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은 기독교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불교든 이슬람교든 이런저런 민족종교, 신흥종교든 '''정상적인 종교로서 인정받기 위한 필수요소'''인데 '네 이웃'을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로 증오하고 조롱해도 된다고 여긴다면 이것은 근본적으로 '종북 좌파 빨갱이 척결'을 끊임없이 되뇌이며 망언을 쏟아내는 빤스 목사나 트루스포럼 부류의 기독교 우파 극단주의자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또 하나의 개독이라 여겨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믿는 페미'라는 단체가 주관하여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 1주기 당시에 이 사건을 '여성 혐오 범죄'로 규정하는 입장에 서서 해당 사건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예배를 드린 바 있다. 단순히 끔찍한 범죄에 희생된 피해자를 추모하고 다시는 이런 범죄가 없기를 바라는 내용으로 예배를 드렸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문제는 이 사건을 갖다가 '여성 혐오 범죄'로 간주하고서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매도하는 사고방식에 입각하여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다. 이것 말고도 한신대 신학과 학부생들 중에 이쪽 사상을 갖다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케이스가 상당히 널리 퍼져나가고 있는데, 이들이 신학대학원에 진학하고 안수를 받아 목회자가 된다면 앞서 언급한 일부 강성 NL 목회자들 이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농후하다.
재세례파의 분파인 메노나이트 역시 단체로 '페미니즘 책 읽기 모임'을 열고 또 뒤틀린 페미니즘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남성을 적대시하는 급진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26] 침례회 소속이며, 한국 기독교 좌파 운동을 최선두에서 이끌고 있는 어느 목회자 역시 정희진 같은 여성학자들[27] 의 입장에 동조하면서 '남자들이 반성해야 한다'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물론 본인도 남성이지만). 기독교 좌파 계열의 단체에서 여성 문제를 근거로 행사를 개최하는 것도 보면, 이런 뒤틀린 페미니즘에 대한 무분별한 수용과 옹호가 적게나마 나타나고 있다.
또한 기독교 좌파 성향 교단의 양대산맥인 한국기독교장로회와 대한성공회의 직영 신학대학인 한신대학교와 성공회대학교의 학생 사회에 강경 페미니즘 신좌파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28] 기독교 우파 성향 교단의 목회자들은 대체로 일반 대학 학부를 졸업하고 신대원만 자기 교단의 신대원에서 다니지만[29] , 기독교 좌파 성향 교단은 학부부터 자기 교단의 신학과를 다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자기네 학교 학생사회의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소속인 서울대성당의 모 신부의 경우, 2017년에 열린 전국청년연합 수련회에서 있었던 질의응답 시간에, "모든 기독교인은 페미니스트가 돼야 합니다."라고 발언했다. 다름을 존중하는 성공회에서 모두가 같은 사상을 가져야 된다는 발언을 한 것이다.
1980년대 한신대는 NL 성향 운동권이 꽉 잡고 있었고, 이에 따라 이 시기에 한신대 학부를 나온 목회자들은 대부분이 온건한 NL 성향을 띤다.[30] 그러나 현재는 많이 바뀌었고 래디컬 페미니즘 성향이 강한 오산캠퍼스에서 학부 4년을 보내면서 그런 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은 신학생들이 신대원에 진학하여 목사가 된다면, 래디컬 페미니즘 성향의 목회를 할 수도 있다.[31]
오히려 기독교 좌파가 일반적인 (현대 좌파진영에서 추구하는) 페미니즘에 반하는 측면이 있다.[32] 단적으로 기독교 좌파의 경우도 급진적인 신학계통이 아닌 한 일반적인 좌파와 달리 낙태에 부정적인 시각이 주류다. 국내로 예시를 들자면 대표적인 서구식 페미니스트 정치인인 정의당 장혜영, 류호정 의원이 박원순 조문을 가지않겠다고 선언하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서는 "정의당이 오합지졸이 되었다", "인간에 대한 예의조차 의심스러운 의원들"이라고 칭하며 맹비난을 퍼붓기도 하였다.# 이 사건에 있어 일부 세속 좌파들이나 페미니스트들은 상식적으로 성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면 왜 자살을 했겠냐고 오히려 자살한 박원순을 비판하는 여론이 적지 않았고 이로 인해 친민주당 지지자들과 충돌하기도 했었다.
즉 오히려 기독교 좌파가 통상 좌파보다 사회보수주의적이라는 점인데 사실 이는 꼭 페미니즘 이슈가 아니더라도 강경한 세속주의나 전투적 무신론을 지지하는 좌파의 경우 아예 기독교 좌파를 '사이비 좌파'나 '좌파코스프레하는 반동세력'으로 보기도 한다.
모든 좌파가 페미니즘에 적극적이지 않듯이 기독교 좌파가 다 페미니즘을 지지하거나 그것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것은 아니다. 오히려 종교 자체가 기본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보수적 특성상, 평균적인 신자들이 비신자까지 포함한 사회 대중 평균보다 사회보수주의적이기 때문에 기독교 좌파 '일부'의 페미니즘의 견해가 더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 뿐이다. 기독교 좌파가 한국 좌파, 더 나아가 글로벌한 기준에서 일반적인 좌파들보다 친페미니즘적이라는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은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를 갖다가 융합을 하거나 조화시키기 위한 시도가 아니라, 기독교 좌파라는 하나의 사회 현상과, 기독교 우파와 기독교 좌파의 대립 구도를 갖다가 비종교적인 관점에서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하기 위하여 작성되었음을 먼저 밝힌다.
기독교 좌파와 타 보수 교단이 이렇게 완전히 다른 종교처럼 행동하고, 또 서로를 그렇게 여기고 있는 이유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화해할 수 없는 상이한 두 계급의 이해관계를 각자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우익은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관계를 종교의 이름을 내세워서 대변하고, 기독교 좌익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중심으로 중소 상공인+영세 자영업자+농민+...을 비롯한 다양한 피지배 계급의 이해관계를 종교의 이름을 내세워서 대변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독교 우익은 지배자들의 관점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성경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정당화하고 현재의 사회 구조와 체제를 갖다 옹호하는 내용들을 끄집어내서 그걸 종교의 형태로 교리화하고 설파하는 것이고, 기독교 좌익은 피지배자들의 관점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성경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고 현재의 사회 구조와 체제가 왜 정의롭지 못한지를 갖다 지적하는 내용들을 끄집어내서 그걸 또 교리로 만들고 설파하고 행동에 나서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 세계관에서 종교는 그냥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스탈린주의 체제에서 종교를 탄압하기 위해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곡해한 바 있지만, 원뜻은 사람들이 괴롭고 힘들어서 아편을 갖다가 맞으며 그 고통을 잊으려고 하듯이 종교를 통해 그 고통을 잊으려 한다는 뜻이다. 지배자들은 지배자들대로 현 체제를 갖다가 유지하고 자기네들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서 종교라는 아편에 의존하는 것이고, 피지배자들은 피지배자들대로 현 체제 속에서 당하는 고통을 잊기 위해서, 혹은 현재의 억압과 폭력에 맞서기 위해서 종교라는 아편에 의존하는 것이다. 전자의 사례가 기독교 우익이고, 후자의 사례가 기독교 좌익이다.
사회가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양분되어 있으니 각각의 계급을 갖다가 대변하는 종교 현상도 극과 극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르주아 계급을 대변하는 기독교 우익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대변하는 기독교 좌익은 완전히 다른 종교가 될 수밖에 없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양상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두 입장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융화나 조화가 불가능하다. 화해할 수 없는 대립 구도 속에 있는 서로 다른 두 계급을 대변하는 종교이기에 기독교 우익의 입장에선 기독교 좌익이 개새끼들이고 기독교 좌익의 입장에선 기독교 우익이 개새끼들이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팝콘 튀기며 관전(...)을 하면 둘 중 어느 쪽이 옳고 다른 쪽이 틀리다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냥 둘 다 각자가 대변하는 계급의 이해관계에 충실할 뿐이다.
그나마 기독교 좌익이 완전히 사회주의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관념론적 세계관과 초월적 인격신에 대한 신앙에 기반을 하고 있기에 사회주의 사상을 100%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고, 또한 기장은 프롤레타리아 계급만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중소 상공인+영세 자영업자+농민+중간관리직+... 다양한 중간계급의 이해관계도 함께 대변하고 있기에 이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 좌익의 '정치적 편향성'을 NPOV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입장도 있는데 기독교 좌익은 그것이 교리이다. 기장 교단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문익환 목사의 신학적 입장이기도 하다. 이러한 신학적 입장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이 섬겨야 할 신은 정치적으로 극도로 편향되어 있는 신이다. 기독교 좌익의 신학적 노선에 따르면 고난받고 억압당하는 민중들의 신인 야훼 신을 섬긴다면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에 서야 하며, '그리스도인'을 표방하면서 정치적으로 우파 내지는 극우파적 입장을 취하거나 중립을 지킨다면 그것은 지배자들의 신, 억압자들의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일 뿐이다. 이러한 정치적 편향성 자체가 기독교 좌익의 교리이다. 우리의 신은 고난 받고 억압당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신이며 우리의 정치적 편향성이 곧 신의 뜻에 따르는 것이란 게 하나의 교리이다. 물론, 이러한 교리는 위에서 언급했듯 기독교 좌익이 피억압 대중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기 때문에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진보적 사상의 대표가 마르크스주의이지만, 본질이 종교인 만큼 마르크스주의와는 사이가 나쁘다. 진보적인 목회자라 하더라도 끽해야 개혁주의적인 선에서 그치고, 정말 아주아주 많이 진보적인 경우에도 근본적 사회변혁이 아니라, '생명평화의 대안 공동체 운동' 정도의 무정부주의적 해결책을 제시하는 선에서 그친다. 남북 통일 문제에 대해서는 NL적인 입장을 다양한 형태로 취하는 목회자들도 일부 있지만 이건 북한 체제를 동경해서가 아니라 한민족이 힘을 합쳐 자주 평화통일을 이루는 것을 중요시하기 때문이고, PD 계열의 사회변혁 운동과는 사이가 좋지 않다. 추구하는 바에 있어서도 엇박자, 세계관과 정세 인식에 있어서도 엇박자... 따라서 기독교 좌파와 마르크스주의와의 관계는 썩 좋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가 완전히 공존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
마르크스, 엥겔스 이 두 사람이 과학적 사회주의의 시초이다. 공존이 가능하다 주장하는 종교학 연구자들도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헤겔 좌파의 선구자인 포이에르바하의 영향을 받고, 그를 탐구한 인물이다. 루터교회와 닿은 세계윤리론자이자 변증학의 대가인 헤겔의 철학 방법론만을 수용하고, 기독교적 색채를 지워버린게 헤겔 좌파다.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의 기원은 더욱더 기독교에 적대적이다. 이를 잘 다룬 책이 《1417년, 근대의 탄생(르네상스와 한 책 사냥꾼 이야기)》이다. 책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15세기 인문주의자들이 에피쿠로스 학파의 로마 시인 루크레티우스를 재발견하는 내용이 큰 줄기로 이어진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고대부터 기독교인들의 적이었고, 고대 그리스에서조차 스토아학파에서 '''"무신론자"'''라 불리던 학파다. 이들은 철저히 신의 존재를 사람이 믿고 싶은 대로 믿을 수 있는, 그러나 실존 증거는 없는 존재로 대우한다. 중략하고 핵심은 이렇다. 서방교회 대분열시기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탈한 라테란궁의 비서가 어느 수도원에 필사된 루크레티우스의 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발견하면서 종교에 환멸을 느끼던 인문주의자들에게 폭발적인 호응을 얻는다. 금서목록도 이를 막지 못했고, 이 시는 찰스 다윈의 조부, 에러스무스 다윈에게 읽혔고 진화론의 초석이 놓였다. 또한 드라이든, 볼테르, 디드로, 흄 등에게 파괴적인 불신론을 낳게 했으며, 이러한 주류 사상에 녹아든다. 해당 시에서는 원자론, 생물의 자연발생적 묘사와 영혼을 물질로 보는 시각, 사후세계 부정 등의 내용이 있다. 책에서는 마르크스까지 이어지지 않지만 마르크스의 유물론의 뿌리에 계몽주의 이후 주류철학이 있음은 설명할 필요가 있나.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정말 진보적인 기독교인이나 목회자라 하더라도 마르크스주의를 100% 받아들이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대체로 사회민주주의 선에서 멈춘다. 정말 기독교 좌파의 극을 달린다고 할 수 있는 경우에도 결론은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은, '생명평화의 대안 공동체 건설' 정도에서 그친다.
마르크스주의자와 진보적 기독교인이 같은 사안에 대하여 함께 정치적 행동을 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깊이 파고들면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는 세계관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충돌이 발생하고,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자가 100% 기독교를 믿거나 거꾸로 기독교인이 신앙 정체성을 유지한 상태에서 100%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는 어렵다. 사상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면서, 진보적인 교회에 형식적으로 출석하여 종교 의식에 참석하고, 교회 깃발을 들고서 집회에 참석할 수는 있겠지만... 거꾸로 신앙적으로는 100% 기독교인이면서 마르크스주의적 운동 단체에 가입하여 행동할 수는 있다. 마르크스주의적 세계관은 받아들이지 않지만,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의 정의를 실천하는 차원에서...[33]
그러한 이유 때문에 진보적 기독교인들도 마르크스주의 그 자체에 대해서는 결코 전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은 아니다. 공동의 의제를 놓고 함께 운동을 벌일 수는 있지만,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사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스탈린주의가 터트린 여러 삽질들 때문에 스탈린주의 자체에 대한 입장도 영 아니고... 북한에 우호적인 케이스는 있지만 '''같은 민족'''이라는 민족주의적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진보적 기독교에서 출발해서 완전히 마르크스주의자로 넘어간 케이스는 있다. 노동자연대 조직의 창립자이자 실질적인 지도자인 최일붕이 그 대표적인 케이스. 여기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정통신학은 교파를 막론하고 스스로 존재하는 창조주이자 만왕의 왕인 하느님에게 순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하며, 하느님이 모든 것을 다스린다고 본다. 고로 지상의 세속 통치자들과 관료들 역시 하느님에게 권력을 위탁받은 자들이므로 백성들은 세속 권력과 질서에도 절대 복종해야 하며, 로마서 13장 초반부에 근거하여 왕이나 대통령[34] 등 지도자에게 반항하는 것은 곧 하느님에게 직접적으로 반항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해석한다.
반면 민중신학은 재세례파가 주장한 절대적 정교분리와 함께 20세기 이후 포스트모던 신학에서 신 자체를 카나안 만신전의 우두머리인 엘과 헤브루 노예들의 수호신의 퓨전으로 보는 관점에 근거해 있다. 그리고 민중의 신이니 민중과 함께 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요 사회 구원이라고 본다.
갈등은 당연해보인다. 위의 민중신학 설명을 참조해도, 민중신학은 사후세계보다는 현실세계에 맞춰지며, 예수는 그저 신격화된 위대한 스승이다. 비기독교인의 시각에서 봐도 기독교보다는 기독교 모티프의 사상으로 보인다. 즉 신의 기원까지도 현실적으로 설명되는 셈. 또한 성서도 독자적 이해가 뚜렷하다. 그러나 이 관점은 유감스럽게도 현대의 시각에서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으로, 이 해석을 지지해주는 오리엔트/중동사 권위자는 없다. 고대인들에게 현대 민주주의자의 의식구조를 넣은 해석이다.
물론 이렇게 따지면 보수주의자들이나 근본주의자들은 고대인의 가치관을 현대 사회에 강요한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극단적으로 말해 일개 진보적 신학자가 현대적 의식을 고대에 쓰여진 텍스트에 투영한 것에 기반하여 기껏해야 개인, 소집단 단위로 활동하는 것과 거대 교단 조직들이 정치권과 야합하여 전근대적 가치관을 사회 전반에 강요하는 것 중 비종교인 입장에선 어느쪽의 해악이 더 큰지 생각해 볼 일이다. 그렇게 야합해서 고대적 가치관을 현대 사회에 지속적으로 재강요하는게 정통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양 신앙의 본질이라면, 그럼 세속화 문서에도 나와 있는, 주로 자유주의와 진보적 종교인들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 종교의 '''문화센터화'''는 지당하고도 필연적인 현상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통 신학과의 갈등이 연대의 촉매가 될까? 마르크스주의 역시 비슷하게 역사를 구조화한다는 비판을 받으나, 인류사의 발전 법칙과는 너무도 다른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효율을 위해 프롤레타리아 독재 단계를 필수로 상정한다는 점에서도 쉽지 않다. 그리고 종교 자체는 결국 하부구조에 따라오는 것이다. 굳이 기독교적 색채가 필수적이지 않다.
그러한 입장에서 마르크스주의자라면 굳이 공존하기보다 '''목적을 위한 연대 이후 재설정할 수 있는 상부구조'''의 요소로 보는 것이 그들 나름의 정통파의 관점이다. 목적을 위해 연대한다는 것은 당연하게도 공동의 정치적 과제를 위하여 함께 행동한다는 뜻이다. 상부구조를 재설정한다는 것은 혁명으로 정권 잡고 나서 토사구팽(...)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종교는 존재하겠지만 그 때는 노동자 계급이 사회의 지배계급이므로 새로운 형태의 종교가 등장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동구권 붕괴 이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종교에 대한 입장은 기존 스탈린주의에 대한 입장과는 반대로 그 자체는 인정한다는 입장이 우세한 추세이며, 종교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사회주의를 거쳐 공산주의가 실현되어 더 이상 종교라는 아편에 의지해야 할 이유가 없어진 시점이 되어서야 가능하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 가운데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를 갖다가 종교 자체가 해로운 것이므로 다 없애야 한다고 해석하는 경우에는 당연하게도 적대적인 입장이지만, 문제는 이런 적대적인 입장은 기독교 좌파의 존재가 등장하기 전이거나 아니면 기독교 좌파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 속에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마르크스 본인은 기독교의 여러 관념들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는 공통분모를 뽑아 냄으로서 기독교의 인본주의적 가치를 존중하였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인본주의를 사탄과 동일시하기도 하지만, 마르크스의 입장에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강조한다면 결과적으로 그것은 인정하든 부정하든 인본주의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본인의 딸 엘레노어 마르크스가 교회에 대해 두려운 감정을 갖자 마르크스는 '부자들이 목수의 아들[35] 을 죽였지만, 목수의 아들이 어린이들을 사랑하였으므로 기독교는 인정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기독교 좌파 세력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입장 역시 종교를 긍정하는 쪽으로 나타나게 된다. 엄연히 자신들과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서 자기네들 빨간 깃발 띄우고 참석하는 집회에 같이 나와 갖고는 같은 목소리를 내는 세력이 있는데 무조건 반대만 할 수는 없으니(...)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1주기 집회 때는 흰 성의에 보라색 스톨라를 두른 목사들[36] 이 대열 속에 십자가 들고 서서는 청계천 다리 뚫으려고 경찰과 정면 대치를 했고 청계천 뚫고서 종로에 진입했을 때는 같이 물대포를 맞았던 판이다. 그런 상황에서 무조건 종교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고수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좌파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 본인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기독교 좌파의 입장에 깔린 관념론적 세계관이나 종교적 관념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거기에 입각하여 특정한 정치적, 사회적 주장을 하고 행동을 벌이는 것은 지지하고, 또 필요하다면 적극 연대한다.''''
이런 성향이 가장 강한 조직이 기독교 좌파 출신인 최일붕[37] 이 조직하였고 현재도 운영위원으로서 실질적인 지도자[38] 위치에 있는 노동자연대이다. 이 조직에서 발행하는 <노동자 연대> 신문을 보면 기독교 좌파들의 활동을 보도하거나 기독교 좌파의 정치, 사회적 주장을 지지하는 내용의 기사들이 수시로 나온다(...) 다만 이 조직은 대중 추수주의적 입장이 상당히 강해서, 어떤 형태의 대중운동이든지 자기네들이 추수할 거리가 있다 싶으면[39] 일단은 긍정적인 논조로 기사 쓰고, 집회장에 가서 가판 벌이고, 자기네들 빨간 깃발 띄우고 본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는 있다.[40]
공상적 사회주의는 종교개혁으로 등장한 개신교의 여러 분파들 가운데 가장 좌측에 있는 재세례파의 사상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 모티프 자체도 기독교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 한 몸을 이루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되었다. 어쩌면 공상적 사회주의는 '''기독교 좌파와의 교집합이 가장 큰 정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상적 사회주의의 3대 인물이 생시몽, 로버트 오언, 샤를 푸리에 세 사람인데 이 셋의 사상은 모두 기독교에 근거하고 있다. 생시몽은 <새로운 기독교>라는 책을 저술하여 공상적 사회주의를 기독교 사상에 입각하여 추구하고자 하였으며 로버트 오언은 대놓고 감리회 신자였다. 지금 당장 야간에 창 밖으로 보이는 빨간 십자가들 가운데도 몇 개 있을 그 감리회 맞다. 사실, 이들의 사상이 '공상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간단하다. 종교적 가르침이나 모티프에 입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한두 단계 역사적으로 더 거슬러 근세까지 올라가면 강성 장로회 신자들이 주도한 청교도 혁명 당시 수평파(레벨러스-levellers)와 개간파(디거스-diggers), 스페인의 코무네로스 운동 같이 아예 마르크스주의보다 두 세기 정도 앞서 급진 기독교 사상 내에서 사회주의가 탄생했다고 볼 수 있을 만큼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와 기독교계의 접점은 불가분의 관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 시절에는 어떤 정치, 사회적 운동도 종교의 영향력을 벋어나기 힘들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근대적 의미에서 사회주의자로 분류하진 않지만...
그런 관계로 기독교 좌파는 공상적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찰떡궁합. 아니 공상적 사회주의의 상당부분은 기독교 좌파가 차지하고 또 기독교 좌파의 대다수가 공상적 사회주의를 추구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심지어는 변증법적 유물론에 근거한 사회주의라면 그것이 레닌주의이든 개량주의이든 가리지 않고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인 가톨릭에서조차도, 공상적 사회주의만큼은 진보적인 신부는 물론이고 주교들까지도 적극 수용하고 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박동호 안드레아 신정동 성당 주임신부)이 대놓고 사회교리 칼럼을 통해 협동조합 운동을 소개하면서 공상적 사회주의를 지지할 정도면 말 다 한 셈이다.[41] 어쩌면 가톨릭이 사회 기득권 세력으로서 자리를 잡고 우파 내지는 극우에 가까운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 나라가 아닌 이상, 조금이라도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신부들은 상당수가 공상적 사회주의를 지지하거나 추구한다고 봐도 된다. 상술한 우파, 내지 극우에 가까운 스탠스를 취하는 나라들은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과 맞물린 역사가 있는 스페인과 중남미권인데, 당장 여기서도 사실 좌우 대립이 극단적으로 심해졌을 때 당장 급진 좌파들의 물리적인 공격 때문에 우파 독재 정권에 의탁했던 것이지, 교회 전체가 극우적이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해방신학의 원산지가 중남미이고, 스페인 내전 이전이나 이후에도 주류 의견에 반대하여 좌파적 사회정의를 강조하는 사제들도 예수회를 중심으로 적지 않다.
개신교의 경우에는 교리적 유연성 때문에 다양한 운동정파의 영향을 받고 있는데 여기도 공상적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우호적 입장인 목회자가 많다. 한국기독교장로회 교회와 사회 위원회 위원장(김경호 들꽃향린교회 담임목사)의 '자유인들의 정치경제'라는 칼럼을 보면 자본주의와 스탈린주의를 동시에 비판하면서[42] 공상적 사회주의와 유사한 주장을 하고 있다. '일하는 사람들이 그 기업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빼도박도 못할 협동조합주의다. 그리고 거기에 온건한 NL 성향을 덧붙여서 이러한 협동조합 경제가 통일한국의 경제 체제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한다.
기독교 좌파는 신좌파와 사상적으로 잘 맞는다.
서구에서는 기독교 좌파가 여성신학, 퀴어신학, 생태신학 등등 다양한 후기 자유주의 신학 노선을 갖다가 신좌파적 신학 노선으로 발전시켰고 기독교 좌파들의 문제의식이나 활동 방향도 전부 다 신좌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성신학이니 퀴어신학이니 생태신학이니 하는 것들 자체가 전부 다 신좌파,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의식과 거기에서 비롯된 부문별 운동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고 있다.
한국의 경우에도 1세대 기독교 좌파는 구좌파 중에서도 NL적인 색채가 강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런 1세대 기독교 좌파의 영향을 받은 2세대 기독교 좌파는 마르크스주의하고는 영 케미가 안 맞는 반면 신좌파하고는 잘 맞는다. 이러한 2세대 기독교 좌파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교회가 서울 마포구 모 동에 하나 있는데, 여기는 목사부터 시작해서 교인들 거의 대부분이 녹색당, 기본소득당을 지지하는 신좌파다(...) 아니, 목사의 설교 내용이나, 교회의 사회참여 활동 방향 자체도 신좌파적인 쪽으로 굴러가고 있다. 소위 말하는 부문별 운동이라는 것인데, 여기서 하는 활동들 대부분이 신좌파적이다.
기독교 좌파와 마르크스주의가 서로 케미가 안 맞는 이유는 마르크스주의가 모더니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모더니즘에 대한 안티테제로 나온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고, 앞서 언급한 다양한 신학 사조들은 대부분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또 받고 있다. 근본주의자들이 하도 포스트모더니즘을 극딜하기 때문에 종교와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충돌한다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 반대다.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을 종교가 적극 수용하여 하나의 신학 사상으로 정립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 보니까 포스트모더니즘 때문에 신좌파와 기독교 좌파가 못 어울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때문에 더 잘 어울릴 수 있는 것이다.
신좌파가 추구하는 부문별 운동이나 대안적 공동체 운동, 지역에 기반을 둔 생활 공동체 운동 같은 것 역시 기독교 좌파와 잘 맞는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기독교 좌파는 근본적으로 사회를 사회주의적으로 변혁하려는 움직임은 약하고, 세속으로부터 분리되어 반자본주의적 라이프스타일을 실천하는 대안적 생활 공동체를 추구하는 무정부주의적 성향이 더 강하다. 거기에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 '생명평화의 대안 공동체', '이웃과 함께 생명평화 일구는 공동체'[43] 등등의 이름을 가져다 붙였다 그래서 기독교 좌파는 신좌파하고 코드가 안 맞을 수가 없다(...)
그런 이유로 현재 남한이든 서구 각국이든 기독교 좌파의 대부분은 신좌파적인 주장과 활동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진보적인 기독교 신학 역시 주장하는 내용들을 보면 전부 다 신좌파적이다. 물론 기독교 사회주의 성향도 띄기 때문에 노동 문제에 무관심하지는 않다.
이렇게 신좌파와 기독교 좌파의 코드가 의외로 서로 잘 맞는 것은 '''관념론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기 때문'''이다. 또한 계급적 기반에서도 신좌파와 기독교 좌파는 모두 중간계급과 중간계급적 의식을 가진 미조직 노동계급을 기반으로 한다. 어찌 보면 신좌파적 대안 공동체 운동, 라이프스타일 운동에 종교적인 외피를 한 벌 더 입혀 놓으면 기독교 좌파가 된다. 이게 의외로 몸에 잘 맞는 옷인 셈이다. 다만 문제는 그러한 차원에서 강경한 여성주의에 대한 옹호도 나타나고 있으며, 메갈리아와 워마드 등의 남성혐오에도 한 다리 걸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이러한 점은 오히려 기독교 좌파가 젠더 문제에서는 더 막장으로 빠져드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 정확하게는 그 가운데 반스탈린주의적 정파들이나 상호교차성 페미니스트들은 양성 분리주의를 배격하고 성 긍정을 추구함으로써 메갈, 워마드 부류의 극단주의적 페미니즘과 명백히 선을 긋고 이를 비판하는 반면 기독교 좌파 페미니스트들은 언더도그마에 빠져서 양성 분리주의로 경도되고 금욕주의와 도덕주의에 빠져서 성보수주의적 레퍼토리를 늘어놓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이들이 사랑제일교회나 트루스포럼 같은 기독교 우파 극단주의자들과 무엇이 다른지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신좌파 친화적인 입장의 해석이며, 철학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과 기독교가 양립하긴 쉽지 않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이 관념론이지만, 기독교적 관념론과는 상극인 면이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 절대성, 초월성 등의 개념에 적대적이고, 다원성, 상대성, 내재성 같은 개념을 긍정한다. 전자의 개념들이 기독교와 관련되므로 포스트모더니즘이 관념론이면서도 기독교와 양립하기 어렵게 된다.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은 기독교보다는 불교나 힌두교 철학과 유사성을 찾아보기 더 쉬운 면마저 있다. 실제로 포스트모더니즘의 비조 중 하나로 여겨지는 니체가 인도 사상과 긴밀한 관계가 있음은 공공연히 알려져 있으며,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 중 하나인 들뢰즈같은 경우 모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가 불교사상에 대응하는 서구철학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44]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두 관념론으로 환원할 수도 없는데, 이는 많은 포스트모던 이론들이 '몸'이나 '육체성'같은 개념을 긍정할 뿐 아니라 핵심 코드로 삼기 때문이다. 지젝같은 마르크스주의자도 들뢰즈를 들어 생기론자라고 분석했으며, 이처럼 포스트모더니즘 계통으로 여겨지는 신좌파 사상이나 이론 상당수가 막상 생기론적 유물론에 기반하고 있다는 해석은 생각보다 빈번히 이루어진다. 이렇게 볼 경우 마르크스주의가 기독교와 양립하기 어려운 이유와 마찬가지 이유에서 신좌파 역시 기독교와 양립하기 어려워진다.
국내에는 딱히 유의미한 기독교 좌파 정당은 존재하지 않지만 해외에서는 기독교 좌파를 표방하는 정당들이 존재한다. 다만 좌파 자체가 세속주의적인 경우가 많아 기독교 우파에 비해 그 수는 확실히 적은 편.
1. 개념과 간략한 사례
기독교 우파와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기독교적 문화와 전통을 지닌 채 진보적 성향[1] 을 띄는 정치 세력들을 뜻한다.
기독교 보수주의 성향의 기독교 우파와 달리 기독교 사회주의 성향을 띄며[2] 복지나 시장규제정책에 대해서는 기독교 우파와는 달리 아가페 사상과 역사적 예수 연구에 따른 0세기 근동에 실제 살았던 혁명적 예수의 발굴에 따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기독교 우파와 달리 매춘을 제외한[3] 성소수자, 낙태 등의 문제에 대해서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끌어들이는 기독교 우파와는 달리 개인적 성향에서 선을 긋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성소수자의 인식은 전향적인 비기독교인보다 좋지 않다고 해도[4] 차별금지법에 대해서는 용인하거나 찬성하는 입장을 보이며 낙태에 대해서도 엄한 잣대를 적용하기보단 예외적인 상황[5] 을 염두에 두기도 하는 등의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에 더 나아가 믿는 페미, 기독여민회 등의 페미니즘, 후기 자유주의 성향 단체와 해외 진보적 교단(세계 감리회, PCUSA, UCC, UMC, 그리스도의교회 제자파 등과 같이 아예 성소수자를 긍정하고 낙태에 대해 찬성하는 경우도 있다.
기독교 좌파는 이웃·약자 사랑과 베풂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좀 더 강조하는 입장이다. 기독교 좌파가 복지, 평등에 적극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도 이런 맥락.
2. 각국의 사례
해외의 경우, 특히 기독교가 오래 전부터 뿌리내린 유럽과 유럽인 위주의 국가에서는 기독교 좌파도 많이 볼 수 있다. 대표적 인물로는 마틴 루서 킹, 마이클 무어 등이 있다. 그 외에도 기독교민주당을 흡수한 이탈리아의 '민주당'도 있으며, 남미에는 좌파적인 성향과 기독교 위주라는 점이 결합하여 기독교 좌파가 상당히 많다. 우고 차베스도 기독교 좌파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으나 기독교 우파와 충돌하면서 베네수엘라 내 기독교는 거의 분열 상태에 도달했다고 한다.[6] 기독교와 사회주의가 결합한 사상인 해방신학도 남미에서 태동하였다.
일본이나 인도처럼 기독교 자체가 소수세력으로써 탄압받은 역사를 가진 곳에서는 현대에도 기독교 자체가 진보 성향을 나타낸다. 일례로 인도의 케랄라 주는 기독교인들이 인도 공산당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다. 유럽에서도 프랑스, 이탈리아처럼 가톨릭이 다수이고 보수 성향일 경우 반대로 개신교 전체가 진보 성향을 나타내게 된다.
2.1. 대한민국의 경우
한국에서 기독교 우파와의 관계는 굉장히 좋지 않으며[7] , 실제로 우파 측에선 좌파를 아예 사탄이라 치부하는 경우도 자주 보인다. 동성애를 공식 지지하는 기독교인들이 가끔 보이면 격한 논쟁이 오가기도 한다.[8]
기독교 좌파적 성향을 보이는 큰 단체로는 대표적으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있고, 소수지만 좌파색이 굉장히 뚜렷한 단체들도 있다. 교단의 공식적인 차원에서는 한국 주류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민주화 운동, 평화통일 지지 등의 입장표명이나 유순한 활동만을 하는 경우가 많다. 과거 국가적으로 반북 성향이 짙던 시절 교단 소속 일부 목사들이 무단 방북, NL세력과의 연계 등으로 인해 논란이 됐던 적이 있다.
기독교 좌파에 속한 교단으로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대한성공회[9] 를 들 수 있으며, 이들은 한국 기독교계에서 가장 기독교 좌파적 색체가 선명한 교단이다.[10][11][12] 진보적인 편에 속하는 감리회, 루터회와 신정통주의를 받아들여 중도적인 모습을 보이는 예장통합의 경우 (정치적으로든 신학적으로든) 보수적인 목회자/평신도와 진보적인 목회자/평신도가 공존하며, 스펙트럼이 넓은 만큼 매우 선명한 기독교 좌파 성향을 띄는 목회자나 신자가 있다[13] . 한국 가톨릭의 경우 마찬가지로 보수적인 성직자/평신도와 진보적인 성직자/평신도들이 공존하고 일부가 기독교 좌파 성향을 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같은 단체야 알려져있다시피 매우 진보적이지만, 한국 가톨릭의 무게 중심은 기독교 우파에 가까운 기독교 민주주의로 향해있다. 물론 대한성공회 · 한국기독교장로회 · 한국 가톨릭 내에도 보수적인 성향을 띠는 종교인이나 평신도들도 꽤 있다.
특히 여운형과 김창준을 비롯한 해방정국의 중도 좌파 및 민족주의 좌파 세력중에는 기독교인들이 꽤 많았다. 심지어 김일성도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기독교 좌파였던 적이 있다.[14] 이들은 해방정국의 혼란 속에서 상당 부분 월북하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 영 좋지 않은 최후를 맞았다. 반대로 38선 이북의 반공주의적 기독교도들은 대부분 월남하여 서북청년회를 비롯한 반공 기독교의 기반이 된다.
한국 기독교 우파에서는 '기독교와 좌파는 공존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과 한국의 개신교 우파들은 좌파가 모두 신을 인정하지 않는 세속주의자거나, 형식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더라도 그들의 사상인 후기 자유주의 혹은 신정통주의 신학이 성경을 그냥 도덕책 정도로 인식하는 얼치기 나이롱이라 보기 때문이다.
2.2. 미국의 경우
리버럴까지 포함한다면 미국 민주당 소속 기독교인 대통령들도 포함할 수 있겠다.[15] 물론 미국 민주당은 그 스펙트럼이 매우 넓은 정당으로, 민주사회주의자에 가까운 당원도 존재한다. 역대 민주당 출신 대통령 중에는 없었다고 봐도 좋을 수준이다. 역대 미국 대통령들 대다수가 2010년대 기준으로는 진보에 속하는 '주류 개신교파'(mainline protestant) 출신이긴 한데, 주류 개신교파에 속한 교인이라고 무조건 좌파 성향은 아니다.
2.3. 일본의 경우
일본의 경우 주류 교계가 정치적으로 혁신 세력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 교계가 한국과 달리 워낙 비주류인데다가 주류인 신토, 불교 중심 사회에서 상당한 차별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파로도 우파보다는 자유주의 신학 내지 좌파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2.4. 중화권의 경우
홍콩의 경우 주로 대륙에 친화적이며 보수주의자가 많은 친설립파(친중파)와 대립하는 홍콩 기준에선 진보 진영인 민주파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해 교파들도 다소 우파보다는 좌파에 더 가까워 친성소수자 성향을 보인다. 다만 복음주의자들은 예외로 전통적 가족 가치를 지지하기 때문에 친중파이자 동시에 사회보수 성향을 보이는 민주건항협진연맹과 협력하기도 한다.[16]
3. 비판
종합해보면, 기독교 우파에 비해 '종교적 측면'에서의 비판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따라서 하기의 비판 문단은 '정치적 측면'에서의 비판이 주를 이룬다.
3.1. NL 성향 정파들에 대한 비판
자유주의적 입장, 혹은 북한 체제에 비판적인 좌파 정파들의 입장에서, 대체로 NL 계열의 정파들이 비판의 대상이 된다. NL 자체에 대한 비판의 연장선상에 있다.
무단방북 및 NL 세력과의 연대는 외부에서 보기에는 기독교 우파와는 다른 의미로 개독교라고 할 만 하다는 비판도 있으며, 정치와 종교가 어떻게든 엮이는 걸 싫어하는 세속주의 성향의 사람들에게 역시 기독교 우파와 더불어서 비판을 받는다. 또한 NPOV의 입장에서는 기독교 우파의 정치적 편향성을 비판하면서 이들 역시 정치적으로 뚜렷한 편향성을 보이는것이 내로남불이라는 비판도 있다. 이들이 문제시하는 것은 기독교 우파의 '정치적 편향성'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편향성'의 방향이 지배자와 권력자들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세속주의적 자유주의의 시각에서 볼 때, 이들은 기독교 우파와 방향만 정 반대일 뿐, 특정 종교(기독교)에 입각한 이상을 제시하고, 이것을 종교적 가치관이 다른 사회 구성원들에게까지 적용하려는 시도를 한다는 점에서는 원론적으로 별반 다를 바가 없다.[17]
또한 정말 통일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정파에 대해서는[18] 북한 체제에서 종교의 자유를 극도로 제한하고[19] 인민을 노예로 삼는 등 남한의 기득권층과 지배자들보다 훨씬 더 악질이면 악질이지 낫지 않다는 점에서, 그 일부가 그들을 옹호하고 추종하는 일부 NL세력과의 연대에 대한 비판이 있다. 또한 남한의 기득권층을 비판하면서, 반면에 북한 주민들을 억압하는 북한의 기득권층에는 그다지 비판적이지 않으며, 단지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루빨리 통일을 이루기 위하여 대화해야 할 대상이라는 이유만으로 우호적이기까지 하다는 점은 모순적이라는 비판 역시 받는다.
또 환빠도 없잖아 있다(...) 강희남 목사는 2000년대 이후 세상을 떠나기까지 중국 동북 3성을 드나들며 환빠질에 한참 열을 올린 바 있다. 경기동부연합의 지역 기반인 성남시 수정구와 중원구를 기반으로 하는 주민교회를 개척하였고 은퇴할 때까지 거기에서 담임목사로 재직한 이해학 목사의 경우에도 현역 시절 행보를 보면 NL 성향이 상당히 강한데, 은퇴 후 '한민족의 역사가 9000년'이라는 환빠성 발언을 대놓고 다른 교회에 초청 설교자로 가서 설교할 때 했을 정도(...)[20] 물론 기독교 환빠는 기독교 좌파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반동적인 기독교 우파에도, 또 중도 자유주의자들 중에도 존재한다.
이런 것들은 기독교 좌파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그냥 NL 자체에 대한 비판이다(...) 1980년대 이 시기에 신학대학 학부를 다닌 목회자들이 NL과 문제의식을 공유하다보니 남한의 기독교 좌파 역시 NL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것이다. 게다가 이 시기에 형성된 진보적인 신학 노선들 역시 통일 문제를 강조하는 쪽으로 흘러가지 않을 수가 없었고... 통일을 지상과제로 여기는 운동판의 분위기와 그런 정파가 헤게모니를 잡은 운동판의 역학 구도가 운동판의 일부인 기독교 좌파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당시의 시대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받고, 그에 따라서 그 때 그 상황에서 운동판 굴러가는 분위기에 맞춰서 해석을 해석하고 정치적 활동에 참여하는 방향으로 굴러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니까... 결국 이러한 비판들은 기독교 좌파 자체를 향한 비판이 아니라, 운동판의 정파에 대한 비판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3.2. 신자유주의에 대한 부정확한 인식과 무조건적 악마화에 대한 비판
또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비판 역시, 신자유주의를 어느 정도 긍정하는 중도좌파 사회자유주의자들에게는[21] 논란의 대상이다.
좌파 전반에서 이루어지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난은 즉 좌파적인 시각에서 불만스러운 것들을 죄다 신자유주의라고 싸잡아 부르는 '''좌파판 색깔론'''이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사실 신자유주의라는 개념 전반에 대해서 의문 역시 제기되고 있다.[22] 또한 이들은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를 거의 사탄과 동일시 하고 있는 정도의 매도하는데, 과연 이러한 식의 극명한 이분법적 사고가 옳은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시선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꼭 이것이 기독교 좌파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므로 신자유주의 항목 참조.
물론 신자유주의 경제노선에 전반적으로 비판적인 시선을 취할 수는 있고, 이의 부작용이나 일면에 대해서 비판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신자유주의의 다양한 바리에이션, 그 빛과 그림자를 모두 인정하는 중도좌파 사회자유주의적 입장에서는 과연 사탄과 동일시 될정도로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게 과연 옳을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23] 반대급부로 시장질서 안에서 복지 확대를 추구하는 주류 개혁주의에 대해서는 무조건 빛만을 보려 하고 그림자를 놓치는 경향이 있는데[24] 주류 개혁주의는 '좋은 자본주의'고 신자유주의는 '나쁜 자본주의'라며 칼 같이 딱딱 잘라서 이원론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중잣대일 수 있는 것이다. 아예 자본주의 전체를 갖다가 속 시원하게 까 버리고 사회주의적 대안이든 무정부주의적 대안이든 자본주의 이외의 다른 대안을 어떠한 형태로든 추구하면 모르겠는데, 주류 개혁주의에 대해서는 모종의 판타지를 품으면서 신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절대악, 타도 대상으로만 간주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비판, 나아가서는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한 비판에 전적으로 동조하는 세속 좌파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논리와 사실에 근거하여 이성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자체를 절대악으로 규정하고서 쳐부숴야 할 적, 영적전쟁의 대상쯤으로 간주하고 종교와 감성의 언어를 앞세워 맹목적으로 매도하는 것을 방법론적인 차원에서 비판할 수도 있다.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든 자본주의 자체를 비판하든 논리와 사실에 근거하여 과학적이고 이성적으로 접근을 해야 하는데, 기독교 좌파는 무조건 신자유주의는 사탄의 세력이고 예수 이름으로 쳐부숴야 할 악한 영의 세력이라는 관념론적이고 또 전근대적 세계관에 입각한 비이성적인 선동에만 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종교 자체의 한계다 보니...
3.3. 뒤틀린 페미니즘 옹호에 대한 비판
최근에는 기독교 좌파 전반적으로 메갈리아로 대표되는 뒤틀린 페미니즘에 대한 옹호가 나타나고 있다. 남성 일반을 적대시하고 타도 대상으로 간주하는 래디컬 페미니즘은 기독교적 세계관에서도 거리낄 것이 없기 때문에 기독교 좌파 일부가 뒤틀린 페미니즘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으며, 이는 이들 사상에 동조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분명히 큰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보수적 복음주의자에서 페미니스트로 넘어오며 보수 복음주의자들의 호모포비아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거부감을 버리지 못한 채 넘어오는 경우에는 교차 페미니즘을 위시한 3세대 페미니즘에 대한 거부와 TERF가 되는 경우가 있다(이들을 기독교 좌파라 해도 될 지는 모르겠지만).
2010년대 들어서 운동판에서 NL의 헤게모니가 퇴조하고 메갈 사상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면서 이쪽의 문제점이 기독교 좌파에도 슬슬 영향을 뻗치는 중이다. 실제로 전술한 강성 NL 성향의 기독교 좌파는 2010년대 들어서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연성 NL은 여전히 많지만 강성 NL은 해당 인사들의 은퇴, 서거[25] 으로 인해 대부분 퇴색하였다. 오히려 지금 기독교 좌파 안에서는 여성신학에 입각하여 뒤틀린 페미니즘 사상을 신봉하고 남성혐오와 여성 우월주의를 부추기는 노선이 더 큰 문제이다.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은 기독교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불교든 이슬람교든 이런저런 민족종교, 신흥종교든 '''정상적인 종교로서 인정받기 위한 필수요소'''인데 '네 이웃'을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로 증오하고 조롱해도 된다고 여긴다면 이것은 근본적으로 '종북 좌파 빨갱이 척결'을 끊임없이 되뇌이며 망언을 쏟아내는 빤스 목사나 트루스포럼 부류의 기독교 우파 극단주의자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또 하나의 개독이라 여겨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믿는 페미'라는 단체가 주관하여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 1주기 당시에 이 사건을 '여성 혐오 범죄'로 규정하는 입장에 서서 해당 사건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예배를 드린 바 있다. 단순히 끔찍한 범죄에 희생된 피해자를 추모하고 다시는 이런 범죄가 없기를 바라는 내용으로 예배를 드렸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문제는 이 사건을 갖다가 '여성 혐오 범죄'로 간주하고서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매도하는 사고방식에 입각하여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다. 이것 말고도 한신대 신학과 학부생들 중에 이쪽 사상을 갖다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케이스가 상당히 널리 퍼져나가고 있는데, 이들이 신학대학원에 진학하고 안수를 받아 목회자가 된다면 앞서 언급한 일부 강성 NL 목회자들 이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농후하다.
재세례파의 분파인 메노나이트 역시 단체로 '페미니즘 책 읽기 모임'을 열고 또 뒤틀린 페미니즘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남성을 적대시하는 급진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26] 침례회 소속이며, 한국 기독교 좌파 운동을 최선두에서 이끌고 있는 어느 목회자 역시 정희진 같은 여성학자들[27] 의 입장에 동조하면서 '남자들이 반성해야 한다'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물론 본인도 남성이지만). 기독교 좌파 계열의 단체에서 여성 문제를 근거로 행사를 개최하는 것도 보면, 이런 뒤틀린 페미니즘에 대한 무분별한 수용과 옹호가 적게나마 나타나고 있다.
또한 기독교 좌파 성향 교단의 양대산맥인 한국기독교장로회와 대한성공회의 직영 신학대학인 한신대학교와 성공회대학교의 학생 사회에 강경 페미니즘 신좌파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28] 기독교 우파 성향 교단의 목회자들은 대체로 일반 대학 학부를 졸업하고 신대원만 자기 교단의 신대원에서 다니지만[29] , 기독교 좌파 성향 교단은 학부부터 자기 교단의 신학과를 다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자기네 학교 학생사회의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소속인 서울대성당의 모 신부의 경우, 2017년에 열린 전국청년연합 수련회에서 있었던 질의응답 시간에, "모든 기독교인은 페미니스트가 돼야 합니다."라고 발언했다. 다름을 존중하는 성공회에서 모두가 같은 사상을 가져야 된다는 발언을 한 것이다.
1980년대 한신대는 NL 성향 운동권이 꽉 잡고 있었고, 이에 따라 이 시기에 한신대 학부를 나온 목회자들은 대부분이 온건한 NL 성향을 띤다.[30] 그러나 현재는 많이 바뀌었고 래디컬 페미니즘 성향이 강한 오산캠퍼스에서 학부 4년을 보내면서 그런 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은 신학생들이 신대원에 진학하여 목사가 된다면, 래디컬 페미니즘 성향의 목회를 할 수도 있다.[31]
3.3.1. 반론
오히려 기독교 좌파가 일반적인 (현대 좌파진영에서 추구하는) 페미니즘에 반하는 측면이 있다.[32] 단적으로 기독교 좌파의 경우도 급진적인 신학계통이 아닌 한 일반적인 좌파와 달리 낙태에 부정적인 시각이 주류다. 국내로 예시를 들자면 대표적인 서구식 페미니스트 정치인인 정의당 장혜영, 류호정 의원이 박원순 조문을 가지않겠다고 선언하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서는 "정의당이 오합지졸이 되었다", "인간에 대한 예의조차 의심스러운 의원들"이라고 칭하며 맹비난을 퍼붓기도 하였다.# 이 사건에 있어 일부 세속 좌파들이나 페미니스트들은 상식적으로 성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면 왜 자살을 했겠냐고 오히려 자살한 박원순을 비판하는 여론이 적지 않았고 이로 인해 친민주당 지지자들과 충돌하기도 했었다.
즉 오히려 기독교 좌파가 통상 좌파보다 사회보수주의적이라는 점인데 사실 이는 꼭 페미니즘 이슈가 아니더라도 강경한 세속주의나 전투적 무신론을 지지하는 좌파의 경우 아예 기독교 좌파를 '사이비 좌파'나 '좌파코스프레하는 반동세력'으로 보기도 한다.
모든 좌파가 페미니즘에 적극적이지 않듯이 기독교 좌파가 다 페미니즘을 지지하거나 그것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것은 아니다. 오히려 종교 자체가 기본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보수적 특성상, 평균적인 신자들이 비신자까지 포함한 사회 대중 평균보다 사회보수주의적이기 때문에 기독교 좌파 '일부'의 페미니즘의 견해가 더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 뿐이다. 기독교 좌파가 한국 좌파, 더 나아가 글로벌한 기준에서 일반적인 좌파들보다 친페미니즘적이라는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4. 기독교 좌파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
이상의 내용은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를 갖다가 융합을 하거나 조화시키기 위한 시도가 아니라, 기독교 좌파라는 하나의 사회 현상과, 기독교 우파와 기독교 좌파의 대립 구도를 갖다가 비종교적인 관점에서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하기 위하여 작성되었음을 먼저 밝힌다.
기독교 좌파와 타 보수 교단이 이렇게 완전히 다른 종교처럼 행동하고, 또 서로를 그렇게 여기고 있는 이유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화해할 수 없는 상이한 두 계급의 이해관계를 각자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우익은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관계를 종교의 이름을 내세워서 대변하고, 기독교 좌익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중심으로 중소 상공인+영세 자영업자+농민+...을 비롯한 다양한 피지배 계급의 이해관계를 종교의 이름을 내세워서 대변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독교 우익은 지배자들의 관점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성경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정당화하고 현재의 사회 구조와 체제를 갖다 옹호하는 내용들을 끄집어내서 그걸 종교의 형태로 교리화하고 설파하는 것이고, 기독교 좌익은 피지배자들의 관점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성경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고 현재의 사회 구조와 체제가 왜 정의롭지 못한지를 갖다 지적하는 내용들을 끄집어내서 그걸 또 교리로 만들고 설파하고 행동에 나서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 세계관에서 종교는 그냥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스탈린주의 체제에서 종교를 탄압하기 위해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곡해한 바 있지만, 원뜻은 사람들이 괴롭고 힘들어서 아편을 갖다가 맞으며 그 고통을 잊으려고 하듯이 종교를 통해 그 고통을 잊으려 한다는 뜻이다. 지배자들은 지배자들대로 현 체제를 갖다가 유지하고 자기네들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서 종교라는 아편에 의존하는 것이고, 피지배자들은 피지배자들대로 현 체제 속에서 당하는 고통을 잊기 위해서, 혹은 현재의 억압과 폭력에 맞서기 위해서 종교라는 아편에 의존하는 것이다. 전자의 사례가 기독교 우익이고, 후자의 사례가 기독교 좌익이다.
사회가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양분되어 있으니 각각의 계급을 갖다가 대변하는 종교 현상도 극과 극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르주아 계급을 대변하는 기독교 우익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대변하는 기독교 좌익은 완전히 다른 종교가 될 수밖에 없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양상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두 입장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융화나 조화가 불가능하다. 화해할 수 없는 대립 구도 속에 있는 서로 다른 두 계급을 대변하는 종교이기에 기독교 우익의 입장에선 기독교 좌익이 개새끼들이고 기독교 좌익의 입장에선 기독교 우익이 개새끼들이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팝콘 튀기며 관전(...)을 하면 둘 중 어느 쪽이 옳고 다른 쪽이 틀리다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냥 둘 다 각자가 대변하는 계급의 이해관계에 충실할 뿐이다.
그나마 기독교 좌익이 완전히 사회주의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관념론적 세계관과 초월적 인격신에 대한 신앙에 기반을 하고 있기에 사회주의 사상을 100%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고, 또한 기장은 프롤레타리아 계급만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중소 상공인+영세 자영업자+농민+중간관리직+... 다양한 중간계급의 이해관계도 함께 대변하고 있기에 이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 좌익의 '정치적 편향성'을 NPOV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입장도 있는데 기독교 좌익은 그것이 교리이다. 기장 교단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문익환 목사의 신학적 입장이기도 하다. 이러한 신학적 입장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이 섬겨야 할 신은 정치적으로 극도로 편향되어 있는 신이다. 기독교 좌익의 신학적 노선에 따르면 고난받고 억압당하는 민중들의 신인 야훼 신을 섬긴다면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에 서야 하며, '그리스도인'을 표방하면서 정치적으로 우파 내지는 극우파적 입장을 취하거나 중립을 지킨다면 그것은 지배자들의 신, 억압자들의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일 뿐이다. 이러한 정치적 편향성 자체가 기독교 좌익의 교리이다. 우리의 신은 고난 받고 억압당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신이며 우리의 정치적 편향성이 곧 신의 뜻에 따르는 것이란 게 하나의 교리이다. 물론, 이러한 교리는 위에서 언급했듯 기독교 좌익이 피억압 대중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기 때문에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5. 마르크스주의와의 관계
진보적 사상의 대표가 마르크스주의이지만, 본질이 종교인 만큼 마르크스주의와는 사이가 나쁘다. 진보적인 목회자라 하더라도 끽해야 개혁주의적인 선에서 그치고, 정말 아주아주 많이 진보적인 경우에도 근본적 사회변혁이 아니라, '생명평화의 대안 공동체 운동' 정도의 무정부주의적 해결책을 제시하는 선에서 그친다. 남북 통일 문제에 대해서는 NL적인 입장을 다양한 형태로 취하는 목회자들도 일부 있지만 이건 북한 체제를 동경해서가 아니라 한민족이 힘을 합쳐 자주 평화통일을 이루는 것을 중요시하기 때문이고, PD 계열의 사회변혁 운동과는 사이가 좋지 않다. 추구하는 바에 있어서도 엇박자, 세계관과 정세 인식에 있어서도 엇박자... 따라서 기독교 좌파와 마르크스주의와의 관계는 썩 좋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5.1.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의 완전한 공존 가능성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가 완전히 공존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
마르크스, 엥겔스 이 두 사람이 과학적 사회주의의 시초이다. 공존이 가능하다 주장하는 종교학 연구자들도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헤겔 좌파의 선구자인 포이에르바하의 영향을 받고, 그를 탐구한 인물이다. 루터교회와 닿은 세계윤리론자이자 변증학의 대가인 헤겔의 철학 방법론만을 수용하고, 기독교적 색채를 지워버린게 헤겔 좌파다.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의 기원은 더욱더 기독교에 적대적이다. 이를 잘 다룬 책이 《1417년, 근대의 탄생(르네상스와 한 책 사냥꾼 이야기)》이다. 책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15세기 인문주의자들이 에피쿠로스 학파의 로마 시인 루크레티우스를 재발견하는 내용이 큰 줄기로 이어진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고대부터 기독교인들의 적이었고, 고대 그리스에서조차 스토아학파에서 '''"무신론자"'''라 불리던 학파다. 이들은 철저히 신의 존재를 사람이 믿고 싶은 대로 믿을 수 있는, 그러나 실존 증거는 없는 존재로 대우한다. 중략하고 핵심은 이렇다. 서방교회 대분열시기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탈한 라테란궁의 비서가 어느 수도원에 필사된 루크레티우스의 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발견하면서 종교에 환멸을 느끼던 인문주의자들에게 폭발적인 호응을 얻는다. 금서목록도 이를 막지 못했고, 이 시는 찰스 다윈의 조부, 에러스무스 다윈에게 읽혔고 진화론의 초석이 놓였다. 또한 드라이든, 볼테르, 디드로, 흄 등에게 파괴적인 불신론을 낳게 했으며, 이러한 주류 사상에 녹아든다. 해당 시에서는 원자론, 생물의 자연발생적 묘사와 영혼을 물질로 보는 시각, 사후세계 부정 등의 내용이 있다. 책에서는 마르크스까지 이어지지 않지만 마르크스의 유물론의 뿌리에 계몽주의 이후 주류철학이 있음은 설명할 필요가 있나.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정말 진보적인 기독교인이나 목회자라 하더라도 마르크스주의를 100% 받아들이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대체로 사회민주주의 선에서 멈춘다. 정말 기독교 좌파의 극을 달린다고 할 수 있는 경우에도 결론은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은, '생명평화의 대안 공동체 건설' 정도에서 그친다.
마르크스주의자와 진보적 기독교인이 같은 사안에 대하여 함께 정치적 행동을 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깊이 파고들면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는 세계관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충돌이 발생하고,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자가 100% 기독교를 믿거나 거꾸로 기독교인이 신앙 정체성을 유지한 상태에서 100%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는 어렵다. 사상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면서, 진보적인 교회에 형식적으로 출석하여 종교 의식에 참석하고, 교회 깃발을 들고서 집회에 참석할 수는 있겠지만... 거꾸로 신앙적으로는 100% 기독교인이면서 마르크스주의적 운동 단체에 가입하여 행동할 수는 있다. 마르크스주의적 세계관은 받아들이지 않지만,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의 정의를 실천하는 차원에서...[33]
그러한 이유 때문에 진보적 기독교인들도 마르크스주의 그 자체에 대해서는 결코 전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은 아니다. 공동의 의제를 놓고 함께 운동을 벌일 수는 있지만,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사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스탈린주의가 터트린 여러 삽질들 때문에 스탈린주의 자체에 대한 입장도 영 아니고... 북한에 우호적인 케이스는 있지만 '''같은 민족'''이라는 민족주의적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진보적 기독교에서 출발해서 완전히 마르크스주의자로 넘어간 케이스는 있다. 노동자연대 조직의 창립자이자 실질적인 지도자인 최일붕이 그 대표적인 케이스. 여기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5.2. 민중신학의 독특함이 마르크스주의와 공존할 수 있을까?
정통신학은 교파를 막론하고 스스로 존재하는 창조주이자 만왕의 왕인 하느님에게 순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하며, 하느님이 모든 것을 다스린다고 본다. 고로 지상의 세속 통치자들과 관료들 역시 하느님에게 권력을 위탁받은 자들이므로 백성들은 세속 권력과 질서에도 절대 복종해야 하며, 로마서 13장 초반부에 근거하여 왕이나 대통령[34] 등 지도자에게 반항하는 것은 곧 하느님에게 직접적으로 반항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해석한다.
반면 민중신학은 재세례파가 주장한 절대적 정교분리와 함께 20세기 이후 포스트모던 신학에서 신 자체를 카나안 만신전의 우두머리인 엘과 헤브루 노예들의 수호신의 퓨전으로 보는 관점에 근거해 있다. 그리고 민중의 신이니 민중과 함께 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요 사회 구원이라고 본다.
갈등은 당연해보인다. 위의 민중신학 설명을 참조해도, 민중신학은 사후세계보다는 현실세계에 맞춰지며, 예수는 그저 신격화된 위대한 스승이다. 비기독교인의 시각에서 봐도 기독교보다는 기독교 모티프의 사상으로 보인다. 즉 신의 기원까지도 현실적으로 설명되는 셈. 또한 성서도 독자적 이해가 뚜렷하다. 그러나 이 관점은 유감스럽게도 현대의 시각에서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으로, 이 해석을 지지해주는 오리엔트/중동사 권위자는 없다. 고대인들에게 현대 민주주의자의 의식구조를 넣은 해석이다.
물론 이렇게 따지면 보수주의자들이나 근본주의자들은 고대인의 가치관을 현대 사회에 강요한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극단적으로 말해 일개 진보적 신학자가 현대적 의식을 고대에 쓰여진 텍스트에 투영한 것에 기반하여 기껏해야 개인, 소집단 단위로 활동하는 것과 거대 교단 조직들이 정치권과 야합하여 전근대적 가치관을 사회 전반에 강요하는 것 중 비종교인 입장에선 어느쪽의 해악이 더 큰지 생각해 볼 일이다. 그렇게 야합해서 고대적 가치관을 현대 사회에 지속적으로 재강요하는게 정통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양 신앙의 본질이라면, 그럼 세속화 문서에도 나와 있는, 주로 자유주의와 진보적 종교인들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 종교의 '''문화센터화'''는 지당하고도 필연적인 현상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통 신학과의 갈등이 연대의 촉매가 될까? 마르크스주의 역시 비슷하게 역사를 구조화한다는 비판을 받으나, 인류사의 발전 법칙과는 너무도 다른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효율을 위해 프롤레타리아 독재 단계를 필수로 상정한다는 점에서도 쉽지 않다. 그리고 종교 자체는 결국 하부구조에 따라오는 것이다. 굳이 기독교적 색채가 필수적이지 않다.
그러한 입장에서 마르크스주의자라면 굳이 공존하기보다 '''목적을 위한 연대 이후 재설정할 수 있는 상부구조'''의 요소로 보는 것이 그들 나름의 정통파의 관점이다. 목적을 위해 연대한다는 것은 당연하게도 공동의 정치적 과제를 위하여 함께 행동한다는 뜻이다. 상부구조를 재설정한다는 것은 혁명으로 정권 잡고 나서 토사구팽(...)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종교는 존재하겠지만 그 때는 노동자 계급이 사회의 지배계급이므로 새로운 형태의 종교가 등장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동구권 붕괴 이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종교에 대한 입장은 기존 스탈린주의에 대한 입장과는 반대로 그 자체는 인정한다는 입장이 우세한 추세이며, 종교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사회주의를 거쳐 공산주의가 실현되어 더 이상 종교라는 아편에 의지해야 할 이유가 없어진 시점이 되어서야 가능하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다.
5.3. 마르크스주의자들 본인의 입장은?
마르크스주의자들 가운데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를 갖다가 종교 자체가 해로운 것이므로 다 없애야 한다고 해석하는 경우에는 당연하게도 적대적인 입장이지만, 문제는 이런 적대적인 입장은 기독교 좌파의 존재가 등장하기 전이거나 아니면 기독교 좌파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 속에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마르크스 본인은 기독교의 여러 관념들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는 공통분모를 뽑아 냄으로서 기독교의 인본주의적 가치를 존중하였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인본주의를 사탄과 동일시하기도 하지만, 마르크스의 입장에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강조한다면 결과적으로 그것은 인정하든 부정하든 인본주의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본인의 딸 엘레노어 마르크스가 교회에 대해 두려운 감정을 갖자 마르크스는 '부자들이 목수의 아들[35] 을 죽였지만, 목수의 아들이 어린이들을 사랑하였으므로 기독교는 인정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기독교 좌파 세력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입장 역시 종교를 긍정하는 쪽으로 나타나게 된다. 엄연히 자신들과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서 자기네들 빨간 깃발 띄우고 참석하는 집회에 같이 나와 갖고는 같은 목소리를 내는 세력이 있는데 무조건 반대만 할 수는 없으니(...)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1주기 집회 때는 흰 성의에 보라색 스톨라를 두른 목사들[36] 이 대열 속에 십자가 들고 서서는 청계천 다리 뚫으려고 경찰과 정면 대치를 했고 청계천 뚫고서 종로에 진입했을 때는 같이 물대포를 맞았던 판이다. 그런 상황에서 무조건 종교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고수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좌파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 본인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기독교 좌파의 입장에 깔린 관념론적 세계관이나 종교적 관념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거기에 입각하여 특정한 정치적, 사회적 주장을 하고 행동을 벌이는 것은 지지하고, 또 필요하다면 적극 연대한다.''''
이런 성향이 가장 강한 조직이 기독교 좌파 출신인 최일붕[37] 이 조직하였고 현재도 운영위원으로서 실질적인 지도자[38] 위치에 있는 노동자연대이다. 이 조직에서 발행하는 <노동자 연대> 신문을 보면 기독교 좌파들의 활동을 보도하거나 기독교 좌파의 정치, 사회적 주장을 지지하는 내용의 기사들이 수시로 나온다(...) 다만 이 조직은 대중 추수주의적 입장이 상당히 강해서, 어떤 형태의 대중운동이든지 자기네들이 추수할 거리가 있다 싶으면[39] 일단은 긍정적인 논조로 기사 쓰고, 집회장에 가서 가판 벌이고, 자기네들 빨간 깃발 띄우고 본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는 있다.[40]
6. 공상적 사회주의와의 관계
공상적 사회주의는 종교개혁으로 등장한 개신교의 여러 분파들 가운데 가장 좌측에 있는 재세례파의 사상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 모티프 자체도 기독교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 한 몸을 이루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되었다. 어쩌면 공상적 사회주의는 '''기독교 좌파와의 교집합이 가장 큰 정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상적 사회주의의 3대 인물이 생시몽, 로버트 오언, 샤를 푸리에 세 사람인데 이 셋의 사상은 모두 기독교에 근거하고 있다. 생시몽은 <새로운 기독교>라는 책을 저술하여 공상적 사회주의를 기독교 사상에 입각하여 추구하고자 하였으며 로버트 오언은 대놓고 감리회 신자였다. 지금 당장 야간에 창 밖으로 보이는 빨간 십자가들 가운데도 몇 개 있을 그 감리회 맞다. 사실, 이들의 사상이 '공상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간단하다. 종교적 가르침이나 모티프에 입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한두 단계 역사적으로 더 거슬러 근세까지 올라가면 강성 장로회 신자들이 주도한 청교도 혁명 당시 수평파(레벨러스-levellers)와 개간파(디거스-diggers), 스페인의 코무네로스 운동 같이 아예 마르크스주의보다 두 세기 정도 앞서 급진 기독교 사상 내에서 사회주의가 탄생했다고 볼 수 있을 만큼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와 기독교계의 접점은 불가분의 관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 시절에는 어떤 정치, 사회적 운동도 종교의 영향력을 벋어나기 힘들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근대적 의미에서 사회주의자로 분류하진 않지만...
그런 관계로 기독교 좌파는 공상적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찰떡궁합. 아니 공상적 사회주의의 상당부분은 기독교 좌파가 차지하고 또 기독교 좌파의 대다수가 공상적 사회주의를 추구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심지어는 변증법적 유물론에 근거한 사회주의라면 그것이 레닌주의이든 개량주의이든 가리지 않고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인 가톨릭에서조차도, 공상적 사회주의만큼은 진보적인 신부는 물론이고 주교들까지도 적극 수용하고 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박동호 안드레아 신정동 성당 주임신부)이 대놓고 사회교리 칼럼을 통해 협동조합 운동을 소개하면서 공상적 사회주의를 지지할 정도면 말 다 한 셈이다.[41] 어쩌면 가톨릭이 사회 기득권 세력으로서 자리를 잡고 우파 내지는 극우에 가까운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 나라가 아닌 이상, 조금이라도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신부들은 상당수가 공상적 사회주의를 지지하거나 추구한다고 봐도 된다. 상술한 우파, 내지 극우에 가까운 스탠스를 취하는 나라들은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과 맞물린 역사가 있는 스페인과 중남미권인데, 당장 여기서도 사실 좌우 대립이 극단적으로 심해졌을 때 당장 급진 좌파들의 물리적인 공격 때문에 우파 독재 정권에 의탁했던 것이지, 교회 전체가 극우적이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해방신학의 원산지가 중남미이고, 스페인 내전 이전이나 이후에도 주류 의견에 반대하여 좌파적 사회정의를 강조하는 사제들도 예수회를 중심으로 적지 않다.
개신교의 경우에는 교리적 유연성 때문에 다양한 운동정파의 영향을 받고 있는데 여기도 공상적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우호적 입장인 목회자가 많다. 한국기독교장로회 교회와 사회 위원회 위원장(김경호 들꽃향린교회 담임목사)의 '자유인들의 정치경제'라는 칼럼을 보면 자본주의와 스탈린주의를 동시에 비판하면서[42] 공상적 사회주의와 유사한 주장을 하고 있다. '일하는 사람들이 그 기업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빼도박도 못할 협동조합주의다. 그리고 거기에 온건한 NL 성향을 덧붙여서 이러한 협동조합 경제가 통일한국의 경제 체제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한다.
7. 신좌파와의 관계
기독교 좌파는 신좌파와 사상적으로 잘 맞는다.
서구에서는 기독교 좌파가 여성신학, 퀴어신학, 생태신학 등등 다양한 후기 자유주의 신학 노선을 갖다가 신좌파적 신학 노선으로 발전시켰고 기독교 좌파들의 문제의식이나 활동 방향도 전부 다 신좌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성신학이니 퀴어신학이니 생태신학이니 하는 것들 자체가 전부 다 신좌파,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의식과 거기에서 비롯된 부문별 운동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고 있다.
한국의 경우에도 1세대 기독교 좌파는 구좌파 중에서도 NL적인 색채가 강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런 1세대 기독교 좌파의 영향을 받은 2세대 기독교 좌파는 마르크스주의하고는 영 케미가 안 맞는 반면 신좌파하고는 잘 맞는다. 이러한 2세대 기독교 좌파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교회가 서울 마포구 모 동에 하나 있는데, 여기는 목사부터 시작해서 교인들 거의 대부분이 녹색당, 기본소득당을 지지하는 신좌파다(...) 아니, 목사의 설교 내용이나, 교회의 사회참여 활동 방향 자체도 신좌파적인 쪽으로 굴러가고 있다. 소위 말하는 부문별 운동이라는 것인데, 여기서 하는 활동들 대부분이 신좌파적이다.
기독교 좌파와 마르크스주의가 서로 케미가 안 맞는 이유는 마르크스주의가 모더니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모더니즘에 대한 안티테제로 나온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고, 앞서 언급한 다양한 신학 사조들은 대부분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또 받고 있다. 근본주의자들이 하도 포스트모더니즘을 극딜하기 때문에 종교와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충돌한다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 반대다.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을 종교가 적극 수용하여 하나의 신학 사상으로 정립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 보니까 포스트모더니즘 때문에 신좌파와 기독교 좌파가 못 어울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때문에 더 잘 어울릴 수 있는 것이다.
신좌파가 추구하는 부문별 운동이나 대안적 공동체 운동, 지역에 기반을 둔 생활 공동체 운동 같은 것 역시 기독교 좌파와 잘 맞는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기독교 좌파는 근본적으로 사회를 사회주의적으로 변혁하려는 움직임은 약하고, 세속으로부터 분리되어 반자본주의적 라이프스타일을 실천하는 대안적 생활 공동체를 추구하는 무정부주의적 성향이 더 강하다. 거기에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 '생명평화의 대안 공동체', '이웃과 함께 생명평화 일구는 공동체'[43] 등등의 이름을 가져다 붙였다 그래서 기독교 좌파는 신좌파하고 코드가 안 맞을 수가 없다(...)
그런 이유로 현재 남한이든 서구 각국이든 기독교 좌파의 대부분은 신좌파적인 주장과 활동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진보적인 기독교 신학 역시 주장하는 내용들을 보면 전부 다 신좌파적이다. 물론 기독교 사회주의 성향도 띄기 때문에 노동 문제에 무관심하지는 않다.
이렇게 신좌파와 기독교 좌파의 코드가 의외로 서로 잘 맞는 것은 '''관념론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기 때문'''이다. 또한 계급적 기반에서도 신좌파와 기독교 좌파는 모두 중간계급과 중간계급적 의식을 가진 미조직 노동계급을 기반으로 한다. 어찌 보면 신좌파적 대안 공동체 운동, 라이프스타일 운동에 종교적인 외피를 한 벌 더 입혀 놓으면 기독교 좌파가 된다. 이게 의외로 몸에 잘 맞는 옷인 셈이다. 다만 문제는 그러한 차원에서 강경한 여성주의에 대한 옹호도 나타나고 있으며, 메갈리아와 워마드 등의 남성혐오에도 한 다리 걸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이러한 점은 오히려 기독교 좌파가 젠더 문제에서는 더 막장으로 빠져드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 정확하게는 그 가운데 반스탈린주의적 정파들이나 상호교차성 페미니스트들은 양성 분리주의를 배격하고 성 긍정을 추구함으로써 메갈, 워마드 부류의 극단주의적 페미니즘과 명백히 선을 긋고 이를 비판하는 반면 기독교 좌파 페미니스트들은 언더도그마에 빠져서 양성 분리주의로 경도되고 금욕주의와 도덕주의에 빠져서 성보수주의적 레퍼토리를 늘어놓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이들이 사랑제일교회나 트루스포럼 같은 기독교 우파 극단주의자들과 무엇이 다른지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7.1. 반론
그러나 이는 신좌파 친화적인 입장의 해석이며, 철학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과 기독교가 양립하긴 쉽지 않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이 관념론이지만, 기독교적 관념론과는 상극인 면이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 절대성, 초월성 등의 개념에 적대적이고, 다원성, 상대성, 내재성 같은 개념을 긍정한다. 전자의 개념들이 기독교와 관련되므로 포스트모더니즘이 관념론이면서도 기독교와 양립하기 어렵게 된다.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은 기독교보다는 불교나 힌두교 철학과 유사성을 찾아보기 더 쉬운 면마저 있다. 실제로 포스트모더니즘의 비조 중 하나로 여겨지는 니체가 인도 사상과 긴밀한 관계가 있음은 공공연히 알려져 있으며,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 중 하나인 들뢰즈같은 경우 모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가 불교사상에 대응하는 서구철학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44]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두 관념론으로 환원할 수도 없는데, 이는 많은 포스트모던 이론들이 '몸'이나 '육체성'같은 개념을 긍정할 뿐 아니라 핵심 코드로 삼기 때문이다. 지젝같은 마르크스주의자도 들뢰즈를 들어 생기론자라고 분석했으며, 이처럼 포스트모더니즘 계통으로 여겨지는 신좌파 사상이나 이론 상당수가 막상 생기론적 유물론에 기반하고 있다는 해석은 생각보다 빈번히 이루어진다. 이렇게 볼 경우 마르크스주의가 기독교와 양립하기 어려운 이유와 마찬가지 이유에서 신좌파 역시 기독교와 양립하기 어려워진다.
8. 관련 인물
9. 관련 단체
9.1. 국내 단체
- 교단[49] , 교회, 신학교
- 한국기독교장로회
- 대한성공회
- 기독교대한복음교회
- 기독교대한감리회: 이 교단에는 김홍도 목사 같이 고보수주의와 결합된 강성 반공주의를 신봉하고 그것이 애국이라 여기며 이러한 신념에 기반한 설교, 발언 등의 활동을 하여 일반적으로 극우로 취급되는 우익 성향의 목사들도 많지만, '사회신경'에 나타난 교단의 공식적인 입장은 복지국가를 이상적인 경제체제로 여기며 독일 사민당 수준의 온건한 사민주의를 추구한다.[47] 그러나 대한기독교감리회는 변홍 축출 사건 이후 대학에서부터 보수적인 성향이 강해졌으며, WCC나 NCCK에 반대하는 목사나 교인들의 집단 행동이 꾸준히 있어오고 있다. 퀴어 축제에 이동환 목사가 참여한 것이나 변영권 목사가 친퀴어적 성향으로 불려나간 점을 생각하면 교단 지도부와 주류 목사들은 예장 통합이나 다름 없는 중도적[48]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 단체
-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다만 이것이 한국 가톨릭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님에 유의할 것. 가톨릭은 원래 개신교보다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NCCK라고도 한다.)
- 촛불교회: 매주 목요일에 투쟁, 농성 현장을 찾아 예배를 드리는 초교파 예배 모임. 이름은 교회이지만 교회가 아니고, 어딘가에 예배당이 있는 것도 아니다![50] 그냥 목요일마다 진행되는 예배 모임을 이렇게 지칭할 뿐이다.
- 예수살기: 위의 촛불교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기독교 사회선교 단체. 민중신학 기반이다.
- 고난함께: 감리회 한정의 기독교 사회선교 단체. 전 감독회장을 역임한 신경하 목사(아현교회 원로)가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참고로 신 목사는 김선도-김홍도-김국도 트리오와 교단 내 역학관계에서 정면으로 대립한 바 있다.
- 기독여민회: 기독교 여성운동 단체. 급진 페미니즘이 들어오기 전 1980년대부터 있었던 곳이다. 대략 이희호, 한명숙 정도 포지션이라 보면 된다.
- 영등포 산업 선교회[51] :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52] 소속 기관으로 1970~1980년대가 이들의 리즈시절이었다. 인명진 목사가 여기에서 활동하였다.
- 청어람 아카데미
- 출판사, 블로그 등
- 에끌툰: 세대주의 종말론+크리스천 시오니즘 성향이었으나 개편 이후 기독교 좌파+페미니즘 성향으로 바뀌었다. 작가진 대부분의 SNS에서 확인할수 있다.
- 새물결플러스
- 대한기독교서회
- 복음과 상황
- 기독청년학생실천연대(기청학련)
- 믿는페미
- 감리교 퀴어함께
- 무지개 예수
- 성공회 용산 평화나눔의집
- 물꼬기(구 차별없는 세상을 위한 기독교인 연대)
- 신학대학의 성소수자 인권 모임
- 언론사
10. 정당
국내에는 딱히 유의미한 기독교 좌파 정당은 존재하지 않지만 해외에서는 기독교 좌파를 표방하는 정당들이 존재한다. 다만 좌파 자체가 세속주의적인 경우가 많아 기독교 우파에 비해 그 수는 확실히 적은 편.
- 그리스 : 기독교민주주의 (Χριστιανική Δημοκρατία)
- 니카라과 :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 우루과이 : 기독교민주당
- 이탈리아 : 민주당
- 칠레 : 기독교민주당, 시민좌파당
11. 관련 문서
- 기독교
- 공상적 사회주의
- 기독교 사회주의
- 해방신학
- 신정통주의: 기독교 중도 내지 중도좌파로 분류되지만, 정치 성향 면에서는 기독교 사회주의이며, 실제로 바르트 이후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자유주의 신학으로도 분류되는 편[56] 이다.
- 한신대학교
- 성공회대학교
- 민중찬양
- 박근혜 퇴진 운동: 기독교 좌파가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또 학생운동 단위들의 연합체인 '박근혜 정권 퇴진 전국 대학생 시국회의'의 대표를 맡은 동국대 총학생회장은 이름부터가 안드레인 크리스천이다.
- 진보주의
- 자유주의 신학
[1] 자유주의 신학, 기독교 사회주의 등[2] 한국에서야 진보로 분류하지만 대체적으로 기독교 민주주의 성향의 단체는 따로 분류하거나 신정통주의와 함께 기독교 중도로 분류한다.[3] 어떤 교리와 경전 해석을 가졌든 종교에서는 성을 돈 주고 거래하는 행위를 좋게 보지 않는다.[4] 성공회 일부와 기독교장로회 제외[5] 대표적으로 강간이나 근친상간에 의한 임신[6] 베네수엘라에서 기독교 우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정당인 기독사회당도 있기도 으며, 다만 미국이나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기독교 우파보다는 성향이 온건하다. 전성기인 1970년-80년대 당시에는 2차례에 걸쳐 집권하며 민주행동당과 같이 양당체제를 구성할 정도였지만, 1990년대에 푼토피호 체제의 몰락과정을 거치며 영향력이 급감했다. 현재는 야당연합을 구성하는 한 정당 정도의 위상을 지지고 있는 수준. 여담이지만 우고 차베스의 아버지가 1978년부터 1998년 상반기까지는 기독사회당 당원이었다고 한다[7] 사실 기독교가 주류인 다른 지역에서도 기독교 우파와 좌파는 자주 티격태격하는 경우가 많다.[8] 한국의 개신교의 경우 대한성공회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교단에서는 동성애 문제에 대한 토론 자체를 꺼리는 분위기가 강하다.[9] 대한성공회 내에서는 진보적 성향이 강하지만 보수적인 신자들도 많다.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에서는 성공회가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사례도 있다.[10] 한신대학교나 성공회대학교의 학풍만 봐도 잘 알 수 있으며, 위에 언급된 무단 방북 사건 역시 기장 소속 문익환 목사의 일이다.[11] 사실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역시 상당히 진보적이나, 교단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다보니 묻히곤 한다.[12] 대한성공회의 경우 동성애를 옹호하는 신자나 신부만큼이나 반대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리고 동성애에 대해 옹호적이거나 중립적이라고 진보적이라고 하는 것은 오류가 있다. 유승민과 같은 국민의힘 내 자유보수주의자들은 동성애자들의 권리 증진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지만 제도화에는 회의적인 성향이 존재한다. 물론 유승민은 불교도이다. 외국의 사례를 찾아보자면 데이비드 캐머런, 테레사 메이는 성공회 교도에 해당되고, 성소수자의 인권에 대해 관심이 많고, 동성애 합법화에 찬성하지만 자유보수주의적인 중도우파에 해당된다. 본 문서에서 대한성공회가 상당히 진보적인 교단으로 서술되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도 엄연히 예장합동처럼 보수와 진보가 공존하는 교단이다.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에서는 보수적인 교단에 속하는 것이 성공회이다. 디씨의 성공회 마이너 갤러리만 가도 퀴어신학 때문에 열불을 내는 사람들이 많다.[13] 루터회의 최주훈 목사, 감리회의 이동환, 변영권, 김기석 목사[14] 사실 김일성은 모태신앙이다(...). 이후 본인 자서전인 세기와 더불어에서 천도교를 민족종교라 한 것을 보면, 천도교 신자가 됐을 가능성도 있다. 정치인이 종교를 정치에 이용하는 경우가 매우 흔하기 때문에 확실히 단정짓기는 어렵다.[15] 거의 모든 미국 대통령들은 ''공식적으로는'' 개신교 신자이다. 단 아일랜드계 미국인인 존 F 케네디는 제외. 케네디는 가톨릭이다.[16] 민건연은 LGBT 권리 이슈에 부정적이며 전통적인 가족 형태를 지지하기 때문에 기독교 보수파를 포함한 종교적 보수 세력을 어느 정도 지지기반으로 두고 있다. #[17] 기독교 좌파는 기독교라는 특수성을 특별히 강조하기보다는, 기독교 안에서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의미가 있는 보편적 가치를 뽑아내려고 한다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18] 대다수의 기독교 좌파는 북한 체제에 대해서 생명평화의 정신에 어긋난다며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통일을 강조하는 정파에서도 북한 체제에 문제가 있고 북한도 남한도 아닌 제 3의 체제로 통일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이 주류이다. 이미 세상을 떠났으므로 실명을 언급하자면 강희남 목사와 박창균 목사가 있다. 문익환 목사조차 북한 체제 자체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19] 평양의 봉수교회와 칠골교회 같은 극소수의 교회만 제한적으로 정권의 통제 하에 운영하고 있으며 ,여기에 다니는 교인들도 조선로동당 당원이거나 아니면 핵심계층에 들어가는 상위 계층들이다. 실질적으로 북한의 평범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20] 2014년 9월에 새맘교회에서 설교 초청을 받았을 때, '북한의 체제가 좋다거나 그 체제로 흡수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민족의 발전과 영광을 위해서 하루빨리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논지로 설교했다. 그러다가 안드로메다로 날아간 것이다(...) 거기서 딱 그쳤으면 그냥 얼마든지 용인될 수 있는 평범한 진보적 주장인데, 끝에 가서 한민족 역사 9000년 드립이 나오고 거기다가 환단고기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기까지 했으니...[21] 민주당계 정당 지지자, 친노, 문재인 지지자 등등. 민주당계 정당은 1998-2008년까지 10년간 집권하면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일관되게 펼친 바 있다.[22] 사실 마가렛 대처 ,로널드 레이건, 밀턴 프리드먼 등등 신자유주의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스스로 신자유주의자라고 부르지도 않았으며, 외부에서 붙인 멸칭에 가깝다. 이들 사이에서도 여러가지 이슈에 대해서 상당한 이견이 있는 등, 실제로 이들이 과연 동질적으로 분류될 만한지에 대한 의문 제기는 정치학계에서 적지 않게 이루어지고 있는것이 사실이며, 경제학계에서는 이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23] 이건 기독교 좌파에 대한 비판이라기 보다 기성 좌파 담론에 대한 의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24] 사실 그 그림자가 신자유주의 발생의 원인이다. 그렇기에 사민주의 정당들 그 자신들이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것이기도 하다. 우파와 자유주의자들은 이를 근거로 자유 시장경제의 우월성과 필요성을 선전한다. 거꾸로 근본적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레닌주의자들은 이를 근거로 부르주아 국가를 완전히 분쇄하고 노동자 민주주의를 실현하여, 사민주의에서 보듯 단순히 먹고 사는 데 걱정이 없는 복지사회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소유구조와 경제 운영 자체를 사회주의적으로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민주의가 이렇게 한계를 드러냈고 그 틈을 파고든 신자유주의는 더욱 가혹하고 냉엄한 시장질서를 앞세워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에게 지옥 같은 삶을 강요했기에 그 반대급부로 사민주의보다 더 왼쪽에 있는 좌파 노선이 성장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그리스의 시리자, 스페인의 포데모스, 아일랜드와 영국(북아일랜드)의 신페인 등등... 어찌되었든 대다수 기독교 좌파들(대부분의 기독고 좌파는 사민주의자이며, 신좌파나 유러커뮤니스트, 트로츠키주의자, 아나키스트 등도 있다) 이 모종의 환상을 갖고 있는 사민주의, 즉 주류 개혁주의에도 엄연히 빛과 그림자가 존재한다.[25] 강성 NL 기독교 좌파의 양대산맥인 강희남 목사는 2009년에, 박창균 목사는 2012년에 세상을 떠났다. 환수복지당의 전신으로서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2016년 7월부로 자진 해산한 코리아연대의 경우, 해산하기 전까지 운영하던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 이 두 목회자를 추모하는 글을 올려 놓은 바 있다.[26] 아이러니하게도 메노나이트의 거의 유일하게 유명했던 신학자가 심각한 성추문을 일으켜 반작용으로 더 강경해졌다[27] 자국 이성 혐오를 선전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28] 한신대에는 래디컬 페미니즘 그룹 이외에도 한신대에는 예전부터 존재했던 NL 성향 단위들과 사회변혁노동자당 학생위원회 한신대 분회가 있고, 성공회대에는 노동자연대 학생그룹이 있다. 하지만 전체 운동판이나 학생회 수권 정파를 놓고 보면 헤게모니를 장악한 쪽은 래디컬 페미니즘 정파다.[29] 아예 목사를 청빙할 때 학부를 명문대 나온 목회자만 찾는다.[30] 의외로 이 시기에 한신대를 다녔던 목회자들 가운데 강성 NL 성향은 없다. 강성 NL 성향 목회자들은 앞서 말했듯 그보다 훨씬 윗세대, 심하게는 주민번호가 2자로 시작하는 사람들이고, 2017년 현재는 대부분 은퇴하거나 세상을 떠났다.[31] 정작 이런 성향에도 2020년 목사고시 면접에서 남편이 목회자인 여성 목사훈련생이 나오자 면접관이 사모를 하지 왜 목사를 하려느냐는 발언을 해 교단이 사죄문을 올렸다(...)[32] 기독교 좌파가 충분히 좌파적이지 못하고 페미니즘과 충돌한다는 비판은 국내 뿐 아니라 중남미나 구미권의 좌파 진영에서도 나오고 있다. 특히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의 반낙태 기조는 전투적 무신론자, 급진적 세속 좌파, 신좌파 등 일부 좌파에겐 가루가 되도록 까인다.[33] 민주당, 한국당, 바른미래당, 정의당, 노동당, 녹색당 같은 제도권 정치 내에 있는 정당들 역시 공식적인 당 강령이나 입장은 종교와 무관하고 세속주의적이다. 이런 세속주의적 정당에 종교인들이 가입하여 활동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실제로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모두 무신론자들이었지만 자기네 당에 신앙인이 가입하여 활동하는 걸 막지는 않았고, 그로 인해서 러시아 혁명 당시 공산당에는 정교회 신자는 물론 신부들도 자유롭게 가입할 수 있었다. "다른 당원들에게 신앙을 강요하거나 이를 통해 당 내에 분란을 일으키지만 않는다면 개인적으로 신앙을 갖는 건 말리지 않는다"는 것이 러시아 공산당의 공식적 입장이었다.[34] 근데 이쯤 되면 그 자체로 자기모순인 게, 대통령을 왕과 동일시하는 건 근대 공화정을 부정하는 것인데 이거야야말로 국민, 인민에게 있는 주권을 부정하는 꼴이 된다...[35] 예수의 양아버지(?)인 나자렛의 요셉은 목수였다.[36] 자신이 목사임을 표시하기 위하여 집회에 참석할 때 착용하는 것이다. 교회력에 상관없이 스톨라는 보라색을 두르는데, 이는 예수의 고난을 상징한다. 더불어 안산시 지방회에 속한 감리회 목사들이 단체로 상경하여 집회에 참석했다. 자기네 교회에서 세월호 참사 희생자가 발생하기도 했으니...[37] 1980년대에 당시 경기도 시흥군 군포읍, 현재의 군포시에서 민중교회를 거점으로 활발하게 부곡 일대의 노동자들을 조직화하고 투쟁을 이끌었던 바 있다. 6월 항쟁 이후 80년대 말에 본격적으로 목회자가 되기 위하여 미국 유학을 갔다가, IST의 미국 조직인 ISO를 통해서 토니 클리프주의를 접했고 이를 계기로 완전히 사회주의자로 전향하였다. 무신론자가 된 지금도 종교에 관한 주제로 발제를 하거나, 종교적인 소재로 글을 쓰는 경우가 있다.[38] 공식적으로 IST 경향은 스탈린주의에 반대하여 1인의 대표 지도자를 세우지 않고 운영위원 여러 명이 공동으로 조직을 이끈다. 노동자연대도 형식상으로는 그러한데, 실질적으로는 이 조직의 창립자이며 개척자인 최일붕이 지도자 위치에 있다.[39] 근데 이것도 자기네들이 추수할 거리가 없다 싶은 운동은 또 그냥 패스한다. 대표적인 케이스로 농민운동이 있다.[40] 이렇게 추수를 많이 하다 보니까, 실제로 종교를 가진 회원들도 많이 활동하고 있다. 선물받아서 장신구로 사용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한 운영위원의 손목에 묵주가 있는 것도 목격되었다. 물론 이들이 실질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100% 수용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냥 이웃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는 차원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공동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지... 심지어 자기네들한테 그렇게도 적대적인 신좌파 여성 운동과 성소수자 운동에 대해서도 그렇고, 극단적으로는 메갈에 대해서도 그렇다. 클로저스 티나 성우 교체 사건 당시는 '''메갈을 비판적으로 지지'''한다는 논평까지 낸 바 있다.[41]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라는 이름으로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보를 통해 연재 중이다.[42] 다만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은 중도좌파 사회자유주의자들이나 좌파 사민주의자들의 그것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듯...[43] 앞서 언급한 마포구 어느 교회의 공식 슬로건이다.[44] 물론 청정심이나 수행론 등에 있어선 차이가 있다고 하였으나, 여러 철학적 개념이나 세계상에 있어 유사성이 있다는 지적이다.[45]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소속의 목사로 2014년 경기도지사 선거에 통합진보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중도 사퇴하였다.[46] 장로교인이면서 일본사회당 소속이었다.[47] 칼 바르트 파동 이후 신정통주의에서 촉발된 물결 속에 세계 감리교는 상당히 진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감리회의 시작인 영국 감리회는 성소수자를 인정하고 낙태에 대해 온건한 관점을 취한다. 미국 감리회는 해외 교회들을 제외하면 동성애를 지지하고, 낙태권을 인정하며, 사회 운동에도 굉장히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제3세계 감리회나 한국 감리회처럼 아닌 경우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보면 진보적 성향이 제법 강하다.[48] 신정통주의-복음주의[49] 이곳에 서술된 교단 내 모든 교회와 목회자, 교인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성공회, 기장에도 보수적인 교인이 있고 예장 합동에도 얼마든지 진보적인 교인이 있을 수 있다.[50] 사무실은 있다. 향린교회 안에...[51] 예장통합 교단의 영등포노회(서울 서남권 + 경기 광명시 관할) 소속이다.[52] 예장통합은 우파와 좌파 성향의 교회 및 신학이 공존하는 장로교 교단이다.[53] 한국기독교장로회, 민중 신학 계열[54] 감리회 계열[55]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욱북노회 사회선교센터[56] 폴 틸리히, 루돌프 불트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