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유/생애
1. 가수 데뷔 전
1976년 12월 15일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1] 에서 태어났다. 가족으로는 어머니와 아버지 유정대, 형 유승환(1975년생)이 있으며 조카는 유한나(女)가 있다. 본관은 강릉 유씨(한고제의 후손 劉씨 32세손 승(承)자 항렬[2] )이다.
한국 출생 후 서울에서 거주하다가 중학교 1학년이었던 1989년 겨울, 가족 모두가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이민을 가게 된다. 미국에서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었는데, 어느 날 한국에서 촬영 온 연예인을 여자친구가 응원하는 것을 보며 스티브 유는 질투를 느꼈다고 한다. 그렇게 스티브 유는 가수가 되어야겠다는 꿈을 가졌고, 스티브 유의 여자친구 역시 스티브 유에게 가수가 되라고 힘을 실어줬다.[3]
미국에서 가수의 꿈을 키우며 혼자 춤과 노래 연습을 하다 여자친구의 권유로 한국 연예 기획사 면접을 봤으나, 너무 미국 스타일이라는 이유로 탈락을 하게 된다. 그렇게 몇 번의 오디션을 보던 중 가위를 만든 이윤상과 만나게 되어 함께 일을 하게 되었고, 데모 테이프를 한국에 있는 기획사 50여 곳에 보냈다.
드디어 한 기획사로부터 연락을 받고 1996년 겨울, 혼자 커다란 배낭을 메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의 아버지에 의하면, 이민 온 당시 미국 생활의 기틀을 잡느라 아들 뒷바라지를 제대로 못했고 가수가 되겠다는 아들의 꿈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때문에 피아노 학원에서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며 피아노 연주를 배웠고 태권도 체육관에서 대리사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댄스를 하기 위한 몸을 만들어갔다. 가수가 되겠다며 혼자서 한국으로 갈 때도 부모는 고생 좀 하고 오라는 생각으로 아들에게 단돈 10달러도 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의 댄스 실력을 엿볼 수 있다. 곡명은 'Black Street - Baby Be Mine'
1997년, 만 20세의 나이로 가요계에 데뷔했다. 이후 2002년 초반까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뒤 해외로 건너갔으며,[4] 2004년 크리스틴 오와 결혼해 4남매의 아버지가 되었다.[5]
2. 가수 활동 및 예능 활동
그의 인식이 매우 부정적으로 돌아선 현재까지도 대중들은 그가 많은 사랑을 받던 음악인이자 예능인이었다는 사실에만큼은 공감하는 편.
박남정 - 박진영 - '''스티브 유''' - 비로 이어지는 199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남성 솔로 댄스가수로 조성모, 임창정과 더불어서 스티브 유[6] 만이 거의 드물게 남성 솔로 가수로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현재까지도 상기한 가수 이후 남성 솔로 댄스 가수로 데뷔해서 성공한 사례가 2010년대에 들어서는 거의 전무한 점을 생각해본다면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커리어를 보유했던 남성 댄스 가수였다.
1997년 4월 1일, 데뷔곡인 가위로 각종 방송사에서 1위를 여러 번 차지했고 이후 후속곡인 사랑해 누나도 10위 권 안에 드는 등,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단숨에 메이저급 반열에 올라섰다. 가위춤은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가 따라췄고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당시 1990년대의 칼군무의 정점을 찍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굉장히 현란했다. 지금 봐도 굉장한 칼군무인데, 그 당시에는 그야말로 파장력이 엄청났다.
스티브 유의 안무.gif
1998년 출시한 2집 타이틀곡인 나나나, 내가 기다린 사랑 1999년 3집 열정[8] , 1999년 4집 비전, 연가 2000년 5집 찾길 바래 어제 오늘 그리고 2001년 6집 WOW와 같은 곡들도 연속으로 히트시키면서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 중 한 명으로 군림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시트콤,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등 다양한 장르의 방송계를 섭렵했다.
그는 춤꾼 스타일의 옷을 입긴 했지만 안무 자체가 기본적으로 굉장히 격렬했고[9] , 대중성을 꽤나 의식했기 때문에 원타임이나 지누션과 같은 당대의 동료 가수들과 비교해 보면 옷차림이 단정한 편이었다. 더불어 항상 미국식의 짧은 남자머리(Buzz Cut) 혹은 반삭을 고수했기 때문에 중장년층 이상의 어른들에게도 큰 호감을 샀다.
그 당시에는 음성적으로 유행하던 일본 비주얼계의 간접적 영향으로 머리를 길게 하는 게 유행이어서 지저분해 보이고 그래서 당연히 두발 제한을 두었지만 스티브 유와 같은 경우에는 머리도 짧은 데다 깔끔하고 깨끗하고 얼굴은 물론 두상까지 멋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잘 어울렸고 유행도 순식간에 뒤바뀌기도 했다. 당시 중고교 두발 규정이 엄격했던 터라 학교에서 두발 단속 문제도 꽤 심각했지만 스티브 유의 반삭머리가 남학생들에게 유행을 타면서 알아서 단정한 머리를 만드니 이 때만큼은 학생부가 두발 단속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또한, 보컬 부분에서도 스티브 유는 댄스 가수 치고도 상당히 좋았는데, 일단 당장 당시의 여느 발라드 가수들과 비교해봐도 전문 장르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스티브 유는 타고난 미성에다 파워풀함을 겸비한 느낌으로 흠 잡을 데도 없이 가창력이 매우 좋았으며, 대부분의 곡들이 2옥타브 시 ~ 3옥타브 레의 높은 음역대였고 <Wow> 처럼 도입부부터 2옥타브 후반대의 음으로만 채워져 있는 경우도 많았다. 스티브 유 본인도 가창력이 정말 좋은 가수로 평가 받았으며 김종서, 김건모, 김경호 등 높은 음역대를 자랑하는 가수들의 노래 커버도 역시 잘 소화했다. 노래 퀄리티나 음반 구성은 지금 들어봐도 역대급이고 요즘 나오는 곡들과 비교해봐도 세련된 편이다. 오히려, 댄스 가수가 비교적 저평가되었던 시절에 활동했기 때문에 평가가 낮게 되는 부분이 본인에게는 아쉬울 따름일 것이다.
그리고, 스티브 유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도 만인의 슈퍼스타같이 같은 연예인들조차도 우러러 보는 위치인 듯하면서도, 나름대로 웃기고 재미있는 모습과 더불어 입담도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무대에서는 카리스마 포지션으로 인기를 얻었지만, 예능 오락 프로그램에서는 오히려 무게 있는 이미지를 버리고 자주 망가지기까지 하면서 친숙한 모습을 보여줬다. 당시 흔하던 드라마 타이즈 계열의 예능에서 바보 연기 같은 코믹 연기도 종종 할 만큼 오락적 역할을 수행하는데 서슴지 않아서 성별과 세대를 가리지 않고 사랑받았고[10] , 종종 단기로 오락 프로그램 진행도 했었다. 그야말로 친근한 웃음과 카리스마 있는 멋이라는, 남들은 하나도 얻기 힘든 두 마리 토끼를 완벽하게 잡은 역대급 스타 중의 스타였다. 실제로 해피투게더 - 쟁반노래방의 초대 MC로 활동하기도 했다.[11] 옆집에 사는 절친한 동네 형같이 친근한 이미지도 있었고, 끼와 재주는 물론이고 탄탄한 춤실력과 격렬한 안무 속에서도 고음의 곡을 깔끔하게 소화해 내는 가창력까지 겸비했었다. 따라서 그는 그때 활동하던 댄스가수들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이었던 발군의 재능을 뽐냈던 가수였다. 게다가 잘생긴 외모에다 탄탄한 근육질 몸매도 역시 그의 인기 요인 중 하나였다. 요즘에야 워낙에 몸이 좋은 가수들이 많지만, 90년대 그 당시 그는 한때 의류모델이었던 듀스의 김성재와 더불어 가요계에서는 거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뮤직비디오만 봐도 탄탄한 몸매를 과시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또한, 예능 프로그램이나 각종 인터뷰를 통해서 데뷔 초기부터 성실하고 예의 바른 모습을 보였던 터라 대외적인 그의 이미지 역시 상당히 좋았다. 더불어 출발 드림팀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면서 건강한 스포츠맨 이미지를 잘 쌓았다. 스타 서바이벌 동거동락에서도 멋있으면서도 마이크웍이나 입담도 좋아서 코믹한 동네 형 같은 이미지도 잘 보여줬고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는 '''잘생긴 팀'''의 주장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고 '''우승'''까지 하면서 '''최후의 생존자'''가 되었다.
게다가 담배를 끊고 금연 홍보대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금연 캠페인 이러한 좋은 이미지가 최고조에 달한 전성기 시절에는 '''아름다운 청년'''[12][13] 이라 불렸고, 흔한 안티조차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의 대중적인 인기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고 광범위하였다. 심지어 댄스에 큰 관심이 없는 중장년층~노년층도 그의 대표곡과 얼굴 정도는 대부분 기억하며 호감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더하여, 나이도 어린 인기 연예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흔한 연애 스캔들도 없이 사생활도 무척 깨끗한 편[14] 이었고, 무대 뒤에서도 항상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던 터라 선후배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매우 좋았다. 또한 크리스찬이였던 점을 여러모로 어필한 점도 이에 한 몫 했는데, 당시 개신교 신자라면 "술, 담배를 안 하거나 적게 하고 검소하게 사는 등 자기 절제를 하는 사람"으로 여겨질 만큼, 지금보다 이미지가 좋았기 때문이다.
그의 앨범 마지막 곡은 항상 직접 부른 찬송가였는데, 이는 테이프나 CD 재킷에는 써 있지 않았기에 이에 게재되어 있는 마지막 곡을 들은 뒤 테이프나 CD가 꺼질 걸 생각하던 감상자들이 뜬금없이 찬송가가 나왔으니 크게 당황하기도 했다. MBC에서 그의 데뷔 스토리와 데뷔 이후의 삶을 취재한 다큐멘터리까지 제작했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전성기 시절엔 대중적인 호감과 건전, 건강한 흠잡을 데 없이 좋은 이미지로 큰 인기를 얻었다.[15]
또한, 2001년이 어찌보면 그에겐 인기 최전성기이자 가장 이익이 많았던 해인데, 2000년대 당시의 쟁쟁한 라이벌이었던 H.O.T.와 젝스키스가 해체된 이후였다. 또한, CF도 10편 이상 찍었고 당시 잘 나가던 음반회사와 무려 37억 원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를 가진 돈을 받고 계약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스티브 유에게는 엄청난 최고의 전성기를 보여줬던 한 해였다 보면 된다. 그 인기 덕택에 2002년 한일 월드컵 조추첨식 축하공연 무대에도 서게 되었다.
동시기 가요 대상을 석권했던 핑클, 임창정, 젝스키스와 비교시 공식 집계된 음반 판매량과 가요 프로그램 장악력은 이들보다 우위를 점할 정도로 높은 수준이었다. 커리어 하이를 달성했던 1999년 3집 열정은 조성모, H.O.T. 에 이어 그해 음반 판매량 연간 3위에 랭크될 정도로 높은 기록을 세웠는데 특히 강력한 팬덤을 보유한 아이돌 그룹이나 대중적 장르의 발라드 가수에 비해 음반에서 불리한 1인 댄스 가수의 태생적 한계를 생각해 본다면 더더욱 무시할 수 없는 성적이다.
어쩌면 전성기를 H.O.T.와 함께 보낸 것이 그에겐 악재 요소로 분석될 수 있다. H.O.T.는 당시 영세 기획사였던 SM엔터테인먼트를 한국 최고의 기획사로 키워낸 그룹으로 엄청난 규모의 팬덤을 거느리고 있었다. 스티브 유의 등장 이전부터 이미 대중가요계는 아이돌이 주도하는 시장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었고 이후 발라드 가수들이 음반 시장을 장악하는 등 당시 경쟁자 수준과 가요계가 흘러가는 판도를 생각해 볼 때 1인 댄스 가수가 가진 불리한 입지로 돌파하기에는 어느 시점에서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이다.
스티브 유의 수상 경력이 저조한 다른 이유로는 그의 영주권 문제가 있다. 당시 미국 이민법상 미국에 6개월 이상 거주를 해야 영주권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주로 상반기에는 국내 활동을 하고 하반기에는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던 터라 1997~1998년 연말 시상식에는 단 한번도 참석을 하지 못했다. 특히 1998년에 발매한 2집 타이틀곡 나나나는 그의 최전성기의 시작을 알리는 곡이었고 그해 대중 지표 순위에서 1~2위를 다툴 정도로 큰 인기도를 달리고 있었지만 결국 그해 연말 시상식에 불참하게 되면서 어떠한 상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스티브 유는 전 연령대를 아우르는 점을 강조하지만, 그런 측면에서는 조성모도 비슷하다. 10대 가수 가요제에서의 30대 이상이 뽑은 가수 명단에 들어간 횟수도 조성모가 앞서고, 위의 리스피아르 설문조사도 모든 연령층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였다.
'''하지만, 이는 스티브 유가 고평가 받는 이유를 잘 파악하지 못한 분석이다.''' 애초부터 스티브 유가 대외적으로 높게 평가를 받았던 이유는 가요계에서 독보적인 원탑이었기 때문에 고평가를 받았던 것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독보적으로 원탑을 찍은 분야는 없었더라도, 연예계 전반에서 두루두루 인정을 받고 톱스타의 이미지를 쌓았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를 받는 것이다.
실제로 음반관련 지표들은 그 당시 대세였던 가수들에게 밀렸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가수들 뒤에는 항상 2위 포지션으로 자리잡았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즉, '''"독보적인 원탑이었다는 것이 과장되었다는 점도 분명히 있지만, 그렇다고 톱스타 반열의 가수가 절대로 아니었다는 표현도 잘못되었다."'''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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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이 아니라 인기도 측면에서 봐도 1998년 한국갤럽 인기도 조사에서 가수 부문 1위를 차지했으며 리스피아르 조사연구소에서 제공하는 자료를 살펴보면 당시 설문조사 자료의 순위에서도 조성모, H.O.T., 스티브 유가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스티브 유는 헬게이트급으로 경쟁이 치열했던 1세대 아이돌 전성시대에서도 솔로 댄스 가수라는 약한 입지로 당당하게 혼자 경쟁을 하면서도 엎치락뒤치락하던 수준까지 올라간 것이 정말 대단했기 때문에 절대로 저평가되어야 할 인물이 아니다.'''
특히 1990년대 중후반에 국내 PC시장이 최정점을 이루던 시기에는 삼성전자가 메이저 PC 제조업체로서 선두 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당시 최고 스타였던 스티브 유를 전속모델로 기용하여 3회 연속 출연하는 진기록을 세운데다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배우들이나 출연해왔던 '''삼성전자 CF에 가수가 출연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 이었다. CF 개런티는 1999년도에 '''국내 최고액'''이라는 기사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스타성은 연예인 중에서도 단연 톱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래서, 스티브 유는 뮤지션으로서의 평가보다 멀티 엔터테이너로서 더 높은 평가를 받는 편이며 싫어하는 사람도 거의 없이 누구나 다 어느 정도 호감은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당신은 유승준[16] 을 좋아합니까?"'''라고 물어보면 '''"내가 유승준[17] 팬은 아니지만 싫어하지는 않는다, 좋다, 잘 생겼다, 멋지다."'''라면서 긍정적인 답이 오는 분위기였다. 누구나 좋아하지만, 최애캐 정도는 아니었기에 사회 전체적으로는 엄청난 인지도와 인기를 보유한 것처럼 보였지만 개인의 음반 판매량 화력은 당대 인기 가수들에 비해 다소 약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음악방송에서의 성적은 1990년대 뮤지션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수준이다.''' 1집부터 5집까지 활동할 때 1위 후보에 꾸준히 올랐고, 커리어 하이를 달성했던 1999년 3집 당시에는 뮤직뱅크, 인기가요, 쇼 뮤직탱크 등 당시 순위제를 시행하던 음악방송에서[18] 전부 '''최고 타이틀에 해당하는 업적을 남겼다.'''
스티브 유의 부재 이후 솔로 가수로 슈퍼스타가 된 후발주자는 비였고, 비는 지금도 스티브 유와 자주 비교되곤 한다.[19] 물론, 최정상급 스타가 된 이후 각종 논란들 때문에 깨끗한 이미지에는 흠이 많이 갔기 때문에 대체로 둘을 비교할 때는 스티브 유의 손을 들어주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다. 심지어 안티들도 이건 인정하는 편이며, 스티브 유와 관련된 게시물에 '''"미국시민권 취득만 안 했어도 지금의 비는 없었을 것이다."'''라는 리플은 거의 필수요소급으로 달리는 리플이다. '''물론 본인의 이기심으로 저지른 잘못'''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2020년 12월 스티브 유가 터트린 역대급 병크 덕분에 이제는 비의 완승으로 기울어지는 분위기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흔히 말하는 가요계의 엄친아로 인정받았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그는 '''미국시민권 취득'''을 저지른 탓에 한 때 "전 국민에게 호감을 받고 사랑받던 가수"에서 지금은 "전 국민이 가장 미워하고 증오하는 가수"로 변모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스티브 유가 남긴 명곡들도 워낙 많았고 퍼포먼스도 뛰어난 인재가 쉽게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4급 받았으니 공익으로 병역의무 수행할 것이지, 왜 공익조차도 안 갔느냐?"라고 아쉬워하는 의견도 있다.
지금은 연예인이 공익 간다면 병역비리 아니냔 소리가 대놓고 나올 정도지만, 당시엔 연예인들이 군대를 어떻게든 빼는 일이 워낙 자연스럽게 여겨졌기에 그가 공익을 갔다 해도 "춤을 저리 격하고 많이 추는데 허리 좀 나가서 공익 갈 수도 있지."[20] 라고 자연스럽게 대중들이 받아들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스티브 유 병역기피 사태 이후 대부분의 남자 연예인들이 공익 판정을 받았거나 외국인 영주권이 있어도 포기하고 자신있게 현역으로 자원 입대하는 경우들도 많이 보였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스티브 유가 지금처럼 병역기피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사건은 오히려 다른 이들의 병역기피를 막는 것에 순기능을 제공한 셈이다.
2.1. 가요 프로그램 수상내역
3. 병역기피
4. 병역기피 이후
5. 해외 활동
성룡이 제작·각본·주연을 맡은 영화 '대병소장(大兵小將: Little Big Soldier)'에 출연했을 때에도 그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는 여전했고 결국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든 채 영화는 스크린 뒤편으로 사라졌다. 영화 개봉에 앞서 국내 영화잡지와 인터뷰를 했다.
대병소장의 경우 중국 현지에선 1억 위안을 벌어들이며 흥행에 성공했는양 기사가 나오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사실 1억 위안이 수치는 개봉 2주차에 1억 위안 돌파라는 이야기고...한국 돈으로 170억 원 정도 된다. 그 정도면 최종으로 약 2억 위안 정도는 될것으로 보이며, 한국 돈으로 350억 정도란 이야긴데...성룡이라는 이름으로 따지면 흥행이 그럭저럭인 셈이다. 게다가 해외가 실패라서 전반적으로 보면 상업적으로는 실패에 가깝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권의 흥행은 성룡 영화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참패를 기록했다. 이는 그야말로 성룡의 굴욕이라고 할 만한 결과였다. 관련 기사
이는 역대 한국 성룡 영화 관객 동원 기록을 봐도 알 수 있는데 성룡이 주연을 맡은 극장 개봉작 중 전국 관객 10만도 모으지 못한 영화는 이 대병소장이 처음이었다. 차이니즈 조디악이 다시 10만명 이상을 넘었으나 예전만 못한다. 게다가 성룡과 제이든 스미스[21] 가 주연으로 등장한 베스트 키드는 30만도 못 채웠다. 그렇다고 단순히 스티브 때문에 실패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데 대병소장의 해외 흥행을 보면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에서 망했으며 가라테 키드의 해외 흥행 또한 한국에서만 흥행을 못한게 아니라 스웨덴, 우크라이나, 폴란드, 터키등에서도 흥행 실패를 하였으며 중국은 평가가 좋지 않았고 '''박스오피스 집계 기록도 없다.''' 해외 국가들 중에서도 '''2천만달러 이상을 기록한 나라가 한곳도 없기 때문'''에 한국만 망하게 아니라 '''미국을 제외한 해외 흥행'''이 전부 망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베스트 키드는 저예산 영화(제작비 4천만달러)라서 해외 흥행을 제외 하더라도 미국 흥행(1억 7천 8백만달러)이 크게 성공했기 때문에 현재 속편 제작을 하고 있다. 요악하자면 스티브 유가 '''한국에서의 흥행에 영향에 미쳤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한국 뿐만 아니라 스티브 유를 모르는 '''해외 국가'''에서도 흥행이 기대 이하였던 것으로 보아 단순히 스티브 유 때문에 실패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 취권(1979): 서울 90만(국도극장 1개관)
이 흥행은 당시 역대 흥행 1위 격인 초대박 흥행이었다.
- 용형호제(1987): 서울 20만
지금 보면 별 것 아니지만 당시 기준으로 20만은 말 그대로 대박 수준이다.
- 홍번구(1995): 서울 30만
성룡의 할리우드 성공적 진출작. 이전 글에서는 그냥 진출작이라고 나왔으나 이미 성룡은 80년대에 프로텍터를 비롯한 영화로 미국 진출을 시도했으나 흥행이나 평은 참혹했다. 버라이어티 지로부터 아시아에서 온 D급 배우라고 비아냥을 받았으나 11년 뒤 홍번구가 미국에서 3239만 달러 대박을 거둬들이며 버라이어티 지는 그 D급 배우가 이젠 A급으로 돌아왔다라고 호평했다.
- 폴리스 스토리4(1996): 서울 35만
1996년 구정 연휴에 개봉했다. 은행나무 침대와 함께 설 연휴 최강자로 군림할 거라는 예측이 대세였다.
- 턱시도(1998): 서울 33만
- 러시아워 2(2001): 전국 76만
- 턱시도(2002): 전국 170만
- 신화: 진시황릉의 비밀(2005): 전국 47만
- 러시아워 3(2007): 전국 80만
- 포비든 킹덤(2008): 전국 100만
- 대병소장(2010): 전국 9만
- 베스트 키드(2010): 전국 29만
- 차이니즈 조디악(2013): 전국 31만
차이니스 조디악에 출연한 스티브 유.
이후 경한 2(硬漢2奉陪到底)에 악역으로 출연, 개봉 10일만에 6천만 관객을 기록했다고 기사가 떴으나 결국 오보로 판명났고 <중국영화보>에 의하면 약 40만 명의 관람객을 모았다고 한다. #[22]
2012년에는 성룡의 용형호제 3편 격인 차이니즈 조디악에 권상우를 비롯한 다른 한국 배우들과 같이 나올 예정이라고 했지만... 정작 출연자 명단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밖에도 맨 오브 타이치(2013)라는 키아누 리브스가 첫 감독을 맡은 영화에 출연했으나 해당 영화는 imdb 평점 6.1, 로튼토마토 관객점수 50%를 기록하는 등 평론가에게서나 관객에게서나 혹평을 받으며 흥행에서 참패했다. 사실 키아누야 워낙에 커리어 기복이 심한 편인데다 스티브 유 역시 주연도 아니고 출연진 목록 끄트머리에나 보일 정도의 조연으로 출연한 탓에 영화가 흥행했어도 커리어에 큰 이득은 되지 않았겠지만, 할리우드에 얼굴도장을 찍는 데에 실패한 셈이다.
스티브 유의 성룡 영화 두 편의 정확한 흥행 수치는 찾기 어려우나 차이니즈 조디악 같은 경우 최근 성룡 영화 중에서 가장 대박난 영화이지만, 대병소장은 외국 흥행은 망했고 중국 흥행에서도 그럭저럭이다. 차이니즈 조디악은 중국에서 8억 위안, 한국 돈으로 약 1400억원 내외의 극장매출을 올렸고, 역대 랭킹에서도 10위 안에 들어갈 정도로 대박이지만, 대병소장은 최종 약 2억 위안 내외의 흥행으로 나쁘지는 않으나 성룡을 생각한다면 그럭저럭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그가 성룡 영화 흥행의 큰 변수는 아니라고 할 수 있으나, 국내 흥행만으로 따지자면 성룡 영화가 나오면 의리로라도 극장에 들어가던 골수 남성팬들의 이탈을 가속화시킨 큰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2015년 개봉한 성룡 영화 드래곤 블레이드는 아예 홍보물 전반에서 스티브 유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꽁꽁 감추었다. 그는 비중있는 단역 정도로 짧게만 출연했으며, 이와 상관 없이 이 영화는 한국에서 흥행에 실패했다.
2020년 성룡 제작 드라마 '성화 14년'에 출연했는데, 작중 등장하는 의상들이 너무나 한국 사극 복장과 비슷하여 논란이 되었다. 시기상 명나라 복식이 한복과 비슷할 때가 있긴 했지만, 이건 중국 내에서조차 조선 고려 스타일과 지나치게 흡사하다며 한드 따라하기냐는 지적이 나올 정도니 말 다 했다. 최근 중국 드라마 동궁, 드라마 태자비승직기, 드라마 연운대(원작가 미월전 제작), 드라마 치아문단순적소미호 작가 혐한 논란 등 현대에도 문화적 침범 형식으로 동북공정이 진행되고 있다는 우려가 많다 보니 한국 내 여론은 더욱 싸늘하다. 안 그래도 논란이 많은 판에 이런 작품에 출연하면서 자신이 한국인이고 입국시켜 달라는 요구를 하는 모습이 뻔뻔하기 그지없다는 평.
6. 의외의 나비효과
스티브 유의 병역기피는 실로 어마무지하게 크고 오래가는 파장을 일으켰다. 스티브 유의 후견인이 된 성룡은 야심차게 보이그룹 JJCC를 데뷔시켰고 성룡 본인의 이름을 걸었지만 이 '성룡의 이름'이 희한하게 '스티브 유의 이름'으로 전환되면서 JJCC 멤버들은 생판 스티브 유를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티브 유의 뒤를 봐주고 있는 사람이 데뷔시킨 보이그룹'이라는 이상한 악명 아닌 악명이 붙어버렸다. 그 바람에 대형신인으로 데뷔한 것과는 대조되게 폭망했는데 JJCC 자체가 딱 소나무의 남자 버전이 되었다. 소나무 역시 성별만 여자일 뿐 JJCC와 모든 게 닮았다. 결국 JJCC는 모든 걸 포기하고, 산청 이외의 한국인 멤버 전원이 군대에 입대했다.
[1] 당시 잠실은 서울 강남구에 속했다가 이후 강동구로 편입되었고 1988년 송파구 분구와 함께 송파구에 편입되었다.[2] 참고로 제19대 대통령 선거에 바른정당 후보로 나섰다가 4위로 낙선한 정치인 유승민과 같은 항렬이다. 유재석의 손자 항렬.[3] 이 여자친구는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이민하게 된 후 방황하던 스티브 유에게 충격 요법으로 헤어지자 하기도 했다. 여자친구와 헤어진 스티브 유는 여자친구의 빈 자리를 크게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4] 해외로 건너간 사유는 아래에서 후술. 이 내용에서도 알 수 있다.[5] 2006년과 2010년에 득남, 2018년 10월에 쌍둥이를 득녀했는데, 장남과 쌍둥이 자매의 나이 차이가 상당하다.[6] 공교롭게도 셋 다 당대 최고 인기예능프로그램인 출발 드림팀의 에이스활동을 했다. 셋 다 운동을 특출나게 잘했기 때문. (단, 임창정은 배우라 영화활동과 가수활동을 병행했기에 꾸준히 나오지는 못했고, 가수활동 시기에만 나왔다.) 여기에 전진과 김종국을 포함해 드림팀에서 무술인 이미지의 배우 이상인 시대를 지나 가수 에이스 전성기 시대를 만든 인물들. 중간에 배우 박용하의 에이스시기도 잠깐은 있었지만.[7] 참고로 이 방송분에서 스티브 유는 다른 출연자의 대타로 들어온 것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란한 춤을 추면서도 훌륭한 가창력을 보여주어 그가 스타로 발돋움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영상을 본 사람들의 대부분의 반응은 '''욕 하러 들어왔다가 감탄하고 간다.''' 혹은 '''누가 저 때로 돌아가서 쟤 군대 좀 보내고 와라'''일 정도이다. 훗날 그의 행보에 비난을 하는 대중들 조차도 그의 재능을 안타까워 한다는 것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예.[8] 40초 부근에 스타크래프트 마린의 'gogogo' 효과음이 샘플링되는 등, 시류를 상당히 잘 타고났다.[9] 실제로 그 당시의 스티브 유는 동북아시아 최고로 손꼽히는 춤꾼이라 평가받기도 했었다.[10] 당시 현재 20대 후반에서 30대에 해당하는 남자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인기 원탑이었던 건 자명하나, 여자 어린이들과 청소년들도 학교 장기 자랑에서 SES 핑클 같은 인기 여자 가수들만 따라하는 것이 아닌, 스티브 유의 가위 춤을 추는 경우가 엄청 흔했으니 말 다했다. 당시의 스티브 유는 여자 어린이들한테도 인기가 역대급으로 좋았다. HOT 팬들과 스티브 유 팬들이 학교에서 대놓고 싸울 정도. 스티브 유 노래와 흉내를 개인기로 삼는 연예인들도 많았다. 당시 예능 단골 스티브 유 흉내 드립은, 스티브 유의 노래 '열정' 도입부에 나오는 영어 가사를, 한국말처럼 바꾼 '김밥에 김이 없대'.[11] 이후 후술할 사건으로 인한 부득이한 하차 이후 그의 공석은 이효리가 꿰차게 된다.[12] 당시 방송가에서 주로 사용하곤 했덩 전성기의 스티브 유에 대한 대중들의 이미지를 한 줄로 표현한 캐치 프레이즈였다.[13] 아름다운 청년이라는 호칭 자체의 원조는 노동 운동가인 전태일 열사, 그 시기에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라는 홍경인 주연의 영화가 개봉했었다.[14] 현재 아내인 크리스티나 오(한국명 오유선)와 무려 그가 데뷔하기 7년 전인 1990년도부터 교제 중에 있었고 그가 국내 활동 공백기 동안에는 영주권 유지를 위해 미국에 머무르곤 했기 때문이다.[15] 다만, 당대에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와 관련된 잡음이나 루머가 존재하긴 했는데 그가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갱단 출신이라는 루머였다. '코리안 프라이드'라는 갱 조직으로서 1992년 초반에 결성되었고 1990년대 중반 전성기였으나 이후 더 거대한 세력의 아시안 프라이드에 흡수되었다. 하지만, 그가 갱단 소속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16] 존치 근거: 인용문[17] 존치 근거: 인용문[18] 당시 음악캠프는 순위제를 시행하지 않았다.[19] 2020년 놀면 뭐하니? 프로그램에 출연 후 깡이라는 노래가 뜻밖의 역주행을 하게 되면서 크게 주목받고 있는 와중에 스티브 유의 부재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 일부 의견들도 있다.[20] 저 시절은 출산율 100만을 넘기던 시절에 태어난 세대들이 군대에 갔을 90년대 초반만큼은 못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출산율이 (현재에 비하면) 비교적 높았을 때 태어난 세대들이 군대에 갔을 때였기 때문에 공익을 가는 것이 2010년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수월했던 시절이기도 했었다.[21] 윌 스미스의 친아들이다.[22] 또한 경한 2에서는 스티브 유보다 칠협오의의 주인공인 초은준(焦恩俊), 유엽(劉燁), 장쯔린(張梓琳) 등이 더 많은 관심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