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환지

 


沈煥之
(1730년 ~ 18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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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환지 초상, 대한민국 보물 제1480호
1. 개요
2. 생애
3. 정치 성향
4. 매체에서
5. 둘러보기


1. 개요


조선 영조정조 시대의 문신. 자는 휘원(輝元), 호는 만포(晩圃), 시호는 문충(文忠). 노론 벽파의 지도자로 도승지와 영의정 등을 지냈다. 심의겸의 형 심인겸의 8대손으로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심진(沈鎭)의 아들, 교리를 지낸 심태현(沈泰賢)의 손자이다. 청송 심씨 안효공파(安孝公派)로 잘 알려져 있다.[1]

2. 생애


의외로 벼슬길이 매우 늦었다. 1762년 소과 진사시에 합격하고 1771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42세. 항상 노신으로 등장하는 심환지는 "청년 관료" 시절이 없었다.[2] 하지만 이후로 빠르게 승진하기 시작한다. 당시 노론 벽파의 수장은 김종수였는데 심환지는 50대에 이르러서야 정치적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후 정언, 교리, 대사성 등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언관직을 맡았으며 의리와 공의를 강조하는 격렬한 언론을 펼쳤다. 1779년 부수찬, 부교리를 거쳤고 1784년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이후 사간원대사간,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이조참의를 거쳐 형조참판으로 승진하였으나 평택안핵어사(平澤按覈御史)로 있던 김희채(金熙采)의 탄핵으로 김갑도(金甲島)에 위리안치되었다. 1793년 풀려나 복직되었고 이조참판, 도승지, 규장각제학, 비변사제조를 역임했다. 1795년 병조판서로 승진되었으며 대사헌, 예조판서, 형조판서,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지내고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 때 남인의 영수 채제공, 이가환(李家煥), 소론 서명선 등을 탄핵했다. 1795년 우의정이 되었으며 1799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경모궁도제조(景慕宮都提調)를 겸하였고 곧이어 좌의정으로 자리를 옮겼다. 순조 즉위년 정순왕후 김씨수렴청정으로 인해서 벽파가 집권하게 되자 영의정이 되었다.
순조 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를 주관하기도 했는데 시파와 남인들의 숙청으로 이어졌으며 장용영 또한 혁파하였다. 김관주(金觀柱), 정일환(鄭日煥) 등 노론 강경파를 등용하여 반대파를 공격하게 했으며 권유(權裕)를 대사헌에 임명하면서 김조순[3]을 공격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나 정순왕후 김씨 사후 김조순이 집권하면서 관직을 추탈당하였다. 이후 고종 1년(1864년)에 관직이 복구되었다.

3. 정치 성향


정순왕후 김씨와 더불어 정조를 독살시킨 용의자로 의심받았으나 2009년 2월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 299건이 발견되어 정조와 비밀 편지로 내통한 사실이 드러나 혐의가 완전히 사그라들었다.[4][5] 정조는 겉으로는 탕평을 내세우면서 노론의 영수인 심환지와 대립하는 척하였지만 막후에서는 심환지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심환지와 같은 성향임을 드러내고 뒤로 각본을 짬으로써 심환지와 함께 정국을 주도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정조 어찰첩 참조.
심환지는 노론 벽파의 강경파였고 남인인 채제공을 배척하며 같은 궤를 하고 있고 2중대였던 소론인 서명선을 탄핵하는 등 비타협적이라 수구꼴통이라 불렸으며 신유박해로 남인들을 숙청했을 정도로 강경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심환지는 기본적으로는 청렴하고 유능하였다. 일례로 가혹한 혹정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장살한 탐관오리이여절을 남인인 채제공과 같은 노론인 이병모가 이여절을 주살하면 국가와 관리의 위신이 떨어진다하여 극형을 반대하자 심환지가 반대하기를 무고하게 죽은 사람이 넷이 되었는데 그런 자를 살려주면 법의 기강이 무너진다 하였다. 결국 이여절이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로 판단하여 공적인 일로 밝혀지자 마무리되어 유배형으로 보냈지만 나라에서 이여절의 죄를 계속 봐주니 이여절은 얼씨구나하여 사고를 많이 쳤다. 나중에 심환지가 아뢰니 반대적으로 일률은 곤란하다하여 충군이 되었다. 이여절을 차라리 심환지 말대로 사형에 처했으면 이여절의 혹정도 없을 것이고 이러한 사고도 안났을 것이다.

4. 매체에서


  • 1995년 영화 《영원한 제국》 - 최종원
당시에는 정조 어찰이 아직 발견되기 전이었고 노론 음모론이 대중 문화계에 한참 대세였던 시대였으므로 극중에서도 정조를 암살할 기회만을 노리는 능구렁이같은 인물로 묘사되었다.
여기서도 정조의 정적이자 그야말로 꽉막힌 벽파 자체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철저히 정치인답게 계산된 모습이 나온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여유로운 미소를 보여주기까지한다.

노론 세력의 수장인 최석주란 가상의 인물로 묘사되었다.

5. 둘러보기



[1] 안효공파는 정치적으로 서인 노론에 속했다. 한때 서인의 거두였던 심의겸, 김효원의 반대로 이조정랑에 등용되지 못한 심충겸, 노론 벽파의 영수였던 심환지 등이 안효공파 벌족이었다.[2] 청년 관료 시절이 반드시 없었는가는 의문이 드는 것이 조선 시대에는 과거 급제가 곧 관료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관료가 되는 것이 반드시 과거 급제만 있는 것은 아니였다. 대체로 고려 시대에 비하여서 음서의 영향이 약해졌지만 하급 관리로 먼저 시작하고 이후에 과거 급제하여 청요직을 비롯한 중요 직책으로 나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조선의 관리 생활이였다.[3] 김조순의 장인인 심건지는 심환지의 6촌형이다.[4] 정조는 심환지뿐만 아니라 남인의 영수 채제공에게도 어찰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5]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은 성균관대학교 출판부에서 정조 어찰첩이라는 이름으로 탈초해 번역하여 출판되었다. 1796년 8월 20일부터 1800년 6월 15일까지 보낸 어찰로서 총 6첩 297건에 달하는 분량이다. 심지어 이마저도 나머지 흩어져 있는 첩들의 합으로 따졌을 때 약 350첩이 넘는 양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