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인 체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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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바이오그래피
3. 디스코그래피
3.1. 정규앨범
3.2. EP
3.3. 라이브 앨범
3.4. 컴필레이션 앨범
3.5. 비디오 앨범
4. 미디어


1. 개요


4인조 시애틀출신 그런지/얼터너티브 메탈 밴드.
1987년 레인 스탤리(Layne Staley, 보컬), 제리 캔트렐(Jerry Cantrell, 기타/보컬), 마이크 스타(Mike Starr, 베이스), 션 키니(Sean Kinney, 드럼)의 4인조로 결성되었다.
너바나의 기념비적인 앨범 Nevermind와 함께 시작된 얼터너티브 록 붐을 주도해나간 시애틀 4대 밴드(너바나, 펄 잼, 사운드가든, 앨리스 인 체인스) 중 하나로, 너바나가 쓰리 코드 펑크 록에 기반한 단순하고 사이키델릭한 음악을 주로 했다면 펄 잼사운드가든은 70년대 하드 록과 유사한 복고풍 음악을, 앨리스 인 체인스는 블랙 새버스의 맥을 잇는 헤비 메탈 성향의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전성기의 곡들은 어둡고 가라앉은 분위기와 간결하지만 헤비하고 임팩트 강한 리프, 레인 스탤리 / 제리 캔트렐의 트윈 보컬이 만들어내는 기묘한 하모니[1]로 대표된다. 동료 밴드들과 달리 상당히 어두운 음악을 들려주었는데, 이들 특유의 다크함은 이후 얼터너티브 메탈 장르의 여러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 한국에서는 레이니 썬, 한음파, 언체인드가 이들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밴드.

2. 바이오그래피


원래 드러머였던 레인 스탤리가 보컬리스트가 된 건 1984년 결성된 시애틀의 로컬 글램 메탈 [2] 밴드 Sleze의 싱어 오디션에 합격하면서다. 이후 Sleze에 몇 차례 라인업 변화가 일어났고 Alice In Chains로 밴드 이름을 바꾸자는 예기가 오갔지만 여성 본디지 (female bondage)[3]에 관련되리란 염려 때문에 멤버들은 최종적으로 1986년에 Alice N' Chains라는 명칭을 택한다.
한편 Music Bank[4]라는 리허설 스튜디오(rehearsal studios)에서 레인 스탤리는 제리 캔트렐이라는 기타리스트를 만나게 되었고 둘은 룸메이트가 된다. 얼마 뒤인 1987년에 Alice N' Chains가 해체되고 레인 스탤리는 어느 한 펑크 (Funk) 밴드에 참여하게 되는데 그 밴드엔 기타리스트가 필요했다. 그래서 레인은 제리 캔트렐에게 사이드맨 (sideman)으로 참여할 수 있는지 물었는데 제리는 자기 밴드에 레인이 함께 한다는 조건으로 합의한다. (그 때 제리의 밴드에 속해 있던 드러머 션 키니와 베이시스트 마이클 스타가 바로 앨리스 인 체인스의 원년 멤버들이다.) 레인이 있던 Funk 밴드가 결국 끝을 보게 된 후 레인은 제리의 밴드에 풀타임으로 합세하여 공연을 다니게 된다. 이 때에는 Diamond Lie 등등 여러 이름(monikers)을 쓰다 결국에 예전 Sleze에서 장난삼아 오갔던 Alice In Chains라는 명칭이 선택된다.
그 해에 콘서트에 있었던 한 로컬 프로모터의 시선을 끌게 되어 데모 녹음 자금을 받게 되지만 녹음 바로 전날 앞서 언급된 바로 그 Music Bank 스튜디오가 경찰에 의해 한 동안 폐쇄된다. 왜냐면 대규모 대마 불시 단속(cannabis raid)이 있었기 때문. 그 뒤 밴드가 1988년에 완성시킨 데모 The Treehouse Tapes는 결과적으로 사운드가든의 매니저 Susan Silver와 Kelly Curtis에 의해 콜럼비아 레코드(Columbia Records)의 A&R 대표(representative) Nick Terzo에게 전해진다. 그리고 1989년에 당시 콜럼비아 레코드의 회장이었던 Don Ienner가 서명함으로써 앨리스 인 체인스는 콜럼비아 레코드 소속이 된다. 그 해에 밴드는 또다른 데모를 녹음하는데 Sweet Alice라는 부틀렉에 실려 있다. 들어보면 알겠지만 밴드의 음악은 데뷔 앨범 이전에는 라이트한 메탈 성향이었다.
1990년 8월에 발표된 첫 앨범 Facelift는 발매 직후에는 큰 반응이 없었으나 MTV를 통해 "Man in the Box" 뮤직비디오가 반복적으로 방송된 데 힘입어 판매량이 크게 늘어서 1990년 말에는 골드를 인증받게 된다. 그 해 12월 22일에 시애틀의 Moore Theatre에서 행한 라이브 실황은 정식으로 촬영되어 1991년에 Live Facelift라는 타이틀 아래 VHS로 발매된다. 한편 메가데스, 슬레이어스래쉬 메탈 밴드들이 주축이 된 Clash of the Titans라는 투어 (1990년 9월에 시작되어 너바나Smells Like Teen Spirit 싱글이 발매되기 약 2개월 전인 1991년 7월에 끝난다)의 두 번째 레그(leg)가 1991년 5월에 시작되면서 앤스랙스가 참여하게 되고 그 기간 동안 앨리스 인 체인스가 서포팅 밴드로 서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중들이 상당히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어쨌든 데뷔 앨범 발표 후 약 1년간의 투어를 마친 뒤에는 이미 너바나 센세이션이 한창이었고 11월에 다음 앨범을 위한 데모 녹음을 위해 스튜디오로 향했지만 어쿠스틱한 5곡을 녹음하는 데 그치게 된다. 당시에 드러머 션 키니는 "Sap이라 불리는 EP를 만드는 것"에 관한 꿈을 꾸게 되고 밴드는 그 동안의 거친 디스토션 사운드에 잠시 식상함을 느꼈던지라 일렉트릭 사운드보단 어쿠스틱 사운드가 주를 이룬 그 곡들을 공개하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1992년 2월Sap이 발표되고 2주 만에 골드를 기록한다. 그 해 1월너바나Nevermind가 차트 1위에 등극하기 때문에 그런지란 꼬리표가 앨리스 인 체인스에게도 붙게 된다. 그 후 앨리스 인 체인스는 3월에 스튜디오로 돌아가 약 2개월 동안 음악 성향을 시리어스하게 가다듬는다. 그 결과물로 1992년 9월에 2집 Dirt를 발표하게 된다. 이 앨범은 밴드 최고의 명반이자 그런지 음악계의 최대 명작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밴드 멤버들의 갖가지 약물 중독으로 인하여 밴드 상태는 완전히 엉망진창이 된다. 특히 베이시스트 마이크 스타는 마약중독 외에 행실도 막장이었는데 2집 투어가 시작된 직후, 비행기에서 절도죄로 구속되어 수감되는가 하면 1993년 오지 오스본과의 투어 중 제리 캔트렐의 약혼녀를 NTR하기까지 했다.(결국 제리가 분노하여 투어가 끝나자마자 밴드에서 해고당한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밴드는 오지 오스본과의 투어에서 오지 오스본 밴드의 베이시스트로 활동하고 있었던 마이크 아이네즈(Mike Inez)로 베이시스트를 교체한 뒤 가까스로 롤라팔루자(Lollapalooza)에 참여하여 밴드의 재기를 알리고 그와 함께 녹음한 곡인 What The Hell Have I와 A Little Bitter를 아놀드 슈워제네거 주연 영화 라스트 액션 히어로의 사운드트랙에 제공한다. 기나긴 세계 투어를 마친 밴드는 몇 개월 뒤 스튜디오로 돌아갔고 1994년 1월 25일에 두 번째 EP Jar of Flies를 발매한다. 해당 음반은 역사상 최초로 EP 레코드가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른 것이며 밴드에게도 처음으로 1위를 안겨준 레코드이다.
3집 Alice In Chains의 제작 과정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당시, 레인 스탤리는 헤로인 중독으로, 션 키니는 알코올 의존증으로 재활 치료 시설에 입원 중이었고, 제리 캔트렐은 코카인 중독에 시달리고 있었다. 앨범은 각 파트를 합주하면서 녹음한 것이 아나라 제리 캔트렐의 곡에 레인 스탤리의 보컬과 션 키니의 드러밍을 얹는 형식으로 제작되었고[5] 특히 밴드의 주작곡자이자 작사가인 제리 캔트렐은 음반의 거의 모든 작업을 도맡아하였다. 재활 치료 시설에서 나온 레인은 제리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독단적이라면서 불만을 나타냈고 이에 제리가 레인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가사의 대부분을 레인에게 맡기고 Jar of Flies의 프로듀서를 재고용해서 앨범의 작업을 마무리하였다.[6]. 세 번째 정규앨범인 Alice In Chains는 1995년 11월에 발표되었고, 한층 무겁고 어두워진 분위기가 듣는 이를 압도하는 이 앨범으로 빌보트 차트 1위를 차지하며 건재함을 입증한다.
하지만 앨범 발표 이후에도 레인의 건강 문제 등 여러 요인들로 인해 라이브를 하지 않다가[7] 1996년, MTV Unplugged에 출연하여 앨리스 인 체인스가 아직 건재함을 알렸다.[8] 하지만 그 공연 이후 몇몇 TV 쇼와 KISS의 공연에 오프닝으로 깜짝 출연한 것을 마지막으로 예전부터 헤로인크랙 등에 중독되어 있었던 보컬 레인 스탤리가 1997년, 결혼 몇 달 전 약혼녀가 헤로인 중독으로 사망하자 깊이 절망한 나머지 집에 틀어박혀 마약에 기대며 지내기 시작, 밴드는 활동을 완전히 멈추었다.
밴드의 활동이 사실상 중단되자 빡친 제리는 시애틀에서 LA로 이주하고 1998년 3월 솔로 앨범 Boggy Depot를 발표하였다. 그래도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인은 다시 밴드와 함께 스튜디오로 돌아가 새로운 곡인 Get Born Again과 Died의 녹음에 참여한다. 그렇지만 새 스튜디오 앨범은 완성되지 못하고 음반사와의 계약에 따라 컴필레이션 앨범들이 발매되기 시작한다. 1999년 6월에 베스트 앨범 성향의 Nothing Safe: Best of the Box가 10월에는 박스 세트인 Music Bank 그리고 2000년 12월에는 Live Facelift를 제외하면 첫 일렉트릭 라이브 앨범인 Live가 발매된다. 거기에 2001년 7월에는 Greatest Hits가 SACD 등의 포맷으로 발매된다. 한편 1998년부터 작업되어 온 제리의 곡들은 두 번째 솔로 앨범의 형태로 2002년 6월에 발표될 예정이었다. 그래도 2002년 3월에 제리는 여전히 AIC가 언젠가 다시 뭔가를 하게 되리라 믿는다는 코멘트를 했다고 한다.
2002년 4월 19일 보컬 레인 스탤리가 헤로인과 코카인의 혼합물 스피드볼의 과다복용으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그의 죽음은 사망 후 2주 정도가 지난 다음에야 레인이 2주 동안 저작권료를 찾지 않아 이를 이상히 여긴 회계사의 신고로 알려졌으며 시체는 부패가 진행 중이었다고 한다. 발견 당시 그는 쇼파에 누워있었으며 그의 주변에는 그림 작업을 위한 페인트 스프레이들이 널부러져있었고[9] 커피 테이블에는 코카인과 크랙 파이프 두 개가 놓여있었다고 한다. 사망 넉 달 전 레인은 생전 마지막이 된 인터뷰에서 '난 수년간 크랙과 헤로인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내 주변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나도 이런 식으로 내 인생을 끝내고 싶지 않다.'라면서 "185cm 키에 몸무게는 39kg 밖에 되지 않는데다가 이도 빠지고 피부색도 창백해졌으며, 간기능 장애 때문에 먹기만 하면 토하고 또 바지에 실수를 하기도 한다."며 헤로인의 금단증상에 대해 토로한 바 있다.
레인은 사망 하루 전에 AIC의 전 베이시스트이자 친구인 마이크 스타와 함께 있었는데, 이미 산송장이나 마찬가지였던 레인이 심하게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며 스타는 과거 레인이 자신을 약물 부작용에서 구해줬던 것처럼[10] 911을 부르겠다며 수화기를 들었으나 911을 부르면 절교하겠다면서 레인이 극구 만류, 결국 격한 다툼 끝에 끝내 레인의 고집을 꺾지 못한 스타는 911을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마이크 스타는 친구의 사망에 대하여 내내 자책하다가, 2011년 3월 8일에 44세의 시체로 발견된다. 마이크 스타는 헤로인 중독을 벗어나고자 2009년 VH1's Celebrity Rehab라는 중독치료 리얼리티쇼에 출연한 적도 있을 만큼 헤로인을 끊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결국 사인은 먼저 떠나간 친구 레인과 마찬가지로 헤로인 중독 때문이었다.
한편, 레인 스탤리의 사망 후 예정대로 2002년 6월이 되자 제리 캔트렐의 두 번째 솔로 앨범이 Degradation Trip이란 타이틀로 로드러너 레코드 (Roadrunner Records)를 통해 발매된다. 제리 캔트렐은 잠시 멈췄다가는 다시 활동하기 힘들 것이란 생각으로 단 한 번의 쇼도 취소하지 않고 투어를 해내는데 이 때 Comes with the Fall이란 밴드의 보컬리스트였던 윌리엄 듀발은 제리와 함께 무대에 설 기회를 얻게 된다.
몇 년이 흐르고... AIC의 기존 멤버들이 재결합하여 일본을 포함한 세계 각지에서 공연을 한 시기는 2005년에서 2008년까지인데 2004년에 일어났던 동남아 쓰나미 참사를 자선하는 콘서트가 그 시작이었다. 그 기간 동안 여러 거물급 밴드들의 멤버[11]들을 초대하여 공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2008년에 AIC는 2006년부터 함께 해왔던 윌리엄 듀발을 정식으로 보컬로 받아들여 재결성했으며, 2008년 10월부터 2009년 3월까지 스튜디오 작업을 하게 된다. 초기에는 윌리엄 듀발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레인 스탤리의 음색과 상당히 흡사한 그의 보컬 덕분에 논란은 빠르게 가라앉아갔다. 그리하여 2009년 9월에 Black Gives Way To Blue라는 새 앨범을 발표한다. 많은 팬들은 사망한 전 보컬인 레인 스탤리의 보컬을 여전히 그리워했지만, 애초부터 AIC의 작곡/작사의 핵인 기타리스트이자 서브 보컬리스트인 제리 캔트렐이 건재했기 때문에 밴드는 AIC 특유의 정체성을 유지한 신곡들을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4년 후에 나온 The Devil Put The Dinosaurs Here 역시 좋은 반응을 얻었다.
메탈리카는 후배라고 볼 수 있는 이들에게 오히려 영향을 받았다.[12] 메탈리카의 드러머 라스 울리히는 Dirt 앨범을 제일 좋아한다고 한다. 메탈리카의 보컬 제임스 헷필드는 Rock am Ring에서 보컬로 깜짝 등장하기도 하였다.영상[13]
2009년에 펄 잼이 새 앨범을 내고 2010년에는 사운드가든도 복귀. 60~70년대의 유명한 락 밴드들이 롤링 스톤즈를 제외하면 멤버간 불화와 약물 문제로 무너져내리고 한동안 또는 영원히 회복하지 못했던 것과는 달리, 90년대 초반을 지배하던 소위 시애틀 그런지 밴드들은 같은 문제를 겪고 나서도 20년이 채 지나기 전에 전부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할 수 있다. 커트 코베인이 떠나간 후 돌이킬 수 없었던, 너바나 대신 푸 파이터즈가 성공했던 건 논외로 하더라도.

3. 디스코그래피



3.1. 정규앨범


  • Facelift (1990년)
  • Dirt (1992년)
  • Alice In Chains (1995년)
  • Black Gives Way to Blue (2009년)
  • The Devil Put Dinosaurs Here (2013년)
  • Rainier Fog (2018년)

3.2. EP



3.3. 라이브 앨범



3.4. 컴필레이션 앨범



3.5. 비디오 앨범



4. 미디어



[1] 그러한 보컬 하모나이징 때문에 피치포크 미디어 등에 의해 그런지사이먼 앤 가펑클로 비유되었다.[2] 1980년대에 여장 메탈 밴드의 모습을 한 사진들을 떠올려 보자.[3] 체인이란 도구를 생각할 때 일본식이 아닌 서양식일 것이다.[4] Music Bank 박스 세트의 검은 덮개를 열어보면 알 수 있다.[5] 보컬 브렛 앤더슨과 기타 버나드 버틀러의 불화가 극심했던 Suede의 2번째 앨범 Dog Man Star도 버나드 버틀러가 작곡한 곡을 녹음해서 보내주면 다른 멤버들이 트랙을 얹고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6] 앨범의 프로듀서로 레인은 Jar of Flies의 프로듀서를 제리는 Dirt의 프로듀서를 원했다.[7] 당시 앨범 표지에 있는 개의 다리가 3개 뿐인 것 때문에 레인의 밴드 탈퇴설이나 사망설도 돌았다.[8] 레인이 중간에 "지난 3년 동안 한 공연 중에 진짜 제일 최고"라고 멘트를 하는데 션이 "우리가 그동안 한 공연이 딱 이거 하나야" 라고 한다.[9] 그는 음악 말고도 미술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 유명해서 밴드의 로고를 직접 디자인했고 1994년에는 개인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10] 1993년 너바나와 투어 중 마이크와 레인 그리고 커트 코베인 셋이 모여서 헤로인을 했는데 레인이 마이크에게 주사를 하자마자 쓰러졌고 레인이 빠르게 CPR로 대처를 해서 스타는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11] 건즈 앤 로지스더프 맥케이건, 하트의 앤 윌슨, 판테라의 필립 안젤모, 의 메이너드 제임스 키넌 등[12] 메탈리카의 얼터너티브 성향이 엿보이는 앨범들인 LoadReload가 바로 그 영향력의 산물.[13] Rock am Ring 2006에서 Would?를 부르는 제임스 헷필드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