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보병사단/사건사고
1. 개요
2. 1953년 폭설
4. 2005년 민간인 총기 탈취 사건
5. 2009년 간첩선 은폐사건
6. 2009년 민간인 월북 사건
7. 2010년 귀순자 완전작전
8. 2012년 북한군 노크 귀순 사건
9. 2014년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
11. 2017년 최전방 초소 경계근무 중 음주 사건
12. 2018년 귀순사건
15. 2020년 북한이탈주민 철책 훼손 귀순 사건
17. 기타
1. 개요
부대원 및 거동수상자가 철책선을 뚫고 월북하거나 북한군이 월남하는 사건이 '''다른 최전방 주둔부대에 비해 상당히 많다'''. 헌병대에서 내려오는 메일을 보면 22와 28사단 사건/사고 내용이 자주 들어가 있다. 한 마디로 이 두 사단의 경계와 작전수행에 문제가 있는 셈인데 특히 22사단은 동부전선에서도 최동쪽을 사수하는데다 해안경계까지 맡다 보니 아무래도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을 듯 하지만 휴전선을 사수하는 단일부대에서 이런 사건들의 빈도가 최근에 들어서 유독 높아진다는 점에서 문제가 더욱 심각하고 부대 입장에서도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괜히 22사단이 '''별들의 무덤'''이 아니다. 8군단장은 좌천이라는 소리까지 들었지만 2016년 이후 박한기 중장과 군단장 후임인 황인권 중장 두명이 연속으로 대장으로 진급하여 각각 합참의장, 제2작전사령관으로 재직중이다. 사실 8군단 예하중 사건사고 없는 부대는 제102기갑여단 하나이지만 대외적으로만 그럴뿐이지 내부적으로 사건 사고는 항상 있어 왔다. 민간으로 보도 되지 않을뿐. 또한 이 부대에 대한 대민신뢰도 역시 바닥을 치고있다. 오죽하면 군대에 아직 가지 않았거나 안간 사람들도 이 부대를 언급하면 '''아 거기 사건 사고 많은 곳으로 유명한데 아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2009년 24대 이양구 소장, 2010년 25대 조보근 소장, 2011~2012 26대 조성직 소장, 2012~2014 27대 서상국 소장 중에서 유일하게 중장으로 진급한 사람은 조보근 소장이다. 그러나 2014~2016 28대 최병혁 소장, 2016~2018 29대 김정수 소장은 모두 임기를 무사히 마치고 중장 진급에 성공했으며 최병혁 사단장은 대장진급에도 성공하여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역임 후 전역하였다. 김종대 군사평론가의 저서 서해전쟁과 위기의 장군들에 의하면 이양구 소장의 경우 민간인 월북사건 좌천되었는데, 여기에 노무현 정부 사람이라며 더 이상 등용하지 않았다고 하며, 결국 2012년 10월에 예편하였다. 조성직 소장의 경우 12년도 10월경에 벌어진 북한군 귀순사건으로 인해 사단장에서 물러났으나 그나마 국군사이버사령관을 역임하였고, 더 이상의 진급은 못한 채 2015년 12월에 전역하였다. 서상국 소장의 경우 2014년 육군훈련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2016년 12월 육군교육사령부로 자리를 옮겼다. 서상국 소장 후임인 28대 최병혁(육사 41기) 소장이 사단장으로 취임한 이후 일단 뉴스에는 나오지 않고있다. 최병혁 소장은 사단장 역임 이후 육군본부 감찰실장으로 영전했으며 2017년 10월 중장진급에 성공해서 6사단 총기사고를 수습해야 하는 5군단장을 역임하고[1] 2018년 11월 육군참모차장으로 영전했으며 2019년 4월 대장진급에 성공해서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취임했으며 1년 5개월 후인 2020년 9월 인사에서 전역하였다. 후임으로 29대 김정수(육사 43기) 소장이 2016년 5월에 취임했다. 김정수 소장이 '''알자회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고 알려졌으나 육사동기 동명이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밑에 언급되어 있는 일병투신자살사고[2] 가 일어났다. 그러나 김정수 소장은 사단장 역임 후 육군본부 정보작전참모부장을 거쳐 2018년 11월 중장진급에 성공해서 특수전사령관으로 재직중이다. 그리고 다른 1군사령부 예하 군단들은 고참 사단장들이 2017년 8월 기준으로 군단장 직무대리를 맡고 있으나 8군단 만큼은 22사단때문에 박종진 신임 1군사령관이 직접 챙길 정도이다. 2018년 5월 권영호(육사 45기) 소장이 사단장에 취임했는데, 2017년 청와대 위기관리센터장 재직 당시 세월호 관련 문건을 규정에 따라 파쇄하지 않고 무단으로 폐기한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았으나 사단장 임기는 무사히 마치고 지상작전사령부 작전참모부장으로 이동하였다.
육군 법무실 자료에 따르면 2010년 이후의 경계소홀로 인한 징계 20건 중 16건이 22사단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병사들의 탈영 및 자살 사건도 알게 모르게 많이 일어나는 사단이기도 하다.
2. 1953년 폭설
1990년대에 군복무를 했던 한 전직 중대장의 말에 따르면 1953년 12월 300cm(...)에 달하는 폭설이 쏟아져 한 중대 전체가 '''전멸'''(...)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후 폭설시 지원이 빵빵해졌다고...
3. 1984년 조준희 일병 총기난사 및 월북 사건
1984년 6월 26일 오전 10-11시경 강원도 건봉산 까치봉에 있는 22사단 56연대 4대대 TOC상황실에서 522GP로부터 아비규환의 전화보고 소리와 수류탄 폭음이 들리며 사건이 알려진다. 초기접보시에는 북측의 강습으로 판단했으나, 해당 GP 소속 상황병인 조준희 일병이 내무반에 수류탄을 투척하고 M-16 총기를 난사한 뒤 '''휴전선을 넘어 월북'''한 것이었으며 사건 바로 다음 날 조 일병의 대남월북권유 방송을 통해 조 일병의 월북 사실이 공식 확인되었다.
이 사고로 내무반에서 잠자던 사병들이 수류탄 파편과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지거나 부상을 입었으며 특히 북으로 도주하던 조 일병을 뒤쫓던 13전초중대 수색대원들도 발목 지뢰를 밟거나 신병의 오발사고로 인해 현장에서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고도 추가로 발생했다. 이 사고와 관련하여 모두 '''15명이 사망하고 11명이 부상을 입었다'''. 해당 GP 신임 소대장 소위는 몸을 숨기고 있다가 살아남았으며 이 사건으로 당시 사단장 장기하 소장, 연대장, 대대장 곽근용 중령 모두 보직해임/전역 조치되었다.
최전방 부대로 강제 배치된 조준희 일병의 범행 및 월북 동기는 여러가지로 조사되었지만 대한민국 제5공화국 출범기였던 1984년 당시의 정치상황과 연계된 자생 공산주의자라는 설과 군대 내의 폭력 문화의 비극이란 설 두 가지로 압축되었다. 강제입대한 상황인데다 월북 직전에 휴가 때 여자친구와 이별하는 등의 행동을 볼 때 전자가 범행동기로 강력히 대두되었으나 조 일병의 대남 방송 내용에 따르면 군대 내 폭력이 원인인데 자신이 대학교를 다니다 입대한 것을 가지고서 선임병들이 데모하다 끌려왔냐는 식으로 비아냥대며 괴롭히고 폭력을 행사한 것이라고 한다. 대한민국 제5공화국 당시에는 대학 교수의 승인하에 운동권 대학생을 강제 입대시키는 지도휴학 제도가 있었다. 국군보안사령부가 학생운동을 와해시키기 위해서 주도한 일명 녹화사업으로 이는 역사 드라마 제5공화국 이나 삼김시대에서도 묘사된다.
사건의 규모나 파급효과는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국군 창설 이래 최악의 총기사고'''로 기록될 정도로 상당히 심각했다고 볼 수 있지만 5공 정권하에서 보도가 통제되는 바람에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고 일반 군 사고로 처리되어 피해자들은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한편 동료를 사살하고 월북했던 조 일병은 월북 이후 '''매일 밤 대남방송을 통해 월북을 권유'''하는 방송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22사단 부대원들은 매일 저녁 전방 경계근무를 설 때마다 조 일병의 대남방송을 들으며 치를 떨어야 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북한 방송에 종종 나온다고 한다.
4. 2005년 민간인 총기 탈취 사건
2005년 12월7일 밤 12시경 22사단의 전방관측소(GOP) 대대(3대대)에서 탄약고가 민간인에게 털린 사건. #
사건을 일으킨 민간인이라는 것도 2004년 전방 GOP에 근무하던 자들로써 예비역 중사와 병장. 사건 당시 자대배치를 받은지 한달도 안된 상황병에게 사단고위간부라 사칭하며 탄약고 근무 배치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듣고는 범행을 실행으로 옮긴다. 탈취했던 물품은 K2 소총 2정과 실탄 700여발, 수류탄 6발 등으로 전남 여수의 한 은행을 털려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을 했다. 혹여나 범행발각시에는 소지했던 수류탄들을 그 자리에서 터뜨렸을거라 했을 땐 정말 불행 중 다행이 아닐지도...
이 사건으로 GOP 본부중대 인원들은 약 한달간 진술서 작성 및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헌병들에게 감시당해야 했고, 심지어 잃어버린 총기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 푸세식 화장실에 들어가 똥도 퍼야했다. 당연히 기존 탄약고 철거 작업도 이루어지고 여튼 이 사건은 중앙 뉴스에 기삿거리로 실리는 나머지 당시 사단장은 진급 불가에 연대장 이하 영관급 간부들은 옷을 벗어야 했다.더욱이 당시 55연대 연대장은 사단쪽 발령을 1개월여 나두고 이 사건이 벌어져 씁쓸함이 더 하다라 전해진다더라. 하늘의 별 따기가 괜히 생긴게 아니다!
5. 2009년 간첩선 은폐사건
2009년에 발생했다는 사건. 그동안 22사단 예비역들 사이에서 도시전설 비슷하게 흐르던 이야기로 어느 날 아침 철책선에 간첩선으로 의심되는 배가 뒤늦게 발견되자 대대장이 이로인해 징계받을까 부대원들을 사사로이 동원해 이를 부숴서 파묻어 버린 사건이 있었다는 이야기.
노크 귀순 사건 이후로 JTBC 다큐로드-무너진 철책선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예비역들이 증언한 장소(군사분계선 안)에 수사의뢰를 하자 실제로 낡은 배의 파편이 나왔다고 한다. 이런 상황임에도 22사단은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별 명확한 근거도 없이 일단 이건 간첩선이 아니라고 했다. '''수상한 배가 아니라면 왜 묻었는데?''' 무엇보다 설령 이게 간첩선이 아니더라도 규정상 이걸 상부에 보고할 책임이 있던 대대장을 비롯한 이 일에 관련된 책임자들의 문책에 관해서는 한 마디 말도 없었다.
6. 2009년 민간인 월북 사건
2009년 10월 민간인 강동림(30세)이 22사단 지역 철책을 자르고 월북한 사건. #
거동수상자가 몰래 철책을 자르고 월북한 일은 2004년 10월 철원 이후로 2번째다. 황당한 일은 북한이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방송할 때까지 '''철책에 구멍이 난 줄도 몰랐다.''' 참고로 범인은 22사단에서 근무했었다. 폭행 전과로 수배중이었으며 검거를 피해 월북한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사단이 무너지고 국방부가 뒤집히는 사태가 발생했다. 해당 초병들은 징계받았으며 해당 소초는 공중분해되고 FEBA에서 지원자를 받아 새 소초를 꾸렸다. 여담이지만 월북 흔적은 먼저 발견한 것이 아니라 북한에서 월북자가 왔다고 광고하는 것을 본 국방부에서 철책 정밀점검 지시를 내렸고 그 결과 절단 흔적이 발견되었다. 때문에 최초발견자는 발견 직후 포상휴가 갈 수 있겠다고 좋아했지만 현실은 징계. 어쨌든 일주일 뒤에 잡혀있었던 연대RCT는 취소되고 그 위로 소초장,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 사단장까지 줄줄이 보직해임되었다. 이후로 사단이 전반적으로 빡세졌다.
후일담으로 대남방송 나오고 철책 정밀검사로 뚫린 곳이 발견되었을때 당시 8군단장이 헬기타고 급하게 와서 "아... 뚫렸구나..."라고 희대의 명언을 남겼다.
사건 당시 55연대 및 56연대 병력 대부분이 훈련은 죄다 때려치고 전방 철책 보수, 시야확보를 위한 불모지 작업을 하러 11월~12월에 9XX고지 언 땅에 텐트를 치고 혹사당하며 굴려졌다.(월북사고가 발생한 지점은 56연대 관할로, 내륙 8소초~10소초 구간이다. 9초소는 없다.) 심지어 전역이나 말출을 앞둔 말년 병장들도 내내 작업하다가 전날 FEBA로 내려온 뒤에 다음날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55연대, 56연대 2008년 4월에서 2009년 군번 출신자들의 전투복들과 활동복엔 흰 페인트가 여기저기 묻어있다는 전설이 있다.
위 후일담을 보다 정확하게 보충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해당 순찰섹터를 담당하고 있던 대대병력이 통째로 갈려나감에 따라 FEBA로 철수했던 대대의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10월 한 달간 순찰에 투입했는데, 같은 시기 이미 보수공사에 투입되어있던 병력[3] 이 있었다. 문제는 이 보수공사라는 것이 순찰로를 완전히 갈아내고 새로 건설하는 수준이었는데, 이때가 공사 초기였으므로 계단이고 뭐고 다 부숴놓은 상태였다는 점. 따라서 순찰병력들은 원래 계단이 2백개쯤 있었던 경사를 계단도 없이 오르락내리락 해야했고, 해당 지역의 토질은 비만 오면 진창이 될 만큼 좋지 않았다. 즉 오르다 미끄러지고 내리다 구르기를 반복해야 했으며 이로 인해 장비 손실이나 부상을 경험한 장병이 많다. 거기에 순찰을 강화한다며 본래 2회였던 야간경계근무를 전반야, 중반야, 후반야 3회로 늘리면서 병사들의 부담이 가중되었고, 하루가 멀다하고 현장에 찾아오는 장성들을 맞이하기 위해[4] 자는 병사들을 깨워서 작업시켰으므로 일부 병사들의 수면시간은 일 3시간까지 줄어들었다.
한 달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대체경계에 투입되었던 이 병력은 이후 치를 떨면서 FEBA로 철수했는데, 1주 후 이번에는 철책 및 순찰로 보수공사에 부대 전체가 투입되어 다시 올라가게 되었다. 11월에서 1월 초까지이며, 해당섹터는 해발 500미터 안팎의 고도로서 이미 땅이 단단하게 얼어있었으므로 길을 만들 때는 먼저 언 땅을 곡괭이로 부숴야하는 악조건이었다. 당시 체감온도는 영하 40도 이하로 내려갈 때가 많았는데, 이 추위에 대한 현장의 대처란게 면장갑을 두 겹으로 끼는 것이었다.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그 면장갑이 맞다. 여기에 보급로조차 포장이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차량에 의한 추진은 한계가 있었고 따라서 중간부터는 벽돌이나 기타 자재를 병사들이 인력으로 수송했다. 이 작업이 얼마나 고되었는지 무릎연골이 닳아 의병제대 판정을 받은 병사까지 있었다. 해당 병사가 체중이 많은 편이라 산악지대에서의 작업에 무리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인간적으로 지나치게 가혹한 작업량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설상가상으로 보수공사병력과 순찰병력이 동숙을 하면서 40명 정원의 막사[5] 에 200명 이상이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추운 계절에 난방도 되지 않는 바닥에서 칼잠을 자야했던 것은 둘째치고, 생활용수가 극도로 부족했다. GOP 근무 경험자들은 알겠지만 전방의 군사시설들은 상수도로 물을 공급받는 게 아니라 지하수와 저수조로 자체조달한다. 적정인원보다 엄청난 숫자가 투입되면서 위생용수는 커녕 식용수도 부족해진 것. 거기에 공사작업은 아침식사를 하기도 전, 새벽 5시부터 저녁식사 이후 추가작업을 통해 오후 9시까지 진행될 때도 있었다. 병사들은 그야말로 극한상황에서 굴려진 셈. 작업 잘한다는 포병연대 병사들까지 파견 나와서 철책 보수 작업에 투입되었다. GP파견되는 관측병 이외에는 철책선 근처에도 갈 일이 없었던 포병들이 난데없이 날벼락을 맞고 투입되어 돌을 나를 때마다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는 슬픈 일화가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병사들의 고난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공사 완료 후 일단 FEBA로 철수했으나 이번에는 제설작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군인이 눈 치우는게 뭐가 이상하냐는 생각이 들겠지만, 이 제설작업은 GOP 보급로와 순찰로를 포함하는 제설작업이었다. 당시 상부의 지시는 이랬다. "경계력을 강화하려면 경계병력은 경계만 해야한다. 그러니 FEBA 대대들이 GOP 대대가 해야 할 제설작업까지 소화할 것." 이것만 해도 악조건인데, 이 때의 FEBA 대대들은 병력도 부족했다. 일부 보병중대의 경우 110명 정원이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가용인원이 50명 아래로 내려갈 때가 있었던것. 50% 이하의 가용자원으로 두 배 이상 불어난 작업을 수행해야했던 당시 FEBA 대대들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며, 이는 경계력 강화를 위해 GOP 대대의 병력을 120%까지 충원한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FEBA 대대에 신병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한 중대는 중대 전체에 이등병이 없었고, 일부 소대는 꺾인 상병이 막내였을 정도. 더불어 이 해는 강원도에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던 때다. 하루에 4~50센티미터는 기본, 1미터의 강설량을 기록한 날도 있다.[6] 이로 인해 야간 경계근무 외에 야간 제설근무라는 것이 추가되어 하룻밤에 두 번의 근무를 서는 경우까지 발생했다. 한편 GOP 제설작전에 투입된 병사들은 현장에서 동숙을 하거나 텐트를 치고 자면서 며칠 단위로 교체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6개월에 걸쳐 그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시험당한 셈이다.
자랑스럽게 떠벌린 경계력 보강공사의 결과가 결국 이런 식으로 병사들을 가혹하게 몰아붙인 결과물이었다. 단지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지만, 이후로도 22사단에서 빈발하는 사건사고들을 보면 지휘부가 생각하는 현장과 병사들이 경험하는 현장에 심각한 차이가 있음은 분명하다.
또 이 사건으로 인해 일부 22사단 인원들의 경우 휴가 나가서 군 복무중인 친구들에게 욕을 먹기도 했다. 니네 사단 때문에 전방부대 모두가 힘들다는 이야기를 술자리 내내 들어야만 했다고 한다.
추가하여 당시 08군번 전역자의 경험으로 말하자면 등산과 제설작업을 같이한 것이다. FEBA 병력은 고강도 작업에 고통스러워 했다. 당시 쩔령(통신병: 중대장부사수)은 99K와 K-1 소총을 들고 1미터 가까이 되는 눈속을 급경사 보급로를 뚫고 가야했다. 또한 포차(밥차)가 올라올수 없는 상황이여서 근무말번(05시 부터 06시)이 미리 주먹밥을 수령받아 미리 점심밥을 개인불출 했었고 점심시간에는 작업이 너무고돼서 그자리에서 퍼질러앉아서 식사를 했다.
7. 2010년 귀순자 완전작전
2010년 3월 북한군 1명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귀순의사를 밝히자 통문으로 인도해 신병을 확보하고 추격해온 북한군과 교전을 벌여 격퇴한 사건.
사실 그렇게 엄청난 사건은 아니지만 얼마 전에 벌어진 위 사건 때문에 떨어진 사단 사기를 올리기 위해 대대적으로 선전했다.[7] 사단장이 신병 교육대를 방문하여 이 사건을 가지고 훈시를 몇 번 하였다. 귀순자 유도와 추격조를 격퇴한 일을 FM대로 했다고 자랑스럽게 선전하였으나 실상은 상당히 다르다.
타부대의 경우는 별다른 영향이 없었는데, 주구장창 인트라넷에서 홍보하긴 했었다. 애초에 이런 자기네 사단에서만 XX 완전작전하면서 홍보하는 거 사단마다 다 있다.
실제 작전 참여자의 증언과 그 밖의 증언에 따르면 군에서의 홍보와 실제상황은 상당히 달랐다. 만일 1년전 민간인 월북사건이 없었다면 유공보다 징계가 더 많았을 것이나 부대 이미지 개선이 필요했기 때문에 포상위주로 이루어졌다. 귀순자 유도는 초병들의 발견으로부터 해서 잘 이루어졌다고 홍보됐으나 사실 GP통문 앞까지 다 와서 발견해서 데리고 들어갔다고 한다. 뒤늦게 북한에서 귀순자를 잡기 위해 추격조를 보내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500m 넘게 접근했다. 조명탄까지 하늘에 쏘며 추격조를 사살하기 위해 K6 중기관총 수백 발을 쐈으나 사살에 실패했다.[8]
8. 2012년 북한군 노크 귀순 사건
바로 위 작전(2010년 귀순자 완전작전)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린 사건.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로.
9. 2014년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
2014년 6월 21일 오후 8시 15분 경 강원도 고성군에 위치한 대한민국 육군 제22보병사단 GOP에서 발생한 군무이탈 및 총기난사 사건. 지금까지 비슷한 류의 총기난사 사건은 많이 발생하였으나 전역이 가까운 병장에 의한 총기난사 사건은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일명 임병장 사건.
10. 2017년 고필주 일병 투신자살 사건
22사단 육군 일병 자살..선임병으로부터 구타, 가혹행위
YTN 취재 동영상
군인권센터는 2017년 7월 20일 오후 서울 마포구 이한열기념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 7월19일 육군 22사단에서 선임병으로부터 구타, 가혹행위를 당해온 고필주 일병(21)[9] 이 국군수도병원 외래진료 중 투신해서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센터는 올해 4월 강원도 고성의 제22사단으로 전입한 K일병이 병장 1명과 상병 2명 등 선임병 3명의 폭언, 욕설, 폭행에 시달렸다고 주장했으며 훈련 중 부상으로 앞니가 빠진 상태였는데 이를 두고 선임병들이 '''강냉이 하나 더 뽑히고 싶으냐''' 등 폭언을 일삼았다는 것이 센터 측 설명이다. 멱살을 잡히거나 욕설을 듣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런 내용을 자신의 휴대용 수첩에 기록했으며, 유족들이 유품 확인 과정에서 발견했다고 한다. 또 K일병의 지갑 속 메모에는 '''엄마 미안해. 앞으로 살면서 무엇 하나 이겨낼 자신이 없어. 매일 눈을 뜨는데 괴롭고 매 순간 모든 게 끝나길 바랄 뿐이야. 편히 쉬고 싶어'''라는 글이 적혀 있었으며 K일병은 치아 진료를 받으러 병원에 갔으며 인솔자는 없었다고 한다. 부대 동료와 함께 동료 아버지의 차를 타고 병원으로 이동했다.
센터는 "K일병은 지난 14일 부대 내 고충 상담에서 선임병으로부터 구타와 가혹 행위를 당했다는 사실을 이미 보고한 상태였다"며 "이후 '배려병사'로 지정돼 GOP 투입 근무에서 배제됐으나 가해 병사들과 분리되지는 않았다. 배려병사로 지정해두고도 인솔 간부 하나 없이 내보내 직무를 유기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7월 21일 오전, 육군 참모차장실에서 ‘현안 업무 점검 회의’를 개최했는데, 그 회의 내용이 “언론 및 SNS 동향을 파악한 결과 해당 사건이 육군의 이미지 등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란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며 “회의 내용 역시 언론 동향 파악 및 대응, 유가족 통제에 관한 것으로 센터 측의 폭로를 사전에 막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을 주로 담고 있었다”고 밝혔다.
특히 회의를 주재한 정연봉 육군참모차장은 이 자리에서 △사전에 이슈화 될 소지가 다분했음에도 언론 동향을 확인하지 않고 선제 대응하지 못한 점은 잘못이다 △공보 대응 측면 문제가 없었는지 확인하고 유가족 관리 철저히 해야 한다 등의 사항을 강조했다는 게 군인권센터 측 주장이다. 즉, 군 간부들은 이 사건에 대한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저 사건을 덮기에만 급급했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유례없는 고함소리를 지를 정도로 대노했고, 거기다 박찬주 대장 부부 갑질 사건이 겹치는 바람에 아예 알자회를 수면위로 가장 먼저 꺼낸 육사 39기 중 한명인 김용우 합참전력기획본부장을 신임 육참총장으로 파격 진급발령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용우 대장 취임식 직후 총장보다 1년 선배인 정연봉 차장은 동기들과 함께 휴가를 냈고, 결국 9월 중장급 인사 때 구홍모 중장에게 이임한 후 전역하였다.
7월 24일, 고필주 일병이 재학 중이던 홍익대에서는 ‘추모 및 군 내 가혹 행위 진상규명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철저한 조사와 함께 책임자 처벌을 촉구했다. 홍익대 총학생회는 “22사단과 국방부는 가해자를 즉각 구속해 엄벌하고 명백히 진상을 밝혀야 할 것”이라며 “(사단장)김정수 소장 등 책임자들을 파면하고 고인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순직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9월 10일 YTN 뉴스 신문고에서도 다뤘는데, 수첩 안에 들어있던 메모 유언장은 '''군에서 증거품이라며 부모에게 전달을 거부했고, 사진 촬영이나 복사라도 하게 해달라고 했지만 이것도 거부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언론에는 버젓이 공개된 것. 고 일병의 부모는 어떻게 언론에 흘러들어간 것이냐고 군에 항의했지만 모른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해당 프로그램에서 고 일병의 아버지는 '''부모인 우리가 유서 내용을 모르는데[10] 전국민은 알고 있다. 이게 말이 되느냐.'''라고 분노를 터뜨렸다.
이후에 고필주 일병 자살건에 대해 순직 처리가 결정되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1. 2017년 최전방 초소 경계근무 중 음주 사건
이제는 군기 문란 사건까지 터졌다. # MBN의 단독보도에 따르면 2017년 12월 강원도 고성군에 있는 최전방 초소에서 22사단 소속 병사 7명이 주변 상점에서 산 소주와 맥주를 몰래 반입해 초소에서 경계 근무 중 술파티를 했다고 한다. 정말 간이 큰 건 이 짓을 많게는 5번 정도 했다고 한다. 심지어 최전방에선 경계근무 중이었으니 실탄과 수류탄을 소지하고 있었을텐데 자칫 잘못했으면 술 김에 뭔 짓을 했을지... 심지어 진짜 무슨 생각이었는지 음주중인 장면을 무단 반입한 휴대폰으로 인증샷까지 찍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덕분에 휴대폰을 검열하는 과정에서 뒤늦게나마 제대로 걸렸다.
그 후 지난달에 헌병대가 사건을 넘겨받아 군 검찰에서 술파티를 벌인 7명을 군 형법 위반 혐의로 수사 중에 있고 해당 초소 간부들에게는 육군 측에서 서면 경고 등 경징계만 때렸다.
12. 2018년 귀순사건
22사단 역사상 그나마 좋았던 사건이다. # 2018년 12월 01일 북한군 병사 1명이 GP를 지나 GOP로 넘어 오던 중 식별되어 완전 작전을 펼쳤다. 완전 작전의 결과로 최초식별자였던 심우재 상병은 제1야전군사령관으로 부터 44박45일을 포상으로 받았었다고 한다.
13. 2019년 고성-속초 산불
산불로 인해 보급수송대대, 정비대대, 의무근무대 주둔지에 화재가 일어났다. 애당초 고성과 속초 일대를 제대로 휘저어 버린 초대형 산불인 만큼 이들 주둔지에도 불이 옮겨 붙는 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14. 2020년 5월 고성 산불
2020년 5월 고성 산불이 발생하여 현재 사단 사령부와 신병교육대, 전차대대 등 직할부대 장병 95%인 1800여명은 인근 운동장으로 대피하였으며, 부대에는 부대 내 탄약고 등으로 불이 번지지 않도록 주요 지휘관과 간부들만 남아 살수 작업을 하면서 탄약고를 지켜냈다. 관련기사
15. 2020년 북한이탈주민 철책 훼손 귀순 사건
2020년 11월 4일에 발표되었다. 2020년 11월 3일 오후 7시 26분에 월남 추정, 제22보병사단 경계구역의 철책이 뚫리고 감지 장치에 사람이 발견 되어 진돗개 둘 경보가 내려진다. 4일 오전 9시 50분 신병을 확보하였다.# '''문제가 되는 점은 GP가 아닌 GOP(남방한계선)를 한참 지나서 민통선 내에서 신병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16. 2021년 동해 민통선 무단침입 사건
2021년 2월 16일 22사단 관할 민간인 출입금지 지역의 해안가에서 신원미상자 발견, 합참은 조사 중으로 발표함.#
17. 기타
17.1. 서상국 사단장
서상국 사단장[11] 이 브라이트캠프와 그린캠프를 진급을 위해 여러차례 강제 폐쇄를 시도했고, 결국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으며 심지어 자살까지 하는 병사들이 늘어났다. 예를 들어 2012년 13소초(공현진 중대)의 문이병 자살사건은 대대장 보직해임, 소대장 전출 등으로 처리되었다. 당시 사단장의 횡령과 부도덕적인 행패로 인해 조용히 죽음을 맞이해 군사기밀만으로 남게 되는 사병들이 많았다. 그 결과 상술한 임병장 총기난사 사건으로 인해 서상국 사단장은 보직해임을 당하게 되며 육군훈련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교육사 예하 소장 직위를 역임 후 예편하였다.
17.2. 끊임없이 일어나는 자살사고
여기에 적힌 자살사고는 22사단의 수많은 자살사고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 2014년 7월 27일, 후방 근무요원이던 신 모 일병이 화장실에서 신발끈으로 목을 매 자살했다. 부대원들이 상황 근무에 나오지 않는 것을 깨닫고 수색에 나서 찾아내 병원에 후송했으나 결국 27일 오후 5시 18분 숨졌다.#
- 2017년 1월 26일, 형 모 일병이 부대 내 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살하였다. 해당 사건은 포상 휴가 복귀 당일 일어났으며 얼굴 여러 곳에 상처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폭행과 가혹행위가 의심되고 있다. 그러나 가해자 6명중 2명만이 만창 나머지는 영창 10일 휴가제한 정도의 징계로 끝났다.
- 2019년 7월 16일, 고 모 상병이 폐막사 화장실에서 목을 매 자살하였다. 점호시간에 나타나지 않아 찾아보았지만 이미 사망한 후였다. 사인은 목을 매달아 떨어지며 목뼈가 부러진 것이었다.
17.3. 의료권 침해
22사단에 근무한 한 병사가 2014년 2월 어지럼증을 호소한 뒤 5개월이 지나고서야 뇌종양 판정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2012년 22사단 독립중대에 근무한 한 병사가 사단 의무대에서 나오는 진료 때[13] 기도가 찢어진 것이 발견되어 국군수도병원으로 긴급 후송된 일이 있었다. 이 병사가 고통을 호소한 지 몇 달이 지나서 기도가 찢어졌다는 것이 발견되었다는데 문제가 있다. 해당 부대에서 전역한 서모 병장은 상병 초기 당시 해당 중대 연병장에서 축구를 하다가 손가락을 밟혔다. 고통이 지속되어 수 차례 군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갔지만 이상이 없다는 말만 들었고 전역 한 달 전 포상 휴가를 가서 민간 의료시설에서 해당 손가락 인대가 끊어졌다는 진단을 받고 남은 포상휴가들과 말년휴가를 붙여서 민간 병원에서 수술받고 말년 휴가 1일 만을 남기고 복귀했다. 물론 수술은 실패.... 손목 인대를 붙여서 수술했는데 손가락을 굽히는 것이 불가능했다. 해당 병사의 전공은 방사선과이었고 지금도 손가락을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지 모른다.
[1] 취임 전날 사고가 일어났다.[2] 고필주 일병의 고충(폭행피해)을 제대로 조치도 하지 않았고(최소한의 조치가 부대소속 변경이다. 즉 가해병사들과 여전히 같은 소속으로 놔뒀다는얘기다.) 해당 고충은 군단장에게도 보고는 필수였음(형사처벌이 필요한 사안이기 때문이다.)에도 현재 합참의장이자 당시 군단장이었던 박한기에게 보고가 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즉 구타가혹행위를 전혀 용납하지 않는 박한기 대장의 특성상 후폭풍이 그저 두려워서 보고를 안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소리다.[3] 순찰병력보다 훨씬 더 많았다.[4] 거의 매일 같이 찾아왔다.[5] GOP는 소대별로 초소를 사용한다.[6] 해발고도가 높은 산악지대의 기후라는 점을 다시 상기해보자. 직경 30센티가 넘는 나무가 위에 쌓인 눈의 무게를 못이겨 부러질 정도의 강설량이다. 당시 3대대가 주둔하던 막사에서도 이렇게 부러진 나무가 있었다.[7] 선전했다는 게 내부적으로 잘 평가했다는 것이지 동네방네 소문 내고 다녔다는 뜻이 아니다. 당장 이 글을 보는 위키러들도 이런 사건이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태반일 것이다. 검색해도 (위 사건이나 아래 사건에 비해) 변변한 기사 하나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8] 왜 K1 기관단총이나 K2 소총 같은 개인화기나 다른 공용화기로 쏘지 않았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왠만큼 근접하지 않는 이상 GP에서 개인화기로 적을 쏘지는 않는다. 또한 나머지 공용화기는 K6가 적을 공격하는 동안 다른 적들을 막기 위해 항상 북한 진지를 조준하고 대기하여야 한다. 추격조가 물러가고 사건은 마무리가 되었다. 후일담으로 기무사에서 조사과정 중에 넘어온 북한 병사에게 라면 4개를 끓여주었는데 앉은 자리에서 국물까지 싹싹비웠다고 한다.[9] 유가족들의 허가 후, 홍익대학교 총학생회 페이스북 글에서 가장 먼저 실명이 공개되었다.[10] 충격 때문에 '엄마 미안해.'라는 문장 말고는 기억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11] 육사40기, 육사 생도대장-제3야전군사령부 작전처장 역임[12] 신병훈련소에서도 시키는 부대가 있다.[13] 독립중대는 파견온 의무병 한 명이 전부이고, 독립중대는 배치된 차량 없이 파견온 차량과 운전병만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진료 받고 싶어도 진료를 못받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