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로동당 제7차대회

 



<colbgcolor=#c60c30><colcolor=#ffffff> '''조선로동당 제7차대회'''
'''개막예고'''
2015년 10월 30일
'''개막'''
2016년 5월 6일
'''폐막'''
2016년 5월 9일
'''장소'''
4.25문화회관 (평양직할시 모란봉구역)
'''의결내용'''
당내 주요 기관 사업총화
조선로동당 규약 개정
사회주의 기업 책임 관리제 공식 선포
조선로동당 위원장 추대
당내 주요 기관 선거
1. 개요
2. 조선로동당 대회란?
3. 경과
3.1. 당대회 개최 이전
3.2. 개최 예고
3.3. 당대회 개최 직전
3.4. 5월 6일
3.5. 5월 7일
3.6. 5월 8일
3.7. 5월 9일
3.8. 5월 10일
4. 참여 인원
4.1. 세부 인원
5. 예산
6. 기념품
7. 관련 문서


1. 개요


2016년 5월 6일부터 개막되어 5월 9일 폐막한 북한 조선로동당당대회다. 개최 장소는 평양직할시 모란봉구역에 위치한 4.25문화회관(구 2.8문화회관)이다. 김일성 사후 처음 열린 당대회다.

2. 조선로동당 대회란?


조선로동당의 당대회라는 이름만 보았을 때는 그냥 대한민국에서도 흔하게 하는 각 당의 전당대회를 떠올리기 쉽지만 '''북한은 일당제 국가'''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더욱이 (명목적이지만) 사회주의 국가이므로 당이 국가보다 상위적 위치에 있다.[1] 따라서 북한의 경우 국가의 헌법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보다 당헌인 <조선로동당규약>이 더 우선시되며[2], 조선인민군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의 군대가 아닌 '조선로동당'이라는 당의 군대다. 북한에서는 '''당≥국가'''인 것이다. 따라서 조선로동당의 당대회는 당의 사업 결정, 당의 강령 및 규약 제정, 당의 노선과 정책ㆍ전략ㆍ전술에 있어 기본 문제 토의 결정, 당 총비서 추대 등을 진행하는 '''남한대통령 선거국회의원 선거 정도의 동급인 행사'''이다.

3. 경과



3.1. 당대회 개최 이전


사실 당 규약상 당대회는 5년에 1회씩 소집하기로 되어 있고 실제로 3차 대회(1956)와 4차 대회(1961)는 5년 만에 소집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그렇게 자주 개최하기는 부담스러웠는지 5차 대회(1970), 6차 대회(1980)는 거의 10년 주기로 개최되었다.
1980년 개최된 제6차 대회에서의 김일성과 김정일. 이 대회에서 주체사상이 유일 지도 이념으로 자리잡았으며, 김정일이 공식적으로 후계자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정상적인 주기였다면 1990년쯤에 7차 대회를 개최했어야 했지만, 북한 대내외의 현실상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대내적으로는 북한의 경제를 돌이킬 수 없게끔 만든 '''3대 흑역사'''[3] 때문에, 대외적으로는 '''1989년 동유럽 혁명'''으로 인한 동유럽 사회주의 동맹국들의 자유화 및 동맹 관계 단절 때문에 돈이 많이 들어가는 당대회는 꿈을 꿀 수도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시기에 남한은 북방외교를 펼치면서 사회주의 국가와도 수교를 맺고 있던 상황이기까지 했다.
그 이후로 1994년 김일성 사망, 1995년 불어닥친 고난의 행군 때문에 북한의 상황은 그야말로 꿈도 희망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욱이 김일성이 생전에 김정일에게 "언제까지 이밥(쌀밥)에 고깃국을 먹이겠다는 식의 구체적인 경제 구상이 발표되지 않는다면 당 대회는 안 하느니만 못할 것"라고 언급했기 때문에 김정일 시대에는 단 한 차례의 당대회도 열리지 못했다. 게다가 김정일은 군부의 지지를 받아 국방위원회라는 비상조직을 통해 권력을 유지했다. 즉, 정상적인 집권행태가 아니었다.
당대회는 2011년 12월 이후 김정은 시대에 들어서도 한동안 논의되지 못한 채 무려 36년 동안 개최되지 못했다.[4] 하지만 김정은은 국방위원회라는 조직 대신 조선로동당의 정상적인 체제로 ‘복귀’하고 싶어했다.

3.2. 개최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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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2015년 10월 30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조선중앙통신를 통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결정서 - 조선로동당 제7차대회를 소집할데 대하여>라는 제목의 결정서를 발표하고 2016년 5월 초 제7차 당대회를 개최한다고 예고하였다. 당 정치국은 결정서에서 아래와 같이 소집 사유를 밝혔다.

우리 당을 위대한 김일성, 김정일동지의 당으로 더욱 강화발전시키고 그 령도적역할을 높여 주체혁명위업의 최후승리를 앞당겨나가야 할 무겁고도 성스러운 혁명임무가 나서고있다.

북한은 이 결정서에서 도당대표회를 미리 열고 김정은을 당대회 대표로 추대했다고도 밝혔다.
북한이 이처럼 단순히 쌀밥에 고깃국을 말아먹기 힘든 상황이 아니라 굶어죽기까지 이르렀는데도 당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던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우선 김정은 체제가 5년 정도 유지됨에 따라 자신의 체제가 확고해 졌다는 것을 선언하는 동시에 자신감을 표하고, 아버지인 김정일 시대의 종결 및 김정은 시대의 개막을 알리기 위한 것으로 분석된다. 또 김정일 시대의 정치체제인 '선군정치'를 '선당정치'로 전환하는 계기로 삼기 위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특히 4차 핵실험광명성 4호 발사를 자화자찬하며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으려는 시도가 있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3.3. 당대회 개최 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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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2016년 4월 27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결정서 - 조선로동당 제7차대회를 개회함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결정서를 발표하고 당대회 개회일을 5월 6일로 확정하였다. 이에 따라 북한 정부는 외신 기자들의 비자 발급 절차에 착수하고 5월 3일~10일, 혹은 5~12일 일정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고 밝혔다. 그 결과 120명의 외신 기자들의 입국을 허가하였다. 그러나 6차 대회 때 118개국 대표단을 초청하여 당대회 과정을 방청하게 한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외국 대표단 초청은 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비용 부담의 최소화, 당시와는 너무도 달라진 북한의 국제적 위상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맹방인 중국이나 주요 협력국인 러시아 대표단도 초청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는 4차 핵실험과 광명성 4호 발사로 인한 북중관계북러관계의 악화를 보여준다고 평가되고 있다.

3.4. 5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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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회는 평양시간으로 오전 9시(한국 표준시 9시 30분)에 개막하였다. 김정은의 개회사와 북한 애국가 연주를 시작으로 대회가 시작되었으며, 이후 집행부 선거 및 주석단 성원 추천을 하고 김정은을 각 도 대표자회의의 결정에 따라 당대회 대표로 정하였다. 뒤 이어 도, 시, 군 및 성 중앙기관, 공장 기업소 등에서 선거한 대표들과 대회에 초대된 우당들, 반제민족민주전선, 해외동포축하단 구성원들이 주석단 대표자로 선출되었다. 이 자리에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재중조선인총연합회 축하단 단장이 해외동포를 대표하여 축하문을 낭독하였다.
또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당대회 의정을 발표하였다. 의정은 다음과 같다.

1.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사업총화

2. 조선로동당 중앙검사위원회 사업총화

3. 조선로동당규약 개정에 대하여

4. 경애하는 김정은동지를 우리 당의 최고수위에 높이 추대할데 대하여

5. 조선로동당 중앙지도기관 선거

이날 김정은 개회사에서 기존의 '핵-경제 병진노선'을 강조함에 따라 사실상 핵 포기는 없다는 것을 더욱 확실히 하였으며, 대남·대외관계도 새로 설정할 의지가 없는 것이 드러났다. 따라서 당 규약 개정 과정에 북한이 핵보유국이라는 사실을 적시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또한 이번 당대회에서 김정은을 당의 최고수위로 높이 추대한다고도 밝혔는데, 현재의 당 제1비서직에 재추대하거나 아예 새로운 직책을 만들어 어정쩡한 '제1'이라는 것을 뺄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일단 주석이나 총비서는 김일성, 김정일을 영원한 주석, 영원한 총비서로 정했기 때문에 다시 쓸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이며, 만일 새로운 직함을 사용한다면 원래 김일성이 역임하다 1966년 2차 대회에서 폐지된 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직을 부활시켜 그 자리에 앉을 것이라는 의견이 대체적으로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날의 행사는 외신에 전혀 공개가 되지 않았다. 기껏 평양까지 찾아간 120여 명의 취재진이 허탕을 쳐버린 것이다. 기자들은 4.25문화회관에 들어가지도 못했으며, 도로를 두고 200m를 떨어져 있을 것을 명령받았다고 밝혔다. 그것도 쓸데없이 3.26공장이라는 전선(電線) 공장을 취재하게 하는 등 대놓고 보도를 통제했다고 한다. 게다가 바깥에서의 외부 스케치도 고작 1시간 여만 하게 해주고 다시 호텔로 돌려 보냈다. 이에 대해 기자들은 농락당했다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또한 당대회 과정은 북한 언론을 통해 생중계되지 않았다. 대신 평양시간으로 10시(한국시간 10시 30분)부터 당대회 장면을 편집하여 조선중앙텔레비죤, 조선중앙방송 등을 통해 30여 분간 녹화중계 하였다. 사실 북한은 이전부터 각종 당 행사를 생중계하지 않고 녹화방송하였다고 한다. 이 방송에서는 15분 정도의 김정은 개회사 육성을 모두 공개하였는데, 김정은이 평소와는 달리 인민복 차림이 아닌 양복 차림으로 등장하여 눈길을 끌었다. 아무래도 김일성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려는 시도로 분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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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중국 공산당은 이날 오후 10시 20분(한국시간 11시 20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명의로 조선로동당 제7차대회 개회를 축하하는 축전을 북한 측에 보냈다.#

3.5. 5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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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7일자 로동신문 1면.
2일차 행사를 진행하였다. 이날도 당 중앙위원회 사업총화 보고가 있었는데, 이는 당초 우리 정부가 예측한 것보다 더딘 속도라고 한다. 원래 예상한 바로는 2일차에 당 중앙검사위원회 사업총화 보고로 넘어가는 것이었지만 전날에 이어 계속 당 중앙위 사업총화 보고를 했던 것이다. 이는 36년간 당대회가 한 차례도 열리지 못하면서 보고할 양이 많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만일 이 속도라면 당초 예정보다 하루 더 늘어날 수도 있을 것이라 한다.
이 날도 북한은 평양시간으로 오후 10시 5분(한국시간 오후 10시 35분)쯤에 당대회 2일차 소식을 편집하여 녹화중계하였다. 다만 첫날과는 달리 김정은의 육성은 공개되지 않고 아나운서가 정리하여 낭독하였다.
북한이 당대회 취재 외신기자들에게 취재완장을 30유로에 강매했다고 워싱턴 포스트, LA 타임즈 기자들이 SNS를 통해 전했다.# 이를 분실하거나 훼손할 경우 벌금이 50유로라고 한다.

3.6. 5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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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기관지인 로동신문이 2일차 소식을 보도했다. 평소 6면 발행되던 것과는 달리 무려 '''24면'''으로 발행되었다. 1980년 10월 6차 대회 때도 '''18면'''으로 증면된 적이 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한 셈이다. 당대회 소식은 무려 9개 면에 걸쳐서 실렸다고 한다.
로동신문이 전날의 소식을 상세히 전함에 따라 김정은과 북한의 입장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우선 김정은이 '비핵화'라는 단어를 꺼내기는 했다. 그런데 그것은 '조선반도 비핵화'가 아니라 '세계 비핵화'였다. 따라서 '미국 니들이 핵 가지고 있는 이상 우리는 죽어도 핵 포기 안 한다. 세계가 비핵화 될 때나 포기하겠다.' 이런 입장인 것이다. 그러면서 '자주권이 침해당하지 않는 이상 핵을 쓰지 않겠다'고 밝혀 자신들의 핵이 방어적 수단임을 밝히는 동시에 자신들이 핵 보유국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였다. 아무래도 인도나 파키스탄이 결국 핵 보유국으로 인정을 받은 전례대로 북한도 핵 보유국임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듯하다.[5]
김정은은 또 미국에 대해서는 맹공을 퍼부었는데, 당초 핵 개발로 인한 제재 문제와 평화협정 문제를 엮어 미국과 협상을 시도할 것이라는 분석과는 전혀 달랐다. 김정은은 "미국은 정전협정 체결 이후 오늘에 이르는 60년 이상 남조선과 그 주변에 방대한 침략무력을 계속 끌어들이고 해마다 각종 북침 핵전쟁연습을 광란적으로 벌리면서 조선반도와 지역정세를 격화시켜왔다."라고 미국을 규정하면서 "미국은 핵강국의 전렬(대열)에 들어선 우리 공화국의 전략적 지위와 대세의 흐름을 똑바로 보고 시대착오적인 대조선적대시정책을 철회하여야 하며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고 남조선에서 침략군대와 전쟁장비들을 철수시켜야 한다. 우리 민족을 분렬(분열)시킨 장본인이며 통일의 기본방해자인 미국은 반공화국제재압살책동을 중지하고 남조선당국을 동족대결에로 부추기지 말아야 하며 조선반도 문제에서 손을 떼야 한다."라고 언급하여 주한미군 철수와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하였다.
반면 남한에 대해서는 대화 공세를 퍼부었는데, 우선적으로 남북군사회담 개최를 요구하였다. 김정은은 "우리는 조선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하여 우선 북남군사당국 사이의 대화와 협상이 필요하다고 인정한다. 북남군사당국 사이에 회담이 열리면 군사분계선일대에서의 충돌위험을 제거하고 긴장상태를 완화하는 것을 비롯하여 호상 관심사로 되는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협의, 해결해나갈 수 있을것"이라고 언급하며 남북군사회담의 필요성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김정은은 "상대방에 대한 적대행위는 불신과 대결을 조장하고 관계개선을 방해하는 기본장애물이다.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심리전방송들과 삐라살포를 비롯하여 상대방을 자극하고 비방중상하는 일체 적대행위들을 지체없이 중지하여야 한다"라고 언급하며 대북 심리전 방송과 대북 전단 살포 중지에 대해서도 남한에 요구하였다. 그리고 '남북 화해에 방해가 되는 각종 법률적, 제도적 장치를 없애야 한다'고 말하며 이전과 같이 국가보안법의 폐지, 5·24조치, 대북 제재 해제를 간접적으로 요구했다. 이렇듯 미국에 대한 비난 일색과 남한에 대한 대화 요구를 보았을 때 김정은은 전형적인 화전양면전술을 사용함과 동시에 통남봉미 전략으로 접근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풀이된다.
남북통일 방안에 대해서도 언급이 있었는데, 우선 김일성이 1956년 3차 대회 때 처음 언급하여 발전시킨 '조국통일 3대헌장'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6] 또한 "북과 남은 상대방에 존재하는 서로의 사상과 제도를 인정하고 용납하는 기초 우에서 온 민족의 지향과 요구에 맞게 련방국가를 창립하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 남조선당국은 '제도통일'의 허황한 꿈을 버리고 내외에 천명한 대로 련방제방식의 통일실현에로 방향전환을 하여야 한다"고 밝히며 1980년 6차 대회 때 김일성이 주장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을 재차 주장하였다. 반면 김정일 시대에 2차례 치러져 김정일 시대에 계속 강조되어 오던 남북정상회담의 결과물인 6.15 남북 공동 선언10.4 남북 공동 선언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아버지인 김정일 시대와는 다르다는 차별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김일성 시대의 정책을 답습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각인시키려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일종의 '복고 현상'을 노리는 것이 아니냐는 것.
그리고 김정은은 대내적인 경제 발전을 위하여 "2016년부터 2020년까지의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을 철저히 수행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정치군사강국의 지위에 당당히 올라섰지만 경제 부문은 아직 응당한 높이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경제 전반을 놓고 볼 때 첨단 수준에 올라선 부문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부문은 한심하게 뒤떨어져 있으며, 인민 경제 부문들 사이 균형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고 선행 부문이 앞서나가지 못해 나라의 경제발전에 지장을 주고 있다"고 평가하며 북한의 경제 상태가 엉망이라는 것을 인증함과 동시에 조속한 경제 발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3일차인 8일에는 조선중앙텔레비죤의 편집 녹화중계가 없었다. 1980년 6차 대회 때 이튿날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군중대회와 모란봉경기장에서 열린 집단체조 관계로 회의를 하루 쉰 전례를 미루어 볼 때 아무래도 행사 관계로 회의를 하루 쉰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정확한 내용은 9일자 로동신문이 나와야 확인될 것으로 보인다.관련 기사 대신 오후 3시부터 3시간 동안 2일차인 7일 김정은이 당 중앙위원회 사업총화 보고를 한 것을 3시간 동안 녹화하여 내보냈다.

3.7. 5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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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녹화 중계방송을 하루 쉬었기 때문에 회의가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틀린 것으로 밝혀졌다. 전날인 8일에는 당 중앙위원회의 사업총화 결정서를 채택하고 당 중앙검사위원회 사업총화를 마무리지었다고 로동신문이 전했다. 북한은 이날 결정서를 통하여 북한이 핵 보유국임을 명시하고 김정은을 최고수위로 추대했다고 밝혔다. 특히 김씨 일가를 이르는 수식어들이 정해졌는데, 우선 김일성은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을 창시하시고 주체혁명 위업을 백승의 한길로 이끌어오신 우리 당과 인민의 위대한 수령'이라고 정의했으며, 김정일은 '김일성 동지의 사상과 위업을 충직하게 계승하여 조선로동당을 주체의 혁명적 당으로 강화발전시키고 주체혁명 위업을 승리의 한길로 이끌어오신 탁월한 수령'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따라서 앞으로는 김일성을 수식할 때 '위대한 수령', 김정일을 수식할 때 '탁월한 수령'으로 나누어 부를 가능성이 커졌다. 그리고 김정은에게는 '주체혁명 위업, 선군혁명 위업을 굳건히 이어나가시는 우리 당과 국가, 군대의 최고령도자'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날도 로동신문은 평소의 2배인 12면으로 증면되어 발행되었다.
이날 로동신문에서는 북한이 중국에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로동신문은 이날 "김정은동지가 조선로동당 제7차대회 개회사를 한 소식을 6일과 7일 여러 나라에서 보도했다"며 러시아, 이란,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영국, 미국 매체의 동향을 소개했다. 그러나 중국 매체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언급조차 없었다. 게다가 앞서 7일에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보낸 축전(7면)을 쿠바 공산당 중앙위의 축전(5면)보다 뒤에 싣기도 했다.
취재 중이던 BBC 기자를 구금하고 추방한다고 CNN이 밝혔다. 김정은에 대한 부정적인 보도와 북한 실상을 부정적으로 보도했기 때문..
NHK는 이날 속보를 내고 김정은이 '''조선로동당 위원장'''직에 추대됐다고 보도하고 김정은과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황병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박봉주 총리, 최룡해 당 비서가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됐다고 전했다. 김정일 시대의 선군정치를 마무리짓고 다시 할아버지인 김일성 시대처럼 당을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김정은이 당 중앙위원회 위원, 당 중앙위 정치국 위원, 정치국 상무위원,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됐다고 조선중앙방송 등 북한 언론들이 전했다.
예정대로 이날 모든 일정을 마치고 당대회가 폐막됐다.#

3.8. 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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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북한 로동신문은 당대회 폐막 소식과 함께 핵, 경제 병진노선을 포함한 당 규약 개정과 김정은의 당 위원장 추대 소식, 인사 발표 소식 등을 전했다. 김정은의 동생인 김여정이 당 중앙위원회 위원 명단에 올랐다고 한다. 또한 기존의 비서국이 없어지고 정무국이 신설되었다.
10일 오전에는 당대회 폐회 경축 군중대회가 김일성광장에서 열렸다고 한다.

4. 참여 인원


  • 총 대표자: 3,667명 (남: 3,352명, 여: 315명)
    • 결의권 대표자: 3,467명
    • 발언권 대표자: 200명
  • 방청자: 1,387명

4.1. 세부 인원


  • 당 정치 일꾼 대표: 1,545명
  • 군인 대표: 719명
  • 국가 행정경제 일꾼 대표: 423명
  • 근로단체 일꾼 대표: 52명
  • 과학, 교육, 보건, 문화예술, 출판보도 부분 일꾼 대표: 112명
  • 현장에서 일하는 핵심당원 대표: 786명
  • 항일혁명 투사: 6명
  • 비전향 장기수: 24명

5. 예산


7차 당대회 연다고 공사판 벌인 것들이나 행사준비 등에 많은 돈을 쏟아부었다. 약 1조 2천억 원 정도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6. 기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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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조선로동당 제7차대회 기념시계로 최고위간부 100여 명에게 선물했다. 위의 낫과 망치는 유명한 상징이지만 아래의 북두칠성은 좀 생소한데 이건 제7차 로동당대회을 상징한다. 브랜드 표시가 없는데 북한에서 특별히 그렇게 주문했다고 한다.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를 의식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선물정치라는 것이 언제나 그렇듯 스위스 시계보다 더 급이 떨어지는 시계는 일반 참가자들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7. 관련 문서



[1] 이건 옆 나라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인 공화제 국가에서 행정부 역할을 수행하는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보다 중국공산당이 상위 기관이고, 이쪽은 그나마 일인독재가 아닌 일당독재체제라서 5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당대회를 연다. 시진핑이 중국 내 서열 1위인 이유는 국가주석이라서가 아니라 명목상으로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이기 때문이고, 실질적으로는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기 때문이다. 명목과 실질적 이유가 다른 까닭은 중국공산당 규약에 따라 중국 인민해방군의 통수권은 당 중앙군사위 주석에게 있음에서 비롯된다. 즉, 중앙군사위 주석에 못 오르면 군대를 장악할 수 없으므로 권력이 크게 약화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후진타오는 중앙군사위 주석직은 국가주석 취임 한참 이후에야 물려받았기 때문에 집권 초기에는 한동안 장쩌민의 입김이 있었다. 시진핑은 2012년 국가주석직과 당 총서기직, 당 중앙군사위 주석직에 동시에 올랐다. 아무튼 중국에서 "국가주석"직은 적어도 명목상으로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2] 이것보다 더 우선시되는 것이 바로 당의 유일적 령도체계확립의 10대 원칙이다.[3] 서해갑문 건설,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 건설,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개최[4] 단, 2010년과 2012년에 임시 당대회 성격의 행사인 '당대표자회'를 개최한 적이 있는데, 김정은의 3대 세습을 공식화하기 위한 요식행위였다.[5] 하지만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하게 되면 미국을 상대로 정식적인 핵 협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한국이든 미국이든 북한의 핵 보유국 지위 인정은 사실상 불가능한 이야기다.[6] 여기서 '조국통일 3대헌장'이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에서 명시한 ‘조국통일 3대원칙’, 1980년 10월 제6차 당대회에서 제시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1993년 4월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5차 회의에서 나온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