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권-위구르 관계
1. 설명
중화권과 신장 지역 간의 상호 관계, 중화권과 위구르 민족과의 상호 관계 관련한 문서이다.
2. 중국과의 관계
2.1. 서북공정
중국 입장에서는 해당 지역이 전통적인 중국의 변방이라고 해당 지역의 중요성을 축소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고대 중국의 식문화와 기마술, 전투마차, 청동기 기술, 중세 초 중국 불교와 중국 음악 등등은 오늘날의 신장 지역을 거쳐 중국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은 중국 입장에서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해당 지역은 중동의 청동기 문명 및 기마술이 유입되는 통로였기에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말과 양 같은 가축 외에도, 밀, 포도, 호두, 완두 같은 작물 역시 중앙아시아와 중동에서 해당 지역을 통해 중국으로 전파되었으며 중국 불교 중 교종은 쿠라마지바 등 중앙아시아 지역 불교 승려들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당나라의 음악 당악은 서역 음악이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될 당시 아직 중화문명의 중심지는 화북지방이었고 인도의 문물이 동서남북으로 교역이 활발했던 위구르 지역을 거쳐 오는 것이 당연했다.
오늘날의 중화주의자들은 위구르가 기원전부터 꾸준히 중국의 영역이었던 것처럼 주장하지만 위구르에 한족이 직간접적으로 지배권을 행사한 경우는 전한, 후한[1] , 당나라 초기, 그리고 청나라 말기에 해당하며 청나라 통치도 야쿱 벡 반란 이전에는 엄연히 만주족의 통치로 한족의 신장 지역 유입은 최대한 제한되었다. 오호십육국 시대에도 북방 왕조들이 동튀르키스탄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긴 했지만 해당 지역의 행정에는 제대로 된 한문이 사용되지 못하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위구르인들이 중국어의 방언을 사용하였다는 식의 이런 중화주의자들의 주장은 남아공의 줄루족이 자신들이 영국하고 관련이 있으니까 인도를 자신들의 식민지였다고 주장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수준이다.
전근대에 한족 군인들이 직접 해당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한 경우는 전한, 후한, 그리고 당나라 때의 고선지의 군사 작전[2] 에 의한 것인데 비교하자면 고조선 역시 전한의 한무제의 공격을 받아[3] 멸망하고 한사군이 세워졌으며 당나라는 잠시 안동도호부[4] 를 세웠다가 신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발해가 건국되는 과정에서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서 철수하였다. 동튀르키스탄이 꾸준히 중국의 영역이었다는 주장은 '''시진핑이 주장한 "한반도는 중국의 일부"라는 망언과 일맥상통하는 패권주의적 주장'''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한반도와 베트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동튀르키스탄과 중국과의 관계도 일방적인 종속 관계로 단순화할 수 없다. 일례로 거란족들이 중앙아시아에 건국한 카라 키타이의 경우 서방의 나라들의 교류를 할 때 자신들을 적극 "중국의 황제"라고 과장 광고를 하면서 권위를 내세우던 편이었다. 고려 시대 외왕내제를 시행하며 탐라국을 번국처럼 삼거나 베트남에서 외왕내제를 하며 이웃 민족들에게 권위를 내세운 것과 같은 맥락이다.
더 자세하게 따진다면 신장 지역의 경우 중국으로부터 유교, 불교를 받아들이기보다는 상술한 오히려 중국에 불교를 전파하는 역할을 맏았으며, 중국의 물산을 가지고 다른 지역과 교역함과 동시에 타 지역 문물을 중국으로 수출하는데 적극적이었던 지역이다.[5] 오늘날 중국에서 신장 지역 역사를 전부 중국사에 우겨넣으려는 이유는 소수민족 동화 정책 이외에도 이런 부분을 간과할 수 없다. 과거 유교적 가치관과 다르게 오늘날 중화 패권주의 입장에서는 중국, 중국인들이 항상 해외로 진출하고 적극적으로 교류한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2.2. 문화적 차이
신장 지역은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인도, 페르시아, 이슬람, 티벳, 튀르크 문화의 영향 역시 골고루 받은 지역으로 중화 문화보다는 중앙아시아 이슬람 문화권에 훨씬 더 가까운 편이다. 현지에서도 보면 중국 땅이면서도 중화풍의 분위기보다는 중동, 튀르크 및 이슬람 분위기가 있는 문화유적들이 많아 보이는 편이다. 얼핏보면 중국 내 무슬림가(街)나 이슬람촌을 연상하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라 한족 문화와 괴리감이 크다. 하지만 이런 차이를 무시하고 위구르어가 중국어의 방언이라는 역사 왜곡을 대놓고 주입시키니 세속주의적인 위구르인들도 반감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중화민족의 단일화 정책에 따라 한족들과 같은 시간을 보내거나 통혼 혼혈을 장려하였으며, 이슬람에서 금기시하는 돼지고기나 술을 먹는 것을 강요받기도 하였다.
요리 및 음식에 있어서도 돼지고기 소비가 많은 중국이지만 위구르 지역에서는 이슬람 율법사상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위구르인들은 여타 이슬람 국가처럼 돼지고기를 입에 대거나 먹지 않는다.(다만 이슬람권 중에서 세속화된 지역이라 술은 많이 마시는 편이다.) 전통적인 가치관 차이는 더 크다. 19세기 말 좌종당은 야쿱 벡 봉기를 진압하고 동튀르키스탄을 재점령한 이후 위구르인들을 중국식으로 교육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좌종당의 군사 작전이 대성공을 거두었던 것과는 정반대로 처참한 실패를 기록하였다. 당시 부유한 위구르인 가족들은 자신들의 자녀를 서당 기숙학교에 보내기 싫어 가난한 소년들을 대신 돈주고 고용하고 대신 학교에 다니게 만들었다. 좌종당이 세운 서당들은 20년 정도 운영되었으나 겨우 한문을 더듬더듬 읽을 수 있는 수준으로 위구르인들을 교육시킬 수 있을 뿐이었고 기숙 학교에서 공부한 위구르인들이 부모들과 말이 안 통하는 문제 등이 생겨나 결국 실용성 논란으로 폐지되었다. 대신 러시아 제국에서 온 같은 튀르크-무슬림 계열인 타타르인들이 신장 지역에 새로 새운 이슬람 현대주의 자디드 학교들은 위구르인 학생들에게 서구식으로 과학,수학,역사,문학,체육 등을 포괄한 종합적인 교육을 실시했으며 이슬람 역시 교과과목에 포함시켜 위구르인 일반의 호응을 얻었고, 현지 상황에 맞게 중국어 교과 과목도 추가했다. 이 때문에 이슬람 모더니즘에 입각한 자디드 학교들은 위구르인 가정에서 선호도가 월등히 높았다. 청나라 중기까지 만주족들의 동튀르키스탄 통치는 위구르인들의 문화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고 중국 문화의 상당 부분은 위구르인들에게 지나치게 이질적이었던 것이다.
중국인들 역시 과거 장제스가 주장한 "위구르인들은 중국인의 일부"[6] 라는 주장은 어폐가 있다 생각하는지 위구르인의 이슬람 문화가 한족들의 생활과 너무 달라서 중국 내에서도 한족과 마찰을 빚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피상적인 인식과는 대조적으로 위구르인들은 무슬림 민족 중에서 매우 세속적인 편에 속한다는 시각도 있다. '''신장 위구르 지역 지하 자원 개발의 이익이 일방적으로 한족에 돌아가다시피 하는 상황에 대한 반발이라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워낙 뭉쳐 살다보니, 타 민족과 시비가 붙는다 하면 우르르 모여들어 위협한다거나[7] , 좀도둑질을 당했다거나, 바가지를 씌운다는[8] 체험담 위주의 괴담이 일부 나돌고 있다.[9] 물론 체험담이기 때문에 100% 신뢰하는건 권장하지 않으나, 그만큼 인식이 나쁘다는 뜻이다. 이런 루머들은 2009년 우루무치 유혈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2.3. 탄압
중국 정부는 이슬람 생활과 문화가 위구르족에게서 분리독립 요구와 테러를 발생시킨다고 생각하여 위구르인들에게 이슬람 및 고유 문화를 금지하며 한족화를 강요한다. 예를 들면 수염을 기르거나 히잡을 머리에 쓰는 행위. 최근에는 이슬람 종교행사의 핵심인 라마단 의식도 금지되었으며 무함마드 등 이슬람과 관련된 이름을 아이에게 지어 주는 것도 금하고 있다. 이러한 금지 조치가 위구르인들한테 심한 반발을 야기시키고 있다. 이슬람 국가들도 카타르나 사우디아라비아[10] 같은 노골적인 친중 국가가 아닌 이상 이런 이슬람 문화 금지조치에 비난을 한다. 하지만 이럼에도 중국 정부는 세속화만이 위구르인의 독립 요구와 테러를 막는다며 세속화 원칙을 고집하고 있다. 위구르인 입장에서 보면 정당한 경제적, 세속적 요구까지 다짜고짜 테러리즘으로 몰아가는 셈이다. 中 최대 '에너지 보고' 인데…위구르인 "금사발 들고 굶주려"
2017년 들어 중국 정부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대한 통제가 엄청나게 강해져서 비밀수용소가 들어선 이후 위구르인이 구금되어 공산주의 교육을 받게 되었고 그곳에서 분리주의, 극단주의, 테러리즘 등 이른바 '3대 악' 을 배격할 것과 중국에 대한 애국심 등을 배우게 되었다고 하지만 사실상 세뇌.## 심지어 이런 세뇌교육으로 인해 '''자살'''하는 사람도 나왔을 정도. 또 지하철을 탈 때 실명을 등록할 것을 요구했다.# 한편, 이에 대해 AP통신 기자는 지구상에서 경찰의 감시가 가장 심한 곳이라 할 수 있다고 전했다.BBC 뉴스나이트 프로그램은 다른 나라로 망명한 전직 수감자를 인터뷰했다.
"그 사람들은 내가 잠을 자게 허락하지 않았고, 몇 시간동안이나 나를 매달고 때리곤 했다. 두꺼운 나무와 고무 방망이, 뒤틀린 철사로 만든 채찍, 피부를 관통하는 바늘, 손톱을 당기는 펜치 등이 있었다. 이런 도구는 언제나 사용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 탁자 위에 놓여있었다. 다른 수감자들의 비명소리도 들렸다. "- 오마르
"저녁 식사 때였다. 최소 1,200명의 수감자들이 빈 플라스틱 그릇을 손에 들고 있었다. 음식을 먹으려면 친(親) 중국 노래를 불러야 했다. 마치 다들 로봇 같았고 영혼을 잃은 듯 했다. 그 사람들 중 상당수를 잘 알고 있다. 함께 앉아서 음식을 먹곤 했지만, 지금 그들은 마치 교통사고 후 기억 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 아자트
2019년 12월 5일 국민일보의 기사와 한국일보 기사에 의하면 사실상 위구르 동화정책은 실패로 끝났고 중국 공산당 간부들은 사직서를 써서라도 빠져나가려고 하나 받아주지 않고 이주 정책으로 이주한 한족들 역시 이주를 허가해 주지 않아서 강제로 묶여있는 상황이다. 특히 2019년 홍콩에서 정치 위기가 터진 이후에는 감시도 심해지고 불안도 심해진 상황이다.
수용소에 수감된 위구르인들을 상대로 고문과 폭행, '''신체훼손''' 외에도 여성 수감자를 대상으로 한 성고문과 강간이 비일비재하다는 폭로가 연이어 나오고 있다.
'''열흘간 성고문 뒤 집단강간 중국 경찰 위구르족 여성 집단 강간 후 자랑하고 다녀 집단 강간에 전기 고문까지...'''
인도 다람살라에 위치한 티베트 망명정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해외에 망명한 위구르인들도 독일 뮌헨에 세계 위구르 회의라는 단체를 조직하였다. 중국은 해당 단체가 가짜 뉴스를 전파하는 테러 단체라고 주장하면서 교섭 자체를 거부하는 중이다.
2.3.1. 논란
중국 및 대한민국의 친중 성향 인사들 측에서는 물론 여기에 대해 여러가지 반박을 내놓는다. 한족들이 70년대부터 최근까지 엄격한 계획생육정책을 적용받았던 것과 다르게(현재는 폐지되었다.) 위구르인들을 포함한 소수민족들은 1자녀 정책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았고, 가오카오 시험에서도 가산점을 받았다는 것이다.
같은 논리대로 따지면 한동안(주로 80년대) 미얀마 군사정권은 버마족 대상으로는 과도한 수준의 강제 노역을 부과하였는데 로힝야족에게는 말이 안 통해서 강제 노역을 별로 부과 안했으니까 미얀마는 로힝야족을 차별하지 않은게 되고, 대한민국에서도 화교랑 조선족들이 군대를 가지 않거나 안 가도 되고 대학 입학에서 외국인특별전형 혹은 재외국민특별전형이 가능하니까[11] 한국에는 화교, 조선족 차별이 없다는 억지 주장도 가능해진다. 신장 재교육 캠프에서의 강제 수용 인권 침해 및 강제 불임수술과 집단 강간 등 제노사이드가 벌어지는 마당에 이런 일부 특혜만 언급한다는 것은 엄연한 논점일탈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은 중국과 소련의 관계, 소련 붕괴 이후에는 국제 사회와 중국과의 관계에 따라 꾸준히 바뀌어왔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소련과 친하거나 소련과 국력 차이가 벌어져서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던 시절에는 소수민족에 대한 관용책이 시행되었으나[12] 반대로 중국이 소련과 사이가 나빠진 상황에서는 문화대혁명 당시 티베트인, 위구르인, 회족 포함 여러 소수민족들이 전통 문화 유산이 사라지고 극심한 탄압을 받기도 했다. 10년대 아랍의 봄이 하나씩 실패한 이후 아랍-이슬람권은 팔레스타인, 카슈미르 문제 등에 대해서 단합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고, 이는 중국 입장에서는 중화민국 시절부터 숙원사업이었던 위구르인 동화정책을 비교적 욕을 적게 먹어가며 위구르인들을 동화시킬 절호의 기회인 셈이다.[13] 자세한 내용을 설명하지 않은체 위구르인 탄압이 약했던 시절 주어진 특혜만 강조하는 것은 그야말로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는 셈이다.
2.4. 후난성 위구르인
명나라 때 귀순한 위구르인 용병 대장 할라 바시(Hala Bashi; 哈勒巴士)가 휘하 위구르인 부하들을 이끌고 먀오족 반란을 진압한 공로를 인정받고 이후 부하들과 후난성에 정착하였다. 현재도 후난성에는 할라 바쉬와 그 부하들의 후손들은 오늘날에도 6천여 명 가까이 거주한다. 이들은 중국 정부에서 공식적으로는 위구르족으로 분류하지만, 거의 완전히 한화되어 위구르어를 거의 구사하지는 못하며 이슬람을 배교한 경우가 많고 대부분 족보에 나온 선대 위구르인 조상들에게 유교식으로 제사를 지낸다 한다.
2.5. 베이징 위구르인
청나라가 18세기 중반 준가르 칸국을 무찌른 이후 상당수의 위구르인들이 베이징 일대로 이주하였다. 열하일기에서도 이들이 회골이라 지칭하며 간단한 기록을 남겼다. 위구르인들은 자체적인 팔기를 구성하지는 못하고 대신 몽골 팔기에 소속되었다. 건륭제 통치 시기 동안 베이징에는 약 300여 명의 위구르인들이 거주했는데 이들 중에는 팔기군 소속 외에도 음악인, 무용수들이 많았다. 후에는 규모가 더 늘어나 광서제 시절에는 2천여 명 정도의 위구르인 음악가와 무용수들이 궁중에서 일했다. 자금성에서 음악이나 무용 일을 맏던 위구르인들은 상당수가 신해혁명 이후 고향 알티샤르로 돌아가고 1930년에는 약 800여 명만 남은 상태였다고 한다. 베이징에 잔류한 위구르인 후손들은 위구르어를 잊어버리고 북경어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1980년대 초 무렵부터 위구르인들이 다시 베이징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985년 베이징에서 민간 시장이 공식적으로 허용되면서 알티샤르 지역의 특산품들을 판매하는 소상인들이 왔다. 이들은 주로 투르판에서 생산된 건포도와 위구르식 양꼬치 등을 파는 노점상을 열었다. 위구르 요리가 베이징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노점상에서 정식으로 식당을 개업하는 사람들도 생기고, 1992년에는 베이징에만 33개의 위구르 레스토랑이 운영되었다 한다. 위구르인들의 베이징 이주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중국 내 다른 지역과 비교해서 평균 교육 수준은 조금 더 높지만 소득 수준이 상당히 더 낮은 이유로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베이징에 새로 이주한 위구르 농민공들의 빈곤 문제가 지적되기도 하였다.
3. 대만과의 관계
대만에 거주하는 위구르인들은 주로 국공내전 이후 중국 대륙의 공산화를 피해 대만으로 도망쳐온 사람들 및 그 후손들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의 주요 인물이었던 율바르스 칸이 있다. 오늘날 기준으로는 대만 내 한족 및 후이족과 동화되었다. 생각보다는 관계가 원만하지만은 않은데, 중화민국 정권 시절에 한족계와 위구르인들의 마찰도 심했으며 중국 국민당 정부가 이 지역에서 군마나 곡물을 과도하게 뜯어갔기 때문이다.
4. 관련 문서
- 대국관계일람/아시아 국가/동아시아 국가
- 중국/외교 / 중국/인권
- 대만/외교
- 중화권
- 신장 위구르 자치구 / 위구르족 / 위구르/역사 / 위구르/대외관계
- 동튀르키스탄 독립운동
- 신장 재교육 캠프
- 2009년 우루무치 유혈사태
- 레비야 카디르
- 후이족
- 쿤밍역 칼부림 테러
[1] 그나마도 전한과 후한은 대부분의 기간을 위구르의 동남부 극히 일부 지역만을 양주(凉州)의 일부로 지배한것 뿐이었다.[2] 당나라 치세 초반의 서역원정군은 대부분 돌궐 동맹군에 의해 이루어졌었다.[3] 한나라는 타림 분지 일대를 흉노의 오른팔, 고조선을 흉노의 왼팔로 취급하였다.[4] 마찬가지로 당나라는 위구르 일대에 안서도호부를 세웠었다.[5] 대표적인 예로 호탄은 중국의 뽕나무와 누에, 비단 제조술을 중동으로 전파하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인도산 면을 중국으로 전파하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였다. 호탄과 근접했던 고창회골이 중국으로 주로 수출하는 품목 중 하나가 자국에서 생산된 목면이었다.[6] 장제스는 중국 고대 신화와 근대 민족주의를 자기 멋대로 결합시켜서 "위구르족이 본래 중국 민족의 지파 즉 황제의 후손이었으나 지리와 역사라는 불행한 사건으로 분기되었을 뿐"이라는 오늘날 상식 기준으로 이해하기 힘든 주장을 피력하였다.[7] 인구 자체는 한족이 위구르보다 많지만 위구르족은 종교가 구심점이 되는지라 결집력이 좋다.[8] 2012년 뉴스로 공개된 체가오(切糕, 절고) 사건을 빌미로 이슈화 되었다.[9] 민족 갈등을 덮어 감추려는 중국 정부 때문에 보도된 뉴스가 '''적은''' 편이다.[10] 걸프전 때문에 친미 국가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빈 살만 정권 이후 친중 성향이 더 강해졌다. 오바마 행정부 말 유가 치킨 게임을 벌여서 중국한테 로또 당첨시켜준 것을 보면 빼박[11] 혹여나 오해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첨언하자면 논란이나 오해와 다르게 조선족 중 재외국민특별전형으로 혜택을 보는 인원은 소수에 불과하다.[12] 소련에서는 레닌주의에 입각하여 소수민족의 자치를 보장하는 정책을 시행했으며, 동시에 제3세계에 사회주의를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었는데, 이웃 국가에서 대놓고 소수민족에게 1자녀 정책을 강요하면 이런 소련의 입장도 어색해질 수 밖에 없었다.[13] 비교하자면 중국은 티베트 자치구에 상당수의 중국인들을 이주시켰고 티베트인들 중 중국인들과 결혼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티베트인 민족 정체성이 점차 희석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경우 한족들을 대량 이주시켰음에도 한족과 위구르인들이 서로 결혼을 안 하고 위구르인 민족 정체성이 별로 희석되지 않다보니 중국 측에서는 제 2의 홍콩이 되는 것 아닌가 위기를 느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