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구르/대외관계

 


1. 대한민국과의 관계
2. 중화권과의 관계
3. 카자흐스탄과의 관계
4. 러시아와의 관계
5. 터키와의 관계
6. 우즈베키스탄과의 관계
7. 키르기스스탄과의 관계
8. 타지키스탄과의 관계
9. 만주, 내몽골 지역과의 관계
10. 몽골과의 관계
11. 티베트와의 관계
12. 중동 지역과의 관계
13. 남아시아 지역과의 관계
14. 기타 서구 선진국들과의 관계
14.1. 캐나다와의 관계
14.2. 네덜란드와의 관계
15. 친중 독재국가들과의 관계
16. 일본과의 관계
17. 미국과의 관계
18. 지역별 관계


1. 대한민국과의 관계




2. 중화권과의 관계




3. 카자흐스탄과의 관계




4. 러시아와의 관계




5. 터키와의 관계




6. 우즈베키스탄과의 관계




7. 키르기스스탄과의 관계


중세 위구르 칸국은 투바 지역에서 남하한 키르기스인들에 의해 840년 멸망하였고 위구르인 난민들은 투르판 분지와 타림 분지로 이주하여 고창회골을 건설하고 오늘날 위구르인들의 기원이 되었다. 키르기스는 카라 키타이와 몽골 제국의 서방 원정에도 참여했으며, 상당수가 13세기 후반 카이두의 군대에 합류하기도 했다. 15세기에 이르러 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에 해당하는 이식쿨 호 지역은 키르기스인들의 근거지가 되었고 이들은 오이라트의 팽창에 맞서 이 지역을 방어했다.
신장 위구르 지역과 접한 키르기스스탄 동부에도 일부 위구르족들이 거주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신장 위구르 자치구 내 키질수 키르기스 자치주에는 상당수의 키르기스인들이 거주한다. 문화 대혁명 와중에 키르기스인 인구 상당수가 소련의 키르기스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탈주하면서 비율이 감소하였지만 아직도 상당수의 키르기스인들이 동튀르키스탄에 남아있다. 키르기스스탄은 카자흐스탄에 비하면 정치적 권위주의가 많이 약해졌지만, 경제적 문제 때문에 중국에게 제대로 된 항의를 하지 못하고 있다. 이 외에도 키르기스인들과 위구르인들은 중세 카라한 칸국의 문인 유수프 카스 하지브가 키르기스스탄 사람인지 아니면 위구르 사람인지 관련하여 서로 논쟁을 벌이는 경우가 있다. 유수프 카스 하지브가 공부한 곳은 카슈가르이지만 출생지는 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 일대이기 때문.

8. 타지키스탄과의 관계


소그드인들은 위구르 국가의 흥기에 깊이 관여했다. 이들의 상업 네트워크는 북중국, 몽골 및 신장과 연계되어 있었는데, 이 지역 모두에서 위구르인들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더욱이 소그드인들은 당과의 견마무역에서 중개인으로 일했을 뿐만 아니라 위구르 칸국의 부족 세력에서 유목민과 정주민 모두를 통치하는 광활한 제국으로 변모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문화, 행정적 모델을 제공했다. 이와 같은 종합적인 문화적 차용물에는 소그드 문자(기본적으로 아람어에서 파생되었다.)가 포함되었다. ... 762년 혹은 763년 위구르의 뵈귀 카간은 낙양에 있는 소그드인들과 접촉한 이후 마니교로 개종했으며 많은 소그드인들이 행정 능력으로서 위구르인들에게 봉사했다. ... 위구르인들이 당과 관계를 맺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혹은 어쩌면 그러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견제 차원에서) 자신들의 문화적, 정치적 토대로 중국의 모델이 아닌 소그드의 모델을 선택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연구 소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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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의 역사 / James A. Millward

중세 위구르 문화는 상당부분 소그드 문화를 이어받았다. 중앙아시아가 완전히 튀르크화, 이슬람화한 오늘날 기준으로는 타지크인과 위구르인 사이의 교류가 감소한 편이다. 다만 아직 타지크계 소수민족들이 카슈가르 근교에 거주하고 있는데 동튀르키스탄 서부 타슈쿠르간 일대에 거주하는 사리콜인와키인은 타지키스탄 동부 산악지대의 파미르족 계열 민족이다. 타지키스탄 역시 신장 위구르 자치구 지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9. 만주, 내몽골 지역과의 관계



거란의 고위층들은 당의 중국 문화와 위구르 문화를 받아들였으며, 거란 문자의 일부분인 거란 소자가 창제될 때 위구르 문자를 참고했으며, 훗날 여진족의 여진 문자 역시 거란소자의 영향을 받게 된다. 위구르인 상인들은 요나라 연경에도 와서 무역을 펼쳤고 카라한 칸국 출신 무슬림 상인들을 위해 수도 연경에 모스크가 세워지기도 했다. 한편 요나라가 금나라에게 밀려날 때 일부 거란 유민들이 세운 서요는 위구리스탄 일부는 물론 지금의 신강 북부인 준가리아 일부까지 차지하여 카라한 왕조의 카를룩족과 위구르족을 지배한 것은 물론, 일리 지역을 두고 위구르, 동카라한과 대립이 있기도 했으며 이들을 간접지배하기도 했었다. 근세시대에는 청나라의 지배를 받았고, 이 때문에 한족, 만주족, 몽골족 등과 관계가 좋지 못했다. 청나라에서는 만주족 이외에도 다우르족(거란족의 후손), 시버족들을 중가리아에 이주시켰다. 청나라 멸망 이후부터 현재는 만주족도 나라 없는 민족으로 전락하다 보니 만주족에 대한 반감은 청나라 지배 시기를 제외하면 딱히 없다. 물론 이는 일반 위구르족 얘기이며, 강경 위구르 민족주의자들은 한족 못지않게 만주족도 매우 증오한다. 일반 한족들이 만주족에 대한 반감이 적고 한족 민족주의자들이 만주족을 엄청나게 증오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10. 몽골과의 관계


몽골 제국 전역에서 위구르인들은 지식인 관료층으로 활약했으며, 러시아에서부터 고려까지 몽골인들을 대신하여 외교관으로 활약했다.[1] 위구르인들이 칭기즈칸에게 일찍이 신속하게 그리고 계속해서 충성했기 때문에 고창회골의 위구르인들은 상당한 자율성을 누릴 수 있었다. 특히 원나라에서는 한족들을 믿지 못하여 위구르인 관료들을 중용한 편이었다. 고려 말 상당수의 위구르인들이 한반도에 유입된 것도 이와 같은 배경이었다.

위구르인들은 유목민들이 제국을 건설할 때 핵심적인 통치기술들을 제공하는 "초원의 지식층 Steppe Intelligentsia"으로서 몽골에 봉사했다. 위구르인 타타통아는 칭기즈칸의 새 제국에 위구르 문자[2]

를 도입했을 뿐 아니라 조세 기록에서 처음으로 관인을 사용했다. 위구르인들은 몽골 황자들의 가정 교사였으며 제국 전역에서 다루가치로서 그리고 다른 공식적인 지위에서 복무했는데 많은 위구르인들이 높은 관직에까지 올랐다.

- 제임스 A. 밀워드, 유라시아의 교차로 신장의 역사

특히 원나라는 몽골족 제일주의에 입각하여 민족을 크게 4등분하여 신분을 나눴는데 1등은 당연히 몽골인이었고 2등은 색목인, 3등은 거란족여진족 등으로 이루어진 한인, 4등은 남송 치하에 있던 한족들로 이루어진 남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위구르족은 2등인 색목인으로 분류되었다. 원나라 인구 중에서 몽골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불과 1.5%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부족한 숫자를 메우기 위해 색목인들을 많이 등용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문해율이 높고 몽골어를 잘 하는 편이었던 위구르족들이 몽골 제국에서 요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다만 오이라트인들이 서진하여 세운 준가르 칸국의 경우 이야기가 다르다. 준가르 칸국은 청나라의 침입을 초래하여 오늘날 위구르인들이 중국에 예속되는 계기를 초래하였다는 이유로 위구르인들 사이에서 취급이 좋지 못하다. 준가르 칸국의 위구르 지배는 청나라 지배보다도 훨씬 더 악질적이었는데 알티샤르의 위구르인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조공을 거두고 정기적으로 성상납까지 요구하는 등 막장을 달렸다.

11. 티베트와의 관계


중세 티베트의 대장장이 가문 중 하나인 가르 가문은 흉노가 월지(토하라인)를 공격할 때 서쪽 대신 남쪽으로 피난한 소월지 후손이라고 한다. 중세 초 전성기의 토번 제국알티샤르 지역의 패권을 놓고 압바스 왕조, 당나라, 돌궐과 전쟁을 벌였다. 토번이 654년대부터 676년까지 이 지역으로 팽창하며 타림 분지를 점령하고, 우전도독부소륵도독부를 무너트리자, 당나라 조정은 안서도호부 본진을 다시 투르판의 고창으로 옮겨야 했다. 얼마안가 670년 티베트 제국의 명장 가르친링 첸드로가 이끄는 대비천 전투에서 당나라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면서 티베트는 한동안 타림 분지에서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토번 제국은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 군의 공격으로 다시 타림 분지를 상실했으나 당나라에서 안록산의 난이 터지면서 병력들이 철수한 덕분에 다시 이 지역을 장악하였고, 위구르 제국 난민들이 몰려와 타림 분지 일대의 오아시스 도시들을 점령하고 정착하기 전까지 해당 지역 영토를 유지할 수 있었다. 위구르인 난민들이 오지 못한 호탄 왕국 역시 토번이 약해진 틈을 타서 9세기 중반 조공을 끊고 다시 독립 왕국이 되었다.
당나라가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에도 신장 지역이 바로 이슬람화가 되지 못한 것은 바로 이 토번 제국 때문이었다. 토번 제국은 압바스 왕조 군대가 토번과 인접한 트란스옥시아나 일대를 정복하자 이를 경계하여 튀르크계 동맹군 튀르게시를 지원하여 소모전을 벌이도록 만들었고, 토번 제국 역시 압바스 왕조 군대와 직접 여러차례 전투를 벌여 승전하였다. 이 때문에 탈라스 전투 이후에도 압바스 왕조 군대는 티베트 대신 타림 분지를 장악하는데 실패하였다.
위구르 제국 난민 중 중국 간쑤성 일대에 정착한 사람들은 처음에 토번에 통제를 받다 이후 독립하여 9세기 중반 하서회골을 세운다. 하서회골은 하서회랑(감숙주랑) 무역을 통해 번영을 누렸으나 11세기 탕구트의 공격으로 멸망한다. 탕구트인들이 세운 서하 역시 속민인 하서 위구르인 상인들의 도움을 받아 요나라, 금나라와 무역을 진행하였다. 서하 당시에는 과거 동서무역을 장악했던 소그드인들이 이슬람화되어 타지크인, 위구르인 등등과 동화된 상황이었고, 서하의 위구르인들은 서쪽의 코쵸 위구르인들의 도움을 받아 동서무역으로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오늘날 유고족은 중세 하서 위구르인들의 후손으로 비정되며 티베트의 영향으로 티베트 불교를 믿어 20세기 초반 중화민국 시절에는 티베트인으로 분류되기도 하였었다.
15세기에는 이슬람 수피 교단의 일파였던 낙슈반디야 수피 교단이 티베트 불교 겔룩파의 영향을 받아 수피 스승이 제자에게 사후에도 영향과 가르침을 줄 수 있다는 주장으로 교단주의 영향력을 절대화하였다. 동모굴 칸국의 낙슈반디야 교단의 지도자 중 하나였던 아파크 호자와 그가 이끄는 '백산당'이 경쟁자 이스하크 호자가 이끄는 흑산당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자, 아파크 호자와 백산당은 티베트로 도주하여 달라이 라마 5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 과정에서 아팍 호자를 따르는 백산당 일부가 라싸에 아예 정착하여 티베트계 무슬림 까체족의 기원이 되었다.[3] 아파크 호자는 달라이 라마 5세를 '브라흐민들의 셰이크'라고 부르고 아첨하면서 다시 자신을 동모굴리스탄 칸국의 지도자로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달라이 라마 5세의 겔룩파 티베트 불교 역시 낙슈반디야 수피 교리와 비슷하게 "종교 지도자들이 세속 문제에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지상낙원이 이루어진다."는 새로운 교리로 무장하며 경쟁자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종교는 다르지만 삶의 방향이 흡사한데 따른 동질감 때문이었는지, 달라이 라마 5세는 아파크 호자의 요청을 받아들여 준가르 칸국갈단 칸에게 아파크 호자를 도와 동모굴리스탄 칸국의 흑산당을 공격해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한 때 티베트 불교 승려로 수행했던 갈단 칸은 이를 칼같이 받아들여 1678년 12만 명의 대병력으로 타림 분지 서부를 침공하여 백산당과 연합하여 흑산당을 몰아냈다. 그 결과 동튀르키스탄 무슬림들은 준가르 칸국에 예속당한다.
갈단 칸은 아파크 호자와 그의 후손들을 달라이 라마 5세의 윤허 하에 타림 분지의 칸으로 임명한 후 준가르 칸국의 '''봉신'''으로 삼았다. 쫓겨난 흑산당은 이후 아파크 호자와 백산당을 배신자로 선전했으며, 지금의 위구르 독립 운동 세력에게도 아파크 호자의 평가는 우리나라의 이완용 수준이다. 위구르인 중 티베트인들을 안 좋아하는 사람들은 티베트 불교와 이슬람의 차이 때문에 싫어한다기보다는 아파크 호자가 생각나서 싫어한다고 볼 수도 있다. 준가르 칸국이 위구르인들을 잔학하게 수탈한 것은 물론 결과적으로 준가르 토벌을 명목으로 한 중국의 개입을 불러일으켰기 때문. 물론 달라이 라마 5세에게 빌붙었다는 점 때문에 더 안 좋은 평가를 받는다. 여담으로 카슈가르에 있는 아파크 호자의 묘는 중요 문화재로서 중국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다.
오늘날에는 해외 망명 위구르 운동가들 사이에서 티베트 망명 정부처럼 체계적이고 구심점이 잡힌 망명 정부를 구성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의견이 모인 결과 독일에서 세계 위구르 회의라는 단체가 발족하였으며 종교를 떠나 티베트 망명 정부와 독립 및 인권 운동 관련하여 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레비야 카디르를 대상으로 "위구르의 달라이 라마"라고 지칭하는데, 이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차원에서 달라이 라마라는 명칭을 오늘날의 중공 내에서 혐칭, 멸칭 수준으로 격하시키려는 운동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12. 중동 지역과의 관계


일반적인 오해와 다르게 위구르인들은 아랍인으로부터 이슬람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이런 오해는 고선지탈라스 전투만 국내에 단편적으로 알려져서 생긴 오해로 신장 서부가 이슬람화한 것은 서기 11세기 무렵이고 신장 동부가 이슬람화한 것은 서기 15~16세기 무렵이다.[4]
문화적으로 이슬람 이전 시대부터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도 상당히 받기도 했다. 타슈쿠르간 같은 서부 지역에서는 기원전 6세기 무렵 조로아스터교 유적이 발견되었다. 신장 지역의 건포도 식용과 포도주 생산 역시 고대 페르시아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5] 위구르인들은 이란 고원의 페르시아인들과 교류보다는 주로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인, 타지크인들과 교류가 많았으며 근세 이란사파비 왕조의 영향으로 시아파 국가가 되면서 종교적으로도 서로 갈라졌다.
민간 감정은 친한 편이지만 대신 터키를 제외한 무슬림 국가들 정부 상당수는 중국의 위구르 인권 탄압에 침묵을 지키는 분위기이다. 이슬람권 나라들의 경제 사정이 열악하거나 혹은 원자재 수출에 의지하는 이유로 중국과 외교적으로 트러블을 감수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도 있다. 위구르인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 몇몇 걸프 아랍 왕정 국가들이나 이란 등 이슬람 원리주의 신정 국가들이 스웨덴, 노르웨이 같은 나라들 앞에서는 이슬람 근본주의 선교를 막지 말라며 큰소리 뻥뻥 치다가 중국 앞에서는 입을 다무는 상황에 대해서 좋게 여기진 않는다.
이스라엘도 위구르를 탄압하는 중국 정부를 비판적으로 보며 일부 위구르인들은 이스라엘에도 거주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이 부분은 자신들의 팔레스타인인 무슬림 탄압에 대한 국제 사회의 성토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

13. 남아시아 지역과의 관계


고대 신장 지역은 쿠샨 왕조의 문화적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은 편이었다. 고대 중국에서 생산된 비단은 신장 지역을 거쳐 쿠샨 왕조로 다시 신드 지역의 항구 도시에서 로마 제국으로 수출되었다. 이를 반영하듯 누란 유적에는 인도 카로슈티 문자 등이 발굴된 것을 비롯해서 문화적 교류가 활발했고 이는 인도 불교가 신장 지역을 거쳐 중국으로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금강경을 한역한 것으로 유명한 쿠마라지바카슈미르 출신과 쿠처 출신의 부모를 둔 혼혈인이었다.
신장 남부(알티샤르)지역은 길기트 발티스탄을 넘으면 카슈미르 및 파슈툰족 거주지역 등과도 연결되다보니 카슈미르인펀자브인 등 북인도 지역의 제족 및 사람들과 혼혈이 되기도 했다. 일부 벵골인들도 인도 북부로 간 사람들은 인도 북부를 통해 위구르를 비롯한 신장 지역 민족들과의 교류와 혼혈화가 되기도 했다. 위구르와 우즈베크의 조상인 카를루크계 및 카를루크에서 갈라진 차가타이어파 투르크인들은 북인도의 벵골까지 점령하기도 했으며, 벵골로 이주해온 일부 투르크계 사람들은 벵갈 술탄국의 고위층을 이루기도 했었다.
남서부 지역은 파키스탄과도 접하다 보니 파키스탄과의 교류도 있는 편이다. 다만 파키스탄은 옛날에 친중성향이 많다 보니 해외의 위구르인들은 파키스탄인과 완전히 좋다고 보긴 어렵다. 파키스탄에는 약 1천여 명 남짓한 규모의 위구르인들이 거주하는데 파키스탄 정부는 중국과의 마찰을 우려하여 이들을 위구르인이라고 분류하지는 않고 카슈미르족이라는 명칭으로 분류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파키스탄인과 사이가 매우 나쁜 정도인 것도 아니다.
2018년 9월 방글라데시와 인도의 무슬림들이 사는 지역에서 반중 시위가 나타나 위구르 인권 탄압을 규탄했다. 중국 상품 불매운동도 나타나기도 했다. #

14. 기타 서구 선진국들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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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년 7월 신장 위구르 자치구 내 인권 문제와 관련하여 중국을 비판한 국가들(노란색)과 그 다음날 바로 중국이 인권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고 칭찬한 국가들(남색) 중국의 위구르인 대상 제노사이드가 미국 CIA의 날조 혹은 이슬람 근본주의 언론의 선동이라고 주장하는 중국 측 주장과 다르게 미국은 여기서 빠져있고, 대신 2003년 미국 조지 W 부시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했던 프랑스 등 국가들이 들어가 있다.#
"집단 강간·전기고문"…중국대사 초대해 '위구르 수용소' 영상 면전서 보여주는 BBC 패기
오늘날 위구르 독립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나라들은 사실상 네덜란드영국, 독일노르웨이 같은 서구 선진국들이다. 해당 국가로 망명 혹은 이주한 위구르인들은 위구르 독립 운동 관련 소셜 미디어 페이지를 만들어서 중국 내 인권 탄압 상황을 적극 홍보하고 있다. 위구르인 독립 운동의 구심점이 될 목적으로 계획된 세계 위구르 회의역시 독일 뮌헨에 위치한다. 위구르인 여성들 중 중국인들과 강제 결혼한 사람들 중 서구 선진국으로 망명 신청을 하는 경우, 혹은 남편과 같이 이민한 후 이혼해버리는 경우도 꽤 된다고 한다.
호주에도 5천명에서 1만명 되는 위구르인들이 거주하며, 이들도 망명해온 사람들이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도 신장의 무슬림들을 탄압하는 중국 정부를 비판하며, 위구르 인권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티베트계 미국인들이 무국적자로 취급받아서 비자, 체류 문제에 불이익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외 체류 위구르인들도 여러모로 곤란을 겪고 있다.

14.1. 캐나다와의 관계


캐나다내에도 망명한 위구르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2021년 2월 22일에 캐나다 의회는 중국 정부의 위구르족 탄압을 제노사이드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4.2. 네덜란드와의 관계


네덜란드 의회는 '위구르족에 대한 중국의 처우는 집단학살에 해당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구속력은 없지만 이번 결의안으로 네덜란드는 유럽연합(EU) 국가 중 중국의 위구르족 탄압을 '집단학살(genocide)'로 규정한 첫 번째 국가가 됐다. 이 결의안은 "소수민족인 위구르에 대한 집단학살이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다"며 1948년 발효한 유엔 '제노사이드 협약'을 위반한 것이라고 규탄했다. #

15. 친중 독재국가들과의 관계


이란의 반정부 진보단체들은 이란 신정 정권이 중국의 위구르 무슬림 탄압에 침묵하는 이중성을 비판하고 있다.# ## ### 이런 비판을 의식하듯 이란 정부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처럼 대놓고 중국의 위구르 무슬림 탄압을 부인하거나 협조하는 행동까지는 하지 않고 있다.[6][7] 이란도 발루치스탄, 후제스탄, 남아제르바이잔, 동북부 국경 일대의 투르크멘인 등 분리주의가 강하거나 일부 분리주의를 원하는 곳도 있다보니 함부로 비난하기 어려운 이유도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중국의 신장 재교육 캠프 운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사우디아라비아 내에서 활동하는 위구르인 활동가 두 명을 체포하고 중국 송환을 추진하여 휴먼 라이트 워치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 ## 위구르인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네덜란드, 스웨덴 같은 나라들 앞에서는 이슬람 근본주의 선교를 막지 말라며 큰소리 치다가 중국 앞에서는 입을 다무는 상황에 대해서 좋게 여기진 않는다. 위구르 독립 운동 단체들이 운영하는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 특히 빈 살만을 저격하는 내용도 종종 올라올 정도. 여담으로 사우디아라비아는 끝내주는 친미 국가로도 유명하지만 빈 살만이 실세를 잡으면서 친중 외교가 강화되는데다가 코로나-19 사태 초기 당시 사우디 왕족들이 코로나바이러스가 중국발 바이러스가 아닌 미국의 생화학무기라는 유언비어를 앞장서서 퍼트리는 등 노골적인 친중 성향도 나오고 있다.
베네수엘라, 짐바브웨, 미얀마, 에리트레아 등은 유명 친중 국가들은 외교적으로 하나의 중국 입장을 지지하면서 신장 재교육 캠프가 극단주의자들을 대상으로 한 직업학교라는 중국의 주장에 동조하는 입장이지만, 이는 진영 논리 편가르기 문제이지 위구르에 대해서는 교류도 관심도 없고 자국 내 상황 처리하기도 바쁘다.

16. 일본과의 관계


일본 역시 위구르 인권 탄압 문제를 비판하는 나라들 중 하나이며, 일본의 위구르인들도 미국, 호주, 영국 못지 않게 적극적으로 중국을 비난한다. 하지만 일본 극우들은 이를 이용해 일본의 우경화를 정당화하려해서 이에 비판적으로 보는 위구르인들도 일부 있다. 심지어 레비야 카디르를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를 강요하는 일마저 일어났다. 다만 위구르인들은 한중일 갈등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보니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기도 하다. 정작 일본 극우들은 이슬라모포비아도 심하다보니 위구르인들도 이슬람을 믿는 이유로 좋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그래도 지리적으로 일본만큼 가까운 곳이 잘 없다보니 일본으로 망명한 위구르인 인구는 약 1천여 명 정도에 달한다. 위구르 단체들은 일본에서 위구르 문화를 복원하여 보존시키려 하고 있다.

17. 미국과의 관계


미중 패권 경쟁으로 인한 제2차 냉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미국과 중국은 치열한 경쟁 상대다. 중국에서 미국의 약점인 팔레스타인 문제를 위성 국가인 북한, 이란을 통해 건드리면 미국은 중국의 약점인 대만을 지원하거나 홍콩, 티베트, 위구르 인권 문제를 지적한다. 당장 바이든시진핑의 첫 통화를 봐도 그랬다.
미국에는 위구르계 미국인 협회(Uyghur American Association) 이른바 UAA라는 단체가 워싱턴 D.C.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해당 단체는 세계 위구르 회의와도 협력 관계이며, 단체를 창립한 루샨 압바스레비야 카디르와 마찬가지로 여성 독립 운동가이다.
중국 정부는 2009년 우루무치 유혈사태가 UAA의 선동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18. 지역별 관계


[1] 고려시대 원 간섭기 시절 역관들이 가장 중요하게 배웠던 언어가 바로 위구르어였다. 조선 초기에도 역관들에게 위구르어를 교육시켰다 한다.[2] 몽골어를 기록하기 위해 차용되었으며 내몽골 지역에서는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사용되고 있다. [3] 까체족은 원래 카슈마르 사람이라는 뜻인데, 백산당이 처음에 카슈미르로 도망쳤다가 그 다음에 라싸로 올라왔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4] 신장 서부의 카라한 칸국은 서쪽의 타지크사만 왕조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신장 동부의 이슬람화는 차가타이계 모굴리스탄 칸국의 영향이다.[5] 고대 페르시아의 포도주 문화는 인접한 캅카스 지역에 영향을 받았다.[6] 이란은 미얀마로힝야 난민 사태 당시 미얀마 정부가 같은 친러, 친중 진영임에도 불구하고 강도 높게 로힝야 탄압을 비판했었는데, 이 때문에 중국의 위구르 탄압에 혹여나 조금이라도 협조했다가는 국가 체면과 권위에 적잖은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7] 그리고 호메이니 시절에 이란은 위구르 문제로 중국과 사이가 나빠진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