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승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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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계 미국인 야구 선수로, 보직은 투수이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동했으며, 2012년은 일본프로야구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뛰었다. 2015시즌 종료 후 무소속. 2018년 4월부터 7월까지 두산 베어스 인스트럭터 코치로 계약했다.
국적회복 소송에서 패소함으로써 병역기피자로 낙인찍혔다.
2. 아마추어 시절
귀화 이전의 자료는 한국인 시절 이름인 '백차승'으로 검색해야 나온다. 원래 부산고 시절, 차승 백은 최고 150km/h를 넘는 불같은 강속구를 던지는 우완 파이어볼러로 1학년 때부터 다른 선배들을 제치고 에이스로 활약하며 팀을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4강에 올렸으며, 1996년말 고려대 측과 1억원에 입학 가계약에 합의했을 정도로 누구나 다 인정하는 초고교급 투수였다.
차승 백이 3학년이 되었을 때, LA 다저스와 시애틀 매리너스 등의 구단이 접촉하며 해외 진출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998년 1월 LA 다저스와 비밀 테스트를 가졌다. # 때마침 부산고 감독으로 부임한 조성옥 감독이 차승 백과 그의 부모에게 해외 진출을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미국 구단 측과 협상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조성옥은 롯데 코치옷을 벗으면서 롯데 프런트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고, 때문에 부산고 출신의 유망주들에게 롯데 입단 대신 해외 진출을 적극적으로 주선한 인물로 보도되어 있다.하지만 이 보도를 전적으로 믿기 힘든건 같은해 경남고의 송승준 선수도 미국에 진출했었다. 그렇다면 그 당시 경남고 감독도 롯데와 악감정이 있어서 미국 진출을 권유했다는건가? 오히려 차승 백의 영입경쟁에서 실패했던 곳에서 조성옥 감독을 희생양 삼아 영입실패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자기합리와 내지 변명이라고 보여진다. # 이미 5월 20일 시애틀 매리너스 입단 계약에 합의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일반인들은 차승 백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에 이런 보도는 그냥 흘러가는 기사에 가까웠다. 문제가 터진 9월 12일에는 이미 시애틀 입단이 확정된 상태였고, # 9월 24일 시애틀 매리너스의 입단이 공식 발표되었다. #
차승 백이 전국적으로 알려진 것은 바로 9월 12일이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한국 청소년 대표팀으로 선발된 차승 백은 1998년 9월 12일 일본에서 열린 대만과의 경기에 선발로 출전했다. 5회까지 피칭을 마친 그는 팔꿈치 통증을 호소하며 투수 교체를 요구했고, 이에 최주현[3] 당시 청소년 대표팀 감독은 마운드에서 내려오는 것은 허락하고, 대신 1루 수비를 볼 것을 지시했다.[4] 하지만 차승 백의 자진강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여겼던 최주현 감독은 이렇다할 언급없이 고개만 끄덕거렸고 차승 백은 이를 감독의 자진강판 허가라 생각하고[5] 덕아웃으로 들어와 버렸으며, 이후 경기는 한국의 역전패로 끝났다.
당시 대회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선수는 일본의 마쓰자카 다이스케였다. 마쓰자카의 유일한 대항마로 평가받던 차승 백은 일본과의 예선전 대결에서 마쓰자카와의 선발대결에서 1:0으로 앞선상황에서 교체되었고 후속 투수들의 실책과 실점으로 2:1로 역전패 하게된다. 한국팀은 패하였으나 그 당시 일본 차세대 드림팀이라고 칭송받던 일본 청소년 대표팀을 0점대로 막아내었던 무명의 대한민국 선발투수 차승 백이 전 세계 야구 스카우터들의 주목을 받게된다. 그후 9월 12일날 준결승 대만 전에서 문제의 자진강판 사건이 발생하였고 경기는 졌으며 차승 백은 고스란히 패전의 멍에를 짊어지게 된다. 그 당시 사실과 다른 내용을 언론 등이 일제히 마녀사냥에 나서듯 메이저 리그 진출을 위해 국가대표 경기에서 꾀병을 피운 듯 몰아세웠고 국민들은 그걸 믿게 된다. 하지만 1,2,3 선발이 고르게 출전하는 일본 국가대표팀과 달리 시스템화 되지 못했던 정신력만 강조하던 후진 야구 시스템의 대한민국이었기에 차승 백을 무리하게 연달아서 선발등판 시켰다는 사실은 언론에서 관심받지 못하였고. 꾀병이라고 언론에서 매몰차게 몰아세웠지만 시애틀 매리너스 진출 이후에 결국 팔꿈치 통증이 재발되고 선수 생명을 발목 잡았으며 꾀병이 아니었다는게 드러났다. 당시 같이 대표팀을 뛰었던 권오준도 백차승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 때 대표팀 뛰었던 선수들은 다 알 것이라며 오히려 동료들이 등판을 말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그 당시 국가대표 야구 시스템이 감독의 독단이 아니라 선진화된 선발투수 로테이션 시스템을 갖추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일본의 국가대표 마쓰자카 다이스케와 국가대표 선발 대결을 펼치던 차승 백의 미래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차승 백과 1980년생 동갑내기인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활약은 야구팬이라면 누구나 알것이다.
문제는 해당 경기 직후 차승 백의 감독 지시 거부 의혹이 사방팔방으로 퍼진 데다 차승 백의 아버지가 미국행을 위해 일본까지 찾아와서 태업을 조장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언론을 통해 나온 바람에[6] 분위기가 엄청나게 험악해졌다는 것이다. 결국 대한야구협회는 이후 상벌위를 열고 감독과 차승 백에게 각각 징계를 내렸으며, 그 중 차승 백은 '''무기한 자격 정지''' 처분을 받게 된다.
이러한 징계 처분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긴 한데, 일단 당시 차승 백에 대한 여론이 너무나 나빴던 터라 그냥 넘어가는 건 불가능하고, 어떤 식으로든 처벌이 내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그 내용에 비해선 이게 엄청 대단한 중징계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것이 무기한 출전 정지는 아마추어 야구대회를 주관하는 대한야구협회(KBA)에서 받은 처벌이지 프로리그를 주관하는 한국야구위원회(KBO)로부터 받은 게 아니기에[7] 한국프로야구 리그와는 무관한 징계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차승 백은 징계 당시 이미 3학년으로 졸업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물론 현재는 KBA-KBO 협정이 개정되어, KBA에서 무기한 출전 자격 이상의 징계를 받은 선수는 징계 해제일로부터 1년 이상 경과해야만 KBO 구단에 입단할 수 있게 되어 있다지만, 당시만 해도 그런 규정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국내 프로야구 리그에서 뛰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해당 징계 탓에 국제 대회 출전에 지장이 생길 수 있긴 하지만, 야구는 축구와 달리 A매치/국가대항전이 매우 드물고, 리그 경기를 우선시 할 때가 많은 터라 국제 대회 출전은 실상 큰 문제가 안 된다. 더욱이 그대로 국내에 남아 정상적으로 지명을 받아 국내 리그에서 뛰며 실력을 키웠다면 KBO 측의 입김과 언론의 압박에 의해 그나마의 징계도 얼마 안 가 풀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8]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중에 알려진 기사 등을 종합해 볼 때, 차승 백은 고교 2학년 때까지는 고려대와 가계약을 맺는 등 해외 진출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보인 흔적은 없다. 고교 3학년으로 올라갈 때 LA 다저스와 시애틀 매리너스 등 일부 메이저 리그 구단으로 부터 접촉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때마침 새로 부임한 조성옥 감독이 차승 백 부자에게 적극적으로 해외진출을 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5월에는 시애틀 구단과 이미 입단 계약에 합의했다는 발표까지 났다. 사건이 터진 9월 12일 시점에서는 시애틀 매리너스와의 계약이 이미 확정 단계에 있었다. 9월 24일 오전 차승 백과 시애틀 매리너스의 계약 체결이 공식 발표되었고, KBA의 징계 내용이 발표된 것은 그날 오후였다. 징계가 발표되기 전인 24일 오전 11시 이미 차승 백은 아버지 백정일씨, 조성옥 당시 부산고 감독과 함께 시애틀을 향해 출국했다.[9] 다만 당시에는 차승 백의 인지도가 낮았기 때문에 미국 측과 사전 계약 진행 과정이 잘 알려지지 않아 KBA의 징계 때문에 차승 백 측이 급작스레 미국 행을 준비한 것으로 오인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당시에는 관련 규정이 없었다고는 하지만,[10] 요즘 기준으로 보자면 명백한 템퍼링으로, 아무리 규정이 없었다고는 해도 그런 일을 벌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리 좋은 소리를 듣기 힘든 게 사실이다.
3. 프로 시절
1998년 9월 25일, 시애틀 매리너스와 입단 계약을 맺은 차승 백은 잠시 한국으로 돌아와 신변을 정리한 뒤 미국으로 완전히 건너갔다. 하지만 시애틀 입단 이후에도 잦은 부상을 겪으며 수차례 수술대에 올랐고, 이 과정에서 구위가 크게 떨어졌다. 구위 하락에 따라 성적 역시 매우 실망스러운 수준이었으며, 이때 받았던 평가가 '구속만 빠를 뿐이지, 다른 면은 한없이 평범한 투수'였다.
이후에도 계속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를 오르내리다가 2008년에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트레이드 되었는데, 로테이션을 꾸준히 돌며 6승을 거두는 등 그나마 미국 진출 이후 가장 좋은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다시 부상이 찾아왔고, 결국 이듬해인 2009년 10월 8일 샌디에이고에서도 방출당했다. 결국 수많은 마이너리그 유망주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자신의 한계에 부딪쳐 특별하게 내세울 것 없는 그저 그런 선수로 전락한 것이다.
2010년 초, 인터뷰를 통해 구단에서 방출된 이후 일본 측의 오퍼를 받았지만 이를 거부했다고 밝혔다. 이후 2년 동안 독립리그에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재기를 뛰었으나 별다른 실적을 올리지 못했으며, 다른 메이저리그 구단의 제안도 받지 못했다.
2011년 말, 일본 측 오퍼를 쭉 거절했던 차승 백은 오릭스 버팔로즈의 테스트를 받고, 1년간 계약금 포함 4,000만엔이란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한국행 제의도 왔으나 외국인 선수 신분으로 뛰어야 하기 때문에 포기했다고 한다.
하지만 2012년 시즌 시작 당시 심각한 팔꿈치 통증이 발생하여 6월까지 계속 재활에만 매달려야 했다. 이후 어느 정도 회복하긴 했지만 2군에서 몇 차례 등판했을 뿐 결국 1군 무대는 단 한 번도 서지 못했다. 본인은 오릭스에 남길 희망했으나 오릭스 입장에서는 재계약을 할 이유가 없었다. 이후 2012년 11월 경에는 한국으로 '''입국''', 부산에서 개인 훈련을 하며, 국내에서 뛰고 싶다는 의사를 재차 밝혔다. 다만 이마저도 인터넷 검색이나 기사를 봐도 매우 짤막하게 언급되는 수준이며, KBO는 물론 구단들 역시 아무런 관심을 표하지 않았다. 물론 미국에서 과거 보인 성적을 따져보면 여전히 활약할 여지가 남아 있는 베테랑 투수인 건 사실이나, 각종 규정과 병역 문제를 무릅쓰고 둘밖에[11] 없는 외국인 선수 엔트리 소비해가며 영입해 써야 할 정도로 매력적인 선수는 아니라는 게 가장 큰 걸림돌이다.
결국 2013년 들어서도 그에게 관심을 가진다고 밝힌 구단은 나오지 않았으며, 최악의 경우 이대로 반 강제 은퇴 수순을 밟을 가능성까지 생겼다. 2013년 5월 국내 보도에 의하면 이미 마이너리그라든지 일본 실업리그까지 가서 테스트를 받았으나 모두 탈락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후 별다른 근황이 나오지 않다가 2015년 2월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입단 테스트에 참가했지만 결국 탈락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 4월 10일 일본의 독립 리그 BC리그의 팀인 무사시 히트 베어스(武蔵ヒートベアーズ)에 입단하면서 어찌어찌 끈을 계속 붙들게 됐다. 그리고 아직 프로 무대에 대한 미련이 남았는지 2015년 7월 28일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테스트를 받았다.# 결국 성공해 공식 입단했는데[12] , 2015시즌 2군리그에서 4경기에 등판해 1승, 평균자책 3.95(13 2/3이닝 6실점 6자책), 20피안타 6피사사구 8탈삼진을 기록했으며 1군 승격은 하지 못한 채 시즌 종료 후 팀을 나왔다.
치바 롯데 팬들의 반응은 2015년 용병 영입 중 가장 의문의 영입이었다는 반응. 기량도 떨어질만큼 떨어졌고 즉전감 대체용병도 아니고 보험용 용병을 용병 영입 끝물인 7월 30일에 영입했으니 구단은 무슨 생각으로 영입한 거냐는 반응이 많았다. 플레잉 코치로 영입하려는 줄 알았다(...)는 반응부터 이대은에게 군대 안 가고 귀화하는 노하우 알려주려고 영입한 거 아니냐는(...) 비꼼까지 덤으로 받았다. 그리고 한신 타이거스의 입단 테스트를 받았으나 불합격되었고, 이후로는 새 팀을 구하지 못한 가운데 시간을 흘러보내고 있다가[13] 은퇴하고 2018년 두산 베어스와 2군 인스트럭터로 3개월 간의 계약을 맺음으로써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여담이지만 2013년 경에 무기한 자격정지 징계가 제1회 WBC를 앞두고 있던 2006년에 이미 풀렸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흔히 WBC 당시 차승 백을 대표팀 멤버로 차출할 계획을 잡고 KBO가 직접 KBA에 요청, KBA가 이를 받아들여 징계를 해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전혀 다르다. 아래에서 서술하는 국적 문제와 언론 플레이와 관련된 내용 때문이다.
4. 지도자 시절
2017년 12월에 난데없이 두산 베어스에서 그를 코치로 영입한다는 설이 돌았고 이후 잠잠하다가 2018년 4월부터 3개월 동안 2군 인스트럭터로 계약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구단에서는 계약 연장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야구규약 107조 1항에 따라 치바 롯데 마린스와의 계약 관계가 종료된 2015년 말을 기점으로 7년 동안 KBO 리그 팀의 코칭스태프로 들어갈 수 없기에 이런 방식을 쓴 듯. 그러나 이유야 어찌 됐든 도덕적인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보통 병역기피자나 단독이민자[14] 에게는 한국에서 경제활동이 가능한 수준의 동포비자가 잘 나오지 않는데 이런 계약이 성립했다는 것을 보아 비자 문제는 어찌어찌 해결된 듯 하다.
이후 2020년 이승진에 관한 기사에서 두산 베어스 2군 코칭스탭으로 이름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이후 쭉 두산 베어스 코칭스태프로 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5. 국적 문제와 언론 플레이
1999년 해외 유학을 사유로 병역 연기를 요청했고, 국방부 측은 이를 받아들였으나 1년 후인 2000년 연기 기간이 만료되고 추가 연기 신청 요청이 없자, 그를 병역판정검사 대상자로 선정한다. 같은 해 6월 별다른 사유 없이 징병검사에 불참하면서 국방부는 그를 병역기피 의심자 겸 출입국 사무소 즉시 통보 대상자로 분류했으며, 이에 아버지 외 1명이 귀국 보증을 선다. 하지만 같은 해 10월 차승 백이 재차 국방부 측의 귀국 요청에 불응하면서 결국 병역법 위반 혐의로 고발 조치되었고, 아버지 외 1명은 귀국 보증 위반으로 각각 5천만 원의 벌금을 부과 받았다. 이후 2005년 미국 국적을 가진 여성과 결혼하여 한국 국적을 포기함과 동시에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였고, 그 해 겨울 미국인 신분으로 한국에 귀국이 아닌 '''입국'''을 한 바 있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미국 국적을 취득한 것 치고는 그 진행 과정이 꽤 치밀한 느낌인데 각종 인터뷰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선 항상 이야기하길 거절하는 탓에 그가 미국 국적의 여성과 결혼한 것 외에도 뭔가 다른 방법으로 미국 국적을 취득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차승 백은 당시 메이저리거 신분이었고 메이저리거는 최소연봉이 억대인 미국에서도 최고 연방세율을 적용할 정도로 손꼽는 고소득 직종에 구단의 보증으로 신원이 확실한, 전세계 어느 나라를 가나 환영받을 고수입에 사회적 명망이 있는 외국인이다. 말하자면 체육계열의 최상위 전문직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수준의 직업을 가진 사람이 귀화를 하고자 했을 때 귀화가 되지 않는 쪽이 더 이상한 것. 그냥 행정서사에 돈 주고 맡기면 알아서 국적이 나올 수준이다. 또한 어느 나라나 결혼이민에는 굉장히 관대하여 비자도 쉽게 나오며, 귀화 조건도 일반 귀화에 비해 허들이 낮다.[15] 이를 생각했을 때 당시 차승 백은 귀화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여럿 갖추고 있었기에 부정한 방법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근거없는 억측에 가깝다. 애초에 차승 백의 귀화 과정이 상세하게 드러난 적은 없기 때문에 하다 못해 그냥 일찌감치 준비를 시작해서 필요한 기간을 채운 것일 수도 있으므로 확실한 증거 없는 추측은 곤란한 일. 사실만 말하자면 차승 백 스스로가 원해서 미국 귀화를 했고 이를 통해 병역 문제를 회피했다는 것 하나 뿐이다.
가끔 쿠바 선수들과 비교하는 경우가 있는데 쿠바 선수들은 정치적 이유(실제 사유는 메이저 리그에서 뛰기 위해서지만)로 망명을 하기 때문에 시민권이 잘 나오는 것이고, 이 경우와는 케이스가 좀 다르다. 하긴 한국인의 경우도 병역의무의 부당함을 이유로 외국에 난민 신청을 하고 이게 실제로 받아들여진 케이스도 있기는 하지만 차승 백의 케이스가 이것이라고 볼 증거는 전혀 없으며, 차승 백 관련 논란에서 시민권 취득 과정은 딱히 별 의미가 없는 부분이다.
간혹 병역 기피를 위해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국적을 취득한 일 때문에 그를 스티브 유 같은 놈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존재하며, 이에 대해선 저마다의 시각에 따라 다소 의견이 갈리는 편이다.
결론을 말하면 차승 백의 징계 해제는 국가대표 발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사자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함에 따라 굳이 징계를 계속 이어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보는 게 맞다. 다만 안우진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징계 해제는 꼭 야구협회 스스로 발의해야만 논의되는 것은 아니고 당사자도 재심사 요청이 가능하기 때문에 미국 시민권 취득을 하지 않았다고 계속 징계가 유지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이러한 과정에서 언론들이 쏟아낸 기사들은 한결같이 차승 백의 입장에서의 억울함을 대변하는 편향된 것들이 많았다. 일례로 비교적 최근의 기사인 두산 베어스 투수 인스트럭터 관련 기사에서도 그가 주장하던 입장을 그대로 따라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그가 실제로 언론을 움직여 그런 기사들을 만들어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결같이 그런 기사들만 나오기 때문에 "언론플레이에 능하다"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6. 기타
제2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당시, 샌디에이고의 5선발로 그럭저럭 활약하고 있던 차승 백을 국가대표로 선발하자는 이야기가 김인식 당시 대표팀 감독으로부터 나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소식을 접한 차승 백은 국제대회에 출전할 정도로 팀내 입지가 안정적이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국가대표로 뽑힌다 하더라도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박찬호가 불참 의사를 밝힌 직후였던 터라 김인식 감독이 어려운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 언론플레이를 했을 뿐, 별다른 뜻은 없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의견이다. 차승 백이 대표팀 합류를 원했더라도 실제 선발됐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가 병역법 위반 사범이란 것만으로도 충분히 논란거리가 되는데[16] 그런 구설수를 감수하고 선발해야 할 정도로 뛰어난 선수라고 보기는 어렵다.[17]
어떻게 보자면, '''생각없이 무작정 미국행을 택하는 많은 유망주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산 증인'''이기도 하다.[18] 그의 통산 성적은 메이저 리그에서도 충분히 통했고 이 정도면 야구 외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한국에서 정상적으로 뛰었어도 충분히 큰 활약을 할 가능성이 높은 수준급 선수였지만, 본인이 자초한 병역기피로 모든 게 꼬여 기량과 가능성에 비해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저평가와 허무한 은퇴를 하고 은퇴 이후에도 정착에 큰 지장이 있는 상태다.
메이저 리그에서 오퍼가 들어올 정도의 유망주라면, 한국에서는 좋은 대우와 지원을 받으며 상당한 시간을 들여 성장할 만한 기반을 얻을 수 있다. 더욱이 이전에 비해 한국 프로야구 리그 자체에 대한 세간의 평가도 많이 좋아진 터라, 류현진, 강정호와 같이 한국 프로야구에서 대성공을 거둔 뒤 만족스러운 조건에 메이저 리그로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설령 윤석민, 황재균, 김현수, 박병호, 이대호와 같이 해외 리그에서 적응을 못하고 실패하더라도, 한국에서의 실적만 있다면 돌아오더라도 충분히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19]
반면, 미국행을 택할 경우 생활 방식도 다르고 말도 안 통하는 상황에서 좋은 대우나 지원을 기대하긴 커녕 거의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하며 '''우월한 신체 능력과 재능'''을 갖춘 북미, 중남미 계열 선수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 이 경쟁에서 승리[20] 하면 정말 다행이겠지만, 무릎 부상을 당하는 등 여러 팀 마이너를 거친 끝에 옵트아웃을 선언하고 귀국한 이학주의 사례와 같이 부상 등 한순간의 실수로 경쟁에서 밀리면 그야말로 나락까지 추락하게 되는데, 보통은 버리는 카드 수준으로 전락하여 여러 구단으로 돌려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 부상을 털고 기회를 잡아 재기할 수 있다면 모를까 어지간해서는 끝내 방출되고 이후엔 독립 리그나 타국 리그 용병으로 이곳 저곳을 전전하다가 선수 생활을 마감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박찬호와 김병현 이후 미국으로 수십 명에 달하는 고교 유망주들이 건너갔으나 결국 살아남은 건 추신수 뿐이고, 대부분은 메이저 리그를 밟아보지도 못한 채 쓸쓸히 은퇴하거나 국내 리그로 돌아와야 했다는 걸 상기해 보자.[21][22] 그마저도 해외파 특별 드래프트 대상이 아니라면 2년 간의 유예기간을 거쳐야 하며, 차승 백처럼 국적을 포기한 상태라면 그 미약한 가능성마저 완전히 사라지지만 말이다.
한신 타이거즈 입단 불합격 이후 2018년 현재, 차승 백과 관련된 소식을 찾아보기 매우 어렵다. 그나마 국적회복소송 패소 기사에서 선수생활을 마쳤다고 나온 거로 보아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만 알수 있다. 김현수, 오승환, 박병호, 강정호 등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한국인 선수들의 활약상이 자주 보도되고 있으며, 특히 오승환은 도박 파문도 거의 극복하면서 MLB에 완벽하게 적응했고, 마이너부터 시작해 메이저로 올라와 이름값이 다소 떨어지고 약물 전과가 있는 최지만마저 점차 조명을 받고 있는 것에 비해 '''차승 백은 사실상 국내 팬들에게 잊혀져 갔다.'''
차승 백은 국적회복을 하지 않는 한에는 KBO에서 뛰려면 '''외국인 선수''' 신분으로 뛰어야 하는데, KBO 리그는 1, 2군 구분없이 외국인 선수 보유 숫자는 3명으로 제한하기 때문에[23] 즉시전력감 선수에 집중할 수밖에 없고, 연봉제한 철폐로 외국인선수에 대한 기대치 자체가 많이 올라갔다. 따라서 차승 백처럼 당장 시간적 여유가 필요한 외국인 선수를 영입하는 건 무리다.[24] 그렇다고 사실상 병역기피가 명백한 상황에서 한국 국적 회복 신청을 받아줄 리도 없다.
사실 본인이 직접 미국 국적을 취득했으니 KBO에서는 당연히 외국인 선수 신분이 맞고, 외국인 슬롯을 써야 하는데 차승 백은 부상 복귀 이후 마이너리그에서 방어율이 9.28이다. 미국 독립리그에서도 방어율이 5점대이며, 이후 베네수엘라 윈터리그 까지 갔지만 거기서도 5점대 방어율. 어렵사리 진출한 NPB에서는 1군 무대를 밟아보지도 못했다. 요즘 KBO 리그에 오는 외국인 선수들은 대부분 풀타임은 아니라도 메이저 경력 정도는 있으며 없을 경우에는 AAA에서 날아다니는 선수들을 영입하는데, 차승 백이 전성기에 쌓았던 메이저리그 커리어(통산 16승 18패 평균자책점 4.83)는 KBO 리그에 오는 외국인 선수들의 평균을 기준으로 봤을 때 나쁜 성적이 아니지만, 이미 나이도 40대 가까이에 접어든데다 부상 이후에는 마이너에서도 패전처리급의 성적을 기록한 선수를 외국인 슬롯 한 장 버려가며 영입할 팀은 없으며, 설령 프로야구 초창기 시절과 같이 해외 교포 선수 영입과 관련된 규정이 생긴다고 해도 논란을 무릅쓰고 병역기피 혐의를 가진 선수를 영입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결론적으로 미국과 일본에서의 활약에 실패했고 한국에도 올 수 없다면, 이제 남은 선택은 독립 리그나 대만, 호주행 정도[25] 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선수로서는 은퇴를 한 모양.
2016년에 국적 회복 신청을 했다가 법무부에서 받아들이지 않자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으나, 법원은 2018년 5월 14일 병역 기피 목적이 명백하다는 이유로 패소 판결을 내렸다. 아마야구에서의 징계 때문에 불가피하게 귀화를 했다는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병역의무가 사라지는 만 38세 이전에 국적회복 신청을 했다는 점도 '사회복무요원 편입을 계산하고 한 행동이다'라며 참작되지 않았다. 헌데 인스트럭터 활동을 할 정도면 외국인 신분이긴 해도 한국 내 경제활동에 지장이 없다는 얘기고, 국적을 회복한다고 야구 규약에 따른 해외진출자의 복귀 유예기간이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굳이 국적 회복 신청을 한 이유는 불명. 세금 문제라든지 개인적인 명예, 미국 생활 부적응 등이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본인이 직접 밝히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병역기피 목적이 명백했고 판결이 나왔기 때문에 여론은 싸늘한 편이다.
2019년 SBS에서 방영한 야구드라마 스토브리그에서 이용우가 연기하는 한국계 미국인 야구선수이자 드림스에 용병으로 합류한 로버트 길(한국명 길창주)이 차승 백을 모티브를 한 것으로 보인다.[26]
미국 국적이지만 원래 한국에서 쭉 살다가 뒤늦게 귀화한 케이스라 영어가 서투른 것인지 2015년의 치바 롯데 마린즈 입단 기자회견 등 굳이 한국어를 쓸 필요가 없는 곳에서도 한국어로 말한다.
7. 관련 문서
[1] 찰스 백, 스티브 백 같은 영어 이름으로 바꿨다는 루머가 돌았으나 본인이 직접 부인했다. 미국 여권상 본명도 이 이름을 쓰고 있다고 한다. 일본 오릭스 시절에도 다른 영어 이름이 아닌 한자 (백차승)으로 등록명을 썼다.[2] 現 동일중앙초[3] 고교야구계에서 잔뼈가 굵은 지도자로, 광주상고, 덕수상고, 신일고, 천안북일고, 청주기계공고, 휘문고에서 지휘봉을 잡은바 있다.[4] 감독측 주장[5] 차승 백 측 주장[6] 단, 이는 잘못된 내용의 기사로 차승 백의 부친이 일본으로 직접 온 적은 없다고 한다.[7] 과거 1982년 김일권이 국가대표 무단이탈로 비슷한 수준의 징계를 받은 적이 있다. 물론 그도 당시에는 아무 지장 없이 KBO에서 뛸 수 있었다.[8] 하지만 선수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미 선술한대로 고려대와 입학 합의한 상태였기에 KBA의 징계는 직격타가 될 수도 있었다. KBA의 징계는 대학부에서도 통하기 때문. 대학입학이 무의미해진 상태에서 대회와 징계가 9월 중순에서 말이였던걸 생각해보면 드래프트도 사실상 의미가 없다. 현실적 신고입단이나 프로지명 재수만이 남았는데, 미국에서 오퍼가 올 정도의 선수에게 당연히 고려해볼만한 가치가 없었을 것이다. 사실 해당 대회에서 청소년 대표팀의 부진을 되짚어보는 기사에선 선수들의 투지부족과 함께 협회의 준비부족을 꼽았는데, 실로 무능하다 못 해 한게 없을 정도였다. 상대팀 선수에 대한 사전정보는 커녕 선수명단 조차 현장에서 받았고, 지명타자제도가 있는 줄도 몰랐으며, 뒷바라지를 해주기 위해 동행한 협회 관계자는 대회기간 중 귀국한 단장을 제외한 단 한 명이였다.# 이런 처참한 실상을 가리기 위해 불성실한 모습을 보인 선수를 유독 심하게 대했을거란 의혹을 거둘수 없다.[9] 당시 고졸우선지명으로 픽했던 송승준마저 미국으로 떠나 버리는 바람에 롯데 자이언츠로서는 여러 모로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10] 봉중근을 졸업 전에 템퍼링으로 빼간 게 규정 신설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전에는 관련 규정이 사실상 없었다.[11] 당시는 2명이었고 2014년부터 외국인 엔트리가 3명으로 늘었다.[12] 이때 500만 엔(약 4만 5천 달러)라는 헐값에 계약을 맺었다. 시즌 중간에 계약을 맺어서 그런지(사실 7월 30일에 입단한 거면 용병 선수 입단 거의 끝물이다. 대체 용병의 마지막 영입시기는 보통 7월 말~8월 초이니.)보험용 용병인 것을 감안해도 엄청난 헐값에 입단. 오릭스에서 1군 기록은 없었지만 나름대로 기대치를 모았던 2012년에 4000만엔(약 35만 달러) 정도는 받았다는 걸 생각하면...[13] 한신의 입단 테스트에서 떨어진 후에 잠깐 한국 동아대학교 야구부에서 비공식적으로 인스트럭터를 했었다고 한다. 이때 많은 도움을 받은 선수가 바로 2019년 드래프트에서 대졸임에도 불구하고 LG에 1차지명된 이정용.[14] 병역을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부모 없이 혼자서 해외에 정착해 시민권을 취득한 경우[15] 결혼은 까놓고 남자든 여자든 어느 한 쪽이 어느 정도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 수준이 되지 않으면 힘들어서, 결혼이민이라는 것 자체가 경제적 수준이 되고, 해당국 국민과 결혼까지 생각할 정도로 문화적 동화가 이루어진 외국인이 앞으로 소득분의 세금을 해당국에 바치겠다는 이야기라(+추후 가족계획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자식도 갖기에 저출산국들은 인구수 증가도 기대할 수 있고) 어느 나라든 환영하는 편이다. 심지어 과거 불법체류 경력이 있던 외국인도 결혼비자는 심심찮게 나올 정도.[16] 차승 백의 한국 국적 포기는 스티브 유와 마찬가지로 처벌을 피하기 위한 해외 도피로 간주되기 때문에 공소시효가 무기한 정지된 상태, 달리 말해 영구 지명수배 상태다. 미국 시민권을 얻었기 때문에 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을 뿐 평생을 범법자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17] 그나마 스티브 유보다 관심도가 매우 적어서 언급이 잘 안된다. 스티브 유는 배신감에 인기 많은 연예인이라서 비난을 배로 먹는게 크다.[18] 당시에는 많은 초고교급 유망주들이 메이저 리그 러시를 하던 시절이었다.[19] 그러나, 강정호는 메이저에서 성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선수로서는 말그대로 실패했다. 그 음주운전으로 인해 2017년 이후로는 선수 커리어가 박살이 났다. 한국 복귀 시도도 했지만 결국 한국에서도 못뛰게 되었다. 메이저에서 실패한 선수라도 김현수, 박병호, 황재균은 자기가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대접받고 은퇴식 행사도 할수 있다. 이대호는 이승엽처럼 영구결번+성대한 은퇴식+미니 은퇴투어 정도도 할수 있고 말이다. 말그대로 김동주와 비슷한 이미지가 된 케이스다. 사실 이대호는 미국에서는 1년 플래툰으로 WAR 0.4를 찍긴 했지만 일본에서는 4년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일본리그도 엄연히 해외리그고 수준이 높은 만큼 적응이 필요하다.[20] 박찬호 이 사람 하나로 설명된다. 첫 메이저리거인지라 동양인 인종차별이 끝내줬다고 한다. 박찬호는 미국 문화에 동화되면서도 한국인의 정체성을 절대 놓치지 않으려 애써서 성공한 거다.[21] 송승준, 김선우, 채태인, 봉중근, 서재응, 최희섭, 류제국처럼 돌아와서 KBO 주전이 된 선수는 그나마 성공한 사례고, 최창양, 조진호, 이승학, 권윤민, 안병학, 오철희 등 대부분은 그저 그런 선수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22] 그나마 예전에는 류제국, 서재응, 봉중근, 조진호 등등 상당수 선수들이 메이저 리그를 밟아 보기라도 했지, 2006년 남윤성 이후 20여 명의 고졸 미국 직행 선수들이 나왔지만 최지만을 제외하고는 메이저 리그를 밟지 못했고 남아 있는 선수들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해서 미국에 간지 얼마 안 된 싱글A 및 루키리거들 뿐이다. 2006년부터 미국으로 직행했던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태생 선수들은 메이저 리그 무대를 어렵게나마 밟은 최지만을 빼면 모두 메이저리그를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23] NPB의 경우는 1군은 출전 인원 제한(최대 4명, 투수 몰빵 및 타자 몰빵은 금지)이 있지만 선수단 전체 외국인 선수 보유 한도는 무제한이다. 그래서 나이 어린 유망주를 육성선수로 잡아 두거나 폼이 떨어진 외국인 선수를 보험용으로 영입해 쓰기도 한다. 차승 백이 뜬금없이 일본 진출을 할 수 있었던 이유다.[24] 일례로 팀 공헌도가 컸던 넥센 히어로즈의 브랜든 나이트(現 넥센 히어로즈 1군 투수코치)마저도 한국인 선수들처럼 2군에서 후배들을 이끌다 시즌 후 명예로운 은퇴를 하지 못하고 2014 시즌 중 갑작스럽게 퇴출되었다.[25] 이마저도 호주 리그는 평균적으로 1시즌 내내 뛰어도 '''총 급여가 300만원이 채 되질 않기 때문에''' 사실상 세미리그에 가깝다.[26] 아마추어 대표팀 시절 징계로 인해 한국에서 야구를 할 수 없게 되자 미국으로 건너간 것, 메이저 리그 등판 경험, 병역의무 때문에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고 귀화한 경력, 그리고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 선수 커리어가 꼬인 게 전체적으로 차승 백과 유사하다. 다만 성영훈의 설정(아마추어 대표팀에서의 심각한 혹사)과 WBC에 2차례 참가했다는 오리지널 설정을 더해 차승 백보다는 동정의 여지가 가는 캐릭터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