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옥천교
1. 소개
[1]
昌慶宮 玉川橋
창경궁의 금천교이다.
금천교는 이름대로 금천을 건너기 위해 세운 돌 다리이며, 금천은 풍수지리적인 이유[2] 와 외부와의 경계[3] 를 나타내기 위해 궁궐의 정문과 중문 사이에 둔 인공 개천이다. 그러나 창경궁은 중문이 없기에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s-6의 정문인 명정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2. 역사
1484년(성종 15년) 옛날 태종이 머물던 수강궁 자리에 대비들을 위해 창경궁을 처음 지을 때 함께 건립되었다. 이름은 창건 당시 의정부 좌찬성[4] 서거정이 지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모든 궁궐의 건물이 불탔으나 옥천교는 돌로 지었기에 피해를 입지 않고 오늘에 이른다. 즉 '''현존하는 궁궐의 금천교 중 창덕궁 금천교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되었다.'''
3. 금천
옥천교 밑을 흐르던 창경궁의 금천은 ''''옥류천(玉流川)''''이다. 창덕궁 후원의 옥류천과는 이름만 같은 다른 개울이다. 하지만 창경궁 옥류천의 발원지도 창덕궁 후원이다.
연경당 서쪽과 부용정, 관람정 권역에서 발원한 것으로 보이는 세 갈래의 물이 춘당지에서 합류한 뒤# 남쪽으로 흘러 옥천교를 지난다. 원래는 창경궁 동남쪽으로 물이 빠져나온 뒤 계속 남쪽으로 흘러 종로 5, 6가동을 거쳐 지금의 예지동 광장시장 인근에서 청계천과 바로 합류하였으나 현재는 창경궁 경내를 제외한 전 구간이 복개되었다.
발원지가 궁 안이고, 또 경희궁과 달리[5] 궁역 자체에 큰 훼손도 없었기 때문에 현재 궁궐의 금천 중 '''유일하게 자연수가 흐르고 있다.'''
4. 구조
- 너비 약 6.6m, 길이 약 9.9m로 경복궁 영제교와 창덕궁 금천교보단 규모가 작다. 이는 경복궁, 창덕궁은 평소 왕이 머물 곳으로 지은 것이지만 창경궁은 위에 언급했듯 원래 대비궁으로 지었기 때문이다. 옥천교 뿐 아니라 창경궁의 홍화문(정문), 명정전(정전), 문정전(편전) 등도 다 그렇다.
- 좌우에는 돌 난간을 설치하였는데, 연꽃 잎 모양의 하엽동자(荷葉童子) 기둥을 4개씩 세우고, 그 사이에 한 장의 돌로 만든 판석을 끼웠다. 판석에는 도드라지게 새긴 하엽동자기둥을 배치하고 2개씩 구멍을 뚫어내었다. 난간 양 끝에는 법수(法首)라는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상서로운 짐승들의 조각을 새겼다.#
- 아치 바깥쪽에는 긴 댓돌을 3단으로 쌓아 하부구조를 마련하였으며, 그 위에 긴 댓돌을 깔아 바닥을 만들고 그 위에 귀틀석과 청판석을 배열하면서 3개의 돌길을 놓았다. 왕이 다니는 어도(御道)는 가운데에 있는데 가장자리의 신하들이 다니는 길보다 조금 높고 약간 더 넓게 만들어 서열을 분명히 나타내었다.
[1] 물론 발음만 같지 전혀 연관이 없다. 그리고 거기는 ‘沃川’이다.[2] 궁궐의 앞쪽에 물을 흐르게 하여 풍수에서 가장 좋다는 배산임수를 구현하였다.[3] 물론 실제 궁궐과 외부의 경계는 문과 담이지만, 잡귀를 쫓아내고 또 외부인이 궁에 들어갈 때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는 의미로 금천을 상징적인 경계로 두었다.[4] 議政府左贊成. 의정부에 속해 3의정(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을 보좌하는 직책. 오늘의 국회부의장 격이다.[5] 경희궁의 금천도 궁 안에서 발원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전부 메워졌다. 지금은 복원된 경희궁 금천교 양 옆에 아주 조금 재현 된 것만 볼 수 있다.[6] 전통 건축에선 홍예라고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