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명정문
1. 개요
昌慶宮 明政門
창경궁의 정전#s-6인 명정전의 정문이다.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으로 들어와 옥천교를 건너면 바로 보인다. 광화문에서 근정문까지 일직선으로 연결되어있는 경복궁과 비슷하지만, 경복궁엔 중문이 있고, 창경궁엔 없는 것이 다르다. 경복궁은 예법에 따라 반듯하게 구획된 정궁인 반면, 창경궁은 애초 대비궁의 개념으로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름은 당연히 ‘명정전의 문’이란 뜻이며 ‘명정(明政)’란 명칭 자체는 ‘정사(政)를 밝힌다(明)’는 뜻이다. 창건 당시 의정부 좌찬성[1] 서거정이 지었다.[2]
2. 역사
1483년(성종 14년) 처음 지어졌다. 다른 궁궐의 정전 정문과는 다르게 남향이 아닌 동향하고 있으며, 이는 풍수지리 및 지형 문제에 근거해 배치한 것이다.[3] 이후 중앙의 왕과 신하가 함께 조회를 하는 조참과 죄인들을 심문하는 국청, 외부인 접견과 과거 시험장 등 많은 국가의 대소사가 열렸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화재로 불탄 뒤 1616년(광해군 8년)에 중건되었고, 몇 차례 수리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 모습 그대로 지금까지 있다. 즉, 명정문은 '''현존하는 궁궐 정전의 정문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따라서 홍화문, 명정전과 같이 17세기 초 목조 건축 양식을 연구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이 놀이공원 창경원이 되면서 남쪽과 북쪽의 행각이 철거되었다가 1986년에 복원되었다.
3. 구조
-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총 6칸이며 겹처마 양식에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세운 1층짜리 문이다.[4] 장대석으로 쌓은 4단의 기단에 7단의 계단이 건물 전면에 설치되었다. 그 위에 원형으로 된 주춧돌 위에 원기둥을 올린 뒤 그 위에 창방[5] 과 평방[6] 을 놓아 공포를 받치게 하였다. 공포는 외 2출목, 내 3출목의 다포 양식으로 하였고 모든 기둥과 기둥 사이의 중간에 2개의 공포를 두었으며 이를 주간포라 부른다. 중앙 2개의 기둥은 고주(高柱)라 하여 다른 기둥보다 훨씬 높게 세웠다. 다른 궁궐과는 달리 협칸과 어칸의 너비 차이가 거의 없으나 어칸이 30cm 정도 더 길다.
-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하고 합각머리 밑의 엮음을 쪽천장으로 가렸으며, 쪽천장의 얽음은 우물천장으로 하였다. 단청은 모로단청[7] 으로 하였고, 문짝은 나무 판으로 되어있으며 중앙 열에 달았다. 그리고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를 양상바름한 뒤, 2개의 취두와 4개의 용두, 그리고 동, 서 양쪽의 추녀마루 위에 5개의 잡상과 각 처마 끝에 토수를 놓았다.
4. 여담
- 12대 임금 인종이 유일하게 이 곳에서 즉위하였다. 정전이 아닌 정전의 정문에서 거행한 이유는 대부분 선왕의 장례기간에 즉위식이 이뤄지는 것이라 화려함과 웅장함보다는 슬픈 분위기에서 했기 때문이다.# 단, 정궁도 이궁도 아니기 때문에 인종 이전과 이후에는 즉위식이 열리지 않았다.[8]
- 1755년(영조 31년) 4월에 영조가 당상관에게 뜬금없이 “오늘 당장 시골 사람인데 서울에 머물고 있는 자들을 찾아내어 궁궐로 불러들이라”고 명했다. 당상관이 급히 나가 서울에 머물고 있는 시골 사람 60명을 명정문으로 데리고 갔다. 시골 백성들을 만난 영조는 시골의 날씨 및 농사 현황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뒤 백성들에게 이르는 말을 남기고 딱한 사정에 눈물 흘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