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치인
러시아어: Чукчи[1]
축치어: Ԓыгъоравэтԓьэт, оравэтԓьат[2]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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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극동 지역의 최동단에 위치한 축치 반도에 살아가는 민족으로 대부분이 추코트카에 거주하고 있다. 2010년 인구는 약 15,908명.[3] 극소수의 인구가 우크라이나와 에스토니아에도 산다고 한다. 축치캄차카어계 민족 중에서 가장 많은 수를 자랑하는 민족이기도 하다.
이들이 쓰는 언어는 축치어로 축치캄차카어족에 속하며 이텔멘어, 코랴크어가 이 어족에 속한다.
축치인들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툰드라 지대에서 순록을 기르는 유목그룹, 또 하나는 해안정주그룹이다.[4]
목축을 업으로 하던 사람들이다보니 순록과 목초지 점유 문제로 주변 민족인 코랴크인, 추반인, 유카기르인과 잦은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게놈 연구에 따르면 아메리카 원주민과 제일 가까운 친척뻘 되는 민족이라고 한다.
주변에 이웃하고 있는 북아시아 민족들 중에서 체격이 제일 크다고 한다.
2. 기원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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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기원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약 6,000년 전부터 축치 반도에 이들 조상이 살기 시작했으며, 그 후 기원후 1천년대 전반기에 기후 및 자연조건 변화, 인구증가가 이뤄지면서 축치인의 조상들은 가축으로 길들여진 순록 떼를 이끌고 시베리아 유픽의 영역으로 이동했다. 그 결과 축치인 일부는 해안가에서 정주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처음 기록된 건 1640년대이며, 당시 기록에 따르면, 유목그룹은 알라제야(Алазея) 강과 콜리마(Колыма) 강 사이의 북빙양 해안 툰드라 지역을 중심으로 순록을 유목했고, 정주그룹은 데주뇨프(Дежнёв) 만과 크레스트(Крест) 만 사이 지역과 아나디르 강(Анадырь) 및 칸찰란 강(Канчалан) 하류 지역에서 에스키모와 더불어 해양 동물을 사냥하며 살고 있었다고 한다.
17세기 후반에 러시아인[5] 과 축치인의 접촉이 지속해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축치인과 코랴크인들로부터 러시아인 커뮤니티를 보호하고자 1700년경에 교전이 발발했다.
첫 교전은 1701년이었으며, 1708년, 1709년, 1711년에도 정복을 시도했으나 상당한 유혈사태만 거뒀을 뿐 정복에 성공하질 못했다. 1729년에 다시 한번 시도했지만, 원정대는 축치인들에게 역으로 박살나고 지휘관까지 살해당했다.
사령부로부터 명령을 받은 드미트리 파블루츠키 소령은 축치인들을 마구잡이로 죽이거나 주거지를 불태우고, 여자와 아이들을 포로로 잡거나, 순록을 몰아내는 등의 상당한 강경책을 내세웠다. 그 후 1742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쪽에서[6] 축치와 코랴크를 '''완전히 제거할 것'''을 명하였고 이로 인해 1744년에 시작된 약 3년 동안의 잔혹한 전쟁이 일어났으나 1747년 3월 파블루츠키가 결국 살해[7] 당하면서 전쟁은 다시 한번 러시아 원정대의 패배로 끝났다.[8][9]
1762년 러시아 측은 다른 정책을 취했으나 아나디르스크 요새 유지비만 1,380,000루블이 나오는데 비해 거둬들여지는 세금을 꼴랑 29,150루블이었던지라 2년 뒤, 아니디르스크를 포기했다.
1822년 제정 러시아의 결정에 따라 축치인은 러시아에 편입되지 않고, 러시아에 원하는 만큼의 야삭(ясак)을 납부하는 것으로 봉합되었다.
시베리아 전체가 18세기 후반 러시아 제국에 완전히 정복되었지만 축치인들의 영역만큼은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 이후까지도 완벽하게 점령되지 않았다.
3.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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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전통의상은 후드티와 흡사하며, 에스키모들과 오랜 시간 접촉해온 탓에 의복이 서로 유사한 모습을 지녔다. 이들의 의복문화는 케레크[10] 에게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정주그룹 축치인들은 작살, 창, 가죽으로 만든 그물로 봄겨울에는 물개, 가을에는 바다코끼리와 고래를 사냥했다고 한다.[11]
원통형 또는 원뿔형의 천막 ‘야란가’(яранга)를 툰드라에선 순록 가죽으로, 해안에서는 바다코끼리 가죽으로 만들었다. 또한 해안그룹 "안칼른"의 야란가는 유목그룹 "차우추"의 야란가와는 달리 연기를 빠져나가게 할 구멍이 없었다. 19세기 말까지 "안칼른"은 에스키모의 고래 턱뼈로 만드는 집 ‘발카란’(валкаран)을 모방하여 고래뼈로 틀을 만들고 떼나 흙을 덮은 반지하에 살기도 했다. 해당 집은 여름에는 지붕을 통해서 드나들었고, 겨울에는 긴 터널을 만들어 드나들었다.
또한 몇 가닥의 줄에 추를 매달아 만든 방식의 볼라를 사용해 날아가는 새를 사냥하기도 하였다.
축치인들은 겨울철 이동을 위해 썰매를 타고 다녔는데 이를 위해 썰매를 끌던 견종이 바로 '''시베리안 허스키'''이다.
노인들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거나 친척이나 지인에게 자신을 창으로 찌르거나 밧줄로 목을 졸라서 죽여달라 청했던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축치인들이 사는 곳 자체는 환경이나 기후가 너무나도 춥고 척박하다보니 생활 조건이 너무 열악해서 그렇다고 한다.[12]
유픽처럼 순록과 사냥하면서 얻은 바다코끼리같은 동물들의 모피나 뼈, 상아 등으로 공예품을 만드는 문화가 있다.[13]
정부에서 학교 등록 및 이들에 관한 서류작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축치인들에게 성씨와 부칭을 강요하기 전까지는 이들에게 20세기까지도 성씨라는 개념이 없었고, 오로지 이름밖에 없었다. 이름들은 남녀상관없이 대부분이 망자가 저승으로부터 되돌아온다는 전통적인 관념과도 관계가 있었다. 태어났을 때 일어난 자연현상에 따라 짓거나[14] 추코트카에 사는 동물의 명칭에서 가져와서 짓는 식이다. 또는 부모가 희망하는 자질에 따라 이름을 짓기도 했다[15][16][17] . 그외에도 체큠, 콰플레크, 콰티크, 페리 등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들을 이름으로 썼다.
4. 종교
일반적으로 축치인들은 모든 자연은 살아있고, 사물은 자신의 의사에 따라 행동하거나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다. 모든 사물에 대해서 게틴빌렌[18] 또는 게큘릴린[19] 이라고 불렀다.
샤먼의 힘은 남자도 여자도 가질 수 있으며, 여성들이 더 자주 힘을 가질 수 있지만, 남자들보단 작다고 여겨진다. 또한 출산은 샤먼이 가진 힘을 잃게 한다 믿으며, 강한 능력을 가진 여성 샤먼이 아이를 낳으면 힘의 대부분을 잃지만, 수년 뒤 아이를 돌보는 기간이 끝나게 되면 다시 회복된다고 믿었다. 또한 출산 시에 썼던 물건은 여성 샤먼의 힘을 감소시키며, 남자도 그 물건에 손댈 경우 힘을 감소시킨다고 여겼다.
5. 출신 인물
6. 기타
러시아인들에게 잡힐 경우 자결을 시도하는 등 상당히 호전적으로 대항한지라 이러한 얘기가 있다고 한다.
오늘날 축치인 대다수는 이동식 천막인 야란가가 아닌 현대식 주택에 살면서 주로 서비스업 쪽으로 일한다. 하지만 아나디리의 물가는 비싸고 급여는 낮아[21] 청년들은 일자리와 더 나은 환경을 위하여 다른 곳을 찾아 떠난다. 사실 추코트카의 봉급 수준은 러시아에서 가장 높지만 광업에 종사해야 받을수있기 때문에 다수의 축치인처럼 1차 산업 위주로 일하는 사람들은 높은 물가로 인한 피해를 고스란히 받을수밖에 없다.중국은 어이없어하면서도 사절단을 보내어 “중국 인구가 10억명[20]
이라는 걸 아느냐. 그래도 싸우기 원하느냐”고 묻자 축치족은 대답했다.
게다가 추코트카 자체가 모스크바에서 상당히 먼 지역이란 것과[22] 험악한 기후환경+열악한 보건시설+수준낮은 사회환경이 더해져 현재 축치인의 평균 수명은 겨우 '''45세'''이다.[23]
7. 관련 문서
[1] 축치어 단어인 "Chachu"에서 유래됐다. 해당 단어는 "순록이 풍부한"이란 뜻을 담고 있다.[2] 전자는 "르그오라베틀엔", 후자는 "오라베틀안"이라 읽는데 의미는 둘다 "진정한 사람"이란 뜻이다.[3] 추코트카 내 인구는 2019년 기준으로 12,305명.[4] 이들은 생활방식이 다른 만큼 자신을 지칭하는 말 또한 달랐는데, 유목그룹은 자신을 ‘순록을 많이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의 ‘차우추’(Чаучу)라 불렀고, 정주그룹은 자신을 ‘바다 사람’이라는 의미의 ‘안칼른’(Анкалын) 또는 ‘바닷가 사람’이라는 의미로 ‘라말근’(Рамалгын)이라고 불렀다.[5] 또는 카자크.[6] 모스크바가 아닌 이유는 당시 러시아 제국 수도가 이쪽이였기 때문이다. 모스크바가 다시 수도가 된 것은 소련 시절 때이다.[7] 1747년 3월 12일, 500명의 축치인 전사들이 아나디르스크에 위치해있던 러시아인들의 방책(防柵)을 급습하자 이에 96명의 카자크와 35명의 코랴크 동맹군으로 구성된 131명의 파블루츠키 연대는 마르코보(Ма́рково) 정착지 근처에서 축치인을 따라잡으며 추격에 나섰다. 파블루츠키는 증원병력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명령했고, 이후 수적인 열세로 인해 전투에서 패배한다. 철제로 된 사슬갑옷을 입은 덕에 그는 다치지 않고 그곳에서 도망쳤지만, 근처 작은 언덕에서 축치인 전사들에게 포위당한 뒤 살해당했다고 한다.[8] 이후 파블루츠키의 머리는 몇년 동안 축치인의 전리품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남아있던 몸뚱이는 야쿠츠크에 묻혔다고 한다.[9] 영어 위키페디아에서 1750년에 또 전쟁이 일어났다고 쓰여져있으나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10] 축치인과 코랴크인 영역 사이에 살던 민족으로 현재는 축치인들에게 거의 동화되어 사실상 사멸한 민족이다.[11] 물개 사냥의 경우 혼자서 잡고, 바다코끼리나 고래는 몇척의 배가 그룹을 이뤄서 잡았다. 19세기 후반부터는 총을 쓰기 시작했다.[12] 로마에서도 노인들이 스스로가 쇠약해졌다고 생각하면 아사를 택하는 풍습이 있었다.[13] 주로 남자는 뼈나 상아에 문양 및 그림을 새기고, 여자는 순록 모피를 가공하거나 바늘꽃 섬유를 엮어 가방을 만들었다.[14] 예를 들어 어떤 남자가 동틀녘이 뜰때 태어났으면 이름이 동틀녘(Tynga-gyrgyn)이 되고, 어떤 여자가 봄에 태어났으면 이름이 봄(Gyrongav)이 되는 식이다.[15] 딸이 예쁘게 크길 바라면 이름을 미녀로 짓는 식이다.[16] 지금은 러시아식 이름도 병행한다.[17] https://www.everyculture.com/wc/Norway-to-Russia/Chukchi.html#ixzz6d7oVobHv[18] Getinvilen, 뜻은 "주인이 있는".[19] Gequlilin, 뜻은 "목소리를 가진".[20] 80~90년대 사이에 생겨난 이야기로 보인다.[21] 약 2만 루블 정도로 2020년 기준 원화로 약 330,800원 정도이다. [22] 동쪽으로 약 '''6000km 이상'''이라고 한다.[23] 러시아인의 평균 수명이 60대 중후반인 걸 생각하면 턱없이 낮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