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호/네덜란드전

 


1. 개요
2. 요약
3. 경기 전
4. 경기 진행
5. 대한민국의 패인
6. 경기 후
7. 이모저모
8. 관련 문서
9. 둘러보기


1. 개요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E조 제4경기
1998년 6월 20일 21:00(UTC+1)
'''
'''스타드 벨로드롬 (마르세유, 프랑스)'''
'''주심:''' '''리샤르트 부이치크''' '''(폴란드)'''
[image]
'''5 : 0'''

[image]
'''네덜란드'''
'''대한민국'''
'''38′ 필립 코쿠'''
'''42′ 마르크 오버르마르스'''
'''71′ 데니스 베르캄프'''
'''80′ 피에르 판호이동크'''
'''83′ 로날트 더부르'''
'''득점자'''
-
'''관중: 55,000명'''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의 경기들 중 네덜란드와 대한민국의 경기에 대해 설명하는 페이지.
이 경기는 일명 '''마르세유의 치욕''', '''마르세유의 비극'''으로도 불리는 경기다. 대한민국이 월드컵에서 1경기에 5실점, 5점 차 이상의 대패를 당한 건 1954 스위스 월드컵 때 헝가리에 0 : 9, 터키에 0 : 7대패를 당한 이후 무려 44년 만의 일이며, 대한민국 국가대표 축구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경기 중 하나다. 또한 현재도 '''5 : 0이라는 스코어는 축구 경기에서의 참패를 뜻하는 명사로 자리 잡힐 만큼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 경기'''이기도 하다.

2. 요약


[image]
'''4번째 실점을 허용한 직후 안타까워하는 골키퍼 김병지김태영'''

'''속수무책이네요.'''

신문선 해설위원

'''완전히 오늘, 완패입니다.'''

이용수 (당시) KBS 해설위원

'''차범근 감독의 전술은 이미 실패작 수준이었고 선수기용도 도저히 이해못할 고집스런 수준이었다.'''

축구협회 기술위원

'''2002 월드컵을 대비하여 다음 벨기에전 때 신인 선수들을 포함하는 새 진형을 갖추겠다.'''

차범근, 네덜란드전 경기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1]

'''우리는 더 많은 득점을 할 수 있었지만, 대한민국의 골키퍼가 너무 뛰어나서 더 많은 골을 넣지 못했다.'''

1998년 마르세유의 치욕 당시,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이었던 거스 히딩크[2]

이 경기를 지켜보신 축구를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여러분의 참담한 심정, 저와 똑같을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절대로... 좌절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 축구는 꼭 다시 일어설 겁니다.''' 성원해주신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네덜란드전을 직관한 이경규가 울먹이는 표정과 침통한 말투로 남긴 마지막 멘트. 이경규가 간다에서 그대로 방영되었다.


3. 경기 전


이변의 드라마를 꿈꾸며 당시 경향신문 프랑스 특파원이 네덜란드전을 앞두고 쓴 기사이다. 경향신문 프랑스 특파원은 네덜란드 기자가 최소 2:0 이상 승리를 예상했는데, 다른 외국 기자는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며 한국은 그것이나 기대해 보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고 한다.
당시 한국은 1997년 외환 위기를 맞이한 상태였다. 해외 축구 자체에 대해 매우 무지하기 짝이 없었으며, 환경도 열악하다 보니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그럼에도 한국 언론이나 방송은 멕시코전의 패배는 잊었다는 듯 앞다투어 "네덜란드 해볼만 하다.", "네덜란드 약점은?" "네덜란드 격파 비책" 같은 제목으로 이른바 뇌피셜이 가득찬 '''정신병자스러운''' 기사만 골라서 쏟아냈다. 한편 어떤 무속인[3]네덜란드에 3:1로 이긴다고 해서 눈길을 끌기도 했다. 네덜란드에 3:1승리 무속인
경기 당일 신문 제목들은 더욱 가관이었는데, 최용수는 네덜란드전에서 반드시 결승골을 넣겠다고 인터뷰했다. 최용수 반드시 결승골을 넣겠다 기사들 제목은 "오늘 네덜란드 잡는다.", "차범근 비책", "네덜란드 잡으면 16강 청신호.", "44년 한 꼭 16강 간다" 등이었으며 비겼을 때 경우의 수를 논하는 글들도 아주 드물게 있긴 있었다. 확실히 상대하는 3개국 중 제일 강팀이 네덜란드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가 1차전인 벨기에전에서 비기는 것을 보고 우리도 해볼만 하다는 생각은 그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더욱 커진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앞선 일본과 아르헨티나의 경기에서 일본이 0:1로 석패했지만 그나마 선전하는 것을 봤는데다 현지 유럽 언론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별볼일 없는 모습을 질타하는 것을 보고 조바심이 나서 그렇게 됐을 이유도 있다지만 그 당시엔 2002 월드컵을 공동개최하면서 한일 양국 정상이 이런 약속을 한 전례가 있었다.
1996년에 한일월드컵 공동개최 발표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 두 정상은 서로의 공동개최를 축하하며 한일 양국 두나라가 2002년 월드컵 결승전까지 올라가 멋진 맞대결을 펼치자는 덕담이 오가긴 했다..[4][5][6] 이럴 정도였으니 당연히 당시 축협이나 기자들도 지금보다 훨씬 다급하던 시대기도 했고 아무래도 욕을 하던 말던 좋던 나쁘던 관심성 기사를 써대는 게 흔한 기자들이라는 점도 있지만.
유럽 언론은 차범근 감독이 월드컵에서 승리를 얻지 못해 자신을 질타하는 한국 팬들의 분위기를 전하며 일본과 비교했을 때 한국팀은 실망스럽다는 식의 기사를 실었다. 차범근 감독 압박 한국 관중들
이때의 네덜란드-벨기에전의 결과는 순수히 양 팀의 실력만 보고 선수들의 멘탈을 좌우하는 양국 관계를 몰라서 나왔던 말이다. 비록 벨기에는 유럽 중위권 팀이고 객관적인 전력으로 보면 네덜란드에 처지는 상태였지만, 과거 벨기에는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한 국가였고, 그것 때문에 네덜란드를 숙적으로 여기고 있어서 네덜란드와 경기를 할 때이면 항상 자기 실력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면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도 1974년 서독 월드컵,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예선에서는 네덜란드가 벨기에를,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벨기에가 플레이오프 끝에 네덜란드를 밀어내고 월드컵에 올라갔다. 그리고 4년전이었던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는 벨기에가 네덜란드를 잡았다.[7][8]
심지어 네덜란드 팀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흑백갈등을 지적한 기사가 나오기도 했는데, 이는 파트릭 클라위버르트에드가 다비즈, 클라렌스 세도르프를 두고 한 얘기였고 실제로 당시 악동으로 불렸던 클라위버르트가 훈련 중 다툼을 일으켰다는 기사가 있기는 했으며 당시 네덜란드 팀 내에 흑백 갈등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히딩크가 그 문제를 잘 통제, 관리하고 있었다는 것.[9] 정작 차범근 감독 본인은 "네덜란드와는 비기고 벨기에를 꺾는 것이 목표다" 라고 말했다.[10]
최용수 선수는 자신의 골 결정력이 네덜란드베르캄프에게 뒤지지 않고 네덜란드를 상대로 반드시 결승골을 넣고 마르세유에서 1승을 얻겠다고 호언장담했다.[11] 마르세유 1승 기적은 있다
아무튼 언론의 이런 같잖은 보도를 믿었던 많은 국민들은 그 어디있는지도 모르는 네덜란드 정도면 이길 수 있다는 망상을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만 해도 위성 방송이나 케이블이 널리 퍼지지 않았을 때였고, 해외 축구의 실력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은 당시의 축구 전문가들 정도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당시 대부분의 축구팬들은 축구 잘하는 나라 하면 월드컵 단골손님들인 브라질, 아르헨티나, 독일, 이탈리아 정도를 생각했고,[12] 유럽 만년 콩라인 네덜란드가 어느 정도로 강팀인지, 아니 네덜란드가 어디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웃긴 건 KBS에서는 1998 프랑스 월드컵 유럽예선도 몇 경기 골라서 중계해 줬고 축구잡지인 베스트일레븐에서는 32개국 출전 예상 선수 개개인의 플레이스타일까지 소개할만큼 나름 정보 제공은 있었음에도 그 모양이었다는 거다.
하지만,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한 당시 네덜란드 대표팀은 상당히 강력한 스쿼드를 갖춘 강팀이었다. 네덜란드 대표팀의 전성기로는 1974년 서독 월드컵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연이어 월드컵 준우승을 이룬 시절, 유로 1988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시절,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준우승을 했던 시절 등이 꼽힌다. 전대회인 1994 미국 월드컵 때도 네덜란드 대표팀은 매우 인상적인 경기력을 보여줬다. 8강전에서 우승국 브라질을 만나 2:3으로 패했지만, 이 경기는 대회 최고의 명경기로 꼽혔다.
유로 1988 우승 당시 네덜란드는 마르코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 프랑크 레이카르트를 앞세운 오렌지 삼총사로 우승을 차지했었는데 오렌지 삼총사 외에도 수비수 로날드 쿠만과 그의 형인 에르빈 쿠만, 얀 바우터스, 제랄트 바넨부르그, 아론 빈테르, 반 티그렌과 골키퍼 한스 반 브루켈렌 등이 포진될 정도로 막강한 스쿼드를 가졌다. 참고로 이때 네덜란드는 유로 대회 직전에 열린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자국 명문팀인 PSV 아인트호벤이 우승을 차지하는 등의 면모를 과시해 나름대로는 절정의 상승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당시 스쿼드만 봐도 꽤나 화려하다.
1998 프랑스 월드컵 당시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면면을 살펴보면 당시 최고의 전성기에 접어들고 있었던 섀도우 스트라이커의 교과서 데니스 베르캄프를 필두로, 세계 정상급 스피드 윙어였던 마크 오베르마스, 최강의 타겟맨 파트릭 클라위버르트[13], 중원의 싸움닭 에드가 다비즈프랑크 더 부르-로날트 더 부르 형제[14], 루드 굴리트 이래로 네덜란드 최고의 테크니션이라 평가받던 클라렌스 세도르프, 다재다능한 만능 멀티플레이어 필립 코퀴, 캄펜의 바위라 불리며 강력한 피지컬로 상대 공격수들을 제압하던 수비수 야프 스탐, 그리고 이제는 전설이 된 최고의 골키퍼 에드윈 반 데 사르 등 당대 월드 클래스로 불릴만한 선수들이 즐비했다. 그것도 포지션 편중은 커녕 공수 전반에 걸쳐 골고루 분포함은 물론 골키퍼까지 완벽했던 것이 1998 네덜란드의 스쿼드였다. 각종 게임이나 TV, 영상 매체로 축구 역사를 쉽게 접할 수 있는 현 세대 입장에선 당시 각 리그 레전드들을 박박 긁어모은 수준의, 입이 떡 벌어지는 괴랄한 스쿼드였다. 게다가 차범근 감독과는 경험과 능력면에서 넘사벽인 거스 히딩크 감독이 지휘하고 있으니....
뿐만 아니라 당시 네덜란드 선수들 대부분은 각각 다른 팀에서 뛰고 있었지만 94-95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의 우승을 이뤄낸 아약스 출신의 멤버들로서 조직력 또한 문제가 없었다. 네덜란드는 결국 이 대회 준결승전에서 브라질에 패했지만 객관적인 경기력은 브라질을 앞섰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으며, 히딩크가 1998 월드컵 이후 사임한 것도 '''저렇게 훌륭한 스쿼드를 가지고도 4강 그것도 4위에 그쳐서 실망스러운 결과였기 때문'''이라는 말이 신빙성 있게 들릴 정도. 정말로 네덜란드가 콩라인만 아니었다면 우승을 논해도 이상하지 않을 스쿼드였다.
물론 상기한 대로 당시는 유럽 축구뿐 아니라 외국에 대한 인식이 지금에 비하면 매우 무지했던 시기였기에[15] 많은 국내의 축구팬에게 네덜란드가 잘하는지, 어디 있는지조차도 모르던 시절이었다.[16] 경기를 중계하던 송재익과 신문선은 자막의 다비즈의 로마자 스펠링만 보고 "다비드즈?"라고 발음했을 정도로 나름 국내 축구 전문가들이라는 사람들조차 유럽 축구에 대해 매우 무지했다.
그러나 당시 세계에서 가장 날카로운 공격력을 가진 네덜란드는 월드컵 전에 가진 평가전에서 파라과이, 멕시코, 나이지리아를 상대로 모두 5골을 넣는 가공한 공격력을 보여주었던 팀이다. 즉 당시 16강 정도의 전력을 가진 팀을 상대로도 네덜란드는 5골을 넣을 수 있었던 팀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이 네덜란드에 5골을 실점한 것은 네덜란드의 경기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네덜란드 전을 앞둔 한국팀에 '''펠레'''는 컬럼을 통해 최소한 무승부를 거두어야 하는 경기지만 그렇다고 수비만 하지는 말라고 조언하며 하지만 네덜란드는 5골을 넣을 수 있는 팀이란 말도 잊지 않았다. 한국이 잘 못하면 네덜란드에 5골을 실점할 수 있다는 위기 의식은 해외 전문가만이 아니라 일부 국내팬들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네덜란드는 경기 전날의 연습 시간에 자신들의 연습 시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을 내주지 않고 슈팅 연습을 계속 해댔고,[17][18] 강력하고 정교한 슈팅들이 골문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본 한국 선수들은 0:1로 뒤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정신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이는 히딩크 감독의 [19] 전략으로, 후에 자신의 자서전에서도 언급하였다.[20] 게다가 경기날 경기장 분위기도 한국의 기를 꺾기에 충분했다. 당시 55,000명의 관중 가운데 60% 정도가 오렌지색 유니폼을 입은 네덜란드 응원단이었고, 한국은 완벽히 원정의 분위기에서 압도당한 채 경기를 치러야만 했다.

4. 경기 진행



이날의 대한민국네덜란드 0:5 대패의 경기 장면이다.
전반 초중반까지는 그런대로 잘 싸웠으며, 종종 기회를 만들기도 했다. 전반 8분에 김도훈이 옆그물을 맞추는 강력한 슈팅을 날렸는데, 이 때 카메라 각도가 절묘해서 해설진과 팬들이 잠시 골로 착각하고 환호하기도 했다(...).

'''김병지가 자꾸 시간을 끌어요, 주심 비위를 건드려요, 나 왜그러는지 모르겠어요.'''

당시 MBC 캐스터 송재익 김병지가 연속으로 시간을 끌자 한 말.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경기는 하프코트 게임으로 돌변하기 시작했고, 대한민국은 전반전부터 아예 노골적인 시간 끌기 전략으로 전환한다. 골킥을 차려던 김병지가 일부러 최대한 늦게까지 미적대다가 관중들의 야유를 받았다.

'''참 이상해요, 왜 오늘 이렇게 서두르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당시 MBC 캐스터 송재익 최용수가 프리킥 상황에 시간을 끌자 심판한테 경고를 받는 모습을 보고 한 말

프리킥 때는 최용수가 자꾸 킥을 하지 않고 도움닫기 거리를 최대치로 잡으며 무한정 뒷걸음질을 시전하다가 보다 못한 심판에게 경고를 먹기까지 했다(...). 결국 전반 37분 필립 코쿠에게 선제골을 허용한 데 이어 42분 마크 오베르마스에게 추가 골까지 허용하면서 0:2로 전반전을 마쳤다. 이 때 이용수 KBS 해설위원은 전반전을 마치고 "아이, 37분까지는 잘 개겼는데~" 라고 말하기도(...)
그리고 후반전에 드디어 헬게이트가 열리고 말았다. 전반전을 통해서 대한민국의 전력을 간파한 네덜란드에 대한민국 수비진은 더 이상 상대가 되지 못했다. 후반 26분 데니스 베르캄프가 한국의 수비진을 완벽히 농락하면서 세번째 골을 넣었고[21] 후반 33분 교체되어 들어온 피에르 판 호이동크마크 오베르마스의 크로스를 받아서 헤딩으로 4번째 골[22], 후반 37분 로날트 더 부르가 5번째 골까지 넣으면서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처참하게 구겨놓았다.
'''결국 대한민국거스 히딩크가 이끄는 네덜란드에 0:5로 대패하고 말았다.''' 그나마 김병지의 선방이 아니었다면, 5실점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경기에서 네덜란드의 슈팅 개수는 27개, 유효 슈팅이 17개였다. 평범한 골키퍼였다면 두 자릿 수 실점이 나올 수도 있었다. 참고로 당시 대표팀의 또다른 골키퍼는 서동명이었다. 서동명의 경우 김병지에게 밀렸으나 1년 전 브라질과의 평가전에서 세계 최고의 공격수 호나우두의 10번의 슈팅을 PK 실점을 제외하고 모두 선방한 경험이 있다. 만일 서동명이 나왔을 경우 실점을 더 많이 했을지 더 적게 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 유력하다.
대한민국이 월드컵에 출전해 한 경기에 5실점 이상을 기록하고 또 5점 차 대패를 당한 것은 1954 스위스 월드컵 이후 44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내용과 상황을 보면 이번이 더 참혹했다. 1954년엔 비록 헝가리에 0 : 9로, 터키에 0 : 7로 대패해 이 경기보다 점수 차는 더 컸을지언정 내용은 훨씬 더 선전한 경기였다.
스위스 월드컵은 1954년 6월에 개막했는데, 한국전쟁이 정전된 게 1953년 7월 27일이니 전쟁이 막을 내리고 만으로 1년도 채 안 된 시점에서 월드컵에 출전했던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의 1인당 GDP는 고작 67$로 세계에서 2번째로 가장 못 사는 나라였다.[23] 전후 복구하기도 힘든 판에 축구같은 오락 따위에 신경쓸 겨를도 없었다. 비행기표는 커녕 선수단 단복 맞출 돈조차도 없어서 축구협회 임원 한 사람이 양복점 운영하는 지인에게 사정사정해서 외상으로 겨우 맞춰 입었으며[24] 스위스까지 갈 때에도 돈이 없어서 선수단 전원이 입성하지 못하고 1진, 2진이 나눠서 가야 했다. 그나마도 마침 태국에 여행 와 있던 영국인 신혼부부가 자기 좌석을 양보해줘서 간신히 갈 수 있었다.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스위스에 도착하니 개막식은 이미 다 한 상태고, 헝가리전 킥오프까지 겨우 10시간 남은 상태였다. 여독도 안 풀린 상태에서 시차 적응도 못 하고 그대로 옷과 신발만 유니폼과 축구화로 환복하고 바로 뛰었었다. 거기다 1950년대 당시 헝가리는 지금의 독일, 아르헨티나급의 세계 최강팀이었다. 그런 팀을 상대로 신생 독립국이 9골만 내준 것은 오히려 굉장히 선전한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대부분이 예측했던 그 경기 스코어는 '''최소 20 : 0''' 이상이었다. 그런데 9 : 0으로 끝나자 오히려 대한민국의 선전을 칭찬했다. 헝가리를 비난하는 말도 있었지만, 당시 월드컵 최다득점으로 이긴 터라 그렇게 많이 욕은 먹지 않았다.
그런데 1998년은 비록 외환위기를 겪던 시기였긴 해도, 1950년대만큼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한 상태는 절대 아니었다. 또한 지난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서 스페인 상대로 2 : 2 무승부, 독일 상대로 2 : 3 석패를 기록해 어느 정도 유럽 강팀과도 맞붙어볼 만하다는 자신감을 안겨주었던 때였다. 그러한 희망적인 상황에서 이렇게 뜻밖의 졸전을 벌였으니 많은 축구팬들로부터 실망과 트라우마를 제대로 안겨준 경기가 되고 말았다. 홍명보는 네덜란드전에 대해 후일담에서 "경기가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라고 회고하였고, 당시 경기를 생중계하던 KBS 서기철 아나운서 역시 5번째 골이 들어가자 망연자실하여 "차라리 경기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네요..."라는 말까지 남겼다. 그때 새벽잠을 설쳐가며 경기를 시청한 사람들 대부분 역시 맨정신으로 끝까지 경기를 지켜볼 수가 없었고, 많은 축구 팬들에게 네덜란드 트라우마를 제대로 안긴 경기이다. 이 경기 이후로 네덜란드는 국내 팬들의 관심 팀이 되는데, 잊혀질만 하면 유로 예선에서 중하위권 팀들에 대량 득점을 하며 "역시 네덜란드는 양민 학살의 달인"이라는 평을 하게끔 만들었다.
특히 당시 국내 최고의 준족을 자랑하던 서정원이 앞이 탁 트인 상황에서 공을 잡았음에도 '''뒤따라 오던''' 에드가 다비즈에게 따라잡히는 모습을 보이는 등, 지역예선의 선전으로 우쭐해있던 대한민국 축구가 아직도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이 그대로 드러났다. 물론 당시 서정원은 프랑스로 출국하기 전 아들을 안아주다가 옮은 수두 때문에 정상 컨디션이 아니기는 했다. 근데 서정원의 폼이 좋았었더라도 즉, 정상 컨디션이었어도 유럽에서도 타고난 운동 능력을 가졌던 다비즈를 따돌리는 건 역시 어려웠을 것이다. 이후 다비즈는 4강 브라질전에서 당시 신체적으로 최전성기를 맞이하고 이 대회 골든볼 수상자인 '''호나우두'''를 상대로 '''쫓아가서 커트를 하는 모습'''을 보여줄 정도로 뛰어난 운동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만 봐도 서정원이 정상 컨디션을 유지했어도 여전히 따라잡힐 확률이 더 높았다는 것을 증명했을 정도였다.
당시 이 경기를 광화문에서 단체 관람한 초창기 붉은 악마들은 새벽 이슬을 맞으며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프로그램 촬영차 마르세유 현지에서 직관한 이경규는 네덜란드전에 대해서 "멕시코전 녹화분을 보고 2차전에서는 울어서 감동을 줘 보자고 생각했는데, 경기를 보고 진짜로 울게 되더라."며 이 때를 회고했다. 그리고 경기를 직접 보러온 김흥국도 방송 카메라로 안타까워하는 얼굴을 하며 보고 있던 게 찍혔다. 이 경기가 새벽 6시경에 끝났는데, 패배가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경기 종료 직후에 시작된 아침뉴스 오프닝에서 앵커가 사색이 된 얼굴로 잠시 말문을 열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5. 대한민국의 패인


당시 거스 히딩크는 대한민국의 문제점을 확실하게 파악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닌 것으로 보았다고 말했다. 일단 체력 문제로, 대한민국 선수들은 전반 30분 경을 넘기고서 확실히 지친 모습이었다. 지난 미국 월드컵 때는 독일과의 경기에서 비록 지기는 했어도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폭염 속에서 지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여 독일 팀을 긴장하게 만들기도 했었지만 이번 네덜란드전의 선수들은 압도적으로 차원이 달랐다. 연장 전반이 아닌 그냥 전반전을 다 뛰지도 않았는데 지친 것은 적장의 눈으로도 체력이 약점임이 드러난 경기였다.
두 번째는 상대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다가, 정신적으로 쉽게 흔들리는 선수들의 모습이다. 다음은 히딩크 문서의 각주를 일부 따온 것이다.

훗날 인터뷰에서 경기 전 한국 선수들의 매우 무지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약한 듯한 모습을 보고 대승을 확신했다고 한다. 2002년 이전 월드컵만 나가면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쩔쩔매다 자멸했다던 많은 국대 선수들의 인터뷰와 일맥상통한 이야기다. 이렇게 무지한 대한민국 선수들을 네덜란드 선수들은 일부러 쫄게 만들기도 했다. 당시 한국과 네덜란드는 같은 연습장을 썼는데, 한국 대표팀이 도착한 후에도 히딩크는 일부러 훈련을 계속했다. 그런데 30분이 넘도록 대한민국 쪽에서 아무런 항의가 없어서 '얘들이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이구나...'라고 확신했다고. 당시에 우리나라 선수들이 뭐가 어떻게 되가는 건지 외국만 나가면 뭘 어떻게 해야될지 몰라서 쩔쩔매는 매우 무지하고 나약한 모습을 보여줘서인지, 만약 이천수기성용, 박지성같은 외국에 대한 경험도 꽤 있는 해외파 선수들이나 한 성질(...)하는 선수들이 있었다면 역효과가 났을지 모른다.[25]

저렇게 외국에 나가서도 준비를 제대로 안하고 나가서 버벅대니, 대한민국 대표팀의 성적이 바닥을 기는 것도 당연한 것. 여기에 선수들이 외국 나가서 뭘 어떻게 해야될지 몰라서 저런 모습을 보았던 것과 거기다 잘못된 훈련 방식과 상대 팀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두려워했던 것도 문제였다.
2002년 월드컵 이후에 출판된 히딩크의 자서전 <마이웨이>에는, 1998년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에 대한 소감을 정확하게 적어놓기도 했다.

...당시 월드컵에서 만난 대한민국 대표팀에 대한 느낌은 간단했다. 개인적으로는 잘하는데 조직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선수들 사이의 간격이 너무 넓었고, 공수 협력이 제대로 안돼 우왕좌왕했다. 조직력에 문제가 있다보니, 선수들이 각자 혼자서 뭔가를 해보려 한다는 인상마저 주었다. 설상가상으로 한국 선수들은 몸이 굳어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대한민국은 전원 공격, 전원 수비의 토탈 사커 및 압박축구와 같은 당시의 축구 전술 흐름에도 완전히 무지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선수 시절 '유럽물을 제대로 먹은' 차범근이 감독이었어도, 당시의 정보력으로는 세계적 흐름을 읽는데 역부족이었던 듯하다. 애초에 차범근이 몸담았던 독일의 축구 스타일 자체가 이 시기엔 이미 한참 뒤쳐져서 녹슨 전차군단이라는 조롱을 받던 시절이었음을 생각해보자. 차범근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89년까지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선수생활을 하고 은퇴했다. 따라서 아리고 사키밀란 제너레이션이 몰고온 압박과 공간이라는 현대 축구의 큰 흐름을 거의 경험해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히딩크가 간격과 공수협력을 지적했듯이, 당시 국내축구계에서는 니폼니시를 제외하면 공수간격 유지라는 개념이 거의 없었다. 차범근호 항목에도 나오듯이 대표팀의 전술은 빠른 윙어들의 측면돌파 → 무한크로스 → 최전방의 황선홍 or 최용수의 받아먹기 이게 전부였고, 중앙은 사실상 유상철 혼자 버티기였다. 이게 아시아에서는 통했지만, 본선에서는 상대의 압박에 완전히 녹아내려서 속수무책이 된 것.
세 번째는 차범근의 경험 부족과 자질 문제였다. 일단 차범근의 경험 부족이 제일 큰 문제로 브라질 월드컵 홍명보 못지 않은 초보 감독인 차범근을 덜컥 대표팀 감독에 앉힌 것 부터가 문제였다.[26] 히딩크가 그가 문제라고 봤던 것이 전부 차범근 감독의 경험 부족을 정확히 파악했던 것이다. 당장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라는 말이 있듯 현역 시절 뛰어난 선수였다고 해서 명감독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27] 차범근이 지도자로서 어떤 자질을 가졌던, 1998년 시점에선 차범근의 지도자 경험이 대표팀 감독이라는 중책을 맡기에는 분명 지나치게 짧았다. 3년간 울산 현대의 감독을 맡은 것이 지도자 경력의 전부였다. 차범근이 국가 대표팀을 하면서 나름 선전하면서 도쿄 대첩이라는 업적도 세웠지만 월드컵에서는 언론 통제를 제대로 못한 본인의 실수가 겹치면서 결국 0:5 대패를 기록하는 단초를 마련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하더라도 결국 실력 차이가 가장 크다. 마치 KBL 올스타와 NBA 올스타와 겨루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그 당시 1998년의 사정을 보면 해외 축구의 사정에 익숙하지 못했고, 시간이 지나 유럽파가 늘어났음에도 여전히 2010년 이후에 조별리그 탈락을 2연속으로 경험했다. 그나마 2002년 4강 이후,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제외한 나머지 월드컵 본선에서 꾸준히 1승 이상은 하고 있다는 것이 고무적인 성과이다. 아시아 축구 대부분이 유럽, 남미에게는 힘든 게 현실이며, 설사 차범근이 아닌 그나마 더 능력 있는 다른 지도자가 감독이었다 해도 패배하는 건 변함 없었을 것이다.
사실 차범근 감독만의 책임은 아니었다. 대한민국 축구협회도 월드컵이 시작되기 전에 중국과 친선경기를 잡았는데[28], 이 당시 중국의 거친 플레이로 주요 선수 황선홍이 월드컵 경기에 나오지 못할 정도의 큰 부상을 입는 그야말로 굉장히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다. 중국은 당시 대한민국과 월드컵에서 상대해야 될 팀과는 레벨도 완전히 낮았으며 결국 아무 쓸모없는 경기로 체력과 전력만 무의미하게 소모한 꼴이 되었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축구협회도 큰 비난과 비판을 받았으며 결국 차범근 감독의 경질은 몇몇 실책은 축구협회도 같이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감독에게 모든 책임을 다 떠넘기고 꼬리자른 셈이라는 견해도 있다.

6. 경기 후


경기 후 나온 석간판 신문 제목들은 흔한 클리셰 중 하나인 "세계의 벽 높았다." 일색… 그나마 일간지들은 저 정도였지, 이날 저녁에 나온 스포츠신문 석간판 1면은 온통 "이 치욕 잊지 말자"라느니, "김병지가 불쌍했다"라느니 "이날 전국은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등등, 원색적인 헤드라인으로 도배되었다. 특히 스포츠조선은 이날 저녁에 나온 석간판 헤드라인에 아예 '''5대빵'''이라는 문구를 선보이기까지 했다.[29]
결국 차범근은 네덜란드전 대패 직후 '''월드컵 중에''' 전격 경질되었고,[30] 대표팀은 김평석 수석코치를 감독 대행으로 올려 마지막 경기인 벨기에전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이에 앞서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대표팀 감독으로,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끈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파헤이라 감독이 프랑스에 0:4로 대패한 직후 대회 도중 경질된 바 있다.
당시 대한민국과 네덜란드가 경기를 벌였던 곳이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의 홈 구장이었기 때문에 마르세유의 치욕, 마르세유의 굴욕, 마르세유의 비극 등으로 불렸다.
그래도 이 경기에서 빛났던 대한민국 선수가 있었으니, 바로 김병지. 자세한 사항은 김병지 문서 참조. 또 당시 19세의 이동국은 후반에 교체로 들어가 네덜란드의 골문을 위협한 날카로운 중거리슛과 코너킥에서 골키퍼 정면으로 향하는 강한 헤딩슛을 날리면서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다음 혹은 다다음 대회를 기약하는 희망을 주기도 하였다.[31][32]
경기가 끝난 후 외신과 네덜란드 언론이 김병지와 이동국만 언급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부상이 심했으나 혹시 나을지도?" 하는 생각에 데려갔던 황선홍은 벤치에서 분루를 삼키며 진통제를 맞고라도 뛰겠다는 이야기를 했으나 차범근 감독이 이 대회가 끝이 아니라면서 만류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한편, 같은 조에 속했던 멕시코와 벨기에는 2:2로 '''또 무승부'''를 기록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대한민국의 16강 진출은 산술적으로도 완전히 물 건너갔다. 같은 조 4팀 중 대한민국만 유일하게 패배, 그것도 2패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은 예선 광탈 확정.[33][34]
이후 이 조에서는 네덜란드와 멕시코가 16강에 진출했다. 멕시코는 16강에서 만난 독일을 상대로 분전끝에 주저앉은 반면 네덜란드는 '''8강에서 가장 유력한 우승후보 중 하나인 아르헨티나를 침몰시키고 4강에 진출'''해서 브라질과 피터지는 승부차기까지 간 접전 끝에 장렬히 산화했다.
이 경기를 통해 처음으로 한국인들에게 알려지게 된 당시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감독 거스 히딩크는 이 때까지는 '''대한민국에 통한의 눈물을 흘리게 하고 비수를 꽂은 적장(敵將)'''이라는 인식을 만들게 하였다.[35] 이 때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을 맡았던 히딩크는 월드컵 이후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직에서 사임했고, 스페인으로 건너가 레알 마드리드 CF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성적 부진으로 1년 만에 경질되었고, 레알 베티스의 감독으로 부임했으나 또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어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바로 그 때 히딩크에게 대한축구협회가 오퍼를 보냈고, 히딩크는 자연스럽게 마르세유에서 인연(?)을 맺은 대한민국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다음 대회를 앞두고 '''당시 적장이었던 그가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어서 4강 신화까지 이룩하게 만든 대한민국 축구의 영웅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 때는 그 누가 알 수 있었을까?
또 한가지 주목할 부분이 있는데, 이 경기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처음으로 문화 충격을 받았던 경기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킥오프 직전 관중석을 온통 오렌지색으로 뒤덮은 스타디움의 장관이 중계 화면을 통해 비춰지면서 사람들은 그야말로 시각적 쇼크를 받았던 것이다. 지금이야 응원 팀과 같은 유니폼을 입거나 같은 색깔로 깔맞춤을 하고 경기장을 찾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그 당시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에서는 붉은 악마같은 특수한 응원단체가 아닌 일반 관중이 응원 팀과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응원한다는 개념이 거의 없던 시절인 때였다. K리그 서포터즈 문화도 이제 막 태동하던 단계였다.
프로야구조차도 아직 유니폼을 상품화해서 제작, 판매한다는 개념조차 상상도 못하던 시기였다. 하여튼 경기 킥오프 전부터 그라운드 관중석 전체가 오렌지 빛으로 뒤덮인 광경을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선수들도 선수들이지만 시청자들조차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경기였다.[36] 여러모로 대한민국 축구사에 임팩트를 안겨 주었던 경기라고 할 수 있다. 이게 국민들의 뇌리에 깊이 박힌 탓인지, 4년 후 한일 월드컵에서는 전 국민이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경기장이며 길거리며 온통 붉은색으로 채우는 기염을 토한다. 아무튼 당시 대한민국을 무너뜨린 적장이 여러 모로 대한민국 축구의 변화를 유도한 건 사실이다.
이 경기에서 대한민국은 '''파란색 유니폼'''을 입고 뛰었는데[37] 이 날의 대패를 시작으로 이 유니폼을 입고 뛴 경기들은 대체적으로 결과가 좋지 않아 결국 월드컵에서의 마지막 파란색 유니폼 착용이 되었다. 1950년 우승이 확실하다고 설레발치다가 우루과이에게 뒤통수 제대로 맞고 결국 흰색 유니폼을 아예 없애버린 브라질처럼 대한민국도 빨강 홈 - 흰색 원정 유니폼으로 바꾸었고 2002년 월드컵에서 대성공을 거두자 아예 공식화되어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7. 이모저모


이 경기를 끝으로 경질된 차범근은 훗날 SBS 축구 해설위원이 되었는데, 2014 브라질 월드컵 준결승전에서 벌어진 미네이랑의 비극을 보고는 '''남의 일 같지가 않다'''면서 이 날의 충격을 곱씹으며 브라질을 동정했다. 생각보다 비슷한 점이 많기도 하고.[38]

8. 관련 문서



9. 둘러보기






[1] 하지만 이런말이 무색하게 경기 종료 몇일뒤 축국협회에 의해 월드컵 경기 도중 경질되었으며 차범근 본인도 네덜란드전 대패의 책임을 지고 감독직에서 물러난다.[2] 훗날 이 감독이 다음 월드컵때 어디의 지휘봉을 잡았는지 생각해 보면, 운명이란 알다가도 모르는 일이다.[3] 1차전에 있었던 한국과 멕시코와의 경기를 1:3으로 패한다고 예언했는데, 운좋게 적중했다.[4] 김대통령.하시모토 일본 총리, 월드컵 공동 개최 입장 표명[5] 김대통령 하시모토 월드컵 결승전서 만나 멋진 맞대결 펼치자[6] 한국은 결승 진출 문턱에서 독일에 발목이 잡혔고,일본은 미야기에서 열린 16강전에서 터키에 0:1 일격을 당하며, 아예 결승 진출은 먼 나라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7] 이전 글에 E조의 톱시드가 벨기에라고 했는데 완전 잘못된 정보다. 98 월드컵에서 시드 7위 네덜란드가 엄연한 톱시드 국가였다. 그 위로 루마니아, 아르헨티나, 스페인, 이탈리아, 브라질, 독일 순이였다. 물론 당시 FIFA 월드컵 계수는 벨기에가 더 높았지만 FIFA 랭킹에서 벨기에가 당시 41위로 많이 쳐지면서 FIFA 랭킹에 밀려 톱시드에 들지 못해 32개국 중 11위에 머물렀다.[8] 참고로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 때 FIFA랭킹은 그야말로 가관이였는데, 벨기에게 FIFA 랭킹 41위로 당시 31위인 대한민국보다 낮은 것도 코미디일 뿐더러 일본의 FIFA 랭킹은 18위로 19위인 아르헨티나(!!!)보다 더 높았던 것, 심지어 이 당시 스페인을 이기며 조별리그 탈락의 구렁텅이로 몰아세운 나이지리아의 FIFA 랭킹은 71위였다.[9] 실제로 차범근 감독의 아들 차두리는 한때 스포츠 기자를 희망했었다고 한다. 이후 고려대로 진학하면서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갔지만, 98년 당시 아버지를 반쯤 매장에 가까운 기사를 써재낀 기레기들에게 학을 떼고 꿈을 축구 선수로 바꿨다고...[10] 이것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목표이긴 했지만 이미 1패를 안은 상황에선 딱히 방법이 없었고, 저게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목표였다.[11] 2019년의 척도로 따지면 황의조,황희찬,김신욱 등등의 선수가 아구에로, 살라, 레반도프스키 급의 선수와 자신을 비교하며 그에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감을 드러내 보인 격이다. 자신감을 표현하여 국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려는 의도가 절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냉정히 보면 실력차가 현격한 상대를 두고 가능성 낮은 필승을 장담한 셈이 됐다.[12] 이 4개의 축구 국가대표팀은 당시로서도 모두 월드컵에서 이미 2차례 이상 우승한 경험이 있다.[13] 다만, 클라위버르트는 벨기에전에서 레드카드를 받고 퇴장을 당하는 바람에 한국전과 멕시코전에는 나오지 못했다.[14] 일란성 쌍둥이[15] 그나마 월간축구(현 베스트 일레븐)를 통해서 유럽 축구가 조금은 알려지긴 했다.[16] 그나마 해외 유선방송이나 신문, 잡지 등을 통해 유럽 축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재외교포들이나 유럽에 사는 축구팬들은 대한민국이 1~2점 차로 진다면 정말 잘한 것이라고 예상했었다.[17] 놀랍게도 다른 유럽, 남미 심지어 아프리카 국가들 같으면 노발대발 하면서 항의를 해야 정상인데 한국은 그 누구도 네덜란드에 항의를 하러 온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선수나 선수단들이 뭘 어떻게 해야될지도 모르는 안일하고 무지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였으니 이 때부터 승부가 판가름나기 시작한건 당연했다.[18] 사실 이는 당시 선수단들이 유럽리그에 대한 경험이 부족해서 쫄아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해서인 것도 있다. 당연히 기성용, 황희찬, 손흥민 등 유럽에 익숙하거나 한성깔 하는 선수가 꽤 있는 현재는 전혀 안 통한다.[19] 사실, 해당 영상은 대회 전에 찍은 네덜란드 보험사 광고다.[20] 히딩크 감독은 이를 한국 대표팀에도 적용하여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에도 연습 시간이 지났음에도 연습장을 내주지 않고 훈련을 계속했다.[21] 베르캄프의 전매특허인 간결한 볼 컨트롤만으로 수비수들을 제쳐버렸다.[22] 21년 뒤오세훈이 아르헨티나전에서 넣은 선제골과 같은 궤적이었다. 당시 경기 결과는 대한민국의 2:1 승리.[23] 1953년 당시 독립국 기준으로 가장 못 살았던 나라는 인도였다. 이 당시 아프리카 국가들은 아직 대부분 식민지 상태였고, 북한도 우리보다 더 잘 살았었다.[24] 그나마도 질이 안 좋아 바짓단이 금방 닳아서 7부 바지처럼 되어버렸다고 한다.[25] 이를 2019년 현재로 대입해보면 손흥민이나 황의조, 황희찬 등 네임드급 해외파거나 이승우같이 한 성깔 하는 선수들(...)[26] 월드컵 당시 차범근의 나이는 만 45세였는데, 2014 브라질 월드컵 때의 홍명보 감독 나이와 같다. 뿐만 아니라 본인들의 마지막 월드컵 출전 후 12년 만에 월드컵 지휘봉을 잡았다는 점도 같다.[27] 특히 디에고 마라도나의 경우, 선수 시절에는 어느 누구도 막기가 어려울 정도로 거의 '''신적 존재와도 같은 최고의 선수'''로 자리매김을 했지만, 감독 시절에는 현지 적응훈련 등과 같은 기초적인 것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인류 역사상 최악의 감독'''이라는 낙인이 찍혔다.[28] 게다가 차범근 감독조차도 반대했던 경기이다.[29] 사실 냉철하게 본다면 제대로 네덜란드의 수준을 파악하지 못한 언론의 잘못도 있다. 1998년 당시는 인터넷이 발달하지 못한 시절이고, 지금처럼 해외 축구에 정통한 사람들도 많이 없었다. 그리고 유럽파가 사실상 없고, 유럽 팀과의 경기도 그 당시에 많이 가지지 못한 것도 있다. 이 당시 네덜란드는 당연히 우승후보로 꼽힐만큼 무시무시한 전력이었고, 대회가 끝난 직후 히딩크는 이 팀으로 4강까지밖에 못 갔다며 폭풍같이 까였다. 애초에 지는 게 당연했던 거다. 쉽게 말해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줄 모르고 나댄 셈.[30] 물론, 차범근 본인도 네덜란드전 대패에 책임을 지고 스스로 감독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31] 이동국이 교체로 막 들어갔을 때 송재익 캐스터는 이름을 헷갈려 "김동국이네요"라고 소개했다(...).[32] 그러나 이동국은 이 경기 이후 무려 두 대회나 건너뛰고 12년 후에야 다시 월드컵 무대를 밟을 수 있었다. 그나마도 그의 커리어에서 월드컵 본선 경기를 뛴 시간은 이 경기를 포함하여 51분이 전부였다. [33] 산술적으로 조별리그에서 무승부 경기가 하나라도 있는 상태에서 한 팀이 2패를 하면 그 팀은 마지막 남은 1경기에서 아무리 큰 점수차로 승리를 해도 2위조차 확보할 수 없기 때문에 100% 조기 탈락이 확정된다.[34] 멕시코와 벨기에간의 경기에서 무승부가 아닌 멕시코의 승리 또는 벨기에의 승리로 끝났다고 해도 이미 네덜란드와 벨기에간의 경기 결과가 0:0 무승부로 끝났기 때문에 이 역시 대한민국이 탈락하기는 마찬가지였다.[35] 농담 하나 안 보태고, 이 때는 거의 케이로스알제리 쇼크를 안긴 할릴호지치 감독 취급을 받았었다.[36] 물론, 이 경기에서 먼저 '신천지'를 본 것만은 아니다. 1997년 11월 1일 잠실 서울종합경기장에서 열린 월드컵 최종예선 일본전에서 많은 관중들이 빨간색 옷을 입고 오는 등, 자발적으로도 빨간색 옷을 입는 응원이 태동하고 있었다.[37] 4년 전 독일에 2:3으로 석패했을 때도 파란색 원정 유니폼을 입었는데, 이 날의 경기는 국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준 반면 네덜란드전은... 게다가 숙적인 일본이 파란색 유니폼을 홈 유니폼으로 정했기 때문에 반일 감정까지도 고려한다면...[38] 그런데 브라질 입장에서 저 경기는 우리로 치면 경술국치급이라고 볼 정도다. 브라질은 홈에서 독일한테 1:7로 크게 진 탓에 그 경기 이후 대혼돈에 빠졌고, 결국 그 다음 경기에서도 네덜란드한테 0:3으로 또다시 졌다. 물론 1998년 때의 한국은 그래도 0:5 대패를 안겨준 네덜란드와 수준 차이가 매우 컸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