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해 운동

 



[image]
'''다같이 참새를 때려잡자'''
일본 만화 창천항로 1권의 설명.[1]
1. 개요
2. 경과
2.1. 발단
2.1.1. 사해에 참새를 넣은 게 오판인가?
2.2. 전개
2.3. 결말
3. 번외 문제들
4. 마작 관련된 루머
5. 유사 사례
6. 기타
7. 패러디


1. 개요


1955년 중화인민공화국마오쩌둥대약진 운동의 일환으로 지시한 유례 없는 대규모 해충, 해조 박멸 운동.
한자로는 除四害运动/除四害運動(4가지 해로운 것을 제거하는 운동)이라고 한다. 이쪽이 정식 명칭이지만, 특별히 참새만을 때려잡는 걸 따로 타마작운동(打麻雀运动/打麻雀運動)이라고도 한다.
중국에 유례 없는 규모의 기근을 불러온 원흉이자, 독재자의 아마추어리즘이 해당 사회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다. 국민들의 여론 수렴과 사회적 공론화, 격렬한 논쟁, 교차검증, 투표와 법률화를 거쳐서 정책을 집행하는 민주주의 사회에 비해서, 1인 혹은 극소수의 권력자들이 철저하게 상명하복으로 운영하는 독재가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위험한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2. 경과



2.1. 발단


모택동은 1955년 농촌에 현지지도를 나갔다가, 지나가던 참새를 보고는 검지로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교시하였다.

'''참새[2]

는 해로운 새[害鳥]다.'''

麻雀是害鸟。

그리고 며칠 후, 마오쩌둥과 14개 성의 당서기들은《전국농업발전강요(全國農業發展綱要)》라는 제목으로 중국의 농업발전을 위한 정강을 포고하는데, 전체 40개로 이루어진 전문에서 제27항이 바로 제사해(除四害), 즉 4가지 해를 제거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해는 중국 인민들에게 해를 끼치는 4가지 해로운 것으로 이는 각각 모기(蚊子), 파리(苍蝇), (老鼠) 그리고 '''참새'''(麻雀)였다.

제27항: 4가지 해로움을 없앤다. 1956년부터 각각 5년, 7년, 혹은 12년 내에 모든 지방에서 , 참새, 파리, 모기를 '''절멸'''시킨다.

(二十七) 除四害。从1956年开始、分别在5年、7年或者12年内、在一切可能的地方、基本上'''消灭'''老鼠、麻雀、苍蝇、蚊子。

이 사해를 박멸하겠다는 마오의 의지는 1958년 10월에 전국적인 '제사해 운동'으로 이어졌다. 마오는 연설을 통해 중국 인민에게 해를 끼치는 사해를 박멸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웃기게도 마오가 참새를 박멸하자 참새의 먹이었던 해충들이 더욱 번성해 도저히 박멸할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어 버렸고, 이로 인하여 오히려 식량 생산량이 더 추락해버렸다. 한국어 위키백과 관련 문서.
이런 참새 사냥을 포함한 제사해 운동은 사실 전반적인 위생 개선 운동과 같이 실시된 것으로, 이전부터 물을 반드시 끓여먹자는 식의 위생개선 운동이 벌여지곤 했지만, 내외부적으로 혼란이 지속되었던지라 어려움이 많았다. 이런 연유로 당시 중국인들은 위생 관념이란 게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여름만 되면 콜레라 같은 전염병이 창궐하기 일쑤였고, 마오는 이를 근절하려 한 것이다. 애초에 개발도상국치고 위생 관념이 철저한 나라는 드물기도 했고... 그리하여 각급 학교에서 위생 검사, 양치질하기 운동, 집이나 거리 청소하기 운동 등의 여러 방역 구제가 실시되었고, 화장실이 따로 없던 농촌 지역에서는 재래식이지만 화장실을 만들기도 했다. 또한 상하수도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찬물을 함부로 마시면 탈이 나기 쉽다는 캠페인을 벌여서(그리고 실제로도 사실이었기도 했고) 중국인들이 찬물을 마시지 않는 습관이 확고하게 정착된 것도 이때부터의 일이다. 한국192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비슷하게 한 적이 있었으며, 쥐약을 배급해서 쥐 잡기 운동을 하기도 했고[3] 파리, 모기를 없애기 위해 DDT 등의 소독약을 뿌리는 방역 조치를 하기도 했다. 실제로 저런 최소한의 위생 조치만으로도 농촌 평균 수명은 제법 올라가긴 한다.

2.1.1. 사해에 참새를 넣은 게 오판인가?


당시 상황을 다룬 영어 다큐멘터리.#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새를 제거 대상으로 여긴 것 자체가 터무니없는 건 아니다. 참새는 추수기만큼은 정말로 어마어마한 곡식을 먹어 치우는, 농민에게는 그야말로 철천지 원수가 따로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제사해 운동의 대실패 이후 원인으로 무분별한 참새 학살이 지목되고 더불어 참새의 이로운 측면이 발굴되면서 참새의 해로운 측면은 간과되는 경우가 많은데, 참새가 추수기에 먹어 치우는 곡식의 양은 그 어떤 병충해도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다. 참새 떼가 한 번 제대로 덮칠 경우 절반이라도 건지면 다행이고 심하면 에 낟알이 1~2할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경우도 흔하다. 마오쩌둥이 참새를 파리, 모기, 쥐와 함께 4가지 해악으로 지정한 이유도, 그리고 이를 중국 인민들이 납득한 이유도 이런 부분에서 서로 같은 인식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짜 문제는 참새의 해악은 분명 사실이지만,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피해를 끼치며 또한 참새의 먹이가 되는 모기, 파리, 그리고 를 퇴치하는 건 참새에 비해 우선 순위가 한참 뒤로 밀려나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만만한 참새 잡느라 제사해(除四害) 운동이 제일해(除一害) 운동으로 변질됐다는 것이다. 참새가 사라진 만큼 참새가 먹었어야 할 모기, 파리 숫자도 사람이 없애줬어야 했는데 이를 하지 못하니 나머지 삼해(三害)는 오히려 미쳐 날뛰게 됐다. 아래의 운동 전개 과정을 보면 알겠지만 제사해 운동은 전문적인 해충구제 기술이나 장비가 동원된 것도 아니었고, 당시 중국의 유일한 강점인 '남아도는 인력'으로 해결했다. 하지만 비교적 덩치가 있는 참새와 달리, 모기나 파리, 쥐는 사람만 무식하게 동원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즉, 안 한 것이 아니고 못 한 것에 가깝다.
해악과 이로움을 동시에 가진 참새 퇴치가 우선시된 건 위생 문제보다도 농업 생산을 우선시하는 당시 풍조와 무관하지 않다. 일단 파리나 모기는 곡식을 먹지 않고, 쥐 역시 곡식을 먹기야 하지만 주로 창고에 있는 곡식 조금씩이나 간간히 훔쳐먹는 동물로 인식되다 보니 다른 부분에서 해를 끼치는 점이 더 부각되었다. 그러니 당장 수확철에 직접적으로 손해를 입히는 참새를 우선적으로 잡게 된 것이다. 정책을 집행할 당원 및 관료들 입장에서는 본인들 인사고과에 반영되는 농업 생산량을 올리는 게 급선무이므로 당장 눈에 잘 띄는 참새를 족치는 게 가장 그럴싸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결론은, 참새는 추수기에는 곡식을 훔쳐 먹는 해로운 새임은 맞는 말이지만, 추수기가 아닌 평소에는 농작물과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는 각종 곤충벌레들을 훨씬 더 많이 잡아먹고 사는 이로운 새라는 점이 알려지지 않았으며, 참새의 감소로 늘어난 곤충과 벌레를 인간이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참사였다. 즉, 참새가 곡식만 훔쳐 먹고 사는 새가 아니며 참새가 잡아먹는 해충의 양 또한 엄청난 걸 생각하면 초대형 오판이자 국가급 소탐대실을 저지른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근본적인 문제점은, 개요 문단에도 적혀 있듯이 이러한 국가 정책이 일반 대중들의 요구와 전문가들의 과학적인 검토에 의해서 실행된 것이 아닌, 독재자의 즉흥적인 말 몇 마디와 인사고과에만 혈안이 된 공무원들에 의해 실행되고 철회됐다는 점에 있다. 당시 중국 공산당 전반에 만연해 있던 '실적주의'와 '서류상 데이터'에 치중된 정책 입각은 하위 간부들을 보여주기식 정책과 서류 숫자에 집착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으며, 결국 무분별한 참새 학살과 병충해 창궐이라는 최악의 결과만을 낳았다.

2.2. 전개


결국 마오쩌둥의 한 마디에 힘입어, 중국의 모든 인민들은 참새를 잡는 데에 동원되었다. 중국사회과학원[4]은 참새가 농작물에 미치는 해로운 영향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고, 농촌에서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참새를 잡는 데 힘썼다.

인민공사의 동지들이여, 그 새를 박멸하는 것은 마오 주석과 당 중앙이 우리에게 하달하신 정치적 임무입니다. 우리 대대는 집집마다 총동원하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오를 지어 모두 새총을 쥐어야 합니다. 새총을 쓸 수 없다면 을 울립시다. 징이 없다면 세숫대야라도 울립시다. 세숫대야가 없다면 모두 목청껏 함성을 질러봅시다. 모두가 이렇게 한다면 그 새가 박멸되지 않겠습니까?

뭘 하냐고요? 저 저질스러운 새 놈들을 놀라게 하기 위해 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걸 기억해야 합니다. 그 새들이 땅이나 가지 위나 지붕 처마에 앉지 못하게 하여 저 양식이나 축내는 교활한 놈들을 지쳐 죽게 해야 하는 겁니다!

- 당시의 중국 공산당 연설문 중

위엄 넘치게도, 사람들은 넘쳐나는 인력으로 참새가 앉아서 쉬지 못하게 해 참새가 탈진하여 떨어지게(!) 만들었다. 말 그대로 나는 새도 떨어트릴 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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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은 참새를 달구지에 매달고 거리에서 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는 중국 인민들. 일일전과(一日战果)란 글귀에서 짐작할 수 있듯, 저 수많은 참새를 단 하루 만에 잡았다. 이런 짓거리를 전 대륙에서 1958년 한 해 동안 계속했다.
일반적으로 참새를 잡는 방법은 이나 새총과 같은 물리적인 수단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 계속해서 하늘을 날도록 하여 탈진시켜 잡는 것이었다. 잠자리채, 올가미, 새총 등은 참새를 잡기엔 너무 비효율적이었고, 그렇다고 인민들에게 총을 풀었다가는 내전 우려 및 치안 불안 등의 문제가 생기는 탓에 총도 지급되지 않았다. 고로, 특정한 날을 정해 참새가 앉을 만한 곳에 사람을 풀어놓고 계속 시끄럽게 하거나 뭔가 휘둘린다 싶으면 잡았다. 참새들은 착륙을 못 하고 탈진할 때까지 날다가 추락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얻어진 결과는 대륙의 크기만큼이나 초현실적이었다. 상하이시에서는 단 한 차례의 '전투' 에서 파리 약 48.7'''톤''', 쥐 93만 마리, 바퀴벌레 1.2'''톤''', 참새 '''136만 7,440 마리''' 를 제거했다고 보고했다. 이러한 영예의 매달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민들이 몰래 파리, 바퀴, 쥐, 참새를 "길렀을지"는 아무도 모른다.[5] 더군다나 일부 농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참새보다 더 큰 새들을 잡아 참새를 넣는 자루 밑바닥에 깔아 두기도 했다고 한다...

2.3. 결말


이러한 전투(?)의 결과는 59년에 나타났다. 1958년 한 해 동안만 참새 '''2억 1,000만 마리'''가 학살당해 거의 멸종의 위기에 이르자, 참새가 잡아먹고 살았던 애벌레와 메뚜기 등 각종 해충의 개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 거기에 후술할 여러 악재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중국사에 길이 남을 대흉년이 발생. '''공식 발표 2,000만 명, 학계 추산 최소 3,000만 이상, 최대 4,500~6,000만 명'''의 기록적인 아사자가 발생했다.
정확히는 상하이 출신 학자 차오수지(曹樹基)는 공식적 지방정부 자료에 의거해 3,250만명 사망을 주장하였고, 1980년 무렵의 공식 조사팀 일원이였던 천이쯔는 4,300~4,600만명 사망을 주장했다. 독자적 조사를 실행한 조사관 위시광은 5,500만명 사망설을 주장하였으며, 일부 역사가들은 6,000만명 이상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게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었는지 감이 안 잡힌다면 비슷한 시기, 1960년대대한민국 인구가 대략 3,000만이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대충 짐작이 될 것이다. 터무니없이 많은 사람들이 개죽음을 당했다는 말이다. 굳이 당시 한국이 아니라 중국의 옛 시절에 있었던 일을 예로 들어보자면, 한때 유럽을 시궁창으로 밀어넣었던 흑사병이 있다. 과거 유럽에서 건너온 흑사병 때문에 죽은 중국의 인구가 대략 2,000~3,000만 정도였다.
즉, 중국의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아서 그나마 살아남은 것이지, 다른 데 같으면 진작에 국가 하나가 사생결단이 나고도 남았다. 국토의 7~80%가 유령도시 / 마을로 남는 정신나간 사례가 생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국 당 지도부는 소련 서기장니키타 흐루쇼프에게 빌어 연해주에서 20만 마리의 참새를 공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참모들이 마오 주석에게 이 '참새 전쟁'을 계속할지 물으니, 이 모든 사태의 장본인인 모택동 주석은 다시 다음과 같이 교시하였다.

'''算了。[쏸러](됐어)'''

그리하여 이 무의미하고 무식하기 짝이 없는 동물 학대 도살극은, 중국인은 물론 중국어를 배우는 타국인이라도 누구나 구사할 수 있는 단순한 두 음절이 마오 주석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그렇게 막을 내렸다. 이후, 제사해 운동은 참새가 슬그머니 바퀴벌레로 바뀌었다.

3. 번외 문제들


1960~61년의 대기근은 이러한 한 가지 이유만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다. 때마침 태풍과 홍수가 세트로 몰려왔으며 마오가 저지른 또 하나의 사건인 '''대약진 운동'''으로 이미 농업 생산량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참새 잡기 이외의 이 기간 중 중국 정부의 농업 관련 정책은 다음과 같다.
  • 철 생산을 위해 모든 자원을 쇠 모으기에 집중했다. 비료 생산에 투입되는 에너지를 모조리 제철 공장[6]에 퍼붓는가 하면, 곡식 운반용 화차까지 고철 화물용으로 넘겨서 안 그래도 모자란 수확량이 현지에서 타지로 조달되지 못한 채로 부패해서 버려지고 말았다.

또한 고철을 모으라는 게 국가의 지시인 관계로 인민들은 농사보다는 고철 모으기에 집착했고, 성과를 내기 위해 농기구를 부숴서 고철로 만들어 바치기도 했다. 그렇게 고철을 긁어모아 제련한 철조차 아무런 쓸모가 없는 똥철이었다는 점이 문제. 토법고로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토법고로만큼 멀쩡한 철광석과 대량의 연료를 가축 분뇨 이하의 똥철로 바꾸는 데 적합한 방법도 없다. 그나마 가축 분뇨는 비료로 쓸 수 있지만 저기서 나오는 똥철은 탄소 함유량이 3~5%를 찍는 막장 선철로, 모래보다 푸석푸석하고 유리보다 쉽게 깨져서 농기구나 병장기는 커녕 수저 하나 만드는 데도 못 써먹는다. 오히려 나무나 돌로 만드는 게 백 배는 나을 지경.
  • 사실 이때의 수많은 사상자를 낸 홍수는 자연 재해가 아니라 인재다. 위에서 설명한 철 생산 운동을 하기 위해 토법고로라고 하는 원시적인 용광로를 이용했는데, 이 용광로에서 사용될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산에 있는 나무를 모조리 베어버렸다. 제대로 된 용광로 하나 돌릴 연료로도 토법고로는 몇 개 못 돌린다. 토법고로 자체가 소형이라 열을 쉽게 뺏기는 특성상, 고로의 온도 유지를 위해선 막대한 양의 연료를 퍼넣어야 하는 막장 시설이기 때문.

그런데, 연료는 더럽게 처먹는 이런 똥철 생산기를 동네방네 만들고 코크스가 아니라 목탄을 처넣어가며 쉬지 않고 돌렸으니 산에 나무가 남아돌 리 없다. 이러니 이전에는 별일 없었을 강수량에도 홍수가 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북한에서 1990년대 산을 모조리 개간해서 식량난을 극복하겠다며 비슷하게 따라하다 빈번한 홍수와 산사태로 인해 식량난이 더욱 악화되며 비슷한 형태로 반복되었다.
  • 당시 MIT-칼텍 교수 출신의 로켓공학 기술자이자 수학자[7]였던 첸쉐썬 박사는 단순한 수학적인 계산으로 "곡식의 씨앗을 2배의 밀도로 심으면 단위 생산량이 2배로 늘어난다"는 논리로 효율적(?)인 작황방법을 마오쩌둥에게 제안했으며, 이 제안은 그대로 통과되었다. 하지만 그게 효율적인 방법이었다면, 범지구적으로 통용되는 유구한 농업의 역사 속에서 조상들이 진작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사실 심는 밀도 자체를 늘리는 것은 수확량을 증가시키는 방법 중 하나이지만, 밀도를 늘리는 방법에도 한계와 리스크가 명확했다.

한계 이상으로 지나치게 빽빽하게 심으면 태양광이 제대로 비치는 범위가 극단적으로 줄어들어서, 햇빛을 덜 쬐는 상태가 지속됨과 동시에 땅의 한정된 영양분을 두고 서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성장이 크게 저해되기 쉽기 때문이다. 설령 영양이 충분하더라도 공간 부족 때문에 잡초 제거 같은 노동이 힘들어지며, 병충해에 심각할 정도로 취약해진다. 때문에 어느 정도 이득은 있긴 하지만 이득에 비해 리스크가 심각할 정도로 크기 때문에 효율적이라고 보기 어려운 위험한 농법이었는데, 상술한 토법고로로 인한 농기구 소멸 사태와, 제사해 운동의 후폭풍인 병충해가 가뜩이나 심각한 리스크를 지닌 농법과 시너지 효과를 일으킴으로써 역사상 최악의 흉년이라는 막장스러운 사태를 초래한 것이다.
  • 이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무기와 기술 원조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는데, 외화가 부족한 중국은 식량으로 계속 상환했다. 이러면서 "우리는 풍년이 들었다"라며 허세를 부렸다.
게다가 외국에 상환해야 할 엄청난 양의 곡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중앙정부가 아주 조금의 식량만 보내주거나 '''구제를 거부'''하는 사태까지 일어나 이를 악화시켰다. 그걸 떠나서 곡물 상환을 위해 더 많은 곡물을 수탈했다. 농업 생산량이 약화된 농촌에 자연 재해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타격을 입혔고, 거기에 대약진 운동이나 참새 운운하는 등의 마오쩌둥의 삽질로 확인사살을 하는 바람에 역사에 남을 만한 대기근이 발생했다고 보면 된다.
1956년 정치국 결정에 따라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한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 국가주석이 된 류사오치는 기록적인 대참사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마오쩌둥과 격렬한 언쟁을 벌였고, 마오의 똥을 수습하기 위해 실용적인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 때문에 마오는 류사오치를 주자파, 즉 자본주의 추종자라고 미워하게 되었다. 한편 류사오치는 경제적으로는 온건책을 썼지만 정치적으로는 대약진 운동에 반발하는 인민들을 반동으로 몰아 가혹하게 탄압했는데, 류사오치를 어떻게 회칠지 고민하던 마오쩌둥은 이걸 보고 옳타꾸나 하고 반정부 학생 세력들을 지지하면서 이들에게 "정부와 당의 주자파를 숙청하라"고 선동하였다. 이 학생들이 다름아닌 홍위병이 되고, 류사오치 뿐만 아니라 그냥 당과 정부, 관료제를 통째로 드잡이해서 박살내게 된다. 이렇게 중국은 문화대혁명이라는 또 한차례의 광기에 휩쓸리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런 양극단을 오가는 정책은 중국을 한국보다 20년 뒤떨어지게 했다. 그리고 이 당시 '''어른들이 시켜서 새총을 들고 들판을 누비며 참새 헌터 짓을 했던 아이들은 10년 후 어른들을 사냥하는 홍위병이 되었다.'''
1950년대 후반에 허황된 정책 때문에 대규모 참사를 빚은 중국 정부는 정신을 차려서 대약진보다 더한 문화대혁명의 광풍 속에서도 비교적 합리적인 식량증산 정책을 실행했다. 이것은 농약 보급, 화학비료 도입, 광범위한 개간사업[8] 등등이 있었기 때문에, 격감한 참새 수는 충분히 회복되지 않았다고 해도[9] 병충해의 창궐이나 병충해로 인한 기근은 막을 수 있었다. 1970년대 말까지 배급을 실시할 정도로 빠듯하긴 했지만, 10년에 1억 명씩 늘어나는 다산정책 속에서도 식량증산이 비교적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대약진운동 때처럼 인민들을 굶겨죽이지 않고 그럭저럭 부양할 수 있었다. 마오쩌둥 사후에 덩샤오핑이 집권한 1970년 말에는 9억에 이르렀고, 그 이후에는 계획생육정책을 실시하여 식량증산 압박 및 인구 압력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4. 마작 관련된 루머


중국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참새와 마작 모두 한자로는 麻雀이라고 쓰기 때문에 마오가 말한 마작이 참새가 아니라 유희 마작을 지적한 게 아닌가 하는 개드립을 치지만, 광동성 등 소수 지역을 제외한 중국 본토에서는 보드게임인 마작을 마작이 아니라 마장(麻將, májiàng)이라고 발음하며 참새는 마췌(麻雀, máquè)로 쓰기도 하고, 설령 마작이라는 단어를 헷갈릴 수 있다고 해도 당시의 선전문 등에서 '참새는 해로운 '''새'''다'라고 명시했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저 둘을 혼동할 수가 없다. 보드게임 마작을 마장이 아닌 마작으로 표기하는 나라/지역에서는 말장난이 가능하다.
다만 실제로 마오쩌둥이 마작에 아주 무관심한 것은 아니라서 진짜로 중국인들이 마작을 못 하게 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실패. 천하의 마오쩌둥도 마작만큼은 없애지 못할 정도로 중국인들의 마작 사랑은 그만큼 대단했단 얘기다. 온갖 법적 규제로 깨끗한 도시를 만들어낸 싱가포르리콴유조차 "중국인에게 마작을 포기하게 하는 것만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고 알려진다.

5. 유사 사례


중국의 예는 그 규모와 참혹성 때문에 희화화된 면도 있지만, 사실 이런 일은 역사상 상당히 많이 벌어졌다. 또한 인간에 의한 동물종 멸종사태는 사실 인류사에서 굉장히 많았다. 이에 대한 사례는 멸종 문서 참조.
  • 인위적인 특정 종의 소멸이 생태계를 어떻게 망가뜨릴 수 있는가의 예시로 흔히 제시되는 사례가 미국의 카이바브 고원 사건이다. 문서 참조.
  • 프리드리히 대왕이 마오쩌둥과 비슷한 일을 터뜨린 적이 있는데 동기가 자기가 좋아하는 체리를 참새들이 막 먹어대서였다. 자기가 기르는 벚나무에 한정했다는 게 그나마 다행. 그리고 그 뒤에 벌레가 생겨서 나무가 병들자 자신의 잘못을 금세 뉘우치고 역으로 참새들을 보호하게 되었다고 한다.
  • 장제스가 중국의 지배자였던 시절에 장제스도 "중국인들의 생활습관을 현대화하겠다"는 이유로 신생활운동이란 것을 지시한 바가 있었는데, 신생활운동 중에도 해충들을 잡으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하지만 장제스가 때려잡으라고 명령한 생물들은 파리, 모기를 비롯한 곤충류라서, 마오의 제사해운동과는 달리 중국의 위생 증진에 도움이 되었다. 신생활운동도 당시 중국의 정치적 혼란과 재정적 부족으로 한계가 분명했으며, 근본적인 환경 변화가 아닌 전시행정스러운 정책들 때문에 해외에선 비판의 대상이었다. 한때는 중국판 파시즘 운동이라는 비난까지 나왔지만 지금은 재평가되는 추세.
  • 중국에서 웨딩사진 촬영을 끝내고 방생한 비둘기를 한 관광객이 손으로 가리키며 '이 비둘기는 식용이 가능하다[10]'고 외쳤더니 사람들이 몰려들어 수백마리의 비둘기를 잡아갔다고. #
  • 조선시대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연산군. 어느 날 연산군은 말을 타고 환궁하다가 앞의 풀숲에서 무엇인가 부스럭거리는 것을 보고 자신을 노리는 자객으로 의심하여 말을 급히 몰아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사람에게 그 풀숲에 있던 게 무엇인지 살피게 했는데 다름아닌 황새였다. 그래서 연산군은 각 도에 명해 황새를 잡아 씨를 말리라는 전교를 내렸다. 다행히 3달 뒤에 중종반정이 일어나서 시행되지는 않았다.

전교하기를, "각 도로 하여금 황새를 잡아 올려 남은 종자가 없도록 하라" 하였다. 왕이 일찍이 금표(禁標) 안을 미행(微行)할 때 풀숲에 사람이 숨었다가 자신을 해칠까 늘 두려워하였는데 하루는 저녁 때 말을 몰아 환궁하다가 밭두둑에서 황새가 무엇을 쪼아 먹는 것을 보고 사람인가 의심하여 채찍을 쳐 급급히 지나와 사람을 시켜 살펴보니 바로 황새였다. 이로부터 황새를 매우 싫어하여 위와 같은 하교를 내린 것이다. - <연산군일기> 연산군 12년(1506년) 5월 23일

  • 제사해 운동과 비슷한 일로 다슬기 박멸 운동도 있다. 마오쩌둥 집권기에 중국에선 수인성 전염병인 주혈흡충[11] 감염증이 크게 유행했다. 중국 정부에서는 이 저혈흡충을 박멸하기 위해 "기생충 감염의 매개체인 다슬기를 박멸하자"는 운동을 펼쳤다. 이 때문에 수많은 농민들이 동원되어서 강과 호수, 수로를 파헤치며 다슬기를 잡았다. 그리고 이 때문에 주혈흡충 감염이 더 퍼졌다. 주혈흡충이 감염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저혈흡충의 알이 섞인 가축이나 사람의 배설물이 강이나 호수에 흘러 들어가고 이 흡충의 알이 다슬기를 비롯한 패류에서 부화해 유충 형태로 수중에 퍼졌다가 사람의 피부에 닿으면 유충이 이를 파고 들어가서 감염되는 형태이다. 즉, 다슬기를 잡기 위해 오염된 물에 빈번하게 들어가면서 더욱 감염에 노출된 것. 저혈흡충 감염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배설물이 함부로 식수원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상하수도 체제를 잘 갖추고 가축의 분뇨 처리 또한 위생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그런데 당시 집단농장화된 중국의 농촌에선 당연히 이게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6. 기타


2013년 1월 20일 MBC의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도 소개되었다. 실제 역사와 미묘한 차이점이 있다면 참새 박멸 운동이 어디까지나 참새가 쪼아먹는 곡물의 양을 아껴서 식량 생산량을 늘려보자는 취지로 시작되었다는 것 하나만 부각되었다는 점이다. 실제로는 곡물 절감 효과도 노리긴 했지만 상기한 대로 위생 문제도 어느 정도 고려하여(완전히 착각한 것이었지만) 참새를 박멸 대상으로 잡은 것이다. 당장 참새 퇴치 운동 당시 같이 퇴치 대상으로 지정되었던 것이 곡물 생산량에 전혀 영향이 없었던 파리와 모기였다.
마오쩌둥의 갓 핑거 로 멸종된 동물이라고 한국에서 잘못 알려진 남중국 호랑이마오쩌둥이 싫어해서 보호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 사실 인명피해 방지를 위한 사냥과 대약진 운동으로 비롯된 삼림남벌로 인한 서식지 파괴로 줄어든 것이다. 인명을 해치는 맹수에 대한 해수구제사업을 단순히 권력자가 싫어해서라고 해석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마오쩌둥호랑이를 싫어했다는 주장은 그 어디에도 근거가 없다.
대한민국에서는 김일성은 참새 70만 마리의 턱 부분 털로 만든 이불을 덮고 잤다는 이야기가 나돌았지만[12] 이 이야기는 당시 김일성의 측근이자 후에 탈북한 황장엽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부정한 바 있다.
미래엔 아이세움에서 출간되고 있는 브리태니커 만화 백과 "함께 살아가는 생물(56권)"편 중 24페이지에 "생태계 평형의 중요성" 항목에 소개되었다.
나무위키에서는 조류와 관련된 부분이나 무언가 정말 해로운 것, 내지 무언가가 멸종할 위기에 처한 부분에서 이 드립을 치는 것이 보편화되어있다. 아래의 패러디들이 대표적.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트위터를 이용한 세력확장으로 인하여 제사해 운동을 재평가하자는 드립도 생겼다.[13]

7. 패러디


최훈의 돌직구 33회에서 이 말이 패러디 된 적도 있다.#
마사토끼의 단편'''실화''' 마사토끼 아청법에 걸리다 1화에서도 패러디 되었다.
SCP로도 패러디되었다.SCP-850-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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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 비이용자들이 트페미, 혼모노등 악명높은 트위터의 이용자들을 두고 "저 새(트위터)는 해로운 새다"라며 패러디하기도 한다. 트위터의 로고가 새 모양이기 때문에 트위터를 새로 패러디하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구글, 유튜브,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차단한 것을 알고 보면 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미니어처 게임 DUST의 SSU 진영에 '마오쪄둥'이란 대공전차가 있는데… 그야말로 '저 비행기는 해로운 비행기다!'를 시전한다. 85mm 대공포 4문을 가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적의 공중 유닛은 물론 적 지상군에게 타격을 줄 수 있다. 대공 전차의 위용과 전차 이름이 절묘하게 조합이 되면서 많이들 웃게 되는 부분… 누가 지었는지 네이밍 센스가 참으로 감탄을 금치 못한다.
사기적인 성능을 가진 새 캐릭터들이 이러한 소리를 듣기도 한다. 예를 들어 죠죠의 기묘한 모험 미래를 위한 유산펫숍은 게임판에 나오는 족족 사기적인 성능으로 악명을 떨쳐 이 소리를 듣기도 했고, 포켓몬스터에서는 조류를 모티브로 한 포켓몬들 중에 5세대에는 가속 번치코, 6세대에는 '''파이어로''', 7세대에는 카푸꼬꼬꼭, 8세대에는 아머까오썬더(포켓몬스터)가 이 소리를 듣거나 들었다. 찌르호크무장조도 경우에 따라 해로운 새 소리를 듣는다.[14] 또, 유희왕카드 중 사기적인 성능으로 금지카드가 된 야타 까마귀도 이 소리를 곧잘 듣는다.
거대토끼 미니! 귀여움이 심하시군 카카오톡 이모티콘에서 패러디되었다.
메이플 업적에 노멀 핑크빈 1,000회 처치하면 얻을 수 있는 업적이 있다.
스타크래프트2의 불사조가 자날기준으로 굉장히 잉여스러워서 잉여조, ㅄ조 등등 엄청나게 까이자 결국 무빙샷이 생기며 저새는 이로운 새 드립이 있었다
천수의 사쿠나히메에서 참새 오니가 확실한 대공기 및 범위기가 없는 초반에 상당히 짜증 나는 적으로 등장하여 이 드입이 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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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인 만화에서도 패러디 되었다.
'''저 새(ㄲㅣ)는 해로운 새(ㄲㅣ)다'''라는 패러디도 있다.

[1] 일본 만화인데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어야 내용 순서가 맞는다. 옛날에는 일본 만화를 우리나라에 들여올 때, 그림을 좌우 반전시켜서 억지로 우리나라 제책 방식에 맞도록 했기 때문.[2] 원문대로 가면 분명 참새인데, 국내에서는 '저 새'로 더 잘 알려졌다.[3] 사실 현재 진행형이다. 관심은 거의 없어졌지만 공직 특유의 관성성으로 아직도 잡기 사업을 하고 있다. 매년 연초에 통장을 통해 쥐약을 배급하고 있다(2017년 기준).[4] 중국 정부 직할의 싱크 탱크.[5] 프랑크 디쾨터의 마오의 대기근 281쪽 인용 (열린책들).[6] 공장이라기보단 각 가정에서 어설프게 만든 재래 풀무가 더 많았다.[7] 여기서부터 문제가 드러나는데, 공학, 수학 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에게 농업 조언을 받았다! 당연히 첸쉐썬 박사는 생물학이나 농업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사람이었다. [8] 이것은 부작용도 컸다. 많은 삼림이나 초원이 농경지로 개간되었다가 사막으로 변하기도 했다.[9] 쓰촨성의 한 지역의 별미였던 참새구이는 이 때문에 명맥이 끊겼다고 한다.[10] 사진 속의 비둘기는 흰 비둘기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품종인 '화이트킹' 품종으로 보이며, 중국에서는 식용으로 많이 길러진다. 화이트킹은 길에 흔히 보이는 비둘기들과 같은 종이면서 보통의 비둘기보다 덩치가 상대적으로 크고 살이 금방 찌는 편이라 식용 비둘기 중에선 가장 보편적인 품종이다.[11] 住血吸虫. 디스토마의 일종이다[12] 1980년대 정부에서 발간한 반공교육서적에 실려있을 정도로 세간에 퍼져 있었다.[13] 마침 트위터의 상징도 새다.[14] 7세대 시점에서는 파이어로의 특성인 질풍날개가 철퇴를 맞아 해로운 새 라인에서 탈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