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무라 신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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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유물을 몰래 묻다가 찍힌 사진
1. 소개
2. 한때의 영광
3. 실상
4. 결과
5. 기타
6. 관련 문서

藤村新一
1950년 5월 4일 ~ (74세)

1. 소개


일본의 아마추어 고고학자이자 일본 고고학계의 크나큰 흑역사를 안겨준 인물. 미야기현 카미정 출신.

2. 한때의 영광


1950년에 태어난 후지무라 신이치가 고고학에 발을 들여 놓은 때는 1972년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였다. 졸업 후 독학으로 고고학을 연구하며 살아가던 중 1981년미야기현에서 4만 년 전 유물을 발견했다. 당시 일본에서 발견된 유물의 연대는 가장 오래된 것이 3만 년 전 것이었기에 일본열도는 후지무라의 유물 발굴에 흥분하였고, 덕분에 그는 전국적으로 널리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 후 90년대 말까지도 계속 오래된 유물들을 속속들이 발굴해 내어 일본의 구석기 시대의 연대를 계속 앞당겼는데, 무려 70만 년 전 구석기를 발굴하여 일본의 역사 연구에서 자신의 위상을 더욱 확고히 했다. 심지어는 교과서에도 그의 업적이 실릴 만큼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아예 '''신의 손'''(神の手)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였'''다. 그는 토호쿠 구석기문화연구소 부이사라는 높은 자리에 올랐으며, 몰락하기 불과 '''한 달 전에도''' 아사히 신문에 자신이 80만 년 전 유물을 발굴했다고 발표하면서 자신의 발견을 10만 년 더 끌어올리고 영광의 절정을 누리고 있었다.

3. 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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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몰락을 알린 마이니치 신문 기사.'''
보다시피 주작질의 현장까지 생생히 포착되었다.
하지만 아마추어 발굴가의 인생역전 스토리로 보였던 것의 '''모든 것이 조작이었다.''' 후지무라가 발굴한 유물은 모조리 가짜였다. 그는 먼저 가짜 유물을 미리 준비해 두고 유적지로서 그럴법한 곳에 묻어둔 다음, 며칠 후 가짜 유물을 묻은 그 곳을 찾아가서 발굴하는 척하는 수법을 사용한 것이다. 고고학사에 길이 남을 후지무라의 사기극… 역사미화가 주업무인 우파학계의 합작품
후지무라의 낚시극이 펼쳐지던 2000년의 어느 날, 어떤 사람이 후지무라의 조작을 눈치채고 이를 마이니치 신문에 제보하였다. 마이니치 측은 전부터 후지무라의 유물 발굴에 뭔가 이상하다 싶은 점이 많았던 터라 조사에 착수했다. 그렇게 마이니치 촬영팀은 몰래카메라로 조작 현장을 포착하는 데 성공, 이를 기사화하여 만천하에 공개했다. 조작 현장을 포착하자마자 바로 보도한 건 아니고, 조작 영상을 촬영한 후 후지무라가 조작된 유물을 다시 파내서 언론에 대대적으로 발표하는 것까지 지켜보고 센다이시의 한 호텔에서 인터뷰를 가지면서 조작현장을 촬영한 영상을 보여 주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빼도 박도 못하고 조작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1] 한국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후지무라는 자신의 조작 모습이 담긴 비디오를 보며 "전부 조작한 건 아니다. 마(魔)가 낀 것 같다."라고 변명했다고.
당연히 일본 열도는 '''후지무라 신이치의 유물 발굴 알고보니 조작'''이라는 충격적인 보도 내용을 접하고 패닉 상태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정밀조사를 해보니, 후지무라 신이치가 1970년대 이후 발굴에 관여한 유적 180곳 중 162곳에서 조작 흔적이 발견되어 [2]가짜 유물 중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지정해제하고 교과서에서 후지무라 관련 내용을 삭제했다. 본인도 고고학계에서 영구제명 당했고 후지무라의 책 또한 출판사에서 모조리 다 거두어가고 애지중지하던 그 모든 석기 유물은 죄다 폐기처분하거나 증거품으로 보관되는 신세가 되었다. 당연히 각계에 큰 파장이 일었다.
사실 후지무라의 발굴은 너무나도 허술했고, 초기부터 숱하게 의혹을 받아 왔다.
  • 뗀석기를 만든 수법이 수십만 년 전의 것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 수십 km 간격으로 떨어진 석기들의 아귀가 너무 정확히 들어 맞는다.
  • 발굴된 석기의 재질이 주변 석재와 다르다.[3]
  • 땅을 파면 땅 속에서 대개 젖은 흙이 나오는 법인데, 그가 발견한 석기에는 마른 흙이 붙었다.
  • 구석기 시대 유물에서 철로 조각해서 만든 철선상흔이 발견됐다.[4]
  • 구석기 시대 유물이 발견되면 필수적으로 주변에 석기의 원본이 되는 돌의 조각이 있어야 하는데 없다.[5]
  • 구석기 시대 유물인데 고도의 문화 흔적인 제사유적이 발견되었다.[6]
  • 석기가 발견된 지층이 화산쇄설류가 퇴적된 지층이므로, 실제 유물이라면 구석기 시대 일본인들은 용암 위에서 석기를 제조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 후지무라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아무리 같은 곳을 뒤져도 유물이 안 나온다.[7]
  • 결정적으로 해외 학자들의 공동 연구 제의를 전부 거부했다.[8]
이렇듯 수상한 점이 많았으나 어쨌든 고고학 지식은 있었던 후지무라가 자신의 석기를 치밀하게 구석기 시대에 해당하는 지표를 골라서 묻었고 구석기의 유물 대조가 어려우므로, 그의 조작은 20년간 밝혀지지 않았고 이를 의심하면 매국노 취급을 당했다고 한다. 게다가 일본 사회의 보수성, 견고성은 이미 유명한 바인데 후지무라의 발굴이 교과서에까지 오름으로써 학계의 인정을 받자 후지무라의 업적에 의구심을 품는 것 자체가 백안시된 것이다. 이로 인해 후지무라의 사기극 20년 동안 의혹 제기 논문은 단 두 편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극우 세력도 좋아라 자기들의 교과서에 이걸 싣기까지 했다. 극우단체에서 쓴 역사책에서까지 후지무라가 발견한 유적을 첫머리에 내세우며 '이집트 문명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연대가 앞선 문명이 일본에 존재했다.'고 주장하며 일본을 세계 4대 문명 가운데 하나로 끼워넣었으니 말 다했다. 거기에 후지무라가 조작극을 벌인 곳이 토호쿠 지방이었기 때문에 토호쿠 지방은 이를 지자체 돈벌이에 이용할 수 있다고 판단,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후지무라를 지원 사격해주어 후지무라의 입지를 든든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조작이 드러나자 같이 개망신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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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정작 까발려진 것은 20년 가까이 지나 2000년이 된 때였다. 과학이 국가적인 자존심 때문에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일본은 그동안 오래전부터 일본한국이나 중국보다 역사적으로 더 먼저였다고 주장했던 적이 있었다. 칭기즈 칸일본인이라며 고고학으로 무덤을 발굴하려던 일 말고도, 중일전쟁 당시 중국에 있던 북경원인 해골도 일본인이라고 하여[9]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뼈를 손에 넣으려고 했다가 실패했다. 현재 북경원인의 해골은 행방불명되었다. 전쟁 때문에 유골을 포장해서 미국으로 수송하던 도중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강탈하진 않았지만, 결국 그 전쟁을 일으킨 게 일본이라 책임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후지무라가 유물을 조작한 계기가 한국의 구석기 유물과 무관하지 않다는 의견이 있었다. 1977년 경기도 연천 전곡리 유적에서 처음 발견된 구석기[10]는 무려 27만 년 전의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자 일본 학계에서 '한국에도 수십만 년 전 구석기가 있는데 일본에 없을 리가 없다.'고 열폭하여 후지무라가 조작하기 쉬워지는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것이다.[11]
그런데 나중에 수사로 밝혀진 결과에 따르면 후지무라는 이미 1970년대부터 유물 조작을 시작했다. 따라서 전곡리 선사유적지에 경도되어서 일을 저지른 것보단, 본인 스스로가 양심의 가책을 잘 느끼지 않는 유형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듯하다. 물론 한창 사기를 저지르던 도중 전곡리 선사유적지에 경도되면서 더욱 유물 조작에 심취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한국에는 그가 구석기 유물을 조작한 사건의 인상이 커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후지무라가 처음으로 주류 학계의 주목을 받은 때는 1973년 본인의 활동 기반인 토호쿠후루카와시에서 기와 유물을 발견한 직후였고, 본인이 직접 답사단을 꾸리기 시작한 1975년에는 이미 석기 분야의 명인으로 대접받았다.
현재는 이와테현에서 발견된 7만 년 전 가네도리(金取) 유적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여긴다.

4. 결과


이 사람이 일으킨 조작 사건의 여파는 일본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간 것 뿐만 아니라,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무고한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엄청난 피해를 끼쳤고 그 피해는 현재도 적용 중이다. 가장 대표적인 피해자는 카가와 미츠오(賀川光夫,1923~2001)라는 벳푸 대학 명예교수. 카가와 교수는 1962년 오이타현 사이키시(佐伯市)에 있는 히지리다키 동굴(聖嶽洞穴)을 발굴하여 후기구석기의 석기와 뼈를 발견했고, 이 소식은 교과서에도 반영이 되었다. 그런데 1999년 2차 조사를 하는 와중에 발견된 유골은 과학적 조사결과로는 아무리 봐도 구석기 시대 인골일 수가 없었다. 2차 조사팀은 카가와 교수가 한 1차 발굴에서 발견된 인골이나 유물도 외부에서 혼입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 소식을 접하고 2000년 8월, 히지리다키 동굴 유적이 실은 구석기 유적이 아닐 가능성을 일본 언론들이 보도했다. 이때 (후지무라 신이치 조작사건의 열풍으로) 주간문춘(週刊文春)은 카가와 교수가 조작했을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제기했다. 이 때문에 카가와 교수는 장난전화를 받고 조롱을 당하는 등 일을 겪자 억울함을 주장하여 2001년 3월 9일 자살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일본 고고학협회가 2년간 검증에 들어갔다. 고고학협회의 결론은 딱히 카가와 교수가 조작한 게 아니라는 것.
카가와 교수가 발굴을 한 1962년은 조몬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기 이전이다. 또한 카가와 교수가 작성한 1차 발굴 당시의 보고서에서도 발굴기술이나 검증의 미흡함을 인정하고 후학의 연구를 기대한다고 문을 열어두었다. 따라서 카가와 교수가 조작했을 가능성보다는 단순한 연대착오, 또는 당시 일본 고고학계의 한계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정설이다. 게다가 이 사람은 가장 '양심적인' 고고학자로 평가받을 정도였으니 그런 의혹을 받는 것이 억울했을 만도 하다. 후일 유족들이 언론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서 승소했다지만 죽은 사람이 그런다고 살아 돌아오겠는가? 저런 파렴치한 때문에 '양심적인' 사람까지 피해를 본 사례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일본의 역사학계 역시 신뢰가 바닥까지 추락하는 아픔을 맛봐야 했다. 2001년 국제 고고학 회의에서 일본인 학자들은 진실성이 의심된다고 참가 거부를 당했고, 2002년에서야 참가하게 되지만 일본 학자들은 이 당시 말도 못 하고 죄인처럼 시무룩하게 앉아만 있었다는 당시 한국 학자들의 증언이 있었다. 이후에 나가노현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자 한국 학자를 초빙해서 연대 측정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아래에서 3번째 문단에 언급) 이는 일본 고고학계의 신뢰도가 바닥으로 떨어진 탓에 한국 학자들을 통해 확실하게 인증을 받을 용도로 그런 것이다. 한국과 일본이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은 각국이 너무나도 잘 아는 관계로, 한국이 이 유적의 연대를 인증하면 자연스럽게 검증이 되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를 들자면 아폴로 달 착륙 음모론에 대한 가장 확실한 반박근거 중 하나가 바로 소련이 이의 제기를 하지 않고 오히려 닐 암스트롱에게 훈장까지 수여하는 등 인정과 칭찬을 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래저래 안습한 상황으로 학자 하나 때문에 학계 전체에 연좌제를 적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으나 '''20년 동안이나 학계 전체가 신의 손이라 추앙'''했을 뿐만 아니라 조작을 밝혀낸 것 역시 학계가 아니라 언론사였던 만큼, 당시의 일본 역사 학계는 스스로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전체의 자질이 의심받아 마땅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사람이 일본 역사학계 교수에 의하여 퇴출당했다면 자정작용은 했다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저렇게 개쪽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후지무라 신이치의 '전성기'였던 20세기 말에는 심지어 (한국을 포함한) 해외 학자들도 일본 열도가 인류 선사시대의 발전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요충지 역할을 했을 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할 정도였다. 그러나 30년에 걸친 발굴 이력이 모두 조작이었음이 밝혀지자 이 모든 게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일본 고고학계의 신뢰도만 왕창 떨어지고 끝났다. 이 사기꾼 한 명 때문에 일본 인문학계는 그야말로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한편 동료학자들이 갈굼을 먹고 있을 당시 후지무라는 병원[12]에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이혼절차를 밟고 있었다. 너무 주변의 비난이 심해서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아내가 이혼을 요구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병원에서 자리보전하고 있을 때도 환자로 있던 한 여성을 알게 되어 2003년에는 이 여성과 재혼한다. 재혼 무렵에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 판정을 받고 정신장애 3급 장애인 판정을 받았다. 장애 판정이 나온 게 단지 꾀병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이때 후지무라는 화훼용 작두로 오른손 중지와 검지를 절단한 상태였다. 사고였는지 자해였는지는 불분명하나 후생노동성 심사관의 눈에는 일단 정상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던 듯.
이후 후지무라는 후쿠시마현 장애인 취업센터에서 자원봉사자(NPO)로 근무하다가, 2010년에 아내의 지병이 도지자 간병을 위해 자원봉사를 그만두고 연금을 신청해 후쿠시마현 동북부에 위치한 미나미소마시에서 연금을 받아 먹으며 살게 되었다.[13] 인터뷰에 따르면 날조에 관한 기억은 기억상실로 남아있지 않다고. 손가락 2개를 자르고 이혼당할 정도로 스트레스이니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지만,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데다[14] 설사 사실이라 해도 자업자득으로 벌어진 일이니 정상참작될 사유가 못 된다.

5. 기타


20세기 초 이와 비슷한 사건다른 섬나라에도 있었다.
한창 한일감정이 안 좋았던 시기이기도 해서 당시 주요 일간지에 대서특필 되었다.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 1권 역사편에서도 구석기시대를 다루며 이 사건을 언급하고 지나갔다. 역사적 우월성을 갖고 싶어한다는 맥락에서 언급되었다.
2010년 10월 3일 방영된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그를 다룬 바 있다.
별의 커비/애니메이션 에피소드 중에서도 이를 패러디한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일부러 몰래 가짜 유물들을 묻어놓고 그걸 나중에 파내어 시민들에게 발굴을 선보이는 행동 등, 위의 사건과 전개가 매우 비슷하다. 차이점이라면 스스로 발굴했다는 행세를 한 후지무라 쪽과는 달리 이쪽은 디디디 대왕 쪽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내세우기 위해 몰래 시켜서 했다는 점.[15]
고우영의 수레바퀴에서 무학대사에 대해 음모론(?)을 제시할 때, '가짜를 땅에 묻고 다시 발굴하는 것은 일본인도 할 줄 안다'는 의미심장한 글귀를 적었는데, 수레바퀴가 출판된 게 2000년대 초반이란 걸 감안하면 아무리 봐도 후지무라 신이치를 말하는 것 같다.
2014년 일본에서 또다른 학계의 조작 사건이 터졌다.
2017년 방영된 명탐정 코난의 872화 코난과 헤이지의 누에 전설에 나오는 탄자와 미치키는 유명한 역사 연구가였으나 출토품이 위조품인게 들켜서 매장되었다는 말로 봐서 이 후지무라 신이치를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도 별황자총통 발굴조작 사건이라는 흑역사급 사건이 있다.

6. 관련 문서


[1] 바로 발표했다가는 장난으로 그랬다거나 동료들이 조작사실을 알아채는지 알아보려고 했다는 등 갖가지 핑계를 댈 수 있다.[2] 허나 발굴 장소에서 조작 흔적이 확실히 발견이 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에 신이치가 나머지 18곳에서 발굴한 유물도 진짜라곤 확신할 수 없다.[3] 굳이 힘들게 외부에서 석재를 옮겨 쓸 이유가 없으니 주변에 있는 돌을 주워 쓰기 마련이고, 따라서 대체로 석기의 재질과 주변 석재의 재질은 비슷할 수밖에 없다.[4] 이게 가능하려면 일본이 철기와 석기를 동시에 사용하였다는 뜻인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굳이 철로 석기를 조각할 이유는 없다.[5] 이를 격지라고 부른다. 구석기 유적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의 80% 이상은 격지와 조각, 몸돌이 차지한다. 그런데 후지무라가 발견한 유물에는 이런 격지와 몸돌이 없었다는 뜻.[6] 쉽게 말해 괴베클리 테페가 만들어지기 훨씬 전부터 일본에서 제사의식을 행했다는 것인데, 당시에는 괴베클리 테페가 발견된 이후이기는 하지만 본격적인 발굴 조사는 1994년부터 이루어져서 현재와 같은 유명세를 얻기 전이었다. 심지어 그 괴베클리 테베마저 신석기 시대에 만든 것이다.[7] 출토된 유물이 왕관이나 장신구 같은 특수한 물품이 아닌 이상, 거의 대부분 함께 출토되는 유물이 여럿 나와야 한다. 무엇보다도 주먹도끼와 같은 유물은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가위나 칼 같은 공산품이다. 하나만 나오는 것을 이상하게 여김은 관련 전문가들에게는 당연한 일이다.[8] 이유는 간단하다. 상대적으로 조사가 자유로운 해외의 유적 발굴가, 고고학자들이 연구를 위해 조사를 시작하면 결국 들통나니까. 해외 학자들의 연구제의를 그럴 듯한 이유로 거절하면서 조작된 유물을 파내어 또다른 업적을 세워 권위자의 위치를 공고히 함으로써 아무런 의혹을 제기하지 못하게끔 만들기 위함이기도 하다.[9] 전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북경원인은 현생 인류도 아닌 호모 에렉투스 화석이었다. 이 논리를 조금만 더 과장하면 먼 고대의 가시두더지 화석도 일본인이니 일본이 포유류의 발상지라는 개드립도 칠 수 있다.[10] 이 석기는 정식 발굴로 발견된 것이 아니다. 당시 주한미군이었던 그렉 보웬(Greg Bowen)여자친구휴가를 나와 한탄강가에서 놀던 도중 여자친구가 만지던 돌을 보고 그것을 신기하게 여겨 아는 대학 교수에게 이를 알렸고, 이 덕분에 구석기 시대 유물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신고 당사자인 그렉 보웬은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했던 학생이었기에 그 돌이 심상치 않은 물건임을 알아보았다. 자세한 내용은 연천 전곡리 유적 문서 참고.[11] 참고로 이런 식의 남의 나라에 OO가 있는데 우리에게 없을 리 없다!는 열폭의식으로 생긴 고고학의 스캔들은 이미 필트다운 인으로 나온 바 있다(...) 그때는 대륙과 섬이었지만 본질적으로 우월의식이 깔렸음은 똑같다.[12] 정확한 병명은 불명이다. 해리성 장애는 이후의 일.[13] 당연히 도호쿠 대지진 당시에는 피난 생활을 했다.[14] 극심한 스트레스로 기억상실이 될 정도면 뇌의 구조적인 문제가 일어나기에, 해당 사건만 싹 잊기는 어렵고 기억 전반에 걸쳐 문제가 생긴다. 후지무라가 꾀병이 아니라면, 기억상실보다는 트라우마성 기억부정에 더 가까울 것이다.[15] 이 짓을 한 큐리오 박사는 진심으로 디디디 대왕의 말을 믿은게 아니라 너무 지원금이 없던 차에 디디디 대왕이 지원금을 준다니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것. 게다가 나중엔 훔의 설득을 받아들여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진실을 폭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