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트레아
1. 개요
동아프리카 홍해 연안에 위치해 있는, 1993년 건국된 국가. 수도는 아스마라. 전체 종족 구성에서 티그리냐인(티그라이족)이 55%로 압도적인 우위를 고수하고 있으며, 30%에 이르는 티그레족을 포함한 기타 민족도 포함되어 있다. 티그리냐인은 에티오피아에서는 2004년 기준 인구의 약 5%를 차지한다.
2. 상징
2.1. 국가
3. 역사
에리트레아는 4세기에서 6세기 동안 번영한 고대 악숨 왕국의 주요 항구가 있던 지역이다. 950년경에 에리트레아는 초기 에티오피아 제국과 연합을 이룬 자치국이었다가 16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7세기부터 19세기에 에리트레아의 통치권을 놓고서 에티오피아 제국, 오스만 제국, 티그라이 왕국, 이집트, 이탈리아 사이에 각축전이 벌어졌다. 최종적으로 1890년에 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되었다. 당시 수도 아스마라 주민의 절반이 이탈리아인이었다.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기지로 사용되었던 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6개 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가, 1941년부터는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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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트레아 독립 전쟁
그러다가 에리트레아는 1952년경에 에티오피아 제국의 1개 주로 병합되었다. 1962년 11월 14일 에티오피아가 에리트레아를 합병하자 이슬람 중심의 에리트레아 해방전선(ELF)과 기독교도 중심의 에리트레아 인민해방전선(EPLF, Eritrean People's Liberation Front) 등은 민족주의 분리운동 독립 전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ELF의 조직원들이 1977∼1978년, 1985년에 대거 에리트레아 해방전선-인민해방군(ELF-PLF)이나 EPLF에 합류함으로써 ELF의 군사조직은 와해되었으며, 1980년대 후반에는 ELF-PLF도 EPLF로 거의 흡수되었다. 한편 이들 분리주의 저항 단체들은 수단과 중국, 소말리아,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 튀니지, 리비아 등 각국의 군사, 재정적 지원을 받으며 에티오피아군과의 전쟁을 이어갔다.
1974년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폐위와 1991년 멩기스투 정권이 붕괴되고, 에티오피아 반란 연합세력이 아디스아바바를 점령하는 등의 혼란을 틈타 EPLF는 1991년 5월 수도 아스마라를 탈환한 뒤 에리트레아 독립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1993년 5월 24일 독립을 선포하였다. 4년 이내에 새 헌법을 제정해야 하는 국회는 1993년 6월 초대 대통령으로 EPLF의 사무총장인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를 선출했다. EPLF는 1994년 유일 합법정당인 민주정의인민전선(PFDJ, People's Front for Democracy and Justice)으로 개편되었다.
에리트레아가 독립하면서 에티오피아는 내륙국이 되었고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는 항구 사용을 두고 갈등을 겪었다. 결국 항구를 차지하고자 에티오피아와 1998년~2000년까지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의 지도 하에 본격적인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전쟁을 치르면서 지금도 사이가 좋지 않다. 이 전쟁에서 에리트레아는 혼란에 빠진 에티오피아를 상대로 크게 선전했지만 결국 스케일에서 밀려 전쟁 전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수준에서 전쟁을 끝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현재 에티오피아는 지부티의 항구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다가 2018년 평화조약을 맺고 양국의 관계는 많이 호전되었다.
에티오피아 전쟁 당시, 이스라엘과 미국,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에티오피아에게 밀리면서 안 그래도 열세였던 공군 전투기 다수를 상실하면서 패색이 짙었으나, 반대로 우크라이나와 리비아의 지지 및 에티오피아 내부 여론의 반발을 잘 활용하여[6] 외교적으로 영토를 잃지 않고 유엔의 중재로 2000년 12월 종전하였다. 이후 유엔 평화유지군은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의 국경지대에 폭 25km의 임시안전지대(TSZ)를 설치하고 양측을 감시하고 있다.
에티오피아와의 국경 분쟁이 벌어진 이후 2003년 3월 국경위원회(EEBC, Eritrea-Ethiopia Boundary Commission)가 양국간 국경의 소도시인 바드메(Badme)를 에리트레아 영토라고 결정하자, 에티오피아는 수용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하면서 양국간 국경 획정 작업이 중단되었으며, 양국 간의 대화는 끝나고 말았다. 2005년 10월에도 국경에 분쟁이 해결되지 않고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에티오피아는 TSZ에서 유엔 평화유지군의 공중 정찰을 금지시켰고 또다시 국경지역에는 군사적 긴장 상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문제는 이러한 군사적 긴장 상태로 인해 에리트레아는 에티오피아와의 국경 분쟁으로 재정 수입은 감소하고 군사비 지출이 급증하여 오랜시간 동안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게 되었으며, 10만 명에 달하는 수단 국경지대의 난민과 7만 5천 명의 에티오피아 추방 난민은 에리트레아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2004년 4월에 에리트레아 내에서의 인권 상황이 악화되었고, 다당제를 실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프리카 성장촉진법(AGOA, Africa Growth Opportunity Act) 수혜 대상국에서 에리트레아를 제외시켰고 현재까지도 에리트레아인들은 하루하루를 독재와 가난에 시달리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2018년 9월 30일에 에리트레아는 유엔 제재를 해제해달라고 요청했다.#
4. 사회
에리트레아는 1993년 에티오피아에서 독립한 이후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대통령이 에리트레아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래 지금까지 집권하고 있다. 독립 이후 현재까지도 에티오피아와의 분쟁은 지속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수만 명의 에리트레아인이 사망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에리트레아는 독립 이전에도 사막화와 인구 증가로 기근이 심각한 지역이었고, 독립 전쟁을 겪는 와중에 경제난이 더 심화된 지독하게 가난한 상태라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국민 대다수가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함에도 불구 식량의 70%는 수입과 원조에 의존할 정도로 가난해졌으며, 또한 이렇다 할 산업이 없으니 일자리도 없는 말 그대로 막장인 상황이다. 실제로 2005년 아프리카에서 최악의 영양실조율을 기록한 나라는 에리트레아였는데 에리트레아의 영양실조율은 무려 '''73%에 달했다.''' 이는 대표적인 기아국가로 알려진 에티오피아의 46%보다 훨씬 높은 수치일 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막장국가인 아이티가 47%라는 것으로 보아 얼마나 에리트레아가 막장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알 수 있다. 기사
이로 인해 에리트레아는 북한, 투르크메니스탄[7] 등과 함께 최악의 독재국가 중 하나로 여겨진다. 철권 억압 통치를 통해 에리트레아 국내의 내전 발발을 억누르는데 성공했을지 몰라도, 억압적인 통치로 그 이상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문제를 안고 있는 것. 아페웨르키는 민주주의를 실현할 생각도 없는 상황이며 알자지라 기자에게 '''"에리트레아에는 민주주의라 불리는 상품이 없다"'''라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에리트레아는 세계 최악의 언론 탄압국으로 꼽히는데 그 이유는 에리트레아에는 정부의 입장을 알리는 관영 언론만 있으며 2001년 정부가 민영 언론을 완전히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에리트레아의 TV와 신문의 뉴스는 온통 정부 정책과 대통령을 찬양하는 내용 뿐이며 이러한 이유로 언론자유지수에서 최하위를 기록했을 정도다. 언론자유지수는 142점 만점이고 점수가 높을수록 언론자유도가 낮음을 의미하는데, 이 조사에서 북한 최고 기록이 2012년 '''141점'''인데 에리트레아 최고 기록은 역시 2012년에 탄생. 무려 '''142점 만점'''이다. 또한 에리트레아에는 종교의 자유도 없으며, 기독교를 탄압하는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들 중에서도 상황이 매우 심각한 것으로 악명이 자자하다.
게다가 현재 에리트레아에는 외국의 특파원들은 단 한 명도 없다. 모든 기사는 국영 언론사가 보도하며, 주로 아페웨르키 대통령의 행적을 찬양하는 내용 뿐으로 만약 정부에 비판적인 기사를 쓰려면 투옥당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에리트레아를 "아프리카 대륙 최대의 기자 감옥"이라고 부른다.
에리트레아는 전화선과 모뎀을 이용한 다이얼업 접속만 허용하고 이동전화 보급률이 5%로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라고 한다. 기사 뉴욕타임스는 북한과 함께 에리트레아를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사람이 국민의 1%도 안 되는 나라"라고 했다.
게다가 에리트레아의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는 아프리카 각국의 분쟁에까지 개입해 테러단체와 반군 세력들까지 지원을 하는데 실제로 소말리아에서 알 샤바브 연계 테러를 지원한 혐의로 UN에서 에리트레아에 대해 제재를 가하고 있다.
에리트레아 국민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가혹한 군 생활이다. ''' 에리트레아인들은 16-18세가 되면 남녀 구분 없이 징집되어 군대에서 10년 이상 복무'''해야 하는데, 군대 환경은 매우 나쁜 데다가 정작 군사 훈련 대신 금광이나 건설 현장에 동원돼 강제 노역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이렇게 차출된 군인들은 에리트레아 집권당과 군부소유의 건설사의 공사장에 배치되어 1주일에 6일, 하루에 12시간씩 사실상 강제노동에 동원되고 있다. 게다가 이들에겐 매달 고작 10달러 정도의 임금만 줌으로써 사실상 공짜 노동을 통해 집권당과 군부가 이익을 착취하고 있으며 이들 건설사들이 에리트레아에 진출한 외국 건설사들에 징집 인력을 '대여'해주고 외국기업이 노동자들에게 지급하는 급여를 가로채고 있다.출처
또한 에리트레아의 인권유린도 굉장히 심각해서 정치범을 섭씨 50도 무더위에 철로 된 컨테이너 상자에 가두거나, 몸에 우유와 설탕을 발라 벌레의 공격을 받도록 하는 형벌도 있으며, 사법 절차가 생략된 공권력의 무자비한 살인, 성 노예 및 강제 노동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유엔 인권보고서에는 적혀 있다. 증언에 의하면 한 여자가 복음설파를 했다고 수감자들과 함께 마이 세르와 군사 기지의 화물용 컨테이너에 구금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컨테이너에는 화장실이 구비되어 있지 않은 것은 물론 낮에는 찌도록 덥고 밤에는 얼어붙을만큼 춥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곳에서는 종교를 포기할 것을 강요하는 구타행위가 이뤄졌다고 한다. 기사 또한 사람들끼리 서로 감시하며 정보 기관에 고자질하는 풍토가 만연해 있다.
에리트레아는 가톨릭·루터회·정교회 외의 다른 기독교 교파나 교단[8] 을 극도로 배척하여 이들 종교는 무조건 불법이며 에리트레아 정부는 한 기독교인 남성이 기독교를 전파시켰다면서 구금한 후 고문하고 굶겼을 뿐 아니라, 짐승처럼 묶어 쓰레기를 먹도록 강요하기까지 했다. 피해자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은 나를 고문하기 위해 밖으로 끌고나가 벌거벗긴 채, 낮에는 뜨거운 태양 아래 두었고 밤에는 추위에 떨게 내버려뒀다'고 한다. 출처
심지어 에티오피아에서 독립한 이후 한 번도 선거를 실시하지 않은 가히 막장국가며 최소한 1만 명에서 2만 명에 달하는 정치범이 약 300개가 넘는 수많은 수용소에 구금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이딴 막장 짓거리들이 횡행하다보니 에리트레아에서는 한 달에 5000명의 에리트레아인들이 지중해를 건너고 있으며 다양한 방법으로 도망쳐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일 정도다. 월스트리트 저널이 보도하기를 유럽연합(EU) 통계청인 유로스탯(Eurostat)의 자료를 인용해 2012년부터 올해 중반까지 유럽으로 탈출해 보호를 요청한 에리트레아인이 전체 인구의 2.13%에 이른다고 할 정도이며 이는 에리트레아인 50명 중 1명 이상이 난민을 신청한 것으로 이 수치는 이는 오랜 내전에 시달리며 난민 신청 최우선 순위로 여겨지는 시리아(1.25%)보다 훨씬 높은 비율이다.[9] 그렇게 최근 몇 년 동안 40만 명 즉, 전체 인구의 9% 가량이 탈출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그렇다 보니 유럽 난민 사태에서 시리아인과 더불어 에리트레아인도 보호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사실상 삶이 전쟁인 국가라...
심지어 에리트레아 축구선수들이 '''망명신청'''을 하기도 했다. 에리트레아 축구선수들은 2015년 10월 13일 보츠와나에서 월드컵 예선전을 3대 1로 패배했는데 이 축구 선수들이 망명 신청을 했을 정도로 망명이 아주 많은 수준이라고 하며, 이외에도 많은 에리트레아 선수들이 해외 경기가 끝난 뒤 망명을 요청하고 있다. 지난 2012년 우간다에서 18명이 망명신청을 했고, 2009년 케냐에서 12명, 2007년 앙골라에서 6명이 망명을 신청했다.
그러나 에리트레아 정부는 난민을 적발하면 현장에서 총살하는 것이 원칙이여서 탈주하는 국민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등의 반인륜적 범죄로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외국 언론과 인권단체의 접근을 철저하게 차단하여, 북한만큼 실상이 외부에 별로 알려진 게 없다고 한다.
이런 극악무도한 에리트레아 인권 상황에 대한 요약을 한 영어 위키백과의 관련 문서가 있으니 영어가 된다면 한번 읽어 보는 것도 좋다.
2020년 1월 31일에 에리트레아 남서부의 금광에서 산사태가 일어나 최소 16명이 사망했다.#
5. 정치
에리트레아의 독재자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는 민주정의인민전선(PFDJ) 일당 독재체제를 유지하면서 다당제 도입을 계속 연기하고 있으며, 2001년 12월 실시하기로 약속했던 국회의원 선거도 무기한 연기하였다. 따라서 국회를 통해 간선으로 선출되는 대통령 선거도 계속 미루어지고 있어 집권층 내부에서도 민주주의 개혁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에리트레아는 2001년 국가안보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모든 민영 언론사를 폐쇄하고 다수의 언론인을 체포했다. 이러한 이유로 2012년 언론자유지수에서 '''북한을 누르고''' 최하위를 기록하기도 했다.[10] 2001년 모든 민영 언론사가 폐쇄되었다. 독립운동 때 에리트레아는 정당 수립을 요구했으나 정작 지금은 민주정의인민전선 1당. 정확히는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독재자 한 명이 통치하는 1인 독재 국가이다. 선거는 1997년, 2003년, 2004년 지방선거 이후에는 없다. 유엔인권보고서에서는 에리트레아 정권이 전체주의적인 감시통제망을 가동함으로써 "아무도, 심지어는 가족도 못 믿는" 사회가 됐다고 지적했다.
에리트레아의 정부형태는 대통령 중심제로 1993년 4월 독립에 대한 국민투표 실시후 구성된 과도정권이 집권하고 있는데, 에리트레아 의회는 150석 정원의 단원제 국회를 채택하고 있으며 PFDJ가 유일한 정당이다. 세분하자면 75석만 PFDJ이고 나머지는 임명석이다. 현재 에리트레아의 문맹율은 41%에 달하며 평균 수명은 52세(남 51세, 여 53세)이다.
한비야가 자신의 여행서에서 얼굴도 잘생기고 엘리트인데 덕망도 있다고 그토록 칭찬에 마지않았던 에리트리아의 지도자씨가 바로 이 인물이다. 그야말로 한비야의 흑역사. 물론 1990년대 중반에 한비야가 여행할 시기에는 에티오피아와 독립 전쟁으로 죽어라 싸우던 터에 독재를 강화하지 못했던 시절이라 좋게 봐줄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11] 현재 20년 넘게 집권 중. 다만 주변국에 의도적으로 해를 끼친다거나[12] 하지는 않는 듯하다.
2014년 지중해를 통해 유럽으로 향한 난민의 18%가 에리트레아 출신이었다. 내전과 이슬람국가(IS)의 학대에 시달리는 시리아(31%) 다음으로 높은 비중이다. 시리아·소말리아·아프가니스탄 등 난민 수 상위권 국가들은 모두 내전을 겪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에리트레아는 예외다. 유럽에 들어온 난민들 중 에리트레아 국민들은 매달 약 5천 명이 국경에서 발각되는 즉시 사살되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웃 수단이나 에티오피아로, 멀리는 리비아를 통해 유럽으로 탈출하고 있다. 지난 10월 현재 수단과 에티오피아에 거주하는 에리트레아 난민만 20만 명. 이들을 포함해 에리트레아를 탈출한 난민은 총 35만 7천명으로 추산되는데,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현 에리트레아 총인구의 6~10%에 이르는 규모이다. 유럽에 정착한 이들은 단파라디오나 인터넷으로 모국에 반독재 방송을 보내거나 서방에 에리트레아의 실상을 알리는 활동을 하고있다. 에리트레아 국내에는 아페워키 독재정권에 대항해 사막과 오지 산간 지대에서 활동하는 소규모의 반정부군 저항 게릴라 세력들도 존재하고 있다.
6. 경제
에리트레아 정권은 2006년 한 공사장에서 노동자 한명이 숨진 것을 구실로 모든 민간 건설사들의 사업 인허가를 취소한 뒤 집권당과 군부가 운영하는 건설사들이 이들을 헐값에 인수토록 함으로써 현재 에리트레아에는 집권당과 군부 소유 건설사들만 사업을 하고 있다. 유엔인권 보고서는 이들 건설사들이 에리트레아에 진출한 외국 건설사들에 징집 인력을 '대여'해주고 외국기업이 노동자들에게 지급하는 급여를 가로채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계 기업들도 에리트레아에 진출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7. 군사
에리트레아는 인구도 매우 적고 경제적으로도 세계 최빈국이나 GDP의 20%를 국방비에 쏟아붓고 있다. 참고로 북한은 25%~30% 정도. 그럼에도 32만 명[13] 규모의 군대를 운용하고 있어 징집 가능 인구의 5분의 1가량이 군인이다. 전체 인구 대비로 볼 때 북한 다음으로 현역[14] 병력이 많은 나라가 에리트레아이다. 참고로 에티오피아군은 현역 15~18만 명에 예비군은 거의 없다. '국가 봉사 프로그램'을 내세워 18세 이상 젊은 청년들을 모두 의무적으로 징집한 뒤 이들을 집권당과 군부소유 건설사의 공사장에 배치해 1주일에 6일, 하루에 12시간씩 사실상 강제노동에 동원하고 있다.
허나 에티오피아군에 비해 실제 전력은 취약하다고 평가받는다. 에티오피아군은 에리트레아보다는 오히려 소말리아 지역의 군벌들을 더 두려워한다.
8. 문화
에리트레아에는 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는데, 티그리냐 50%, 티그레 및 쿠나마 40%, 아파르 4%, 사호 3%, 기타 3%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에리트레아 남부 고원지대에는 티그리냐어를 쓰는 기독교인, 북부 고원지대와 동부, 서부 구릉지대에는 티그레어를 쓰는 무슬림들이 살고 있으며, 티그리냐어를 쓰는 티그리냐인은 에리트레아 최대 민족이지만 남쪽 국경 에티오피아의 티그라이 주에 더 많이 거주한다. 이웃 부족들이 반농반목에 가까운 것과 다르게 이들은 농업 위주로 생계를 유지한다. 티그레어를 사용하는 무슬림들은 대부분 목축업을 하고 있다.
해안 사막평원에서는 사호어와 아파르어, 서부 평원지대에서는 베자어와 나일 제어를 사용한다. 해안과 수단 국경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아랍어, 티그레어, 아스마라 주변 사람들은 식민지 시대의 영향으로 이탈리아어를 쓰고 있다. 공용어는 티그리냐어와 아랍어인데, 티그리냐어도 아프리카아시아어족 셈어파, 즉 아랍어와 같은 어족 같은 어파에 속하는 친족 관계의 언어이다. 아랍어와 티그리냐어외에도 영어도 널리 쓰이고 있다.
무슬림들이 많이 살고 있지만 다수파는 아니다. 다수 티그리냐 족이 에리트레아 테와히도 정교회를 많이 믿으며 인구 50%를 차지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가톨릭이 12%를 차지해 기독교 인구가 총 62%이고 수니파 무슬림(티그레족 대다수가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이 36%를 차지한다. 에리트레아에서는 오순절교회나 복음주의 교회 신도들이 감금을 당할 정도로 개신교에 대한 종교적 박해가 심하며, 기독교 박해지역의 기독교인들이나 개신교 박해지역의 개신교 신자들을 지원하는 국제선교단체인 오픈도어(Opendoor)에서도 에리트레아를 개신교 박해지역으로 분류하고 있다.
전 식민모국인 이탈리아의 흔적은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남아 있다. 고령층에 이탈리아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으며 카페 문화가 잘 발달되어 있다. 수도에는 한때 '작은 로마'라 불릴 정도로 이탈리아인들이 많이 거주했는데 20세기 초 이들이 지은 아르데코 건축물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있다. 유럽의 보수적인 건축의 영향권 밖에서 독특한 양식을 피워낸 것이 높게 평가받았다. 또한, 에리트레아내에도 이탈리아계 에리트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에리트레아 축구 국가대표팀 문서를 보면 군사와 같이 축구도 최약체라는 것을 그냥 알 수 있다.
사이클 강호다. 1910년 이탈리아의 식민지 시절 자전거가 에리트레아에 소개된 뒤로 사이클 팀이 생겨났고 많은 선수들을 배출 했다. 가장 유명한 선수로는 다니엘 테클라헤이마놋 이라는 선수로 투르 드 프랑스, 지로디탈리아, 부엘타 아 에스파냐 등등의 경기에서 산악왕 저지를 차지한 적이 있었다. 에리트레아 수도 아스마라 자체가 해발 2,300m에 위치한 고지대라 지구력이 훌륭한 선수들이 많은 편이다.
9. 여행
대한민국 국민은 사전 비자를 발급받아야 갈 수 있다.
에리트레아 직항 노선은 없지만 가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두바이 국제공항에서 새벽 3시 40분[15] 에 출발하는 플라이두바이 항공편이 직항운행하기도 하며, 카이로에서도 이집트항공이 직항운행한다.
아프리카의 북한이라 불리는 나라이나 북한과 달리 가이드를 동반하거나 계획된 경로로 돌아다니는 것이 의무적이진 않다.
수도 아스마라 외 지방쪽으로 갈려면 20낙파에 발급하는 외국인 여행 허가증을 발급받아야 한다.
10. 외교
11. 기타
- 러시아의 작가 알렉산드르 푸슈킨의 외증조부인 아브람 페트로비치 간니발이 에리트리아 출신 흑인으로 추정되었었다. 오늘날에는 간니발의 고향을 카메룬 근방으로 추정 중
- 소설 《커피우유와 소보로빵》은 독일로 이주한 에리트레아 난민이 차별받는 광경을 다루고 있다.
- 아프리카에서는 유일하게 크리스마스를 2번 보내는 나라이다.
- 딴지일보의 한 글에서는 에리트레아가 살기 좋은 나라라는 헛소리를 늘어놓았는데, 애석하게도 링크된 저 글은 반어법으로 쓴 게 아니다. 생각할 가치도 없는 쓰레기 같은 글[16] 로 북한이 살기 좋다는 이야기나 다를 바가 없다. 실제로 밑에 나와 있는 댓글에서도 조롱하는 의견이 우세하다. 차라리 댓글이 이 문서보다 제대로 된 설명이 적혀 있으니 댓글을 참고하는 것이 나을 정도. 당장 그렇게 살기 좋은 국가라면 아프리카에서 인구 대비 가장 많이 나오는 난민이 에리트레아 난민이고, 막대한 수의 난민유입으로 스트레스 받는 유럽에서도 에리트레아 난민은 이해할 만한다는 소리가 나올까?
[1] 티그리냐어[2] 아랍어[3] 에티오피아와 영토, 국경 분쟁 중이라 면적이 오락가락한다.[4] 법적으로 공용어는 아니지만 국가 업무와 같은 것은 모두 영어로 한다.[5] 티그레어, 아파르어 등.[권위주의] 2.15점[6] 실제로 1990년대 말 이 전쟁을 다룬 국내 언론에 따르면 에티오피아 내부에서는 "국민들은 굶어 죽는데 경제나 살릴 것이지 무슨 전쟁이냐" 며 정부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고 전하고 있다.[7] 그나마 이 나라는 많은 자원으로 국민들에게 상당한 복지를 제공해 굶어죽는 사람들이 없게 했으며 1999년에 사형 제도를 폐지하는 등 어느 정도 인권을 제공함으로써 봉기가 일어나지 않도록 했다.[8] 탄압 대상에는 성공회도 포함된다. 가장 많이 탄압당하는 교단은 오순절파와 감리교.[9] 소말리아(0.61%), 아프가니스탄(0.44%), 이라크(0.20%)라고 한다.[10] 참고로 언론자유지수는 142점 만점인데 점수가 높을수록 언론자유도가 낮음을 의미한다. 이 조사에서 북한 최고 기록이 2012년 '''141점'''인데 에리트레아 최고 기록은 역시 2012년에 탄생. 무려 '''142점 만점.'''[11] 참고로 무솔리니나 후세인, 벤 알리, 카다피, 무바라크 같이 부정부패와 숙청, 전쟁으로 나라를 망친 독재자들도 집권 초기에는 정상수준을 넘어서 꽤 높은 평가를 받았다. 히틀러 같은 경우엔 아예 불세출의 위대한 민족 영웅으로 평가받았고 영국과 미국에서조차 히틀러를 우상으로 삼은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현재는 모두가 알다시피 독일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지도자 중 하나로 꼽힌다.[12] 에티오피아와의 갈등은 에티오피아 전 독재자 멜레스 제나위가 압박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측면도 없지 않다.[13] 이 가운데 20만 명은 현역이다.[14] 예비군까지 포함하면 순위가 조금 떨어진다. 그래도 상위권이다.[15] 두바이의 항공편 대부분은 새벽에 출발한다[16] 저 글은 딴지의 정식 기자가 쓴 글이 아닌, 독자투고란에 적힌 글인데 편집자가 제대로 걸러내지 못하고 그대로 올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