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항소이유 보충서
1. 개요
유신체제 시절 중앙정보부 부장이었던 김재규가 박정희 살해사건에서 항소하기 위해 1980년 1월 28일에 발표한 항소이유 보충서로, 전반적인 내용은 10.26 사건이 필요한 조치였다고 주장하며 고문을 당하면서 자기가 쓴 재산헌납 서약서는 무효이고 10.26 사건을 일으킨 계기가 무엇인지를 서술해놓은 것이다. 이 보충서는 재판과정 중 김재규측의 주장 전반을 짧고 명쾌하게 서술하고 있기에 문헌으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어 나무위키에 작성한다.
또한 이 글에는 짧지만 최태민과 박근혜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어서 이미 당시부터 최태민 일가와 박근혜가 가까운 사이였으며 김재규가 이를 경고했다는 사실이 담겨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이후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하 당시의 원문을 맞춤법을 포함하여 모두 그대로 쓴다.[2]
2. 전문
피고인은 피고인의 변호인들이 1980년 1월 21일자로 제출한 바 있는 항소이유서#s-3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보충합니다.
다음
2.1. 서문
본인이 결행한 이번 10·26 거사는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한 혁명이었읍니다. 5.16과 10월 유신을 거쳐 완전하게 말살시켜놓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켜놓기 위한 혁명이었읍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우리나라의 건국이념이며 국시입니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보전하는 일은 이 땅에 생을 누리고 있는 모든 국민의 제 1차적이고 가장 중요한 의무에 속합니다. 국시인 자유민주주의가 완전히 말살되었을 때 그 압제와 말살의 원인을 제거하고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키는 일 또한 우리 국민이 갖는 막중한 책무요, 그 고유한 천부의 권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저항권 내지 혁명권이 바로 그것입니다. 10·26 민주회복국민혁명이 이 저항권 내지 혁명권의 행위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읍니다.
2.1.1. 10·26 민주회복국민혁명의 필연성
첫째로, 우리나라의 건국이념은 자유민주주의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국기(國基)요 국시입니다. 6·25 전란을 통하여 많은 고귀한 피를 흘리면서까지 지켜온 것입니다. 4·19 의거의 희생 역시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것이었읍니다. 이 자유민주주의가 완전히 말살되고 1인독재체제를 구축한 것이 10월 유신이었던 이상 유신체제를 철폐하고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켜야 함은 당연한 명제입니다.
둘째로,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은 전국민이 열망하는 것입니다.
유신체제 7년 동안 이 체제에 대한 도전과 항거는 온 국민의 생각 속에 팽배해 있었읍니다. 작년 10월의 부산·마산 사태가 그 좋은 증거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박대통령이 영도하는 정부 안의 국무총리를 비롯한 전각료, 공무원과 공화당의 당원들조차도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을 뿐 내심으로는 유신체제의 철폐나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을 다 같이 원하고 있었읍니다. 10·26 혁명 이후 정부나 공화당 모두가 입을 모아 개헌을 주장하는 것으로도 이 점은 분명한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의 우방에서도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을 강력하게 원하고 있읍니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미국·일본을 비롯한 자유우방과 강력한 유대관계를 지속시키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조차 없게 되어 있읍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도 중요한 국가안보라는 차원에서도 그렇습니다. 자주국방이 이상일는지는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잠꼬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서독 같은 나라도 집단 안보를 강조하고 있는 터에 우리가 자주국방을 내세운다는 것은 그 발상 자체가 우스운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안전보장에 직접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우리의 혈맹인 미국을 위시한 모든 우방이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을 원하고 있었읍니다.
넷째로, 만일 우리가 자유민주주의를 하지 않는다면 북괴와 싸워 이길 수 없고 궁극적으로는 적화되고 말 것입니다.
국가의 안보란 무력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독재체제로 북괴를 닮아서는 절대로 적을 이길 수 없읍니다. 이념적으로도 우월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함은 물론 무엇보다도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강한 국민의 의지만이 적을 이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독재체제가 계속되어 국민들이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식어간다고 할 때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10월 유신으로 독재정치가 계속되면서 외교관계, 특히 미국과의 관계는 건국후 최악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읍니다. 미국과의 관계가 이처럼 악화되어서는 우리의 안보도 끝장인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유신체제를 철폐하고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나라의 국시에 맞는 일이고 건국이념을 되살리는 일로서 전국민은 물론 우방이 모두 열망하고 있었고, 만일 이를 하지 않고는 북괴와 싸워 이길 수 없고 궁극적으로는 적화될 수밖에 없었음이 분명한 이상 본인이 결행한 10·26혁명은 필연적인 것이고 불가피한 것이었읍니다.
2.1.2. 10·26 혁명의 적시성(適時性)
첫째로, 유신체제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정도의 한계점에 와 있었읍니다. 우리 민족은 본래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우수한 민족입니다. 일제의 압제에 항거하여 3.1운동까지 일으킨 민족이고 안중근 의사 같은 훌륭한 분을 낸 민족입니다. 이러한 역사 속에 살아온 우리 국민이 유신체제 같은 혹독한 독재를 용납할 리가 없읍니다. 유신체제 7년 동안 끊임없이 압제와 독재에 항거하여 왔읍니다.
본인이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무슨 명목을 붙여서든지 구속된 사람을 많이 풀어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급조치 9호로 구속되는 학생의 수는 늘어만 갔읍니다. 안타까운 일이었읍니다. 제적학생수는 더 많았읍니다. 그 제적학생들은 다른 대학에 새로 입학할 수도 없었읍니다. 완전히 대학에서 추방하도록 박대통령 자신의 지시로 방침까지 세워놓고 있었읍니다.
그러나 백번 잘못을 저지른 국민을 백한 번 용서하는 것이 정부의 태도여야 한다고 믿은 본인은 당시 박찬현 문교부장관에게 먼 훗날 우리가 어떤 심판을 받겠느냐면서 제적된 학생들을 모두 복교시키자고 세 번씩이나 간곡하게 애소도 해본 일이 있었읍니다만 복교시킨 뒤에 학생들이 또 무슨 일을 저지르면 자기가 책임질 수 없다고 하면서 거절을 당한 일도 있었읍니다.
어떻든 이와 같은 가혹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국민, 특히 학생들의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은 더욱 거세어졌고 급기야 부산·마산사태로까지 발전하였던 것입니다. 부마사태는 그 진상이 일반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읍니다. 특히 부산에는 본인이 직접 내려가서 상세하게 조사하여 본 바 있읍니다만 민란의 형태였읍니다.
본인이 확인한 바로는 불순세력이나 정치세력의 배후조종이나 사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일반시민에 의한 민중봉기로서 시민이 데모대원에게 음료수와 맥주를 날라다 주고 피신처를 제공하여 주는 등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이 완전히 의기투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고 수십대의 경찰차와 수십 개소의 파출소를 파괴하였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읍니다.
그것은 체제에 대한 반항, 정책에 대한 불신, 물가고 및 조세저항이 복합된 문자 그대로 민란이었읍니다. 이러한 사태는 본인이 당시에 갖고 있던 정보에 의하면 서울을 비롯한 전국 5대도시로 확산되어 연쇄적으로 일어나게 되어 있었읍니다. 국민들의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은 일촉즉발의 한계점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이와 같은 위기에 처하여 박대통령은 절대로 물러설 줄 몰라 국민의 엄청난 희생이 강요되고 있었읍니다. 본인이 부산사태 직후 부산을 다녀오면서 바로 청와대로 들어가 박대통령에게 보고를 드린 일이 있읍니다. 김계원 실장과 차지철 실장과 동석하여 저녁식사를 막 끝낸 식당에서였읍니다. 부산사태는 체제반항과 정책불신 및 물가고에 대한 반항에 조세저항까지 겹친 민란이라는 것과 전국 5대도시로 확산될 것이라는 것 및 따라서 정부로서는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아니하면 안되겠더라는 것 등 본인이 직접 시찰하고 판단한 대로 솔직하게 보고를 드렸음은 물론입니다.
그랬더니 박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면서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고 역정을 내셨고, 같은 자리에 있던 차지철은 이 말 끝에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 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200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읍니까" 하는 무시무시한 말들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읍니다.
그런데 박대통령의 이와 같은 반응은 절대로 말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본인의 판단이었읍니다. 박대통령은 그 누구보다도 본인이 잘 압니다. 그는 군인 출신이고 절대로 물러설 줄을 모르는 분입니다. 더구나 10월 유신 이후 집권욕이 애국심보다 훨씬 강하여져서 심지어 국가의 안보조차도 집권욕의 아래에 두고 있던 분입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여러 모로 비교도 하여보았지만 박대통령은 이박사와는 달라서 물러설 줄을 모르고 어떠한 저항이 있더라도 기필코 방어해내고 말 분입니다.
4.19와 같은 사태가 오면 국민과 정부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질 것은 분명하고 그렇게 되면 얼마나 많은 국민이 희생될 것인지 상상하기에 어렵지 아니한 일이었읍니다. 그런데 4.19와 같은 사태는 눈앞에 다가왔고, 아니 부산에서 이미 4.19와 같은 사태는 벌어지고 있었읍니다.
셋째로,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원하지 않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국제적으로도 고립되고, 특히 미국은 대한정책을 바꾸게 될 충분한 가능성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나라의 장래는 어떻게 되겠읍니까? 결국 본인은 이와 같은 절박한 상황에서 도저히 더 이상 늦출 수가 없어서 10·26 혁명을 결행하였던 것입니다.
2.1.3. 10·26 혁명의 방법
첫째로, 다른 방법이 없었읍니다. 유신체제를 철폐하고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키는 것이 아무리 당위의 명제로서 불가피하였고 또 이를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박대통령의 희생 없이 이를 달성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단 한 가지라도 있었다면 박대통령의 희생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은 전혀 없었읍니다.
본인이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한 뒤 순리로 체제를 바꾸거나 완화하여보려고 여러 차례에 걸쳐서 여러 각도로 노력하여왔던 일은 변호인들이 제출한 항소이유서에 상세히 적혀 있었읍니다만 그러한 노력이라고 하는 것들도 저 자신의 전인격과 직위를 걸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것들이었읍니다. 그러나 손톱도 안 들어갔읍니다. 자유민주주의의 회복과 박대통령의 생명과의 숙명적인 관계만을 확인할 따름이었읍니다.박대통령은 국민의 어떠한 건의나 요구에 대하여서도 촌보도 양보할 줄 모르는 그런 성품이었읍니다. 따라서 그의 생명과 바꾸는 방법 이외에는 절대로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었읍니다.
둘째로, 박대통령을 사살하는 바로 그 자체가 혁명이었읍니다. 혁명이라고 하여 기본 룰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목적과 대상에 따라 그 방법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박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를 말살한 유신체제를 출범시키고 이를 유지하여 온 장본인입니다. 박대통령이 바로 유신체제라고 보아 좋을 것입니다. 따라서 유신체제를 깨기 위하여는 그 심장을 멈추게 할 수밖에 없었고 또 그것으로 충분하였읍니다.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보전할 책임은 있을지언정 이를 말살할 아무런 권리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1.4. 10·26 민주혁명의 결과
본인이 결행한 민주회복을 위한 혁명은 완전히 성공한 것입니다. 10·26 이후 유신체제는 완전히 무너졌고, 자유민주주의는 회복되었읍니다. 다만 본인이 혁명 후에 완수하려던 혁명과업, 즉 유신기간 동안 사회에 쌓여온 많은 쓰레기들을 설거지하고 자유민주주의가 이 땅에 뿌리내리도록 지켜주는 일은 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을 뿐이고 이 점 심히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2.1.5.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켜놓은 10·26 혁명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완전히 성공한 혁명입니다.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킨 바로 그것이 죄가 된다면 무슨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읍니다. 그러나 나를 처형한다면 이 땅에 더 큰 문제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국민은 3.1 운동도 하였고, 4·19도 한 국민으로서 불이 붙으면 무서운 국민입니다. 결코 우리 민족의 혼, 우리 민족의 저력을 무시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본인이 한 일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한 일이기 때문에 그 이해득실이 일부 국민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 국민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한 나를 처형하면, 1960년 김주열이 죽어 4·19가 일어났듯이 국민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읍니다. 내 죽음이 이슈를 제공합니다. 나를 죽이면 학생, 인텔리, 종교인 등 국민들이 대정부투쟁을 벌이고 나올 것입니다. 여기에 북괴가 추파를 던져 국론을 분열시킬 것이고 혼란을 틈타 장난할 가능성도 있읍니다.
이와 같은 국내외 정세로 보아 지금 우리나라가 대단히 어려운 때임을 알 수 있읍니다. 현재 군부가 우리 정치 전체를 요리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 군부나 재판하는 여러분보다 정치에 관한 한 내가 전문가입니다. 유니폼을 입은 당신들이 편견을 가지고 이런 식으로 정세 전망을 하여서는 아니됩니다. 나의 사건을 군대에서 생긴 조그마한 범죄를 다루는 것같이 하고 있지만 이 사건은 자유민주주의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정치 전반에 대한 뚜렷한 판단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정부가 내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지 말고 나로 하여금 자결하도록 하기를 바랍니다. 내가 자결하면 내 죽음에 대하여 국민들이 정부를 원망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물론 내 목숨 하나로 전 책임을 지고 내 부하들은 살려주어야 되겠읍니다. 그리하여 대법원과도 상의하여 나를 제거하되 정부가 책임지지 않도록 신중히 처리하기 바랍니다. 본인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켜놓은 것이 결과적으로 이 나라에 불행을 가져오는 일이 없도록 거듭 당부하는 바입니다.
2.2. 본인이 명백히 하지 않으면 안될 사안 한 가지가 있읍니다
그것은 본인이 수사과정에서 본인이 소유한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헌납한다는 내용의 문서에 서명 날인할 것을 강요당하며 포기서와 헌납서를 쓴 바 있으나 이는 모진 고문으로 강요된 것이고 따라서 본인 소유의 모든 재산은 마땅히 본인에게 되돌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1979년 10월 27일 새벽 보안사의 서빙고로 연행되자마자 수사관들은 본인의 전신을 닥치는 대로 구타하고 심지어 EF 8 전화선을 손가락에 감고 전기고문까지 자행하였읍니다. 이러한 고문이 며칠간이나 계속되었는지 모릅니다. 여러 차례 졸도도 하여 심지어 어떤 수사관에게 이대로 죽으면 이 꼴로 고향에 가지 말고 서울에 묻어달라는 유언까지 한 일이 있었읍니다.
본래 간이 나쁜 본인은 지혈이 안돼 온 몸이 피하출혈로 시뻘겋게 되었었고 그 흔적이 현재까지 남아 있읍니다. 산송장이나 마찬가지였읍니다. 이러한 가운데 수사가 진행되어 진술서 등이 작성되면서 10월 28일인지 29일경인지 본인 소유의 재산은 물론 고향에 있는 선산과 위토(位土), 심지어 동생 명의로 된 아파트까지가 포함된 여러 통의 재산목록을 제시하며 포기서, 나중에는 포기(헌납)서를 쓸 것을 요구하므로 그대로 써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은 본인 재산을 국고에 환수당할 만큼 부정한 행위를 한 일이 전혀 없고 헌납을 강요당할 아무런 이유도 없읍니다. 본인이 이번에 처벌받는 것과 본인의 재산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읍니다. 따라서 본인의 재산은 마땅히 되돌려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중에서 묘답(墓畓), 선산 등과 세간내면서 동생에게 준 재산을 제(除)한 나머지 재산을 모두 처분하여 본 건으로 만일 처형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2.3. 10·26 혁명의 동기의 보충
본인이 결행한 10·26 혁명의 동기 가운데 간접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 한 가지는 박대통령이나 유신체제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박대통령의 가족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공개된 법정에서는 밝힐 수 없는 것이지만 꼭 밝혀둘 필요가 있으므로 이 자리에서 밝히고자 합니다.
2.3.1. 구국여성봉사단과 관련한 큰영애의 문제[3]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총재에 박근혜 양이었는 바,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따라서 국민, 특히 여성단체들의 원성이 되어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도 문제삼은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민정수석(民情首席) 박승규 비서관조차도 말도 못 꺼내고 중정부장인 본인에게 호소할 정도였읍니다.[4]
본인은 백광현 당시 안전국장을 시켜 상세한 조사를 시킨 뒤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나 박대통령은 근혜양의 말과 다른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직접 친국까지 시행하였고, 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면서도 근혜양을 그 단체에서 손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양을 총재로 하여,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 놓은 일이 있었읍니다. 중정본부에서 한 조사보고서는 현재까지 안전국(6국)에 보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2.3.2. 지만 군의 문제
육군사관학교는 전통적으로 Honor System이 확립되어 있읍니다. 그런데 육사에 입학한 지만 군은 2학년 때부터 서울시내에 외출하여 여의도 반도호텔 등지에서 육사생도로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오입을 하고 다녔읍니다. 그래서 본인이 박대통령에게 육사의 명예나 본인의 장래를 위하여 다른 학교에 전학시키거나 외국유학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간곡하게 건의한 일이 있었읍니다. 그러나 그러한 건의는 결코 받아들여지지 아니하였읍니다.
위와 같은 문제는 아이들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박대통령의 태도에서 본인은 그의 강한 이기심과 집권욕을 읽을 수 있었읍니다. 비록 자녀들의 문제이지만 이런 일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국민을 우매하게 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임은 물론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를 이런 기회에서나마 밝혀두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1980. 1. 28. 김재규
3. 관련 문서
[1]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근원이 되는 부분이다. 김재규가 이 점을 언급했다는 것은 김재규가 박근혜-최태민의 관계에 대한 잠재적 위험성을 확실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얘기이다.[2] 오늘날에는 쓰이지 않는 읍니다체가 많이 보여 어색할 수도 있다.[3]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근원이 되는 부분이다. 김재규가 이 점을 언급했다는 것은 김재규가 박근혜-최태민의 관계에 대한 잠재적 위험성을 확실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얘기이다.[4] 민정수석비서관(차관급) 역시 엄청난 실권을 가진 자리 중 하나이며(당장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본격 폭로되기 이전에 부각되었던 우병우의 행각이 어땠는지 돌이켜보자), 자기의 직언은 직속 상관인 비서실장(장관급)에게 보고해야 맞다. 아무리 중정부장이 의전상 부총리급이었다고 하지만 민정수석이 비서실장도 아닌 중정부장에게 직접 하소연 하였다는 것은 이미 이 사태가 대통령비서실 차원에서 해결 못할 상황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