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민(1968)
[clearfix]
1. 개요
대중적인 멜로디의 발라드를 부르면서도 허스키한 목소리와 목을 긁어서 지르는 스크래치 창법에 강한 샤우팅으로 자기만의 색깔이 강한 가수며 김민종과 창법이 거의 유사하다. 히든 싱어에서 이 두 사람의 모창을 한 강균성은 김민종의 창법은 포장도로, 김정민은 비포장도로라고 알기 쉽게 비교 분석을 했다.
아마추어로 시작해서 상업 가수로 성공한 케이스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원래 데뷔 전까지 가수의 꿈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사람이다.(물론 음악 쪽 활동은 했지만) 학창시절부터 기타를 좋아해서 대학 시절 록밴드에서 베이스 기타를 담당하던 연주가였고, 밴드에서도 보컬 쪽에 딱히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가수가 된 건 오히려 음악보다 그저 잘생긴 외모로 뽑힌 것으로, 일종의 길거리 캐스팅. 본인이 군대 가기 전까지 함께 활동해서 친했던 밴드 후배 김민우가 본인이 군대 간 뒤 상업 가수로 데뷔하여 인기를 얻었고, 1992년 군대를 제대한 직후에 친구에게 "그 김민우가 내 친한 대학 후배 겸 밴드 동생이었다"라고 자랑하면서 친구에게 "니가 산 김민우 음반에 김민우의 친필 사인을 받아주겠다"고 했고, 연락이 되어 그 친구와 함께 김민우를 사적으로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유명 가수와 음악 관계자들이 많이 다니던, 강남 신사동에 있는 유명 카페인 HQ카페라는 곳에서 김민우를 친구[5] 까지 셋이서 만났는데, 하필 그 때 유명 음악 감독인 오진우 감독이 그 카페에 방문했다가 김민우를 보고 인사했다가, 같이 있던 김정민을 보고 외모에 반해 캐스팅한 것.
김정민의 말로는 오진우 감독이 그냥 "어 민우야 안녕, 그 친구들은 누구야"라고 하면서 다가왔고 김민우가 "아 네, 친한 선배 형이에요"라고 대답했는데, 오진우가 바로 앞까지 와서 김정민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을 전혀 떼지 못하며 잠깐 말을 더듬다가, 바로 "자네 가수할래?", "나랑 같이 하자"고 중간 대화 과정도 없이 무작정 캐스팅을 했다고 한다. 김정민은 처음에 처음 본 사람이 자신을 보자마자 "어... 너... 어...자네..."라고 말을 더듬으며 뚫어지게 쳐다보길래, 놀라면서도 속으로 '이 아저씨 왜 이러지? 어디서 본 사람이었나? 시비 거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캐스팅을 요구하자 더 놀랐다고. 그 이후 계약이 되어 보컬 연습에 몰입하여 데뷔했다고 한다.
김정수라는 본명 대신에 김정민이라는 예명도 오진우가 지어주었고, 현재 김정민의 스타일인 짧은 숏컷이나 가죽, 데님 위주 패션도 데뷔 전 오진우가 정해준 콘셉트가었다고 한다. 물론 원래도 록을 할 때 가죽 옷은 즐겨 입긴 했었으나, 헤어는 달랐다고 한다. 원래는 군대 가기 전까지 록을 하면서 머리를 기르는 장발을 좋아했었고, 심지어 입대 전 군대 갈 때가 된 밴드 친구들끼리 '군대를 가면 머리를 짧게 깎아야 하는데 록 정신을 잃어버리는 거 아니냐, 어쩔 것이냐'로 토론까지 했었을 정도라고.[6] 하지만 오진우를 만났던 당시는 제대 직후라 머리가 짧았고, 그 모습에 오진우[7] 가 반했다고 한다. 주변 지인들에게 '정민이가 나랑 닮은 것 같다'며 진심으로 김정민을 좋아했다고 한다.
데뷔 이후 2년 간 아픔이 있었고, 결국 오진우 감독의 회사와 이별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TV는 사랑을 싣고에서 밝혀졌다. 경제적 문제였는데, 상세한 수익 분배 문제까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김정민의 앨범이 실패한 것도 아니었고 얼굴도 어느 정도 유명해져서 유명세도 탔지만 경제 사정이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원래 집이 가난한 편에 속했기에, 부친과 모친이 그가 어릴 적부터 육체노동[8] 을 해왔는데, 그가 데뷔 후 무려 2년이나 활동하고 나서도 여전히 부모가 계속 그런 일을 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점점 지쳐가던 그가 중간에 화가 나서 오진우에게 '형님, 저 차라리 막노동을 하겠습니다'라고까지 했었다고 한다. 그 정도이니 아마 80년대 90년대까지 한국대중가요계의 문제였던 불합리한 수익 배분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건 그런 호소에도 경제 사정이 나아지지 않자, 다른 음반 기획사들에서 김정민에게 러브콜이 왔고, 그 중 한 회사가 상당한 수준의 경제적 보장을 약속하는 계약을 담보로 자신의 회사로 옮기라고 설득을 했고, 김정민이 3번이나 거절하긴 했으나, 김정민은 결국 그 회사가 포기하지 않고 연락을 시도하다가, 최종적으로 대놓고 거액의 계약금을 현금으로 보여주기까지 하여 김정민의 마음을 움직였고, 결국 그 회사와 계약하며 오진우를 등지게 되었다고 한다.
오진우는 그 일로 큰 충격을 받아 우울증 증세까지 보였고, 마음의 상처를 모든 주변인들이 다 눈치챘을 정도로 심하게 괴로워 했다고 하는데, 아무리 캐스팅과 데뷔를 다 총괄 감독한 은인이라 해도 대중에 유명세를 탄 소속사 가수가, 경제 사정이 다른 가수들보다 더 힘들었던 걸 알고, 상식적으로 당대의 분배 구조가 불합리했다는 걸 자신도 알면서도 특별한 조치도 없이 본인이 데뷔시켜 준 은혜와 남자끼리의 의리만 믿고 심한 가난을 견디기만 바랐다면, 과연 그것이 김정민의 배신일 뿐이라 간주할 만한 일인지는 알 수 없다. 어찌되었건 두 사람은 방송을 통해서라도 만나 당사자끼리 화해했으니 다행인 일이긴 하다.
2. 가수 활동
2.1. 1~3집
- 1994년에 '그대 사랑 안에 머물러'라는 곡으로 데뷔했으며 가요톱텐에서는 10위까지 랭크되었다.
- 1집은 그냥 데뷔 수준에 지나지 않았지만, 1995년 9월 발매한 2집에서는 슬픈 언약식이 커다란 신드롬을 일으켰다. 이 때 그의 인기는 대단했는데 슬픈 언약식으로 가요톱텐 골든컵 수상과 더불어서 각종 가요 프로그램에서 연속으로 1위를 수상했으며 후속곡인 '마지막 약속' 역시 3월 중순에 여러 방송사에서 1위를 차지하는 엄청난 기염을 토했으니 가히 신드롬적인 인기. 특히 1996년 가요톱텐은 치열한 대접전으로 골든컵 수상곡이 2곡 밖에 없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김정민의 <슬픈 언약식>이었으니 대단한 인기라고 볼 수 있으며 특히 1996년 별들의 전쟁이 있던 시기에도 여러 번 1위를 차지하면서 큰 인기를 누렸다.[9][10]
- 1996년 10월에 낸 정규 3집의 타이틀곡 <애인> 역시 1996년 11~12월에 나와서 1위를 여러 번 할 정도로 대히트했으며 후속곡 무한지애 역시 가요톱텐에선 10위 권까지,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에서는 1위 후보에 여러 번 올랐고 삼속곡인 '굿바이 마이 프렌드'도 소소한 인기를 얻었으니 H.O.T. 같은 아이돌 시기 때 밀려서 주춤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11]
2.2. 4, 5집
- 199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많은 여대생 팬들을 이끌고 다니는 등 인기가 높았다. 그 뒤 1998년에 4집으로 컴백해서 <비>와 <아모르> 등으로 활동했으며 이전과 달리 큰 인기는 얻지 못했지만 그래도 가요 프로그램에서는 10위 권 안에 들면서 선전했다. H.O.T.와 젝스키스가 등장하고 본격적인 아이돌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도 이유 중의 하나나 아이돌에 기세가 밀렸어도 애초에 181cm의 장신에 짧은 올백머리로 굵고 강렬하게 발라드를 부르는 남성 가수의 영역은 아이돌과는 다르다. 가난과 청소하시는 어머니의 뒷바라지, 오랜 무명 생활이라는 비하인드 스토리에 외모까지 갖춘 김정민은 미혼 여교사들의 이상형 1위로 꼽히는 등 실제 지지층도 20대 초반에서 30대 중반의 여성이었고 노래방용 발라드로 어울리는 노래가 많았기에 남성들에게도 거부감은 커녕 많은 지지를 받았다. 4집 컴백 때는 트레이트 마크인 짧은 머리에서 긴 머리 스타일로 변신을 시도했는데 방송가에 센세이션을 일으킬 정도로 잘 어울렸다.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라는 옴니버스 앨범을 여러 동료 가수들(터보, 박상민, 박지윤, 포지션 등등)과 발매하며 라는 곡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 그 뒤 4년 간의 공백기 이후 2002년에 5집으로 컴백했다. 5집의 경우 타이틀곡 '정상에서'의 뮤직비디오는 김정민의 완숙미가 느껴지는 앨범이며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가 세션으로 참여할 정도로 퀄리티에도 상당한 심혈을 기울였으나, 타이틀곡 '정상에서'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신현준과 손태영의 촬영 중에 스캔들이 터졌고, 손태영의 애인이었던 주영훈과의 삼각관계로 이상하게 연결되면서 논란이 일파만파 커지게 되었다. 결국 이들을 주연으로 기획되어 촬영까지 마친 드라마타이즈 뮤직비디오 장면들이 대거 폐기되었고[12] , 이 영향으로 타이틀곡 '정상에서'는 대중들 사이에서 김정민의 노래라는 본연의 느낌보다 신현준과 손태영이 썸을 타게 된 매개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지며 음악의 높은 완성도가 빛을 바랬다. 그럼에도 김정민 개인에 대한 인기, 인지도는 여전했기 때문에 음악방송에서는 1위를 다투는 등 상위권까지 오르면서 선전했다.
- 그 뒤 후속곡인 '마지막 사랑'이 좋은 반응을 얻은 덕분에 일찌감치 활동곡으로 변경하여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게 된다. '마지막 사랑'은 김정민 특유의 보이스가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의 웅장하고 애절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멜로디와의 조화를 이룬 곡으로, 앨범이 발매된지 5년 후인 2007년에 다시 MBC 월화드라마 히트에서 1회:차수경(고현정)과 형사들이 선배 장용화 형사(최일화)를 특진시키기 위해 버팔로를 소탕하러 출동하는 장면, 6회:장용하 형사가 홍콩에서 인신매매 목적으로 삼합회 조직원들에게 억류된 (자신의 딸을 포함한) 10대 여성들을 구하기 위해 총격전을 벌이다 제압당하는 장면. 7회:삼합회 조직원들에게 인질로 잡혀 있다 막 풀려난 장용하 형사가 딸과 통화를 하는 장면, 곧이어 딸과 재회하며 서로 포옹하는 장면. 10회:김영두(김정민 본인)와 차수경이 통화하는 장면과 이어 김재윤 검사(하정우)가 정인희(윤지민)와 통화하는 장면 등에 흘러나오면서 비장, 감동, 아련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OST로 쓰였다.[13] '마지막 사랑'은 스카이라이프 애니원 TV 개국 이후 자투리 시간에 넣어주던 뮤직비디오의 음원으로 쓰이기도 했는데 그 뮤직비디오는 다름 아닌 열혈강호. 이는 2001년에 PC로 출시되었던 게임판의 주제곡을 김정민이 불렀던 인연이 있었기에 전혀 어색하지가 않았는데, 영상 자체방송국에서 게임 속 CG 영상과 마지막 사랑을 편집한 자체제작 뮤비였지만 오히려 게임 주제곡보다 더 잘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 또한 락 발라드 장르에서 벗어난 댄스곡인 '붐붐붐(2집)', '도날드 & 장군(5집)'이라는 곡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2.3. 그 이후
- 2003년에 6집 타이틀곡인 '원'이 10위 안에 들면서 선전했고 후속곡인 '내가 사는 이유'로 활동한 뒤 2005년에는 플라워의 고성진, 김우디와 함께 '리플레이'라는 일렉트로닉 밴드를 결성했으나 1집 이후로 활동은 없었다.
- 2009년에는 정규 7집 'BEAUTIFUL MY LIFE'을 내고 활동을 했으며, 6집의 Restart의 가사를 수정하여 게임 트리니티 온라인의 OST로 쓰여졌다.
- 2012년엔 소속사를 엠클라우드 엔터테인트먼트에서 잠시 양정승이 대표로 있는 "KIROY Y"로 바꾸면서 양정승과 함께 싱글 "Return:바라보다"를 냈다가 다시 2014년쯤 김슬기, 류덕환, 류승룡 등이 소속해 있는 필름있수다로 바꾸었다. 2016년 기준 최근에 알려진 소속사는 이현우가 대표로 있는 H.W 엔터프라이즈다.
- 2016년에는 싱글 '먼 훗날에'를 발표하며 '제 2막'이라는 타이틀로 단독 공연도 가졌다. 최근에는(2017년 10월) 대학로에서 5일 동안 소극장 콘서트를 열었는데, 젊은 시절보다 오히려 더 안정된 보이스를 보여주며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2.4. 앨범
2.4.1. 정규앨범
- 1집 그대 사랑안에 머물러 (1994. 06. 01)
- 2집 4Love (1995. 11. 01)
- 3집 Change (1996. 10. 01)
- 4집 Jump 98 (1998. 03. 01)
- 5집 The Greatest Love Song 2002 (2002. 02. 28)
- 6집 2003 Reborn of Tiger (2003. 01. 24)
- 7집 Beautiful My Life (2009. 09. 23)
3. 여담
- 가수로서의 활동이 하향세를 그리는 동안엔 주로 (배우로서) 연기를 했으며 각종 시트콤이나 영화에 조연으로 자주 나왔다. 대표작은 KBS 2TV 일일시트콤 '올드미스 다이어리', 영화 '언니가 간다' 등등. 대학로 연극에서 나오기도 했다. 연기 부문에서도 꽤 경력이 많다. 가장 최근 출연 작품은 가족끼리 왜 이래. 생각보다 준수한 연기 수준을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올드미스 다이어리에 출연하던 무렵 그는 리플레이 활동도 하고 있었는데 몇몇 나이 어린 10대 팬들이 그를 본래 연기자인 것으로 오해해서 가수로 데뷔한다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졌다.
- 위기탈출 넘버원에서는 16회(2005년 10월 29일 방송분)부터 37회(2006년 4월 15일 방송분)까지 고정 게스트로 출연했다. 다만 19회(2005년 11월 19일 방송분)에는 출연하지 않았다. 김현철과 함께 5명 / 오구동성 공공의 답 / 선택 지워야 산다 체제로 바뀐 이후에도 계속 출연한 고정 게스트였다. 지워야 산다 당시에 별명이 찬스맨이었다. 이유는 지워야 산다에서 맨날 찬스를 썼기 때문이다. 이는 20회(2005년 11월 26일 방송분)부터 32회(2006년 3월 11일 방송분)까지의 별명이었고 33회(2006년 3월 18일 방송분)부터는 찬스 제도가 사라졌다.
- 2006년에 결혼한 11살 연하의 일본인 아내 타니 루미코(谷ルミコ)는 하로프로젝트의 전 멤버이며 과거 일본 아이돌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14] 재일교포 3세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타니 루미코 본인이 일본 여권을 인증하면서 직접 재일교포가 아닌 일본인이라고 밝혔다. 다만 루미코의 아버지는 일본 국적으로 귀화한 재일교포[15] 였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한국계 혼혈 일본인인 것은 사실이다. 일본 아이돌 출신답게 미모가 출중하다.
- 2013~2014년 tvN의 일일 시트콤 감자별 2013QR3에서 '김도상' 역으로 출연했으며 2014~2015년에는 KBS 2TV의 주말 드라마 가족끼리 왜 이래 서중백 역으로 출연했다.
- 2015년 11월 14일 JTBC 히든 싱어에 출연했으며 오랜만에 가수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 방송에서 본인이 한 얘기에 따르면 혈압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노래를 부르면 안 된다고 했다. 잘못하면 쓰러진다고...
- 뭉쳐야 찬다의 어쩌다FC vs 서울 신정초FC의 시합에서 신정초FC에 소속된 김정민의 두 아들 김태양, 김도윤이 선수로 출전했다.
4.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2015년 11월 1일, 11월 8일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에서 자나 깨나 안전제일이라는 가명으로 참가했다. 1라운드 상대였던 월미도 바이킹과 함께 듀엣곡으로 강인원, 권인하, 김현식의 '비 오는 날의 수채화'를 불렀으며 2라운드 상대였던 자유로 여신상과 겨루면서 조정현의 '그 아픔까지 사랑한 거야'를 불렀다. 정체를 밝힌 뒤에는 판정단들이 그가 숨겨왔던 특유의 스크래치 창법을 보여달라고 요청하자 명불허전 특유의 창법을 완벽히 보이며 속을 뚫어줬으며 아이들에게 아빠가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왔다고 밝혔다. 참고로 정체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던 케이윌은 안전제일의 유력 후보로 그를 포함해서 김민종, 박상민을 꼽았다.
그 뒤에 2020년 6월 28일, 7월 5일 오징어는 못생겼다는 편견을 버려! 잘생긴 목소리 오징어라는 가명으로 다시 참가해서 내 무대는 심심풀이 땅콩이 아니야! 고소한 목소리 땅콩, 뜯을까 말까~ 변치 않는 영원한 두근거림! 뜯지 않은 택배, 충성! 가왕석에 말뚝박겠습니다! 말년병장을 이기면서 가왕과 겨루면서 맹활약을 펼쳤다. 정체를 밝힌 뒤에는 "중견 가수들이 꾸준히 활동을 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중이다. 오늘도 오랜만에 신곡을 발표했다."라면서 향후의 활동에 관심을 조금이라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밝혔다.[16]
5.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
[1] 음력 8월 23일. 생일을 음력으로 쇤다.[2] 1979년생으로 김정민보다 11살 연하의 일본인이다. 현재 남편과 함께 네이버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 또한 일본 가정요리 책을 출간한 적도 있다.[3] 자녀들은 대한민국과 일본의 복수국적이다. 한국은 선천적 복수국적을 허용하지만 일본은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 병역법상으로 만 18세가 되는 해의 3월 31일 이전까지 또는 군복무 후 2년 내로 하나의 국적을 선택해야 한다.[4] 장남과 차남은 유소년 축구선수이다. 2019년 뭉쳐야 찬다 - 전설들의 조기축구에서 서울신정초등학교의 축구 선수(골키퍼와 공격수)로 출연했다.[5] 김정민 말로는 그 친구도 친구들 사이에서는 잘생긴 걸로 유명했다고 한다. [6] 이는 동시대 로커들에게 굉장히 진지하고 나름 중요한 화두였다. 부활 보컬 출신 박완규는 김경호가 핑클 NOW를 리메이크했을 때 사석에서 어떻게 그게 로커가 할 짓이냐며 멱살을 잡았다고 할 정도... 2020년이라면 신선한 도전으로 받아들일 일이지만 하여튼 그땐 그랬다.[7] 그는 본인이 환갑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숏컷을 할 만큼 젊을 때부터 짧은 머리에 남자다워보이는 스타일을 좋아한다고 한다. 체격도 옛날 사람치고 큰 편이다.[8] 모친은 건물 청소를 하셨다고 했는데, 부친은 육체노동이라고만 했고 어떤 종류인지 밝히지 않았다.[9] 나머지 하나는 클론의 <꿍따리 샤바라>.[10] 참고로 '슬픈 언약식'의 원제는 '우리 사랑을 위해'였다.[11] 특히 1996년 12월 3주차 가요톱텐에서는 H.O.T.의 <캔디>를 꺾고 1위를 했다. H.O.T.의 가요톱텐 첫 1위는 1997년 1월로 넘어간다.[12] 해당 부분은 김정민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으로 교체되었다.[13] 드라마 연출을 맡은 유철용 PD가 직접 선곡했다.[14] 모무스&헤이케 미치요 '여동생' 오디션 1위 수상자였다. 당시에는 미요시 치나츠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으며, 마술사 오펜 Revenge 엔딩곡을 불렀다. 다만 인기는 그리 많지 않았어서, 싱글 3장을 발표하고 활동을 중지했다.[15] 2014년 11월 15일 MBC 프로그램 세바퀴 글로벌 엄마편에 출연하여 자신의 아버지가 재일교포라고 직접 언급하였다. 어머니는 재일교포가 아닌 일본인이다. 재일교포 출신 아버지는 한국 방송에 잠깐 출연했던 적도 있는데, 당시 한국인 제작진이나 김정민과는 오직 일본어로만 소통한 것으로 보아서 한국말은 전혀 못하시는 듯하다. 일본은 1985년 이전 출생자까지는 부계주의 국적법을 적용하여 아버지가 일본 국적인 경우에 한하여 자녀에게 일본 국적을 부여했다. 배우자 타니 루미코는 1979년생이기 때문에 재일교포 출신인 아버지도 일본으로 귀화하셨다.[16] 참고로 이 당시에 가왕의 우승에 의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가 3라운드에서 불렀던 말리꽃이 어떻게 2표를 받으면서 떨어지냐고 황당한 결과에 충격을 받았다.[17] with 홍경민[18] 개인 최고기록.[19] with 박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