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진

 

'''이덕진
Lee Duke-jean
'''
'''2017년도 사진'''
<colbgcolor=#424242> '''출생'''
1967년 10월 22일[1](57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가족'''
아버지(이규호)[2], 어머니(김영숙)
2남 2녀 중 장남
'''신체'''
182cm[3], 70kg, O형[A]
'''취미'''
음악감상, 게임, 바둑[A]
'''종교'''
개신교
'''학력'''
양정중학교 졸업
경성고등학교 졸업
총신대학교 기독교교육과 학사
'''데뷔'''
1992년 1집 《Sad Wings Of Destiny》
'''직업'''
가수, 작사가, 작곡가
'''링크'''
[4] [5] [6]
1. 소개
2. 학창 시절
3. 활동
3.1. 언더그라운드 메탈 밴드 시절
3.2. 1집 솔로 가수 데뷔 (1992)
3.3. 2집(1993) & 3집(1994)
3.4. 이덕진 프로젝트 밴드 '노 페이트(No Fate)' (2001)
3.5. 헤비메탈 밴드 '제라(ZERA)' (2012)
4. 이덕진 밴드
6. 수상 경력
6.1. 가요 프로그램 1위
6.2. 시상식
7. 출연 작품
8. 여담


1. 소개


이덕진은 대한민국의 가수이자 작사가, 작곡가며, 대표곡으로 〈'''내가 아는 한가지'''〉, 〈너의 눈에 눈물이〉, 〈기다릴 줄 아는 지혜〉, 〈Forever〉 등이 있다.

2. 학창 시절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1학년 때 홍역을 심하게 앓아 학교에 거의 가지 못했다. 2학년으로 진급한 후에는 열심히 공부해서 성적은 상위권이었지만 동급생들과 1년을 덜 지냈다는 생각에 내성적인 소년이었고, 틈만 나면 책을 보는 습관이 생겼다. 상급학년이 되어 체육시간에 의외로 운동을 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학교 축구부원으로 활동하다가 부모님이 성적이 떨어질 것을 염려하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중학생일 때 우연히 TV에서 '이치현과 벗님들'의 공연을 보고 '저렇게 아름다운 행위가 있을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때까지는 거의 담 쌓고 있었던 음악이란 것을 다시 인식하고 충격을 받았다. 다음날 기타 연습을 바로 시작했고, 중학교 시절 학급에서 유일한 기타맨이었다.
중학교 2학년 말에 키가 크고 뼈대가 좋아 보인다고 체육 선생님이 테니스를 권유해서 시작했다. 그러나 고교 선배들의 과도한 군기 잡기에 체육선생님을 찾아가 이런 분위기로는 운동을 할 수 없다고 말하곤 그날로 운동을 그만두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지나치게 내성적인 성격을 바꾸기 위해서 학교 중창단, 문예부, 한별단, 학교 그룹사운드 '야생마' 등 다양한 동아리에 가입했다. 선후배로 만난 많은 사람들과의 여러 대화를 통해서 적극적인 성격으로 바꾸려고 노력했다.

3. 활동



3.1. 언더그라운드 메탈 밴드 시절


1985년 경성고등학교 재학 시절 그룹 ''''야생마''''[7]를 조직해 공연을 다녔고,[8] 1986년 ''''푸른하늘''''을 만들기도 했으며,[9][10] ''''사월'''', ''''사자후'''' 같은 메탈 그룹의 리드 보컬로 언더그라운드 무대에서 활동했다. 이들 그룹을 거치는 동안 이덕진은 1백여회의 콘서트를 가지며,[11] 가창력을 키워나갔다. 그는 매탈 밴드 시절 주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 로니 제임스 디오(Ronnie James Dio), 밴 헤일런(Van Halen) 등의 영향을 받았다

음악은 그때부터 더이상 나에게 취미나 오락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성한 내 직업이었다. 그룹원들과 같이 연습하고, 집에 와서 혼자 연습하고, 잠자고 밥 먹는 시간을 빼면 거의 24시간 음악과 함께 하는 생활이 시작됐다. 기타(Guitar)등의 외국잡지를 보며 발성에 대해서 계속 공부했다.

우리 가수의 목소리에 비해서 외국 메탈 가수들의 목소리는 음량과 음폭에서 훨씬 큰 것 같았고 그렇다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를 따져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목소리를 내기 위하여 온몸 마디마디를 공명시키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목에서 피가 나도록 목발성 연습을 했다. 온몸을 공명시키려고 힘을 주다가 팔다리에 온통 알이 배겨 꼼짝하지 못하기도 했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목소리가 변해갔다. 거칠고, 힘있고, 그러면서도 리듬감 있게 나의 목소리를 만들려는 노력이 계속됐다.

나는 서서히 메탈음악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메탈음악에는 내가 가진 응어리를 풀어낼 수 있는 공간들이 있었다. 금속성의 기타소리와 거친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공간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나의 상처와 절망들을 풀어내렸다.

메탈그룹 활동은 힘겨운 것이었다. 아무도 우리를 주목하지 않았다. 라면을 먹으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음악이 즐거웠다. 연습과 조그만 공연들이 계속됐다.

이덕진 스토리(일간스포츠, 1992)


3.2. 1집 솔로 가수 데뷔 (1992)


이덕진은 아역 탤런트로 TV 어린이 드라마에 출연한 경험이 있고, 1986년 CF 모델 경력이 있다.[12]
1987년 입대해[13] 1990년 제대한 이덕진은 밴드를 꾸리려 했으나 멤버를 모으는게 여의치 않았고,[14] 그를 아끼는 지인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4곡의 자작곡이 담긴 데모 테이프를 들고 음반사를 물색했다. 여러 음반사를 찾아 다니던 중 한 음반사와 계약을 맺고, 1집에 들어갈 노래를 찾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음악적으로 존경하고 있었던 들국화 멤버 최성원을 찾아갔다. 최성원은 먼저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보라 권했고, 이덕진의 노래를 들은 최성원은 목소리가 괜찮다며 곡을 써주겠다고 응낙했다. 얼마 후 3곡을 가지고 왔으며, 그 중 2곡이 1집 수록곡인 〈내가 아는 한 가지〉, 〈혹시 또 모르잖니〉였다.
1992년[B] 1집 《Sad Wings Of Destiny》[15][16]을 발매하며 솔로 가수로 데뷔했다. 처음 선보였던 곡은 〈도시 속의 사랑[17]이었으나 〈내가 아는 한 가지〉[18]가 대중들에게 반응이 더욱 좋았다. 록발라드 〈내가 아는 한 가지〉는 여러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연말에는 《대한민국 영상음반대상[19] SKC 인기 가수상, 《서울가요대상》 올해의 가수상[20][21], MBC 《10대 가수 가요제》 신인상을 수상했다.
이덕진은 깊은 중저음과 고음의 샤우팅을 두루 소화하는 뛰어난 가창력으로 주목받았다. 또한 열광적인 그의 소녀 팬들 사이에선 만화영화 《들장미 소녀 캔디》의 남자 주인공과 비슷하다고 해서 '테리우스'라는 별명을 가진 미남가수로 유명했다.[22] 특히 당시 활동했던 신성우와 같이 미소년이라서 한 때 테리우스 논쟁이 팬들 사이에서 벌어진 적이 있었다.[23]
[image]
TV 방송과 여러 라이브 공연에도 자주 올랐던 이덕진은 그 해 7월부터 '솔로로 나설 때 지명도를 얻고 난 후에는 백밴드를 조직해서 그룹활동을 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백밴드 ''''웨이브(Wave)''''를 조직해 8월 초 KBS 《록 페스티벌》, 8월 21일에 열린 MBC FM 《록 페스티벌》 등에 참여했고, 솔로로 활동하면서, 필요한 경우에는 다시 그룹으로 활동했다.
이덕진은 최성원의 진두지휘 아래 발탁된 '기획성 가수'라는 평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노래실력만큼은 충분히 훌륭했다.[24] 언더그라운드 헤비메탈 그룹 활동을 하면서 몸에 밴 실력이 라이브 공연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이 노래는 생각보다 더 높은 키를 가지고 있다. 후렴부 '그래서 나는 맞이하게 된 거야'에서 '야' 부분은 2옥타브 시까지 올라간다. 이후에도 악보는 여러 차례 2옥타브 시를 찍고 내려온다. 일반 남성들이 가진 노래방 한계음은 통상 2옥타브 솔, 노래 좀 한다는 사람들은 2옥타브 라 정도다. 타고난 미성을 가진 사람들은 그보다 더 높은 키에서도 노래를 자유자재로 부르지만, 평균적으로 일반 남성들에게 2옥타브 시는 쉽게 내기 힘든 음이다. 하지만 이덕진은 능수능란한 발성으로 자유롭게 높은 음을 오간다.

홍장원, 〈90년대 초 '테리우스 논쟁'의 중심, 가수 이덕진〉, 《매경프리미엄》, 2019. 9. 21.

"고교시절부터 헤비메탈 그룹에서 음악을 한 것은 음악인들끼리는 매우 즐거운 것이었으나 보다 대중적인 호소력을 갖지 못했던 것이 아쉬웠어요. 그렇지만 그 당시 배운 것들이 음악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음악 선배들이 매우 큰 도움을 줘 좋은 작품을 만나게 된 것이 행운이랄 수 있지만 그보다 꾸준히 음악에 정성을 들인다면 언더그라운드라도 결국 빛을 보게된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채규진, 〈인터뷰 『내가 아는 한가지』 록 음악 정통파 이덕진〉, 《중앙일보》, 1992. 9. 25.


이덕진 - 내가 아는 한가지 (KBS 2TV 토요대행진 / 1992. 9. 5.)
스틸하트의 〈She's gone〉(영상)과 〈Sheila〉, 헬로윈의 〈A Tale That Wasn't Right〉[25]를 국내 가수로서는 처음으로 지상파에서 불렀다.[26] 당시 노래를 처음 접한 대중들의 반응은 엄청났다.[C]

이덕진과 웨이브 - Sheila (원곡: 스틸하트) (KBS 2TV 토요대행진 / 1992. 9. 26.)
1993년 3월 〈너의 눈에 눈물이〉가 KBS 2TV 《가요톱10》 20위권 안에 진입하며 괜찮은 반응을 얻었다. (영상)

이덕진 - 너의 눈에 눈물이 (MBC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 1993. 1. 9.)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들과 친한 친구가 이덕진의 학창시절에 대해 인터뷰를 했다.

3.3. 2집(1993) & 3집(1994)


소속사와 음악적 노선에서 마찰을 빚은 끝에 1993년 8월 메탈 음악 위주의 2집 《Part 1 - Live The Stage》를 발표했다. 밴드 ''''1004''''[27]를 결성해 타이틀곡인 〈굿바이 엑스트라〉와 〈아픈 기억속에서〉로 라이브 무대 위주의 활동을 펼쳤으나, 소속사와의 갈등으로 많은 활동을 하지 못했으며, 2집은 1집에 비해 별 반응을 얻지 못했다.[28]

이덕진 - 아픈 기억속에서 (KBS 2TV 젊음의 행진 / 1993. 12. 18.)
1994년에 11월에 발매한 3집 《Part 2》[29]는 2집에서 전혀 홍보를 하지 못했던 노래들과 신곡 등을 모았다. 최성원의 〈이별이란 없는거야〉 등 리메이크한 5곡과 록비트의 리듬이 강렬한 신곡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30] 3집은 중박 정도의 인기를 얻었다. 희망적 메시지와 깔끔한 록사운드가 인상적인 〈기다릴줄 아는 지혜〉는 1994년 연말부터 리어카의 인기곡으로 화제를 몰다가 1995년 초부터 각종 가요 인기 차트에 진입했다.[31]늦은 후회〉는 호소력 짙은 감성 팝발라드 곡이다.

이덕진 - 기다릴줄 아는 지혜 (KBS 2TV 가요톱10 / 1995. 2. 1.)
그러나 이덕진이 원하는 음악은 헤비메탈과 하드록이었는데, 발라드는 원치 않는 음악이었고, 적성에 맞지 않은 방송 활동[32]까지 겹치자 기획사와 갈등이 컸다.

"원치 않는 음악에 절 연예인으로 보는 시선도 부담스러웠죠. 당시 개그 프로그램에서 가수가 웃기는게 유행이었는데 기획사가 그걸 시키니 꼭두각시가 된 기분이었어요. PD에게 잔소리를 듣고 잠수를 타곤 했죠. 당시엔 고집도 세 음반제작자의 입장을 이해 못했어요. 하지만 제가 지금 기획사(듀크엔터프라이즈)를 운영해보니 좀 이해가 되더군요. 미성숙에서 온 과오였죠."

〈이덕진 "록 위해 고난의 나날 돌아와"〉, 《국제신문》, 2011. 7. 25.

1995년 이덕진은 메탈 그룹 ''''사자후''''[33]를 재결성하고 왕성한 라이브 활동을 했으며, 록그룹 공연을 활성화하기 위해 《메탈 프로젝트(락클럽)[34] 콘서트》를 열었다.

이덕진 락클럽 콘서트 인터뷰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 / 1995. 6. 9.)
3집 이후 이덕진의 정신적 지주였던 아버지가 폐암으로 돌아가시면서[35] 육체적,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시간을 보내며, 가수 활동이 뜸해졌다. (2010년 인터뷰 영상)

3.4. 이덕진 프로젝트 밴드 '노 페이트(No Fate)' (2001)


2001년 이덕진 프로젝트 밴드 '노 페이트(No Fate)'를 결성해 정규 1집 《No Fate..》를 발매했다.[36] 7년만에 내놓은 컴백곡 〈Forever〉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만든 노래. 제목 역시 아버지의 사랑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지었다. 11곡 중 8곡이 자작곡이며, 바이올린 선율이 인상적인 〈Jullie〉, 뉴웨이브풍의 〈You Wana Get In?〉 등이 수록되었다.[37] 이덕진은 이 앨범에 프로듀서로 참여하며 심혈을 기울였으나 별 다른 인기를 얻지 못했다.[38] ('이즘' 앨범 리뷰 - No Fate)
수록곡들 중 〈슬픈 기억〉은 2003년 버즈의 〈잘 살아요〉, 2004년 한경일의 〈가렴〉으로 리메이크되었다.

이덕진 - Forever (2001)

"고난의 나날들이었죠. 2000년대 초반 뮤지컬도 했는데 이후 게임과 영화제작 사업에 손을 댔다가 사기를 맞는 등 어려운 시간을 보냈어요. 헤비메탈, 하드록을 하고 싶은데 이런 음악을 원하는 기획사가 없으니 제가 돈을 벌어 음악 활동을 하려고 사업에 손을 댄거죠. 사업은 외도가 아니라 제가 원하는 음악을 하기 위한 수단이었어요."

〈이덕진 "록 위해 고난의 나날 돌아와"〉, 《국제신문》, 2011. 7. 25.

음악을 포기할 생각도 했었는데, 인터넷 카페에서 활동하는 팬들이 쓴 편지를 읽으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고, '무대를 떠나면 안 되겠구나'하는 생각에 다시 음악 활동을 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2007년 인터뷰 영상)

3.5. 헤비메탈 밴드 '제라(ZERA)' (2012)


2011년부터 락밴드 '제라(ZERA)'[39]를 결성해서 홍대 등지에서 콘서트나 방송 활동을 하고 있다. 그가 결성한 밴드 제라는 '지저스 록 어게인(Jesus Rock Again)'의 준말로 어감을 강하게 하기 위해 'J'를 'Z'로 바꿨다. '주여, 록의 시대를 다시 열어주십시오' 또는 '맙소사, 록의 시대가 다시 왔구나'라는 뜻이 담겨 있다.[C]
2011년 7월 29일 《스틸하트 위드 제라 조인트 콘서트》란 타이틀로 합동 공연을 열었다. 제라가 1부, 스틸하트가 2부 무대를 꾸몄으며, 제라는 이덕진의 솔로곡들을 비롯해 밴드의 미공개 신곡 등을 불렀다. 이번 공연은 스틸하트와 친분이 있는 재미교포 가수 토미 키타(본명 윤진호)의 주선으로 이뤄졌으며, 토미 키타가 공연의 게스트로 참여했다.[40]
2012년 《Zera》란 타이틀로 이덕진이 작사·작곡한 〈Stop〉, 〈Forever〉 2곡을 실은 디지털 싱글을 발매했다. (가수 이덕진, 록 밴드 "제라"와 만나다)

ZERA(이덕진) - Stop (KBS 1TV 콘서트 7080 / 2012. 8. 14.)
이후 2015년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파일럿 방송에서 터프한 별밤지기라는 가명으로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내며 들국화의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를 불렀다. 이 날 판정단 중 김형석은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고 락커가 아니라고 했으며 김구라는 음반을 몇 년 째 못 내고 있는 가수로 김정민 같다는 추측을 했다. 나중에 정체를 드러낼 때 '오랜만에 출연해서 밴드에 도움이 되기 위해 나왔는데 마스크를 써서 호흡을 못 해서 떨어진 것 같다'면서 아쉬움을 드러냈으며 그 뒤 복면가왕 참여 이후 팬카페 회원이 늘어났다는 근황을 전했다.#

이덕진 & 케이윌 -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4. 이덕진 밴드


  • 1985년: 야생마
    • 이덕진(보컬), 이완철(기타), 김종태(드럼)
  • 1986년: 푸른하늘
    • 이덕진은 초창기 시절 보컬
  • 1987년: 사월
  • 1988년: 사자후
    • 이덕진(보컬), 정일천(기타), 최우석(베이스), 김기현(드럼)
    • 장르: LA 메탈
  • 1991년: 비트(BEAT)
    • 이덕진(보컬), 심동식(기타)
  • 1992년: 웨이브(WAVE)
    • 이덕진(보컬), 최원석(기타), 장영규(베이스), 이박(건반), 김만식(드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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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3년~1994년: 천사(1004)
    • 이덕진(보컬), 반상균(기타), 강상영(베이스), 박영태(키보드), 배종수(피아노), 박성민(드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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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년~1995년: 사자후
    • 이덕진(보컬), 윤민호(기타), 박재철(베이스), 윤길호(드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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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년: 노 페이트(No Fate)
    • 이덕진(보컬), 채경훈(기타), 윤종부(베이스), 이정학(드럼)
  • 2011년~: 제라(ZERA)
    • 2011년: 이덕진(보컬), 안회태(기타)[41], 이지웅(기타)[42], 서창원(베이스), 하성호(드럼)[43] (기사)
    • 2012년: 이덕진(보컬), 안회태(기타), 심동식(기타)[B], 김승주(베이스)[44], 하성호(드럼) (기사)
    • 2013년: 이덕진(보컬), 안회태(기타), 홍석훈(베이스)[45], 장인형(드럼)[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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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안회태(기타), 이덕진(보컬), 홍석훈(베이스), 장인형(드럼) (출처: 위클리오늘)

5. 음반 목록




6. 수상 경력



6.1. 가요 프로그램 1위


'''날짜'''
'''방송사'''
'''수상 내역'''
'''곡명'''
'''비고'''
1992년 10월 16일
MBC
여러분의 인기가요 1위
내가 아는 한가지

1992년 11월 25일
KBS 2TV
가요톱10 1위
영상
1992년 12월 2일
KBS 2TV
가요톱10 1위 (2주 연속)
영상
1992년 12월 9일
KBS 2TV
가요톱10 1위 (3주 연속)
영상

6.2. 시상식


'''날짜'''
'''시상식명'''
'''수상 내역'''
'''곡명'''
'''비고'''
1992년 12월
MBC 제7회 대한민국 영상음반대상
SKC 인기 가수상
내가 아는 한가지
공연 영상
1992년 12월 6일
SBS 제3회 서울가요대상
올해의 가수상[47]

1992년 12월 31일
MBC 10대가수 가요제
신인상[48]
수상 영상

7. 출연 작품


기록이 남아 있는 출연 작품들 위주로 작성했다.
  • 콘서트
'''날짜'''
'''제목'''
'''장소'''
'''비고'''
1992년 10월 25일
환경보호 특집공연 '내일은 늦으리'
서울 올림픽 펜싱경기장
기사
1993년 3월
Sad Wing Of Destiny Live
63빌딩 컨벤션 센터
커뮤니티 사이트
1993년
이덕진 인천송도호텔 콘서트
인천송도호텔

1993년
이덕진 대구 콘서트

팬카페 댓글
1993년 6월 5일~6월 6일
권인하·이덕진 조인트 콘서트
종로5가 연강홀 개관기념공연
기사1 기사2
1995년 6월 1일~6월 11일
'이덕진과 사자후' 메탈 프로젝트(락그룹) 콘서트
서울 태평로 마당 세실극장
기사
1995년 7월
이덕진 부산 콘서트

기사
2001년 12월 15일
이덕진 프로젝트 밴드 '노 페이트' 콘서트[49]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

2006년 3월
이덕진 라이브 콘서트
미사리 카페 로마
콘서트 사진 모음 영상
2011년 7월 29일
스틸하트 & 제라 조인트 콘서트[50]
예스24 라이브홀 (구 악스코리아)
기사
2013년 6월 9일
헤비메탈 투어 〈Age of Rock - Chaos〉[51]
서울 홍대 주니퍼 디딤홀
기사
2013년 8월 15일, 8월 18일
헤비메탈 투어 〈Age of Rock - The Beginning〉
서울 홍대 주니퍼 디딤홀
블로그
2013년 11월 2일
이덕진 [ZERA] AUTUMN CONCERT[52]
서울 홍대 주니퍼 디딤홀
기사
  • 뮤지컬
'''날짜'''
'''제목'''
'''배역'''
'''장소'''
'''비고'''
1996년 4월 15일~4월 16일
다시 피는 꽃
화랑 원술
대구시민회관 대강당
공연 정보
2002년 7월 28일~8월 7일
달과 푸른 장미
동화를 읽어주는 남자
서울 대학로 알과핵소극장
기사1 기사2
2003년 8월 23일~9월 4일
킹(King)
압살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기사 인터뷰 영상
  • TV
'''날짜'''
'''방송사'''
'''방송명'''
'''비고'''
1992년 6월 29일
KBS 2TV
한바탕 웃음으로
'총각파티' 코너 출연. (기사)
1992년 9월 15일
MBC TV
퀴즈여행 달려라 지구촌
기사
1992년 9월 16일
SBS TV
꾸러기카메라
영상
1992년 11월 25일
MBC TV
이야기 쇼! 만남
기사
1993년 1월 16일
MBC TV
특종! TV 연예
뮤직드라마 - 내가 아는 한가지(주연: 이덕진, 이영자) (영상)
1993년 1월 16일
KBS 2TV
전원집합! 토요 대행진
기습 탐방 스타출동! (기사)[53]
1994년 6월 30일
KBS 2TV
밤과 음악 사이
이덕진, 방은희 출연. (기사)[54]
1994년 9월 29일
KBS 2TV
밤과 음악 사이
기사[55]
1995년 3월 1일
MBC TV
33인 퀴즈쇼
기사
2001년
iTV
파워 핫3 빅10
출처
2001년 10월 30일
MBC TV
수요예술무대
기사
2006년 1월 22일
KBS 1TV
열린음악회
이덕진 밴드 - 내가 아는 한가지 & It's My Life
2006년 7월 1일
KBS 1TV
콘서트 7080
이덕진 밴드[56] - 내가 아는 한가지 & Love Ain`T Easy For Me & 여행을 떠나요 (원곡: 조용필) & 밤이면 밤마다 (원곡: 인순이)
2007년 12월 11일
KBS 2TV
KBS 아침뉴스타임
연예수첩 - 인터뷰 영상
2008년 2월 23일
KBS 1TV
콘서트 7080
이덕진 - 내가 아는 한가지 & 기다릴 줄 아는 지혜 & Runaway (원곡: 본 조비)
2010년 1월 16일
KBS 2TV
지금 뭐하세요?
인터뷰 영상
2012년 9월 2일
KBS 1TV
콘서트 7080
ZERA(이덕진) - 어둠 그 별빛 (원곡: 김현식) & Stop
2012년 12월 7일
OBS경인TV
콘서트 고백(Go Back)
조정현, 이범학, 이덕진 - 인터뷰 영상
ZERA(이덕진) - 내가 아는 한가지 & Stop
조정현, 이범학, 이덕진 - 비오는 날의 수채화 (원곡: 강인원, 권인하, 김현식)
2014년 10월 12일
KBS 1TV
콘서트 7080
ZERA(이덕진) - 내가 아는 한가지 & Stop & Smoke on the water (원곡: Deep Purple) & 기다릴 줄 아는 지혜
2015년 2월 18일
MBC TV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터프한 별밤지기(이덕진) & 오페라 스타(케이윌) -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원곡: 들국화)
2015년
SBS TV
불타는 청춘
3회(2015년 4월 10일): 이덕진 - 내가 아는 한가지 (Feat. 김도균)
4회(2015년 4월 17일): 이덕진 - 내가 아는 한가지 (Feat. 김도균, 김국진), 알까기 고수
5회(2015년 4월 24일)
6회(2015년 5월 1일)
7회(2015년 5월 8일): 이덕진이 작곡한 로고송, 엿 만들기 호흡
2015년
KBS 2TV
영상앨범 산
태백산 도립공원, 안석환-이덕진과 떠나는 여정. (기사)
2016년 1월 31일
2016년 2월 21일
2016년 3월 27일
KBS 2TV
출발드림팀 시즌 2
'전설의 가수 VS 전설의 개그맨 리턴즈' 특집.
  • 라디오
'''날짜'''
'''방송사'''
'''방송명'''
'''비고'''
1995년
MBC FM
FM은 내 친구
이덕진과 사자후 - Sheila (원곡: 스틸하트)
2013년 8월 16일
TBS FM
JK김동욱의 원더풀 투나잇
ZERA(이덕진, 안회태, 홍석훈, 장인형) 출연. (풀 녹음본)
내가 아는 한가지 & STOP & Forever (원곡: 스트라토바리우스)
2020년 9월 1일
BBS불교방송
김흥국의 백팔가요
녹음본
  • 영화
'''연도'''
'''제목'''
'''역할'''
'''비고'''
1994년
커피 카피 코피
카페 피아니스트(특별 출연)
기사
  • 광고
1992년 롯데제과 크런키 CF


8. 여담


  • 좋아하는 음악은 재즈이고, 추구하는 음악은 하드 록이다. #
> 가장 좋아하는 장르는 물론 록이지만 한가지 장르만을 고집하지 않겠다는 방침. "장르는 단지 표현의 방식 차이일 뿐, 음악은 한 가지"
>
>송원섭, 〈돌아온 '테리우스' 이덕진 90년대 초 '내가아는 한가지' 여성펜 '꽉'〉, 《스포츠조선》, 2001. 10. 30.
> * 이덕진: "저는 할아버지를 많이 닮았대요. 물론 아버지의 별명이 '알랭 들롱'이었고, 어머니께서도 얼굴이 고우시니까, 부모님 덕을 본 셈이죠. 그렇지만 가수인 제가 노래보다는 '외모'로만 인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어요. … 제가 존경하는 전인권 선배님처럼 정말 노력하고, 열심히 부르는 가수가 되는 것이 저의 희망사항이죠"
'항상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을만치 아버지(이규호, 54세. 시인, 언론인)로부터 들어 왔다는 이덕진의 음악인생은 출발부터 순탄치는 않았다. '공부를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반대가 컸기 때문.
"어머니(김영숙씨, 53세)의 후원이 없었더라면 저는 음악을 못했을 겁니다. 아버지 몰래 음악하는데 필요한 용돈을 주시고,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 주셨어요. 제가 어느 정도 가수로서의 싹수가 보이자 아버지께서도 이제는 적극 후원자가 되셨습니다. '시건방지지 말고, 거짓말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조건 하에서의 지원이죠"
> * 코디네이터: “이덕진씨는 허리가 가늘어 폼이 덜 나는 편이에요. 그래서 꼭 끼는 옷보다는 좀 여유 있는 의상들을 준비하죠. 메탈그룹에서 오랜 활동을 해온 탓인지 금속장식이나 액세서리를 좋아해[57] 자제시키는 편이죠. 발라드풍 노래엔 요란한 장식보다는 심플하면서도 디테일을 강조한 의상이 어울리거든요.”
> * 메이크업 아티스트: “이덕진씨의 경우 피부가 참 고와요. 그래서 굳이 외국 화장품이 아니더라도 화장이 잘 받죠. 조금만 손 봐줘도 금새 괜찮아지니 일하기가 수월합니다. 여자처럼 잘생긴 얼굴이다보니 조금은 남성미를 가미하는것이 메이컵의 주된 목표입니다. 한달에 두어번 정도의 '팩 마사지'를 해주고, 밤에는 '크린싱'을 권합니다. 그러나 이덕진씨가 별로 얼굴 가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평소 담배를 많이 피우는 편이라 입술이 자주 터서 로션을 촉촉하게 발라줍니다. 그리고 터프한 남성미를 살리기 위해 앞머리에 절대 빗질을 하지 않고요.”
  • 1992년 한 음악 방송에서 중세 유럽 귀족을 연상케 하는 주름 장식이 달린 상의와 타이츠 차림의 의상을 입고,[58] 소품용 칼을 든 채로 〈내가 아는 한가지〉를 부른 적이 있다.[59]
  • 2015년 4월 10일 SBS 《불타는 청춘》에 출연해서 김도균의 기타 반주에 맞춰 〈내가 아는 한 가지〉를 열창했으며#, 뛰어난 알까기 실력을 선보였다. #
  • 조정현(1964년생), 이범학(1966년생)과 경성고등학교 동문[60]이며, 2019년 12월에 골프 관련 채널 '골프앤 피플'에 함께 출연했다. [61]

[1] 1992년 이덕진이 직접 작성한 이덕진 스토리(일간스포츠)에서 "67년 10월 22일이 내가 태어난 날이고,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이 내가 세상의 공기를 처음으로 호흡한 곳이다."라고 밝혔다. 1992년 8월 15일자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1969년생으로 잘못 소개된 적도 있다.[2] 시인이자 언론인으로 한국문인협회 이사를 맡은 적이 있으며, 이덕진이 태어나기 전부터 삼중당 출판사에서 일했다. (출처: 박성수, 〈예술인 2世(세)들 가수로 데뷔〉, 《경향신문》, 1992. 3. 21.)[3] 포털 사이트의 프로필에는 183cm라고 나오는데, 이덕진 스토리(일간스포츠, 1992)에서 본인의 키가 182cm라고 밝혔다.[A] A B (출처: jeff, 〈2001 테리우스 이덕진 포에버~!〉, 이덕진 팬카페 《The Sazahoo》, 2007. 11. 9.)[4] 이덕진 페이스북.[5] 밴드 ZERA의 공식 팬카페 《metal ZERA》.[6] 이덕진 팬카페 《The Sazahoo》.[7] 야생마 6기 보컬이 이범학이었고, 7기 보컬이 이덕진이었다. 그때 두 사람은 선후배로 만났으며 지금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출처: 〈가수 이범학, 이덕진, 조정현의 경성고교 동문 스크린골프 - 2편〉, 《골프앤 피플》, 2020. 1. 11.)[8] '야생마' 보컬로 마포 지역 유명인사였으며,# 여학교 축제에 많은 초대를 받았다.#[9] (출처: 〈"「메탈 그룹」 시절 매력 간직" 「내가 아는 한가지」 상승세 이덕진〉, 《동아일보》, 1992. 8. 15.)[10] '푸른하늘'은 원래 메탈 밴드로 시작했다.# 다른 자료(그때, 우리, 이 음악)에서는 이덕진이 '푸른하늘'의 초대 보컬이었다고 나온다. 대중 지향적인 음악을 선호했던 유영석과 하드록에 주한 음악을 추구하던 이덕진과의 갈등 속에서 이덕진은 '푸른하늘'의 데뷔앨범 녹음 이전에 탈퇴했다. 1988년 '푸른하늘'은 유영석을 중심으로 한 4인조 그룹으로 데뷔했다.#[11] 동아일보 기사에는 '2백여회'라고 나오지만 '1백여회'라고 나오는 기사들이 더 많다.# (출처: 〈"「메탈 그룹」 시절 매력 간직" 「내가 아는 한가지」 상승세 이덕진〉, 《동아일보》, 1992. 8. 15.)[12] 중학 시절 비누 CF 모델을 한 적도 있으며, 이러한 경력 때문에 가수 활동 당시에 세련된 무대매너를 보인다는 평이 있었다. (출처: 박성수, 〈6인의 신인가수 정상도전 각축 가을무대 돌풍예고〉, 《경향신문》, 1992. 9. 16.)[13] 현역으로 사단 의장대에서 복무했다.[14] 1990년 당시 국내 대중 음악계에서 여러 그룹들은 불황을 맞고 있었고, 방송이나 음반사에서도 그룹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음반업계 넉달째 불황 늪 '허우적' 기사에서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다.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열풍에 이어 10월 이후 015B, 신해철N.EX.T 등이 상승 추세를 보이면서 그룹 음악의 전성기가 열렸다. (출처: 박성수, 〈그룹음악 전성기 연다〉, 《경향신문》, 1992. 11. 04.)[B] A B 이덕진이 데뷔하던 해에 결성했던 밴드 '이덕진과 비트'의 기타리스트 심동식이 후에 '제라(ZERA)'에서 리듬 기타를 맡게 된다. (출처: 멜론 - Zera)[15] 반도음반에서 LP, CD, 카세트 테이프로 발매한 이덕진의 솔로 1집. 이 음반의 LP는 재킷 디자인이 서로 다른 두 가지 버전이 있다. 초판 버전은 1992년 1월 12일에 나왔으며, 이후에 나온 재판 버전은 CD의 재킷 디자인과 동일하다. 그런데 예스24 LP샵에서는 LP 초판 버전의 발매일이 1991년 11월 4일로 나온다. (출처: ① 〈이덕진 1집 - Sad Wings Of Destiny〉, 매니아DB. / ② 정일서, 〈가요앨범 리뷰 - Sad wings of Destiny〉, 네이버 지식백과.)[16] 이덕진이 좋아하고 영향을 많이 받았던 주다스 프리스트가 1976년에 발매한 《Sad Wings Of Destiny》와 앨범 이름이 같다.[17] BBS 불교방송 《김흥국의 백팔가요》에 출연한 이덕진이 직접 밝히길, '〈내가 아는 한가지〉가 타이틀곡은 맞는데, 데뷔하는 시점이 봄이다 보니까 좀 빠른 곡으로 밀어보자고 해서 〈도시속의 사랑〉을 먼저 밀었다가, 가을 쯤에 〈내가 아는 한가지〉를 밀었다.'고 한다. (출처: BBS FM, 《김흥국의 백팔가요》, 2020. 9. 1.)[18] 박주연 작사, 최성원 작곡.[19] 2001년 '대한민국 영상음반대상'에서 '골든 디스크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위키백과 - 골든 디스크)[20] 스포츠서울이 주최하고 SBS TV에서 중계한 《서울가요대상》에서는 '신인가수상' 대신 신설한 '올해의 가수상'으로 〈난 알아요〉의 서태지와 아이들, 〈내가 아는 한가지〉의 이덕진이 공동수상했다. (출처: 〈콘서트 고백(Go Back)〉, 《OBS》, 2012. 12. 7.)[21] "그 해 최고의 가수 한팀에게 주어지는 대상과 달리 여러 팀을 선정하는 '''신인상'''의 성격상, 수상자만 보면 가요계의 변화를 짚어볼 수 있다. 1990년대 초반에는 남자 솔로가 강세를 보였다. 1회 신해철·김민우, 2회 신승훈·심신, '''3회 이덕진''', 5회 구본승, 6회 성진우 등이 이름을 올렸다." (출처: 이지석, 〈[서가대 D데이]역대 서울가요대상을 빛낸 수상팀 면면은?〉, 《스포츠서울》, 2017. 1. 19.)[22] 목소리에 남성적인 힘이 서려있는 점이 가장 큰 매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이덕진은 훤칠한 키와 빼어난 용모로 '탤런트나 CF모델 출신이 아니냐'는 말을 들을 정도의 또 다른 인기 요소도 가지고 있다. (출처: 채규진, 〈인터뷰 『내가 아는 한가지』 록 음악 정통파 이덕진〉, 《중앙일보》, 1992. 9. 25.)[23] 1992년 이덕진 스토리(일간스포츠)에서 "'''테리우스 보다는 음악성으로 사랑받고 싶다.''' 판을 낸지 보름이 지나면서 노래는 서서히 반응을 얻기 시작했다. … TV에 나오는 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테리우스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인기만화 <캔디>에 나오는 멋진 남자주인공의 이름이었다. 새삼 나는 '내가 그렇게 잘생겼나'하는 의문을 갖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순정만화의 주인공같이 생겼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지만 테리우스라는 멋진 별명은 처음이었다."라고 말했다. 2012년 12월 7일 OBS 《콘서트 고백(Go Back)》에서 이덕진은 신성우를 라이벌이 아닌 동료로 생각했으며, '테리우스'라는 별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왜 그런 별명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영상) [24] (출처: 홍장원, 〈90년대 초 '테리우스 논쟁'의 중심, 가수 이덕진〉, 《매경프리미엄》, 2019. 9. 21.)[25] 신성우와 함께 불렀다.[26] (출처: jeff, 〈이덕진과 스틸하트, 그리고 she's gone...〉, 이덕진 팬카페 《The Sazahoo》 , 2011. 7. 8.)[C] A B (출처: 김현우, 〈록 그룹 제라로 10년만에 복귀한 가수 이덕진/ "내겐 음악이 전부…더는 인생 허비 안 해"〉, 《한국일보》, 2011. 7. 25.)[27] 천사같은 마음으로 인간애가 느껴지는 정통 하드록 음악을 부르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1993년 멤버는 5인조 밴드로 이덕진(보컬), 강상영(베이스), 반상균(기타), 배종수(피아노), 박영태(키보드), 박성민(드럼)이었고, 1994년 1월에는 6인조 밴드로 바뀌었다. (출처: 〈인기솔로가수 그룹결성 붐〉, 《매일신문》, 1994. 1. 21.)[28] (출처: 박신연, 〈활동뜸한 男(남)가수들 "야심찬 기지개"〉, 《경향신문》, 1994. 3. 11. / 다음 블로그)[29] 지니뮤직을 제외한 대부분의 음원 사이트에서는 3집 앨범명이 《기다릴줄 아는 지혜》로 나오지만, 1994년 컴백 기사에는 "'파트 2' 앨범 내는 이덕진"이라고 나온다.[30] (출처: 〈"1년 공백기 노래 너무 그리워 신인 기분으로 새출발합니다"〉, 1994년 컴백 기사.)[31] (출처: 〈이덕진 '기다릴줄 아는 지혜' 가요 차트 '쾌속 질주'〉, 《일간스포츠》 , 1995. 2. 10.)[32] 1992년 SBS 《초특급 꾸러기 대행진》의 '꾸러기 카메라' 코너에 출연했는데(영상), 이 방송은 '「꾸러기카메라」에 의해 오줌싸개가 된 가수 이덕진' 이런 기사까지 나올 정도로 발상의 유치함과 사생활 침해로 비판을 받았다. 이덕진은 제작진에게 깜빡 속아서 제작진이 뿌려놓은 물이었다는 것은 까맣게 몰랐고, 본인이 실수를 한 줄 알고 상당히 당황했었다. (출처: 김진경, 〈몰래카메라 꾸러기카메라 사생활 침해 너무 심하다〉, 《동아일보》, 1992. 9. 20.)[33] 이덕진(보컬), 윤민호(기타), 박재철(베이스), 윤길호(드럼).[34] '''메탈 프로젝트'''란 1985년 시나위, 부활, 블랙홀, 사자후 등이 록음악의 부활을 위해 만들었던 공연모임이다. 그러나 이 그룹에서 활동하던 김종서, 이승철, 이덕진 등이 솔로로 전향하면서 그동안 활동이 뜸했었다. 이덕진은 그룹을 재결성하면서 라디오 공개방송을 주로 했으며,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해온 '핫도그', '뮤즈에로스' 등을 영입했다. (출처: 〈록음악 '부활의 노래' 이덕진 메탈그룹결성 콘서트〉, 《경향신문》, 1995. 6. 3.)[35] 집안에 안 좋은 일이 한꺼번에 몰려와 몸을 추스리기 힘들었다고 한다.#[36] 공백기 동안 미국과 일본에서 음반을 준비했으며, 특히 미국에서는 미스터 빅과 공동 음반 작업 제의가 들어와서 곡을 만들었는데, 양쪽 모두 각자의 앨범을 내야 할 시점과 맞닥뜨려져 성사되지 못했다. 그때 작업한 곡들이 '노 페이트'의 앨범에 수록되었다. (출처: 송원섭, 〈돌아온 '테리우스' 이덕진 90년대 초 '내가아는 한가지' 여성펜 '꽉'〉, 《스포츠조선》, 2001. 10. 30.)[37] (출처: 송원섭, 〈돌아온 '테리우스' 이덕진 90년대 초 '내가아는 한가지' 여성펜 '꽉'〉, 《스포츠조선》, 2001. 10. 30.)[38] 국내에서 헤비메탈 장르는 흥행하기가 어려운 편이다. ‘헤비니스 음악’이라고 불리는 메탈 장르의 음반들은 국내 판매율이 매우 낮다. 최대 판매량이 150장 정도라고 한다. (출처: 이윤지, 〈한국 헤비메탈의 지킴이〉, 《중대신문》, 2009. 04. 06.)[39] 2011년 멤버: 이덕진(보컬), 안회태(기타), 이지웅(기타), 서창원(베이스), 하성호(드럼).[40] (출처: 이은정, 〈이덕진, 밴드 '제라' 결성…스틸하트와 공연〉, 《연합뉴스》, 2011. 7. 18. / 장재선, 〈이덕진 록밴드 ‘제라’-세계적 록그룹 ‘스틸하트’ 합동공연〉, 《문화일보》, 2011. 7. 18.)[41] 안회태(1968년생)는 피어선대학(현 평택대학교)에서 클래식 기타를 전공했으며, 키는 188cm로 장신이다. 80년대 후반 바로크 메탈 그룹 '파트4'를 결성했고, 이어서 메탈밴드 '미스테리'의 멤버로 활동하며 메탈 마니아들 사이에서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2001년 독일 프로그레시브 메탈 밴드 ‘톡식 스마일(TOXIC SMILE)'의 기타리스트로 영입되어 독일 현지에서 3년간 활동했다. '톡식 스마일' 탈퇴 후 2000년대 초반 신해철 넥스트, 이후 '제라(ZERA)'에서 활동했으며, 2019년 '제라' 탈퇴 후 솔로로서 곡을 쓰는데 치중하고 있다. (출처: 멜론 - Zera / 〈[조성진의 기타신공] 안회태…기타 테크닉의 ‘처음’이자 ‘끝’〉, 《스포츠한국》, 2019. 8. 27.)[42] 부활, 외인부대의 기타리스트 출신.[43] '뮤즈에로스'의 멤버였던 하성호는 1995년 《메탈 프로젝트 콘서트》에서 이덕진과 합동 공연을 한 인연이 있으며, 지금까지 친분을 쌓아 왔다. 여러 뮤지션들과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세션 드러머며, 하성호 드럼 아카데미 대표다. (멜론 - Zera)[44] 이브의 베이스 멤버 출신.[45] 2000년 4인조 록그룹 'La C'의 데뷔 음반을 발표했으며, 홍대 부근 클럽에서 주로 공연했다. (출처: 강동균, 〈"인디음악명맥 우리가 잇는다" 4인조록그룹 'La C' 데뷔음반 발표〉, 《한국일보》, 2000. 9. 1.)[46] 제라 활동 이후 2014년 정규 2집을 발표한 인디밴드 '옆집 아저씨'의 새 멤버 드럼 장선수(본명: 장인형)로 활동했다. (출처: 〈유쾌한 복고풍 그룹사운드 '옆집 아저씨' 부활〉, 《인빅터스 뮤직》, 2014. 2. 13.)[47] 공동 수상: 이덕진, 서태지와 아이들[48] 공동 수상: 현진영, 이덕진, 한서경, 이현우, 서태지와 아이들[49] 앨범 발매 기념 라이브 콘서트.[50] 게스트: 토미 키타, 여성 6인조 신인그룹 '비비드'[51] 제라, 뮤즈메로스, 외인부대의 연합 무대.[52] ZERA: 이덕진(보컬), 안회태(기타), 수려란(베이스), 이박(신디사이저), 장인형(드럼)[53] 이덕진은 자신의 열렬한 팬인 한 여중생의 집을 기습 탐방했다.[54] 방은희의 옛 친구 이덕진과 재회시간도 마련되는데 이덕진의 새로운 계획과 라이브 실력을 공개한다.[55] 가수 이덕진이 2년 동안의 공백을 깨고 새 앨범을 내면서 컴백한다. 확실한 자기 음악의 색깔을 갖고 있는 이덕진이 음악을 시작하고 가수가 되기까지 힘이 되어준 어머니의 이야기와 더욱 성숙해진 그의 목소리도 함께 들어본다.[56] 이덕진(보컬), 이덕형(기타), 정필영(베이스), 장인형(드럼).[57] 이덕진: "나는 머리를 길게 기르고, 군데군데 쇠붙이가 박힌 가죽옷들을 입고 다녔다. 손가락에도 커다란 금속반지를 끼고 다녀 마치 펑크족과 같은 모습이었다. 이런 내 모습을 보고 가족과 주변친구들은 좀 단정히 하고 다니라는 얘기를 많이 했다. 그러나 메탈음악을 할 때는 이상하게도 이런 차림들이 무대위에서 편했다. 아니 무대 밖에서도 이런 금속성의 옷차림이 메탈음악에 관한 내 의지를 확인시켜주는 것도 같았다." 이덕진 스토리(일간스포츠, 1992)[58] 중세 후기 남성 복식은 남성용 바지였던 브레(Braies)가 짧은 속옷으로 변형, 양말이었던 쇼오스(Chausses)가 바지로 변형되어, 남성용 상의인 푸르푸앵(Pourpoint)과 함께 입었다. (출처: 서양복식문화의 현대적 이해 - KINX)[59] 2020년 9월쯤 해당 유튜브 계정이 해지되어 을 더 이상 볼 수 없다.[60] 〈사랑을 잃어버린 나〉, 〈세월 가면〉 등으로 유명한 이광조(1952년생)도 경성고등학교 동문이다.[61] 스크린 골프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영상이었는데(유튜브 섬네일) 2020년 이후 채널이 개편되면서 영상은 모두 비공개로 전환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