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성범/선수 경력

 


1. 프로 이전
1.1. 어린 시절
1.2. 고교 시절
1.3. 대학 시절
1.3.1. 연고전
2. 프로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1. 프로 이전



1.1. 어린 시절


1989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다. 형인 나성용과는 두 살 터울[1]. 초등학교 3학년이 됐을 때 이 야구부에 들어갔으니 야구에 흥미를 가질 법 한데 본인은 로봇 같은 과학 쪽에 관심이 있었고 야구 쪽에는 흥미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달리기 대회에서 반 대표로 뛰었던 그의 빠른 발에 주목한 야구부 감독이 계속 설득하다가 건넨 만 원 때문에 야구부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이후에도 야구부 학생들이 맞는 것을 목격하고 하기 싫어했는데, 야구부를 적극적으로 권유했던 부모님 때문에 야구를 시작하게 되었다.[2]

1.2. 고교 시절


[image]
광주진흥고 시절에는 4번 타자로 활약했으며 투수 이전에 외야수로서도 자주 출장했다. 3학년이던 2007년 봉황대기에서 타율 5할을 기록하는 등 5개 전국대회 통산 타율 0.353의 강타자 겸 투수였다. 3학년 투수 성적은 12경기 2승 2패 30.2이닝 29K ERA 3.19.
2008년 드래프트에서 2차 4순위로 LG 트윈스에 지명되었으나 연세대학교에 진학하였다. LG가 싫어서 대학에 진학한 것이 아니라, 진학이 결정된 선수를 LG가 숫자 채우기 식으로 지명한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 당시 드래프트에서 LG 4순위부터는 모두 대학 진학이 결정된 선수를 지명한 것.[3][4]

1.3. 대학 시절


그 때 그 연대 킹카 시절
2010년 YBS 다큐 영상 연세대 재학 당시 대학 웹진 글 모음 2014년 연세대 스포츠 매거진 인터뷰
연세대에 입학해 투수로 활동하던 2008년부터 2011년까지, 나성범은 대학 야구리그 연세대 야구팀의 좌완 에이스로서 지옥에서라도 데리고 온다는 좌완 파이어볼러로서 이름을 날렸고[5]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계약 제의를 여러 차례 받기도 했다.[6] 대학리그 4년간의 방어율은 1.70 / 2.92 / 2.48 / 2011년에는 방어율이 3점대까지 올라가며 약간 부진했다.
후술할 연고전에서의 활약 덕분에 연세대에서는 2000년대 이후 한정으로 신지애 다음으로 유명한 스포츠 선수 동문으로 손꼽힌다.[7]

1.3.1. 연고전


[image][image]
연고전에서는 4년간 4경기 34 2/3이닝을 던져 2승 1패(1무)를 거두어 '''연세대의 노예'''로 이름을 날렸다.
1학년 때부터 연세대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2008 연고전에서부터 선발 등판, 3회초 대거 7득점한 타선의 지원에 힘입어 9이닝 완투 2자책점의 훌륭한 성적으로 9:2의 완승을 거둔다. 다음해 2009 연고전에서는 8회까지 3점만 내주는 호투를 펼쳤으나, 당시 고려대의 에이스였던 신정락(현 LG 트윈스 투수)도 호투하며 마지막까지 박빙으로 경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결국 당시 양승호 고려대 감독의 대타 작전으로 9회초 무사에 연속 3루타와 단타를 맞고 4:5로 역전당해 완투패를 기록했다.[8]
2010 연고전에서는 경기 초반 만루에서 싹쓸이 2루타를 맞고 3실점하여 연세대의 패색이 짙어졌으나, 타선이 간신히 동점까지 쥐어짜내면서 간신히 3:3으로 경기를 원점으로 되돌린다. 그리고 7회 이후에는 지친 나머지 제구력이 시망이라 사사구를 남발하기도 했으나, '''9회말 2사 만루에서 풀카운트 삼진으로 대타 김경도를 잡아내면서 4:4 무승부로 경기를 마무리'''했다.[9] 6회까지 0:3으로 지고 있던 연세대 학생들은 이 야구 만화에서나 볼 법한 장면에 환호했으며, 고대 학생들은 말도 안 되는 결과에 아연실색하며 자교의 물타선을 욕했다.
2011 연고전에서는 0:1로 지고 있던 2회 2사 1, 2루의 위기 상황에서 계투로 등판, 경기 종료까지 7 2/3이닝 동안 140구 이상 던지고도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며 3:1로 승리를 챙겨 고려대학교 학생들을 벙찌게 만들었다. 경기 말부터 잠실구장 3루 측(고려대 응원석)에서는 '''"또 쟤 나왔냐?" "저건 사기야."''' 소리가 터져 나왔다. 부상으로 인해 선발출전이 어려웠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투구 내용은 그다지 좋지 못해 빈번히 위기상황을 맞이했지만, 직구의 구위를 바탕으로 꾸역꾸역 이닝을 먹었다. 그래서 고대생들은 나성범이 아니라 '''자기 팀 빠따 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10]
흥미롭게도 이 날 경기에서 2회부터 9회까지 마운드를 지켰던 나성범을 상대했던 고려대학교 투수는 3명으로, 두산베어스 1차지명 윤명준, SK와이번스 1차지명 문승원, 그리고 SK와이번스 임치영이었다. 대학 최정상 선발진들이 계투로 나오는 중요한 경기에서 비자책으로 승리를 거둔 나성범은 타자전향설이 불거진 시점에서 '투수로서의 가치하락' 이라는 의혹을 깨끗이 씻어냈다.
여담으로 2011 연고전 방송제[11]에서 고려대 방송국에서는 성동일의 현대스위스 광고를 더빙하여 "나성범은 아직도 직구밖에 모른다~" 라는 디스를 시전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대학교를 디스하면 디스했지 특정선수를 디스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으며, 그 정도로 나성범이 연고전 야구경기에 미치는 영향이 컸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고려대학교 타자들이 나성범의 직구를 공략하기 위해 합숙훈련 과정에서 피칭머신의 속도를 160에 맞춰놓고 연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4년간 나성범의 역대 연고전 기록을 정리해 보면
2008 9이닝 2실점 2자책 '''완투승'''
2009 9이닝 5실점 4자책 '''완투패'''
2010 9이닝 4실점 3자책 '''완투무승부'''
2011 7 2/3이닝 무실점 무자책 승
총 4경기 34 2/3이닝 ERA 2.34 2승 1패
...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남겼다.
나성범의 연고전 활약은 연세대와 고려대의 당시 전력차를 생각하면 더욱 빛을 발한다. 연세대학교에 나성범이 재학중이던 2008 ~ 2011년에 연세대학교에서 배출한 인지도 있는 프로선수는 그의 친형인 삼성 라이온즈 나성용, KIA 타이거즈 고영창,유민상 정도에 불과하다. 반면 고려대학교 야구부는 당시 대학리그 최강으로 꼽혔으며, 나성범과 동기급인 선발 트로이카 임치영, 윤명준, 문승원과 나성범이 신입생이던 시절 30.1이닝 연속 무실점을 기록했던 대학리그 최고의 투수였던 신정락, 그리고 타선에는 김재율, 홍재호, 박세혁, 황정립, 김상호, 문상철 등 당시 대학리그를 대표하는 타자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12][13]

2. 프로 경력



2.1. NC 다이노스



2.1.1. 지명과 타자 전향


지명 당시 사진. 왼쪽이 나성범, 오른쪽은 박민우.
2012 신인드래프트에서 신생팀 NC 다이노스에 2라운드 전체 10순위로 입단을 하게 되었다.
대졸임을 감안해도 대어임이 분명했지만 1라운드 지명이 안 된 것은 드래프트 규정 때문으로, 야구 규약 108조 2항에 따르면 고등학교때 드래프트에서 지명을 받았음에도 대학 진학을 한 경우 1라운드에서는 지명이 불가능하다. 문제는 나성범이 고교를 졸업할 당시에는 1차지명이 있었던 때라 규정이 '1차지명 불가'였는데 전면 드래프트로 바뀐 후 문구만 수정해 그대로 이어져 왔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규약을 확실히 개정할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크게 이슈화되지는 못했고 KBO도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14] 어쨌거나 NC 입장에서는 넝쿨째 굴러온 호박인 셈.
사실 이 규정 때문에 원래 '''나성범은 2010 우승팀에 주는 포상이다'''라는 얘기가 야구 팬들 사이에 있었고, 덕분에 2010 시즌 우승팀인 SK 와이번스 팬들이 상당히 설렜지만 NC가 창단되면서 2라운드 우선 지명권이 NC에게 돌아가게 됨에 따라 망했어요.
지명은 분명히 투수로 받았지만 2011년 가을캠프에서 타자 전향을 선언했다. 김경문 감독의 권유로 전향했다고 하며[15][16] 김경문 감독도 타자로서의 재능에 중점을 두고 지명했다고 밝혔다. 물론 타자로서의 재능을 더 높게 본 것도 있겠지만 '''부상 때문에'''[17] 전성기 시절의 공을 못 던지게 된 탓도 있을 것이다.[18] 김경문 감독이 말하는 나성범 타자 전향 배경
하지만 나성범은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외야수로도 자주 뛰었다. 대학리그에서도 역시 타자로 자주 출전해 스카우트들에게 이미 컨택 능력과 장타력을 입증했기 때문에 타자 전향에 큰 무리는 없었다. NC는 나성범을 신생팀의 창단 프랜차이즈이자 간판 타자로 키우기 위해 작정하고 전략적으로 지명했고, 이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기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1.2. 2012 시즌


2012년 퓨처스리그 개막 이후 전반기 동안 임팩트 있는 모습을 보였고, 훤칠한 외모에 재능까지 합쳐져 이미 NC 프랜차이즈 스타로서의 조짐을 보였다. 후반기 들어서는 상대팀 투수들의 집중적인 견제로 인해 약간 페이스가 쳐졌다.
이는 특히 몸에 맞는 볼이 무려 '''33개'''일 정도로 자주 나온 것이 컸다.[19][20] 1군 기준으로 봐도 박석민이 27개로 1위, 최정이 21개인데 비록 퓨처스리그 기록이라고 하지만 저 정도의 사구갯수는 굉장히 이례적으로 많은 편. 특히 장원준은 나성범이 홈런친 뒤 다음 타석에서 대놓고 빈볼을 던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21] 이 당시 일부 롯데팬들은 오히려 장원준의 행위를 옹호하는 추태를 벌이기도 했다.[22]
결국 시즌 초중반의 임팩트 있던 모습에 비해서는 다소 평범한 성적인 0.303, 홈런 16, 67타점, 29도루로 시즌을 마쳤다. 그래도 팀 내 유일한 퓨처스리그 3할 타자로 활약했고, NC가 밀어주는 간판 타자이자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할수 있다.

2.1.3. 2013 시즌



[image]
타자 전향 2년, 1군 진입 1년차 만에 프로에서 의미있는 성적을 내며 미래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시즌 최종 성적은 104경기 404타수 98안타 14홈런 64타점 타출장 .243/.319/.416. 비록 팀 동료 이재학에게 신인왕을 내주긴 했으나 리그에서 주목 받은 루키로서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한 성공적인 시즌이 되었다.

2.1.4. 2014 시즌



기대에 비해 조금은 아쉬웠던 지난 시즌을 뒤로하고 완벽히 자신의 가능성을 터뜨리며 1군 2년차 만에 3할 30홈런 100타점을 기록했다.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에 승선하여 금메달까지 따내면서 병역 문제까지 해결. 시즌 최종 기록은 123경기 477타수 157안타 30홈런 101타점 타출장 .329/.400/.597. 시즌 후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는 데뷔 첫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했다.

2.1.5. 2015 시즌



[image]
이 시즌부터는 강점인 어깨를 살리고 공격력 극대화를 위해 포지션을 우익수로 변경했다. 비율 스탯 자체는 지난 시즌보다 하락했으나 144경기 전 경기 출전과 함께 28개의 홈런과 23개의 도루를 성공시키며 20-20 클럽에 가입했다. 최종 성적은 144경기 564타수 184안타 28홈런 23도루 135타점 타출장 .326/.373/.553. 2년 연속 골든글러브 수상까지 얻어냈다.
한편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는 6:4로 뒤지고 있던 9회초 2사 상황에서 '''투수로 등판해''' 이닝을 끝낸 이후 9회말 2사에서는 타자로 나와 뜬공으로 물러나며 2015년 NC 다이노스의 마지막 투수이자 마지막 타자가 되었다.

2.1.6. 2016 시즌



[image]
2년 연속 전 경기 출전과 함께 KBO 리그 역대 7번째 3년 연속 100타점을 달성했다. 팀은 나테이박 클린업 콰르텟을 구축하며 팀과 본인 모두 역대급 성과를 거둘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후반기에는 김태군이 부럽지 않은 처참한 타격성적을 기록하며 타고투저의 리그 상황에도 3할 턱걸이 타율, OPS 0.885로 시즌을 마무리하고 말았다.

2.1.7. 2017 시즌



[image]
수비 도중 당한 손목 부상으로 인해 예년보다 20경기 정도를 결장했지만 비율 스탯에서만큼은 커리어하이를 기록했다. 특히 2014 시즌 OPS 0.998을 기록한 이후 계속해서 떨어지기만 하던 OPS였으나 드디어 1.000을 찍는데 성공했다.[23]
이와 함께 포스트시즌에서도 드디어 제대로 된 활약을 보여주었는데, 2014~2016년 포스트시즌 통산 기록이 18경기 타율 .224에 1홈런 3타점에 불과했던 것에 비해 이번 시즌에는 10경기에 나서 4할의 타율에 4홈런 11타점을 기록했다. 2017년 이전의 포스트시즌 WAR은 투수로 0.1이닝 던졌을 때보다 낮았다는 점에서 얼마나 포스트시즌에서 부진했는가를 알 수 있는 부분.

2.1.8. 2018 시즌



[image]
[image]
주전 선수들의 잦은 이탈과 외국인 선수들의 부진으로 인해 팀은 창단 이후 최초로 꼴찌를 기록했으나 전 경기 출전 및 수비 최다 이닝을 기록하며 꿋꿋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누적과 비율 스탯 모두 만족스러운 성적은 아니었고, 지난 시즌에 비해 무려 0.1이나 떨어진 .899의 OPS를 기록하는데 그쳤다. 홈런 역시 23개에 머물렀고 91타점을 기록하며 2년 연속 100타점에도 실패.

2.1.9. 2019 시즌



5월 초까지 23경기 4홈런 14타점 타출장 .366/.433/.645 OPS 1.089라는 엄청난 호성적을 거두고 있었으나 5월 3일 KIA 타이거즈전에서 슬라이딩 도중 무릎이 꺾이는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통산 1,000안타를 달성한 직후 당한 부상이었기에 더욱 안타까운 상황. 결국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 및 연골판 파열'''이라는 진단을 받으며 커리어 최악의 부상이 되어버렸고, '''시즌 아웃'''은 물론이고 복귀 이후의 퍼포먼스까지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2.1.10. 2020 시즌


[image]

모든 이들의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부상복귀 첫 시즌, 6년 만에 '''30홈런-100타점'''을 기록하는 등 NC의 창단 멤버로서 창단 첫 정규시즌 우승과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어냈다.

2.1.10.1. 메이저리그 포스팅

한국시리즈가 끝난 뒤인 2020년 11월 30일, NC 다이노스는 KBO에 나성범에 대한 포스팅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
허나 미국 현지에서는 동시기 똑같이 포스팅을 신청한 김하성과는 정반대로 나성범의 메이저리그 성공 가능성을 굉장히 낮게 보고 있다. 팬그래프 닷컴에 의하면 나이가 많다는 점, 무릎 부상을 당하면서 플레이 스타일이 달라졌다는 점, 삼진이 많다는 점, 중견수가 아닌 코너 외야수라는 점 등을 들면서 연봉 100만 달러 미만의 단년계약을 제시받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물론 본인의 의지가 워낙 강하면 이런 정도의 계약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포부에 비하면 많이 아쉬운 조건이다. 이후에도 같이 포스팅 신청한 김하성과는 달리 부정적인 기사만 뜨는 상황.##

결국 마감 기한인 2021년 1월 10일 오전 7시까지 협상이 성사되지 않으며 최종적으로 메이저리그 포스팅이 불발되었다. 엠스플뉴스 기사이영미#s-3 기자가 에이전트인 스캇 보라스에 문의한 바에 따르면 5개 팀이 응찰을 했으나 계약 기간, 마이너리그 거부권, 몸값 등에 있어서 선수가 만족스럽지 못한 조건을 제시받았다고 한다.# 포스팅 신청 이전부터 터무니없는 조건에는 본인이 절대 가지 않겠다는 자세를 고수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미국행이 성사되지 못한 것.
결국 나성범은 KBO 리그 출신 외야수 사상 첫 포스팅을 통한 메이저리그 진출이라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24] 2021년 시즌도 NC 다이노스에서 뛰게 되었다. 나성범 측은 FA 때 다시 한번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겠다는 입장이다.

2.1.11. 2021 시즌




3. 국가대표 경력



3.1.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image]
호성적을 바탕으로 첫 국가대표에 선발되었다. 좋은 활약을 남겼는데, 특히 중국과의 준결승전에서는 2-2의 균형을 깨는 역전 1타점 적시타를 쳐낸 것에 이어 2루 도루 과정에서 상대 송구가 뒤로 빠져나간 틈을 타 열심히 달려서 홈까지 들어와 2-4의 스코어를 만들며 이 날의 수훈갑이 되었다. 대만과의 결승전에서도 3-3 동점이던 8회초 1사 만루에서 느린 2루수 땅볼로 역전타를 기록했다. 그리고 대표팀이 6-3으로 승리하면서 병역 특례 획득. 첫 국대 발탁이지만 부족함이 없는 활약을 펼쳤다.
아시안게임 최종 성적은 5경기 타율 .400 8안타 6타점 5득점 2도루. 중견수 수비에서도 나름대로 밥값했다.

3.2. 2015 WBSC 프리미어 12


세간의 예상대로 무난히 대표팀에 선발되었으나, 8경기 중 2경기에만 선발로 출전 하는데 그쳤고 나머지 경기에서는 주로 대타와 대주자로 출장했다. 한정된 기회 속에서도 좀처럼 활약을 펼치지 못하면서 총 12타석 11타수 1안타 0타점 1득점 0.091/0.167/0.091 OPS 0.258을 기록했다.
[1] 다만 나성용이 빠른 88년생이라 87년생들과 같이 학교를 입학했지만 도중에 부상으로 유급한 경력이 있어 최종적으로는 88년생들과 졸업했기 때문에, 사실상 한 살 터울이라 봐도 무방하다.[2] 2009년 정기전호 인터뷰. #[3] 다만 5순위 노진용은 진학을 번복하고 입단했다.[4] 이는 형 나성용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둘 다 LG의 지명을 받았지만 연세대에 입학했다. 여러 인터뷰를 조합해 보면, 나씨 형제의 부모님도 만일 프로 야구선수가 안 될 경우 대신 교사라는 직장을 노려볼 수 있기 때문에 대학에 갈 것을 원했고, 연세대 진학이 결정된 상황에서 LG의 픽순위가 높지도 않았기 때문에 대학교 진학을 결정한 듯하다.[5] 대학교 1학년 동계훈련 때 볼 스피드가 갑자기 10km/h가 올랐다고 한다. 고3시절 좌완투수임에도 2차 4라운더라는 비교적 낮은 지명을 받은 이유가 느린 구속에 있었던 것인데 이를 해결한 것.인터뷰[6] 그런데 손을 뻗은 에이전트가 다름 아닌 마이너스의 손 재미교포 더글라스 조(한국명 조동윤) 였다. 구대성이 2005년 뉴욕 메츠에 있었을 때의 에이전트로, 당시 구대성의 연봉 일부를 본인이 착취했다는 소문과 과거 안산 돔구장 사업에서 미국인 투자자와의 계약불이행 사건 등 에이전시 계에서 평이 나쁘기로 유명하다. 더글라스 조에 관한 더 자세한 것은 기사 참조. 결과적으로 천만 다행이다.[7] 90년대까지 올라가면 더 윗학번 선배들은 워낙 쟁쟁하기 때문에 그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8] 2009 연고전은 나성범에게 있어 다른 의미로 안타까운 기억이기도 하다. 이 날 경기에서 나성범은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다 어깨를 크게 다쳤는데, 해당 경기는 물론 투수 생활을 마치는 날까지 이전의 구위를 회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성범은 4학년 시절에도 147~8km/h 의 공을 뿌리며 야구 월드컵 대표로 선발되었지만 150km/h를 넘나드는 대포알 직구는 그 날 이후로 볼 수 없게 되었다. 이 결과에는 나성범뿐만 아니라 연세대 코치진들의 책임도 있는데, 경기 중에 부상을 당한 나성범을 무리하게 완투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이 경기에서 나성범의 투구수는 150구를 넘어갔으며 부상을 당한 몸으로 그 정도의 전력투구를 시키는 것은 자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9] 연고전 역시 대학리그 경기에 포함되기 때문에 연장은 하지 않는다.[10] 후술되어 있지만 당시 고려대 타선은 교내 역사상 최고라고 불릴 정도로 최고였다. 나성범과 동기인 08학번 선수들 중 6명이 드래프트에서 지명받았고, 신고선수까지 합치면 한 학교 한 학번에서 8명 이상이 프로에 갔으니 말 다한 셈. 선수 명단을 보면 대졸들임에도 대부분이 프로지명 후 주전 혹은 준주전급으로 활동한 선수들일 정도로 누구에게 욕먹을 타선은 절대 아니었고, 고대생들이 이를 모를리가 없을텐데도 욕했다는 건 그만큼 좌완투수 나성범이 위협적이었다는 이야기.[11] 5회말 종료 후 진행[12] 문승원과 윤명준은 1라운드 지명, 신정락은 2년 전 드래프트 되긴 했지만 '''전체 1순위 지명'''[13] 그래서 당시 김한중 총장은 나성범을 끌어안고 응원단상위로 올라가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여러분 우리 나성범 선수가 138구를 뿌리며 우리에게 승리를 으흐흑" 이라며 감격했다고..[14] 해당 부분은 1차지명 부활과 함께 복구되어 110조 2항으로 이전.[15] 면담 당시 자신이 투수를 해야 하는 이유를 A4 3장에 적어갔으나 한마디도 못하고 설득당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본인이 직접 인터뷰에서 사실이 아님을 밝혔다.[16] 이는 2018년 컴프야포인트 라이브에서도 언급했다. 형 나성용과 형제 배터리를 해 보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에, 신인지명 이후 김경문 감독의 "나성범 타자 전향 시킬거다"라는 인터뷰 기사를 접했을 때만 해도 전혀 타자전향에는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팀 합류 후에 김경문 감독의 확신에 찬 격려를 통해 자신감을 많이 얻었고, 김경문 감독의 그 말만 믿고 훈련에만 집중했다고 한다. 김경문 감독을 처음 만났을 때는 포스 때문에 눈도 못 쳐다보고 고개 숙인채로 듣기만 했다고.[17] 2013년 인터뷰에 따르면 대학교 2학년 때 경기 도중 왼팔 연골이 끊어졌고 이후 공 끝이 떨어졌다고 한다.[18] 상기한 대학리그에서의 스탯도 학년이 올라갈수록 ERA가 점점 상승하고 있었다.[19] 2위 기록이 14개일 정도로 압도적인 1위다.[20] 시즌 후 KBSN스포츠에서 진행한 야생야사 토크쇼에 출연한 나성범은 올 시즌 유독 사구가 많았다며, 자신에게 타박상을 수여하고 싶다는 우스갯소리를 해서 팬들의 분노와 한숨을 선사하기도 했다.[21] 세리머니가 과해서 1군에서는 그러면 안 된다는걸 가르쳐 주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과연 이 정도의 세리머니가 '''1군에서 이러면 안되는 정도인지'''는 영상을 보고 판단하기 바람.[22] 그리고 2017년 플레이오프에서 나성범은 두산으로 이적한 장원준에게 잠실구장 백스크린을 때리는 투런 홈런을 때려낸다.[23] 나성범의 2017 시즌 출루율은 0.4153297...로 반올림하면 0.415가 되며, 장타율은 0.5843373...으로 반올림하면 0.584가 된다. 여기서 반올림 된 기록을 그대로 합치면 0.999가 되지만, 실제 기록을 합치면 0.9996671...이 되므로 합계를 낸 이후 반올림을 하면 1.000이 된다. KBO 기록실에서는 전자, 스탯티즈에서는 후자로 표기하고 있다.[24] 나성범 이전에 손아섭김재환도 포스팅에 도전했지만 실패했고 20년 전인 2001년 말 양준혁뉴욕 메츠로부터 1년 최대 70만 달러의 영입 제안을 받았지만 영입이 불발된 바 있다. 추신수도 한국인 출신 메이저리그 외야수지만 KBO 리그를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김현수는 KBO 리그 출신 외야수이지만 포스팅 시스템으로 메이저리그를 간 게 아니라 FA로 갔다.